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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협조적” 노사관계
김 삼 수
(서울산업대 산업경영학과 교수)
1. 문제 관심과 과제
1970년대의 두차례에 걸친 석유위기 시 일본 경제는 신속한 구조조정에 성공했다. 석유위기 후의 구조조정과 경제적 실적에 관한 국제비교를 행한 OECD(19887)의 보고서에 의하면 일본의 양호한 경제적 실적은 특히 노사관계에 있어서의 구조조정, 그 경제적 지표로서의 효율적인 임금조정에 힘입은 바가 컸다.(OECD(1987), pp.25-33,加藤(1991)) 1)
석유위기 후의 일본 경제의 괄목할 만한 성과를 배경으로 고양된 일본의 노동시장이나 노사관계에 관한 연구를 보면 노사관계, 특히 생산방식이나 숙련형성에 대한 평가는 아직 합의된 결론에 이르고 있지 못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정반대의 견해마저 존재하고 있다.2) 그러나 적어도 일본의 노동시장에서의 임금조정이나 노동력 이용이 신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노사관계가 매우 안정적이었다는 점에는 대체로 이론이 없다.
<도표 1>은 임금, 노동생산성, 임금비용의 국제비교이다. 주요국간에 노동생산성 상승율에 커다란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임금비용을 보면 일본의 안정이 괄목할 만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차이는 임금의 상승율에 있다. 일본의 경우 노동생산성의 상승율에 가까운 수준에서 임금상승을 억제했던 것이다. 그리고 석유 위기 이후 일본의 노사관계를 보면 1975년 관공노(官公勞)의 ‘파업권 파업(罷業權 罷業)’ 이외에는 별다른 노사분쟁을 겪지 않았다. 노동쟁의의 건수, 참가인원, 노동손실일수의 그 어느 지표를 취해 보더라도 일본의 노사관계는 극히 안정적이었다. 이 기간에 극히 안정된 것으로서 국제적으로도 발군의 것이었다.(橋本(1991) pp.200-204)
불황기에는 일반적으로 노사관계는 대립적이 되는 패턴을 보인다. 서구의 경우는 석유 위기기의 기업환경의 악화가 노사관계의 긴장을 증대시켰다. 그러나 그에 비해 일본의 경우는 ‘국민경제 정합성론(國民經濟 整合性論)’을 사상적 원점으로 하는 금속노협(金屬勞協 : IMF․ JC)이 노동조합의 주류를 차지해 노조의 기능이 오히려 진정화하는 대조적인 추세를 보였다. 석유위기 이후의 일본경제의 양호한 실적이나 국제경쟁력은 이와 같은 노사관계 구조의 변화를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
일본의 안정적인 노사관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석유위기 이전에 이미 “협조적”인 노사관계의 기반이 확립되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연구가 시기적 분석 대상으로 하고 있는 석유위기 이후는 오히려 “협조적”인 노사관계의 전개 과정으로서 파악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노사관계가 원래부터 협조적인 것만은 아니었다는 점은 제 2차 세계대전에서의 패전 직후나 1950년대의 노사관계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이 논문이 주로 석유위기 이전의 노사관계의 전개를 협조적 노사관계의 성립과정으로 파악하는 것은 이와 같은 시각에 의거한다.
본고는 석유위기를 계기로 성립된 일본의 안정적인 노사관계를 협조적 노사관계로 파악하고 그와 같은 노사관계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형성되었는가(2,3장),일본의 중요한 임금결정기구인 춘투(春鬪)체제와 그 특징(4장),그리고 협조적 노사관계의 조건과 메카니즘(5장)을 해명하는 것을 과제로 한다. 제2차 대전 이후 일본의 노사관계를 볼 경우 일본의 경우도 격렬한 노사대립의 시기가 엄연히 존재하였던 것이다. 또 일본의 노사관계는 단순히 “경영전제(經營專制)”의 체제로도 파악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일정한 정도의 노동자의 협의와 동의의 절차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2. 기업별 조합체제의 성립
2-1 전후 노동개혁과 기업별 조합체제
(1) 전후 노동개혁
일본에서 노동자의 단결이 최초로 법인(法認)된 것은 패전에 따른 미군 점령하에서의 노동개혁을 통해서였다. 1945년 12월의 (舊)노동조합법의 제정을 계기로 노동자들의 즉자적 대응으로서 노조가 급속히 설립되었다.
당시 노동조합을 장악하게 된 전국적 연합체(내셔널센터)는 일본 공산당계의 산별회의(産別會議 : 全日本産業別勞動組合會議의 약칭)였다. 산별회의가 지향한 것은 주관적으로는 산업별조합체제였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전도(傳導)벨트론에 입각한 산별조합체제에 불과했다. 산별회의의 “통일협약 기준”이라는 것도 내용상으로는 산업별의 조직된 노동시장을 형성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산업별의 직종별․숙련도별 임금율을 통일교섭을 통해 결정한다는 정책이 없었을 뿐더러 그 의미마저도 자각화되지 못한 것이 현실이었다.(吉村(1977),pp.13-16)
(2) 기업별 조합체제
1947년에서 1948년에 걸쳐 실시된 노동조합에 대한 전후 최초의 종합조사( 東京大學 社會科學硏究所 編, 1950)에 의하면 당시 결성된 노동조합은 모두 특정 기업의 (정규)종업원을 조합원 자격으로 하는 기업별 조합이었다. 기업별 조합의 중요한 조직적 특징은, 1)직제(職制)상의 책임자(관리직)까지도 조합에 포함시키고, 2)공원과 직원의 혼합조합(“工職 混合組合”)이라는 점이었다. 이와 같은 기업별 조합의 조직상의 특징은 전전(戰前) 산업화 이래 노동쟁의의 가장 중요한 쟁점 가운데 하나였던 공원과 직원의 신분상의 차별 철폐(인격승인요구=종업원으로서의 평등과 동질화)가 전후 산업민주주의 출발점이고,노동조합이 말단에서 톱까지 연속적으로 연결되는 범종업원(汎從業員)의 직장집단(職場集團)으로서의 성격을 당초부터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栗田(1994),pp.56-63)
이와 같이 전후 출발점에 있어서의 일본의 노동조합의 조직 형태가 기업별 조합의 종업원 조직이었던 것은 직접적으로는 공원과 직원이 동일 조직에 가입한 제 2차 세계대전의 전시동원체제하에서의 산업보국회에 유래한다.(三宅(1991)) 그러한 점에서 전전과의 연속성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공원을 직원과 동질시하는 기업별조합의 특징은 노동자를 “근로자 = 국민”으로서 동원했던 전시기 산업보국회의 이데올로기의 연속선상에서 파악될 수 있다.(佐口(1991)) 3)
전후 출발점에서의 노동조합이 기업별조합이었던 사실은 일본의 노사관계의 내실을 규정하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전후 일본의 노동자는 횡단적인 노동시장에서의 직업적 능력을 근거로 한 노동자로서의 조직 논리를 갖추지 못한채 기업의 종업원으로서의 단결과 기업내 승진에 의해 직업적 하층사회로부터의 이륙을 꾀하게 되었던 것을 의미한다.
(3) 기업별 조합체제의 정착 : 전산쟁의(電産爭議)의 의의
그러나 전후에 성립된 노동조합이 종업원조직의 기업별조합이었다고 해도 그것이 곧바로 기업별 조합체제의 정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본질적인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업별조합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산별회의가 존재하고, 또 일본전기산업노동조합(日本電氣産業勞動組合 ; 電勞로 약칭), 전일본자동차산업노동조합(全日本自動車産業勞動組合 ; 全自로 약칭)과 같은 단일의 산업별 조합이 존재하였다. 일본에서 기업별 조합체제가 정착하게 된 것은 대체로 1950년대 중엽이었다. 산별회의는 1950년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총평)의 성립에 의해 붕괴되고,전자(全自)는 日産(分會)쟁의의 패배를 계기로 1954년에 해산되었다. 특히 산업별조합으로서의 1952년의 쟁의를 계기로 한 전노(電勞)의 붕괴는 기업별조합체제의 정착에 있어서 획기적 의의를 갖는다.
전력산업의 단일 산업별조합으로서 전노(電勞)는 1940년대 후반에 산별회의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고, 또 총평이 성립된 이후에도 탄노(炭勞)와 더불어 총평의 좌선회를 주도하였다. 특히 <도표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가족급과 본인급(연령급)으로 구성되는 생활보장급을 중심으로 하는 산업별 횡단임금의 전산형 임금체계를 획득하고 통일교섭과 통일협약을 시도하였다.4) 그러나 GHQ(미점령군 총사령부)와 경영측의 전력산업의 지역별 분할․민영화(1951년)를 배경으로 하여, 1952년의 협약개정과 임금인상 교섭 요구를 계기로 발생한 전산쟁의에서는 경영측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11차에 걸친 전원(電源) 파업에도 불구하고 조합이 분열함으로써 완전히 패배하였다. 그 결과 각 기업별 조합의 연합체로서 전국전력노동조합연합체(全國電力 勞動組合連合體 ; 全勞連)가 결성되었고(1954년),이미 유명무실해진 전노(全勞)는 1956년에 실질적으로 해산되었다.(河西(1982))
이와 같이 패전 후 10여년에 걸친 노동운동의 공방을 통해 일본의 노동조합체제는 기업별 체제로 정착되게 되었다. 전산쟁의의 의의는 이와 같은 전환을 완성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2-2. 노사관계의 “근대화”와 기업별 교섭체제
(1)“근대적 노사관계” 형성의 시도와 좌절
일본의 노사관계는 패전 직후 노동운동이 생산관리투쟁이나 경영협의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경영권이 크게 제약되었었다. 그러나 동아시아 질서에서 일본을 중시하는 정책으로의 미국의 점령정책의 전환(소위 “逆 코스”)과 시장경제를 중시하는 돗지라인의 경제정책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일본의 노사관계는 일경연(日本經營者團體連盟 ; 원래 1947년 5월에 經營者團體連合會로서 결성됨. 1948년 4월에 개칭)의 발족에 의해 상징되는 것처럼 경영권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그리고 노동운동계도 산별회의에 대한 공산당의 지배를 거부하고, 경영권을 승인한 위에서의 대등한 노사관계의 형성을 정책으로 하는 산별민주화동맹(産別民主化同盟 ; 産別民同)이 1948년 2월에 결성되었다. 이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총동맹(日本勞動組合總同盟)과 중립(中立)의 단산(單産)을 중심으로 총평이 결성되었다.5) 노사관계의 재편 과정에서 산별민동이 행한 역할은 매우 중요하였다. 경영측이 주장하는 경영권의 확립을 노동운동측에서 실행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일경연의 주도로 전개된 이 시기의 노사관계 재편 구상은 구미형(歐美型)의 ‘근대적 노사관계’의 형성을 의도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실행은 당초부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총평은 “평화 4원칙”의 채택(1951년)에 의해 “닭에서 거위로” 좌선회하였으며, 1952년 2월에는 “임금강령”을 채택하여 기업별 조합의 약점을 극복하고 단산(單産)6)을 강화하는 “통일협약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한국전쟁 특수(特需)가 끝나 차입금으로 신예설비를 도입하는 산업합리화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저노무비와 고회전율이라는 조건이 필수적으로 요구되었기 때문에 일경연으로서는 총평의 협약투쟁을 허용할 수 없는 것이 예산제약의 현실였다. 더우기 신설비의 도입은 직무 변경, 배치전환, 직장 재편성, 근무지 이동, 요원삭감 등을 수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용자측으로서는 이에 대한 노조의 개입을 용인하지 않으려는 태도였다.
1953년 1월에 발표된 일경연의 “노동협약 기준안”은 <도표 3>에서 보듯이 기업과 노조가 서로 명확히 구분되는 사회적 영역을 기반으로 하는 독립적인 존재인 것을 전제로 하는 구미형의 근대적 노사관계상을 제시하는 것이기는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인사․경영권에의 개입금지, 단체교섭권의 제3자(상부노동단체)에의 위임 금지, 오픈숍 제도, 직장내에서의 조합활동의 규제 등을 천명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현실적으로는 경영과 신뢰관계에 있는 협조적 노동조합(=기업별조합)과만 단체교섭을 하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기준안은 이미 일본에서 현실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기업별 조합을 기반으로 한 경영 우위의 협조적 노사관계의 형성을 지향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栗田(1994),pp.96-110)
(2) 기업별 교섭체제 : 베이스업 교섭과 정기승급제
1950년대 중엽에는 기업별 교섭체제가 정착하게 되었다. 기업별 교섭체제란 하나의 교섭이나 협약의 적용범위가 기본적으로 기업별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이는 전후 10년간에 걸쳐서 기본적인 노조의 조직 범위가 기업(또는 사업소,공장) 단위가 되는 기업별 조합이 정착한 것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이 교섭체제하에는 교섭․투쟁․타결의 권한이 기본적으로 기업별 조합에 집중된다.
기업별 교섭체제는 다음의 두가지 중요한 특징을 가졌다. 첫째, 임금의 교섭이 베이스업(base-up) 방식을 취해 평균임금인상액 또는 인상율을 정하는데 불과하며, 인상액(또는 인상율)의 개인별 배분에 대한 노조의 규제력이 없다.(高橋(1965),p.97) 이러한 평균임금 교섭방식은 기업 횡단적인 직종별․숙련도별 협약화에 의해 개인별 임금이 거의 자동적으로 정해지는 구미의 임금인상 방식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둘째, 정기승급제가 도입되고 승급(昇給)에 있어서 인사고과가 이루어지게 된 점이다. 정기승급제도는 한국전쟁의 특수 붐의 종료에 따른 디플레에 대응하기 위해 취해진 임금억제정책(1954년의 일경연의 “임금 3원칙”)7)의 일환으로써 도입되었다. 이 제도는 전후 인플레 과정에서 노조가 매년 생활수준의 유지를 위해 행해 온 임금투쟁을 정지시키기 위해 그에 해당하는 정기승급을 행한다는 명목을 갖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동자 측에서 보면 정기승급을 위한 재원은 본질적으로 매년 동일한 크기가 되기 때문에 전체적인 노동자의 분배 몫은 고정적이게 된다.
여기에서 정기승급제도와 관련하여 중요한 점은 그것이 단순히 베이스업 방식을 대체하여 임금비용의 안정화를 꾀할 뿐만 아니라 승급기준선의 변경을 행하지 않고 개별 노동자의 임금인상에 대한 사정(査定)을 정기적으로 행하기 위한 의도에서 도입되었다는 점이다. 승급기준선, 사정기준, 인사고과의 방식 등 승급의 일반 방침에 대해서는 노사간의 교섭에 의해서 결정하나 개별 노동자에 대한 적용은 경영권하에서 인사고과 승급으로 이뤄지게 된다. 이와 같은 성격의 사정에 의해 개별 노동자의 임금인상에 대해서 차별하는 정기승급제도는 우선 본급(本給) 부문에 적용되었다. 결과적으로 정기승급 부분에 대해서도 사정에 의한 차별을 포함한 베이스업 교섭(평균임금 교섭방식)의 관행이 성립되었다. 그후 이와 같은 인센티브 임금제도는 1960년대에 직무수행능력에 대한 사정을 통해 임금과 승진 등의 면에서 차별하는 직능급(職能給) 제도의 도입․보급에 의해 더욱 강화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兵藤․下山(1982),pp.255-260)
3. 노동운동 주도권의 전환과 작업장(作業長)제도
3-1. 산업합리화와 조합 분열
1950년대에는 경영측이 일경연의 기준안을 실천하고, 또 신설비 투자를 계기로 한 합리화 문제로 많은 대규모 쟁의가 발생하였다. 日産쟁의(1953년), 尼崎製鐵쟁의(1954), 日本製鋼室蘭쟁의(1954), 王子製紙쟁의(1958), 三井三池쟁의(1960) 등이 대표적이었다.
日産쟁의는 노조활동의 규제를 쟁점으로 하는 것이었으나 나머지 대부분은 합리화를 쟁점으로 하는 쟁의였다. 그리고 그 대부분 경영자측의 승리로 끝났으며, 쟁의를 통해 노동자간의 대립(勞勞對立)이 발생하는 결말이 되었다.(河西(1989),pp.116-119,126-128)
쟁의 → 조합분열 → 제2조합의 성립으로 이어지는 대규모 쟁의의 경과를 통해 1950년대말에는 이미 민간 부문에서는 총평(總評)의 기반이 약화되고 합리화에 대한 협력과 노사협조주의를 정책으로 하는 동맹(同盟)계의 노조가 노동조합 운동의 주조류를 형성하기 시작했다.8)
50년대의 일련의 쟁의와 조합분열의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1) 제1조합도 제2조합도 모두다 특정 기업의 정규종업원을 조직 대상으로 하고, 2) 제2조합의 주도층은 직제(職制)상의 현장감독자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복수조합의 병존(multi- unionism)이나 교섭단위제(bargaining unit)를 택하고 있는 영미(英美)의 노사관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3-2. 직장투쟁(職場鬪爭)의 붕괴와 작업장제도의 도입
(1) 직장투쟁의 붕괴
50년대의 일련의 쟁의의 패배 이후 총평(總評)은 1958년 “조직강령 초안”을 발표하여 노조의 기업으로부터의 자립을 추구하기 위한 직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직장투쟁을 노동조합운동의 기조로 할 것을 천명한 이 초안은 1950년대 전반 이래의 산업 합리화 과정에서 기업별 조합의 공동화에 대응하여 소수이기는 하지만 직장의 질서를 둘러싼 성공적인 직장투쟁, 특히 1952년말의 北陸鐵道노조의 직장투쟁이나 익년의 三鑛連 三池炭鑛노조의 직장투쟁의 경험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것이었다.(兵藤(1982),pp.211-220)
그러나 이 초안은 문자 그대로 초안에 머물러 총평의 조직강령으로서도 채택되지 못했다. 더우기 이 초안은 당시 春鬪를 추진하고 있었던 오따․이와이(太田․岩井) 라인의 총평 지도부로부터도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이 현실이었다. 1962년에는 초안마저 폐기되었다.(兵藤(1981),pp.73,74) 그리고 윤번제(輪番制)와 직장대표자회의(직장집단)를 통한 ‘생산 콘트롤’(생산제한)에 의해 직장(職長 ; 拂長)을 배제하는 직장관행으로 사실상 현장의 직제를 마비시키기까지도 했던 三井三池쟁의에서의 완전한 패배에 의해서 상징되는 것처럼 직장투쟁은 실패하였다.(平井(1991)) 특정 기업의 종업원인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장래의 입장인 직제상의 커리어(career)로서의 직장을 배제하는 투쟁에서는 결국 노조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지 않는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2) 작업장제도의 도입
이와 같이 노조의 직장투쟁이 붕괴하는 다른 한편으로는 1950년대 후반에 직장의 질서를 재정비하기 위한 현장관리조직이 설치되었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철강산업에서의 작업장제도의 도입을 들 수 있다. 야하따제철소에는 1956년에, 日本鋼管에서는 1959년에 미국에 직장(職長 ; foreman)제도를 모델로 한 작업장제도가 도입되었다. 그것은 작업관리와 노무관리의 양면에서 권위와 책임 및 권한을 명확히 부여한 현장직제의 확립을 의도한 것이었다.(折井(1973),pp.34-37,小松 編(1968))
야하따제철소에서는 라인․스탭제 도입의 일환으로써 작업장제도를 도입하는 한편 작업장의 비조합원화를 꾀했다. 종래의 현장관리조직은 <계장(掛長) - 조장․오장(組長․伍長)>으로 된 현장 라인의 중간에 기사나 기술원이 개재하는 복잡한 구조였으나 새로운 작업장제도는 기사나 기술원을 스탭부문으로 흡수하여 <계장(掛長) - 작업장․공장(作業長․工長)>의 라인 직제를 도입하였다. 이 제도에 의해 작업조직의 관리와 더불어 인사고과, 인사이동, 요원 청구, 휴가의 허가 등 종전에는 직원층에 독점되고 있었던 노무관리상의 권한이 현장의 노동자 가운데서 발탁․승진되는 작업장에게 부여되었다.(兵藤(1982),p.228-244)
기사나 기술원을 기술개발 등을 위한 스탭부문으로 흡수하고 블루칼라 출신의 작업장(=職長)이 생산현장관리에 대해 집권적인 권한과 책임을 갖는 라인상의 직제를 확립하기 위해 도입된 이 제도는 형식적으로는 ‘기획과 집행의 분리’를 원리로 하는 테일러시스템의 라인․스탭제로 보여진다. 그러나 미국식의 직장(foreman)제도와는 이질적인 내용을 갖고 있다. 일본의 경우는 블루칼라 출신 가운데서 생산현장의 작업장(=職長)으로의 내부승진이 이뤄지며 원리적으로는 그 위로의 승진도 무제한적으로 가능하게 된다. 소위 “푸른 하늘이 보이는 승진제도”(blue sky ceiling promotion system)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제도에 의해 노동자의 커리어 상의 직제로서 직장의 지위가 확립되고 경영의 말단에서 최정점까지 연속적인 종업원 집단이 형성되었다.
직장은 본질적으로 경영상의 직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종업원집단의 대표자로서 기업별 조합의 의사결정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중적인 존재이다.(단,야하따제철의 경우 작업장은 1963년에 비조합원화되었음)
(3) 철강쟁의와 IMF․JC의 결성
마지막으로 협조적인 노사관계의 성립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계기는 철강쟁의이다. 총평 산하의 철강노련(鐵鋼勞連)은 각 기업별 조합에 대해서 파업 지령권을 갖는 “확대 중앙투쟁위원회”체제(파업권 비준방식)를 구축하여 1957년과 1959년에 통일임금투쟁을 조직하나 사용자측의 강력한 결속에 의한 “제로(零) 회답”과 “일발회답(一發回答)”에 부딪혀 전면적으로 패배하였다. 당시 철강노련은 사회당 좌파의 프랙션이었던 「동지회(同志會)」가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이 쟁의를 계기로 철강노련내의 좌파가 패퇴하게 되었다. 이 쟁의는 무엇보다도 원래 기업별 조합의 단일 산별화의 의도를 갖고 있었던 철강노련의 의도가 일본 노사관계사상 최종적으로 좌절되고 ‘기업별 조합주의’ 노선의 리더십이 확립되었던 데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松崎(1991),田端(1991),pp.238-241)
미야다 요시카즈(宮田義二)로 대표되는 새로운 리더십은 생산협력을 전제로 한 성과의 배분에 중점을 두는 “조합주의노선”으로 1960년대에 전일본금속산업노동조합협의회(全日本金屬産業勞動組合協議會 : IMF․JC ; 국제금속노련 일본협의회로 1964년에 결성된 금속 4單産의 협의회. 1975년에 金屬勞協으로 명칭 변경)의 결성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9)
철강산업과 철강노련은 후술하는 바와 같이 1960년대 이래 춘투체제에서의 패턴 세터(pattern setter)로서 “일발회답주의”와 같은 교섭관행을 성립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日本鐵鋼勞連(1981))
4. 춘투체제하의 임금교섭의 특징
4-1. 춘투체제와 임금교섭기구
(1) 춘투체제의 성립
1950년대에 이미 형성된 분권적인 기업별 임금교섭은 노동조건의 개선이나 평준화에 커다란 한계를 갖고 있었다. 노조측이 이를 보완하기 위해 도입한 것이 춘투(春鬪 ; 春季 統一 賃金鬪爭)이다. 춘투체제의 전개과정은 약 10년씩을 단위로 하여 형성기(55-63년), 성숙기(64-73년), 전환기(74-86년), 렌고(連合)체제하의 정책제도투쟁기(87년-현재)의 4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오늘날의 일본의 임금교섭을 직접적으로 규정하는 제관행이 성립되었던 것은 제3기(소위 「춘투의 전환기」)의 1970년대 후반이다.
저성장에 대한 경기회복책으로서의 금융완화정책의 기조에 오일쇼크가 겹쳐 「광란물가」가 초래됨으로써 커다란 위기가 조성된 노사관계의 상황에서 정부와 재계의 임금억제 캠페인(「일본형 소득정책」)에 적극적으로 호응한 IMF․JC와 동맹(同盟)이 75년의 춘투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국민경제와의 정합성을 고려한 임금투쟁을 주장하는 「국민경제정합성론」이 노조운동의 주류적인 정책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임금결정의 관행은 물가추수형(物價追隨型)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앞에서도 누차 지적한 것처럼 춘투에서의 주도권은 단지 오일쇼크를 계기로 한 제3기의 한 시기에 일거에 전환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그 형성기인 1950년대 후반에 장차 춘투에서의 패턴 세터로서 역할하는 철강노련과 야하따제철소에서는 좌파가 패퇴하고 협조주의적인 노동조합주의 노선이 운동의 주도권을 잡았다. 그리고 10%를 넘는 실질경제성장율과 노동력 부족, 특히 연소(年少) 노동력의 부족을 배경으로 거시경제의 생산성 증가율을 초과하는 대폭적인 임금상승이 이루어졌던 제2기의 성숙기에는 민간 주도의 춘투체제가 성립되었던 것이다.(春鬪硏究會 編(1989))
(2) 임금교섭기구와 IMF․JC
춘투의 시세 설정자(時勢 設定者 ; pattern setter)는 1970년대 전반까지는 철강부문이었다. 그러나 1975년 춘투에서의 철강노련과 조선중기노련(造船重機勞連)의 “스크럼 트라이(scrum try)”를 계기로, 또 76년에는 전기노련(電機勞連)과 자동차총연(自動車總連)을 포함한 4개의 단산(單産)이 중심이 되는 “4단산 집중결전방식”으로 전환되었다. 77년에는 전금동맹(全金同盟)과 전기금(全機金)을 포함한 “6단산 집중결전방식”으로 확대되어 “JC 춘투”가 되었다. 1982년 이후에는 금속산업의 4단산(IMF․JC의 철강,조선,전기,자동차)으로 고정화되게 되었다.
금속 대기업 8사의 임금인상 결과와 춘투의 결과를 비교해 보면 80년에서 85년까지 춘투의 임금인상율은 8사의 평균 임금인상율에 0.1% 내지 0.3% 포인트를 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양자간에 강한 상관관계가 있으며,철강을 중심으로 한 금속산업이 기업의 임금인상 교섭 시에 중요한 준거의 틀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표 4>는 이와 같은 일본의 임금교섭 메카니즘을 도시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일본의 춘투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JC의 정책 결정에서는 각 업종의 2사씩으로 구성되는 “금속 4업종 8기업연 연락회(8社 노조간담회)”가 중추적인 기능을 하고 있다. 이 간담회는 1977년에 설치되었다. 그 계기는 76년도 경영측이 설치한 “금속 4업종 8사 간담회”(8사 간담회 : 新日鐵,日本鋼管,三菱重工,石川島播磨重工業,도요따,日産,日立,東芝)였다. 그리고 이 8사 간담회의 설립 계기는 동년의 노동측 금속 4업종 8사 “집중결전 체제”였다. 8사 간담회는 금속계 4단산에 대응하는 형태로 금속 4업종의 지배적인 과점기업간에 정보교환을 행하고 철강과 다른 3업종의 임금인상의 회답을 조정하는 기능을 행한다.
8사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는 이들 각 기업이 각 산업의 중심적 기업이기 때문이다. 그 중요도는 단지 노동조합원의 숫자가 아니라 기업의 자산 및 정치력에 의해서 규정된다. 정치력이란 경단연(經團連), 일경연 등 경제단체의 임원 및 경제관계심의회의 위원의 수에 의해 측정된 것이다. 이러한 선정 기준을 보면 기업간의 서열에 의해 8사가 정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리하여 일본의 춘투체제는 임금결정 과정의 중심에 8사가 있으며, 요구 수준은 국민경제 정합성의 논리에 따라 국민경제적으로 가능한 인상율로, 타결율은 그 7할로 결정되는 극히 예측하기 쉬운 형태로 제도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つじ中(1986),pp.285-289)
4-2. 임금교섭의 특징
(1)평균임금교섭
일본의 임금교섭의 내용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은 임금교섭이 임금지불총액(기준내 임금)의 교섭,즉 노동자의 평균임금의 인상(베이스업)의 교섭으로서 이뤄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임금인상분을 기준내 임금의 각 항목에 배분하는 교섭도 동시에 이뤄진다. 이러한 특징은 이미 1950년대에 형성된 것으로서 춘투에서 임금개정의 준거의 대상이되는 것은 바로 평균임금의 인상액 또는 인상율이었다. 춘투체제하에서의 이러한 교섭방식과 임금파급으로 인하여 임금인상은 산업이나 기업을 넘어서 평준화되고 산업이나 기업간의 임금격차의 축소가 촉진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임금인상 교섭은 문자 그대로 평균적인 인상액을 의미할 뿐 각 개인에게는 인사고과에 따른 차별적인 임금인상이 이뤄지는 구조이다. 노동자 개개인은 배분교섭의 이후 또는 월급 봉투의 급여명세를 보고서야 자신의 임금인상액을 알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평균임금방식의 임금교섭은 그후 개별임금을 중시하는 노조측의 정책(예컨대 표준노동자방식이나 연령별 점수방식 등)에 의해 약간의 수정을 받으나 본질적으로 그 성격이 변화하지 않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10)
(2) 철강과 IMF․JC 중심의 패턴 설정
춘투의 형성기에는 사철(私鐵), 공노협(公勞協), 화학이 춘투의 시세를 형성하는 경우가 많았다. 성숙기에는 철강이 패턴 설정자가 되었다. 그리고 구조전환기 이래 금속산업의 4단산으로 조직되는 IMF․JC가 춘투의 시세 결정에 있어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이 각 시대별로 시세의 설정자가 변화되어 온 데에는 경제의 구조적 변화가 반영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춘투의 성숙기에 철강이 패턴 설정자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은 산업으로서의 표준성, 대표적인 과점산업으로서의 산업연관상의 중요한 지위, 안정적인 수익성이라는 경제적 원리를 반영한 것으로 일본의 노사관계의 구조 형성에 있어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 제도나 관행을 창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노동조합측도 철강노련으로 통합된 총평 및 IMF․JC 산하의 민간의 유력 조합이었다.
저성장기에 일본경제 전체가 수출의존형의 경기순환으로 전환하게 됨에 따라 전형적인 수출산업인 조선과 전기(電機),그리고 자동차의 금속계 산업이 철강업에 더해 패턴을 형성하게 되었다. 1980년대 중반이 되면 조선에 더해 철강업의 경우도 구조불황산업으로 전락하여 패턴 설정자로서의 그 역할은 작아지나 여전히 커다란 영향력을 형성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저성장기 이래 현재에 이르기 까지 일본의 춘투에 있어서의 패턴의 설정은 철강을 중심으로 한 금속의 4단산(IMF․JC)과 그에 대응한 경영측의 8사 간담회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 할 수 있다.
(3) 일발회답주의(一發回答主義)와 일제회답방식(一齊回答方式)
일본의 춘투에 있어서 경영측의 단체교섭정책의 특징으로서 일발회답주의와 일제회답에 의한 단기집중의 결전방식을 들 수 있다.
일발회답주의는 임금인상을 위한 단체교섭과정에서 구체적인 수치를 내놓지 않다가 일단 회사측이 회답(구체적인 금액 회답)을 하면 세부적인 사항을 제외하고 그 최초의 회답이 그대로 최종회답이 되도록 하는 회사측의 교섭전략을 말한다. 따라서 2차 회답, 3차 회답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일발회답방식은 1957년과 59년의 장기의 파업을 수반하는 쟁의 과정에서 철강의 대기업들이 견지하여 획득한 교섭방식으로서 그후 많은 산업에 확대되었으며, 또 춘투에서의 중심적 교섭으로서의 철강의 지위로 보아 매우 중요한 교섭관행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의 철강 대기업은 매년 임금의 교섭시에 기업별로 교섭을 행하면서도 각 사가 완전히 보조를 맞추어 같은 날에 동액의 일발회답을 기업별 조합(기업연)에 제시하여 임금교섭을 행하고 있다. 이와 같은 교섭방식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철강대기업 5사간의 결속이 이뤄지지 않으면 안된다. 기업간의 결속을 실현하는 장소는 공식적인 조직이 아니라 5사의 노무담당부장을 중심으로 하는 비공식적인 회합이다. 회사별의 단체교섭이 시작하기 전부터 정기적으로 비공식의 회합이 개최되어 처음에는 상호의 정보교환부터 시작하여 점차 타사의 사정에 정통하게 된다. 그리고 각사의 회답안이 회합에서 제시되고 상호의 조정을 거쳐 통일된 일발회답이 작성되어 각사별의 단체교섭에서 제시된다.
그리고 일발회답으로 교섭을 해결하기 위해서 경영측은 조합 리더와의 공식․비공식의 접촉을 행함과 동시에 계통적인 노무관리의 라인(職制)을 통해 파업 없이 수습할 수 있는 최저한으로서의 조합의 저항선(抵抗線)을 파악하여 회답을 작성한다. 또 노조의 현집행부를 유지시키기 위해 비공식적인 회합 과정에서 조합 간부에게 어느 정도의 교섭기능을 부여하고 공식적인 교섭 장소에서나 뉴스를 통해 조합원 대중에게 리더의 역할을 알리는 여론 조작을 행한다.(石田(1976),第6章)
일발회답주의는 그 확립과정에서는 파업을 수반하는 한편 경영측이 그 파업을 견디는 것을 통해 노조의 파업 비용을 높임으로써 리더십의 교체를 초래했지만,일단 확립되고 난 이후에는 노사관계의 안정화를 도모하는 중요한 전술적인 관행으로서 역할하고 있다.
이러한 일발회답방식은 IMF․JC 산하의 금속 4단산의 일제회답의 경우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여기에서 「격차(隔差) 회답」이 나오지 않도록 기업 또는 업종간의 의견조정을 행하는 기구가 8사 간담회와 8사 노조간담회이다. 양 기구는 그 자신의 존립 근거로서 서로 상대방의 기능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5. 협조적 노사관계의 메커니즘
이상 우리는 제2차대전 이후 일본에서의 “협조적” 노사관계의 성립과정과 그 중요한 역사적 계기에 대해서 논했다. 일본의 노사관계는 일본에는 기업별 조합체제를 근간으로 하여 고도성장 과정에서 협조적 노사관계로 전환하였으며,석유위기 이후의 안정적 노사관계의 신속한 회복은 이와 같은 1950년대의 기업 레벨의 노동조합 운동 노선의 전환, 그리고 고도성장 과정에서의 전국적 노조운동에서의 주도권의 전환 위에서 가능하였던 것이다. 춘투라고 불리는 임금교섭 기구도 본질적으로 이와 같은 기업별 조합 및 기업별 교섭체제를 수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금속노협을 시세 설정자로 하는 교섭체제의 성립은 중추 금속산업의 과점적 대기업 중심의 협조체제를 경영측에서도, 조합측에서도 성립시키는 것으로 일본의 안정적 노사관계를 지탱하는 기구로서 역할하였다. 이하, 본고의 분석에서 밝혀진 일본 노사관계의 내용적 특징을 전제로 협조적 노사관계의 조건과 메커니즘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5-1. 경제성장과 춘투에 의한 성과배분
경영 우위의 노사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이며 협조적인 노사관계가 유지되었던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인은 무엇보다도 대폭적인 임금인상이었다. 경제성장의 결과 핍박해진 노동시장의 조건이 춘투를 매개로 하여 큰 폭의 임금인상과 임금수준의 평준화를 초래하였다. 그리고 고도성장 기간중 서구제국에서와 같은 소득정책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임금, 물가, 생산성은 밸런스를 이뤘기 때문에 임금인상의 압력을 경영측이 충분히 흡수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임금인상에 의한 내수의 확대는 수요측에서 고도성장을 견인하는 요인으로서 작용하였다.(經濟企劃廳 編(1972)),栗田(1994),pp.169-173)
이와 같은 의미에서 춘투는 노동시장의 조건을 임금인상으로 귀결시키는 것에 의해 협조적 노사관계를 유지하는 기구로서 작용하였다.
5-2. 생산주의
협조적인 노사관계를 지지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생산주의가 노사간에 공유되고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근면한 노동 → 기업성장 → 국민경제의 발전 → 개인 생활의 개선이라는 논리 회로를 갖는 이 단순한 이데올로기는 일본 생산성본부가 주창한 생산성 향상운동과도 통하는 것이었다.(野村(1993))
이와 관련하여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 이데올로기를 둘러싸고 총평과 총동맹간에 대립이 있었으며, 이 대립은 “국익(國益)을 둘러싼 대립”으로 전화되어 노동운동계의 재편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兵藤(1981),제3장) 이데올로기 대립의 결과 생산성을 노사의 공동이익의 원천으로 여겨 생산성향상에 협력하는 태도를 취한 반총평계(=총동맹계)의 노동운동에서의 헤게모니가 확립되었다. 금속노협과 총동맹의 “국민경제정합성론”은 그 도달점이었다. 일경련의 생산성기준 원리는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관철되었던 것이다.
5-3. 직장구조와 기업별 노조의 보완적 기능
협조적인 메카니즘이 작용하는 기본적인 기반은 노사관계의 루트와 노무관리의 루트가 중복되는 직장(職場)과 노조의 기업별 조직에 있다. 앞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이 구조의 결절점은 현장직제로서 조합원인 직장(職長)이다. <도표 5>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일본의 직장구조는 서구와는 달리 직장(職長)이 경영의 노무관리 기능과 기업별 조합에서의 중추적인 의사결정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Dore,R.(1973/1987),第9章)
이러한 직장구조 하에서 노조의 일상적 기능은 직장집단(職場集團)의 대표로서 다단계의 위계질서를 갖는 직제 루트에 의해서 흡수․대체되어 비일상화되는 한편 역시 특정 기업의 동일한 종업원을 조직대상으로 하는 기업별 조합의 기능은 직장집단을 보완하는 데 머무르게 된다.(栗田(1994),pp.189-194)
5-4. 노사협의 기구
그러나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일본의 노사관계에서 노조의 기능이 전면적으로 후퇴한 것은 사실이나 직제를 중심으로 한 직장조직이 경영의 의사결정을 위한 기구에 파트너로서 참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제도화한 룰이 다름 아니라 사전협의제를 중심으로 한 노사협의 기구이다. 철강산업 등의 대기업에서는 요원합리화나 배치전환과 같은 매우 중요한 문제에 대한 의사결정 과정에 있어 비록 교섭적 지위이지는 않지만 노조나 직장집단의 협의와 동의의 절차가 전제되어 있다.(仁田(1988))
6. 맺음말
협조의 메카니즘을 보다 깊이 해명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기업의 종업원으로서의 직장집단에 귀속되는 중요한 요인이라고 여겨지는 직장내에서의 노동자간의 경쟁의 구조에 대해 분석해야 된다. 승진과 승격의 룰을 규정하는 ‘능력주의 노무관리’에 대한 분석을 하지 못한 것이 본고의 한계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고는 일본에서 협조적 노사관계가 형성되는 역사적 과정과 그것을 유지하는 요인 및 메카니즘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일본의 협조적 노사관계의 요인이 무엇보다도 독특한 직장집단의 존재양식과 기업별 조합체제에 있음을 밝혔다. 그리고 경제성장과 대폭적인 임금인상이 그 기반이 되었음을 밝혔다.
일본의 노동조합은 산업에서 기업 횡단적인 직종별․숙련도별 임금율을 설정하고 있지 못하는 점에서 구미의 노동조합의 기능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춘투에 의해서도 이와 같은 의미의 산업별 임금결정은 달성되지 못했다. 일본에서 지배적인 조직 형태인 기업별 조합은 본질적으로 노사협의기구의 종업원 대표조직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는데 머무르고 있다. 경영 우위의 안정적이며 “협조적” 노사관계는 바로 이와 같은 노조(=종업원조직)의 기능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
1991년 5월 시작된 전후 부흥 이후 최장의 헤세(平成)불황에 의해 일본경제의 성장력은 크게 감퇴하였다. 일본경제가 서비스 및 정보산업화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종래 일본형 노사관계로서 주목되어 온 연공제도나 종신고용도 커다란 변용을 겪고 있는 것이 최근 일본 산업사회의 두드러진 모습이다. 그만큼 일본의 “협조적” 노사관계의 요인이나 기반도 크게 약화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본고의 분석을 기초로 앞으로 일본의 노사관계를 전망하려고 할 때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기업별 조합체제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을 것인가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 점에서 일본의 노동조합체제 자체에는 아직 주목할 만한 변화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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