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뿔고개
김윤식/시인․인천문협 회장
쇠뿔고개가 어디냐고 물으면 대답할 인천 사람이 이제는 몇 안 될 듯싶다. 그 지명을 쓰던 옛날 사람들은 다 떠나고 없으니, 이 고개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고작 향토 사학자 몇 사람뿐일 것이다. 지난날 주위 어른들이 일상으로 입에 올리던, 해서 우리들 귀에도 전혀 설지 않던 이 고개 이름이 이제는 까마득히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말이 되어 버린 것이다.
쇠뿔고개의 위치는 『인천광역시사』에 나와 있는 기록대로 “창영동 고서점 거리에서 창영초등학교 앞을 거쳐 올라가는 고개”가 맞다. 물론 그 다음 줄에 “그 모양이 쇠뿔처럼 휘어져서 붙여진 이름이다.”라고 단정한 부분이 좀 엉뚱하다는 느낌이 있지만 여기가 쇠뿔고개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쇠뿔고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인접해 있는 황골고개(황굴고개) 내력도 자연 따라 나오게 된다. 다시 시사의 기록을 보자. “황골고개는 원래 그 맞은편에 있는 창영동 쇠뿔고개와 이어져 있었다. 지금 인천세무서가 있는 곳 일대를 가리키는 쇠뿔고개는 1897년 우리 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철도를 놓기 위해 첫 기공식이 열렸던 곳으로, 이 철로가 놓임으로써 쇠뿔고개와 황굴고개가 둘로 나뉜 것이다.”
문제는 또 다른 페이지의 기록으로 “1897년 3월 27일 우각리(牛角里·쇠뿔고개)에서 역사적인 경인철도 기공식을 가졌는데 이곳이 바로 지금의 중구 도원동 도원고개였다.”고 혼동하고 있는 점이다. 도원고개는 황골고개를 이르는 것으로 쇠뿔고개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오류인 것이다.
고 신태범 박사의 『인천 한 세기』에는 “현재 동인천세무서(인천세무서의 잘못인 듯)가 있는 언덕을 쇠뿔고개라고 불렀는데 내동에서 싸리재를 거쳐 쇠뿔고개를 넘는 길이 옛 경인가도였다. 숭의동로터리를 통하는 경인도로가 생기기까지 서울로 가는 길목이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니까 인천도시사적(仁川都市史的)으로 이 쇠뿔고개가 한때 서울과 교통하는 요지였음을 지적하고 있다.
앞에서 이 고개의 명칭에 대해 ‘쇠뿔 모양으로 휘어져서 붙은 이름’이라는 시사의 기록을 엉뚱하다고 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좀 억지스럽다. 아무리 넓게 생각을 하고 상상을 한다 해도 이 고개가 쇠뿔처럼 휘어진 형상이라고는 단정하기가 곤란하다. 지금 와서 옛 지명의 유래를 소상히 밝혀낼 수는 없지만 이 쇠뿔고개, 우각현(牛角峴, 또는 牛角里)은 전혀 쇠뿔과는 관계없이 엉뚱하게 붙은 이름이 아닐까 싶다.
왜냐 하면 인접한 금곡동(金谷洞)의 동명 때문이기도 하다. 인천시사에는 금곡 마을은 “금곡동의 중심 마을로 쇠가 난다고 하여 쇠골 또는 금곡(金谷)이라 하였다. 금창동이 되기 전 창영동의 서쪽, 송현1동의 동쪽 지역이다.”라고 한 점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금곡, 창영동 일대에서 쇠가 났다면 ‘쇠’와 뾰족한 지형을 의미하는 ‘부리’가 합쳐져 ‘쇠부리’ 고개로 불리다가 이것이 줄여져 ‘쇠불’, 혹은 ‘쇠뿔’로 발음되고, 후에 한자로 적으면서 잘못 의역을 해 우각(牛角)이라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물론 이것은 개인적 추측에 불과할 뿐으로, 향토사적 측면에서 누군가가 좀 더 체계적으로 연구할 필요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1970년 전반 무렵까지는, 이 쇠뿔고개로부터 배다리로 빠지는 길이 인천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 중의 하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책방이 줄지어 있어서 학생들의 통행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의 왕래도 매우 빈번해서 경동이나 답동 이상으로 번화했다.
좀 빗나가는 이야기지만, 그 무렵 이 헌책방거리(당시에는 고서점 거리가 아니라 모두 헌책방거리로 인식하고 있었다.) 안쪽에는 철로변에 인접해 당시 우리의 허기를 채워주던 꿀꿀이죽 골목이 있었고, 유명한 인천양조장과 창영당 아이스케키집, 그리고 인천 사이클의 대명사 김호진 선수가 운영하던 자전거포 등이 있었다. 추억 속에 지금도 그 시절, 그 거리 풍경이 아련하다.
그러나 이제 쇠뿔고개 일대는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되어 머지않아 지금의 모습을 벗을 것이라 한다. 구한말 주한 미국 공사 알렌(Horace N. Allen)의 별장이 섰었던 전도관 자리, 또 1897년 경인철도 기공식이 있었던, 한국 철도의 시발지인 역사적인 이 우각리 일대가 그 동안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낙후된 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옛 사람은 가고, 고개를 넘던 나귀도 수레도 세월도 가고, 그러면서 집도 길도 고개도 새롭게, 새롭게 변해 간다. 그래서 이제는 아무도 쇠뿔고개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것이 인간의 삶이며 도시의 숙명인 것처럼.<2007. 5. 11. 도개공 사보 여름호 원고 ‘고갯길 이야기’>
첫댓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발행하는 A4용지 한장짜리 소식지(배다리통신)에 선생님의 위 글을 싣고 싶네요.
그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