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성향의 한 대학교수는 “노무현 정권이 한 일은 그간 아무도 열지 않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는 것”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실제로 노무현 정권이 출범한 후 2년 동안 한국사회에는 그간 묻혀있었던 수많은 모순과 딜레마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이는 노무현 정권 스스로가 의도한 바도 있었지만, 통치능력 부족으로 인한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다.
취임 초 검찰 인사로 논란이 되었을 때 노대통령은 스스로 평검사들과의 토론을 자청하였다. 대통령이 손수 평검사들과 소탈한 대화에 나섰다는 점에서 일면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대통령을 지지했던 일련의 지식인 그룹에서는 이러한 대통령의 자세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었다.
첫째, 국가 최고 통수권자가 법무부장관이나 검찰총장이라는 명령체계를 뛰어넘고 직접 소통에 나섬에 따라, 행정 기강이 흔들린다는 것이다.
둘째, 토론의 과정에서 평검사들이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지키지 않았고, 대통령 역시 고압적인 자세를 풀지 않아, 국민들로부터 불안한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굳히게 했다.
이러한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여론은 소탈한 대통령에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통령의 통치스타일은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문제가 되고 있다. 시스템에 대한 이해도 없이 대중만을 상대로 선동적 정치에 치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파격적인 통치 스타일은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최근에 국무총리가 야당을 상대로 국회에서 차떼기 정당이라 비판을 한다던지, 공무원 노조가 행자부 장관을 상대로 현상수배 포스터를 배포하는 것이라던지, 크게 보면 통치 스타일의 변화에 따른 파생적인 사건들이었다.
이제 더 이상 국가의 리더들이 판에 박힌 예법에 갇혀지내기 보다는 할 말은 하고, 움직을 때는 움직이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들을 하는 것이다. 특히 총리를 비롯한 여당의 정치인들은 노대통령의 스타일을 따라하는 것이 차기 대권이나 당권 레이스에 더 유리하다는 생각을 하는 듯하다. 이런 것들 역시 짧게 보면 정략이겠지만, 길게 보면 통치 스타일의 변화에 따른 움직임들이다.
사회개혁은 진보, 국제와 경제는 보수
러한 대통령의 방식의 긍정적인 효과는 지난 2년 간 수많은 모순점들이 사회적 의제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공무원 노조 문제도 그렇고, 최근 시간강사들의 연대파업 등등,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들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다. 각 언론사들 역시 침묵의 카르텔을 깨고, 서로 비판할 것들은 비판하면서 상호 감시에 나선다. TV가 신문을 비판하고, 신문이 인터넷을 비판하고 인터넷이 TV를 비판하며 언론권력이 점차 합리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급부로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하나의 국가는 시스템으로 움직인다. 이 시스템을 개혁하려면, 현존하는 시스템보다 더 우수한 시스템을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미국에 종속되어있는 국가시스템을 동북아 중심으로 옮겨오려면, 현존하는 시스템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적 시스템을 하나하나 실천해야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준비가 없다면, 사실 상 국가시스템은 붕괴되며, 그에 따른 경제적 고통은 고스란히 서민들에게 돌아온다.
노대통령이 후보시절 늘 “미국에 당당한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지만, 시스템에 대한 준비없는 선거용 발언은 오히려 집권 이후 부담이 되었다. 미국에 당당하기는커녕 국외에서는 ‘이지맨’, 국내에서는 ‘등신’이라는 말이 그에게 돌아왔다. 최근에는 오버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한미우호 관계에 치중하며, 급기야 족벌언론의 사주를 주미대사로 임명하는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는 시스템에 대한 준비없이 덤볐다가, 결국 최소한 대미정책에 대해서는 재벌과 보수언론에게 그 전권을 다 넘겨준 꼴이 된 셈이다.
사회개혁 분야에서는 일정 정도 선동적 발언이나 대중적 소통이 필요하다. 그러나 국가 시스템의 근간을 이루는 경제정책이나 국제정책에서는 이는 거의 무용지물이다.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접근하지 않다가는 순식간에 시스템이 붕괴되며, 국제적으로는 고립, 경제적으로는 도산의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현재까지 노무현 대통령과 가장 비슷한 통치 스타일을 보여주었던 김영삼 정권이 말년에 IMF 경제환란으로 종식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국내 정치의 위기가 오면, 금융실명제, 세계화 정책 등, 아무런 철학도 없이 국제 및 경제정책의 근간을 뒤흔들면서까지 이미지 정책들을 펴오다 그 종말을 맞이한 것이다. 그 점에서 보면 노무현 정권의 앞날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사실 노무현 정권과 김영삼 정권은 공공의 비판기능을 마비시켰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김영삼 정권은 출범 때부터, 지식인과 시민운동그룹을 적극 영입했다. 또한 조중동과 방송권력과 유착하여, 원천적으로 비판을 막아버렸다. 이러한 비판기능의 마비가 정권의 파국을 불러오게 된 측면도 있다.
현재 노무현 정권도 출범부터 너무나 많은 인사들을 시민운동과 개혁언론 진영으로부터 흡수했다. 그들 개개인이야 최선을 다하고 있겠지만 남아있는 그들의 시민단체와 언론은 유착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오창익 인권실천 시민연대 사무국장도 “일부 시민단체와 노 정권 사이에는 이심전심의 교감 같은 게 보인다. 이것은 시민운동의 미래에 대단히 좋지 않다. 자칫하면 김영삼 정권과 유착했었다는 비판을 받았던 모 시민단체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정권 출범 2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제 노무현 대통령의 성향이 무엇이냐느니, 개혁의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논의는 한가해 보인다. 이미 대통령은 국가경영의 설전에 돌입한지 오래이다. 국가경영이 학생회 수준의 소꼽놀이가 아닌 이상 비판이나 정책제안을 하는 단체들도 책임있는 자세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반노 조중동과 친노 오마이뉴스 및 민언련의 문제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건데 정권은 사회개혁을 위해서라면 자신들의 기득권을 내던질 의지가 충분히 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자신들의 기득권을 버려야지만 통치의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을 정도로 시스템 통치능력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시스템에 대한 이해도가 필수적인 국제와 경제 분야에서, 그들은 늘 우왕좌왕하고 있다. 의지가 있어서 좌로 가는 것도 아니고 의지가 부족해서 우로 가는 것도 아니다. 노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이 그간 경험해온 판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큰판에 갑작스레 뛰어들며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그렇다면 정권을 바라보는 시각도 교정을 할 필요가 있다. 현재까지 조중동으로 상징되는 반노세력은 정권이 무슨 일을 하든 비판하도록 코드화 되어있다. 그들이 보기에 수준이하의 경제와 국제감각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다, 끊임없이 기득권을 파괴하는 발언과 행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홍석현 회장의 주미대사 임명으로 상당부분 그들의 불안감을 해소시켜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중앙일보조차도 노정권이 기득권을 버리면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개혁욕구와 이로 인한 혼란에 대해서는 용인해주지 않을 것이다.
반면, 오마이뉴스와 민언련 등의 친노 매체와 시민단체들은 정권이 무슨 일을 하든 이해주자는 입장이다. 민언련의 최민희 총장은 “노무현 정부가 퇴진해서 더 진보적 정부를 세울 수 있다면 고려해볼 만하다. 그러나 '로드맵'이 보이지 않는다”라며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시민단체가 정권의 운명까지 걱정한다는 것은 이미 그들의 영역을 과도하게 넘어서서 현실정치에 개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노무현 정권의 장점을 소진시키는 결과만 초래한다. 노무현 정권은 그간 그 어떤 정권보다도 성역을 깨뜨리며 나아갔다. 자신들의 칼이 될 수 있는 사법부와 검찰 등과도 마찰을 빚으며 지금 그 역풍으로 줄줄이 당선무효형을 받고 있기도 하다. 이런 정부 아래서 개혁언론과 시민운동을 한다면서 과연 정권 지키기에 급급하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히려 사회분야에서는 보다 더 강력한 개혁을 요구하고, 이미 보수층으로 완전히 넘어가있는 국제와 경제 분야에서는, 시스템을 갖추면서 정책 방향을 옮길 것을 끊임없이 주문해야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이미 개혁의 방향이나 의지를 잃어버린 인사들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퇴출시킬 것도 요구해야 한다. 정권이 이를 할 능력이 없어, 다가오는 재보선이나 지자체 선거 때, 참패를 한다면 이는 정권이 부담해야할 일이다. 시민단체와 언론은 정권이 해야할 일을 요구하는 것이지, 정권의 안위를 걱정할 것은 아니다.
노무현 정권에 대해서는 정권이 끝난 이후에도 아마 가장 많은 논란이 될 것이다. 그가 세상의 판도라 상자를 열었고, 거기서 나오는 모든 사회적 갈등과 모순을 치유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조중동은 그걸 다시 닫으라 요구하고 있고, 오마이뉴스와 어용단체는 친노단체는 능력없는 정부 편에서 더 열어보라는 주문만 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 판도라 상자의 위치 자체가 점점 더 보수 및 수구적 방향으로 가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눈을 감고 있다.
지금부터는 열 것을 다 열되, 거기서 파생되는 문제점을 실천적으로 해결하도록 노력해야할 것이며, 국제와 경제정책 등 국가 시스템의 방향에 대해서도 가감없이 비판해야한다. 그것이 앞으로 남은 3년 간, 노무현 정권을 성공시키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