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루미너스한 사진가 조엘 메이어로윗츠
뛰어난 사진가라고 하는 것은 세계를 발견하는 사람이다. 지금까지 그곳에 있으면서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대수롭지 않은 것에서 보다 깊은 세계를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일상적인 주제로부터 선명한 세계를 끌어내어 하나의 사진으로서 전개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이글스턴은 토착의 풍경을 육체의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공감(共感)을 통해 정착시켰다. 말하자면 체험이 육체화된 미국적 풍경이다. 이것에 반해서 쇼어의 풍경은 마음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의식성이 강한 풍경이라 할 수 있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려고 하는 조엘 메이어로윗츠에 이르면 더욱 지적이고 분석적으로 미국 풍경의 유산을 의식화하여 자신의 방법론으로 삼고 있다. 메이어로윗츠 사진의 강렬함은 그 자신보다도 더 젊은 세대의 사진가들로부터 평가되고 영향력도 크다. 그러나 이것은 메이어로윗츠의 강점임과 동시에 이글스턴이나 쇼어의 사진처럼 직접적인 충격이 부족해 결점이 되기도 한다.
메이어로윗츠는 1938년 뉴욕에서 태어나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미술을 공부하였다. 이글스턴과 같은 세대인 그는 1958년 로버트 프랭크의 작품을 보고 감명을 받아 사진에 눈을 떴다. 처음에 35밀리의 컬러 슬라이드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지만 생각한 대로 컬러 프린트를 만드는 것이 어려워 흑백사진으로 전환하였다. 1965년까지 뉴욕에서 아트 디렉터와 디자이너 일을 하였고, 이 시기부터 프리랜서 사진가가 된다. 존 사코우스키의 저서 『사진에 대한 고찰』에 수록된 100점의 사진 중에 메이어로윗츠가 66년에 찍은 흑백작품 ‘무제’가 선정되어 있다. 이 작품을 보면 로버트 프랭크의 명료한 영향을 찾아볼 수가 있다.
그에게 있어서 컬러 사진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하는 것은 1973년부터이다. 이 시점부터 현재 메이어로윗츠가 하고 있는 작업의 일면을 찾아볼 수 있다. 메이어로윗츠 자신만의 사진이 개화하는 것은 1976년부터이다. 8×10“의 대형 카메라로, 76년부터 77년에 걸쳐서 뉴잉글랜드 지방의 케이프 코드(Cape Cod)를 촬영한 일련의 사진이 메이어로윗츠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들을 가지고 1978년 보스톤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함과 동시에 같은 사진으로 『케이프 라이트(Cape Light)』란 제목의 사진집을 역시 같은 미술관에서 출판하고 있다. 이 사진도 역시 아메리카 풍경을 촬영한 것으로 이글스턴과 쇼어의 사진에서 찾아볼 수 있는 직접성이 희박해진 대신 일종의 복잡 미묘함이 엿보인다. 이 복잡 미묘함을 신비성, 명상성, 감상성, 아이러니, 로마네스크 등의 여러 가지 단어로 말할 수 있지만, 이 다양한 요소가 독자적으로 체계화되고 있는 것이 메이어로윗츠 사진의 특징이다.
케이프 코드는 미국 동해안의 유흥지로서, 그는 이곳 풍경에서 빛나는 새로운 공간과 분위를 뽑아내고 있다. 활짝 갠 하늘과 에머랄드의 바다에 한 점으로 존재하는 보트와 사람, 하얀 페인트로 칠해진 리조트 하우스의 내부, 그 베란다에서 바라본 저녁노을, 암청색 일색의 황혼의 인기척 없는 수영장, 베란다 난간의 맞은편으로 펼쳐지는 어두운 바다와 번개, 콜로니얼풍의 화려한 꽃무늬의 벽지와 소파가 풍부한 여름 햇빛에 의해 빛나고 있는 실내, 특히 메이어로윗츠가 좋아하고 주제로 즐겨 삼는 것은 황혼의 사광과 요란한 인공조명을 결합시킨 모텔이나 주유소, 차를 탄 채로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이나 극장 등의 정경이다.
예를 들어 프로빈스타운(Provincetown) 등은 가장 전형적인 것이다. 황혼의 하늘 아래 새빨간 코카콜라 간판, 밝은 초록색의 새로운 건축 재료로 지은 드라이브 인의 인공색,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형광등의 먼지 낀 및 등 인공조명의 홍수가 펼쳐지고 있다. 더욱이 거기에는 신비감과 아이러니가 공존하고 있다. 이 방법은 잇따라 발표된 센트루이스, 플로리다의 시리즈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케이프 라이트』에서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수평선이 가로지르는 하늘과 바다를 촬영한 사진이 절반 가까이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경우에서는 폭풍우의 예고와 같이 안개로 인해 수평선이 없어져 하늘과 바다가 미묘한 빛의 공간으로 이루어져 구별이 안 가는 작품도 있다. 또한 파란 하늘, 하얀 구름, 군청색 하늘의 콘트라스트가 강한 케이프 코드의 눈부신 빛을 표현한 것도 있다. 그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그가 자신있게 보여줄 수 있는 석양에 물들은 미묘한 하늘과 바다의 톤을 찍은 사진이다. 이것을 아마추어 사진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석양 풍경에 고도의 기술을 구사한 것으로 보고 ‘사진이 이상화된 미’ 또는 간단한 ‘감상, 향수’의 차원에서 해석하는 커다란 오류가 생겨난다. 메이어로윗츠의 수평선 풍경사진들은 역사적인 아메리카 풍경의 유산을 그 자신의 감수성을 매체로 하여 인용하거나 비평하고 있는 것이다.
스티븐 쇼어에 대해 언급하면서 필자는 초기의 미술사 속에서 나타난 허드슨 강파와 로키 산맥파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쇼어는 이들 유산을 어느 정도 의식하면서 미국만이 갖는 풍경을 우러나오게 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메이어로윗츠는 이들 유산을 지적인 게임과 같이 구사한 지적인 사진가였다. 이러한 이유로 조금 우외하는 것이 되겠지만 미국의 풍경관의 기반에 대해서 언급하고 다시 메이어로윗츠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미국인은 자연을 너무나도 빨리 정복해 버렸기 때문에 자연을 극복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연을 무시하고, 자연의 법칙에 따르는 것을 소박한 태도로 거부한다. 자연과 인간의 사이에 융합이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것은 프랑스 학자 지그프리드의 ‘미국의 자연과’에 대한 견해이다. 유럽인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미국인에게 있어서는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사진사를 통해 생각해 보면, 미국의 19세기 후반의 윌리엄 헨리 잭슨, 티모시 오설리반 등의 사진가는 로키 산맥이나 콜로라도 계곡 등의 미개척지에 정부가 파견한 탐험조사단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그곳의 대자연을 촬영했다. 그러나 황량하고 장엄한 거대한 풍경은 인간의 척도를 초월한 것이었다. 즉 유럽에서 들어온 풍경사진의 개념으로 대자연의 카오스를 구성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동시대의 유럽 사진가들은 18세기 말경에 일어난 풍경화를 답습하여 인간과 자연의 친근감있는 조화미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개념으로 미국의 대자연에 대처하면 속수무책에 빠진다. 결국 잭슨이나 오설리반 등 탐험조사단의 사진가들은 풍경에서 미를 탐구하는 사진가로서가 아니고, 지질학자, 지리학자, 생물학자의 눈과 대자연에의 소박한 동경자의 눈이라는 두 가지의 극을 갖는 시선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대자연을 동경의 시선으로 대처한다는 면에서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미술에서는 미국 최초의 풍경화를 그린 허드슨 강파의 토마스 콜(Thomas Cole)에 의해 1820년부터 전개되고 있다. 흥미로운 일은 동시대의 유럽 인상파와 같이 풍경을 대기 중에 용해시키려 하지 않고 반대로 양감있는 덩어리로 잡으려고 한다는 점이다. 콜의 <호반 풍경(Lake Scene)>이 대표적인 예이다.또한 같은 파의 프레드릭 처치에게서도 같은 경향이 보인다. 그들은 대자연에 대한 외경의 마음을 그림과 동시에 호수나 산 및 하늘을 양감있는 덩어리로서, 과학자와 같은 시선을 가지고 그렸다. 가까운 것과 먼 것, 정확한 질감, 특히 빛의 효과를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빛의 효과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주제로 한 동시대의 풍경화가로 존 켄제트, 조지 이네스, 피츠 휴레인, 마틴 비드 등을 들 수 있다.
Thomas Cole
선명한 색채, 중간색, 미묘한 변화 등 작가에 따라서 그 방법은 여러 가지이지만 모두 빛을 탐구하고 있다. 콜이나 처치에게는 외경심과 대치되는 과학자의 시선, 켄제트에 이르면 사실주의적인 시선과 시적인 에스프리의 결합으로 비록 변용이 있다고 하여도 그 각자의 이중의식이 화가의 내면에서 갈등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서로 통하고 있다. 다시 말해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불안정한 공존은 미술에 국한되지 않고 예술 전반에 걸쳐서 끊임없이 흘러가는 미국 예술의 원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19세기의 화가들 중 일부가 공통으로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풍경에서의 빛의 효과였다. 이들은 언덕이나 강, 호수, 안개, 구름의 상태, 폭풍 전의 하늘 등 미묘한 빛의 톤을 주의깊게 관찰하여 주제로 삼고 있다. 그중에는 완전한 빛만을 연구하여 하늘과 물만으로 된 추상적인 작품도 있다. 이 풍경 중에서도 특히 빛의 효과에 관심이 많았던 19세기의 일군의 화가들을 1960년대 휘트니 미술관의 디렉터였던 존 바우어(John I. H. Baur), 는 ‘루미니스트(luminist)'라고 명명했다. ‘루미너스(luminous)'라는 말은 ’발광하다, 빛나다‘라는 의미이지만, 이들 화가의 작품은 확실히 풍경이 빛을 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이름은 일군의 19세기의 풍경화가를 총괄하기 위하여 붙인 것으로, 현대미술 속에서 정착하고 있다.
루미니스트의 풍경에는 이상한 정적이 감돌고 있는 것이 많다. 이것은 자연의 시적(詩的)인 순간에서 느낀 두려움이다. 반대로 메이어로윗츠의 하늘과 바다를 주제로 한 사진은 놀랍게도 이들 화가의 풍경과 똑같다고 할 만큼 유사하다. 하늘과 바다의 수평선의 풍경은 물론이고, 편대의 드라이브 인(drive-in)의 요란한 빛과 색의 홍수와 같은 작품에서조차도 그 배경에서 시적인 순간의 두려움을 찾아볼 수 있다. 사실 그대로 표현하면 ‘미의식’으로 부르는 쪽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메이어로윗츠의 사진이 언뜻 보기에 풍속적인 ‘감상미’같이 보이지만, 주의해서 바라보면 투철하고 일관된 강인한 사고에 직면하게 된다. 즉 풍경의 유산에 입각하여 대상을 파악하고 있다.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졸업 후 뉴욕의 상업 디자인의 아트 디렉터로 일을 한 후, 1971년부터 쿠퍼 유니온(미술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메이어로윗츠가 미국 풍경사를 의식하지 않을 리 없다. 그의 사진은 이러한 지식 위에서 성립하고 있다. 그만큼 지적인 사진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비되는 듯한 농밀한 로맨티시즘의 시선이 내포되어 있는 것도 그의 사진의 매력이라고 하다. 흥미로운 일은 이글스턴에 의해 도화선이 당겨진 컬러에 의한 풍경사진은 80년대에 들어와서 하나의 조류로서 젊은 사진가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글스턴의 출현이 지나치게 극적인 화제가 되어 버린 반동의 영향도 있겠지만 젊은 세대는 이글스턴보다는 메이어로윗츠의 영향을 더 받고 있는 사람이 많다. 80년대 들어서 사진이 점점 지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는 과정에서 반짝이는 감성으로 지적인 작품을 창조하는 메이어로윗츠의 자세는 젊은 사진가들의 목표이다. 이 사실은 미국 사진의 방향을 또한 시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4. 도시생활의 허구를 부각시킨 맥고윈과 미국의 군상을 생생하게
묘사한 슬레이빈
이글스턴, 쇼어, 그리고 메이어로윗츠는 컬러에 의해서 새로운 아메리카 풍경을 제시한 사진가다. 그런데 ‘아메리카 풍경’이라는 말에는 미국의 풍경이나 정경을 가리키는 의미 외에 미국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지칭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가장 미국적인 인물이 죽었을 경우에도 ‘하나의 아메리카 풍경(American Scene)을 잃었다’라는 식으로 사용된다. 인물, 도시 상황에 관해서도 아메리카 풍경이란 말로 표괄할 수가 있다.
여기에서는 이른바 풍경과는 다른 도시의 정경을 주제로 찍는 사진가에 대해서 언급해 보자. 메이어로윗츠는 ‘케이프 라이트’ 이전 1975년까지의 한 시기에 도시 길거리의 사람들을 주제로 한 거리 사진(street photograph)을 찍었던 적이 있다. 이 일련의 작품은 미국 도시의 숨막힐 듯한 열기가 전해오는 듯한 격렬한 컬러 작품으로서 평가되고 있다. 이글스턴과 쇼어도 미국 생활을 표현하기 위해 인물을 다룬 사진도 많다.
컬러로 이러한 장르를 발전시킨 선구적 사진가로는 헬렌 레빗트(Helen Levitt)가 있다. 70년대 초반에 컬러로 재출발한 레빗트는 주로 도시 슬럼가의 사람들을 찍었다. 이 작품들로 1947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던 경력으로 보아도 이 종류의 사진에서는 선구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약간 문제가 있는 것은 종래의 다큐멘터리 수법이 너무 눈에 띈다는 것이다. 즉 아메리카 풍경으로서는 부족한 감이 든다.
이러한 의미에서 맨 처음 거론하고 싶은 사람은 로스엔젤레스에 살고 있는 케네스 맥고윈이다. 그의 아메리카 풍경은 현실의 세계와 위조(fake)의 세계를 동일하게 보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 세계는 그의 사진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후르트>라는 작품 속의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핑크색 피부의 미녀와 체격이 늠름한 나체의 흑인은 마치 플라스틱 인형 같고 <요가>란 작품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는 나체의 남자와 그 위에 펼쳐지는 감청색의 하늘도 모조품 같은 맛이 난다. <영화관의 화재>라는 작품은 연기가 뭉게뭉게 올라가는 영화관 앞에 구경꾼들이 모여 있는 정경을 촬영한 것뿐이지만, 현실감이 희박하여 꿈속에서 일어난 일 같다. 맥고윈 자신도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LA에 살고 있고, 거리에 의해 포위되어 있는 셈이다. 그러한 나의 눈에 비친 일상은 이러한 정경들이지만 LA라는 거리가 전달해주는 놀랍도록 초현실적인 의미를 띤 정경을 즐겨 찍고 있다.”
맥고윈은 주로 레코드 자켓의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그는 생활을 위한 사진과 자기 자신은 위한 사진은 결국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텔레비전에 비치는 스타의 얼굴도 한두 발 뒤로 물러서서 조명이 늘어선 천정까지 화면에 넣으면 위조의 세계가 되고, 현실도 한 걸음 물러서서 보면 위조의 세계로 비춰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맥고윈의 세계는 위조도 현실이며 현실도 위조인 것이다. 더욱이 이 동일성은 LA만이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모든 도시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미국 도시의 획일성에서 유래하는 것일 것이다.
“미국의 도시는 모두 비슷비슷하게 닮았다. 그러므로 잇달아 도시들을 방문하는 것은 지루하고,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롭다”로 싱클레어 루이스(Sinclair Lewis)는 1920년대에 집필한 소설 「중심가(Main Street))」 속에서 미국 도시의 정경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왜 나는 굳이 이 거리에 서 있으며, 그 밖의 다른 유사한 거리에 서 있지 않은 것일까? 약국과 무슨 회사 지점 앞에서, 어느 곳의 어떤 회사라도 좋다. 수천 수백 개나 있는 그 어느 곳의 약국이라도 좋다. 닮은 듯한 회사나 약국 앞에서 왜 서 있지 않는 것일까?
―식민지적 도시 뉴욕―
이것은 1945년 사르트르가 뉴욕을 방문했을 때 느낀 도시의 획일성에 대한 감상이다. 또한 그는 실존철학자답게 이 도시는 “길을 헤매는 일은 절대 없지만 자리를 잃어버린다”고 덧붙여 말하고 있다. 물론 이 두 사람의 견해는 현재는 전 세계의 도시에 공통적으로 해당된다. 그러나 같은 건물, 같은 간판, 같은 호텔, 같은 레스토랑이라는 극단적인 획일주의(Conformism)는 특히 미국의 도시에서 현저하다. 필자는 이 획일성의 현상에서 미국인의 버릇에 가까운 것을 느낀다. 미국의 도시가 가진 창백한 감각은 이 획일주의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한마디 덧붙이면 미국의 도시는 유럽과 같이 정서적이지는 않지만 분방한 에너지를 숨긴 거친 인간성이 있다.
케네스 맥고윈의 인공적인 원색의 도시풍경(cityscape)은 획일주의를 위조 감각으로 억제해서 확립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미국의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창백한 도시와 인간의 정경을 사진을 통해서 비평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판에 박힌 양식으로 딱 잘라서 결론지어 버리면 맥고윈으로부터 이의가 나올 것 같다. 그는 필자 앞으로 보낸 편지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Neal Slavin
“나의 사진은 인간에 대한 동정이다. 따라서 본질적으로는 비평이나 풍자가 아니다.” 확실히 그의 작품은 악의 있는 풍자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렇지만 팝 아트를 현대적인 비평으로 보는 관점에서 보면 그의 사진도 역시 하나의 비평이라 할 수 있다. 지금 필자는 팝 아트를 참고로 꺼냈지만 맥고윈의 사진은 팝 아트의 연장선 위에서 성립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약력을 보면 명료해진다.
맥고윈은 1940년 유타 주 오그덴에서 태어났다. 그의 기억에 최초로 남아있는 것이 테크닉 컬러의 영화 장면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과연 컬러 사진의 세대라고 말할 수 있다. 1974년 캘리포니아 대학과 1976년 동대학원에서 미술을 배우며 그림을 그렸지만, 1986년에 사진으로 전향하였다. 그가 미술을 배우고 있었던 시기는 팝 아트의 전성기로서 그도 당연히 영향을 받고 있었을 것이다. 그 자신도 “상업과 예술로서의 사진은 전혀 별개의 것으로 생각되기 쉽지만 팝 아트의 출현으로 이러한 구별은 그렇게 엄격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팝 아트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할 여유는 없지만 앤디 워홀의 마릴린 몬로의 실크 스크린 사진을 종횡으로 배열한 작품, 리히텐슈타인의 신문 만화의 한 컷을 확대하여 그린 회화는 미국인의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매스 미디어가 만들어낸 대중적인 이미지의 세계이다. 즉 실체를 잃어버린 위조를 재현한 것이다.
맥고윈의 사진은 이 팝 아트의 이미지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발광하는 듯한 선명한 색채를 특기로 하는 루미니즘의 사진가를 면에서 그는 지금까지 다루어온 세 명의 새로운 아메리카 풍경의 사진가와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이 세 사람이 어디까지나 현실을 대상으로 해서 미국적 풍경을 표현하고 있는데 반해서 맥고윈은 허상과 같은 현실을 표출하려고 하는 점에서는 결정적으로 다르다. 맥고윈이 도시의 정경에 의해서 아메리카 풍경의 단면을 드러내고 있지만 닐 슬레이빈은 사람들이 모이는 기념사진의 형식으로써 아메리카 풍경을 표현하고 있다. 미국은 개인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반대로 그룹이나 조직을 만드는 일을 통해 다른 사람과 우호를 다지고 공동의 이익을 지키는 것을 중요시한다.
필자는 긴 세월을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가장 미국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다음의 두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로 조직, 조합, 위원회, 그룹이라는 단체를 닥치는 대로 만드는 것과 도 한 가지, 파티라 불리는 이름의 사교를 들고 싶다. 파티에는 검은 넥타이를 착용하고 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호텔 볼룸에서 벌이는 것부터 근처의 친구들이 아파트에 모여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차를 마시는 텔레비전 파티까지 크고 작은 여러 가지 형태의 것이 있다. 이 두 모임의 공통점은 이것이 미국인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과 같이 커뮤니케이션을 갖기 위한 중요한 자리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모임은 부부 단위로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을 연결하는 매개체인 것이다.
닐 슬레이빈은 이러한 여러 가지 조직의 기념사진을 컬러로 일관하여 제작하고 있다. 미국의 사무실이나 가정을 방문하면 자신이 참가하고 있는 조직체의 회원으로서 찍은 기념사진이 걸려 있다. 그것은 물론 그들이 사회에 참가하고 있다는 일종의 자기 확인이라는 뜻이지만 슬레이빈은 이 기념사진의 개념을 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찍은 그룹이나 조직체는 예를 들면 ‘묘를 파는 인부’ ‘레슬러’ ‘여자 야구팀’ ‘소방수’ 등과 같이 특정한 단체들이다. 여러 명의 동호회나 직업의 그룹도 있지만 수백 명에 달하는 것도 있다. 이러한 조직체의 사진은 그들의 직장과 시설을 배경으로 삼은 기념사진으로서 촬영하고 있다.
한 장 한 장 이들 연작(連作)을 바라보면 침묵 속에서 뭉쳐진 동료끼리의 연대감과 그 기쁨이 각 단체 고유의 단기(團旗), 제복, 상장 등이 빚어낸 색채로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연작의 총체적 이미지로서 미국의 색과 미국의 인물상이 나타나 있다.
즉 슬레이빈은 일반적인 미국의 단체 기념사진의 제도에 눈을 돌려, 그 방법을 그대로 모방하여 아메리카 풍경을 표현하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는 미국의 사진 제도가 사람들이 사회에 참가하려는 잠재적인 희구이고, 아이덴티티의 확인인 것을 깊이 통찰하고 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슬레이빈이 1년간 그림엽서 사진의 촬영에 종사하였던 일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림엽서의 색채 감각이 일반 미국인 군상 사진의 이미지에 훌륭하게 활용되어 있다.
슬레이빈은 1941년 뉴욕 시에서 태어났다. 쿠퍼 유니온에서 유화, 그래픽 디자인 사진을 배웠다. 그후 옥스퍼드 대학에 유학하여 르네상스 미술을 전공하고 귀국한 후 구겐하임 미술관의 사진부에서 어시스턴트로 활동하였다. 연령으로 부면 다음에 언급할 세대에 속하는 사진가이지만 1964년경부터 흑인의 게토 사진을 찍기 시작하였고, 이미 <단체(Organization)>라는 일련의 작품을 1973년에 발표하였기 때문에 굳이 이쪽으로 분류해 넣었다.
현대사진의 이해 - 고쿠보 아키라 지음, 김남진 옮김, 눈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