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영조의 증손자(손자의 아들)이자 남연군의 넷째아들로, 왕족이지만 안동 김씨 가문의 힘에 눌려 잔칫집이나 상갓집(사람이 죽어 장사지내는 집)을 옮겨다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의 아들이 어떻게 왕이 됐을까요? 답은 왕실의 최고 어른인 신정왕후와 대원군이 안동 김씨를 쫓기 위한 계획에서 찾을 수 있어요.
풍양 조씨로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는 안동 김씨의 힘에 눌려 권력을 펼치지 못하다 철종이 아들 없이 죽자 흥선대원군과 힘을 합해 그의 아들인 명복을 왕(고종)으로 만들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조선 역사상 최초로 살았을 때 대원군(왕의 아버지를 일컫는 말)이 된 사람이 됐습니다. 무시를 당하던 왕족이 최고의 권력자로 화려하게 변신하는 순간이었지요.
흥선대원군은 아들이 왕이 되자, 고종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바로 자신이 권력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거칠 것 없는 개혁을 펼쳤어요.
먼저 60년 안동 김씨 세도정치(권력을 가진 집안이 나랏일을 마음대로 하는 것)의 본거지던 비변사를 없애고, 의정부를 부활시켰어요.
당쟁(당파를 이뤄 서로 싸움)의 뿌리인 서원을 없애려고 1871년 47곳을 뺀 600여 곳의 서원을 정리했습니다. 없앤 서원의 땅과 재산은 국가에서 관리했지요. ‘백성을 해치는 자는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내가 용서하지 못한다’는 대원군의 강한 말에 유생들은 기가 꺾였지요.
또 대원군은 양반의 부담을 늘리고, 백성을 위한 개혁을 펼칩니다. 호포법을 실시해 양인에게만 부담하던 군포(軍布)를 호포(戶布)로 바꿔 양반까지 군포를 내게 했어요. 고리대로 나쁘게 바뀐 환곡제를 상당 부분 없애고 백성들의 모금에 의해 운영되는 사창제(社倉制)를 펼쳐 탐관오리(남의 재물을 탐내는 깨끗하지 못한 관리)가 백성을 쥐어짜는 것을 막았어요. 이어 ‘동문휘고’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을 펴내 통치규범을 다시 세웠습니다. 이로써 18세기 영조·정조시대에 펼친 문화사업을 다시 꽃피울 수 있게 됐습니다.
첫댓글 자기의 고집때문에 많은 비판도 들었지만 그래도 흥선대원군때문에 우리나라가 이렇게 변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