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어도르 존 카진스키 (Theodore John Kaczynski)
*카진스키는 우편물 폭탄 테러로 유명했던 유나바머(Unabomber)의 본명이다. 위의 글은 그가 미국 정부를 협박해서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에 실었던 선언문 '산업사회와 그 미래(Industrial Society And Its Future)'의 일부이다. 박영률출판사에서 1996년에 나온 '유나바머'라는 책의 p100 ~ 101에서 인용했다.
미국 동부의 정전 사태
지난 8월 14일에 있었던 미국 동부 지역과 캐나다 일대의 정전 사태는 그야말로 한 여름밤의 홍두깨 같은 사건이었다. 교통이 마비되어 퇴근길에 맨하탄을 걸어서 빠져 나오는 시민들의 왁자한 모습은 좀처럼 구경하기 어려운 진풍경이었다. 철도와 차량이 운행을 중단하고, 거리의 신호등은 기능을 상실한 채 간혹 노란 불을 깜빡거리면서 서 있었다. 집에서는 냉장고 안의 음식이 상하기 시작하고, 기지국의 기능이 마비되어 휴대폰이 모두 먹통이 되고, 컴퓨터며 TV며 세탁기며 하는 일상적인 전자 제품들이 모두 의미를 상실하여 사실은 그저 쇳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말았다.
엄청난 정전 사고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사건의 의미가 결코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시스템에서 발생한 경보를 무시한 '사람의 잘못(human error)'을 들먹이는 것은 대개 이런 종류의 사건이 터지고 나면 언제나 나오기 마련인 약방의 감초 같은 '분석'이지만 그것으로 설명이 되는 것은 사실 아무 것도 없다. 문제는 시스템 자체이지 그 시스템을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폴 크루그먼(Paul Krugman)은 지난 19일자 칼럼 '폐허로 가는 길(Road To Ruin)'에서 정전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은 국가 기간 시설에 대한 과도한 '규제 완화(deregulation)'에 있다며 지나친 민영화를 추진하는 부시 정권에게 비판의 화살을 돌렸다. 일주일 전인 12일자 칼럼 'M. R .E.들 덕분에(Thanks For the M. R. E.'s)'에서도 그는 이라크에 파견된 미국 군대에게 음식을 조달하는 군수 업무가 민영화된 탓에 미국의 전력이 얼마나 타격을 입었는가를 밝히면서 역시 부시 행정부에 대한 비판의 날을 세운 바 있었다. (이 칼럼에서 그는 이런 형편없는 '민영' 군수 업체를 데리고 어떻게 '북한'과 같은 만만치 않은 상대와 대결하겠는가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은 정녕 북한과의 전쟁을 원하고 있는 것일까.)
규제 완화와 민영화
공공의 이익을 위한 기간 시설을 건설하고 관리하는 업무를 민영화하는 것이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오는 일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사실상 드물다. 해당 사업권을 획득한 회사는 대개 기간 시설의 원래 취지인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돈'이 되지 않는 '공공의 이익'은 허공에 붕 뜨게 되기 때문이다.
폴 크루그먼이 정전 사태를 분석하면서 말한 내용은 바로 민영화가 안고 있는 그와 같은 허점을 지적한 것이다. 시민들에게 전기를 공급하는 기간 사업이 무리하게 민영화된 결과 각 회사는 오직 자신이 소유한 부분만 책임질 뿐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도 지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전기를 공급하는 전체 과정에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빈 공간이 생겨났고, 이번 정전 사태는 바로 아무도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 빈 공간에 의해서 손쉽게 넓은 지역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사건의 원인과 책임을 밝히는 작업이 쉽지 않은 것도 이와 같은 책임 소재의 불분명함에 어느 정도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규제 완화와 민영화는 그 자체로 문제가 되기보다는 이렇게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복무해야 하는 인프라를 민간 사업자가 떠맡았을 때 본격적인 문제로 등장한다. 동일한 시설과 사업권에 대해서 여러 개의 회사가 서로 경쟁을 하는 상황이라면 그나마 낫다. 책임 소재의 불분명함은 피할 수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책임 소재가 분명한 부분에 대한 품질의 향상은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서 규제 완화와 민영화가 '경쟁' 대신 '독점'이라는 게으르고 탐욕스러운 친구와 만나게 되면 그로 인해서 초래되는 결과는 '공공의 이익'의 철저한 죽음이다. 실로 끔찍한 재앙이 초래되는 것이다.
컴퓨터 바이러스와 웜
컴퓨터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요즘 미국 동부의 정전 사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불편하고 짜증나는 일을 경험하고 있다. 일일이 이름을 기억할 수도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많은 컴퓨터 바이러스(virus)와 웜(worm)이 PC의 정상적인 사용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바이러스나 웜에 감염된 PC가 나타내는 증상은 제각각 달라서 사람들은 자신의 컴퓨터가 위험한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지내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컴퓨터의 응답 속도가 차츰 늦어지는 경우, 뚜렷한 이유 없이 특정한 소프트웨어의 동작이 멈추는 경우, PC가 느닷없이 혼자 다시 시작(booting)되는 경우, 모니터에 푸른색 화면(blue dead screen)이 뜨면서 컴퓨터의 동작이 완전히 멈추는 경우처럼 특정한 증상이 나타나기라도 하면 바이러스 퇴치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문제를 고칠 수 있다. 하지만 컴퓨터의 구석에 숨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다만 컴퓨터의 뒷문(back-door)을 열어 놓는 조용하고 음험한 바이러스가 설치되어 있는 경우에는 평소에 부지런히 바이러스 퇴치 프로그램을 업그레이드(upgrade)하지 않는 사용자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반가운 사람에게 온 이메일에 첨부되어 있는 파일을 열어 보는 순간, 자신의 PC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처럼 기분 나쁜 일도 없다. 경로야 어떻든 한번 감염된 바이러스를 완전히 제거하는 작업은 시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피곤하고 소모적인 일이다. 바이러스를 제거했다고 해서 내일은 완전히 안심해도 좋다는 보장도 없다. 아무리 조심성이 많아도 자신의 PC가 종류와 모습을 시시각각 바꾸면서 침투해 들어오는 바이러스에게 최소한 한 번쯤 감염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바이러스와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자신의 PC가 바이러스나 웜에 감염되어 낭패를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한번쯤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어 보았을 것이다. 도대체 이런 일은 왜 자꾸 생기는가. 이런 일의 최종적인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가. 비싼 돈주고 산 PC와 소프트웨어를 이용하면서 내가 왜 이런 고통과 수고를 감수해야 하는가.
누구의 책임인가
' 신형 바이러스 어쩌고저쩌고 급속히 확산'이라는 식의 뉴스를 듣는 일은 이제 조금도 낯선 일이 아니게 되었다. '어쩌고저쩌고'의 이름만 '소빅(Sobig.F)'이니, '블래스터(W32.Blaster)'니, '슬래머(Slammer)'니, '코드레드(Code Red)'니 하면서 달라질 뿐, 뉴스의 내용과 성격은 대부분 비슷하다. 이러한 바이러스들이 모두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즈(Windows) 운영 체제(Operating Systems)를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도 늘 변함없이 되풀이되는 사실이다.
되풀이되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신형 바이러스가 급속히 확산되어 문제가 커지면 마이크로소프트는 언제나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기 위한 소프트웨어 조각인 '패치(patch)' 프로그램을 자사의 웹사이트에 올려놓았으므로 사용자들이 자사의 웹사이트를 방문하여 패치 프로그램을 PC에 직접 설치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패치'라는 것이 무엇인가. 옷에 난 구멍을 다른 천으로 기워서 그냥 가리자는 것이 아닌가. 말의 의미 그대로 '패치'란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과는 전혀 거리가 먼 일시적인 방편에 해당할 뿐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즈 시스템을 공격하는 바이러스의 기승으로 인한 문제는 개인적인 '불편함'과 '짜증'의 차원을 넘어선 지 오래 되었다. 그것은 이미 사회적 비용 혹은 생산력 차원의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이크로소프트의 말은 자신이 제작한 소프트웨어에 내재한 결함 때문에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을 시민과 소비자에게 전가시키는 행위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직원이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집을 방문해서 패치 프로그램을 설치해 주고 가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 판에 그 책임을 나더러 지라니?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시민들에게 전기를 공급하는 일이 사회의 공공 시설에 해당하기 때문에 지나친 규제 완화와 민영화의 대상이 되지 말아야 한다면, 시민들이 사용하는 각종 소프트웨어에게 CPU나 메모리와 같은 자원을 할당해 주는 일을 수행하는 컴퓨터의 '운영 체제(Operating Systems)' 역시 사회의 기간 설비에 해당하는 측면이 있다. 다시 말해서 운영 체제는 특정 기업이 독점적으로 소유하여 폭리를 취하는 수단이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복무하는 사회의 공적인 인프라로 인식되어야 하는 것이다. 윈도우즈와 같은 정교한 운영 체제를 경쟁력 있는 사기업이 아니라 공적인 영역에서 개발하고 관리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해 왔다. '리눅스(Linux)'라는 운영 체제가 개발되는 과정에서 모습을 드러낸 '오픈 소스 운동(open source movement)'이 바로 그것이다.
두 가지 방법
다른 기회에 자세하게 살펴볼 '오픈 소스 운동'은 간단히 말하자면 소프트웨어의 소스 코드를 만천하에 공개한 다음, 세계 각지의 프로그래머들이 인터넷을 통해서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고민하면서 소프트웨어의 기능을 향상시키고, 결함이 발견되면 즉각 수정하고,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운동이다. 유명한 리차드 스톨만(Richard Stallman)의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free software movement)'과 약간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오픈 소스 운동'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즈 시스템을 위협할 차세대 운영 체제로 각광을 받고 있는 리눅스를 탄생시킨 동력이 되었다.
누구나 함께 자유롭게 참여하여 건설하고 그 결과를 모두가 자유롭게 누리는 세상. 이런 면에서 보면 '오픈 소스 운동'과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은 사회주의 운동을 많이 닮았다. 관념 속에서 배회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사회주의가 아니라 삶 속에 뿌리를 내린 능력으로서의 사회주의의 모습이 엿보이는 것이다. 소스 코드를 주머니 속에 꼭꼭 감춘 채 누더기 같은 패치로 얼룩지고 있는 윈도우즈 시스템에 비해서 누구나 자유롭게 일하고 그 결과를 나누는 리눅스 시스템은 이미 오래 전부터 수많은 컴퓨터 사용자와 기업들에게 내일의 대안으로 선택되고 있다.
PC에서 중요한 작업을 하다가 바이러스 때문에 소중한 자료를 잃는 경험을 했거나 감염된 바이러스를 제거하기 위해서 새벽까지 작업을 해 본 사람들은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분노'와 '짜증'을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할 지 몰라서 깊은 좌절과 억울함을 맛보았을 것이다. 일차적인 책임은 물론 악성 바이러스를 만들어서 유포한 사람에게 있다. 하지만 바이러스가 바이러스일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윈도우즈 시스템 내부에 포함되어 있는 '결함' 때문이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과연 마이크로소프트의 책임은 가벼워질 수 있는 것일까?
방법은 둘 중의 하나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역시 윈도우즈 운영 체제의 소스 코드를 만천하에 공개하고 '오픈 소스 운동'의 대열에 동참하는 것이 하나이다. 필자는 이 방법을 권하고 싶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방법은 앞으로 바이러스가 발생해서 윈도우즈 시스템에 '패치'를 설치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그럴 때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사용자에게 일정한 금액을 환불해 주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비싼 돈주고 구입한 제품에 내재된 결함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면 일정한 금액을 환불해 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 아닌가?
테크놀로지는 그 자체로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대개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독점적인 기업이나 권력이 테크놀로지와 결합했을 때 문제가 되는 법이다. 테크놀로지가 한 방향으로만 움직인다는 카진스키의 지적은 어떤 면에서 옳다. 테크놀로지가 자유에게 뒤로 물러서라고 강요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지적도 옳다. 하지만 그가 간과한 것이 한가지 있다. 그것은 자유를 열망하는 시민들의 운동이 테크놀로지와 결합한 독점적 기업이나 권력의 전횡을 결코 묵과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미국 연방 법원의 판결을 뒤집어엎을 정도의 괴력을 가지고 있으나 시민 사회의 힘은 미국 연방 법원보다 크고 강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 알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