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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농암 지명은 '네티앙'에서 검색한 농암의 지명 소개를 바탕으로 활용하여, 제가 지리적 특성을 엮어 재구성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 고장의 마을 이해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회원 여러분이 알고 계신 더 많은 자료와 이야기꺼리를 제공하여 내용을 보완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
농암리 / 종곡리 / 연천리 / 궁기리 / 내서리 / 화산리 / 율수리 / 갈동리 / 사현리 / 지동리 / 선곡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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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및 고려 초기에는 가은현에 속했던 이 지역이 고려말 공양왕(1390년경) 때 문경현에 병합됨에 따라 가서(加西), 가남(加南) 양면이 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상주군 은척의 일부와 상주군 화북의 일부를 통합하였으며 갈동리에 있는 '농바우 = 농바위(籠岩)'의 이름을 따서 농암면(籠岩面)이라 개칭하였다. 그 후 1963년 1월 1일의 행정구역 개편 때, 남동부의 민지리는 가은면에, 서북쪽의 삼송리는 괴산군 청천면(나중에 송면으로 분리됨)에 편입시킴으로써 농암면은 다음과 같이 11개 법정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농암리(籠岩里), 종곡리(鍾谷里), 연천리(連川里), 궁기리(宮基里), 내서리(內西里), 화산리(華山里), 율수리(栗藪里), 갈동리(葛洞里), 사현리(沙峴里), 지동리(池洞里), 선곡리(仙谷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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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리(籠岩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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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 농암장터> 장터(場基)
농암천변의 단구면에 발달한 마을인데 처음에 평산신씨가 이 마을에 이주,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지금의 갈동리에 해당되는 '구 농바위'에 시장터가 있었는데 현재 농암 지서 앞의 장터로 시장을 옮겨 왔으므로 '장터' 또는 '농암장터'라 하였다. 행정구역인 농암면사무소의 소재지였으므로 일반적으로 '농암'이라 지칭하였다. 1980년에 농암천의 범람으로 큰 수해를 입은 까닭에 새로 시장을 옮긴 농암초등학교앞의 '새장터'와는 구분되는 곳이므로 '구장터'라고도 부른다.
"농암"이라는 이름은 농암의 이름을 설명한 이 카페 자료실의 설명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자료실>농암의 명승과 명소> 농암이란?) 현재 농암면 소재지에서 함창방면으로 나갈 때 지나가게 되는 갈동리(농바우마을)에서 사현리 홈다리마을로 가는 도로변의 들판, 논 가운데 있는 장롱모양의 고인돌(속칭 농바우 또는 농바위)에서 비롯한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농암장터 마을 앞 냇가에 개 한 마리가 지나가는데 종곡리 괴정 뒷산에서 호랑이 한 마리가 입을 벌리고 잡아 먹으려고 노려 보는데 맞은 편 성지산(성재산, 성깨산) 밑에 았던 사자도 호랑이를 견제하면서 일격을 가하려 하자, 서로 개를 잡아 먹지 못하고 그곳에서 각각 사자(바위)와 호랑이(바위), 개(바위)가 그대로 굳어버려 바위가 되었다고 하며 현재까지도 그 형태를 갖추고 있다 한다.
어린 시절에 개바위 부근 농암천에서 물놀이를 하거나 물고기를 잡으며 놀았던 추억이 많다.
청룡끝 · 청룡등끝
농암초등학교의 앞쪽에 자리 잡은 새장터 뒤로, 가실목의 "찬샘이"에서 성지산 아래쪽으로 형성되어 있던 마을 이름이다. 마을 앞의 큰 느티나무는 동제(洞祭)를 지내던 동고사 나무인데 오월 단오 즈음에는 그네를 매어 놓고 마을 사람들이 그네뛰기를 즐기던 곳이다.
이곳에 고려말 청룡사(靑龍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여 청룡골이라 하고 풍수지리설에 의한 좌청룡의 등 끝에 위치한다고 하여 "청룡끝", 또는 '청룡등끝'이라 부르기도 한다.
찬샘>찬샘이, 서원촌(書院村)>서원땀, 가실목>가실매기>가항(加項)
이 마을 동북쪽에 차가운 물이 솟아나는 샘이 있으므로 "찬샘" 또는 "찬샘이"라고 불렀다. 이곳은 문경이나 가은쪽에서 뻗어온 고생대의 석회암층이 농암초등학교의 뒷산 까지 뻗어 내려 있어서 석회암의 활발한 용식작용으로 지하수로를 형성하여 흐르던 물줄기가 지표로 솟아 나오는 용천(溶泉)의 하나이다. 가실목 고개 너머쪽에도 불당골에서 물뫼마을로 이어지는 골짜기에 이런 샘이 있어서 생수를 길어 가는 사람들이 모인다.
찬샘(寒泉)과 같은 이러한 용천은 식수원으로 이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연중 수온이 일정하므로 외기 온도와 차이가 커 여름철에는 차고 겨울철에는 따뜻하다. 그러므로 여름에는 땀띠를 치료하는 옷샘으로 이름 값을 하였고, 겨울에는 부녀자들의 빨래터로 인기가 있었다.
성재산 동쪽 기슭으로 용출하는 가은읍 민지리 물뫼 마을의 옻샘(지금은 물뫼송어양식장으로 이용), 가은읍 작천리의 무두실 찬샘(문경수산의 송어양식장으로 이용), 가은읍 성저리, 성밑마을의 도로변에 있던 샘과 같은 것들이 유명하며 호계면의 쌍천(이곳도 송어양식에 이용중)과 마찬가지이다.
찬샘으로부터 뒷산 기슭을 따라 서쪽으로 조금 내려 오면 "서원땀"이 있다. 1550년경 안씨문중의 사직(司直), 신씨문중의 처사(處士), 성씨문중의 추담(秋潭) 등 삼현(三賢)이 이곳에 '찬샘(寒泉)'이라는 지명에서 이름을 따와 한천서원(寒泉書院)을 세워 후학을 양성하였던 마을이라 하여 서원촌(서원땀, 서원마을, 서원말)이라 한다.
가실목은 가실+목의 합성어다. "가실"이란 고어로 "마을"을 이르는 말인데 서원땀 마을로부터 청룡끝 마을로 이어지는 가운데, 즉 찬샘이 부근이 목처럼 잘룩하게 좁아지는 까닭에 "가실목"이라고 부른다. 가은읍과의 경계에 가실목고개가 있다. "가실목"을 부를 때 '가실매기', '가실메기' 또는 이두식 한자어로 '가항(加項)'이라고도 쓴 것이다.
또한 동네 앞 300m 지점에 위치한 성지산에는 "마고(麻姑)할미"의 전설이나 얽혀 있기도 하고 후백제의 시조 견훤이 쌓았다기도 하는 성의 흔적(성터, 城址)이 남아 있어 "성지산" 또는 성재산(城在山)이라고 하며 이 성을 견훤성 또는 백제성, 천마산성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성지산은 농암천이 크게 곡류하는 꽃비리(벼랑)를 지나 섬안을 거쳐 더대마을까지 이어지면서 그 가운데 우뚝 서 있는데 섬안의 뒷산을 '쪽금산' 또는 '천마산'이라고 달리 부르기도 한다. 가은읍 민지리의 '섬안'마을은 성지산을 안고 크게 감입곡류하는 농암천이 안동의 하회(河回)마을이나 예천의 회룡포처럼 물돌이동을 이루어 마치 섬처럼 이루어졌던 까닭에 섬의 안쪽에 있는 것과 같다고 하여 '섬안'이라는 지명이 붙었다. 우리 나라에는 감입곡류하는 하천이 많아서 산간지역 곳곳에 이런 지형이 있으며 지명은 하회 또는 수회(水回), 수곡(水曲)이라는 이름이 많이 쓰이는데 상주시 내서면에서는 섬안>서만이라고 바뀌어 '서만리'라는 행정구역 명칭으로 쓰이고 있기도 하다.
동발이> 동바리, 가땀
동바리 마을은 농암초등학교에서 연천리로 돌아서 올라 가는 길목에 있는데 다리 건너 100m쯤에는 종곡리 북실 마을이 있다. 마을 앞 농암들에 물을 대기 위하여 종곡리 북실과 농암리 사이에 설치한 관개용수 인입용 보(洑, 또는 湺)의 "동발"이 세워져 있는 곳이라고 하여 마을 이름을 "동발이" 또는 "동바리"라 불렀다.
'동발'이란 광산이나 터널공사에서 굴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갯다리처럼 세우는 버팀목을 이르는 순 우리 말이다. 이곳 동발은 장터나 농암초등학교쪽으로 부터 말바위 마을이나 궁터 마을로 가는 사람들이 (연천리 마을로 돌아서 올라가지 않고 말바위쪽으로 곧장 질러 가기 위하여 ) 궁터와 연천에서 내려오는 물이 합쳐진 궁기천을 건너기 위하여 알게 모르게 지나 다니던 곳이다.
동바리에서 끌어 들인 물이 흐르는 도랑가의 아래쪽에 농암초등학교쪽으로 새로 들어섰던 몇 채의 집이 있었는데 도랑가에 있는 작은 마을이라는 뜻으로 "가땀"이라고 했다.
새장터
처음에는 현재의 갈동리인 (구)농바위에 5일과 10일에 열리는 정기시장( 5일장 )이 서다가 조선 말기에 현재의 농암지서 앞, 청암중고등학교 옆의 농암리로 장터를 옮겼다. 그후 농암장터는 농암 명물인 곶감, 콩, 고추, 담배(엽연초), 고치, 수공예품, 한우(소), 산나물 등 여러가지 특산물을 수집하여 도시로 내 보내거나 산촌 주민들에게 필요한 생활필수품을 거래하면서 번창하였다.
그런데 문경지역에 쏟아졌던 1980년 7월 22일의 큰 폭우로 인하여 서쪽에서 흘러오는 속리천과 북쪽에서 내려오는 궁기천이 합류하는 농암1리의 농암 장터 일대가 큰 수해를 입었다. 당시 소백산맥이 둘러싸고 있는 지형적인 특징에 겹쳐 집중호우(集中豪雨)가 쏟아져 도장산- 청화산일대에 쏱아진 많은 물이 속리천을 따라서, 연엽산-조항산-당재 이남의 큰 물은 궁기천을 따라 내려와 농암리에서 합류하는 바, 곡류하는 섬안 일대로의 배수량에 비하여 유입량이 워낙 많았기에 농암리와 종곡리 부근 일대에서 범람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한우물숲이 훼손되고 동바리마을의 물가쪽 집들과 농암장터의 하천변 여러 집들이 폐허로 변하게 되자 농암면사무소와 농암초등학교 앞에 있는 현재의 농암2리 지역으로 시장을 옮기고 '새장터'라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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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곡리(鐘谷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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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실, 골마
동바리 마을에서 서쪽으로 궁기천을 건너 약 100m지점에는 흔히 '북시골'이라고 부르는 골짜기 앞에 형성된 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의 모양이 종모양을 이룬 까닭에 "북실"이라고 하고 쇠북종자를 써서 종곡(鐘谷)이라고 하였다.
북실마을에서 서북쪽으로 약 200m정도 더 들어가면 연엽산 자락인 뒷산의 아래에 작은 '골짜기마을'이 형성되어 있어 '골마'라고 하였다. 이곳은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전에 안동김씨가 처음으로 이주, 정착하여 개척하였다 하며 작은 저수지가 있다. 옛날에는 이곳에 종각이 있었다고도 전한다.
그러나 연엽산 아래, 궁기천의 서쪽편 낮은 단구면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로 일찍이 농업생산성이 높고 살기 좋은 곳이었기 때문에 선사시대 주민들의 생활 흔적인 고인돌과 선돌이 1980년대 초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예전에 마을을 보호하기위하여 개울가에 쌓았던 천방(川防)은 모두 사라지고 단구면 위에 자리하고 있던 여러 기의 고인돌(支石墓)도 농업기반공사의 경지정리 과정에서 망실되고 없어졌다.
북실 마을과 골마는 종곡1리로 분류된다.
찬우물, 한우물>하느물, 한천(寒泉)·한정(寒井)·대정(大井)
종곡3리인 이 마을은 약 500년전에 안동권씨가 이주하여 개척하였다고 네티앙의 자료에 기록되어 있으나 이곳 출신의 농암사랑 회원(운당 이헌채)님의 제보에 의하면 한우물은 안동권씨가 처음 이주하여 개척한 마을이 아니고 정착한 순서가 1.전씨, 2. 인동장씨, 3. 예안이씨, 4.단양우씨, 5. 순천김씨 라고 합니다. 마을 한 가운데 수원(水源)이 좋고 물도 차가운 샘이 있었다 하여 찬우물> 한우물(寒井) 또는 큰 우물이라는 뜻의 한우물(大井)이라 부르다가 이것이 연음현상으로 변음되어 하누물 또는 하느물( 한우물 )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마을 한 가운데 있던 큰 우물에 지나가던 스님이 빠져 죽어서 샘을 묻어 없앴다고도 한다. 지금은 마을 앞 속리천이 농암천과 합류하는 강변에 500년 이상된 노송과 팽나무를 비롯하여 많은 나무들이 500m 길이의 큰 숲을 이루고 있어서 '한우물숲' 또는 대정공원(大井公園)이라 부르고 있다. 이 숲 공원은 단오제를 비롯하여 농암면민들의 주요 행사가 열리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우복산으로 이어지는 마을 뒷산에는 예로부터 여름 철새인 백로(왜가리)들이 해마다 찾아와 명물이 되고 있다.
한우물 마을은 해발고도 200m 정도의 산기슭에 줄지어 길게 발달해 있는데 하담(하땀), 중간담(중땀), 새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뒷발이 > 뒷발이, 승팔(升八)
농암장터 서쪽, 농암천(궁기천) 건너 마을 이름으로 행정구분으로는 종곡2리에 해당된다. 이 마을은 괴정 마을에서 부터 점차 북쪽으로 확대되어 왔는데 최근에는 콘크리트다리가 새로 놓여진 농암지서 건너편으로 까지 확대되고 있다. 본디 이 마을은 약 500년전에 김해김씨가 이주, 정착하여 개척한 마을이라고 한다. 괴정(槐亭)마을에서 북서쪽 50m 지점부터 이어지는 우복산(牛伏山)이 있는데 그 산 모양이 흡사 엎드린 소의 형상인 바, 이 마을은 그 소의 뒷발부분에 해당된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뒷발이 > 뒷바리'라 부르게 되었다. 그것이 발음이 변하여 '뒤빠리' 또는 '디빠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뒷발'이 "됫팔"로 음역되는 과정에서 잘못 한자화되어 승팔(升八)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표현이다.
괴정(槐亭)
함창에서 갈동리(농바위)마을 거쳐 농암장터를 향해 들어 올때, 속리들을 지나온 농암천(속리천)에 가로 놓인 농암교를 건너면서 바로 만나게 되는 마을이다. 한우물 숲(대정공원)옆에 발달한 이 마을은 옛날부터 느티나무가 많아 나무 밑이 흡사 정자와 같다 하여 붙여진 마을 이름이라고 한다. 지금은 마을 뒤의 바위 벼랑위에 '진향루'라고 하는 정자가 세워져 있어서 얼핏 '괴정'이라는 이름과 어울리는 모습이다.
아랫담 · 하담
괴정에서 서쪽으로 150m쯤 가면 한우물 숲이 바라보이는 곳에 이 마을이 있는데 하느물(한우물) 아랫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아랫담, 하담이라 한다. 이 마을 뒷 산의 소나무숲에는 1910년경부터 하얀 백로떼가 찾아와서 번식하고 서식하였는데 독한 황새 똥 때문에 지금은 나무가 고사하고 도래하는 백로의 수도 많이 줄어 들었다.
중간담 > 중담
아랫담에서 남서쪽으로 100m 정도 지점에 위치하며 하느물 마을의 중앙에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중간담, 또는 중담, 중땀이라고 한다. 이 마을에 있는 큰 우물 때문에 한우물, 하느물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새터(新基)
중간담에서 서쪽으로 600m 정도 가면 새로 생긴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을 새로 형성된 마을이 라 하여 새터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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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리(連川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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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바우·마암(馬岩)
마을 남쪽 200m 지점, 궁기천의 하천변에 큰 바위 절벽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이 바위에서 한 마리의 용마 또는 준마가 나왔다 하여 마을 이름을 "말바우"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전설에 의하면 신라 말엽에 말바우에서 솟아난 준수한 말이 연천리 벌마 마을 일대를 휘젖고 다녔는데 당시 궁터에서 군사를 훈련시키던 견훤이 이 소문을 듣고 그 말을 길들여서 타려 하였다. '용마나면 장군난다'고 하는 말이 있으니 견훤은 그 말을 잡아서 용마가 맞는지 확인해 보려고 했다.
그는 말이 빠른가 화살이 빠른가를 시험하기 위하여 활을 쏘는 동시에 말을 달려 자기의 고향(가은의 작천리 맞은 편, 영강 건너 마을, 견훤의 아비였다는 지렁이가 있었다고 전는 금하굴이 남아 있다.) 동네까지 쏜살같이 달려 가 보았으나 화살이 보이지 않자, 말이 화살보다 느려서 누군가가 화살을 뽑아간 것이라고 판단하고 '성질만 나쁜 쓸모없는 말이다' 하여 말의 목을 내리쳤다고 한다.
그런데 말 목을 베는 순간에 "슈웅"하고 화살이 견훤 앞의 소나무에 와 꽂혀 "아차! 내가 경솔하여 아까운 준마를 잃게 되었구나 "하고 탄식하며 후회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후로부터 말이 나왔던 바위를 말바위라고 하고 말의 목을 쳐서 없앤 곳을 "아차"라고 명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명장난데 용마난다'는 옛 이야기를 전하는 어른들은 이때 견훤이 말바위에서 나온 말을 잘 조련하여 썼더라면 3국 통일의 위업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아쉬워 하였다.
연천2리인 말바위 마을은 해발고도가 200m내외의 산촌으로 말바위에서 서쪽으로 올라가면 궁터마을, 서북쪽으로 올라가면 고모재 마을과 고모재광산으로 연결된다.
벌마, 벌담 > 벌땀, 하땀
말바우에서 동쪽으로 400m 지점의 벌판에 마을이 생겼다 하여 벌마, 벌땀이라 하게 되었다. 말바위에서 나온 야생마(준마)가 벌로 날뛰던 곳이라고 하여 벌마라고 한다는 전설도 있다. 이 마을은 궁기와 고모재에서 동남쪽으로 흘러 나온 궁기천 물과 당재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나온 연천 마을의 물이 합류하는 곳이므로 홍수시에 두 하천에서 흘러온 퇴적물이 쌓여서 들판이 형성된 곳에 마을이 들어선 것이다. 궁기천은 이곳에서 부터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흐른다.
상담 > 상땀, 한가실, 항가실 중담 > 중땀
상담 마을은 달리 "한가실"이라고도 하는데 우리 고어에서 '한'은 '크다'는 뜻이고 '가실'은 '마을'을 이르니 결국 '큰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 마을에는 규모는 적지만 농업용수를 공급하던 '한가실 못'이 라는 저수지가 있었다. 동네 위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상담'이라고도 하는데 경음화하여 '상땀'이라고도 하고 상담과 벌마의 중간에 있는 마을은 동네 중간쯤에 있다고 하여 '중담, 중땀'이라 한다.
마을에서 동북쪽으로 뒷산을 넘으면 가은읍 성유리의 불무골(아마도 철을 생산하던 야철지가 있었고 그때 밤새워 풀무질을 하던 곳이므로 '풀무골'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전해오다가 불무골이 된 것이리라)로 통하고 북쪽 뒷산인 당재산을 넘으면 가은읍 죽문리(대문이)로 통한다. 당재 너머에는 건천사(乾川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새터(新基)·구새터(舊新基)
연천1리에 속하는 마을인데 구새터 앞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터라 한다. 새터 마을에서 북쪽으로 200m 지점, 당재로 올라가는 길목에 작은 동네가 있는데 '새터'가 생기기 전의 새터'라고 하여 '구새터'라고 한다. |
궁기리(宮基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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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터골 > 이터골, 고기(古基)
후삼국시대에 후백제의 시조였던 견훤이 이곳에서 많은 군병을 모집하여 훈련한 곳으로 본궁(本宮)을 설치하였던 '옛터'라 하여 한자어로 '고기(古基)'라 하고 그 후 속칭 '이터골' 혹은 '옛터골'로 불리어지고 있다. 이 부락은 경북과 충북을 경계로 한 험준한 조항산(953.6m)의 동남쪽 1500m의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조그마한 마을로서 지금으로부터 약 390년전 충북 괴산에서 경주이씨 일족이 피난하여 개척한 마을이라고 한다.
상궁기(上宮基) > 상궁, 상땀 > 웃땀
이터골 즉, 고기(古基)에서 남동쪽으로 500m 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를 비롯하여 소백산 줄기의 심산 오지인 이 일대에 견훤이 궁궐도 짓고 군병도 훈련하던 곳이라 하여 궁터(宮基)라 명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 3개의 자연부락 중 가장 상부에 위치하였다 하여 웃땀, 상궁, 상궁기라고 불렀다. 동남방으로 500m쯤 아래에 포장도로로 연결된 중땀(중궁기) 마을이 있으며 이 길은 중담과 말바위마을, 연천리(벌마)를 지나 농암면 소재지로 이어진다.
상궁기에서 서북쪽으로 험한 산길을 따라 갓바위재를 넘어가면 채석장지역을 거쳐 충북 괴산군 청천면에 속하는 이평리(이 마을에도 농암리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이 있어서 주목을 하게 된다.), 또는 삼송리(1963년 이전까지는 농암에 속하였던 마을)에 닿거나 송면저수지를 거쳐 상주군 화북면 입석리의 의상골로 통한다.
불당곡(佛堂谷), 절골 · 절터골
옛터골과 상궁기 사이에서 오른쪽 500m 지점의 조항산 줄기 자연봉 중턱의 폭포가 있는 계곡에 신라시대의 명승 원효대사가 조그마한 절을 건립하여 조선 중엽까지 있었는데 이 절에 빈대가 너무 많아 절을 태워 버렸다는 전설이 있다. 빈대 잡으려다가 초가삼간 다 태운다는 말도 있는데...
이 계곡을 불당골(불당곡)이라 하고 절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절골'이라고도 하며, 7~8가구의 화전민들이 생활하다가 화전정리가 이루어진 현재는 황폐화된 곳으로 가끔 기왓장과 주춧돌이 발견되어 옛 자취를 희미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
중궁기(中宮基), 중궁, 중땀
상궁기에서 남쪽으로 400m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서 3궁기 마을 중 중간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중땀, 중궁, 중궁기라 부른다.
하궁기(下宮基) > 하궁, 아랫땀, 새터
중궁기에서 동쪽으로 400m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서 3개소의 자연부락 중 가장 아래 쪽에 있다 하여 아랫땀, 하궁, 하궁기라 부르며 궁기리의 자연부락 마을 가운데 가장 늦게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새터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마을의 해발고도는 약 230m이다.
고모재(古毛嶺) · 고모치(古母峙) · 고모(姑母)
말바위 마을에서 서북방으로 약 2.5km쯤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좁은 계곡에 하천을 따라 길게 발달한 작은 마을이 나오는데 이 마을이 고모재(고무재)마을이다. 이제는 충북 괴산 땅이 되어버린 삼송리로 넘어가는 고모재의 해발고도는 670m이며 고모재의 동남쪽 아래 첫마을인 고모재 마을의 해발고도는 약 250m 내외 지역이다.
궁기 뒤편 깊은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경북과 충북을 연결짓는 12㎞의 험준한 준령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고모와 부모없는 질녀가 오두막에서 가난하게 생활하다가 질녀가 우연히 병사하자 고모는 슬픔을 못 이겨 식음을 전폐하고 험준한 준령 상봉에 올라가 질녀의 이름을 부르며 수일을 지나자 고모도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었다. 그 뒤 후세인들이 이 고모의 애처로운 넋을 달래기 위하여 이 준령의 명칭을 고모재라 하였다 한다. |
내서리(內西里) |
광정(光亭) · 광대정(光大亭)
농암면의 서쪽끝인 내서리 북서쪽 끝에 있는 마을로서 역천 송명흠(宋明欽)의 선고인 시요(詩堯) 송좌묵(宋佐默)이 숙종29년에 역천정(역泉亭)을 건립하였는데 영조대왕이 사도세자를 죽이려 할 때, 사도세자의 사부인 이조판서 송명흠이 영조대왕에게 '미문살자지악(未聞殺子之惡)이어늘 전하하인살자호(殿下何忍殺子乎)이까'라고 직언한 후에 이 정자에 은거하여 독서하며 후진을 양성하니 명성이 높은 정자 마을이라 하여 광정(光亭) 또는 광대정(光大亭)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서북쪽의 청화산으로부터 남쪽의 도장산으로 이어지는 경치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팔역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 수록된 길지(吉地)인, 용유리(龍遊里)와 병천(竝川)이 있는 살기 좋은 마을이다. 현재 이곳은 개천과 수석이 아름답고 평산신씨가 주로 살고 있는 마을이다.
서당들
청화초등학교가 있던 곳의 남쪽으로 약 400년전 이 마을에 서당을 세워 후진을 양성하였다 하여 서당마을 > '서당마' 또는 '서당들'이라 부르고 내서리에서 으뜸가는 마을로서 경주김씨 4세대가 1800년경에 정착하여 마을을 발전시켰다고 한다.
다락골, 누동(樓洞)
농암면의 서남단에 위치한 도장산(道藏山 827.9m)의 동남쪽 기슭인 이곳은 골짜기의 해발고도가 300m에 이르는 까닭에 다른 마을에 비하여 다락처럼 높은 곳에 있다 하여 '다락골'이라 는 이름을 가졌다 한다.
약 400년전 이 마을의 개척자 전주최씨도 하늘 아래에서 가장 높고 깊은데 있는 마을이라 하여 다락골이라 불렀다 한다. 내서리의 남쪽부분인 이곳에는 옛 청화초등학교의 도장분교였던 곳을 활용하는 "다락골 수련원"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3.5km쯤 가면 서재 마을이 나오고, 동남쪽으로 1.8km쯤 가면 윗다락골(웃다락골) 마을이 나온다. 웃다락골은 해발고도가 300m가 넘는다.
더 남쪽으로 올라가면 상주군 외서면 서북단의 대전리 갈골마을(작은 분지로서 특정 종교집단인 '한농'의 공동생활터전이다)과 만나는 서재다락골(서재다리골이라고도 하며 농암면의 가장 남쪽 지역이다) 마을이 나온다.
반달골 · 밴대골(고개)·반월(半月)
약 400년전 이 마을의 개척자 경주김씨가 마을 입구의 산이 반달처럼 생겼다고 하여 반달골이라 불렀다고 하며 고개의 형태가 반달모양이라 하여 반달고개라 하다가 후에 변음되어 밴대재(고개)로 되었다 한다.
서재, 서령 마을
도장산 남쪽으로 서관령 밑에 있다 하여 서재라 하고 다락골에서 서쪽으로 약 5㎞ 떨어진 마을로 상주군 화북면과 계천 하나를 두고 경계를 이루고 있다.
속리들 > 속릿들
약 500년전 남양홍씨가 이 마을을 처음으로 개척하여 속리산 끝에 마을이 생겼다고 속리들 > 속릿들이라 한다. 청화초등학교 남쪽의 서당들에서 서쪽으로 500m 쯤 떨어진 곳에 내서1교를 통하여 속리천(농암천)을 건너면 이 마을이 있다. 최근에 전통 한지(韓紙)를 만드는 곳으로 이름났다.
쌍룡(雙龍)
옛날에 이 근처에 있는 용초(龍湫, 이는 '용의 꼬리'라는 뜻으로 용이 승천할때 용꼬리가 올라가는 모습이라로 하여 전국 곳곳의 작은 폭포를 이르는 말이다.)에서 쌍룡이 났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쌍룡'이라 하고 속릿들 서쪽으로 약 1㎞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다. |
마을 앞에 사우정(四友亭)이라는 작은 정자가 있고 그 아래에 깊고 푸른 소(沼)가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네가지 벗(四友)이란 고산 유수(高山流水)와 명월 청풍(明月淸風)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이 마을에서 남쪽으로 가면 다락골이고 서쪽으로 농암천(속리천)을 따라가면 쌍용터널과 쌍용계곡을 지나 용유리 병천으로 이어진다.
화산리(華山里) |
귀밑 · 괴밑 · 괴하(槐下)
마을 뒤에 마치 소가 엎드린 모양과 같은 우복산(牛伏山, 해발고도 382m)이 있는데 이 마을의 위치가 마침 그 소의 귀에 해당되는 곳 아래(산밑)에 있어서 마을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율수리에서 내를 건너 북쪽으로 5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1700년경에 여흥민씨 4세대가 이주.정착한 마을이라 전한다.
중리(中里) · 내중리(內中里)
농암초등학교 청화분교장이 있는 마을이다. 마을의 해발고도는 대략 190m 내외이다. 지금부터 약 600여년전 이름 없는 한 승려가 개척하였다고 하여 중마을(중리 - 僧里)이라 하였다는 전설도 있고, 동네가 청화산 밑에 있는 중간마을이라 하여 중리라 했다고도 한다. 이 마을 서쪽으로 약 200m 가면 뒷마가 있고 평산신씨가 1800년경에 이곳으로 이주.정착하면서 마을이 발전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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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파수(三派水)의 전설> 소재지에서 산간석로(山間石路)를 따라 4㎞쯤 가면 청화산 동쪽 기슭에 큰 마을이 있다. 이 마을 앞에 세 갈래로 한없이 맑게 솟아나는 우물이 있는데 이를 삼파수(三派水)라 한다. 전설에 의하면 조선조 중엽 어떤 명풍수가 명산대첩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청화산 시루봉 줄기의 영산봉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동쪽에 명당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내려와 보니 바로 그곳에서 맑은 정화수가 용솟음 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지관은 대명당 터에서 물이 솟아나는 것을 보고 애석하게 여겨 우물물 줄기를 세 갈래로 갈라 놓았는데 이를 삼파수라 한다. 상류는 식수로, 중류는 농업용수로, 하류는 역시 식수로 이용하였는데 어느날 상여가 이곳으로 지나가니 그렇게 맑던 우물물이 갑자기 누런 물로 변하여 온 마을이 식수난을 겪게 되었다 한다. 그러던 어느날 마을의 어느 노인이 목욕재계하고 제수를 차려 용왕님께 제사를 지냈더니 맑은 물이 다시 솟아났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청화산(靑華山)의 전설> 백두대간이 뻗어내려 청화산을 이루고 다시 뻗어내려 속리산을 형성하였으니 청화산은 속리산과 함께 이곳 2대 명산의 하나이다. 전설에 의하면 청화산이란 이름이 지어진 유래는 수십리 밖 어디에서 바라보나 항상 화려하고 푸르게 빛나고 있으며 시루봉도 장엄한 자세로 그 위엄을 떨치고 있다 하여 청화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 산을 중심으로 산재해 있는 부락 이름들도 청산리 또는 청화동으로 불려지고 있으며, 청화정, 청화연이란 명칭도 이 산의 이름을 따서 부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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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계동(蓮溪洞) · 내하리(內下里)
화북쪽에서 농암천 상류인 속리천이 흘러 오다가 쌍용계곡을 빠져 나오면서 다락골물, 청화산아래 시루봉물, 율수의 샛골물과 합류하면서 처음으로 비교적 넓은 퇴적지형을 형성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논농사와 밭농사가 성하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곳이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고 마을 밑에 맑은 물이 흐른다고 하여 연계라 하고 남서쪽으로 내를 건너서 약 300m 가면 중리가 있다.
상비치(上飛雉) · 청화(靑華) · 중비치(中飛雉)
청화산(984m)과 도장산(827.9m) 줄기의 중간에 광정으로 넘어가는 비치재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꿩이 산쪽으로 날으는 형상의 지형이라고 하는 풍수지리상의 '비치우산혈(飛雉于山穴)'에 있다 하여 비치(飛雉)라 하고 위쪽에 위치한 마을을 상비치, 남쪽으로 약 1.5㎞ 지점의 아랫마을을 중비치라고 한다. '비치'가 구개음화하여 '비티'라고도 한다.
청화는 천연기념물230호인 농암반송이 늠늠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는 마을이다.
삼화실, 상삼화(上三花)·하삼화(下三花)
이 마을 뒷산이 청화산이고 산봉우리에 세송이의 연꽃이 있었다 하여 삼화실, 삼화리(三花里)라 하였다. 동네 위쪽 마을을 상삼화라 하고 200m 쯤 떨어진 아랫마을을 하삼화라 부르게 되었다. 1500년경에 평산신씨가 개척한 마을이라고 한다.
<삼화사경(三花四景)> 화산청풍(華山淸風) 연계명월(蓮係明月) 북실종성(北室鐘聲) 비치주양(飛雉走揚)
뒷 마
중리 마을에서 200m쯤 가면 산기슭에서 동서쪽으로 길 게 뻗친 마을이 있는데 중리마을 뒤편에 있다 하여 뒷마라 하고, 이 마을 동쪽 끝산 밑에 청화초등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은 평산신씨와 안동권씨가 처음으로 이주.정착하였다 한다. |
율수리(栗藪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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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소·밤수(栗藪)·상율(上栗) 이 마을은 1400년경에 평산신씨가 처음으로 이주.정착하였다 하며 마을 앞 방천 밑 뒷산에 밤나무 숲이 우거져 있고 마을 전체가 밤나무 숲으로 덮여 있어 밤소라 하였으며 후에 밤수, 상율로 개칭되었다.
감막·시막(枾幕)·하율(下栗) 옛날 동네 앞 들판에 감나무가 많아 움막을 치고 감을 지켰다 하여 감막 또는 시막이라 하였고, 밤소 아랫마을이라 하여 하율이라고도 한다. 지금도 이곳은 감의 생산지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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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동리(葛洞里) |
갈골(葛谷)·갈동(葛洞) 현재 농암면 소재지로부터 남쪽으로 약 2.5㎞ 지점의 장산(큰산) 밑에 마을이 생겼는데 당시 칡덩굴이 산천을 덮었던 지역의 마을이라 하여 갈골 또는 갈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웃갈골·웃땀 갈골에서 남쪽으로 2㎞ 지점의 마을을 웃갈골 또는 웃땀이라 하는데 마을 입구는 극히 협소하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제법 넓은 들이 있고 뒷산이 상주군 외서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농바우·농암(籠岩)·구농바우·농상리(籠上里) 전설에 의하면 옥황상제가 하늘나라에서 죄를 저지른 선녀를 벌하기 위해 지상으로 내려보낼 때 천마(天馬)에다 바구니 2개를 실어 내려보냈는데 하나는 농바우 마을에 두고 다른 하나는 가은읍 민지리에 두어 바위로 변했다. 농암면쪽 바위가 장롱(欌籠)처럼 생겼다고 하여 이 마을을 농바우라 하였으며 뒷날 면(面)의 이름도 이 바위(籠岩)에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이곳 농바우 마을의 입지는 속리천과 궁기천이 합류하여 이루어진 농암천의 왕성한 퇴적작용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그러므로 토지 생산성이 높아서 일찍이 선사시대부터 거주지로 선택되어 농암지역 개척의 시발점이 된 지역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농바우를 상징물로 사용하는 지명인 '농암'이 사용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본디는 이곳이 중심지였으나 북쪽으로 농암들이 개척되면서 조선시대 말에는 농암천 건너에 5일장 장터가 생겼는데 상업의 발달과 함께 장터 자리로 지역 중심지가 이동하였는데 그 때 지명도 함께 이동하여 그곳이 농암리가 된 것이다.
새동네·새마 홈다리를 지나서 도로를 따라 300m 정도 올라가면 좌측산 중턱에 1980년 7월 22일 가은과 농암지역에 대폭우로 가옥이 유실되자 새 마을터를 잡고 현대식 건물 9동을 건축하여 평산신씨가 이주.정착하게 되었다. 이때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동네 또는 새마라 부르게 되었다. 홈다리 상신원(相信園) 입구에서 농암면 소재지 쪽 도로를 따라 100m 정도 가면 도로 양편에 5,6가구가 있는데 이 마을을 홈다리라 하며 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긴 홈다리를 설치하였다는 이유로 마을 이름이 홈다리가 되었다 한다. |
사현리(沙峴里) |
샛골·봉동(鳳洞) 이 마을 동쪽에 매봉산이 솟아 있고 복치혈(伏雉穴)이 있다 하여 샛골 또는 봉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주막담에서 동쪽으로 800m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이다. 사그막·사기막(沙器幕) 샛골에서 동쪽으로 약 1㎞ 지점에 있는 마을로서 옛날에 이곳에 사기그릇을 굽는 막이 있었다고 하여 사기막 또는 사그막이라 불렀다 한다. 바구우지·바고지(朴古地) 옛날 이곳에 박씨가 처음으로 이주.정착하여 생활하였다고 하여 바고지(朴古地)라 하였으나 지금은 박우지라 부르며 주막담에서 약 500m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서 상산김씨가 살고 있다. 주막담·중앙동(中央洞) 이곳은 농암, 선곡, 함창방면으로 가는 삼거리 분기점에 위치하여 옛날부터 주막이 있고 사현리의 중앙마을이라 하여 주막담 또는 중앙동이라 부른다 한다. 현재 이 마을에서는 전통 옹기를 굽고 있다. 산수골·산수동(山水洞) 산이 깊고 물이 맑아 아름다운 마을이라 하여 산수골이라 하고 주막담에서 5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상신원(相信園) 1954년 4월 1일 음성나환자촌을 설립하여 마을명을 상신원이라 하고 처음에는 50가구였던 것이 현재는 30가구 정도 생활하고 있으며 전 주민이 천주교를 신봉하고 양축업을 하며 소득을 높이고 있다. 홈다리 남쪽으로 100m 정도 가면 오른쪽 계곡에 상신원 입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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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동리(池洞里) |
못골·지동(池洞) 뭉우리고개(雲峴)에서 남쪽으로 1.5㎞ 정도 새로 생긴 도로를 따라 가면 이 마을이 위치하고 있는데 옛날에 못이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못골 또는 지동이라 하였다 한다. 웃땀·아랫땀 지동리와 같은 마을인데 마을이 길게 뻗쳐 형성되었으므로 위쪽의 마을을 웃땀이라 하고 의성김씨가 주로 살고 있으며, 아래쪽에 있는 마을을 아랫땀이라 하고 홍씨가 많이 살고 있으며 주업은 농업이고 한때는 양잠업으로 소득을 크게 올렸었다. 선바위·입암(立岩) 1800년경에는 10여개의 바위가 서 있었는데 현재는 다 쓰러졌다. 옛날에 선돌이 있던 마을이라 하여 선바위 또는 입암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선곡리 머지에서 약 800m 떨어져 있으며 상주군 은척면과 농암면의 경계에 위치한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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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곡리(仙谷里) |
밀개동 바구지 고개에서 은척방면으로 약 2㎞ 떨어진 도로변에 위치한 밀개 모양의 마을로서 본래 지동리에 속하였으나 1962년 선곡리로 편입되어 현재 선암초등학교가 위치한 마을이다. 멀베이 머지 북쪽으로 100m 정도 떨어져 있는 마을로서 사현리에서 산 고개를 넘으면 첫 동네이다. 머지마을에서 먼 방향에 떨어져 있는 마을이라 하여 멀베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평산신씨가 많이 살고 있다. 머지·선계(仙溪) 밀개동에서 서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한 마을이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두 선비가 이 마을을 지나다가 마을을 쳐다보며 뭐지 뭐지 하고 물었다 하여 이 마을을 머지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현재 평산신씨가 많이 살고 있다. 큰땀·상땀 아랫땀 서쪽으로 80m 거리에 있는 마을인데 선곡리 전체로 볼 때 제일 위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상땀 또는 큰 땀이라 하고 전주이씨, 김해김씨가 몇 집 살고 있다. 작은땀·아랫땀 밀개동에서 남쪽으로 300m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인데 마을이 작다 하여 작은땀, 제일 아래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아래땀이라 불렀다. 압실(鴨室) 전설에 의하면 이곳을 지나던 고을 원님이 이 마을의 지형이 오리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압실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머지동에서 1.5㎞ 남쪽으로 작은 산등을 넘으면 이 동네가 있는데 마을 한 가운데를 흐르고 있는 작은 개울의 북쪽은 문경시 농암면 선곡리에 속하고, 개울의 남쪽은 상주시 은척면 남곡리에 속하는 곳이다. |
첫댓글 좋은 자료이군...geolist가 첨삭을 다하고 나면 후대에 물려줄 귀중한 자료가 되겠군. 우리 농암 출신들과 미래 농암의 후손들에게 영구히. 훌륭한 작업이 되겠네...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geolist가 전공에 딱 맞춰서 하고 있구만.
자기가 태어나 살던 마을의 이야기나 전해오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자세하게 알고 있으면 꼬리글 달아 주시기 바랍니다.
벌마에서 살았서면서도 왜멀마인지 몰라는데 아주 좋은 공부햐였군.고맙구면......
많은 자료를 수집 공개하여 모르는 것을 알게해 줘서 감사.합니다.
고향의 마을지명을 속속들이 알게돼서 고맙습니다.바쁘신 와중에도 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좋은 정보를 알려주신 geolist님께 거듭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수정 되어야 합니다 중궁기(중궁) 절골 · 절터골 중궁기 에서 왼쪽 1000m 지점의 청화산에서 조항산 가는 백두대간 등산로 중턱의 폭포가 있는 계곡에 신라시대의 명승 원효대사가 조그마한 절을 건립하여 조선 중엽까지 있었는데 이 절에 빈대가 너무 많아 절을 태워 버렸다는 전설이 있다. 이 계곡을 절골(절터)이라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그렇죠. 절골과 불당골은 완전히 다른 골짜기입니다. 그리고 상궁기, 중궁기, 하궁기가 아니라 상궁, 중궁, 하궁이 궁기 표준어입니다. 그리고 그 절의 이름은 추심사입니다. 고지도와 사찰 보감에서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옛터골은 견훤이 본궁을 설치한 곳이 아니라는 것은 이름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견훤이 어디다 군막을 얽었는지는 현재 밣혀져 있지 않고 다만 궁터라는 지명에서 유전되는 것일 뿐입니다. 아마 유력한 후보지는 궁터라는 지명을 가진 중궁과 상궁이 될 터인데 굳이 추리해 보자면 중궁쪽이 조금 더
유력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말바위 하추리에 있는 바위는 용마가 나타난 곳이 아닙니다. 용마가 나타난 곳은 그 곳 바위 아래 물에서 나왔다는 설과 말바위와 궁기 사이에 있는 느티나무에서 나타났다는 두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그 바위는 단지 견훤이 말과 화살 중에 누가 빠른가 내기 할 때 활을 쏜 곳입니다.
그리고 송명흠이 세운 정자 이름은 사전에는 주로 력(역), 락(낙)으로 나와 있지만 전통적으로 늑천정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역옹패설의 역자와 같은데 그래서 역옹패설을 낙옹패설, 늑옹패설이라고도 합니다. 또 그 패자가 발음이 비로도 나서 상당한 의견이 있습니다. 그 쪽 광정에 사시는 분 한테 물어봐도 아마 늑천이
라고 할 겁니다. 그리고 용초는 용의 꼬리란 뜻이 아닙니다. 물이 고인 깊은 못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용자를 붙이는 것은 용이 승전함직한, 용이 삶직한 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발음은 초나 추 둘 다 가능하나 일반적으로 추라고 많이 표기합니다. 원 자료가 매우 허술한 듯합니다.
지금 또 자료를 보니 한천정사를 단순히 찬 샘과 연관지었는데 이것은 아무래도 시경 한천(빈풍 개풍편 -효도가 주제)에서 끌어 쓴 주자의 한천정사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리고 쌍용의 사우정의 사우가 청풍명월과 고산유수라는 것은 얼핏 들으면 그럴 듯 하지만 정자 이름을 그렇게는 잘 안 짓는데 뭔가 다른 뜻이 있을 듯 하네요. 율수가 栗藪라는 건 처음 알았네요.
문경삼다가 호랑이 광물자원(석회석과 탄), 그리고 신씨라고 하더니 농암면에도 신씨가 많이 사는군요. 평산 신씨가 농암면에 살게 된 유래라든가 어떻게 여러 곳에 퍼지게 되었는지 좀 알려 주십시오.
연묵님의 좋은 지적들 감사합니다. 이 글은 몇년전인 2004년에 인터넷에서 자료를 검색하다가, 네티앙에서 검색한 고향 지명 설명을 보고 너무 허술하여 내가 알고 있는대로 수정해 내려 오던 것입니다. 그러나 궁기, 내서, 화산, 율수 선암 등 제가 별로 가보지 않아서 잘 알지 못하는 마을의 유래에 대해서는 그곳 출신이거나 현재 사는 분들이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분들의 의견을 들어서 수정하려고 남겨 둔 부분들입니다. 전설이나 유래는 본디 그곳에 전해져 내려 오는 것이고 저야 지리적인 부분을 보완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었지요. 그런데 이 게시판이 아래의 자료실에 있으니까 잘 보지 않아 호응이 없더군요. / 계
제가 현지 답사를 가거나 구비전설 조사 활동을 하였으면 좋겠지만, 마음뿐이고 직장생활하면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까 아무 변화가 없었지요. 그래서 농암을 소개하는 이 게시판을 맨 위로 끌어올려 관심을 촉구하고, 덧붙여지는 다양하고 자세한 구전자료나 의견, 자료를 구하여 보완하고 수정하고자 함입니다. 다른 내용들도 알고 계신 분들이 올려 주시면, 할 수 있는대로 확인하고 답사하여 이 내용을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농암 일대의 지형도를 보아도 틀린 곳이 많습니다. 전에 화은 선배님께서 고쳐 보라고 하셨는데 국토지리원에서 새 자료(수치지도) 를 냈기에 폐기된 지도의 수정요구를 하지 않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우연히 오래간만에 들어와 봤습니다. 사우정기에 대한 설명은 원래의 것이 맞습니다. 제가 사우정기를 입수하여 살펴보니, 땅에서는 고산, 유수를 생각하고 하늘에서는 명월, 청풍과 함께 할 따름이니, 진실로 은자가 노닐고 군자가 살기에 적합하다. [在地惟高山流水, 在天與明月淸風而已耳, 允合隱者盤旋君子棲息.]라는 구절과 함께 4가지는 곧 산수와 풍월이다.[四卽山水與風月也]라고 분명히 나와 있더군요. 그러니 정자 전면에 걸어 놓은 주련에 청풍명월 고산유수라 적어 놓은 것은 사우정이라는 편액에 대한 일종의 해설이라 하겠습니다.
나는 화령 [상주군 화서면] 출신입니다, 울 어머니는 말바우에서 출생하시고 울 아부지가 말바우로 장가를 가시고 울 고모님[일명 모산댁 모산아지매]께서 하누물 순천김씨댁으로 시집을 가시고 작은 고모님은 압실[문경군 선곡리]로 출가하시고, 울 할머님은 서재 안동권씨 가문에서 오셔서 어릴적부터 아부지 손목을 잡고 서재,다락골,황령,갈골,하누물, 말바우를 자주댕겨서 농암은 나의 어린 향수를 자극하는 제2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농암면에 얽힌 역사자료를 올려주셔서 새삼 농암역사공부를 잘 하였습니다, 상주시 신봉동거주 林光洙장로
혹 외서나 화남면 에 蘆洞이나 蘆谷이란 지명이 있는지요? 제가 임진왜란 관련 사료를 보다 보니 상주에서 피난하여 문경 노곡에 와 있으면서 여러가지 의병활동을 한 분이 있어서요. 그 쪽에 사시는 분들은 혹 알지 않을까 해서요...
농바우 앞들의 느티나무와 연천의 은행남무, 빗티의 육소나무에 대해서도 전설(?) 아님 기록이 이어졋으면하는 바램입니다. 좋은자료로 이여름을 시원하게 하였습니다.고맙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민지리(섬안)에 대한 정보 부탁드려도 될까요?~~~ㅎ
운영자님 종곡3리 한우물은 안동권씨 이주하여 정착한 마을이 아니라 예안이씨,단양우씨,순천김씨가 이주하여 개척한 마을입니다...수정부탁 드립니다.
아주 아주 귀한 자료입니다...수고 많으셨고요...연묵님도.....사현리 주막담에 살면서..."주막담"을 "중앙동"이라고 부르는 건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선암초등학교 있는 동네가 "밀개동"인 것 같은데 "밀개동"도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만 사현리 주막담 살 때는 못들어 본 것 같습니다...바구우지에서 멀베이 넘어가는 고개를 "점말랑"이라고 불렀는데 그 연유가 뭔지 궁금합니다.
반갑습니다. 이건 추측에 지나지 않아 무리한 생각이하지만 '점말랑'이라는 이름만 가지고 저 혼자 추측을 해 봅니다. '산 말랭이', 또는 '고개 말랭이'라는 흔한 표현에서 보듯이 말랭이는 '능선' , '마루', '꼭대기'를 이르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그 고개말랭이에 점방(가게)이 있었지 않았나 싶군요. 그래서 점말랭이, 점말랑 이라는 지명이 생겨 났던 것 아닐까? 그곳이 어디 쯤인지 몰라서 가 볼 엄두는 못내고 있지만 ... 한번 주변의 어른들에게 여쭈어 보거나 생각해 보세요., 이촌향도로 인구가 급감한 요즈음은 그런 곳에 점방이 남아 있을리가 없지만...
감사합니다...농암 사현리에서 은척가는 길에 있는 조그만 고개입니다...점방이나 가게는 없었고...그런 얘기는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나름대로 고민 좀 해봐야겠습니다...
사현리에서 은척가는 고개길을 넘어서 창말에 방학때면 꼭 갔지요. 걸어서... 고갯길 돌아가기 싫어서 산 아래로 미끄럼타듯이 내려갔던 기억이 나요. 옛날이 그리워서 사무치게 가슴이 아려와요.
좋은 자료 잘 읽고 갑니다. 대강 알았던 것을 더 자세히 알았습니다 . 수고하셨습니다.
농암 사랑을 안 지 몇년이 되었는데도 저는 이곳을 몰랐습니다. 고귀한 자료 정말 고맙습니다. 많은 시간을 할애했을 것 같은데 많은 분들이 볼 수 있도록
회원들이 자주 들리는 곳이나 바탕 화면에 안내글을 띄우시면 좋겠습니다. 뿌리를 안다는 것은 자신을 안다는 것이고 자신을 안다는 것은, 경쟁력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가끔 어른들이 말씀하시던 , 조금은 이상한 발음의 지명들이 표준발음은 어떻게 될까 많이 궁금했었는데 그 궁금증을 모두 해소한 것 같아 후련합니다.
고귀한 자료 많은 농암인들이 읽었으면 함니다.
운영자님 한번더 수정부탁드림니다...한우물은 안동권씨가 이주하여 개척한마을이 아니고 제일먼저 정착한1.전씨이고 2. 인동장씨고 3. 예안이씨이고.4.단양우씨이고.5 순천김씨로 알고있읍니다 근거도 없이.......빠른시일내에 수정부탁드림니다
인천에더 오래살았지만 내고향 선바위는 항상 마음속에 있습니다.고맙습니다.
자세히 아시는 분의 설명을 부탁드리며~일갈벌.이아체.삼중리. 라는 문경의 피난지? 살기좋은곳? 으로 이름이 나있었다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