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어둠 속에 갇힌 불꽃 원문보기 글쓴이: 정중규
창작이론 강의 1 ~ 9 / 하인리히 뵐
문학 / 작가 / 책
|
창작이론 강의 / 하인리히 뵐
프랑크푸트대학교 창작이론 강의 Frankfurter Vorlesungen
하인리히 빌 Heinrich Boll
안인길 역
1.
다음 몇 시간에 작품과 테마 그리고 테제를 가지고 인간주의 미학에 대해서 다루어 보겠다. 주거, 이웃과 고향, 돈과 사랑, 종교와 식사 등의 문제를 다루겠다. 각기 한 권 내지 두 권의 책에서 대화의 기본 자료를 만들어 보겠다. 이것들을 다음 세미나에서 여러분과 함께 조사하고 보충하겠다. 그 전에 우선 오늘 단지 두세 가지 전제 조건을 내놓겠다.
문학의 입장에 대한 일반성과 앞으로 이어질 대화에서 전제 조건이 될 수 있는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서 말하겠다. 여기서 개인은 글을 쓰고 종이 무더기과 뽀족하게 깎은 연필이 들어있는 연필통과 타자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나를 한 개인으로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다른 것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시대와 그 시대의 사람, 한 세대가 경험하고 체험했던 일 그리고 보고 들었던 것과 연결되어 있다. 이런 걸 자전적으로 접근하여 말로 담아내기란 쉽지 않다. 또한 고향을 잃은 불안한 한 세대와 연결되어 있다.
이 세대는 우리가 보통 성숙했다고 말하는 데도 이르지 못했는데 갑자기 할아버지 나이를 먹게 되었다. 이런 할아버지들로 시작할 일은 과연 무엇일까? 그들을 데리고 정신병원에 갈까요. 아니면 화장터로? 다른 사람의 눈에서 살기가 보인다. 넌 차라리 죽었던가 살해당했으면 좋을 뻔했다. 이 나라에는 너무 많은 살인자가 파렴치하게 자요롭게 활개치며 다니고 있다. 그들이 살인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도 없다. 죄, 후회, 참회, 그리고 통찰이 사회의 범주에 들지 못하게 되었다. 정치의 범주에 들지 못하는 건 물론이다.
이런 배경에서 그새 20년이란 거리를 두고 전후 독일문학이 이루어졌다. 한 시대와 그 시대 사람들과 연결되지만 동맹자 관계는 아니다. 물론 개인적인 우정과 독자층은 있다. 그러나 그들은 동맹한 것이 아니다. 글을 발표한 사람으로서는 자신처럼 공인이어야 동맹자이다. 이런 상처 입을 수 있는 입장으로 나보다 먼저 여기서 말했던 사람들과 앞으로 말하게 될 사람들의 입장이다. 이것으로 이 나라 작가들의 위상이 어떠한지 대강 확실해졌다고 본다. 물론 상처를 입기만 한 게 아니다. 가끔 상처를 주기도 했다. 목표물에 꽂힐 수 있는 화살과 골리앗의 이마를 스칠 수 있는 돌이 수많은 화승총에서 나와서 두 배로 늘어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 분명한 것은 우리가 언제나 산탄을 맞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동맹자가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여러분, 지금 나는 개인으로 말하지만 객관적인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최선을 다해 말하고 있다. 연결되었지만 종속되지 않았다는 건 무슨 뜻일까? 너무 복잡하다고 생각해도 할 말이 없다. 기실 더 간단하게 표현할 길이 없다. 나는 연결된 사람으로서 말하고 있다. 이런 제한은 겸손에서 온 것이 아니라 일종의 요구에서다. 왜냐하면 내가 전혀 연결되지 않는 걸 믿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공동 공부 팀, 그룹, 선수단, 동호회, 살롱 마담 모임 등의 말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이익을 얻고 기대하는 바가 없으면서도 동맹을 맺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영어의 인트리스트(interest)를 번역하면 ‘이자’라는 뜻이 된다.
하인리히 뵐(Heinrich Boll, 1917~1985, ’72년 노벨문학상 수상)은 창작하는 입장과 목표를 체계적으로 써서 남긴 것이 없다. 그러나 수필, 인터뷰 등에서 이런 문제에 대해서 언급했다. 특히 1963~64 겨울학기 프랑크푸트 대학교에서 네 번에 걸친 강의에서 그의 창작이론을 설명했다. 첫 번째 강의에서 뵐은 인간주의 미학을 강조했는데, 그것은 거주, 이웃, 고향, 돈, 사랑, 종교, 식사 등을 뜻한다. 이 인간주의 마학에서는 말과 사랑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며, 자신과 타인 그리고 신과 관계를 맺는다고 말했다. 독백과 대화 그리고 기도가 문학의 본령이다. 뵐은 자기 시대의 언어를 성찰하고는 이렇게 확신했다. 믿을 만한 언덕도 없고 살만한 지역도 없다. 사회도 정이 가지 않는다. 세계와 환경에서 친근감을 못 느낀다. 뵐은 독일 사람들의 반 지방주의를 비판했다. 그리고 기실 사회적이고 인간적인 일상성을 반대하는 것도 호되게 비판했다. “지방은 세계문학의 장소이다. 지방에서 언어가 풍성해지고 전달된다.”
그는 “살 만한 나라에서 살 만한 언어를 찾는 게” 문학의 목표라고 선언했다. 번역 작업을 통해 자기 나라 말을 다지는 기초가 생긴다는 말로 번역 문학을 권장했다. 여행과 거주 그리고 오물에 대해서 쓴 토마스 만과 프란츠 카프카, H. G 아들러의 택스트를 예로 들면서 인간주의 문학의 특징을 알고 전개시키려고 했다. 한 나라의 인간주의 척도는 별로 쓸모가 없는 오물, 개인의 일상생활과 그 용품 그리고 문학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달렸다. 뵐로서는 폐기물과 사회에서 멸시받고 추방당한 사랃들이 중요했다. 예술은 오물과 아웃사이더나 부정당하는 사람들을 포함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굴욕 받고 모욕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개념이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인간주의 미학에는 빵, 사랑, 결혼 생활, 에로, 종교 등의 미학과 먹고 마시고 담배 피고 잠자고 말하는 등의 인간의 일차적인 욕망이 포함된다. 뵐은 문학에서 전문가만 전제로 하는 걸 계속 반대해왔다. 문학에는 도덕적이고 미학적 인물이 가정되어야 한다. 사회적 인물만으로는 안 된다. 사회는 자료다. 이데올로기도 자료다. 신앙도 자료이다. 그와 달리 취급하면 프로파겐다가 되고 만다.
뵐의 문학적 입장은 참여이다. 이 참여를 그는 시대와 그 시대 사람들과 연결된 것이라고 말한다. 아무런 도덕적 유대도 없이 게르만화한 만행과 살인에 헌신하면서 역겹기 이를 데 없는 승리를 축하하는 류의 참여를 반대하는 데서 나왔다고 본다.
뵐은 도덕과 미학 그리고 내용과 형식이 떨어질 수 없이 일치하는 걸 중요하게 여기고 형식을 고려하지 않고 내용만 인정하는 걸 사기라고 비난했다.
뵐은 사회에서 부정적으로 취급받는 것을 고귀하게 묘사할 때에는 유머가 지닌 인간적인 기능을 강조했다. 반사회적인 것이 고귀하다. 반사회적인 것을 고귀하게 보이기 위해서는 유머가 있는 인물이 있어야 한다. 뵐은 장 파울의 유머를 통해 그런 인물을 찾았다. 유머를 비판적으로 밝힌 형식이 풍자이다. “여전히 기독교 세계라고 선언하면서 이를 요구하는 세계와 대결하는 것이 풍자다.”
하인리히 뵐의 프랑크푸트 창작이론 강의는 다음의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말과 사랑 그리고 연결과 상호간의 믿음을 토대로 한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것을 강조한다.
2) 일상의 일차적인 욕망을 높이 평가하고 숭상한다.
3) 사회에서 부정되고 도태되는 아웃사이더의 평가를 절상한다.
4) 인간에게 믿음을 주는 언어를 강조하고 사회에서 기능적으로 말이 사용되는 걸 비판한다.
이 번역에 사용한 텍스트는 DTV 68년 판이다. 저작권법에 따리 텍스트의 원제와 판권을 밝힌다.
Originaltitel : "Frankfurter Vorlesungen" von Heinrich Boll
(c) 1966 by Verlag Kiepenheuer & Witsch Koln
이제 좀더 접근해 보자. 문학은 사회의 어디에서 활동하는가, 이따금 의도한 바도 없이 문학은 사회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면 문학은 관심의 대상이 된다. 이 관심은 이미 깊은 상처를 입은 것이기도 하고 또한 가벼운 상처일 수도 있다.
나의 강연 제목에서 사회(Gesellschaft)라는 단어를 피했다. 그것은 많이 사용되는 단어지만 아직 정이 가지 않는 말이다. 이 단어는 이해하기 시작하기도 전에 유행어가 되었다가 이미 퇴조하고 말았다. 그리고 사회적(sozial), 인간적(hunman)이라는 말들을 우리 사회가 기피하고 있다. 억누르고 우습게 만들었다. 이 말들은 사회에 맞지 않는다. 부수적인 말이 붙지 않으면 반사회적인 말이 된다. 사회학이나 휴머니즘이라는 학술어의 지원과 사회주의라는 말이 들어 있는 정치 용어의 지원이 없으면 반사회적인 말이 되고 만다. 허가받아 잘 조직된 자선 사업 말고도 종교와 사회의 중간에서 어떤 인간주의 관계를 추구하며 찾는 걸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신앙의 문제에서 교단에 맞쳐 움직이지 않고 인간주의를 향하는 개인과 그룹을 제거하기 위해 교회가 유물론 단체와 동맹을 맺어도 놀라지 않겠다. 내가 과장했을까요. 그런데 나의 상상력은 어떤 분야에서는 과장할 수 있다는 게 드러났다. 이런 종류의 시도는 많았다. 어떤 시도는 성공했다. 왜냐하면 허가를 받았고 조직체의 조건을 채웠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전적 의미에서 동호회의 나라인 독일에 동호회는 없고 거의 사회 단체만 설립되었다는 걸 뜻한다. 이런 단체들은 부끄럽게도 법에 따라 등록해야 하고 지나치게 많은 의식을 치러야 한다. 수많은 회의와 회동 그리고 개인적 또는 공식적 토론회의 배후에서는 파티를 갈망하게 되었다. 파티에는 축사하는 인사가 있으며 그가 회의 진행을 빛나게 한다. 이런 파티에 대한 갈망을 우습게 하려는 게 내 의도가 아니다. 나는 이런 회합에서 표현하는 말에 기대하는 바가 크다.
그런데 이런 파티에서 그것이 견습공 졸업 시험 합격자를 위한 것이거나 판사 연수원 졸업생을 위한 회합이던 간에 단지 한 가지 놀랄 일은 그들이 기대하는 것이 감언이나 위로 그리고 격려나 증면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딘가 염치없고 뻔뻔스러운 걸 고대하고 사회 비판을 기대하는 것이다. 시대 비판을 고대한다.
자신만만한 사업가나 성직자는 채찍을 기대한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이런 걸 의식한 다음부터는 겉으로라도 때리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이런 행사의 특징은 본디 회합의 목표와 다르며, 그것은 늦은 저녁의 식사와 마시는 데서 나타난다. 놀랄 정도로 친근감을 가지게 되고 고백도 한다. 고백은 기대했던 것이기도 하다. 말은 점잔빼는 공식적인 공허한 수사에서 벗어나면 해방된다. ‘그건 그런 뜻이 아니였어요’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그러면 파티는 조용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공식적인 말과 친근한 동호회에서 사용하는 말이 있다는 게 드러났다. 두 번째 문장마다 ‘무슨 뜻이에요’ 라는 말이 반드시 필요하게 된다. 그러면 먼데서 끌어온 정의의 미로에 들게 된다. 우리말이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암흑 속에 들게 되었다는 게 드러난다. 그리하여 교육이 완전히 상처를 입었다는 걸 알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결코 이런 파티에 대한 갈망을 우스꽝스럽게 하려는 의도가 없다. 그리고 그 가치를 절하시키려는 의도는 더더욱 없다. 이런 갈망에는 다른 것과 연결하라는 바람이 들어 있다. 공통적인 어휘는 한 시간도 이어지지 못한다. 일상 생활에 대한 어휘조차 안 된다. 예를 들면 학교에 대한 대화에서 그러하다. 한 시간 이상 지껄이고 나면 피곤해진다. 정중한 의식도 한 시간 이상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우리에게 말은 충분하고 또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인간주의와 사회가 연결된 말이 어디 있는가? 그러니 우린 아직도 단순한 미학을 고집한다. 어느 정도 발표가 가능한 산문 세 쪽을 쓰는 작가는 단순한 미학을 받아들이는 걸 전제로 해야 한다. 그러면 우린 적어도 장편소설이나 빌트짜이 통신문의 논설을 여러 가지로 비판하면서 접근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언어와 사랑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사람을 자신과 다른 사람 그리고 신과 관계를 맺게 하는 독백과 대화 그리고 기도를 전제로 출발하겠다. 인간주의 미학이 어떤 언어로 묘사되는가를 조사하려는 게 내 목표가 아니다. 정치가의 어휘인가, 상인, 교원, 부부, 교수, 사장 그리고 때마다 다른 파트너의 언어로 묘사되었는가를 조사하려는 게 아니다. 대개 권력 쟁취와 권력 유지 및 권리를 가진 사람의 어휘가 있다. 이 어휘는 파트너에게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전에 파트너를 생각하고 만들어졌던가 배워서 얻어진 것이다. 어휘는 강할수록 그와 정비례로 말하는 것이 없다. 말이 많으면 말하는 게 없다. 현학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기실 현학적인 말에는 문체상의 아름다움이 있다. 모범적이고 꾸민 데가 있다. 그것은 말을 겸손하게 하는 도구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규칙을 전제로 한다. 춤추는 무희나 거의 다를 바 없다. 우리의 말은 존경과 멸시를 표현하는데 적합한 예의를 아직 배우지 못했다. 철학과 사회학 연구에 필요한 말은 충분히 갖추었다. 아마도 번역 방법을 통해 몇 가지가 우리말에 들어 왔을 것이다. 필요에 따라서는 기교를 통해 우리말에 들어왔다. 소위 번역의 홍수가 독일어에 위험이라는 건 촌스러운 생각이다. 범죄 소설을 포함하여 번역은 무엇이든 모두 자기 나라의 언어를 풍부하게 한다. 번역은 우리의 언어에서 위축될 위험이 있는 생활 언어 분야를 일깨워 준다. 이런 언어는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에도 없는 것이다.
뉴욕의 구두수선공이 나오는 단편 소설을 번역하면서 나와 아내는 삼십 년 전만 해도 자연스러웠던 말들이 사라진 걸 눈여겨보게 되었다. 어린 시절 구두를 수선공에게 가지고 갈 때 구두수선공이란 말은 당연했다. 급격하게 발전하는 기계화는 수공업자 그룹을 사라지게 했다. 그들과 함께 수공업의 연장 이름들이 사라졌다. 그들의 옷과 노래를 없앴다. 비교하고 모으는 것이 독어독문학도의 작업으로 충분하다. 정치는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말들을 눈여겨보고 모으고 비교하라. 앞으로 말하겠지만 그 내용에 분석할 것이 많다. 그것은 산문의 내용을 전제하는 것으로 선사 받은 것이다.
이렇게 공짜로 받은 내용의 흠을 잡지 말아라. 말을 모으고 문장 구문을 공부하고 분석하라. 그리고 그 리듬을 하나하나 연구하라. 그러면 어떤 리듬과 문장 구문 그리고 어휘가 우리 나라의 인간주의와 사회를 나타내는가 그것이 밝혀질 것이다. ‘사회 관계의 총체’라는 말은 어학에서 박사학위 논문 제목이 될 게 분명하다. 우리에겐 선물할 말이 없다. 잃어도 될 말이 없다. 우리말이 그렇듯 많은 게 아니다. 여기서 마음 놓고 할 말이 있다. 문화를 지닌 나라는 구원할 게 있으면 얼른 구원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아일랜드처럼 복지가 빈약한 나라에 그림(Jakab Ludwing Korl Grimm, 독일의 언어학자 1785~1863/ Wilhelm Karl Grimm, 독일의 동화작가 1786~1859)형제가 했던 일에 버금 갈 작업을 목표로 하는 위원회가 정부에 있다. 지금 아일랜드가 시인의 나라인건 물론이다. 초대 대통령이 더글라스 하이드였는게 그는 언어학자였다. 그리고 아일랜드는 가톨릭 국가인데, 그는 프로테스탄트였다.
독일 사람들이 지방주의를 반대하고 인간주의와 사회라고 할 일상을 싫어하는 게 바로 지방적이다. 언어가 자라나고 전수하는 지방은 세계문학의 현장이 된다. 여기서 나는 더블린과 프라그만 거명하겠다.
우리는 너무 많은 말을 잃었다. 버렸던 것이다. 세계를 버린 것이다. 우리에겐 커다란 세계다. 큰 세계는 큰 사회다. 그리고 큰 사회에는 위대한 것이 없다. 정치가들은 할말이 없던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건 일종의 매진되는 과정이다. 국가의 지지와 재정 지원을 받으면 언어학은 말을 싸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언어학은 말을 모아서 정리할 수 있다. 두세 가지 착상을 제기한 것이다. 아마도 늦었을 수도 있고 지나친 제안일 수도 있다. 벌써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큰 세계의 단어는 정치가의 단어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일상 언어의 미학을 정리하면 구두수선공이나 시장판의 여자는, 큰 세계에 대해서 말하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정치가들의 말과 비교하면 왕이나 여왕일 것이다. 종종 나를 낮춰서 작은 사람들을 위한 작가라고 말하는 걸 듣는다. 유감스럽지만 나는 이런 제한을 언제나 내 기분을 맞춰 주는 말로 받아들였다. 그러면 내가 지금껏 작은 사람들에게서만 위대한 걸 찾아냈다는 말인가?
이 나라에 어린이 책이 없고 청소년 책이 없고 범죄 소설이 없다는 건 우연이 아니다. 우리가 독일어로 번역하는 범죄 소설을 쓴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보다 독일에 범죄가 결코 적은 게 아니다. 믿을 만한 말과 마음이 쏠리는 지역이 없는 것 같다. 사회와 세계 심지어 주위 환경과 친근한 것도 없을 성싶다.
작가가 자신이 속하지 않은 사회를 꾸미는 게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혀 비난할 생각이 없다. 좋은 징조라고 여긴다. 소비 수준에 따라 등급을 매기고 매겨져야만 하는 사회, 문체도 없고 심지어 꾸미지도 못하고 뻐기기만 일삼는 사회에 작가가 속하는 게 아니다. 글을 발표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공적인 인물인건 아니다. 나는 여기서 공적인 인물에 대한 개념을 정립할 필요가 없기를 바란다. 나는 사회 계층을 결코 구별하지 않는다. 독일 사람들은 연결되는 걸 기대한다. 그러나 사회만 찾아냈지 믿음을 보지 못했다. 독일 사람들은 여행을 많이 한다. 그리고 어디선가 인간주의와 그에 따른 사회를 찾는다. 다른 나라 사람들의 일상을 보고 놀라워한다. 그건 우연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도 앞으로 말할 것이다.
이 시대 문학에는 책임이 주어져 있다. 그러나 문학은 그걸 맞추지 못하고 있다. 정치는 아무 말고 하지 않고 사회도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교회는 속수무책이다. 교회는 본디 사회가 지녀야 할 현실을 찾으면서도 뻔뻔스럽게 교회를 위한 도덕적 의무만 내세운다. 그리고 교회와 관계가 없는 학술을 통해 알리바이를 찾으면서 빈말을 늘어놓는다. 사회와 정치가 가끔 남모르게 음해의 어휘를 사용하는 경우와 같다.
이 모든 걸 이 시대 문학이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겠다. 문학이 에로와 섹스 그리고 종교와 사회 문제를 떠맡아 그 책임을 져야 한다. 정치가 실패하고 패배하는 곳에서는 바로 작가들의 책임 있는 말이 필요하다. 나는 베를린 장벽을 반대하는 작가들의 입장을 억압하던 신경질적 병적 자세를 기억하고 있다. 정치가들을 상대로 말할 때는 되도록 간단한 문장으로 말해야 정치가들이 상대를 반박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작가들이 정치 문제와 사회 그리고 종교 문제에 대해서 말할 때, 항상 악의와 조소의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그건 우연이 아니다. 이런 정의의 정글 속에서 책임 있는 말을 직접하라는 요구를 받는다면, 그것은 명예이다. 나는 너무 큰 명예여서 지나친 요구라고까지 말하고 싶다. 학자나 정치가 그리고 교회에 걱정 끼칠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기 꺼리는 걸 작가들이 말해야 한다. 잃은 것은 잃고 만 것이다. 아마도 습득자에게 주는 사례금이나 받을까. 작가들은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정치가들은 도망친다. 교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똑똑하다. 우직하고 진솔한 말을 작가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작가들이 그걸 말한다. 그러면 선동하는 기계가 공습경보처럼 울어댄다. 대개 공개적 발언에 따르는 터부로, 말하면 안될 것을 넘어선 말을 하면 금세 위험이 따른다.
이런 사실을 다소간 의식으로 확인한 나는 내용이 없는 말을 대단히 아름답게 표현하고, 인간으로부터 인간주의와 연결된 것과 공동 사회를 빼앗고, 인간을 아무 말도 없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환경에 넣는 것을 문학이라고 선언한다. 말이란 그 자체로서만 골격을 유지하는 것이지 뭘 누설하면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다. 말 자체로서는 전달하고 경고하지 못한다. 동호회와 살롱 마담 모임에 머물뿐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는다. 언어 자체의 움직임에는 단지 리듬만 있을 뿐이다. 시인의 고독을 훌륭하게 알려주는 게오르게(Stefan George, 독일시인 1868~1933), 벤(Gottfried Benn, 독일시인 1886~1956), 윙어(Ernst Junger, 소설가 1895~1998)로서는 사회와 독자에게 감출 것이 없었다. 무질(Robert Musil, 스위스 작가 1880~1942)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이러니가 아니라 비극이다. 글로 쓴 말 다시 말해서 인쇄된 말은, 써서 인쇄되는 순간 사회에 있게 되는 것이다. 작가가 독자와 사회 그리고 세계의 변화를 원하던 원치 않던 간에 사회에 나돌게 된다. 고독한 시인들이 열심히 가꾼 예술에는 언제나 조금씩이라도 괴로움이 뒤따른다. 이런 글을 가꾸고 손작업을 하는 곳에서 예술의 작업이 시작된다. 약간 운명적인 아마추어가 생겨난다. 엘리트의 어휘를 부정하는 계층에 사회가 가장 깊이 끼어든다. 동호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예술 애호층에 친밀하고 개인적인 살롱 마담 모임 같은 것이 생긴다.
동호회와 살롱 마담 모임은 공통적으로 페쇄적인 데가 있다. 예술 숭배 정신은 이런 숭배를 가장 받아들이지 못하는 영역으로 들어간다. 따라서 예술 직업은 요구가 많은 것으로 맛인 동시에 맛있는 식도락으로 표현한다. 이것은 전문가들이 음식 분야에서 끌어 낸 어휘다. 전문가들이 결국 크기가 컸던 어휘를 중간 크기로 길러 내면 그것이 유행이 된다. 물론 나는 문학이 독자만 아니라 해석자도 전제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동호회 및 연결되는 것도 조건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학이 완성을 요구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가장 위대한 카프카도 완성되는 걸 전제로 하지 않았다. 카프카를 살롱 마담들과 동호회에 잡아 두어도 좋다.
교회가 준공된다. 그러나 교회의 낙성식은 교회문을 닫으려는 게 아니라 열어 주는 것이다. 그것도 모든 사람에게 열린 것이다. 우린 한 그룹에 영입되기도 하고 추방도 된다. 오만과 오만한 사람에 대한 개념이 추가된다. 나는 우리집 아이들과 한 가정부에게 카프카와 포크너를 읽게 했다. 예술은 대중의 것이라는 자만심에서가 아니라 카프카와 포크너를 존경하기 때문이었다.
문학을 전문가를 위해서 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해하기 힘들다’는 개념은 상대적인 것이다. 그림 형제의 동화들도 이해하기 힘들다. 작가는 어떤 독자도 배제하지 않는다. 작가는 겸손으로 글을 쓰는게 아니라 자존심으로 쓴다. 만족스러운가는 독자 사회에 달려 있다.
내가 이 말을 여기서 꺼낸 것은 쓴 글이 사회에 자리잡을 때 어디로 또는 어떤 사회로 가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전문가들을 위해서만’이라는 방패를 가지지 못하고 무력한 말을 하면서 동호회에서 벗어난 작가는 어떤 힘과 관계를 맺어야만 한다. 내가 가끔 갑자기 똑똑하게 생각하는 게 있다. 그건 대단히 간단한 가정이다. 소설 작품은 대중 신문의 논설과는 다른 해석 장치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 간단한 가정이 그리 간단하지 않은 것 같다. 나는 비평의 대상인 두세 가지 경험을 한 남자에게 적용하겠다. 그리고나서 일반적인 가치에 척도를 맞쳐 대상을 풀어내는 사람들에게 적용해 보겠다.
유명한 예를 하나 고르겠다.
라디오 드라마나 장편 소설에서 한 굴뚝청소부가 지붕에서 떨어졌다. 구성과 연극성 즉 미학적 이유로 지붕에서 떨어져야만 한다. 그러면 굴뚝청소의 소송이 일게 된다. 보통 굴뚝청소부는 지붕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항의와 분노 그리고 흥분은 기실 그리 깊은 게 아니다. 따라서 노력할 가치가 없다. 작가는 굴뚝 청소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브레히트에 이르는 서양미학 전체를 훑어볼 필요가 없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간에 추락한 굴뚝청소부에 대해서 의기 양양해하는 건 최소의 가정도 안된다. 작가는 이런 가정을 함께 전할 수 없다. 굴뚝청소부는 작가로서는 전혀 무관심한 것이다. 작가는 어느 계층에 속한다고 구분되길 바라지 않는다. 작가를 굴뚝청소부, 마르크스주의자, 가톨릭교도, 정부의 사무관 등으로 분류할 수 없다. 작가가 한 번 재미로 치른 굴뚝청소 기능장 시험에 합격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작가 이외의 일은 모두 그 밖의 것들이다. 작가가 다른 것과 연결하는 것도 적어도 일곱 가지가 안 되면 연결이 아니다. 또한 작가는 어떤 중간이 되는 걸 찾는다. 그러나 그것도 바깥에서 찾는 것이다. 굴뚝청소부, 마르크스주의자, 가톨릭교도, 정부의 사무관 등에서 그리고 중간이란 개념에서는 언제나 둥근 원의 중간을 얼른 생각하게 한다. 미학에서는 쓸모없다. 삼각형, 구각형, 오십칠각형에도 중간이 있다. 바로 이 굴뚝청소부를 떨어지게 하는 필연성은 수없이 많다. 아마도 작가는, 예쁜 유리구슬 한 개가 20년 전부터 처마에서 사람들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고 생각하리라. 바로 굴뚝청소부가 발견한 구슬이다. 구조차가 그를 구하려고 급히 오는 동안 그가 처마를 꽉 붙잡고 있으면서 찾아낸 구슬이다. 또한 작가에게는 이런 것도 중요하다. 굴뚝청소부가 떨어지고 꽉 붙잡고 창가의 걸상을 디디는 등의 우희를 통해 병원이나 어느 젊은 여자의 공부방으로 가게 할 수 있다. 이 젊은 여자는 그에 대한 사랑으로 소진한 상태였다. 또한 작가는 운동화가 지붕 위에서 떨어질 때 만들어 내는 소음이 필요하다. 떨어져 나가는 추녀 물받이에 붙어 추락하는 사람을 날게 하는 것이 작가로서는 중요하다.
작가는 떠다니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에게 갖은 독백과 서정성을 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주의해 볼 만한 이유이다. 차갑지만 해롭지 않은 것이다. 이런 이유는 인간적이란 말처럼 추상적이고 비인간적이란 말처럼 바보 같을 수 있다. 더 짧게 말할 수 있다. 정당과 이해 집단 그리고 교회는 거의 언제나 틀린 곳에서 일거리를 찾아낸다. 이것들은 아이들의 유리구슬이나 사랑 때문에 소진한 젊은 여자에겐 관심이 없다. 그리고 추락하는 사람이 변장한 카사노바나 돈환일 수 있다는 것에도 관심이 없다.
여기서 또 완전히 다른 두 가지 미학적 견해가 생겨난다. 이것도 그들에겐 관심이 없다. 비행기 회사의 경우와 비슷하다. 비행기 회사는 비행기가 추락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와 동시에 작가가 철도 회사나 자전거 회사의 돈에 매수되었다고 추측한다. 아니 오히려 이런 자극과 모욕에 대해서 항의하면 안 된다. 물론 작가의 의도가 있다. 작가는 추녀물받이를 날게 하고 유리구슬이 새총으로 오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아치를 그리면서 어느 경찰관의 헬멧을 맞추도록 한다. 작가로는 완전히 물리적인 것이 중요하다. 그는 유리구슬이 과연 새총으로 마분지나 유리, 심지어 철붙이도 뚫고 나갈까 실험하고 싶다. 그리고 탄도를 통해 사업상 손해와 정치를 자신에게 종속시킬 곳을 생각한다.
그 이상 말하지 말자. 단지 나는 사회와 종교 그리고 에로의 미학을 보는 두세 가지 관점을 제시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작가가 탄도와 미학을 연결시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또한 구슬도 틀린 목표물에만 아니라 눈에도 들어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굴뚝청소부도 너무 일찍 창가의 소파에 발을 디뎌서 젊은 아가씨가 아직도 화장복을 입은 채 거울 앞에서 얼굴의 맑은 피부와 빛나는 눈을 확인하고 있을 수도 있게 한다
나이 들면서 나는 지금껏 너무 급한 나머지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미심쩍은 일을 하나 확신하게 되었다. 내가 독자로 생각하는 비평가는 분류하고 표현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라도 빠뜨리면 그는 작가가 생각한 바를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면 이미 말한 바 있는 정의의 미로가 생긴다. 이 미로는 모욕과 자극 그리고 항의와 갖가지 바보짓으로 이미 있던 미로보다 더 애매해진다. 그러면 최소의 가정도 요구할 수 없을 게 분명하다. 작가가 전달하기 위해 골라 낸 시각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찾아내는 걸 요구할 수 없게 된다. 더 짧게 말하면 비교적 사실적인 장편 소설에는 복잡한 마력이 있어서 독자와 비평가는 작가가 선택한 시각에 맞춘 임의의 전문적인 희극성을 알지 못하면, 본의 아니게 희극 배우로 변하고 만다.
다른 경우를 말해 보자. 라디오 드라마에서 굴뚝청소부가 떨어졌다. 어질고 순진한 한 여자 청취자가 금세 앰뷸런스를 부를 생각을 할 수 있다. 어디로? 라고 물으면 우리는 방송국으로 가라고 말한다. 이 경우 이 여자 청취자가 방송국 회장보다 더 미학적으로 정확하다. 회장은 금세 방송국장 그 다음으로 방송국 데스크에게 전화를 걸어 이의를 제기한다. 내가 이따금 무얼 갑자기 깨달을 때가 있다는 걸 반복해 말한다. 음악 용어로 가볍고 진지한 걸 동시에 뜻하는 말을 가정할 수 없을까? 진지하고 명랑함은 히쭉 웃는 바보짓이나 유머 또는 풍자가 아니며 그 범주가 다르다. 풍자는 결코 조소하는 것이 아니다. 가정을 만들어 내는 것은 작가가 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작가와 같은 언어로 가르치고 배우고 분석하고 비평하는 사람의 몫이다. 간단히 말하면 가정하면서 써 놓은 글을 취급하는 사람들이 할 일이다.
이 도시에서 테오도 W. 아도르노가 대단한 말을 하나 했다.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쓸 수 없다”, 나는 이 말을 바꾸어 표현하겠다. 아우슈비츠 이후 숨쉴 수 없고 먹을 수 없고 사랑하지 못하고 책을 읽을 수 없다. 그러나 처음으로 숨을 쉬고 담배에 불을 붙인 사람은 살아남기로 결정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먹고, 사랑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이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여러분께 말하고 있다. 나는 기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믿음직한 지역, 즉 언어의 지역을 생각했다.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결혼도 했고 담배도 피웠다. 그리고 체류를 연장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그는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주머니에 폭탄을 넣고 살아간다. 우리는 모두 주머니에 성냥과 담배와 나란히 폭탄을 가지고 있다. 폭탄 때문에 시간은 지속하는 걸 거의 막아 버리는 다른 차원을 얻게 되었다. 진지하고 가벼움이 중요하다. 그 밖에 남을 건 하나도 없다. 뿌리를 내린 것도 전혀 없다. 발로 진득하게 땅을 밟을 수도 없다.
잃어버린 고향, 잃어 간 관계들, 믿음이 없는 지역에 대해서 앞으로 또 한 시간 말하겠다. 왜냐하면 인간주의와 사회 그리고 연결됨은 고향이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향이란 이름은 이웃 사람과 믿음을 포함하는 말이다. 이것이 없으면 사회의 기본 단위인 가정은 절대적이며 독이 묻은 요새가 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비전문가를 배척하는 동호회나 살롱 마담 모임으로 밀려나게 된다. 동호회, 살롱 마담 모임 그리고 폐쇄된 사회와 비밀 결사는 전체주의 사회의 현상이다.
이것들은 내게 언짢게도 1933년 이후의 첫 몇 년을 기억나게 한다. 당시에도 있었던 동호회와 그룹은 개인적이고 비밀투성이였다. 이것들은 대개 아마추어로 안전 장치가 엉성했다. 이미 간첩과 정보부원과 교제하고 함께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간첩들이 빨리 끼어들었다. 국가 조직에 끼지 않은 사람이 두셋 청소년들과 축구를 하면 그 후 체포와 신문이 따랐다. 가끔 경고로 끝났지만 더 나쁜 결과를 낳기도 했다. 독재자는 우발적인 일을 벌이기도 했다.
오늘을 보자. 연구소나 대학교, 출판사, 그룹, 방송국으로 위장하지 않고 이것들의 주변과 그 안에 형성된 학술과 비밀결사가 바로 비공개의 권력이다. 하나하나의 순수한 전술부대만 있지 작전은 아무데도 없다. 그렇다면 적전은 숨어서 이루어지는가? 이 경우 자유로운 문학이 이런 전술 단위 부대들 사이에 생긴 혼란 속에 스며든다. 문학은 그 자유로움 때문에 측량할 수 없을 정도의 기대와 주목의 대상이 된다. 문학은 종교와 직업 조합을 대신할 수 없다. 비정상적인 전선의 뒤바뀜과 위치 변화가 생긴다. 왜냐하면 오해의 깊은 골을 넘어서 우정을 맺으며 또 적을 안다는 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학술이 아니라 종교 테마를 선택한 작가로서는 틀린 걸 찾아내는 게 중요하지 않다. 앞으로는 점점 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세계에서 투쟁하는 교회를 위해서다. 이에 따른 훈장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우리나라에 사실주의에 대해 이상한 개념이 지배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일 전짜리 동전처럼 무미건조하고 쉬운 단어가 된 것 같다. 아이들은 누구나 늦어도 첫 번째 등교하는 날 언어의 믿음이 가는 나라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신이란 단어도 있는 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정치는 말로 하는 것이다. 학술도 말로 표현된다. 종교도 말로 알린다. 그러나 이 말 중의 하나도 가까운 데 있는 동전 투입구에 맞게 간단하고 쉽지 않다. 대중을 위해 대량으로 인쇄된 글이 말을 다듬어서 통용할 목적이었지만 훼손되어 무미건조할 위험에 들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수백만 권의 포켓북이 팔렸다. 이 시대 문학의 거의 모두가 이런 방법으로 인기 있게 되었다. 또 몇 년 후에는 전문서적도 그렇게 될 것이다. 누구나 주머니에 가지고 있는 책은 기실 선물 받은 것이다. 가장 값싼 시간당 임금으로 살 수 있는 책이다. 하다못해 의료보험 처방도 한 번에 오십 페니히의 수수료를 낸다. 이 돈은 자가가 포켓북 한 권에 대해 받는 원고료의 8배에 해당한다. 대중 문학은 대량 매체를 필요로 한다. 대중 매체에 맞춰 미학적 가정을 쓴다. 대학교가 대량 인구의 연구소로서 대량으로 늘어날 것이다. 나는 작가로서 대량 출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반대하던가 찬성하지 않는 사람이 만든 해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로서는 가정이 있는 텍스트에 대해 가정도 모르면서 해석하는 권리가 두렵다
우리가 동방이라고 부르는 세계의 일부는 졸렬하게 가끔 폭력을 사용하는 행정을 펼치려고 시도하지만, 서툴지만 인간주의와 사회적인 미학을 만들었고 독자들의 놀라운 감수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감수성은 사회적 미학에서 정신과 종교를 알 수 있다. 우리가 서방이라고 부르는 세계의 일부에서는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것을 극구 거부하고 이를 선전한다고 생각한다.
하이테크의 지식 계급은 일용품의 소모 기간을 소비 경제가 휘청거리지 않도록 정확하게 계산하는데 관계했던가 앞으로 관계해야만 한다. 이런 고도의 학술 지식 계급이 인간을 소모시키는 일종의 거대한 아우슈비츠를 만드는 일에 관여했는가 그건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여기서 말한 거대한 아우슈비츠의 문에는 ‘소비가 자유를 준다’는 푯말이 드리워질지 모르겠다.
사회 분야의 요구와 판단에 따라 예비 인력을 제한하는 데도 수준급 교양을 갖춘 지식인 예비 인력이 필요하다는 건 나로서는 결코 납득이 가지 않는다. 예를 들면 종교 단체의 내부에서는 전문가나 비전문가나 모두 이곳 언어를 사용한다. 교육이 모든 사람을 위한다고 선언하는 곳에서 교육이 직업 조합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에 상처를 입힌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마지못해 듣기는 했지만 필요하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교육이 왜 소수에게만 주어지는가에 대해서는 우리의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에 그 결과가 나올 것이다. 과거나 지금이나 자식들이 상급 학교에 가는 걸 거부하는 부모들이 있다. 자식들의 재주와 머리가 공공기관에서 증명했는데도 거부하는 것이다. 이 부모들은 재정적인 부담이나 노력이 걱정스러워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대학 출신의 위상을 얻는 순간 생겨날 고통스러운 이별이 두려워서 거부한다. 이런 관계에 대해 쓰라린 경험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교육받은 계층의 오만이다. 여기서 예를 하나 들겠다. 그러나 이 예는 많은 사람에게 해당한다.
독일인은 교육으로 상처받은 민족이다. 이런 상처가 선동하는 데 가장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이 상처가 교육 수준, 예비 인력, 흥분하는 사람들을 만들어 냈다. 한 번 나치 지도급의 교육 수준을 생각해 보면 된다. 그들 실패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독일 대학교의 권력을 거머쥐었다.고 한다. 여기서 불행한 모습이 생겨났다. 독일 사람들 중에서 가장 순수한 인간으로서 교육받은 교수들이 이런 대학의 권력 장악에 직면하여 힘이 없었던 게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 폭력에 굴복했던 것이다. 나는 예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규정이 아주 엉망이었다. 중요한 것이 빠져 있었다. 오늘날 지식인들을 반대하여 선동적인 격렬한 어휘를 사용하는 투쟁은 그 근원을 이미 말한 교육의 상처에 두고 있다. 자신들의 대상과 교육을 찾지 못한 우수한 지성인들이 이런 교육의 상처에 개입하면 생명을 위협할 선동이 생겨날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권력자들이 대학교에 위험이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대학교는 단어 본래의 의미에 따라 스스로 중세의 자유를 보장받고 있다. 면역이 생겨 공격받지 않는다. 그 밖에 국가도 대학 때문에 위험을 받지 않는다.
학술이 화려하게 등장하면 공격받지 않는다. 더 나아가서 대학이 자연 과학, 의학, 사회, 과학을 넘어서 산업체와 협동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 거의 산업체의 일부가 되면 더 이상 위험이 따르지 않는다. 지금부터 대학이 안고 있는 고유의 항구적인 위기(대학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를 어떻게 이겨낼까를 나는 걱정한다. 그러나 그건 나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프랑크푸트에서 진행되었던 새 아우슈비츠 소송 사건에서 두셋 피고의 증인들은 출두하지 않았다. 피고들은 배후에 있던 대학의 학자들은 소환하라고 했다. 하얀가운을 입은 빛나는 학자로소 출두하기를 바랐다. 내가 지금처럼 앞으로도 인간주의 미학에 대해서 계속 쓰게 되면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이 광고 활동에서 화장품과 의학품을 칭찬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환자에게 놓아 줄 주사바늘이 부족할 수 없다. 더 자세하게 말하면 교육이 그 완성과 학술 면에서 권력이 되었다는 걸 알리고 싶다. 우리는 교육에 복종하고 종속되었다. 학술은 학회나 대학교에서 그 자체의 법과 정당성을 가지고, 수많은 성문․비성문 규정으로 지원받으면 외부에서 어떤 위험도 받지 않는다. 교육 때문에 상처를 입은 민족으로서 이런 입장은 새로 왕관을 쓰는 거나 진배없다. 결국 학술이 반응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복종과 종속이 지금껏 역사가 진행하는 과정에서 독일 사람들이 유일하게 인정할 수 있는 사회적 현실이기 때문에 그 힘은 배가된다.
이런 순간에 비로소 갈릴레이도 실제로 독일에서 개가를 올렸다. 갈릴레이가 권좌에 오른 것이다. 이제 갈릴레이가 시작할 일의 순서가 보이게 되었다. 교회가 아직 권좌에 있고 중요한 소위원회에서 영향을 미치는 건 분명하다. 그리고 가끔 새로운 영향도 미친다. 그건 전투로서 일본 군인들이 패망한 후 2년, 3년 아니 더 오랫동안 정글에서 벌였던 전투와 비교할 만한 것이다. 이 투쟁은 중요하다. 그리고 놀랄 만큼 비정상적으로 전선을 바꾸고 이동도 할 것이다.
종교는 어떤 사회적인 현상에서나 더 이상 공격하지 않는다. 단지 방어만 한다. 그런데도 아직도 휘말려 있다. 곧 쫒기던가 동유럽 같은 정황에 들게 될 것이다. 휘말리고 쫒기는 상황에 들게 될 것이다. 그러면 유물론자들이, 자유를 위해 투쟁한 유물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의리를 지키고 믿는다 는 게 드러나게 된다. 내가 제시한 이 단계에서는 작가는 모두 교육의 상처와 학술 사이에서 엄청난 책임이 늘어난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런 책임은 사회 활동만으로는 변화할 수도 없고 강화시킬 수도 없다.
작가의 위상이 강화돼야 한다. 작가는 무슨 교육 과정을 반드시 졸업하지 않았더라도 교육받은 것이다. 작가가 늪지나 들 또는 슬럼이나 정글에서 나온 사람처럼 순진하더라도 그는 작가임에는 틀림없다. 거의 표현할 수 없는 세계에서 무얼 말한다는 사실이 작가를 교육받는 수준으로 올려 준다는 건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림을 그려낸다는 것이 교육에서 가장 수준이 높은 단계다. 그러나 그는 작가로서 학술이 지닌 것을 가지지 못했다. 그에겐 도구도 없고 보조 인력도 없다. 그는 문학의 가정들을 조정할 수도 없고 만들어 낼 수도 없다.
2.
첫 번째 강의 후 내가 무엇에 대해서 말했던가를 분명히 해 두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가 대학에서 어느 정도 열심히 공부했던 건 오로지 고대 언어였다. 25년 후 처음으로 다시금 고대 그리스어 사전을 찾아 ‘poieo’ 의 단어 뜻이 담긴 카탈로그를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poieo’ 의 동사 ‘poieomai’의 여러 가지 뜻도 중요하다. 이 타동사를 어떻게 사용하는가는 작가에게 맡길 일이라고 노대가 캐기가 말한 바 있다.
이제 그 동사의 뜻은 빗방울처럼 수다하다. ‘poiein’을 단지 ‘만들다’라는 뜻만 있다고 하는 건 틀렸다고 사전의 세 가지 항목에서 지적했다. 이 단어는 ‘창조한다’는 뜻도 가질 수 있다. 또한 ‘야기 시키다’, ‘또 만들 수 있다’, ‘준비하다’, ‘회사하다’, ‘이룩하다’, ‘희생하다’, ‘시를 짓다’, ‘이야기를 꾸며내다’란 뜻도 가질 수 있다. 이야기를 꾸미다 라는 단어에는 ‘무얼 만들다’, ‘무얼 묘사하다’, ‘무얼 설명하다’, ‘무슨 의견을 내다’ 등의 뜻이 있다.
그리고 ‘poiein’는 그 밖에 이런 뜻들도 있다. ‘행하다’, ‘거래하다’, ‘일하다’, ‘노력하다’, ‘효과적으로 말하다’, ‘부추기다’, ‘작용하다’, ‘영향을 미치다’, ‘인정하다’, ‘일을 끝내다’, ‘말을 전달하다’, ‘시행하다’, ‘기획하다’, ‘일을 처리하다’, ‘이끌다’, ‘일하는 도중에 있다’, ‘노력하다’, ‘보여주다’, ‘기지를 다해 처리하다’, ‘만들어 내다’, ‘세우다’, ‘열다’, ‘설정하다’, ‘일을 꾸미다’, ‘가져다 내다’, ‘기념비를 세우다’, ‘주선하다’, ‘정돈하다’, ‘얻다’, ‘가져다 주다’, ‘실적을 쌓다’, ‘열거하다’, ‘진척시키다’, ‘방향을 지시하다’, ‘파악하다’, ‘공급하다’, ‘비판적인 말을 하다’, ‘넘어뜨리다’, ‘데리고 가다’, ‘간섭하다. ‘poiein’ 이란 단어와 합쳐지는 아름답고 겸손한 표현이 있다. ‘kalos poeiein'이다. ’정말 다행이다‘라는 뜻이다. 또한 ’무관심하다‘, ’뜻대로 하시오‘ 라는 의미가 있다.
마지막으로 'poiema'는 ’단지 만들어진 것‘, ’작업‘, ’일‘을 뜻하며 이것들의 효과, 결과, 인공으로 창조한 것을 아우르는 말이다. 이것은 또한 연장, 문학 작품을 뜻하는가 하면 마지막 의미는 글로 된 작품 즉 책이다. 이렇듯 많은 동사로 이루어지는 일을 모두 행하는 ‘poietes’는 창조자이며 저작권자, 제작자, 발명가이며 시인이자 환상을 그리는 사람이다. 신약성서에서도 ‘poietes’는 행동하는 사람의 뜻이다. 말을 완성하는 사람이다. 창작이론 강사에게 주어진 이런 50가지 이상의 뜻을 가지고 나의 활동과 행동자의 입장을 계속해 나가겠다.
학술이 총체적으로 지배함을 설명하려는 시도와 관련하여 나는 복종과 예속을 유일한 사회적 현실로서 지적한다. 이 사회적 현실은 독일인들이 지금까지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받아들였던 것이다. 더욱 간단하게 말해 보자. 독일인들은 복종을 요구하는 만큼 복종하는 걸 좋아한다. 불행한 상황이다. 불행하다고 표현하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전쟁이 끝나고 나는 해방되었다고 느꼈다. 억지로 제복을 입지 않아도 되는 온전한 민간인이 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불행한 상황은 이렇다. 미군 포로수용소에서 있었던 일로, 첫 점호 때였다. 함께 있던 포로 두셋이 과감하게 열심히 앞으로 나갔다. 그들은 인내와 살인에 대해 설교하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민주주의 사고를 전파하기 위해 배울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서했다. 과감하고 열심이고 예속적이며 미학이 없고 시적이지 않았다. ‘poiein'의 50가지의 두세 배나 되는 의미 중에는 예속됨이라는 동사는 타동사에도 없고 자동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포로수용소에 있던 순간의 문학은 그 순간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해방되었지만 잡혀 있고 빡빡하다. 대단히 빡박하게 살아남는 일이며, 미군대위는 우리에게 제 마음대로 평화와 행복을 약속하는 순간이다. 이 미군 대위는 그걸 믿는 것 같기도 했고 또한 믿기도 했다. 맥주와 소시지도 약속했다. 나는 곧 자유가 없이 단지 해방만 되어 포로수용소로 들어가리라는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과감하고 열중하는 예속된 사람들을 위한 수용소로, 이 사람들은 나를 이미 출생과 출신부터 정해져 있던 민주주의자로 만들려고 하는 것 같았다.
이걸 나는 아직 글로 쓸 수 없었다. 그리고 나의 글로 쓴 작품, 문학 작품, 그리고 책들과 관련하여 나는 노대가 캐기(Adolf Kaegi 1849-1923, 스위스 교수, 인도게르만어 전공)의 말을 굳건히 따른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까지 썼던 것보다 쓸 수 없었던 것으로 훨씬 더 창작이론을 발전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러기위해서는 더 큰 시간대와 연륜이 필요하다. 나이가 50밑으로는 자신의 창작 테크닉에 대해서 말하고 글로 쓰면 그건 정확하지 않고 따라서 큰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설명하는 게 더 좋겠다. 행동자인 시인과 관련하여 두세 가지 더 말하겠다.
한 시인이 적막한 밤거리를 산책한다. 이때 ‘poiein’의뜻은 ‘시행하다’, ‘준비하다’이다. 뮤즈(시의 여신)가 그에게 속삭여 준다. 돌을 세 개 들어서 가까이에서 가장 좋은 창문에 던지라고 명령했다. 그가 돌을 던졌다. 언제나 뮤즈의 속삭임에 따르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밤에 쉬던 사람들이 방해을 받고 창문을 열고 그를 대고 아무리 무례한 놈, 깡패, 건달, 불량배라고 욕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창문을 열 때 유리 조각이 길에 떨어지고 소음이 일었다. 따라서 동네 전부가 흥분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살인 의도, 능욕, 가택 침입, 방화, 강도 내지 국가를 위험하게 할 인물로 혐의를 받는다면 놀라게 될 것이다.
그는 심지어 재판정에 서야할 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첫째로 그는 뮤즈의 속삭임을 따랐을 뿐이고, 둘째로는 그와 뮤즈의 공통된 의도는 중요한 침실에 좋은 공기를 넣어 주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대체 어떻게 뮤즈가 명령을 내린단 말인가? 그러자 엄청난 소요가 일었다. 왜냐하면 시인은 다른 사람들처럼 항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들은 명령의 비상 상태에서 행동한 가벼운 죄로 생각되면 언제나 항소할 수 있다. 나는 관중의 흥분과 동요를 경제적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균형을 지키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행동자의 의미로 파악될 시인은 과연 무슨 일을 시작할 수 있을까? 이제 그는 쇼윈도나 교회의 창문에 돌을 던지지 않는다. 기껏해야 물에 던진다. 왜냐하면 돌이 만든 원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돌 한 개가 원만 그리는게 아니라 모든 물리법칙 심지어 파도까지도 거역한다는 걸 보고는 놀란다. 돌을 던지면 갑자기 조용하던 늪 전체가 움직였던 것이다. 오리들이 깨어나고 물고기들이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행동자인 시인은 이 늪에 대한 경고문 게시판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수심이 1미터 50센티이고 그중 절반에 해당하는 75센티는 버슬버슬하고 더러운 물질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지 못했다. 이제 그는 무죄엔 것이다. 그는 뮤즈를 끌어냈다. 뮤즈가 시인에게 순간의 문학을 만들라고 속삭였던 것이다. 그는 물을 조금도 더럽힐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물이 더렵혀진 건 증명되었다.
독일 사람은 복종해도 된다. 심지어 복종해야만 된다. 문을 부술 수 있다. 벽을 허물 수 있다. 총을 쏘고 칼로 찌르고 때리고 행군할 수 있다. 그리고 약탈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를 위해서 약탈할 수는 있지만 자신을 위한 자연적인 동기에서는 그러지 못한다. 그리고 독일인은 세속화 되지도 않았고 가톨릭 신자 명부에 적힐 수도 없는 처녀가 명령을 할지라도 그녀의 지위가 명령을 할 수 있는 위치라면 그에 복종한다. 50가지의 서로 다른 행동을 동시에 행하라는 명령을 받을 수 있다.
나는 이런 명령받는 민주주의가 있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이런 형식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명령’이라는 단어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이건 재판정에 속하는 단어로 지워야 할 단어다. 무정부주의자인 작가의 나라 군대는 이 단어가 뜻하는 수많은 일을 암시로서는 해낼 수 없다. 문학이 불러일으키는 사건들은 모두 유감스럽게도 과장된 것이라고 말하겠다. 사건을 법정에서 일어난다. 법정이 명령이란 단어를 규정한다. 작가이며 저작자이자 시인인 그는 거주하기만을 즐기는 게 아니다.(거주하다는 행동하다는 뜻을 가진 단어) 작가는 자신이 가지고 쓰는 언어를 살 만한 언어로 만든다.
사람이 혼자 산다는 건 좋지 않다. 사람이 스스로 남아 있는 갈비뼈로 고향과 이웃 그리고 우정과 믿음을 만들어 낼 수없다. 그는 아브라함처럼 자기 민족을 만들 수 없다. 그러나 민족에 접근해야 된다. 그를 위하는 민족의 숫자가 늘어나야 한다. 또한 친구와 독자 그리고 관중만 필요한 게 아니다. 그는 동맹자도 필요하다. 화를 내고 이기기만 하는 공식적인 동맹자만 아니라 인정하는 동맹자가 필요하다. 공허와 질투, 질병과 개선 그리고 분노는 개인적인 일이어야 한다. 인정해야만 할 더 중요한 것은 살 만한 나라에서 살맛나는 말을 찾아내는 일이다.
나는 이제 고향 문제로 들어가겠다. 아들러(Hans Gunther Adler 유태계 독일어 작가 및 사회학자, 1910-1988)의 단편 소설 <여행> 중에 고향에 대한 이런 글이 있다.
-그들이 소식을 전달하러 올 때면 대개 늦은 저녁이나 밤중이다. 늦은 저녁은 요란한 빛을 거부한다. ‘넌 거주하면 안 된다.’ 이것은 그들이 인쇄하여 전달한 소식이었다. 사람들은 이미 불행한 사태가 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따라서 거처들이 이미 파괴되었다. 그 후 비행사가 화기를 발사하여 그들을 가엾게 했다. 비행사들은 훨씬 더 늦게 와서 텅빈 잿밭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집에서 쫒겨난 사람들을 데려다가 복수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들에 대해서 비행사들은 거의 몰랐다. 그리고 비행사들은 측량도에 맞춰 말살시키려는 도시 부분을 결정하면서도 그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밤중 온통 우레가 진동하는 하늘에서 비행기들이 미친 듯이 내려왔다. 그리고 살인하는 짐짝들을 허무에 떨어뜨렸다. 이렇듯 스스로 깨어지는 허무는 그들도 처음으로 알게 되어다. 상처 입은 사람들은 받아 줄 거처가 없었다. 버려진 소굴과 약탈당한 움막집이나 부당한 재물이 있었다. 이런 재물은 강도도 소유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일은 훨씬 후에 일어났고 우선 관련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이 사람들에겐 이미 오래 전부터 일려진 게 있었다. ‘넌 거주하면 안 된다.’
‘넌 거주하면 안 된다.’는 말은 명령이었다. 이 단편 소설은 내게 많은 걸 설명해 주었다. 소설을 읽는 동안 독일 전후 문학에서는 거주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고 이웃과 고향을 전제로 한 책이 거의 없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따금 외교관들이 한탄하는 말을 지적하자. 독일 전후 문학은 외국에서 독일연방공화국의 외교 방식과 경제 회담에서 나타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그림을 전달한다는 것이다. 독일을 대표하는 여러 가지 분야를 한 번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는 테마라고 생각한다. 이런 비교에서는 독일의 큰 신문 광고란을 자세하게 포괄적으로 공부하는 걸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광고란에는 지구상의 모든 지역에서 대지를 팔고 사겠다는 내용이 실린다. 피난 가는 민족이다. 세계의 어느 곳에 독일연방공화국처럼 대지를 열심히 사겠다고 하는지에 대한 조사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나는 거주할 대지를 말한 것이지, 공장을 지을 대지를 말한 게 아니다.
정치가들은 당대의 문학을 칭찬하려고 할 때, 우리 시대나 독일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지만 불편하고 곤란하다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한다. 당대의 문학에서 정치와 사회 비판이 어떠한가는 그때 그때 생기는 자료로서 알 수 있다. 작가는 표현을 찾고 문체를 만들어 낸다. 작가는 이미 글로 쓴 도덕과 표현, 문체 그리고 형식의 도덕을 일치시키는 어려운 일을 해야 한다. 따라서 정치와 사회 그리고 이것들의 어휘와 습관 및 신화와 풍속 등이 이미 있던 자료로서 사용된다. 그런데 정치가나 사회가 병들고 위협받는다고 생각하면, 언제나 정치가와 사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게 된다. 이것들로는 변명할 수조차 없다. 동기가 되는 일도 드물고 모델로서는 거의 맞지 않는다. 모델은 그들을 지나 넘어 가는 것이다. 따라서 비교적 사실적인 소설에서도 대상을 지배하고 짜 맞추는 위력마저 현실에서 무엇이 소설에 들어와서 가공되고 조립하여 변신할 수 있을까 하는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만들어 낸 현실인 소설에서 무엇이 나와서 영향을 주는가 그것이 중요하다. 덜 꼼꼼한 문학형식이나 글로 쓴 모든 것 그리고 어떤 르포에서나 바꾸고 조립한다. 골라내고 오랫동안 ‘표현’을 찾는다.
이런 일반적인 사실도 점차로 알려져야 한다. 사진조차도 현실에 충실한 게 아니다. 사진도 골라서 화학의 변화 과정을 거친 것이다. 사진은 재생산된 것이다. 가령 누가 소설에서 현실의 충실성이나 인생과 가까운 걸 발견하면 그건 만들어 낸 현실이나 인생과 가깝도록 만든 걸 찾아낸 셈이다. 독일인들이 거주할 수 없다는 건 현실이다. 이건 전후문학에서만 만나는 현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통계로는 누구나 모두 어디선가 어떻게든지(떠돌이들도 등록되어 있다) 거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나 어디론가 가려고 하는 인상을 받는다. 이웃을 지속적이고 믿음을 주는 대상으로 그린 데는 한 곳에도 없다.(이웃, 서로 돕는다, 서로간의 깊은 유대, 동맹 관계, 친절 등은 단지 살인자들만 아는 것 같다. 그밖에 다는 사람들은 서로 돕지 않는다. 깊은 유대도 맺지 않는다. 그리고 동맹 관계가 아니다.) 거처를 전후 문학은 단지 잃어버린 것으로만 묘사했다. 현재 있는 거처는 임시로 있는 것이다. <여행>이라는 단편소설의 한 문장을 소개하겠다.
- 파울은 자주 방에 앉아서 주위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건 믿음에 근거한다고 오랫동안 생각했다. 이 믿음이 상처를 입으면 그 관계는 이미 끝난 것이다. 그러면 그 결과를 알 수 없다.
친절한 사람들의 도시를 이야기한 게 없다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실로 당연하게 살 만한 곳이 하나도 묘사되지 않은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웃이 너무 많이 상처를 입었다. 믿음이 너무 많이 사라졌다. 명령에 따른 것이다. 언제나 미움과 열광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명령에 따른 것이다. 상처 입은 이웃과 상처 입은 믿음, 상처 입은 신앙이 생긴 것이다. 약을 주고 때리는 일, 상처 주는 취급은 모두 명령에 따른 것이다. 명령이 떨어지면 한 지방이 온통 파괴된 이웃과 부서진 믿음으로 가득 차게 된다. 나는 우리 학교들의 벽에 붙일 좋은 말을 하나 알고 있다. 잉에보르크 바흐만의 시구이다.
낮에 입은 제복은 인내를 뜻한다.
훈장은 가슴 위에 붙이는 희망을 위한 가여운 별이다.
.....
훈장은 부대의 깃발에서 도망치라고
주는 것,
친구 앞에서 용기를 부리라고 주는 것,
가치가 없는 비밀을 털어놓으라고 주는 것,
그리고 누구의 명령도 따르지 말라고 준 것이다.
이 시구를 우리 아이들의 교과서에 영원히 넣어 두어야겠다. 명령을 거부한 영광스러운 범죄에 책임지고 죽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그들이 부당하게 죽이고 파괴하려고 하지 않았던 까닭에서이다. 명령이라는 단어가 법정에 서더라도 명령을 시행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말은 너무 적다. 총살하라, 떼어 내려라 등의 명령이었다. 사람은 죽음에서 구원받았고 도시와 다리들이 보호받았다. 비상 명령은 비인간적인 것과 관련있다. 인간적인 것은 이 혐의를 받게 된다. 왜냐하면 비상 명령에서는 사용할 데가 없기 때문이다. 두세 장 깨어진 창문 유리에 대해서 소란을 피울 것이 아니라 국어 독본에 대해서 흥분해야 한다.
전후 문학에서 유일하게 격조있고 명성을 얻은 도시가 있다. 그것이 멸망한 도시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단치히이다. 베를린은 분명히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 베를린은 정이 가는 지역으로 변신하지 못했다. 비극으로 가득 찬 도시가 되었다. 단지 한 편의 희곡 자료도 주지 못하는 도시가 되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이 문학 장르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범죄 소설 자료조차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분명히 독자나 비평가는 작가가 집 앞 빗물통에 들어 있는 것 같은 현실을 가졌다고 가끔 생각하리라. 잠깐 나가서 물을 퍼 오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빗물이 있다고 하자. 그리고 또한 집 앞 빗물통에 물이 있다고 하자. 빗물 양이 얼마나 되며 이것들은 비가 올 때마다 얼마나 서로 섞일까. 이걸 베를린을 예로 들어 증명해 보자. 집 앞의 현실은 그리 멀리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매일 볼 수 있고 경험했던 일들을 언어로 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 게 틀림없다.
나쁜 장면을 보자. 멀리 가는 기차에는 온통 지도급 인사들로 차 있다. 기차들은 남쪽으로 갔다. 북쪽과 서쪽으로 갔다. 그러나 동쪽으로 가는 기차들은 텅 비었다. 아무튼 일등칸은 비었다. 동쪽으로 가는 사람들은 비행기를 탔다. 여기서는 현실과 접촉하는 건 조금도 무섭지 않다. 열차를 타면 적어도 창문 밖을 내다본다. 정거장에 정거했을 때는 사람들의 얼굴을 본다. 적어도 정돈하는 민중 경찰의 얼굴을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러나 비행기로만 찾아드는 도시는 나쁘다.
나는 지금 정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문학에 있는 인간주의 미학과 거주의 미학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알프레드 되블린(Alfred Doblin 1878-1957, 유태계 독일작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 독일작가, 문학평론가), 라아베(Wilhelm Raabe 1831-1910, 독일작가)그리고 폰타네(Theodor Fontane 1819-1898, 독일작가)는 읽을거리로서 반드시 옳다고 할 수 없다. 멀리 가는 기차를 탄 남자들은 대개 <빌트차이퉁>신문을 읽는다. 열차를 탄 사람들은 대개 이 신문이 본-함부르크나 본-뮌헨 구간에 맞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범죄소설이라도 읽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범죄 소설에는 법과 사회 그리고 사회의 상처가 언제나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독일어로 글을 쓴 휠더린(Friedrich Holderlin 1770-1843, 독일시인),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 독일철학자),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 독일 사회주의 이론가, 마르크스주의 앙시자), 클라이스트(Heinrich von Kleist 1777-1811, 독일소설가, 극작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자. 특별한 문화 협정이 필요할 것도 없이 모스크바와 글래스고(스코틀랜드의 가장 큰 항구 도시)의 학생들이 그들을 읽고 있다. 나쁜 장면이 보이고 나쁜 말이 들린다. 과거와 현재에 계속 되풀이하여 이런저런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사람의 말이 들린다. 정치란 정말 그렇게 간단한 걸까. 모든 카드놀이 중에서 가정 간단하고 바보스럽고 지루한 걸까.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문학에서는 장소가 없다. 엄청나게 힘든 노력을 기울인 전후 문학은 장소와 이웃을 다시 찾는 일을 하는 데 있다. 1945년에 독일 산문을 단지 반 페이지만 썼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여기 또 갖은 선동을 일삼는 또 다른 가짜 말이 있다. ‘고향에서 쫓겨나다’는 단어다. 새 고향, 옛 고향이란 말인가! 라인란트에서는 오랫동안 내 청소년 시절까지, 즉 1945년까지 프로이센 사람들과 관련하여 차디찬 고향이라고 말했다. 내게는 라인란트 사람의 기질이 있다. 이 기질은 라인란트를 결코 따뜻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고향을 조롱하는 걸 바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지방주의를 조소하는 걸 촌스럽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방주의가 한동안 이웃을 만들고 거주할 수 있는 다정한 지역을 이루는 유일한 가능성으로 본다.
영국에서 찰스 디킨스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그의 생시부터 오늘까지 계속하는 논쟁이다. 영국에서 디킨스의 독일에는 없는 그런 존재이다. 그는 한없이 논쟁을 벌이게 하는 고전주의 작가이다. 발자크가 프랑스 작가들에게 미친 영향과 같다. 이런 논쟁에서 여러 가지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언어 지역과 사회 구역을 되풀이하여 새롭게 조사하는 일이다. 여기서 형성된 자연스러운 의식은 당대의 문학에 도움을 준다. 그 문학이 실험적인가 또는 전통적인가 그건 관계가 없다. 우리가 논거를 제시하고 또한 이 논거를 반대할 수 있는 발판이 형성될 수 있다. 독일 문학 어디에 런던이나 파리처럼 현실이 소설에 묘사되어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논쟁을 벌여 온 도시가 있는가? 지금 여기서 독일의 지리적 위치와 역사를 한탄할 곳도 때도 아니다. 단지 베를린이 15년 이상은 한 민주주의 독일의 수도였다는 걸 확인 할 수 있다. 꿈꾸고 비틀거리던 기간이었다. 이 꿈과 비틀거림이 갑자기 끝나리란 건 모두 알고 있다. 라아베, 폰타네, 되블린, 벤야민은 베를린을 런던이나 파리, 페테스부르크, 모스크바와 비교할 수 있는 문학의 현실로 만들어 낼 수 없었다
최근 문학에서 베를린을 인정할 지점을 찾지 못했다는 건 베를린이란 단어가 가진 도시의 정치성에 그 원인이 있다. 한 도시가 일상에서 늘 개념으로 논박을 벌인다면 도시로서는 좋지 않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내가 지금 설명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대체 독일 수도는 어디에 있는가, 정이 가는 지역은 어딘가, 집처럼 느낄 데는 어딘가? 정치가들이 공허한 말을 하고 지겹고 공허한 개념을 만들어 내면 진실의 흔적이 보이는 말 하나하나가 모두 더 높은 정치가 된다. ‘평화적 통일’이라는 슬로건이 대두되고 우리 아이들에게 음식으로 제공된다. 동시에 양쪽이 모두 기회 있을 때마다 한쪽의 사회와 경제 사정이 다른 쪽을 가깝게 맞추는 게 불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이런 걸 어떤 아이나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아마도 어른들 모두가 알지는 못할 것이다. 자기 기만이 행해지고 두 가지가 가능한 미래의 정치에 대해서 듣지만 그중 하나는 응용할 수 없고 나머지 하나는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전쟁이나 기적에 해당된다.
‘거주할 수 없다’는 결코 새 테마가 아닌 건 물론이다. 이건 광범위한 연구 테마로 가치가 있다. 괴테는 거주할 수 있고 등산하고 사랑할 수 있었다. 클라이스트는 거주할 수 없고 등산과 사랑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풀죽어 조용한 슈티프터는 독일 문학에서 ‘늦은 여름’이라는 꿈과 같은 대단한 거처에 대해서 썼다. 이것은 문학에 나타난 거대한 테마로 정치와 역사만 아니라 종교도 포함하는 테마다. 낭만주의의 방랑에 대한 동경, 파란색의 먼 곳, 파란 꽃에 대한 것이다. 그후 비로소 또 한 작가가 거주하고 방랑할 수 있었다. 그가 사랑에 대해서 쓰려고 했다는 건 우연이 아니다. 그는 폰타네였다. 베를린에 폰타네 박물관이나 자료실이 없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따라서 나로서는 폰타네의 무덤이 어디 있는가를 찾아내기가 좀 힘들었다.
‘거주할 수 없다’ 는 테마는 새로운 게 아니다. 카프카의 야누흐(Gustav Janouch, 유태계 독일작가)와의 대화에 이런 대목이 있다.
- 많은 사람들이 바삐 뛰어간다. 대단히 빠른 걸음으로 시간을 지나간다. 어디로 가는가? 그들은 어디서 왔는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들은 행군을 많이 할수록 목적을 이루는 게 더 적어진다. 쓸데없이 힘을 소모했던 것이다. 그들은 간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제자리에서 행군하면서 허공으로 떨어지고 만다. 이것은 전부다. 인간은 여기서 고향을 잃게 되었다.
카프카의 마지막이다. 그 이후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단지 거처만 찾을 뿐이다.
나는 이 나라에서 공허한 말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매일 일어나는 현재의 말을 일구는 젊은이들을 생각한다. 내 나이 사람들은 이런 기초를 결코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들에게 전통이 결여되었다. 공부하려는 인내와 지속적으로 모으려는 믿음이 없다. 적어도 슬기와 경쟁하려는 냉소주의의 흔적을 즐기려는 마음도 없다. 내 나이 사람들은 슬기롭지 못하다. 결코 앞으로도 슬기롭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똑똑했던 일이 한 번도 없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오늘까지도 약지 못하다.
문예학이 제 뜻을 가지려고 하면 수은주의 빈 곳을 막아야 한다. 그리고 인위적인 열과 겉으로 보이는 쟁점 때문에 자신에게 실망하여 생긴 열을 식히고 새롭게 균형을 잡아야 한다. 독일의 한 부분은 지금도 망명지에 있다. 현재의 독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망명지로 현재의 독일과는 전혀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다. 이 나라가 문학에서도 거주할 수 있도록 젊은 세대가 새롭게 해야 한다.
사람이 그 나라에 대한 향수를 느낄 때 그 나라에는 사람이 살고, 살 만한 나라가 된다. 세상 어딘가에는 향수를 느끼지만 지금은 없어진 독일에 향수를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한 도시에 대한 향수도 가질 수 있다. 베를린, 뉘른베르크, 함부르크, 퀼른, 뮌헨 등의 도시를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건 언제나 없어지고 가라앉아버린 베를린이나 퀼른에 대한 향수가 아니지 않겠는가? 독일연방공화국에 대한 향수? 아마도 있을 것이다. 과연 향수를 느끼게 할 이 나라가 될 수 있을까? 소설문학과 서정시 그리고 책자에 묘사된 독일연방국이 공보관이나 경제 담당 아따세가 기분 좋아할 것과는 다르다는 것은 우연도 아니고 공격적인 지식인들의 나쁜 의도 역시 아니다. 여기서 말한 지식인은 유물론자일 수도 있고 무정부주의자 또는 가톨릭교도로서 교회세를 내는 사람일 수도 있다. 왜 전후 소설에 독일연방공화국을 꽃피고 즐거운 나라로 묘사한 책이 하나도 없는가를 그들 스스로 곰곰 생각해야 된다.
유명한 질문이 있다. 긍정적인 데가 어디 있는가? 전혀 바보 같은 질문이 아니다. 그러나 틀린 질문이고 또한 상대도 잘못 잡았다.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 한 사람도 이 꽃피는 나라에 대한 소설을 쓰지 않는가? 그걸 쓴다고 방해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방해가 되는 건 피상적인 병적 정치적 증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은 데 있다. 슬픈 나라다. 그러나 슬픔이 없다. 이 나라는 슬픔을 넘겨 버렸다. 국경을 넘어 동쪽으로 밀었다. 그런데도 아직 정치가 표면에 불과하다는 걸 알지 못한다. 정치는 가장 위에 있는 가정 얇은 층으로, 많고 많은 층에서 가장 상하기 쉬운 것이다. 정치의 열을 재는 곳이면 어디나 수은주에 빈 데가 생긴다. 정치가들은 미학을 공부해야 된다. 정치하는 데 시간을 허비한다고 생각할 일이 아니라고 본다. 시대 상화을 말로 쓰면, 한 국가를 계속 바탕이 없게 방치하고 ‘고향에서 쫓겨난다’는 단어를 고향에서 쫓겨난 사람들의 회합으로 사용하면서 항상 선동적으로 비상시에 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예비군처럼 경계 태세를 갖추하고 말하면, 얼마나 비인간주의적인가를 증명하는 것이다. 또 H. G. 아들러의 <여행>이라는 소설에서 한 대목 인용하겠다.
- 길을 다니지 못하게 했다.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졌다. 그러나 밤에도 금지되고 낮에도 금지된 건 마찬가지였다. 장사를 하지 못하게 했다. 의사, 병원, 비행기, 쉬는 곳, 모두가 금지 또 금지였다. 세탁소도 금지되었다. 음악도 금지였다. 신발도 신으면 안 됐다. 목욕도 금지였다. 아직 돈이 있었기 때문에 돈 사용도 금지되었다. 과거에 있었던 것과 될 수 있었던 건 모두 금지되었다. 이런 공고가 나붙었다. ‘네가 살 수 있는 건 금지된 것이다. 넌 살 수 없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사면 안 되기 때문에 팔려고 했다. 그들은 재산에서 얻은 이익으로 생명을 연장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말을 들었다. ‘네가 팔려고 하는 건 금지되었다. 넌 정말 아무것도 팔면 안 된다.’ 그러자 그들은 점점 더 슬프게 되었다. 그들의 인생을 슬퍼했다. 그러나 그들은 인생을 훔치지 않으려고 했다. 왜냐하면 금지된 일이기 때문이었다.
아들러의 책은 대단히 독일적 책이다. 대단히 독일적 여행을 그린 책이다. 그리고 독일어나 유대어라는 단어들이 이 소설에 한 번도 안 나오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경찰이나 감옥이라는 단어도 안 나온다.
이 소설에 나오는 장소는 루엔탈, 운켄부르크, 라이텐베르크, 수투파이트이다. 그리고 소설의 언어는 카프카, 그림 형제, 슈티프터 세 작가로 이어지는 3각지에서 찾으면 된다. 그들 사이에서 고향을 잡은 언어다. 그러나 그것은 카프카와 슈티프터의 나라에서 쫓겨났다. 그림 형제의 나라에서 추방되었다. 아들러의 책은 전래하는 내용에서는 거의 하나도 꺼낸 게 없다. 문장, 단어가 모두 스스로 말하고 있다.
- 말들은 모두 불안에 대해서 쓰고 있다. 왜냐하면 말이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연설을 시작하는 사람에게서 도망쳐서 낯설다. 나의 말, 너의 말은 벽을 허물고 다시 세운다. 벽이 빽빽하고 물이 새지 않고 안전하게 된다.
이 소설을 읽고 난 후 나는 독일 전후 문학 전체가 말을 찾아내는 문학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또한 왜 내가 이따금 직접 쓰는 것보다 번역을 더 즐겨했던 가도 알게 되었다. 무언가를 외국 언어에서 자기 언어 지역으로 옮기는 건 기초를 다질 수 있는 일이다.
아들러의 소설은 거의 일상사만 문제 삼고 있다. 가지고 갈 수 없는 전기다리미와 개도 다루고 있다. 류트(만돌린 모양의 르네상스 시대의 현악기)와 어느 시민 가정의 살림 도구 그리고 조소받는 시민 가정의 거실이 중요하다.
하인리히 뵐은 1947년부터 작품들을 발표했습니다. 가장 먼저 쓴 장편소설 <기차는 제 시간에 왔다 Der Zug war punktlich>(1949)와 <아담, 너는 어디 있었는가? Wo warst du Adam?>(1951)에는 병사들의 어둡고 절망적인 삶과 전쟁의 무의미함이 간결한 문체로 그려져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빵 Das Brot der fruhen Jahre>(1955)에서는 한 기계공의 삶을 통해 불안정한 현실을 묘사했으며, 내적 독백과 플래시 백(순간적인 장면전환기법)을 사용하여 가장 복잡한 소설로 꼽히는 <9시 반의 당구 Billard um halb zehn>(1959)에서는 3대에 걸친 한 건축가 집안을 통해 현실의 불안정함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인기작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 Ansichten eines Clowns>(1963)에서는 주인공이 술에 뻐져 보수를 많이 받는 연예인에서 구걸하는 거리의 악사로 전락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가톨릭교도인 작가가 가톨릭 사회의 인습과 비인간적인 요소를 부각시켜 가차없는 비판을 가한 것입니다.
다른 작품으로는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Und sagte kein einziges Wort>(1953), 한 부자간의 재판을 통해 도시인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어떤 공무여행의 끝 Ende einer Dienstfahrt>(1966), 가장 긴 소설인 <여인과 군상 Gruppenbild met Dame>(1971)에서는 중년의 ‘귀부인’ 레니 파이퍼의 삶 속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의 입을 빌려 제1,2차 세계대전부터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독일인의 삶의 모습을 펼쳐 보였습니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Die verlorene Ehre der Katharina Blum>(1974)에서는 미모의 젊은 여자가 신문기자를 사살한 사건을 분석하고 있는데, 당시 독일인의 가치관뿐만 아니라 현대 언론의 윤리까지 공격한 작품으로 대단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문제작입니다. <그 소년이 어떻게 될 것인가? : 책들과 관계 있는 어떤 것 Was soll aus dem Jungen bloss werden? oder, lrgendwas mit Buchern>(1981)은 1933~37년에 일어난 일들을 회상하여 쓴 것입니다. 그밖에 방송극 작가로도 상당한 명성을 올렸고, 국제펜클럽 회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