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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은 집현전에서 만들지 않았다.
한글은 세종대왕의 단독작품이었다.
나만 모르는 사실이었고 국어선생님들은 이미 20년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라고 하더군요..이미 정설이 된 지 오래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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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은 집현전에서 만들지 않았다.
오늘날 대부분의 책이나 교과서에는 훈민정음의 창제는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 공동으로 만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한글 창제 무렵의 기록이나 실록에는 전혀 그러한 증거가 없다. 한글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1443년, 세종 25년의 일이다. 실록에는 이것에 대해, 매우 간략한 기록만이 남겨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훈민정음의 창제는, 무렵 큰 파문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관료들이, 집단으로 상소를 올려 한글 창제를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다.
"굳이 언문을 만들어야 한다 하더라도 마땅히 재상에서 신하들까지 널리 상의한 후행해야 할 것인데 갑자가 널리 펴려 하시니 그 옳음을 알지 못 하겠나이다." 이들은, 상소를 통해 한글 창제가 세종의 독단적 행동이었음을 비난하고 있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부제학이던 최만리도 그 때서야 훈민정음 창제한 것을 그때 안 것이다. 집현전의 최고 책임자였던 최만리가 한글 창제를 몰랐다면, 창제 과정에 집현전 학자들이 참여했다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일까?
세종이 신숙주, 성삼문에게 명해 언문을 지었다는 것이다. 집현전 7학사 가운데서도 한글 창제와 관련해 가장 주목을 받는 학자는 신숙주다. 세종의 총애를 받았을 뿐 아니라, 한글 관련 사업에 가장 많이 동원된 사람이 바로 신숙주였기 때문이다.
신숙주는 외국어에도 능통했다고 알려져 있다. 중국어, 일본어 등 5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 같은 사실도 그가 한글 창제에 참여했을 거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신숙주의 문집인 보한제집에는, 그의 행적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신숙주가 직접 쓴 글을 비롯해, 당대 학자들이 기록한 그의 일대기가 실려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한글 스물여덟 글자를 만든 것은 세종이라고 적고 있다. 신숙주가 한 일은 세종의 명을 받아 한글 서적을 편찬하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동안 학자들이 주목한 것은 신숙주가 요동에 다녀왔다는 기록이다. 그 무렵 요동에 귀양 와 있던 중국의 언어학자 황찬을 만나기 위해, 성삼문과 함께 여러 차례 요동을 방문했다는 것이다. 신숙주가 황찬을 만난 것은 훈민정음 창제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라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한자를 바로 잡기 위해 한자음에 관한 질문을 하러 간 것이다. 그렇다면, 신숙주가 황찬을 만나기 위해 요동으로 간 것은 언제일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신숙주가 최초로 요동에 간 것은 1447년 1월 한글이 만들어진 뒤 1년 2개월 후의 일이었다. 실제 일은 성삼문 신숙주 또래들이 했다고 볼 수 있는데 성삼문은 조금 전에 집현전에 왔고 신숙주는 세종 25년 말에 훈민정음이 창제됐는데 신숙주는 23년 즈음 집현전 학자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일본에 갔다. 그 일에 관여할 시간이 없었다.
한글 창제에, 집현전 학자들이 참여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원로 학자들은 한글 창제 자체를 반대했고, 젊은 학자들도 한글 서적을 만드는데 참여했다는 사실만을 밝혀냈을 뿐이다. 결국, 세종 25년에 만들어진 한글 스물여덟 자는 그들의 공로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훈민정음에 관한 책 중에, 현재 전해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바로 이것이 세종 28년, 한글 반포를 위해 집현전 학자들이 만든 책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해례본은 한글의 글자 하나하나에 대한 해석을 담고 있는 책이다. 집현전 학자였던 정인지가 쓴 이 책의 서문 가운데 한글을 만든 사람에 대한 언급이 있다.
전하 창제(殿下創制) - 전하가 지으셨다.
여기서도 훈민정음 스물 여덞자를 만든 것은 세종이라고 밝힌 것이다.
그런데 신하들이 만들었는데 관례에 의해서 임금이 한 것으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다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세종대왕 때 한글만 만든 것이 아니라 다른 사업도 많이 했는데. 그런 것들은 다 한 사람들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아무리 공을 임금한테 돌리기 위해 했다고 하더라도 그 무렵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은 한글을 만든 것은 대단한 공이 아니고 해서는 안 될 일을 임금이 하고 있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공을 임금에게 돌리기 위해서 친제라는 표현을 썼다. 이건 전혀 근거가 없는 그런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최만리의 상소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번 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 재주에 지나지 못하는 것으로 학문에 방해됨이 있고 정치에 유익함이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옳은 것이 없습니다. (최만리 상소문) 그는 한글을 만든 것은 신기한 재주를 부린 것에 불과한 것으로 전혀 유익할 것이 없다고 혹독한 비판이었다. 이에 대해서 세종은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너희가 설총은 옳다고 하면서 제 군주가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까닭이 무엇이냐? 설총이 만든 이두는 옳다고 하면서 제 군주가 한 일을 그르다고 하는 까닭이 무엇이냐며 반박하고 있다. 세종 스스로 한글을 만든 것이 자신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세종이 직접 쓴 글속에서도 한글 창제를 다른 사람에게 명해서 만들게 했다는 말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 같은 사실은 훈민정음 서문의 글을 통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한글 스물여덟 글자는 자신이 직접 만든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친제라고 하는 표현은 훈민정음에서만 볼 수 있다.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는 것을 보면 훈민정음은 역시 친제다. 또한 세종은 어려서부터 이미 학문에 능통했다. 세종은 언어학에서도 조예가 깊었다. 너희가 운서를 아느냐? 또 너희가 사성 칠음과 자모가 몇인 줄 아느냐?
세종 스스로 언어학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최만리라고 하는 분이 집현전 책임자로 다른 말로 당대 최고의 학자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당대 최고의 학자를 앞에 두고 당신이 이걸 아느냐고 얘기할 수 있는 건 아무리 임금이라도 자신이 학문적 역량이 없으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한글을 만든 직후 세종은 동국정운을 편찬하도록 명한다. 이것은 방대한 분량의 중국 음운값을, 모두 한글로 옮겨 적는 일이었다. 그런데 실무자였던 신숙주가 쓴 서문에 따르면 음 하나하나까지 모두 왕에게 직접 재가를 받았다고 한다. 이것은 음운학에서 당대 최고의 학자가 바로 세종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훈민정음 창제과정에서, 집현전 학자들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정인지가 쓴 훈민정음 해례의 서문에서 그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즉, 세종의 명을 받아 한글 스물여덟 글자의 원리와 용례를 해석하는 일을 맡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기록으로 볼 때, 집현전 학자들은 한글 스물여덟 글자의 해석과 동국정운 등 한글 서적의 편찬사업에 관여했을 뿐이었다. 그것도 세종의 지시를 일일이 받아서 이루어 낸 일들이었다. 세종이 임금이기 때문에 학자라고 하는 사실이 가려지는데 세종은 왕이면서도 아주 뛰어난 언어학자였다. 세종대에 이뤄진 한글 관련 사업의 최고 책임자, 그것은 바로 당대 최고의 언어학자였던 세종 자신이었던 것이다.
훈민정음 창제를 둘러싸고 떠도는 이야기는 많지만, 그 중 믿을 수 있는 내용은 거의 없다.
그런데 한 가문에서 구체적인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고 해서 확인해 보기로 했다. 바로 세종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와 관련된 것이었다. 한글을 만들었다고 까지 이야기 되는 세종의 둘째 딸 정의공주는 죽산 안씨 가문으로 출가한다. 그런데 이 가문의 족보에 시집온 그녀가 세종의 명을 받아 한글 창제를 도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한글의 변음과 토착을 세종이 대군들에게 풀어보라고 하니 대군들이 못 풀고 정의공주가 그것을 푸자 극찬하였다.
여기서 변음과 토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다만 이것이 민간에서 사용되던 언어나, 사투리 등이 아니었을까 막연히 추정해 볼 뿐이다. 한글 창제과정에서 정의 공주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같은 기록은 한글을 만드는 과정에 세종의 직계 가족들이 참여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다.
집현전 학자들을 중심으로 추진된 한글 서적 편찬 사업에도 왕자들이 깊숙히 개입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글을 창제한 다음에 처음 실시한 사업이 바로 운회를 번역하는 것, 이 일에 왕자들이 동원된 것이다. 훈민정음으로 사업을 하는데 그 총책임자를 세자와 왕자를 임명했다는 것은 그들이 내용을 알기 때문에 그러지 않았았을까? 그때처음 집현전의 젊은 학자들이 참여했고 그 후 최만리의 반대상소가 나온다. 운회를 번역하는 일에 참여한 왕자는 모두 세 사람, 훗날 문종이 되는 세자와 수양대군, 그리고 안평대군이 그들이다. 이들이 번역 사업의 책임자가 된 것은 왕의 아들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다른 누구보다도 한글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이들이 세종을 도와 한글 자모 스물여덟 자를 만들 때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아들 세분이 세종 못지않게 학문, 글씨 등에서 능가할 수 있었다. 심지어 어떤 기록에는 세종과 문종이 같이 만들었다고 하는 기록도 나온다. 문종과 관련해, 직해동자습이라는 책의 서문에, 재미있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것은 신숙주와 함께 한글을 만든 장본인으로 지목되는 성삼문이 쓴 기록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성삼문은 이 글에서 한글을 만든 것이 세종과 문종이라고 적고 있다. 이것을 뒷받침해줄 다른 기록은 없지만 한글창제에 왕자들이 참여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인 셈이다.
그렇다면 세종은 왜 한글을 만들려고 했던 것일까?
이것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그러나 세종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단서를 삼강행실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이 만들어진 동기는 세종 10년에 있었던 일 때문이다. 진주사람 김화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충격을 받은 세종은 모두 자신의 잘못이라고 자책하며 효자 충신 등의 사례를 담은 행실도의 간행을 지시한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삼강행실도는 내용과 함께 그에 맞는 그림을 그려 넣었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도 그림을 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위한 배려였다. 그러나 세종은, 글자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그림만으로는 제대로 된 뜻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며 안타까워한다. 글자 창제의 필요성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다. 그리고 10년 뒤, 훈민정음 서문에서 어리석은 백성과 글자라는 단어가 다시 나타난다. 삼강행실도에 백성이 알 수 있는 글자를 붙이고 싶었던 세종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로 사업은 중단되고 훗날 성 종 때 이 책은 간행될 수 있었다. 한글 삼강행실도가 빛을 보게 되는 것은 성종대에 이르러서다.
한글 창제는 세종이 신하들 몰래 자식들을 데리고 10여년간을 추진해 온 비밀스런 연구의 결과인 것이다.
한글이 완성된 직후 세종은 큰 곤경에 처한다.
한글 창제를 찬성하는 이는 없는 반면, 가장 신임하던 집현전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최만리 등의 학자들은 상소를 통해 왕의 행동은 사려 깊지 못한 일이라며 강력하게 비난한다. 이들의 태도와 어조는 매우 당당한 반면, 이에 대해 세종이 오히려 변명을 하는 형상이다. 어찌 옛날부터 쓰는 폐해 없는 글자를 고쳐 낮고 천하고 속된 말인 이익이 없는 글자를 새로 만들어 쓰겠습니까? 이들이 감히 세종에게 도전할 수 있었던 까닭은 중국와의 문제 때문이였다. 만약 이 사실이 중국에라도 알려지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최만리는 걱정하고 있었다. 상식적인 태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때 학자들로선 그런 소양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우리나라는 중국의 한문으로 글자 생활을 했고 한문으로 이뤄져 있었기 때문에 한글을 만드는 것은 그들에게는 필요치 않았고 이것은 오히려 오랑캐가 되려는 것이라고 반대하는 것이 당연했다고 볼 수 있다.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새로운 글자를 만든다는 생각은 무렵으로서는 위험한 생각이었다. 중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사대 관계에 있던 조선이 이미 쓰고 있는 한문을 두고 따로 국어를 가진 다는 것은 중국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집현전 학자들에게 명령을 하면 하라고 할 사람이 아무도 없기에 남 몰래 만들 수밖에 없어. 집현전 학자에게 명령을 내렸을 때 전하 절대로 안됩니다하고 반대할 터인데. 만약 한글이 창제되기 전에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다면 한글 창제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 같은 가능성을 엿보게 하는 것이 바로 내불당 사건이다. 세종이 궁권 안에 법당을 지으려 하자 신하들이 대대적으로 반대를 하고 나선다. 나라의 국교가 유교 즉 성리학인데, 왕이 불교를 숭상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해동잡록에는 무렵 신하들의 반대가 어느 정도 였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집현전 학자들은 자신들 의견이 관철되지 않자, 업무를 중단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에 세종은 무렵 영의정이었던 황희를 붙잡고 "이를 어쩌면 좋을까" 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아무리 임금이라고 하더라도 명분을 앞세운 신하들의 주장을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글 모르는 백성을 위한 한글창제는, 양반계층의 이익과는 상반되는 것이었기에 반대는 더욱 거셀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무렵 최만리라든가 이런 사람들은 한문으로 글자생활을 하고 그것이 다른 서민들과 자신들이 구별되는 어떤 근거이기도 했기 때문에 굳이 모든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는 글자를 만들 필요가 있겠는가? 자기 고유의 글을 가지고 있는 일본이라든지 여진, 서하를 오랑캐라고 무시하는 대목을 보면 한마디로 말해 필요 없다..자신들의 입장에서 보면 필요 없지만 세종은 그들 입장이 아니라 글 모르는 백성을 입장에서 보면 필요하다고 의견차이가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불당 사건 때와는 달리, 세종은 반대론자들에 대해 매우 단호하게 대처한다. 반대 상소를 올린 집현전 학자들을 전원 하옥 시키면서까지 한글의 사용을 추진하려 했던 것이다. 한글 창제 전에 이 사실이 신하들에게 알려졌다면 한글은 탄생자체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 무렵의 명분에는 어긋나는 한글창제, 한글은 혼자만의 고독한 작업 뒤에 비밀작업으로 이루어낸 업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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