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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14면체 주사위'의 비밀은?(한자병기, 해설)
한겨레 | 입력 2014.09.07 14:20
[한겨레] 유신시대(維新時代)의 한복판이던 1974년 가을, 신라 고도 경주(新羅 古都 慶州)는 들뜬 분위기에 휩싸였다. 70년대초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발굴(發掘)했던 천마총(天馬冢)과 황남대총(皇南大冢) 같은 시내의 신라 고분(新羅古墳)에서 금관(金冠) 등 찬란(燦爛)한 황금보물(黃金寶物)과 고급 유물(高級遺物)들이 잇따라 출토(出土)되는 낭보(朗報)가 이어지고 있었다. 불국사(佛國寺), 보문관광단지(普門觀光團地), 석굴암(石窟庵) 등 경주 관광명소(觀光名所)를 단장(丹粧)해 개발(開發)하는 관광종합개발계획(觀光綜合開發計劃)도 착착 실현(實現)되는 중이었다. 이런 와중(渦中)에 신라인(新羅人)들이 1400여년전 경주 도심(都心) 언저리에 팠던 옛 연못 바닥을 퍼내는 공사(工事)가 그해 11월 벌어지기 시작(始作)했다. 신라 왕궁터(王宮址, 왕궁지)인 반월성(半月城) 바로 동쪽, 경주시 인교동에 있는 안압지(雁鴨池)의 준설공사(浚渫工事)였다. 안압지는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왕자(王子)가 살았던 동궁전(東宮殿) 근처(近處)에 귀족(貴族)들의 놀이터로 조성(造成)된 것으로 전해져왔지만, 당시(當時) 관리(管理)가 거의 되지 않아, 수백년간 연못에 흙이 쏠려 내려가는 등 극도(極度)로 퇴락(頹落, 穨落)한 상태(狀態)였다. (안압지는 조선시대 묵객(墨客)객들이 지은 이름이다. 90년대 이후 연못 주위(周圍)에서 발견된 기와 파편(破片)에서 월지라는 신라 때의 원래(元來) 이름이 확인(確認)돼 지금은 월지(月池)라고 부른다.) 준설(浚渫)은 박 대통령이 세운 경주종합개발계획에 따른 유적(遺蹟, 遺跡) 정비사업(整備事業)을 위해 벌인 것이었다.
옛 경주 연못 펄바닥에서 나온 14면체 주사위 주령구(酒令具)
신라귀족과 후대 한국인 사로잡은 옛 놀이문화의 정수(精髓)
보존처리(保存處理) 중 불타 원래 실물(實物)은 사라졌는데,
같이 생긴 다른 주령구 실물 속속 나타나 논란(論難) 계속(繼續)
그런데, 이 퇴락한 연못에서 애초 생각치도 않았던 문화재대박이 터졌다. 연못 물 빼내고 펄 바닥을 뒤져보니 무려 1만5000점이 넘는 통일신라 시대의 갖가지 생활 유물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불상(佛像), 숟가락(匙 숟가락 시), 청동거울(靑銅鏡, 청동경) 난간 조각(欄干 彫刻), 벼루(硯 벼루 연), 송곳, 가위, 심지어 유람용(遊覽用) 배까지 별의별 유물들이 다 있었다. 그 속에 유난히 쓰임새가 독특(獨特)한 유물 하나가 조사단(調査團)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 당겼다. 1300여년전 통일신라 귀족들이 술자리 연회(宴會)에서 굴리며 놀았던 14면체 주사위였다. 발굴(發掘)이후 40여년이 흐른 지금 이 독특한 주사위는 통일신라만의 재치(才致)있고 독특한 놀이문화를 상징(象徵)하는 국민문화재(國民文化財)가 되었다.
통일신라 귀족들이 술자리 연회에서 갖고 놀았던 이 주사위는 문화재 용어(用語)로 '주령구(酒令具)'라고 부른다. 지금, 경주 반월성 옆 국립경주박물관 안압지관에 가면 볼 수 있다. 신라 상류층의 놀이문화를 보여주는 유물이란 설명(說明)이 붙어있다. 주령구란 말을 바로 풀이하면, 술과 관련(關聯)된 명령(命令)을 내리는 도구(道具)라는 뜻이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 또하나 궁금한 것은 박물관(博物館) 진열창(陳列窓)에 있는 유물이 복제품(複製品)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원래 유물은 이제 없다는 얘기다. 이건 또 무슨 곡절(曲折)이 있는 걸까.
우선 제원(諸元)부터 살펴보자. 참나무로 만든 주령구는 직경(直徑)이 5cm도 안된다. 정육면체(正六面體) 모양(模樣)의 일반적(一般的)인 주사위 꼴과는 전혀 다른 독창적(獨創的)인 14면체 디자인이다. 긴변 2.5cm, 짧은변 0.8cm의 육각면(六角面) 8개, 가로·세로 각각 2.5cm의 정사각면(正四角面 )6개가 서로 정교(精巧)하게 맞물려 있고, 각 면의 면적(面積), 크기도 똑같다. 당시 신라의 발전했던 수학(數學) 지식(知識)과 정교(精巧)한 세공기술(細工技術)을 짐작(斟酌)케 해준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각 면에 다른 주사위처럼 숫자가 아니라 13면에 4자, 1면에 5자씩 음각(陰刻)으로 새긴 정갈한 해서체(楷書體)의 한자문구(漢字文句)들이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주사위를 굴려 위로 나타난 면에 새긴 문구의 내용대로 행해야 하는 술자리 벌칙(罰則)들을 적은 것이다. 14면체 주사위는 1976년 중국 서안(西安) 진시황(秦始皇) 무덤 부근에서 비슷한 유물이 나온 사례가 있지만, 각 면에 숫자 대신 놀이용 문구를 적은 것은 신라의 주령구가 유일(唯一)하다. 후대(後代) 학자(學者)들마다 해석(解釋)이 일부 엇갈리긴 하지만, 문구 내용들은 메시지가 다채(多彩)롭고, 한결같이 익살스럽고 유쾌(愉快)하고 창의적(創意的)이다. 오늘날 한국인 술자리 문화(文化)와도 맥락(脈絡)이 닿아 있어 웃음이 절로 나온다.
먼저 술잔을 비우고 크게 웃는 '음진대소(飮盡大笑)'와 양잔즉방(兩盞則放), 술 석잔을 한꺼번에 마셔야하는 '삼잔일거(三盞一去)'가 있다. 요즘 직장인들이 즐겨하는 '원샷'에 해당한다. 노래와 춤도 빠지지 않는다. 노래 부르지 않고 춤을 춰야하는 '금성작무(禁聲作舞)', 알아서 막춤을 추라는 뜻이다.
스스로 노래 부르고 마시라는 '자창자음 (自唱自飮)'은 신입사원(新入社員) 환영회(歡迎會) 등에서 자기소개(自己紹介)를 할 때 한잔 하고 노래부르라고 채근하는 지금 풍경(風景)과 닮았다. 마음대로 노래 청하기인 '임의청가(任意請歌)'는 노래방에서 게임처럼 하는 '도전(挑戰) 100곡'류의 게임과 비슷하다. 코믹한 장난들도 있다. 여러 사람이 코를 때리는 '중인타비(衆人打鼻)', 얼굴에 간질거려도 참아야하는 '농면공과 (弄面孔過)', 더러운 것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추물막방 (醜物莫放)', 스스로 도깨비를 부르는 기행(奇行)까지 벌여야하는 '자창괴래만(自唱怪來晩)'이 있다. 덤벼드는 사람이 있어도 참고 가만히 있어야한다는 '유범공과(有犯空過)'는 도대체 그 벌칙의 실체(實體)가 무엇일지 야릇한 궁금증을 뭉실뭉실 피워올리기도 한다. 후대 연구자(硏究者)들은 신라 귀족들이 이런 문구를 적은 주령구를 월지 부근의 정자(亭子)에 가지고 와서 주연(酒宴)을 베풀면서 굴리고 놀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도 남아있는 경주 포석정(鮑石亭)처럼 굽은 수로(水路)를 따라 술잔을 띄워놀았던 곡수연(曲水宴)을 신라귀족들이 즐겼다는 문헌기록(文獻記錄)이 전하므로 이 곡수연 때 시(詩)와 노래를 하면서 같이 갖고 놀았던 것이 아니었겠느냐는 추정(推定)도 나온다.
이 주령구의 독특한 놀이방식은 언론(言論) 등을 통해 숱하게 알려지면서 국민적 관심(國民的 關心)을 모았다. 한 주류회사(酒類會社)에서는 3년전 주령구 놀이를 스마트앱에서 내려받는 기획(企劃)을 내놓았고, 술자리에서 주령구 놀이를 응용(應用)해 즐기는 이들도 늘어났다. 경주시는 해마다 시민(市民)들이 참여(參與)해 주령구를 함께 만들고 함께 말판을 차려 놀이하는 행사(行事)를 열고 있고, 주령구 복제품도 선물용(膳物用)으로 시판중(市販中)이다. 신라사(新羅史)를 전공(專攻)한 역사학자(歷史學者)인 최광식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장관 재직 시절(長官 在職 時節) 출입 기자(出入記者)들과의 회식(會食) 자리에 주령구를 확대(擴大)한 모조품(模造品)을 들고 나와 번갈아 굴리면서 벌주(罰酒) 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주령구는 유물 자체(自體)의 성격(性格)도 흥미진진(興味津津)하지만, 발굴 경위(發掘經緯)와 이후 보존과정(保存過程) 등에서도 드라마틱한 후일담을 갖고있다. 사실 정부가 안압지 준설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면, 그리고 앞서 71년 박정희 대통령이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을 입안(立案)하지 않았다면, 주령구는 지금도 흙속에 파묻혀있거나 영영 세상에 다시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애초 안압지 준설은 원래는 관광단지 개발을 위해 유적지(遺蹟地) 재정비(再整備)가 필요(必要)하다는 의견(意見)에 따라 연못 밑의 수백년 묵은 펄바닥을 퍼내고 주변(周邊)을 깨끗이 정비하려는 목적(目的)이었다. 그런데 준설 과정에서 '수거(收去)'를 감당(勘當)하기 어려울 만큼 신라 유물들이 마구 쏟아지기 시작한다.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증언(證言)한다.
"74년 준설공사가 시작될 당시 경주사적관리사무소에서 감독(監督)을 했어요. 물 빼고 펄 바닥을 말린 뒤 인부(人夫)를 동원(動員)해 리어카로 흙을 퍼 날랐는데, 자꾸 기와 전돌 등의 생활 유물들이 나온단 말이에요. 그래서 수습 연구원(收拾연구원)을 보내 유물들이 반출(搬出)되지 않도록 관리를 맡겼는데, 엄청나게 많은 유물들이 계속 쏟아져서 감당을 못할 지경이 됐지요. 심지어 안압지 출토 유물들이 골동상(骨董商)에 돌아다닌다는 소문(所聞)이 돌았어요. 당시 국립경주박물관 학예관(學藝官)이던 미술사학자(美術史學者) 강우방 선생이 사적관리사무소쪽에 유물 관리가 부실(不實)하다고 항의(抗議)하고 언론(言論)에도 의혹(疑惑)이 보도(報道)되는 등 파문(波紋)이 일었어요. 놀란 당국(當局)이 준설공사(浚渫工事)를 중지(中止)하고, 75년부터 문화재관리국 학예사와 황남대총 발굴단의 인력(人力)을 일부 빼내 본격적(本格的)인 발굴이 시작됐어요. 주령구를 비롯한 안압지 유물은 그런 곡절 끝에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겁니다."
주령구는 안압지 발굴조사가 한창이던 1975년 6월19일 연못 서쪽 호안(湖岸) 석축(石築) 바닥에서 출토된다. 수십여점의 목간(木簡, 나무쪽 문서) 조각들과 함께 나왔는데, 독특한 모양새와 면마다 재미있는 놀이규칙을 담은 글씨가 새겨져 있어서 발굴 직후부터 연구자들 사이에 화제(話題)로 떠올랐다. 목간에 적힌 연호(年號), 간지(干支)를 판독(判讀)한 결과(結果) 목간의 글씨를 적은 시기(時期)가 경덕왕(景德王) 6년(747년)부터 혜공왕(惠恭王) 9년(774년) 사이였다. 사서(史書)를 보면 월지를 처음 판 것이 문무왕(文武王) 14년(674)이고 그 옆의 동궁전인 임해전(臨海殿)이 처음 세워진 것이 문무왕 19년(679)이니, 이 주령구는 통일신라 전성기(全盛期)로 들어가는 7세기말부터 8세기 초중엽 사이 만들어진 것으로 대략 연대(年代)를 추정할 수 있다. 당시 발굴에 관여(關與)했던 원로 고고학자(元老 考古學者) 조유전씨(72·현 경기문화재연구원장)가 <발굴이야기>(대원사)에 쓴 회고(回顧)를 보면, 발굴 당시 표면(表面)이 검게 칠해져 있었으며 오랫동안 펄 속에 있었기 때문에 보존상태(保存狀態)가 좋지않은 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진 촬영(寫眞撮影)과 실측(實測) 등 유물조사(遺物調査)를 마치고 곧바로 서울 청와대9靑瓦臺) 아래 창성동에 있던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실(현 정부종합청사 별관 1층)로 옮겨 유물 보존 처리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그게 화근(禍根)이었다.
주령구는 오랫동안 물 속 펄바닥에 있었기 때문에 물기를 빼내는 것이 필수적(必須的)이었다. 아직 국내 보존과학(保存科學)이 걸음마 수준이던 시절이라 습기(濕氣)를 제거(除去)하는 특수장비(特殊裝備)가 없었다. 그래서 토스터기 같은 일반 전기 오븐에 넣어 유물의 수분(水分)을 천천히 말리는 초보적(初步的)인 방법(方法)을 써야 했다. 문제(問題)는 당시의 전력(電力) 사정(事情)이 용이(容易)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공급(供給)되는 전력의 전압(電壓)이 고르지 않고 수시로 오르락 내리락했던 것인데, 이런 맹점(盲點)을 고려(考慮)하지 않고 오븐에 유물을 넣었다가 작동 불량(作動不良)으로 밤사이 전원 과부하(電源 過負荷)가 걸려 주령구가 새카맣게 타버렸다. 조유전씨는 <발굴이야기>에서 당시 비화(秘話)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나무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한꺼번에 강력한 빛으로 건조(乾燥)시키게 되면 뒤틀리게 되므로 서서히 수분을 제거시켜 원형(原型)에 아무런 손상(損傷)이 없도록 처리9處理)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래서 특수하게 제작(製作)한 전기 오븐에 넣고 건조하기로 했다.
물론 자동 전기 조절(自動電氣調節)이 가능(可能)하도록 하여 온도(溫度)가 높아지면 전원이 끊어졌다가 낮아지면 다시 연결(連結)되도록 하여 항상(恒常) 적절(適切)한 온도를 유지(維持)하도록 해서 처리를 하고자 했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자동 전기 조절기가 말을 듣지 않아 과열(過熱)되어 주사위를 재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
주령구가 숯덩이가 되어버린 사건(事件)은 생각치도 못한 파장(波長)을 낳았다. 건물로 화재(火災)가 번지지는 않았지만, 사고(事故)가 난 다음날 출동(出動)한 종로경찰서 형사(刑事)들은 청와대를 의식(意識)한 방화(放火)가 아니냐고 의심(疑心)했다. 보존과학실이 있는 건물이 바로 청와대 아래에 있어 고의적으로 오븐을 과열시켜 불을 낸 것은 아닌가를 당직자(當直者), 담당자(擔當者)들을 불러 추궁(追窮)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당사자들의 무고(無辜)함이 드러나고, 불탄 주령구는 폐기처분(廢棄處分)됐다. 사전(事前)에 정밀(精密)하게 사진(寫眞)을 찍고 실측한 탓에 똑같은 복제품도 만들 수 있었다. 사건은 세간(世間)에 알려지지 않고 잊혀지는 듯 싶었다. 그런데, 15년이 지난 1989년 6월 한 경북지역 일간신문에 주령구를 문화재당국이 홀랑 태워버렸다는 기사가 1면 머릿기사로 실리면서 주령구의 비극(悲劇)은 처음 세상(世上)에 알려지게 된다. 큰 파문이 일었고 국립문화재연구소는 15년전 허물에 빌미를 잡혀 문화재관리를 졸속(拙速)으로 하고있다는 비난(非難)에 곤혹(困惑)을 치렀다. '국보급 신라 문화재 소실(國寶級 新羅 文化財 燒失)'이란 제목(題目)을 단 이 기사(記事)는 국립경주박물관(國立慶州博物館)에서 연구사(硏究士)로 일하다 신문사(新聞社)로 직장(職場)을 옮긴 기자(記者)가 쓴 것이었다. 주령구의 저주(咀呪, 詛呪)라고 해야할까. 조씨를 비롯한 연구소 사람들은 주령구를 불태운 후과에 가슴이 서늘했을 터다.
이 곡절 많은 주령구는 국내 문화재보존과학 시스템의 정착(定着)과 발전 과정(發展過程)에서 시행착오(試行錯誤)에 따른 희생양(犧牲羊)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원래의 실물이 없어 그 뒤에도 진본(眞本)의 실체를 둘러싼 논란들을 계속 낳고있기도 하다. 불타 없어진 이 주령구와 거의 똑같은 다른 주령구 유물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는 탓이다. 2011년 국립민속박물관의 장장식 학예사는 온양민속박물관 소장품 가운데 경주에서 출토된 주령구와 똑같은 모양의 주령구를 발견(發見)했다고 학계(學界)에 보고(報告)해 시선(視線)을 모았다. 문제의 주령구는 77년 온양민속박물관이 서울의 한 고미술상(古美術商)을 통해 수집(蒐集)했다고 밝힌 것으로, 75년 안압지 발굴 당시 별개의 주령구가 몰래 유출(流出)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다. 온양민속박물관 쪽은 탄소연대측정(炭素年代測定) 등 유물의 분석(分析)에 나설 용의(用意)가 있다고 밝혔으나, 이후 조사는 진행(進行)되지 않아, 정확(正確)한 진상(眞相)은 여전히 드러나지 않은 상황(狀況)이다. 최근(最近)에는 인터넷 경매(競賣)사이트인 코베이의 9월 경매전에 한 소장가가 40년전 구입(購入)해 보관(保管)해왔다는 또다른 주령구가 출품(出品)됐다. 입수9入手)한 뒤로 죽 갖고 있었는데,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주사위와 같은 형태(形態)임을 알고 용처(用處)를 알게됐다는 설명(說明)이 코베이 사이트에 적혀있다.
이 다른 주령구들의 실체가 어떤 것일지는 여러 가능성(可能性)을 생각해볼 수 있다. 경주 출토 현장에서 유출된 또다른 주령구이거나, 주령구 놀이의 전통이 이후에도 이어져 계속 놀이도구로 만들어졌거나, 아니면 경주 주령구 출토 뒤 이득(利得)을 노려 만들어낸 복제품일 가능성이다. 안압지 조사는 처음부터 유적을 겨냥한 발굴이 아니라 흙을 퍼올리는 준설에서 비롯됐다. 발굴하면서 걷어낸 흙을 제대로 분석하지 않고, 그냥 다른 곳에 버렸기 때문에 버린 흙더미 안에서 주령구 같은 유물들이 훗날 발견돼 골동품 시장 등에 떠돌아다닐 가능성이 있다. 모조품(模造品)이든, 다른 주령구 유물이든 앞으로도 또다른 주령구들이 또다른 원본 논란을 빚으며 계속 나타날 가능성을 배제(排除)할 수 없는 형편(形便이다. 문화재동네 한켠에서는 주령구 실체를 둘러싼 혼선(混線)을 막기 위해 논란이 된 주령구들을 모아 정밀(精密)한 연대 분석과 비교 조사를 통해 가닥을 잡아야할 필요가 있지 않느냐는 의견(意見)도 나온다.
신라 십사면체 주사위의 실체에 얽힌 오랜 논란들은 첫 단추를 잘못 꿴 유적 발굴이나 소홀(疎忽)한 문화재 관리는 두고 두고 구설(口舌)과 오해(誤解)를 부른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주령구의 진짜 실체는 앞으로 얼마나 제대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까.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제공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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骰子(투자), 博簺(博塞, 박새) 주사위
骰 주사위 투
簺 1, 주사위 새 2. 통발 새
고분(古墳)과 벽화(壁畵)
경주의 천마총(天馬冢)의 자작나무껍질[白樺樹皮]로 만든 말다래에 그린 「천마도(天馬圖)」, 「기마인물도(騎馬人物圖)」, 「서조도(瑞鳥圖)」와 황남동(皇南洞) 제98호 고분(第九十八號 古墳)인 황남대총(皇南大塚)에서 출토된 칠기(漆器)에 그려져 있는 「우마도(牛馬圖)」
주령구(酒令具)
주령구(酒令具)는 1975년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정사각형 면 6개와 육각형 면 8개로 이루어진 14면체 주사위이다. 정사각형 면의 면적은 6.25평방센티미터, 육각형 면의 면적은 6.265평방센티미터로 확률이 거의 1/14로 균등하게 되어 있다. 재질은 참나무이다. 각 면에는 다양한 벌칙이 적혀 있어 신라인들의 음주 습관의 풍류를 보여주고 있다. 출토된 진품은 유물 보존 처리도중 불타버렸고, 복제품만 남아있다.
벌칙
1.금성작무 (禁聲作舞)- 노래없이 춤 추기(무반주 댄스)
2.중인타비 (衆人打鼻)- 여러 사람 코 때리기
3.음진대소 (飮盡大笑)- 술잔 비우고 크게 웃기(원샷)
4.삼잔일거 (三盞一去)- 술 석잔을 한번에 마시기
5.유범공과 (有犯空過)- 덤벼드는 사람이 있어도 참고 가만 있기
6.자창자음 (自唱自飮)- 스스로 노래 부르고 마시기
7.곡비즉진 (曲臂則盡)- 팔을 구부려 다 마시기(러브샷)
8.농면공과 (弄面孔過)- 얼굴 간지러움을 태워도(놀려도) 참기
9.임의청가 (任意請歌)- 마음대로 노래 청하기
10.월경일곡 (月鏡一曲)- 월경 노래 한 곡 부르기
11.공영시과 (空詠詩過)- 시 한수 읊기
12.양잔즉방 (兩盞則放)- 두잔이 있으면 즉시 비우기
13.추물막방 (醜物莫放)- 더러운 것 버리지 않기
14.자창괴래만 (自唱怪來晩)- 스스로 괴래만을 부르기(도깨비 부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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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석정(鮑石亭)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경주 남산의 서쪽에 있는 석구(石溝).
사적 제1호. 삼국유사 권2 처용랑망해사조(處容郞望海寺條)에 49대 헌강왕(875~885)이 포석정에 행차했을 때 남산신(南山神)이 나타났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곳은 927년 55대 경애왕이 왕비·궁녀·신하들과 놀다가 견훤의 습격을 받아 죽은 곳이기도 하다.
포석정은 경주 서쪽 이궁원(離宮苑)에서 열리는 연회를 위해 만든 것으로 시냇물을 끌어들여 포어(鮑魚) 모양을 따라 만든 수구(水溝)에 흐르게 하고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며 술을 마시며 즐겼다고 한다. 이러한 것은 유상곡수(流觴曲水)라는 시회(詩會)로 중국 동진(東晉)시대부터 유행했으며, 통일신라시대에 화려했던 궁정생활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포어 모양의 수구뿐인데 일제시대에 임의로 보수되어 수로곡석(水路曲石)의 원형이 많이 변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