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사는 1670년 현종 11년에 사액(賜額)된 것으로 김제갑 원주목사를 비롯해 원충갑, 원호 등 3위(位)의 호국정신이 깃들어 있는 사당이다.
1.文肅公 金悌甲 (1525 ~ 1592) 목사
김제갑 원주목사의 충렬비에는 '신하는 충성으로 죽고, 부인은 죽어 정절을 지켰으며, 아들은 죽어 효도를 다하였으니 여기 만고에 삼강과 오륜을 남겼도다'라는 기록이 있다
김제갑 목사는 조선 중기 문신으로,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원주목사로 있다가 왜군이 원주를 침공하자 가족과 백성을 이끌고 치악산 영원산성에 들어가 방어했다. 하지만 전투중 성이 함락됐고, 부인 이 씨, 아들 김시백과 함께 순절했다.
문숙공은 새로 모집한 의병들과 함께 치악산 영원산성에서 적병을 맞아 많은 적을 무찔렀으나 물밀듯하는 적의 대군에 밀려 고전하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산성의 한 모퉁이가 무너지고 함락의 위기에 처하자
‘내 어찌 국난을 당하여 구차하게 살기를 도모하겠는가. ’
그리고 조복(朝服)을 내어 갑옷위에 입고 서북쪽 임금계신곳을 향해 재배하고 통곡하여 말하기를 “신이 살아서 국은에 보답치 못하였으나, 죽어 귀신이 되어서라도 결단코 왜족을 소탕하오리다” 한 후 일어나서 큰 활에 살을 먹이고 잡아당길 때, 적의 조총 두 방이 문숙공을 꿰뚫어 그 자리에서 숨졌다.
성중(城中)에 있던 공의 부인 이씨는 “영감 마님께서 이미 돌아가신 이 마당에 내가 죽지 않고 살아 무엇하랴”하고 벼랑에서 떨어져 자결했다 하는데 혹설에는 칼을 안고 엎어져 자결했다는 말이있다.
이 때 둘째 아들 시백이 있다가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으니 시신을 두고 어찌 가겠는가”하고 시신을 거두려다가 그 또한 왜장의 칼에 맞아 쓰러졌다.
그 후 원주 사람들이 공을 추모하여 제사를 지낼 때, 그 제문에 이르기를 “공과 그 부인, 그리고 아들이 충성과 정열과 효도로 같은 한날에 죽었으니 한 모퉁이 외로운 성중에서 만고에 드문 삼강을 세우심이여!”하였고 원주 역전의 충렬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을 새겼다.
'오오 당신은 원주의 빛이며,
강원도의 의기요,
겨레의 스승이요.
아들과 아내의 별이오이다.
임진왜란 가등청정의
불의의 군사를 무찔러
최후의 일각까지 이 땅을 지켰고
마침내 시체를 말가죽에 싼
그 높고 씩씩한 정신 갸륵하다.
아들과 아내마저
효와 정을 지켰네.
왜란이 지내간 지 삼백칠십사 년
자주 자립의 얼에 불타는
강원도민은 이 탑을 세워
천만대 후손에 빛을 전한다.'
김 목사를 추모하는 충렬탑에는 '1592년 7월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장 모리 요시나리가 원주 영원 산성으로 쳐들어오자 관군과 의병을 이끌고 끝까지 싸웠다'고 기록돼 있다.
1966년 강원도 애국유족부활위원회는 원주역 앞에 그를 추모하는 충렬탑(忠烈塔)을 세웠다.
'死非難處死則難 (죽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죽음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나니)
惟君子捨生取義 (오직 군자만이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할 수 있으리라.)
當危急是如平素 (위험을 당해도 평소와 같이 태연자약하고)
勵忠憤不移終始 (충성스러운 분노에 힘써 처음과 끝이 같으니)
臣死忠婦貞子孝 (신하로서 충을 위해 죽고 부인은 정절로 아들은 효도로 목숨을 바치니)
扶植萬古之綱常 (만고에 빛나는 사람의 바른 도리를 심었도다.)
雉岳東峙兮鳳川西流 (치악이 동쪽에 우뚝 솟아 있고 봉천이 서쪽으로 맑게 흐르나니)
先生之名與之俱長 (선생의 높은 이름은 이 산천과 더불어 길이 남으리라.)'
2. 忠肅公 원충갑(元冲甲)은 원주 사람으로 체구가 작고 왜소하였으나 정력이 넘쳐 날래었으며 눈동자가 번개처럼 빛났다. 위험한 지경에 있으면서도 자기 일신을 돌보지 않았다. 원충갑은 향공진사(鄕貢進士;지방의 추천에 의하여 시험에 합격한 진사)로서 본주(원주)의 별초(別抄)에 소속되어 있었다. 충렬왕 때 합단의 침략군이 철령을 넘어 함부로 침입하게 되었는데 여러 고을에서는 그들이 온다는 소문만 듣고 모두 무너져 달아나 아무도 항쟁하는 자가 없었다. 적들은 원주에 와서 주둔하였는데 적들 가운데 50여 명의 기병이 치악성 아래에 와서 노략질을 하였다. 원충갑이 보병 6명을 인솔하고 가서 그들을 구축하고 적의 말 여덟 필을 빼앗아서 돌아 왔다.
적들은 군사 400명으로 다시 성 밑에 와서 녹전미를 가져가려고 하였다. 원충갑이 결사대 7명과 함께 적의 행동을 엿보고 있었는데, 먼저 적들 속으로 뛰어 들어가 한 놈을 베고 형문(荊門) 밖까지 추격해 가니 적들이 안장 얹은 말들을 버리고 달아났다.. 적이 다시 와서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면서 진공해 와서 모든 술책을 다하여 성을 공격하니 화살이 빗발치듯 하였고 성이 거의 함락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때에 흥원창 판관 조신(曹愼)이 성 밖에 나가서 적들과 싸웠으며, 원충갑은 급히 동쪽 봉우리에 달려 올라가 한 놈의 목을 베었다. 그리하여 적들이 약간 문란해지자 별장 강백송(康伯松) 등 30여 명이 그를 협조하여 나섰으며 원주 아전(州吏) 원현(元玄), 부행란(傅行蘭), 원종수(元鍾秀) 및 국학생(國學生) 안수정(安守貞) 등 100여 명이 서쪽 봉우리로 내려가서 협공하게 되었다.
적군의 선봉이 약간 뒤로 물러서자 뒤에 선 자들은 저희끼리 짓밟으면서 퇴각하게 되었다. 주병(州兵)이 힘을 합쳐 공격하니 그 소리는 산을 울리었으며 전후 10회의 전투에서 적들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로부터 적들은 예봉을 꺾이우고 감히 공격도 노략질도 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여러 고을들에서도 굳게 방어하게 되어 비로소 적들을 경시하는 마음이 생겼으니, 이것은 모두 원충갑에게서 얻은 힘인 것이었다. 원충갑은 공로로 인하여 여섯 번 전임하여 삼사우윤으로 되었다.
1. 성장 과정
고려의 무신으로 본관은 원주 원씨(原州元氏)이다. 향공진사(鄕貢進士)로 원주의 별초(別抄)에 있으면서 충렬왕 17년(1291)에 합단적(哈丹賊)이 치악성(雉岳城)을 포위하자 전후 10차례에 걸쳐 적을 크게 무찔렀다. 후에 충선왕때엔 응양군의 상호군을 받았으며, 충숙왕 6년(1319)에 식목도감이 청해 표창을 더하여 추성분용정란광국공신(推誠奮勇定亂匡國功臣)의 호를 하사 받았다. 충숙왕 8년(1321)에 향년 72세로 돌아가셨다.
2. 업적
1290년 합단의 고려 침입이 있었다. 몽고가 서서히 세력을 확장할 무렵, 칭기스칸의 막내 동생 테무케 오치킨의 5세 손인 나이얀은 흥안령의 동서쪽과 요동 지역을 봉지(封地)로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원 세조가 남송을 통일하여 한지파(漢地派)를 중심으로 몽골세계제국을 갖추는 과정에서 고비 이북의 몽골 본지파(本地派)를 위주로 하는 비한지파 분봉왕(分封王)들과 충돌이 생겼다. 1287년 나이얀 군의 반란도 이런 과정에서 발생 하였다. 1290년에 고려에 쳐들어온 합단은 나이얀 군의 한 부장인데, 역시 칭기스칸의 동생 카치군의 손자이다. 1287년에 나이얀과 더불어 반기를 들었으나 원 세조의 군대에 쫓기다가 고려로 들어오게 된다. 1301년 합단의 손자인 토곤이 원나라에 투항함으로써 난을 끝맺게 된다.
3. 본받을 교육적인 내용
고려왕조의 혼란과 민생이 도탄에 빠져있을 시기에 정부군도 아닌 지방군으로 수만의 적의 예봉을 꺾었다는 것은 원주전사(原州戰史)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사에 길이 빛날 일이다. 원주의 치악성이 고대로부터 중요한 전쟁터였으나, 원충갑 장군의 결사적인 혈전에 의해서 더욱 그 중요성이 알려졌다.
임진왜란 때의 김제갑 목사의 활동이나 구한말의 의병활동도 이 지역에서 활발히 전개되었던 것은 비단 지세(地勢)의 유리한 점도 있겠지만, 전란(戰亂)에 임하는 주민들의 저항정신(抵抗精神)과 불굴의 투쟁 정신이 오랜 전통으로 가슴속에 간직되어 왔기 때문일 것이다.
3. 忠壯公 元豪 신도비문 요약 : 임진란에 임금을 태운 수레가 파천하고 온 나라가 붕괴되니 동토 수 천리에 서쪽으로 평양까지 북으로는 경성까지 왜구들에게 유린당하니 마치 무인지경을 치닫는 듯하였다. 오직 강원도 조방장(助防將) 원공(元公) 호(豪)만이 외롭게 군대를 거느리고 홀로 적진 속에서 지탱하였고 다시 큰 적을 섬멸하여 한 모퉁이나마 보전하였으며 고개를 넘어오는 적을 감히 서쪽으로 향하고 서울로 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백여 년이나 지났건만 전해오는 그의 일들은 어제일 같이 분명하다.
공은 원주인(原州人)이고 가정(嘉靖) 계사(癸巳)년에 태어나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스스로 학문에 힘썼다. 정묘(丁卯)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으로부터 육품에 오르고 내외 요직을 두루 거쳤는데, 지금 기록할만한 것만 보더라도 경주(慶州)에서 통판(通判)이 되었고 운산(雲山), 단천(端川)에서 군수를 지냈으며 경흥(慶興), 경원(慶源)에서 부사(府使)를 지냈다.
임신(壬辰)년에 이르러 공은 관직에서 해임되어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왜구가 침범했다는 말을 듣고 곧 성에 들어갔다. 마침내 공으로 강원도 조방장(助防將)이 되었다. 공은 명을 받고 원주와 여주에 돌아와, 고을의 군대 약간을 모아서 여주 신륵사에서 적을 공격하여 섬멸하였다.
이때에 임금은 서쪽으로 피난을 하였는데, 이 전공을 보고 받고 크게 기쁘게 여겨서 가선(嘉善)의 품계를 주고 여주목사 겸 경기, 강원의 양도 방어사로 삼았다. 적의 대군이 원주에 포진하여 있고 여주에 주둔한 군대들도 그 형세가 매우 강하고 거칠었다. 공이 밤에 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수백 명의 수급을 노획하고 살상시킨 것만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군대의 형세가 비록 크게 떨쳤고, 적의 왕래를 단절하여 이에 서쪽으로 이천, 광주와 북으로는 지제, 양주에 이르기까지 모두 편안하고 적의 칼을 보지 못하였으니 모두 공의 힘이다.
공이 군사를 거느리고 김화(金化)에 이르러 갑자기 큰 적과 더불어 싸우다가 형세가 불리하여 대적할 수 없음을 알고 급히 군대를 거두어 산상으로 올라가 적을 방어하고 종일토록 싸워서 적을 죽인 수효가 많았으나 공의 군사도 쇠진하였다. 얼마 후 다시 크게 쳐들어오니 공은 화살도 다 떨어지고 힘도 다하였다. 공이 이르기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나 혼자 죽겠다. 너희들은 꼭 나와 함께 죽을 필요가 없다.”라 하고 마침내 스스로 천 길 낭떠러지에 몸을 던지니 적은 공이 항거함에 분노하여 공의 머리를 베어 현문에 달아 놓았다. 현의 백성들은 슬퍼하여 공의 시체에 표를 하였다가 밤에 몰래 공의 시신을 거두어 원주 서쪽 두산(頭山) 선영 을좌(乙坐)언덕에 장례를 지내 주었다.
선조대왕께서는 특별히 공을 병판(兵判)으로 추증하시고, 공의 부인에게 녹봉을 주었다. 효종조에 와서는 충장금화유사(忠將金化儒士)라고 시호를 내리고,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원주에서도 충렬사에 제사를 지냈다.
공은 효도로써 어머니를 섬기고 형 수사공(水使公) 양(亮)을 정성으로 받들었으며, 그의 친구를 공손한 태도로 대하였다. 성품이 청백하여 단체에 있을 적에 사랑하는 첩이 은가락지를 산 것을 보고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여기는 은이 생산되는 땅인데 내가 여기에 군수가 되었으니 어찌 집사람으로 하여금 이런 물건을 소지해서 되겠는가. 빨리 버려라.” 라고 하였다.
호남의 궐문에서 돌아왔을 때에 그의 행장에는 다만 몇 권의 책만 있었을 뿐 다른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이와 같이 청백하였으므로 서울과 시골에 한 채의 집도 없었고 의식도 모두 수사(水使)에서 의존하였다.
공은 천성이 어질고 남을 관용하였으므로 그는 가끔 남에게 해를 입었지만 일에 임해서는 사람의 말을 무턱대고 따르지 아니하였고 남의 앞에서는 권세 있고 귀한 이라도 잘못되면 그대로 거절하여 비록 죄에 연루되는 한이 있어도 굽히지 아니하였다. 이 때문에 공을 아는 사람이 많았다.
공의 아들과 손자들은 모두 인각(麟閣)에 오르고 국가에 큰 공을 세웠다. 윤평공의 덕업은 크고 또 컸으며 당세의 명재상이었다 공의 형제의 행적을 살펴보면 모두 한결같이 조정에 현달하였고 이제 후생들도 모두 법도를 지켰다 아! 아! 공의 업적이 이처럼 멀리 내려온다. 몸을 죽여 인을 성취하니 반드시 근본이 있을 것이다.
비명에 이르기를 적을 막은 공로는 매우 높고 의리는 매우 깊도다. 임금을 위하여 순직하였다. 공을 이룩함이 저와 같으니 하필 문학만을 숭상하랴! 공의 일생을 살펴보면 후덕하기 그지없다. 이에 그 후손도 현달하여 경사 거듭하였다. 능을 골짜기에 옮기어 사람을 한결같이 칭송한다. 내 이 돌에 새기어 자손 대대로 추모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