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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대구대교구 새방골성당 역사
새방골성당은 대구대교구소속 본당으로서 대구광역시 서구 상리동 559번지<새방로27길 9>에 자리하고 있다. 새방골성당은 초대 대구교회 사제로 임명된 프랑스 선교사 로베르토 김보록 신부가 신나무골을 거쳐 1888년 이곳에 부임하면서부터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였다. 대구교회 본당사제이신 김보록 신부가 맨 처음 머물던 곳인 신나무골이 대구교회 첫 본당 터이고, 바로 이곳 새방골이 그 두 번째 본당 터이다. 그 후 김보록 신부에 의해서 대구교회의 얼굴인 계산동 주교좌성당이 설립되면서 계산동성당 관할공소로 되었다가 날뫼에 비산동성당이 설립되면서부터는 비산동성당 관할 새방골공소에서 1963년 준 본당이 되고 1978년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새방골성당은 원죄 없으신 성모님(12월 8일)을 주보로 모시며, 관할구역은 상리동 전역(1, 2구)과 이현동 일부이다.
역대 본당사제
초대 김보록(金保祿)바오로<로베르토 아킬레오, 프랑스인>(1888~1919)
02대 베르모렐<프랑스인>(1919~1927) - 이상 계산성당 소속
03대 맹석호(알로이시오)<프랑스인>(1927~1928) - 이하 비산성당 소속
04대 하제안(요한 마리아)<프랑스인>(1928~1929)
05대 이필경(안드레아)<한국인>(1929~1929)
06대 이종필(마티아)<한국인>(1931~1943)
07대 노를뢰(베드로)<프랑스인>(1943~1945)
08대 조문도(레이몬드)<파리외방전교회소속스위스인>(1945~1946)
09대 노를뢰(베드로)<프랑스인>(1946~1948)
10대 이기수(야고보)<이하 한국인>(1948~1950)
11대 정수길(요셉)(1950~1951)
12대 김영제(요한)(1951~1956)
13대 이기수(야고보)(1956~1961)
14대 이창호(안드레아)(1961~1962)
15대 조상익(베드로)(1962~1963) - 새방골 준본당으로 분리 독립
16대 권영조(勸永兆)마르코(1963~1964)
17대 조상익(趙祥益)베드로(1964.7.17~1966.10)
18대 박창수(朴昌壽)요한(1968.11~1969.8.14)임시
19대 이종흥(李鐘興)크리산도(1969.8.15~1970.11.24)임시
20대 곽길우(郭吉祐)베드로(1970.11.25~1971)임시
21대 김규태(金圭泰)디모테오(1971~1974.1.5)임시
22대 정순재(鄭淳在)베드로(1974.1.6~1975.1.30)임시
23대 김경식(金烱式)보니파시오(1975.1.31~1976.3.8)
24대 이대길(李大吉)시메온(1976.3.9~1977.7.4)
25대 임 청(任 淸)베드로(1977.7.5~1979.11.5) 새방골본당으로 분리독립
26대 김규태(金圭泰)지모테오(1979.11.6~1984.1.17)
27대 이종흥(李鐘興)크리산도(1984.1.18~1984.7.25)임시
28대 권혁시(勸赫時)모이세(1984.7.26~1985.10.29)휴양
29대 허 용(許 龍)요셉(1085.10.30~1986.1.17)임시
30대 나원찬(羅元璨)바울로(1986.1.18~1987.6.20)주임
31대 김용길(金容吉)바울로(1987.6.21~1988.7.7)임시
32대 김정환(金正煥)미카엘(1988.7.8~1989.4.3)주임
33대 박병원(朴柄元)필립보(1989.4.4~1989.7.9)임시
34대 박원출(朴元出)토마스(1989.7.10~1992.7.9)주임
35대 김두찬(金斗璨)요한(1992.7.10~1993.3.31)주임
36대 이종건(李鐘健)시메온(1993.4.1~1993.11.14)임시
37대 이종흥(李鐘興)크리산도(1993.11.15~1003.12.2)임시
38대 박덕수(朴德洙)스테파노(1993.12.3~1995.8.17)주임
39대 박영식(朴永植)야고보(1995.8.18~2000.11.23)주임
40대 이상해()스테파노(2000.11.24~2001.9.6)주임
41대 김용민()안드레아(2001.9.7~2002.9.5)주임
42대 소요한()요한(2002.9.6~2004.9.2)주임
43대 김봉진()안드레아(2004.9.3~2008.9.4)주임
44대 김윤호()토마스 데 아퀴노(2008.9.5~2011.8.25)주임
45대 김종률()스테파노(2011.8.26~)주임
역대 본당수녀
01대 박영자(朴英子)요세피나(1994.2.4~1996.2.18)
02대 서정실(徐貞實)요안나(1996.2.18~1999.2)
03대 김보영(金寶英)프란체스카(1999.2~1999.11.30)
역대 공소회장
01대 이장언(李章彦)방지거
02대 이규성(李圭成)다미아노(?~1920)
03대 박문규(朴文圭)베드로(1920~1930)
04대 전봉립(全鳳立)발라바(1930~1933)
05대 박문규(朴文圭)베드로(1933~1938)
06대 이종화(李鐘華)바울로(1938~1963; 이규성의 아들)
역대 본당회장
01대 이일우(李一雨)히뽈리도(1964~1997.11; 이종화의 아들)사목회장
02대 박윤식(朴潤植)라우렌시오(1994~1998.1)평협회장
윤태수(尹太守)에드왈도(1997~1998.1)사목회장
03대 조영식(趙永植)막시모(1998.1~1999.10)평협회장
04대 이상권(李相權)베드로(1999.10~ ; 이일우의 아들)총회장
이청진(李淸進)토마(1999.10~)평협회장
05대 김갑수()()총회장
()()평협회장
06대 이상배()(이상권의 아우)총회장
강삼태()평협회장
07대 이태기
08대 김갑수
09대 이상권(李相權)베드로(2011.10~ ; 이일우의 아들, 이상배의 형)총회장
강삼태()평협회장
전사
새방골은 와룡산(臥龍山) 기슭에 자리 잡은 작은 부락이다.
현재의 상리1동으로 전설에 의하면 달성군 신당리 금호강하류에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돌풍이 불어 집이 날아와 떨어져 살고 있는 곳이 지금의 새방골이라 한다. 처음 함양조씨(1가구)가 개척하고 살았으나 임진왜란 때 왜란을 피해 진주강씨가 정착하게 되어 그로 인해 새로 집이 생겼다고 해서 새방골이라 한다.
그 후 함안조씨, 옥산전씨가 이곳에 정착하기 시작해서 경주이씨, 경주김씨 등이 모여들어 부락을 형성하고 ‘새방골’이라 칭했다.
새방골은 원래 달성군 달서면 상리1동에 속했으나 1930년 대구시에 편입되었다.
1837년 김현상 요아킴(김찬수의 증조부)이 나이 38세에 부인 김발바라, 장남 응배 요한(12세), 둘째아들 진배 가를로(6세), 장녀 아가다(9세)를 데리고 경성을 떠나 신동의 신나무골과 한티에 와서 살다 죽었다(한티 묘지발굴에서 그의 시신이 확인됨). 김현상의 가족들은 경신박해(1860)때 한티에서 새방골로 이사 왔다. 장남 요한은 새방골에서 경신박해 때 두 번이나 체포되어 매를 맞았다. 그의 비신자 친구 손대여가 대구감사 서헌순에게 부탁하여 요한을 석방시켜 주었다. 아가다는 서철순의 아내가 되어 서상돈(徐相燉)아우구스티노(대구본당의 초대회장)를 낳았다.
새방골에는 1860년부터 이재영(李載榮)고스마, 그의 4촌 이권필(李權畢)과 아들 이규혁(李圭赫; 족보에는 李圭復)시몬이 살고 있었다. 이재영은 1868년(무진년) 병인3차 박해 때 31세의 나이로 서익순(38세; 서상돈의 3촌)과 정 바오로(25세)와 함께 절두산 한강에 익사당하는 순교의 영광을 받은 이 공사가(뮈텔주교의 1895년 일기)의 4촌이다.
이재영의 아들 이장언(李章彦,1861~1934)방지거는 대구읍내 뽕나무골(대구 계산성당부근) 이방지가(절두산 순교자 이 공사가의 여동생; 최정복의 외조모)의 당질(堂姪)이요, 이규혁은 대구읍내 뽕나무골 서의관상정(徐議官相定)의 합부인(閤夫人) 이마리아(서병무의 모친)의 생질이며 종훈(鐘勳) 아나다시아(동촌 거주)와 종해(鐘海)야고보(신암동 거주)와 종각(鐘珏)벨라도(신암동 거주)를 자녀로 두었다. 이장언은 아들 이종칠(李鐘七), 이종열(李鐘烈), 이종덕(李鐘德)과 4명의 딸을 낳았다.
이재영(李載榮)고스마는 최정복(대구천주교회사,37쪽)의 기록과는 달리 새방골에서 신자가 되지 않고 경북 칠곡군 동명면 송산동의 대치부락(어골)에서 신자인 아내 김마리아의 신앙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이재영의 증순자 [이화우 안토니오1911년9월30일생]의 증언). 이재영은 아내가 천주교 신자인 것을 알고 집안이 망할 것을 두려워하여 아내에게 배교를 강요했다. 김마리아는 신앙을 버리겠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몰래 신앙생활을 계속했다. 이재영은 결국 그것을 알아내고 작두에 목을 갖다 대라고 위협하기까지 하였다. 아내는 태연자약하게 목을 작두에 갖다 대면서 죽는 한이 있어도 신앙을 버리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아내의 목을 자르지 못하고 아내의 이러한 신앙에 감명을 받아 온 가족과 함께 그리스도인이 되고 경신박해(1860)를 피해 밤에 새방골의 송골로 피신해 와서 살았다(김구정, 영남교회사627~628쪽; 마백락, 경상도교회와 순교자들, 대건출판사1989년, 364쪽).
새방골의 지역구조에 대한 설명
새방골은 비록 와룡산 기슭에 자리한 작은 부락이나, 수많은 작은 지명을 포함하고 있는 곳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모든 자연부락에도 널리 통용되는 관습으로 집집마다 그 집의 이름(宅號)이 따로 있어 구별되는 것처럼, 구역도 잘게 나누어 구체적으로 이름을 붙여 그 지역을 정확하게 구분하려는 뜻이 담겨있기도 하다.
따라서 새방골 안에는 다음과 같은 작은 지명(자연부락)으로 또 나뉘어 부르는데, 그 명칭은 각각 다음과 같다.
현재 성당이 있는 곳을 옛날에는 미나리 밭이 있던 곳이라 하여 ‘안깡뚝’으로 부르고, 성당 남쪽은 얕은 야산의 아래이어서 ‘언덕 밑’으로 부른다.
그리고 성당 앞은 ‘막골’이며, 성당에서 서쪽으로 와룡산 기슭에 더 들어간 곳은 ‘웃골’이다. 성당에서 고속도로 건너편은 ‘안산 밑’이며, ‘안산 밑’의 서쪽은 ‘당 너머’이다. ‘당 너머’는 원래 ‘당산너머’인데 말을 줄여 발음하는데 기인한다. 그리고 현재 무학사 쪽이 ‘대치골’이며, 경원고등학교가 있는 곳이 ‘상남골짜기’이고 경원고등학교 아래쪽이 ‘옻밭골’이다.
‘옻밭골’에서 고속도로 건너편으로 내려온 곳이 ‘덕골’이며 ‘덕골’과 ‘안산 밑’의 사이에 ‘송골’이 있는데 이곳에 김보록 신부님의 사택이 있었다.
이 사택이 있던 자리에서 조금 내려간 곳에 현재 상리공원이 들어서 있으며,
‘송골’의 바로 아래에는 옛날에 못이 하나 있었는데 그 못은 현재 메워져서 도시가스가 들어서 있다. 그리고 상리공원입구에서 서쪽이 옛날 샘이 솟는 곳이라 하여 ‘샘숫골’이고, 그리고 메워진 그 못의 건너편에 ‘대밭 골’(죽전)이 있었다.
김보록 신부님의 사목시기에는 이 대밭 골에 말을 메는 곳이 있어서 나귀나 말을 이용하시던 김보록 신부님은 이곳에서 말(나귀)을 메어두고 새방골(송골)로 올라가시곤 하였다. 교회사 기록에 더러 보이는 “성사를 마치시고 신부님은 새방골의 죽전으로 가셨다.” 하는 대목이나 “새방골의 송골로 가셨다.” 하는 대목은 바로 이런 지형의 구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자연부락 전체를 통 털어 새방골이라 이름 하여왔는데, 죽전은 본래 대구부 서상면 지역으로 대밭이 있었으므로 ‘죽전’ 혹은 ‘죽박골’이라고 했으며, 1915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달성군 성서면에 편입되었다가 후에 대구시가 직할시와 광역시로 거듭나면서 도시계획의 필요성에 의해 신시가지를 넓게 형성하면서 새로 들어서는 마을의 이름을 새방골에서 가장 가까운 부락의 이름인 ‘대밭 골’ 즉 ‘죽전’을 원용하여 이름붙이면서부터 교회 안에서 더러 새방골이 죽전동이 아니냐하는 오해(?)가 생기기도 하였다.
하지만 전술하였다시피 ‘새방골의 죽전’은 아직도 여전히 상리동이며, 현재의 죽전동은 평리동과 중리동에 걸쳐 있는 대구의료원의 건너편에 새로 생긴 지역에다 그 이름만 따서 붙인 신흥지구로 전혀 타당하지 않은 지역이다.
다만 죽전성당의 신자들이 기록에서나마 동일한 지명인 그 이름(죽전)이 거론되던 김보록 신부님의 영성을 본받고자 하는 마음은 높이 사야할 것이다. 우리 구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원래 ‘신 평리 성당’으로 이름 하였다가, 한국교회200주년이 되면서 그 이름을 우리 교구 제2의 주보이신 이윤일 성인의 이름을 따서 ‘윤일성당’이라 이름하고부터는 이윤일 성인에 대한 남다른 신심을 갖게 된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일일 것이다.
참고로 새방골의 자연부락 구역도는 다음과 같다.
김보록 신부의 사목시기(1886~1919)
새방골(송골과 대밭 골<죽전마을>을 포함한)은 경상도일대를 전담하던 대구본당(현 계산본당)의 로베르(Achille Paul Robert, 김보록, 保祿, 대구본당주임, 1886년 6월~1919년 8월)신부가 사목 했던 곳으로서 대구대교구에서 신나무골 다음에 창립된 유서 깊은 성당이다. 이 지역에 복음이 선포된 것은 비교적 오래 되었다. 조선대목구 제7대 감목 블랑(Jean Marie Gustave Blanc, 백규삼, 圭三)주교로부터 경상도지역의 사목권을 위임받은 김보록 로베르 신부는 지방에서의 잦은 교안(敎案) 때문에 대구에 정착하지 못하고 1885년 칠곡(漆谷)군 지천면 연화리(枝川面 蓮花里)의 신나무골에서 이호연(李浩然)복사와 함께 머물면서 경상도전역에 흩어져 있던 신도들을 사목했다. 김보록 신부가 대구를 자주 방문함에 따라 이곳 신도들의 열성이 더욱 커져갔다.
1888년 11월 김보록 신부는 허 골롬바 사건이후 신나무골에서 대구 성밖의 송골(현재 대구광역시 서구 중리동1177번지)로 거처를 옮겼다. 김 신부는 송골에서 이장언(李章彦)방지거에게서 매입한 밭을 포함한 초가집(임시성당)에 머물렀다. 이장언의 집과 임시성당장소(중리동 1177번지)는 1977년 3월 28일 대구시 서구 이현 공단조성을 위한 구획정리로 폐쇄되었다. 새방골의 일부인 송골에는 3~4가구의 초가집밖에 없었고, 새방골에는 40여 세대가 살고 있었다. 이장언은 문필이 좋고 안중근의사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졌으며 신앙이 돈독한 사람이었다. 김보록 신부는 이장언을 복사로 임명하고 2년간 은신한 채 전교를 하였다. 어느 날 김보록 신부가 마부 장(張)씨와 이장언을 데리고 사목방문을 하던 중 관헌들이 돌을 던졌다. 김 신부와 장씨는 도망가고 이장언이 머리에 돌을 맞아 다친 일이 있었다. 이장언은 종들이 들고 집으로 돌아 올 정도의 큰 상처를 입었다.
대구지역에서는 천주교회에 대한 감시가 멈춰지지 않고 항상 박해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다. 김보록 신부는 낮에는 밖으로 나가는 것을 삼가고 밤에 상복으로 변장하여 대구 성안의 신도들에게 성사를 주러 가곤 했다.
김보록 신부는 1888~1911년까지 새방골의 신도들의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대구의 사도 김보록 로베르 신부 서한집1,2).
1888~1889년 새방골의 그리스도인들의 수는 50명, 예비자 12명, 전교회원 2명으로서 열심 하다(대구의 사도 김보록 로베르 신부 서한집1).
1888~1890년 신도 수 26명, 예비자 21명이고 열심 하다. 전교회원은 없다.
김보록 신부는 1891년 2월 25일 서울주재 프랑스영사(Collin de Plancy, 갈임덕 葛林德)에게, 3월 5일 뮈텔 주교에게 자신이 1890년 대구에서 추방된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대구의 사도 김보록 로베르 신부 서한집1, 93~103). 1890년 9월 김 신부의 여름 사제관이 비신자들에게 노출되자 매일 20~30명 내지 50명씩 떼를 지어 호기심으로 ‘하느님의 집’을 보러 왔다고 하면서 찾아왔다. 그는 그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호의적 반응을, 다른 사람들은 심한 욕을 하고 갔다. 9월과 10월에도 매일 이러한 일이 벌어졌다. 비신자들은 새방골로 창과 곤봉을 들고 떼 지어 몰려와서 김보록 신부와 신도들을 포위하고 때려죽인다고 두 달 동안 매일 위협했다. 1890년 성탄절 전날 대구 성안의 부랑자 70~80여명이 몰려와서 하인을 구타하고 사제관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방을 뒤졌다. 1891년 2월에도 대구에서 온 부랑자들이 김보록 신부와 신도들을 괴롭히고 협박하곤 했다. 이러한 협박이 오래 계속되자, 김보록 신부는 정장을 하고 김문일이라는 54세 된 전교회장을 통역자로 데리고 대구현감에게 시장을 요구하러 갔다. 그러나 현감은 그들을 만나주지 않았다. 그들이 시정을 요구하러 대구 감사에게 가는 도중, 김문일은 관헌들에게 심한 구타를 당했다. 삽시간에 3천여 명의 군중이 모여 돌을 던지면서 천주교인을 때려죽이라고 아우성을 쳤다. 김문일은 계속 구타를 당했다. 김보록 신부는 저항하다가 결국 감사를 만나지도 못하고 관헌에 의해 대구지역에서 추방되어 칠곡과 선산으로 피신했다. 대구와 그 인근의 신도들이 비신자들의 모욕과 몰매를 맞았다(대구의 사도 김보록 로베르 신부 서한집1, 93~103쪽).
김보록 신부가 대구감사 민정식에 의해 대구에서 추방된 산건을 소위 ‘대구교안(敎案)’이라한다. 천주교와 서양인들에 대한 이지역인들의 적대적 태도와 1886년에 채결된 한불수호통상조약을 무시한 지방 관리의 조치로 인해 발발한 그 사건은 조선대목구 제8대 감목 뮈텔(Gustave Charles Mütel, 閔德孝)주교와 프랑스공사(Collin de Plancy)의 중재로 해결되었다. 새 경상감사 이헌정은 범인들을 처벌하고 외교부대표 민정묵에게 결과보고를 했다(대구의 사도 김보록 로베르 신부 서한집1, 125~126쪽). 이 대구교안으로 한불조약에서 약속된 프랑스선교사의 행동의 자유가 지방 관리에 의해 침해된 것을 조선조정이 시정하게 된 전례가 되었다.
서울로 피신했던 김보록 신부는 협상이 타결된 후 1891년 4월 30일 새방골로 금의환향 대구감사 이헌영을 만나보고 대구주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상황에서 다시 사목을 하게 되었다. 이곳의 신도들은 더욱 용감하게 신앙생활을 했다.
김보록 신부가 작성한 교세통계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890~1891년 신도 수 72명이고 열심 하다. 예비자 6명, 전교회원은 없다. 1891~1892년 신도 수 80명이고 일시적으로 신심도가 미지근하다가 다시 열심 해졌다. 예비자 18명, 냉담자 6명.
1891년 여름과 1891년과 1892년 사이의 겨울까지 듀떼르트르(Dutertre Leo, 강량, 姜良) 신부는 송골의 초가집(임시성당)에 경상도 북부사목을 위해 머물렀다(뮈텔주교 일기, 181쪽). 이 신부가 ‘가실공소’에 성사를 집행한 문서상의 증거가 있다. 대구사건 때문에 충격을 받은 김보록 신부는 1891년 음력 12월 대구 성안의 대어벌(待御伐; 현 대구시 중구 인교동의 정규옥, 鄭圭鈺, 바오로 1852~1931) 승지의 사랑채에 거처하고(1897년까지) 새방골을 공소로 삼았다. 대구진출은 김보록 신부가 1886년 초 신나무골에 부임한지 5년 만에 실현된 것이었다.
1892~1893년 신도 수 96명이고 소수는 열심이고 다수는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한다. 예비자 10명, 냉담자 16명, 1893~1894년 신도 수는 88명이고 신앙생활에 태만하다. 예비자 2명, 냉담자 15명.
뮈텔주교는 1893년 11월 16~18일 3일 동안 새방골에 사옥방문을 왔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는 11월 16일 11명에게 견진성사를 주고 15명의 교우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다. 이날 준비된 성체가 다 소모되었다. 부산에서 사목하는 우도(Oudot) 신부의 짐을 꾸려 새방골로 보내기 위해 7마리의 작은 짐승들을 이용했다. 뮈텔주교는 이 짐승을 타고 10리쯤 오니 와룡산 기슭의 대밭골, 즉 죽전마을(새방골의 일부)에 도착했다. 가뭄 때 대구감사가 와룡산에서 기우제를 지내곤 했다. 새방골 주민인 이장언 방지거는 조조(Jozeau) 신부의 복사로 일한 사람으로서 조조 신부를 부산까지 배웅한 신도이다. 이장언은 8살의 한 아들과 네 딸을 두고 있었는데, 이 딸들 중에서 직물을 짜는 데 능숙한 13살의 딸이 수녀원에 들어가기를 원했다. 부모가 기꺼이 그녀를 경성(서울)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경성의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가 되었다. 또한 양잠업을 하는 서(徐)씨가 공소의 일부를 차지하고, 붓 장수 유(兪)씨가 공소집을 관리하고 있었다(뮈텔주교 일기, 181쪽).
뮈텔주교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뮈텔주교 일기, 181쪽).
“11월 17일 나는 견진성사를 주었다. 40명가량의 신도들이 고해성사를 보았다. 냉담자 이 분도는 고해성사를 보았지만 15명의 냉담자는 아직 성당에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양잠업을 하는 서 요한은 경성의 성영회(聖嬰會) 아이들에게 돗자리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위해 경성까지 온 일이 있다. 또한 청년 요셉이 비단 짜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서 요한(서상돈 아우구스티노의 조카)의 집에 머물렀다. 서 요한은 자진해서 음력 2월의 장날 이후 경성에 가서 한 달 동안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수녀원의 고아들에게 직물을 짜는 방법을 책임지고 가르치겠다고 말했다. 직물업은 수입이 좋은 업종이란다.”
11월 18일 뮈텔주교는 “아침에 6명에게 견진성사를 주고 새방골에서 40리 떨어진 신나무골로 향했다. 나는 10리쯤 가서 나룻배로 금호강을 건너고 지천면의 어느 신도 주막에 들러 요기를 하고 신나무골에 도착했다. 지천면 부근의 논과 밭은 대구교우들의 소유이다(뮈텔주교 일기, 181쪽)”
뮈텔주교가 1893년 새방골의 사목방문에 대한 기록에서 이곳의 공소집 관리인을 명시하고 공소회장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 아직 공소회장이 임명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김보록 신부는 1895~1911년까지 새방골의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895~1896년 신도 수는 64명, 예비자 5명, 전교회원 2명, 열심 하지만 무식하다.
1896~1897년 신도 수는 65명, 예비자 4명, 전교회원 1명, 학교1, 학생 3명, 열심 하다.
1897~1898년 새방골 신도 수는 91명, 예비자 수는 7명이고 열심이다. 전교회원이 1명, 학교 1, 학생 2명이 있다.
1898~1899년 신도 수는 112명, 아주 열심 한 편은 아니다. 예비자 3명, 전교회원이 1명, 학교 1, 학생 5명이 있다. 김보록 신부는 1899년부터 새방골을 공소로 기록했다.
1900~1901년 신도 수는 103명이고 신심도는 보통이다. 예비자 11명, 전교회원 2명, 학교 1, 학생 7명이 있다.
1901~1902년 신도 수는 117명, 예비자 수는 9명으로서 좋은 공소이다. 전교회원 1명, 학교 1, 학생 6명이 있다.
1903~1904년 신도 수는 134명이고 꽤 열심이다. 예비자 수는 10명이고 학교 1, 학생 6명이 있다.
1909~1910년 신도 수는 170명이고 열심이다. 예비자 수는 3명이고 전교회원은 없다. 학교 1, 학생 7명이 있다.
1910~1911년 신도 수는 134명이고 열심이다. 예비자 수는 3명이고 전교회원은 없다. 학교 1, 학생 8명이 있다.
1910년 새방골의 공소건물이 현 상리본당 대지 안에 세워지기까지 여러 집에서 공소예절이 거행되었다. 신도들은 장기간 이규성(1858 戊午年生~1920년 12월 4일 사망) 다미아노 공소회장의 집(현 새방골성당 앞집, 555번지)에서 공소예절을 올렸다.
계산본당의 공소시대
1910년 이규성과 김남석(본명미상의 신도)과 그의 형제(본명미상의 신도)의 재정적 도움으로 이규성의 뒷집(현 새방골성당 부지, 상리동 559번지)에 190평의 땅을 매입하여 초가집 공소를 짓고 원죄 없으신 성모님(12월 8일)을 주보로 모셨다(이규성의 손자인 이일우 히뽈리도, 1924년 3월 21일 생, 의 증언).
1911년 계산동 성당의 준공으로 새방골 공소는 계산본당에 소속 되었다.
1915년 초, 초대 대구 대목구장 드망즈(Demange, 안세화, 安世華)주교는 교구 별장을 마련하려고 2월 18일 부지를 물색하기 위해 신학교의 학생들과 함께 교우촌인 새방골을 둘러보았으나 부적합한 곳으로 여기고 계획을 취소했다(드망즈 주교 일기 1911~1937, 가톨릭 신문사 131~132).
1915년 12월 4일 아침에 드망즈 주교는 소세 신부와 함께 새방골로 갔다. 주교는 아무도 이 신부를 동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찰고 이외에 고해성사도 주어야했다(드망즈 주교 일기 160).
1916년 10월 19일 일요일부터 성사집행을 하고 있는 소세 신부가 아마 지쳐서 새방골에 있을 것이라고 드망즈 주교는 일기장에 기록했다(드망즈 주교 일기 173).
제2대 새방골 공소회장 이규성이 1920년 12월 4일(음력) 세상을 떠나고 박문규 베드로가 제3대 공소회장이 되었다(1920~1930).
1925년 집이 딸린 110평의 대지를 구입하고 초가집 공소를 함석집으로 개조했다.
새방골 공소는 1927년 11월 1일 설립된 비산동 본당에 속하게 되었다.
전봉립 발라바가 제4대 공소회장이 되었다(1930~1933). 그는 순교자 전 프란치스코와 인척관계인 것 같다.
박문규 베드로(1933~1938)가 제5대 공소회장으로 재임할 때 죽전공소가 설립되었다. 이 공소는 새방골 공소에 속했다.
1938년 이종화 바오로(1938~1963; 이규성의 아들)가 죽을 때까지 제6대 공소회장으로 일했다.
1955년 새방골 공소 앞(현 새방골성당 앞마당)에 목조종각을 세우고(1963년 성당신축 때 해체) 성모성심회를 발족했다. 이 회는 남자신도들(강임도 가브리엘, 이갑수 요셉, 이춘관 소시모, 이춘석 실바노, 유춘발 시메온, 유대로 요한, 이주식 레올지오, 서태용 노렌조, 구윤태 바오로, 김소세 마리노, 구상규 모이세, 이윤기 요셉, 김기종 가스발, 김동한 이시도로, 이영석 바오로, 이주식 레올지오, 강대성 계명, 윤태수 에드왈도, 이일우 히뽈리도, 이만우 플로리아노, 강무중 바오로, 이상식 사베리오, 박윤식 라우렌시오, 강달중 요한)로 구성되어 상리동에 새로운 본당건물이 건축될 때까지 존속하다가 현 ‘사도들의 모후(레지오 마리애)’로 발전됐다. 그들은 당시 10원씩 출자하여 약 300평의 논을 구입했고 훗날 교구에 헌납했다.
준 본당시기(1063년 ~ 1972년 12월 7일)
새방골 공소는 1963년 동촌본당 제5대 주임신부로 재직하다 건강상 이유로 1962년 7월 5일부터 휴양을 하고 있었던 권영조 마르코 신부(고 서정길 대주교의 동기동창)가 부임했다. 1963년 11월 20일 새방골 공소의 신도들은 비산본당의 강당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나온 벽돌을 가져와서 천신만고 끝에 함석집인 공소건물을 허물고 대지300평(991.73m²)에 50평(148.76m²)의 성당을 신축했다. 1963년 12월 14일 상리성당이 공사비 약100만원으로 준공되어 대구시내 14번 째 성당이 되고 서정길 대주교가 비산동성당 신도 500명과 새방골 공소신도 50여명의 참석 하에 낙성식을 거행하고 새방골 공소를 준 본당으로 승격시켰다(당시 가톨릭시보의 기록; 대구 교구청자료는 소실되었음). 성당의 이름을 당시 행정구역 명칭을 따라 상리성당으로 하였다. 비산본당의 죽전동 공소와 감삼동 공소, 그리고 세천 공소가 상리 준 본당에 속했다.
제6대 공소회장 이종화가 선종하고 그의 아들 이일우 히뽈리도가 제7대 공소와 상리 준 본당의 회장으로 일했다(1964~1997).
조상익 베드로 신부가 권영조 신부의 선종 후 상리성당에 상주하면서 사목했다(1964년 7월 17일~1966년 11월).
박창수 요한 신부가 조상익 베드로 신부를 이어 1969년 8월 15일 신암성당 주임으로 이동하기까지 임시로 상리성당을 돌보았다(1968년 11월~1969년 8월). 관할구역은 대구시 상리동, 중리동, 이현동, 죽전동, 감삼동, 이곡동, 장기동, 달성군 다사면 일부였다.
이종흥 신부가 1969년 8월 15일 새방골에 미사를 드리러 옴으로써 임시로 상리성당을 보살폈다.
곽길우 베드로 신부가 1970년 11월 25일부터 1971년까지 임시로 상리성당에서 성사를 집행했다.
1971년부터 1974년 1월 6일까지 김규태 신부가 교구 경리직을 맡으면서 임시로 상리성당을 돌보다가 사제거주 준 본당신부로 재직했다. 그의 재임 시(신도 수 446명). 그는 1971년 사제관(현 수녀원)과 식관(현 23평 기와집)과 성당건물의 현관을 신축했다(신도 수 560명).
1974년 정순재 신부는 새방골에 상주하는 신부로 재직하면서 제의실을 성당의 부속 건물로 신축했다(신도 수 616명).
김경식 보니파시오 신부가 1975년 1월 31~1976년 3월 9일까지 상리성당신부로 재직했다.
이대길 시메온 신부가 1976년 3월 9일~1977년 7월 5일까지 본당신부로 재직했다. 이대길 시메온 신부는 원래 안강성당에서 사목 중 와병으로 포항 갈평수녀원 등지에서 정양하다가 이곳으로 부임하였는데, 본당 처음으로 산간학교를 실시하려고 당시 대봉성당에 적을 두고 있던 음악교사 이혁우 시몬선생을 초청하여 산간학교계획을 수립하고 신옥균 안드레아, 구경옥 마르타(현재 샬트르 성 바오로회 수녀) 등을 주축으로 교사진을 구성하여 연수회를 실시하고 부서별로 준비하는 등 활발히 추진하였으나 도중에 복자성당으로 이동이 되어 후임으로 이관하였다.
임 청 베드로 신부(1977년 7월 5일~1979년 11월 6일)가 본당신부로 있으면서 1977년 12월 18일 현 성모상을 축성하고 성당보수공사도 대대적으로 실행했다(신도 수 718명).
본당승격(1978년 12월 8일)
임 청 신부 재임 시 지금껏 준 본당으로 유지되어 오던 본당이 자립본당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 2월 4일 죽전 공소와 감삼 공소가 분할되어 죽전본당으로 승격되자 본당 구역조정으로 감삼동, 이현동, 이곡동, 장기동과 다사면이 죽전본당에 편입되고(588명의 신도), 상리동1, 2구만이 상리본당에 속해(357명의 신도) 오늘에 이른다.
1986년 9월 30일 성당 옆의 부지 132평을 매입하여 이듬해 9월 20일 교구경리 김용길 바오로 신부의 지휘아래 현 사제관(2층 70평)신축공사를 시작해서 1988년 7월 7일 완공했다.
상리본당의 인근지역(성서)이 공단으로 번창하여 많은 아파트단지가 조성되자 교구에서는 상리성당의 발전을 내다보고서 1995년 4월 성당입구의 132평(557-1번지)과 1998년 11월 30일 상리동 546번지(대지32m²)를 이일우 히뽈리도 회장으로부터 기증을 받고 1995년 12월 12일 545번지(42m²)의 대지를 구입하여 훗날 성당신축을 위한 준비를 했다.
김봉진 안드레아 신부가 부임한 이 후 본당의 정체성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어 이곳에 첫 사목자로 오셨던 김보록 신부의 유업을 기리는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는데, 그 일환으로 김보록 신부의 이름을 딴 ‘보록정’을 성당 마당의 느티나무 뒤편에 세우고 축복식을 가졌다.
2007년 12월 7일~9일까지 3일간 김봉진 안드레아 본당 신부의 주도아래 본당공동체형성 120주년을 기념한 제1회 ‘보록제’를 성대히 열었다. 첫날에는 신자들과 마을주민들을 위한 ‘열린 음악회’를 유수의 성악가들을 초청해서 열었으며, 둘째 날에는 주일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성경암송대회’를,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한국교회사 전문가 두 분(김길수 교수, 마백락 회장)을 초청하여 ‘대구교회사’와 ‘새방골 본당사’에 대한 강의가 있었고 전 신자와 인근주민을 위한 잔치가 있었다.
2007년 봄부터 부분적으로 배워서 부르기 시작한 그레고리오성가를 주일교중미사 때마다 시행해 오다가 대림 제1주일부터 전 신자가 한목소리로 전통 그레고리오성가를 부르는 노래미사의 전통을 이어가게 되어 전통이 깊은 본당의 이미지 고양 및 전통전례에 대한 의식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대구평화방송에서 주일미사를 중계하기도 하였다.
공동체형성 120주년을 맞이하면서 본당의 노래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김봉진 안드레아 신부는 본당신자인 음악가 이혁우 시몬에게 본당가의 작곡을 의뢰하였고, 그는 시인인 권국명 알로이시오 교수에게 작사를 의뢰하여 동년 11월에 권국명작사 이혁우 작곡의 ‘본당의 노래’를 제정하였다.
<악보>
2008년 3월 9일 김보록 신부 흉상 제막식 및 견진성사 집전이 있었는데 이날 집전을 위해 본당을 방문하시는 조환길 타데오 보좌주교를 영접하기 위해 본당의 모든 신자들은 마당에서부터 성당입구까지 흰 천을 깔고 도열하여 주교님의 도착에 맞춰 종각의 종을 치며 열렬히 환영을 하였다.
한편 이날 제막 축복식을 가진 김보록 신부의 흉상은 역대공소회장을 역임한 이규성 다미아노의 후손인 전 총회장(이상권 베드로)과 현 총회장(이상배 안드레아) 형제가 조상들의 은덕을 기리는 마음으로 세운 것이라 그 의의가 더욱 컸다. 참고로 흉상에 새겨진 글귀는 다음과 같다.
<흉상좌대 측면에 쓰인 글>
김보록 로베르 아킬레오 바오로
(金保祿 Robert, Achille Paul, 1853~1922)
파리외방전교회소속 한국선교사. 세례명 : 바오로
대구본당(현, 계산동성당) 초대 본당신부
1853. 프랑스 오트손 지방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신부님은 소신학교를 거쳐 외방전교회 입회하시고
1876. 12. 23. 사제서품을 받으신 이듬 해 파리를 출발하여 베트남, 상해를 거쳐 만주에 도착. 차쿠에 머무시며 조선입국을 시도 하시다가
1877. 9. 23. 황해도 장연 앞바다배천 맞은편 한강입구로 입국하시어 배천 교우집에서 은거하시며 한국어와 한국관습을 익히시며 선교활동을 준비하시는 한편 신학생들에게 라틴어교육을 시키시던 중
1878. 리델주교님의 투옥과 추방소식을 듣고 신학생들을 해산시키고 황해도 산악지대로 피신, 함경도 안변의 교우 집에 은거하시다가
1879. 경기도 삭령, 강원도 원주 부흥골 등지에서 선교에 전력하셨다.
1883년에서 1885년까지는 점차 선교사 수가 증가하여 사목담당구역이 경상도로 한정되고
1886. 대구본당이 설정되면서 초대본당신부로 임명되어 신나무골(현, 칠곡군 연화리)에 임시로 거처를 정하고 한티와 거제도까지 관할하셨다.
1888. 거처를 이곳 새방골로 옮겨계시던 중
1891. 교안사건이 일어나 한때 추방되시기도 했으나 프랑스공사의 협력으로 경상감사를 경질시키며 지방박해를 안정시키는 계기가 되게 하고 대어벌 정 승지 댁에 머무시며 계산동으로 나오실 준비를 하셨다.
1897. 3. 계산동 성당을 짓기 시작하여
1898. 12. 25. 한식 목조십자성당을 완성하여 축성하였으나 화재로 소실되어
1903. 11. 고딕식 벽돌성당(지금의 계산동성당)을 다시 지으셨다.
1911. 4. 8. 대구대목구가 설정되자 초대교구장으로 오신 드망즈주교를 보좌하시며, 그간 성영회를 운영하시고, 해성재를 지어 뒤에 최초의 지방사학의 기초를 닦으셨고, 해성체육단, 명도회 등을 창설하게 하여 가톨릭청년운동의 효시가 될 기반을 든든히 굳히셨다.
1919. 그간의 노고로 발병하여 치료받으셨지만 병이 재발하여
1920. 은퇴하시어 주교관에 머무시며 회고록을 집필하시던 중
1922. 1. 2. 선종하시니 향년 69세셨다.
기록 김길수 사도요한
조각 최홍록 스테파노
<흉상좌대 후면하단에 쓰인 글>
김보록 신부님께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신 이곳 신앙의 텃밭에서 먼저 신앙을 받아들이시고 신앙생활을 영위해 오신 선조들의 삶을 기리며, 특히 역대회장을 역임하신 이규성 다미아노 증조부님과 이종화 바오로 조부님, 그리고 저희 부친이신 이일우 히뽈리도님을 기억하며 공동체형성120주년을 맞아 전 총회장 이상권 베드로 및 현 총회장 이상배 안드레아 형제의 이름으로 이 흉상을 세웁니다.
2008. 2. 주님봉헌축일에
본당명칭 변경
2008년 6월 13일자 교구공문(2008-105호)에 의거 지금껏 행정구역에 따라 사용돼온 본당의 명칭(상리성당)을 원래의 이름인 ‘새방골성당’으로 변경하였다.
1968~2008년의 교세 현황
1968년 446명
1974년 616명
1979년 803명
1980년 870명
1982년 945명
1983년 357명(죽전본당의 분할)
1985년 377명
1988년 416명
1993년 437명
1995년 480명
1997년 410명
현 상황
새방골에 복음이 선포된 역사는 대구대교구에서 신나무골 다음으로 오래되었지만 새방골성당에 속한 신자들은 주로 구 교우들로 구성된 신앙촌이다. 약 30년 전에 이현공단이 조성되어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사람들 중에서 많은 수가 상리동에 세를 들어 살면서 세례를 받고는 떠나가곤 했다. 최근 이현공단이 성서공단으로 점차적으로 이전됨에 따라서 행방불명자들이 속출하고 인구감소가 현격히 드러났다. 현재 약 2백여 명이 새방골성당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1994년 2월부터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수녀회의 분원이 성당 안에 설립되어 3명의 수녀들 중 하나가 공부를 하면서 본당사목을 돕고 있다가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철수하였다. 이곳의 긴 교회사에도 불구하고 큰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상리동 자체가 마을을 가로막고 달리는 구마고속도로 때문에 대구시내와의 교통이 불편하여 폐쇄된 마을이 되고 공단지역의 일반적 현상대로 토박이 이외의 공단근로자들의 이동이 잦으며 행방불명자의 수가 많은데 있다. 또 본당신부들이 너무 자주교체된 것도 그 이유들 중의 하나로 여길 수 있다. 새방골성당은 대구교구의 특수본당으로 휴양을 필요로 하거나 다른 직무를 겸해야 하는 신부들이 짧은 기간 동안 지내다 가곤 했던 곳이었다. 지역의 구조적 한계 때문에 지역사목 만으로는 본당의 운영이 어려운 실정이다. 따라서 전통교회의 역사성을 제고한 특수사목의 병행이 요구된다.
참고도서
병인박해 치명자 명부
김구정(金九鼎) 영남 순교사(嶺南殉敎史)
최정복(崔正福) 대구천주교회사
마백락 경상도 교회와 순교자들
대구의 사도 김보록(로베르) 신부 서한집1, 2
뮈텔 주교 일기1, 1890~1895
드망즈 주교 일기 1911~1937
대구대교구 주소록
한국가톨릭대사전
대구본당 백년사(大邱本堂百年史, 1886~1986)
비산성당 60년사
죽전성당 25년사
김길수 하늘가는 나그네
김보록 신부의 복사였던 이장언의 손자 이화우(李花雨, 안토니오, 1911년 9월 30일생), 제2대 상리공소회장 이규성 다미아노(1920년까지)의 손자이고 6대 공소회장 이종화(李圭成) 바오로(1938~1963)의 아들인 이일우 히뽈리도(1924년 3월 21일생; 1964년 공소시대부터 1997년 10월까지 본당사목회장)와 동년배 신도들의 증언을 참조한 박영식 야고보 신부의 1998년 8월 6일자 작성을 기초로 하여 김봉진 안드레아 신부가 2008년 5월 10일자로 추가 기록하고 2013년 본당125년사를 준비하면서 김종률 스테파노 신부가 종합정리하다.
위 글은 고인이신 이 혁우 시몬님의 컴퓨터 자료실에서 발췌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