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에 그때 아버지보다 나이 스물은 더한 내가 육학년인 우리교실에서 펼친 대국론소국론에서 "소국이라하여 기죽을 것 없느니라 까짓 땟놈들. 왜놈들 네들을 깔아뭉갤 날이 머잖았은께" 선생님의 박수치기에 따라 우뢰와 같이 쳐대며 날 힐껏힐껏 쳐다보는 눈들을 피해 자꾸만 책상 속으로 빨려들었던 그날. 내가 왜 그리도 챙피만했는 지. 그 아버지가 학교를 다녀 가신지 벌써 60년을 훌쩍 넘겼다. 그때 아버지는 어리석기만한 시골 농군이 아니었던 것이다.겨우 조그만 수리조합장 직함으로 65명의 까까머리 아이들 앞에서 소국론 대국론을 펼치고 계셨던 것이다.우린 무슨 얘기인지도 모르고 박수를 쳤지만 담임 선생님께선 나 때만이 아니라 나보다 일곱살 더한 누나랑 다섯살 더한 형의 담임을 하신 분이셨다. 지난 연말 송년회에서 그 담임선생님의 자제로 동창인 김대홍을 만났다. 우린 같은 반이 한 번도 된 적이 없었기에, 또 키 차이 때문에 어울려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가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일 때, 내가 교수로 문학을 가르칠 때라 입소문으로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쉰 즈음에 우리 집에 잠시 들린 적도 있었다. 나는 그의 아버지인 담임선생님에 대한 추억을 꺼내들고 그가 모임에 잘 나타니지 않았던 것을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나지 않은 친구들과 싸잡아서 비난했다.그리고 귀경하는 버스 안에서 후회했다. 그 친구들이 동창회를 조직한 초기의 주역이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무엇을 하고 살았던가? 돌이켜 보면 오직 가족을 위해 하루 12시간씩 강의하며 살지 않았는가 말이다. 이튿날 날이 밝기도 전에 金 교장한테 메시지로 내가 너무 성급했다고 사과했다. 친구도 어제 먹은 막걸리 한 사발 덕분에 기분이 묘하다며 긴 글을 올렸다. 술 한 잔 마신 힘으로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을 현실로 소환해서 어떻게 해 보겠다는 심산이란 말인지. 이미 졸업 후로 만나서 얘기 한 번 해 보지 못한 친구들을 내가 얼마나 잘 알고 있다는 것인지. 일흔을 넘게 살고도 철들기가 이렇게 힘들단 말인가? 며칠 남은 올해가 끝나고 명년이면 아버지가 사신만큼에 더욱 가까워진다. 일흔 여섯의 아버지. 어머니를 먼저 보내고 10년을 더 사시면서 그 최후가 얼마나 외로움과 소외감을 느끼시며 사셨을까? 막내아들을 큰댁 작은방으로 옮겨놓고 이튿날 동네 공중목욕탕에서 숨진 채 발견됐을 때 얼마나 황망했었던지. 그때에도 나는 역시 마흔 살의 철부지였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후회막급한 일이 얼마나 많은지 헤아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