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년 10월봉기와 47년 2·7봉기 등을 겪은 이승만과 우익지도자들은 미 군정의 힘을 빌어 대대적인 좌익소탕에 나선다.
이런 와중에 제주 4·3항쟁이 발생하게 되고 여기서 수만명의 민중을 희생시킨 끝에 단독정부 수립에 성공한 이승만 정권은 수많은 우익단체를 만들어 자신의 집권 기반으로 삼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에는 전혀 새로운 개념의 조직을 만드는 일에 착수한다.
이른바 ‘국민보도연맹(國民輔導聯盟)’이 그것이다. 좌익에서 전향한 사람이나 그 가족들을 ‘도와서 올바른 데로 인도한다(輔導 또는 補導)’는 뜻을 가진 이 조직은 사실상 이승만 정권에 대한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죄를 뉘우치는 사람에 한해 이승만에 충성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이승만에 대한 반대는 곧바로 ‘빨갱이’로 통했기 때문이다.
49년 당시 반공검사 오제도씨(현 변호사)의 기획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보도연맹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로 이어진다. 북한 인민군이 점령도 하기 전에 한강 이남을 피로 물들인 보도연맹원 대학살은 전쟁중 벌어진 최초의 민간인 학살이며, 이후 인민군 점령지에서 일어난 보복학살의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마산에서도 약 1,000여명이 50년 7월말~8월초 사이 바다로 끌려나가 집단 수장당하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
때마침 마산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으로 오빠를 잃은 한 할머니가 구천을 떠도는 오빠의 한을 풀어달라며 본사에 글을 보내 왔다.
글을 보내 온 팽상림 할머니(63)는 마산 오동동에서 태어나 마산여중과 마산여고를 졸업하고 창원 삼귀초교와 상남·봉덕초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지금은 부산으로 이사해 살고 있다.
팽 할머니는 일제강점기 마산의 대표적인 항일운동가였던 팽삼진 선생의 친조카로, 사건당시 마산상업학교(6년제) 학생이던 오빠 팽현진씨(당시 19세)를 잃었다.
희생된 오빠의 원혼은 구천을 떠돈다
-한 희생자 유족의 호소
팽상림63.부산시 문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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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보호하고 잘 지도하겠다는 약속을 굳게 믿고 또 믿어 보도연맹에 가입한 것이 목숨까지 빼앗겨야 하는 큰 죄였던가. 귀중한 인권은 유린되고 무참히 희생된 원혼은 지금도 구천을 떠돈다.
마산상업학교 미술부 학생이던 오빠(19)는 아버지가 일본으로 건너간 사이 세상이 흉흉해진 줄도 모르고 당시 학생동맹에서 부탁해온 포스터를 그려줬다.
아! 그것이 큰 빌미가 될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현대상업미술전집과 세계미술전집을 곁에 두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조용히 앉아 그림에만 몰두하던 오빠였다.
마산에서 가장 무섭다는 황형사는 혈안이 되어 오빠를 잡겠다고 설쳤다.
귀국한 아버지는 상황을 깨닫고 오빠를 산판일(벌목) 하는 곳에 은밀히 보냈다.
오빠를 찾지 못한 황형사는 바로 밑 남동생을 인질로 끌고가 잠도 안재우고 무자비한 고문을 계속했다. 겨우 16살의 작은 오빠, 온몸은 퉁퉁 붓고 흐릿한 정신으로 말도 제대로 못했다.
어스름이 깔리던 어느날 저녁 큰오빠가 돌아왔다. 산판도 위험하더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살려보려는 일념으로 얇게 콘크리트가 덮인 마루밑을 팠다.
연장소리를 안내려고 손으로 흙을 밤새도록 파내느라 피가 엉겨붙었지만 작업은 며칠간이나 계속됐다.
은행나무 밑에 수북이 쌓여있던 흙을 보았고, 오빠는 감쪽같이 숨겨졌다.
어느날 형사들이 권총을 들고 급습했다.
하필 그날은 오빠가 마루밑에서 나와 방안에서 가까운 분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던 때였다.
혼비백산한 손님들이 활짝 연린 방을 나왔고, 현사들은 구둣발로 다른 두 방과 부엌, 2층을 오르내리며 광이며 가축우리, 변소까지 수색하고 갔다. 놀란 어머니의 얼굴은 사색이 됐다가 다시 흙빛으로 변하고 하품을 하는가 했더니 아사증 걸린 사람의 입으로 비뚤어져 버렸다.
아! 큰오빠는? 활짝 열어제친 양쪽 문의 각진 곳에 종이장처럼 달라붙어 있었으니…
이날 이후 큰오빠는 마루밑 토굴에서만 지냈다. 바닥에서 베어나논 지기(地氣)는 오빠의 다리 피부를 상하게 했고, 2층 양철지붕을 이용한 공간에서 지낼 때는 뜨거운 지붕을 타고 피신하기도 했다.
그때 마산의 초대제헌의회 입후보로 출마했던 김순정씨로부터 권유를 받았다.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면 일체의 과거를 묻지않고 애국적인 국민으로 포용하며, 사면은 물론 취직도 가능하다는 정부의 약속이 있었다는 것이다.
큰오빠는 자신으로 인해 집안이 엉망이 됨을 걱정했고, 특히 작은오빠에게 죄책감을 느껴 괴로워하고 있었기에 주저없이 보도연맹에 가입하게 됐다.
오동동에서 산호동 바닷가로 이사한 우리는 큰오빠가 안전하게 된 것이 기뻐 우선 다리부터 열심히 치료를 했고, 거진 아물 무렵 1950년 4월 30일자로 공군입대를 희망하며 이력서를 썼다. 자수하고 보련에 가입하여 충실한 국민이 되겠다고 약속하는 글이 상벌란에 적혀 있었다.
보도연맹 소집날.
배를 앓는 오빠에게 “참고 어서 갔다오너라. 열성을 보이면 빨리 취직이 되거나 공군입대도 가능해 질런지…” 하는 아버지의 재촉을 뒤로 하며 큰오빠가 손수 지어 만든 파란색 하복(교복)을 입고 집을 나섰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생을 포기했어야 했다. 아버지는 자식을 사지로 보냈다고 땅을 치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해마다 6월이 가까워 뻐꾸기가 울면 흰 수건을 덮어쓰고 밭에 나가 우시던 어머니. 열네살 문학소녀의 터지던 가슴.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큰오빠의 원혼이 구천을 떠도는지 “원한을 풀어달라”고 애원하는 소리가 들린다.
한국의 현대사는 보도연맹사건을 은폐하고 있다.
<분단을 넘어서>, <1950년대의 인식>, <해방전후사의 인식> 1·2편을 다 읽어봐도 없다. 중앙일보사에서 펴낸 <민족의 증언> 여덟권을 샅샅이 읽어봐도 없다. 밤을 새워 읽느라 눈만 상했다.
누구의 처벌이나 보상금도 원치 않는다.
지금도 살아있다는 오제도씨와 당시 내무·국방·법무부 등 관계자와 사회지도자들의 동의를 얻어 결성됐던 보도연맹의 진상을 밝히고, 그들로부터 사죄 한마디만 들어도 한이 풀릴 것만 같다.
이대로 잊혀져서는 안된다.
칠순 밑자리를 깐 우리 세대마저 가고 나면 증언할 사람도 없다. 역사는 거짓되거나 은폐되서는 안된다.
【한국전쟁 중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 경남지역 피해사례】
발제 : 조현기(한국전쟁 중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 경상남도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
1. 들어가며
1. 한국전쟁 중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 경상남도대책위원회는 지난해 9월 말 미국 AP통신의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 보도 이후 경남 지역 곳곳에서도 이와 유사한 피난민 학살 사건이 있었다는 주민제보에 따라 한국전쟁 당시 경남 지역에서 이루어진 미군에 의한 피난민(양민)학살 사건에 대한 자체 조사활동을 지난 6개월 여의 기간동안에 진행하였다.
2. 대책위원회의 진상조사 결과 경남지역에서는 지난 1950년 7월과 8월 사이에 함안, 의령, 창녕, 마산, 진주, 사천, 하동 등의 최소 20여 곳 이상의 지역에서 주로 미군기의 폭격과 기관총 사격에 의한 양민학살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이를 피해 유형별로 구분해 보자면,
1) 미군기의 폭격과 기총사격으로 피해를 입은 경우 - 함안군 군북면 장지리 일대, 의령군 용덕 면 정동리·화정면 상일리, 사천시 곤명면 조장리· 마곡리, 마산시 진전면 진목리 등
2) 미군기의 기총사격으로 피해를 입은 경우 - 진주시 명석면, 하동군 양보면 등
3) 미군기의 폭격, 미육군의 총격, 미해군의 함포사격이 동시에 이루어져 피해를 입은 경우
- 마산시 진전면 곡안리
4) 미육군의 총격으로 피해를 입은 경우 --- 창녕군 창녕읍 여초리, 마산시 진북면 이목리 등이 있다.
3. 경남지역에서 자행된 미군에 의한 피난민 학살은 철저하게 계획된 조직적 양민학살만행이었다. 그 대표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미군기는 저공비행을 통해 민간인임을 확인하고도 폭격을 가했다.
피해자와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전투기로 인한 무차별 폭격 직전에 정찰기로 사전 정찰을 하였는데 미군 정찰기나 전투기는 피난민들이 조종사의 얼굴을 식별할 정도로 저공으로 비행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미군기에 타고 있던 조종사 또한 피난민들을 뚜렷이 식별할 수 있었음을 반증한다. 그들은 그 어떠한 무장도 하지 않은 어린이와 노약자, 부녀자가 대부분인 흰 옷 입은 피난민들이었다. 그들은 민간인·피난민임을 알리기 위해 흰옷을 입고 흰 손수건을 흔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기는 무차별 폭격을 가하였다.
2) "전투지역에서 움직이는 모든 민간인은 적으로 간주하라!"는 미 제25사단 윌리엄 킨(Willam B Kean)소장이 자신의 휘하부대에 내린 작전명령이 미국 AP통신의 보도를 통해 드러났다.
이것은 한국전쟁에 투입된 미군들이 한국민들에 대해서 극도의 인종차별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한국민들은 그들의 작전을 수행하는데 걸리적 거리는 장애물에 불과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3) "육군은 아군 진지로 접근해오는 모든 민간인들을 향해 기총소사를 가하도록 요청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우리는 이에 부응해 왔다"라고 적힌 터너 로저스 공군대령의 메모(1950년 7월 25일 작성)가 미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되어 CBS방송을 통해 폭로되었다.
이는 '한국전쟁 초기 미군이 의도적으로 민간인을 상대로 사격을 가하는 정책을 폈음을 시사하는 것'(CBS의 보도)이며 미군의 양민학살이 결코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전쟁범죄였음을 반증한다.
4) 몇몇 지역의 경우 아직 인민군이 들어오지도 않은 비전투지역에 무차별 폭격이 가해졌다.
적군이 없는 비전투지역에 대한 미군기의 폭격은 의도적인 양민학살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4. 대책위의 진상조사 결과 대부분의 피해자와 유족들은 그렇게 참혹한 피해를 당하고도 억울한 말 한마디 호소할 곳 없이 침묵으로 한 많은 세월을 살아오고 계시다 지난해 9월 말 노근리에서 미군이 자행한 양민학살만행이 공식적으로 확인되면서 50년 동안 숨죽여 왔던 절규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하였으며 무참히 학살당한 그 날의 참상에 대하여 증언하기 시작하였다.
미군의 폭격과 기관총 사격에 의해 하루아침에 가족과 친지를 잃은 유가족 및 피해 당사자들의 원통한 사연을 그분들의 조심스러운 증언과 자체의 조사활동을 통해서 알게된 우리는 그 당시의 양민학살에 대해 이제라도 진상이 규명되고 명예회복이라도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피해자와 유가족의 통절한 염원을 가슴으로 받아 안고 이 사건의 해결을 위해 남, 북, 해외의 민족양심이 모여 결성한 "미군학살만행 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를 중심으로 유족들과 함께, 양민학살 진상규명을 바라는 대중들과 함께 끝까지 투쟁할 것이다.
한국전쟁 중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 경남 지역 피해사례
【1】마산지역 피해사례
마산시 진전면 곡안리 폭격·기총소사 사건
1. 사건 개요
1950년 8월 10일, 마산시 진전면 곡안리 마을 뒷산 성주 이씨 재실에는 백여명의 피난민들이 집단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이날 저녁 재실 아래 마을에 미군들이 속속 들어오더니 미군 1명이 통역관을 데리고 재실로 와 피난 갈 것을 종용했다. 이에 주민들은 날이 어두워져 내일 아침에 떠나겠다는 말을 하니 미군은 그렇게 하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피난짐을 싸놓았지만 어디로 떠날지 모르고 있는 사이 인민군 정찰대 2명이 재실 인근 대나무 숲까지 내려와 미군을 향해 발포를 해 미군 1명이 쓰러 졌다. 그로부터 30여분 후, 탕 탕 하는 총소리가 들리며 마을 사람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하늘에서는 미군 전투기가 기관총 사격을 가하고 박격포탄이 날아들어 순식간에 재실은 아비규환이 되었다.
2. 피해 현황
80여명 사상.
마산시 진전면 진목리 폭격·기총소사 사건
1. 사건개요
1950년 8월 7일(음력, 6월 24일) 오후 1시경, 마산시 진전면 진목리 진목 마을은 미군기의 폭격으로 갑자기 온 마을이 불바다가 되었다. 사전에 피난을 하라는 지시나 연락은 물론 없었고 6.25 전쟁 중이었지만 이곳에는 인민군이 나타나지도 않았으며 도시에 있는 친척들이 피난차 일부 와 있었다.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라 마을 주민들이 이리 저리 피하는 순간, 초가집에서는 불이 붙고 여기 저기 온 마을은 불바다가 되었고, 미군 전투기의 폭음과 사람의 비명소리 총소리 등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공습으로 불이 난 것으로 볼 때 미군 전투기에서 소이탄을 쏜 것으로 보이며 또 비행기에서 기관총을 난사함으로써 무고한 마을 주민 5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하였으며 당시 40여 호의 가옥이 전소하였다.
2. 피해현황
사망 5명, 부상 3명사망자 : 황맹성(당시 54세) 황봉성(당시 51세) 황치복(당시 45세)
황창수(당시 84세) 밀양 하씨(여, 당시 79세) 황치익(나이 ?)부상자 : 황근성(당시 52세)
황주식(당시 7세) 황치안(당시 14세)마을 가옥 40여호 완전소실.
마산시 진북면 이목리 총격사건
1. 사건개요
1950년 8월 9일, 미 제 5해병 전투연대는 창원군(현 마산시) 진북면 이목리 뒷산인 야반산을 점령하여 서북산에 있는 북한 인민군과 대치하여 전투 중이었다. 1950년 8월9일 오전 11시경 미군은 이목리 마을 전 주민을 소개키 위하여 집집마다 피난을 가라고 내몰았다. 이에 마을 주민 24여 명은 당산 밑 개울가에 모여 진북면 이목리 윗배목 샛터에서 들 가운데 부산 마을로 뻗은 개울 둑길을 따라 피난을 가기 시작했다.
부산 마을로 뻗은 들 가운데 개울 둑길을 따라 이목에서 100여 M 푸른 들판에 흰옷을 입고 피난 보따리를 지고 이고 가는 어른들과 10여 명 정도의 어린이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던 이 행렬은 인민군이 아닌 마을 주민이었다. 그런데 이 피난민들을 향하여 미군은 무차별적으로 기관총을 난사하여 10여 명이 사망하고 수명이 부상하였다.
한편 이후 8월 13일 오전 11시 경에는 동네에서 어린이 3명이 나무 밑에 은거해 있는 것을 보고 미 흑인병사 2명이 흰 독가루탄을 던져 1명은 질식사하고 2명은 혼수상태에서 사망한 사건도 있었다.
2. 피해 현황
사망 : 13명 / 부상 : 수명
【2】창녕지역 피해사례
창녕군 창녕읍 초막골 총격 사건
1. 사건 개요
1950년 8월 초, 당시 창녕읍 초막골에는 국도 5호선 위쪽이라 안전하다하여 많은 피난민들이 머물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을 뒷산에 인민군이 진주하기 시작했고 마을 앞에는 미군 포병부대가 진주하고 있었다. 이때 마을을 사이에 두고 미군과 인민군 사이에 전투가 일어나 당시 300여명의 마을 주민과 피난민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미군이 있는 쪽으로 피난을 가기로 했다. 미군 초소 쪽으로 피난민이 움직이자 이내 미군 쪽에서 총알이 날아와 마을 사람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앞선 사람들이 쓰러지자 피난민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얼마간의 정적이 지속되자 마을 사람들은 다시 짐을 꾸려 도로로 나갔다. 또다시 총알이 날아오고 하기를 세 번이나 계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십 명의 마을 주민이 죽거나 다쳤다.
2. 피해 현황
사망 : 60여명 / 부상 : 20여명.
3】함안지역 피해사례
함안군 군북면 장지리 일대 폭격·기총소사 사건
1. 사건 개요
1950년 8월 20일, 함안군 군북면 장지리 일대 유현벌, 남산벌에서 피난하고 있던 약 2000여명의 피난민들은 아침밥을 해먹고 있는 중에 미군정찰기가 저공비행으로 다녀간 후 폭격기가 나타나 기총소사와 네이팜탄 투하로 많은 피난민들이 살상 당했다.
당시 정찰기는 저공비행으로 피난민의 신분을 확인한 상태였으며, 피난민들은 흰옷을 입고 흰 손수건을 흔들며 양민임을 알리기 위해 무수한 노력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연이어 나타난 미군 폭격기는 두 시간이나 넘는 시간 동안 무고한 양민을 향해 폭격과 기관총 사격을 가했다.
2. 피해 현황
사망 : 170여명 / 부상 : 100여명.
함안군 군북면 수곡리, 박곡리 폭격 사건
1950년 8월 20일 경, 수곡마을에서는 미군의 참혹한 폭격으로 심육갑씨의 일가족 3명이 즉사하고 타지역에서 온 피난민 2명도 사망했으며, 박곡마을에서는 1950년 8월 27일을 전후해 미군 폭격기가 폭탄을 퍼붓고 네이팜탄을 터뜨려 피난민 3명이 사망하고 김복남씨와 딸이 큰 화상을 입었으며 이들은 현재도 화상의 상처를 그대로 간직한 채 생존해 있다.
함안군 법수면 토현리 폭격 사건
주민 박성철(72)씨는 1950년 8월 20일을 전후해 마을 뒤 안산으로 마을 사람들이 함께 피난해 있었는데 양민임을 표시하기 위해 태극기를 높이 세우고 있었다. 몇 번을 미군정찰기가 그냥 지나갔는데 그 날은 미군의 폭격으로 마을주민 1명이 팔이 절단되는 부상을 당했으며 박씨의 처도 군북면 박곡에서 폭격을 당해 왼쪽 팔목에 파편이 박혔다고 증언했다.
함안군 가야읍 혈곡리 폭격·기총소사 사건
당시 피난을 가지 못하고 마을에 남아 있던 김점팔(90)씨의 증언에 따르면 미군 흑인 병사가 나타나 인민군을 보았느냐고 묻길래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한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군폭격기가 나타나 폭격이 시작되었다. 또한 마을 제실에는 몇 명의 주민이 남아 있었는데 미군에 의해 사살되었으며 290여 채의 마을 가옥이 미군에 의해 불태워졌다고 한다. 이때 폭격으로 김종곤의 부친 등 4명이 사망했다.
함안군 군북면 원북터널 폭격·기총소사 사건
1. 사건 개요
1950년 8월, 함안군 군북면 원북터널에는 미군의 폭격을 피해 원북마을 주민들과 인근의 이반성면 주민 등 수백 명의 피난민들이 피난 중이었다. 한편, 일부 인민군들도 피난민과 함께 터널 안에서 같이 피난하는 처지였는데 미군기는 무차별적으로 터널 양쪽 입구를 향해 폭격과 기관총 사격을 가해 터널 양쪽 입구 쪽에 있던 100여명 이상의 무고한 피난민들이 죽거나 다치는 피해를 입게 되었다.
조경래(55, 당시 5세)씨의 증언에 의하면 터널 양쪽입구에는 폭격으로 인한 시체더미가 수북히 쌓여 있을 정도였다고 하며, 어머니의 품에 있던 자신은 폭격으로 인한 파편에 왼쪽 눈을 실명하고 오른쪽 손목과 왼손의 엄지와 검지 손가락을 잃는 등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2. 피해 현황
사망 : 김수열의 부친 등 최소 100여 명 이상 사망
부상 : 조경래(당시17세)씨 등 상당수
【4】의령지역 피해사례
의령군 용덕면 정동리 폭격·기총소사 사건
1. 사건 개요
1950년 8월 22일, 의령군 용덕면 정동리 마을 주민들은 인민군과 미군의 폭격을 염려하여 마을 뒷산에 피난했다가 저녁이 되어 밥을 해먹으려고 마을에 내려왔다. 이때가 저녁 7시 쯤 되었다고 한다.
막 저녁을 지어 먹으려고 하고 있는데 미군 정찰기가 마을 상공을 선회한 후 미군 전투기 4대가 나타나 마을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하고 폭탄을 투하해 가옥 100여 채가 불타고 수많은 주민들이 죽거나 다쳤다.
2. 피해 현황
사망 : 33명 / 부상 : 30여명
의령군 화정면 상일리 보천마을 폭격사건
1. 사건 개요
보천마을은 지형상 마을 양쪽으로 암벽산(마을 주민들은 '덤'이라 불렀다)이 둘러싸고 앞으로는 남강유역에 위치하고 있어 당시로서는 인근에서 마을로 통하는 길은 사람 하나 겨우 통과할 정도의 좁은 통로가 전부 였으며 이나마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위험을 감수 해야할 정도였다. 따라서 마을이 곧 천혜의 피난처였으므로 마을 주민들은 따로 피난 갈 필요가 없었으며 인근의 함안 등지에서 피난민 행렬이 피난을 오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1950년 8월 11일 오후 1시경, 의령군 화정면 상1리 보천마을 상공으로 미군 정찰기가 선회한 후 미군 전투기(호주기라 불렀음) 4대가 나타나서 4회에 걸쳐 마을을 폭격하고 사라졌다.
미군 전투기는 주민들이 피난민임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저공 비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폭탄을 투하하고 기관총을 마구 쏘아 마을의 가옥들이 불타고 집안에 있던 양민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처참하게 죽어 갔으며 순식간에 마을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폭격으로 불타는 집에서 나와 마을 앞 하천둑 제방으로 대피하였으나 흰옷을 입은 주민들 위로 미군 전투기는 또다시 기총사격을 가해 수십명이 죽거나 다쳤으며 폭격으로 인하여 130호 정도의 가옥 중 20여 채가 전소하는 등 대부분의 집들이 불타고 부서졌다. 마을은 온통 화염에 휩싸이고 부모 형제의 주검을 끌어안고 오열하는 사람들, 가족들의 생사를 확인하느라 폭격 맞은 집들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로 그야말로 마을은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그 날의 분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심상현(당시 22세)할아버지는 증언했다.
한편 이날 폭격 이후에도 8월 13일 저녁 무렵과 8월 15일 오후 3시경, 8월 17일 저녁 무렵에도 미군 전투기는 마을 상공에 나타나 기총사격을 하고 사라졌으며 17일의 경우에는 마을 위로 소이탄을 떨어뜨리고 기관총 사격을 가해 마을을 다시 불바다로 만드는 무자비한 학살만행을 저질렀다.
2. 피해 현황
< 사망자 >
유지곡 : 심재원의 조모 --- 집에서 손자를 안고 있다가 기관총에 맞아 사망, 손자는 생존
진외조 : 진정식의 백부 심상리 : 심서환의 부 심진섭 : 심서환의 형 심익곡 : 정순우의 조모
정선임 : 정순우의 누나 김봉조 : 김영중의 동생 김옥중 : 김영중의 동생 박순남 : 김형중의 모
김순둘 : 김형중의 동생 진석이 : 진병진의 조부 진수야 : 진병진의 손자 진점야 : 진병진의 고모
심상희 : 심후남의 당질 심상오 : 심상완의 제 정소남 : 심상두의 처 이타순 : 심상우의 형수
? : 김선후의 고모 김용중 : 진두옥 : 이임자의 시조부 김종인 : 김종해의 제 --- 어머니가 업고 있던 중 기관총에 맞아 사망, 김종보(형,변호사) 이만욤 : 연고자 없음
심상현의 처 : 대퇴부 관통상으로 사망
< 부상자 >
김선준(당시 9세) : 본인 --- 왼쪽팔 절단, 진양군 집현면에 주둔하던 미군 부대에 후송,
부산 육군병원에 보내져 1년 정도 치료받고 귀가, 현재 마산에 거주
이경분 : 심재용의 모(사망)정용이 : 정규춘의 부(사망) 심상원(당시 24세) : 주정순의 남편(사망) --- 오른쪽 다리 살점이 떨어져 나가 진양군 집현면에 주둔하던 미군 부대에 후송, 부산 육군병원으로 후송되어 1년 정도 치료 후 귀가 심옥환(당시 17세) : 심재춘의 부(사망) --- 기총사격으로 귀가 찢겨 나감
심시택 : 심호영의 조부(사망) --- 기관총 탄알이 볼과 귀를 스쳐가 볼과 귀가 찢어짐
이외 신원 미상의 피난민 10여명 정도 더 사망. 미확인 피해자 약간 있음.
현재 사망 22명, 당시 부상자 6명(현재 생존자 1명)
3. 기타 사항
마을 폭격 5일전에 누군가 동네의 대밭을 제거하라고 지시하여 대밭을 베어냄.
마을이 폭격 당할 당시는 아직 인민군이 점령하기 전임.
당시에는 마을 지형상 배가 유일한 교통수단 이었음.
미군 전투기의 기총사격으로 굴속에까지 탄알이 뚫고 들어와 굴 안에 있던 사람까지 사상.
마을 공동 우물에 불발 포탄이 떨어져서 벼 한 섬을 주고 인부를 들여 지게로 마을에서 700m정도 떨어진 남강까지 져다버림.
심상현씨의 경우 1949년 12월에 산너머 옆 동네의 처녀와 결혼식을 올렸으나 '묵힌다'는 풍습에 따라 부인은 처가에 있었으며 설에 한번 가보고는 6.25를 맞게된다. 한편 산너머 처가가 있는 동네에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심씨는 정신없이 달려갔고 하천 둑을 지나 논두렁에 쓰러져 있는 부인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미 대퇴부 관통상을 입은 부인은 과다출혈로 얼굴이 새파랗게 되어 죽어가고 있었다. 꼭 껴안은 채로 부인의 죽음을 맞이한 심할아버지는 그때는 아직 혼인신고도 안한 상태였다며 당시를 회고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4. 현장 목격 및 증언자
심상현(72, 당시 22세), 김영준(74, 당시 24세), 심재환(73, 당시 23세),
김형중(70, 당시 20세), 심기환(63, 당시 13세) 등
의령군 의령읍 만천리 폭격사건
1950년 음력 7월 7일(양력 8월 20일), 마을 상공을 미군 정찰기가 선회한 후에 폭격기 4대가 날아와 마을 전체를 폭격하여 12명이 사망하고 10여명이 부상당하는 일이 있었다. 의령읍사무소 소실로 관계자료가 불탐.
의령군 부림면 단원리 폭격사건
마을 주민들이 폭격을 피해 동굴 속에 피난해 있던 중, 미군 전투기가 폭격을 가해 피난민 12-3명 정도가 사망하였다. 부림면사무소 소실로 관계자료가 불탐.
의령군 지정면 마산리 폭격사건
지정마을 주민들이 배를 이용해서 강을 건너 함안 대산 방면으로 피난을 가던 중 마지막으로 강을 건너던 일가족에게 미군기가 폭격을 가해 일가족이 전원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5】사천지역 피해사례
사천시 곤명면 조장리 폭격·기총소사 사건
1. 사건 개요
1950년 8월 2일, 사천시 곤명면 조장리 앞 하천제방에서 이 지역 주민 약 300여명이 피난을 하고 있었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흰옷을 입고 한 곳에 모여 있으면 양민으로 알고 미군이 총을 쏘지 않을 것"이라며 하천 제방에 모이자고 했다. 산으로 들로 피해 있던 주민들이 이곳에 모여든 것이다.
7월 29일 부터 폭격이 진행되었고 이 당시의 폭격으로는 주민들은 피해를 입지 않았고 가옥만 소실되었다. 그런데 8월 2일 점심때쯤 되어 미군 정찰기 2대가 날아가고 난 뒤 30여 분쯤 지나 미군 폭격기 4대가 나타나 폭격과 기관총 사격을 가하여 150여명의 주민이 죽거나 다쳤다.
2. 피해 현황
150여명 사상
사천시 곤명면 마곡리 폭격·기총소사 사건
1. 사건 개요
1950년 7월 31일 정오쯤, 사천시 곤명면 마곡리 앞 하천제방에서 이 지역 주민들이 피난을 나와 점심을 먹고 있던 중 미군 전투기('쌕쌕이'라 불렀던 F54기) 4∼5대가 갑자기 나타나 주민들을 향해 약 30분간에 걸쳐서 무차별적으로 기관총 사격과 폭격을 가해 강남덕(당시 17세)의 아버지와 3명의 동생 등 13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하는 피해를 입었다.
피해 현황
사망 : 강남덕씨의 부친 등 13명
부상 : 강남덕의 어머니 등 8명
※ 관련 자료 : 경남신문 1999년 12월 10일 (금) 보도
【6】진주지역 피해사례
진주시 수곡면 원당리 폭격 사건
1. 사건 개요
1950년 8월 6일 아침 경, 수곡면 원당리 강가매(당시 12세)씨가 아침밥을 먹고 이웃에 놀러간 사이 마을 한길가에 있던 강씨의 집과 집 옆의 방앗간과 이웃해 있는 집들에 미군기가 폭탄을 떨어뜨리고 기관총을 난사하여 강씨의 가족들과 이웃 주민들이 사상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2. 피해 현황
미군기가 떨어뜨린 폭탄으로 집에 있던 가족4명이 몰살하는 등 총 7명 사망.
사망자 : 강씨의 어머니(이씨)
강씨의 언니(당시 16세) 강호연(당시 8세, 강씨의 여동생) 강판도(당시 4세, 강씨의 남동생)
박아무개(여, 이웃집 처녀) 성명불상의 아주머니(강씨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이웃해 있었으며 임신중이었으나 폭격으로 놀라 죽은 아이를 낳고 자신도 죽음) 상기 아주머니의 아이 1명
3. 미군기에 의한 폭격 주장 근거
수곡면 원당리에서 미군기에 의한 양민학살이 이루어 졌다는 정황은 여러 가지이다.
1) 사천시 곤명면 조장리와 불과 1Km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동네라는 것이다.
2) 당시 이곳에는 북한군이 주둔했다는 흔적이 없어 미군의 오인으로 양민에 대한 폭격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3) 강씨의 집은 한길가에 있어 미군이 전쟁 중 마을 가운데 한길가에 있는 큰 집을 대상으로 무조건 폭격을 했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1999년 10월 24일 밤, 문화방송이 입수해 공개한 당시 미군기의 민간인 공격을 담은 필름 속에서도 드러난 사실임).
4) 당시 미군이 떨어뜨린 폭탄 하나가 강순중씨의 담장사이에 아직도 묻혀 있다.
5) 마을 뒷산에 있는 비석에 기관총을 맞은 자국이 비스듬이 나있어 하늘에서 기관총을 쏜 흔적으로 추정된다.
6) 당시 면사무소에서 나무조각 몇 개와 보리쌀을 주면서 집을 짓고 다시 살라고 했는데 당시도 면사무소에서 지원을 해 줄 정도였으니 억울하게 당했다는 것의 반증이다.
4. 기타 제보
원당리 주민들은 인근 대평들녘으로 피난을 가던 피난민들이 폭격을 맞아 한꺼번에 사망했다는 증언도 하고 있다. ※ 강안성(76)
진주시 명석면 오미리 시목마을 기총소사 사건
1. 사건 개요
명석면이 아직 인민군에게 점령되기 전인 1950년 7월말 어느날 오후, 진주쪽에서 폭음소리가 너무 심하게 들려오자 명석면 오미리 시목마을 주민들은 미군의 폭격과 인민군의 점령을 피해 피난을 가기 위해 모두들 마을 앞에 있던 달구지길로 나섰다. 이 때 피난민 행렬 위로 대평면 방향에서 오미리 상공으로 미군 전투기 1대가 나타났다.
아무도 미군기가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던 피난민들은 그대로 행렬을 지어 피난을 가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기( '호주기'라고 불리던 F 54기 )는 시목마을(감나무골) 뒷산을 두어 바퀴 선회한 후 갑자기 피난민 행렬에 기관총을 난사하고는 팔미 방향으로 사라졌다.
이 사건으로 명석면 오미리 시목마을에서 괴나리 봇짐을 싸들고 피난길에 나섰던 피난민들과 가축들이 영문도 모르는 채 사상당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2. 피해 현황
사망자 : 강신탁(오미국민학교 6학년, 당시 13세) --- 현장에서 즉사.
부상자 : 강신범(당시 17세, 강신탁의 형) --- 기관총탄에 장단지를 맞아 장단지 살이
떨어져 나감, 현재 사망
유족 : 강석헌(시목마을 이장)
조또래(여, 당시 55세) --- 기관총탄이 젖가슴밑에 박혀 6개월 정도 치료받음,
현재 사망, 유족 : 최세균(충무해안경찰서 근무)
신기식(당시 16세) --- 오른쪽 다리에 총상, 전 시목마을 이장,
현재 시목마을에 거주.
신대식(당시 8세, 신기식의 동생) --- 다리에 총상, 현재 서울 거주.
이용돌(당시 7세) --- 사건 당시의 충격으로 정신이상,
현재 사천시 정동면 노천리 거주.
이 밖에 현장에 있던 피난민들이 파편상을 입음.
3. 현장 목격자
신현규(당시 10세, 현 60세) --- 명석면사 편찬추진위원회에 당시의 학살사건을 증언함.
4. 추가 피해
인민군 점령기인 1950년 8월, 미군기에 의한 오미리 일대 폭격이 있었지만 주민들의 대피로 폭격 당시의 피해는 없었으나 그 후 시목 새터에 떨어진 불발탄을 건드린 양만식(당시 13세, 오미국민학교 6학년 )이 사망함.
진주시 반성면 쇠골 기총소사 사건
1. 사건 개요
반성면 새골(세골) 주민들이 방공호 속으로 피난해 있던 중, 그 위로 인민군 행렬이 지나가자 미군기에 의한 무차별 폭격이 가해짐.
2. 피해 현황
조정임씨 남편 등 10여명 사망.
진주시 주약동 약골 기총소사 사건
1. 사건 개요
1950년 8월 3일(음력 6월 20일) 진주시 주약동 약골에서 미군 전투기의 기총사격으로 피난민 40∼50여명이 사망하고 50여명이 부상을 당한 사건이 있었다.
특히 당시 목격자들은 미군은 사전에 정찰기로 정찰을 마친 후 3∼4대의 전투기 편대가 두 차례에 걸쳐 진치령 터널에 숨어 있던 피난민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고 주장해 충격을 주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후 진주지역이 인민군에 의해 점령되자 진주시 강남동, 망경동, 주약동 주민 등 수백명은 진주시 주약동 약골의 진치령 터널(길이 240여m)로 대피했다. 진치령 터널에는 당시 많은 진주 주민들이 대피, 터널 안에서 숙식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더욱이 미군의 학살 전 날인 1950년 8월 2일 미군 정찰기가 야간 비행을 하면서 조명탄까지 밝히며 정찰을 실시해 계획적인 폭격을 실시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튼날 오후 5시께 진주시 주약동 방향(현재 주약동 세란병원)에서 3∼4대로 구성된 전투기 편대가 출몰해 저녁을 먹으려던 피난민들에게 무차별 기총사격에 이어 폭격까지 감행했다.
미군 전투기들은 피난민들에게 기총사격을 한 후 선회, 한 차례 더 사격을 가한 후 무차별적으로 폭탄을 투하해 진치령 터널 입구에 있던 피난민 40∼50명이 사망하고 수십여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사고 현장에서 오른 쪽 발목에 관통상을 당한 김사복씨(76, 진주시 가좌동)는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데 갑자기 주약동 쪽에서 미군 쌕쌕이 편대가 나타나 기관총 사격을 가해 수십 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했다"면서 "터널 안은 떨어져 나간 팔, 다리가 널부러져 그야말로 아수라장으로 변했다"고 회고했다.
미군의 기총사격으로 아버지를 여읜 목격자 정삼근씨(58, 진주시 주약동, 당시 9세)는 "저녁 무렵 전투기가 나타나 기관총을 난사하여 수십 명이 즉사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며 "아버지도 당시 기관총 사격을 받아 즉사해 인근 야산에 안장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목격자 김영두씨(65, 진주시 주약동)는 "사고가 발생한 지 2개월 후 철도 개통을 위해 시신 정리 작업을 위해 진치령 터널을 찾았을 때 떨어져 나간 팔과 다리가 완전히 지옥이었다"며 당시의 참혹함을 증언했다. 한편 새롭게 밝혀진 진주지역의 '약골학살'은 한국전 당시 미군의 수많은 양민학살중 정찰비행 후 자행된 계획된 학살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어 국방부 차원에서 정학한 진상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2. 피해 현황
사망 : 40∼50여명
부상 : 50여명
--- 1999년 12월 31일, 경남일보 15면 박명환 기자 ---
【7】하동지역 피해사례
하동군 양보면 장암리 기총소사 사건
1. 사건 개요
1950년 7월 31일(음력 6월 17일) 하동군 양보면 장암리 양정골에 피난을 갔다가 기총사격을 받아 총상을 입고 살아남은 권창현씨( 68, 하동군 양보면 감당리 )는 피난해 있던 양민 50여명에게 2회에 걸쳐 미군기가 기관총 사격을 가해 7명이 숨졌다고 밝혔다.
7월 30일 아군의 하동 저지선을 무너뜨리고 국도 2호선을 따라 진주 방면으로 진격하는 인민군 탄약수송 차량이 양보면 감당리 황토재 아래에서 날이 밝으면서 미군정찰기에 의해 발각되자 국도를 벗어나 인근 양보면 감당리 원양마을 대밭 속으로 숨어들었다. 이때 원양마을에 이웃해 있는 감당리 신전마을에는 "음력 17일에는 미군 폭격이 있을 것인데 우리 마을도 쑥대밭이 된다더라" 는 소문이 나돌면서 청장년, 어린이 등 50여명이 10여리 떨어진 하장암 마을 양정골로 피난을 떠났다.
이날 오전 일찍부터 미군기들이 인민군 수송차량에 폭격을 가하고 돌아갔다. 점심때쯤 돼서 피난해 있던 권씨 등은 숨어 있던 다리밑에서 나와 도로변에서 가져온 점심을 먹고 있는데 머리위로 미군 수색기가 지나가고 10여분. 곧바로 '쌕쌕이'가 날아오더니 두번에 걸쳐 기관총사격을 가하고 돌아갔다.
순식간에 점심식사를 하던 도로변은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미군기가 가고 나서보니 7명이 숨져 있었고 다친 사람은 부지기수였다.
2. 피해 현황
사망자 : 장봉애(여, 양보면 감당리 신전)
이영길(장봉애의 아들, 당시 초등학생)
김무연(여, 양보면 감당리 신전) ---> 유족 : 삼촌 신전 거주, 딸 진주 거주
김용호(당시 서울상대 3년 재학중) ---> 유족 : 형수 신전 거주,
동생/형은 미국에, 조카2명은 서울에
김희수(당시 25세 정도) ---> 유족 : 김용수(형, 사망, 부인 김해 거주)
공환석의 출가한 누이 ---> 집은 하동인데 친정에 왔다가 참변.
방갑진 ---> 유족 : 방갑조(형)
부상자 : 권창현(68세, 하동군 양보면 감당리)
최인호(52년∼53년 부산으로 이사 후 후유증으로 사망) ---> 유족 : 아들 3명
권영대(발꿈치 부상) ---> 형님이 신전에 거주
방갑조의 모친(머리 부상) 등
※ 공환석씨는 현장에서 4명이 사망하고 부상당한 후 이내 사망한 사람까지 포함하면 12명쯤 사망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3. 현장 목격자
김삼수(양보면 운암리 진암), 공환석(양보면 장암리 중하쌍), 정환복(당시 18세, 하장암 마을 이장) 정연용(당시 5세) 등
당시 5세로 현장을 목격했던 양보면사무소 정연용 계장은 "흰옷을 입고 있으면 미군기가 폭격하지 않는다는 말이 떠돌았는데 길가에 나와있던 사람 중 흰옷을 구하지 못했는지 푸른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있어 사격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고 했다.
한/국/전/쟁/중/미/군/에/의/한/양/민/학/살/경/상/남/도/대/책/위/원/회
함안지역 대책위원회 대표 김차희 의령지역 대책위원회 대표 이재기
창녕지역 대책위원회 대표 이승일 곡안리 대책위원회 대표 이만순
조장리 대책위원회 대표 조익래 마곡리 대책위원회 대표 강남덕
이목리 대책위원회 대표 김진권 상임대표 김차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