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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막한 고전읽기@물푸레 4차 모임 <지하로부터의 수기>
20120627 WED
0. 생각들
- “어떤 말을 하기 전에 내 이야기,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 내가 어떤 입장과 처지에서 말하고 있는지를 먼저 명료히 하자.”
- ‘뒤끝 최강, 변죽 최강’인 인물. 그런데 바로 그 ‘뒤끝’과 ‘변죽’에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매력이 있다. 달리 말하자면 심도 있는 ‘논쟁’과 촌철살인의 ‘유머’로 점철된 대화에 매력이 있다.
- 뻬쩨르부르그 : ‘유럽으로 향한 창문’ 계획도시. 추상적 세계. 때문에 과도하게 발달한 자의식. ‘창문’으로서의 도시란 어떤 도시이며, 그 도시에서 사는 이들은 어떤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갖게 될까?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학생들에게 읽혀도 좋은 작품인가? 청소년 추천도서가 되어도 괜찮을까? 만약 읽힌다면 어떤 가이드라인에 따라 읽게 해야 할까? 학생 때 읽기에는 적당하지 않다는 판단이 든다면 적당한 때는 언제일까? 30세? 40세? 또 다른 질문. <죄와 벌> <백치> <미성년> <악령> <까라마조프의 형제들>과 같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대작들을 읽어도 좋은 때는 언제일까?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활동에서 전환점을 이루는 중요한 중편으로 평가받는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읽지 않고 곧바로 <죄와 벌> 등을 읽어도 괜찮을까? 말하자면,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읽지 않고 <죄와 벌>을,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었노라고 말할 수 있을까?
도스토예프스키는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1863년, 그의 나이 42세일 때 썼다. 당시 러시아는 니콜라이 1세(재위: 1825-1855)의 경찰 통치, 감시 통치가 끝나고 혁명의 기운이 감돌던 때였다. 한편 당시 러시아가 세계체제의 주변부였다는 점 역시 특기할 사항이다. 계몽주의, 공리주의, 합리주의, 혁명 사상은 모두 유럽으로부터 수입된 것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그리고 고골)의 도시인 ‘뻬쩨르부르그’는 공식적으로 ‘유럽으로 난 창문’으로 건설된 계획도시(신도시)였다. 뻬쩨르부르그는 말하자면, 추상의 도시이자 환영의 도시, 강제로 삶의 터전을 떠나온 뿌리 뽑힌 자들의 도시였다. 그곳은 원대한 이상에 의해 건설된 러시아의 신수도였지만 기본적으로 러시아에 없는 것, 러시아적이지 않은 것을 대놓고 모방하려하고 추구한 장소였다. 즉 러시아적인 것은 부정되어야 했다. 러시아인으로서 러시아적인 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듯, 그건 “그 무엇도 될 수 없음”을, “악한 자도, 선인도, 비열한 자도, 정직한 자도, 영웅도, 벌레도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도스토예프스키(그리고 고골)의 작품을 읽을 때는 이점을 고려해야 한다(한편 톨스토이의 작품을 읽을 때는 반대로 톨스토이와 러시아 농촌(농민)의 관계--즉 러시아적인 것에 대한 애정과 추구--를 고려하며 읽을 필요가 있다).
* 혹 뻬쩨르부르그라는 도시에 관심이 간다면 도스토예프스키의 단편 <뻬쩨르부르그 연대기>와 고골의 소설집 <뻬쩨르부르그 이야기>(민음사)를 읽어보길 권한다.
1. 고립과 고독
고독이 낭만적 개념이라면(파우스트), 고립(감)은 사회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물이 어디에 위치하느냐의 문제에 주의를 기울여 보자. 산 정상에서 만끽하는 고독감과 지하에서 절감하는 고립감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이는 세계 속에서(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나의 위치와 역할을 어떻게 규정하는가 하는 문제와 연관된다. 나는 (세계와 더불어)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세계와 동떨어진 채) 정체된, 마비된 존재인가? 나로 하여금 살게 하고 행동하게 하는 것, 즉 삶의 동력은 무엇인가? 일단 “내 존재 또는 내가 하는 일이 결국에는 이 사회에 어떻게든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그런데 이는 도스토예프스키가 비판하는 공리주의적 관점에 의한 규정이다. 그렇다면 “내가 어떤 일을 하든지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하는 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는 이 문제를 두고 고민한다. 그는 내가 세계의 변화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고 아무래도 이것을 떨칠 수가 없다. 그는 의학을 존경하는 만큼 미신을 믿는 사람이며, 의사를 증오하는데, 그런 증오심(복수심)으로 의사들에게 해를 입힐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해를 입는 건 오직 그 자신뿐이다. 그의 증오심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무익한 것’이다.
이에 대해 지하생활자는 ‘쾌감’을 내세운다.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뒤에 나오지만) 공리주의와 합리주의를, 이성적 사고방식을 증오하고 저주하는 데서 비롯되는 ‘쾌감’을 말이다. 동의할 수 있겠는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우리가 동의하건 말건 상관하지 않고 말을 계속하다. ‘쾌감’ 다음에 언급되는 단어는 ‘수치’다. 그는 자신의 (‘19세기의 영리한 인간들’에 대한) 증오가 비열한 것임을 알고 있고, 거기서 오는 수치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그 수치심을 내던지거나 극복하고 19세기의 영리한 인간들 중 하나가 되려고 하는 대신, 그 자신의 것으로서 고스란히 끌어안는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점을 시험해보려 한다.
적어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완전히 솔직해질 수 있을까? 그리고 모든 진실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2. 안티-멘토 선언
이익! 이익이라고 부르는 이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어쨌든 문명 때문에 인간이 피에 더 주리게 되지는 않았더라도, 전보다 더 나쁘고 혐오스러운 방법으로 피에 주리게 된 것은 확실하다.
오늘날 대다수가 도시생활자인, 말하자면 ‘뿌리 뽑힌 존재’인 우리로서는 뻬쩨르부르그의 한 지하생활자를 도스토예프스키 시대의 독자들보다는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어야 마땅한지도 모른다. 그가 말하는 위악적인 쾌락, ‘하찮은 방식으로 은밀히’ 이뤄지는 복수, 그 결과 시달리게 되는 치욕과 자기혐오에 대해 말이다. 우리는 지하생활자를 통해 “변화, 행동, 도전, 모험, 그리고 무한한 자기긍정이 바로 경쟁력이다!” “당신의 모든 것을 다해 세상과 당당히 맞서라”라는 자기계발서의 표어들, 멘토들의 친절한 조언들이 난무하는 세계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어떤 삶을 살기를 (폭력적으로) 요청받고 있는지를 돌아볼 수도 있다. 어쩌면 그러한 삶은 ‘피아노 건반 중의 하나 또는 오르간의 작은 나사못’과 같은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세계화의 시대에 우리들 각자는 ‘원자화된’(atomized) 개인으로서 그리고 ‘고립’된 단독자로서, 오로지 자기의 능력과 열정으로 세계와 맞서야 한다. 도움의 손길은 어디에도 없다. 파우스트처럼 영혼을 팔아 악마라는 든든한 조력자를 얻을 수도 없다. 악마는 이미 그 힘을 잃고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자연 역시 내 편이 아니다. 자연은 그것이 미지의 미신적 영역, 인식되지 않고 계산되지 않은 영역에 남아 있을 때 탐험 또는 개척(개발)이라고 부르는 인간 행동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한다. “… 모든 것들이 대단히 정확하게 계산되고 표시되어서 행동들도 모험들도 더 이상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2×2=4’라는 벽 앞에서 인간은 충심으로 굴복한다고. 언제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2×2=4’를 두려워해왔다고. 그러니까 우리는 ‘자연의 품에서 태어난 아이(child of nature)가 아닌 시험관에서 태어난 것(test-tube product)’이라고.
이익(이윤)의 논리, 간단한 수학 공식의 논리--숫자로(‘일개 8등관’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지하생활자)--로 모든 것이 계산되고 평가되고 설명되는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건 어떤 삶일까? 그 세계와 맞서는 건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어떤 식으로? 시험관에서 태어난 인간이 시험관을 벗어나는 건 가능할까? 지하생활자가 자신의 거주지인 지하로부터 벗어나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건 가능할까?
여기서 지하생활자가 ‘날카로운/과도한 의식(heightened consciousness)을 가진 인간’, ‘대단히 자존심이 강한/예민한(horribly sensitive) 사람’임을 떠올릴 필요가 있겠다. 그렇다. 지하생활자는 ‘과도한 자의식’과 ‘끔찍하게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이다. 그는 사회에서 정해준 정체성과는 별개로 자신이 누구인지, 세계와 자기 자신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자신이 느끼는 비열한 쾌락과 치욕스러움에 대해 생각한다. 이것이 그를 다른 사람들, 19세기의 영리한 인간들, 2×2=4라는 사실 앞에 충심으로 굴복하는 인간들, “쾌락의 섬세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강한 신경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려 살지 못하게 만든다.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못됨과 못남은 되도록 숨겨야 한다는 건 당연하지만, 지하생활자는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자신의 못됨과 못남을 끝까지 파헤쳐 묘사하려 한다(그는 반문한다. “그렇다면 정말 의식 있는 인간은 얼마만큼이나 자신을 존경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거기에 그가 느끼는 쾌락의 섬세함이, 쾌락의 역설이 있다(그는 “자신을 비하시키는 감정 그 자체에서 쾌락을 찾는 사람”이다). 또한 문명이라는 가면을 쓴 이 세계의 혐오스러움이 있다.
지하생활자는 남(심지어 참새)을 괴롭힘으로써 자신의 영혼에 위안을 얻는 인간이다. 그는 스스로의 비열함을 인정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이 세계의 혐오스러움도 동시에 드러낸다. 이 세계에서 인간관계는 사랑과 애정과 같은 미덕의 교환이 아닌 상처와 증오심의 교환, 복수의 연쇄로서 맺어질 뿐이라는, 인정하기 싫은 사실을 드러낸다. 물론 지하생활자가 말하는 것들 중 인정하기 싫은 건 이것 말고도 아주 많다. ‘인정하기 싫지만 내 것이 분명한’ 어떤 혐오스러운 것들 앞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바로 이것이 심술궂고 변덕스러운 지하생활자가 우리에게 던져둔 문제다.
그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들'을 들춰내고 또 파헤쳐서 말하고 쓰고 기록한다(덕분에 150년 후의 우리도 읽고 있다). 정말이지 심술궂은 녀석, 상종하기 싫은 녀석, 꿈에 나타날까 두려운 녀석이다. 그런데 바로 이 심술궂은 들춰냄과 파헤침이 소설에 긴장감을 부여하고 매력을 넘어서는 마력을 부여한다. 독자는 처음에는 ‘설마 이런 것까지 말할라고…’하는 의구심을 품게 되고, 책장을 몇 장 넘기고 난 후엔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속담을 떠올리며 두려움을 품지만, 지하생활자는 거침이 없다. 그에게는 인간 존재에 대한 존경심과 존중심이 전혀 없다. 그는 명백히 자기존중감이 결여된 인물이며, 보기에 따라서는 볼품없는 사회부적응자, 하찮은 복수심을 가졌을 뿐인 불평분자, 비열한 사기꾼에 불과한 존재다. 그의 말들을 깡그리 무시해버려도 무방한 것이다. 그런데, 왠지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왜 나는 지하생활자의 말을 무시할 수 없는가?”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볼 일이다. 오늘날 모두가 인정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드높은 명성 때문일까? 막고 리딩리스트에 포함되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나 자신의 ‘심술궂음’과 ‘변덕’--말하자면 (지하생활자가 대는 이유는 ‘진눈깨비 때문’에 상응하는) ‘6월말의 미친 더위 때문’일까?
3. 나 자신에 관해 이야기할 것
도스토예프스키가 산 시대는 확고한 신념의 대상, 의지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였다. 때문에 “나는 무엇을 위해 행동하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가?”와 같은 물음이 생겨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프랑스에서는 ‘신의 대리인’인 왕을 죽이는 사건이 벌어졌고, 신이 아닌 인간의 손에 의해 하나의 세계, 즉 도시가 건설되기도 했다. 19세기는 번영의 시대인 동시에 회의주의의 시대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믿을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반복해서 ‘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강조하는 까닭이다. 믿을 수 있는 건 나 자신의 의식과 감정(감수성)이다. 과도한 의식, 예민한 감수성으로 무장한 도스토예프스키는 아주 사소한 것도 놓치려 하지 않는다. 아니 그는 과도한 의식과 예민한 감수성에 수반되는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카프카에 앞서 그는 스스로를 벌레로까지 격하시킨다. 아니 그는 심지어 벌레조차 될 수 없는 존재, 그 무엇도 될 수 없는 존재라고 스스로에 대해 말한다.
물론 도스토예프스키의 정신적 탐색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여기가 출발점이다. 그는 스스로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규정했고, 그럼으로써 그가 존재하는 세계 역시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 있음을 드러냈다. 그럼으로써 역설적으로 앞으로의 여정을 시작할 단단한 기반--믿음직한 베이스캠프--을 구축해 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될 수 없다”라는 정체성 선언(그러므로 “이 세계 모두 역시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세계관)은 누구나 무엇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만 한다는 말들이 난무하는 오늘날 무척 기이하게 들린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묘한 위안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그런 위안을 그저 가볍게 받아들이고 나면 곧 견디기 힘든 ‘수치심’이 뒤따라오기 마련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어쨌거나 존재의 의미를 알지 못해 항상 불안에 시달리는, 행동하지 못하고 끝없이 망설이기만 하는 우리에게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는 그게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준다는 점에서 위안을 준다. 중요한 건 이것이다. 나 자신에 관해 이야기할 것. 그러나 어떠한 과장도 위선도 꾸밈도 없이 이야기하도록 할 것. ‘짜증나는 음조’처럼 나에게 달라붙어 있는 어떤 먼 과거에 대한 회상에 대해 쓰도록 시도할 것. “어떤 체계도 질서도 도입하지 않고”, “회상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적은”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독자인 우리도 지하생활자처럼 무엇이든 한번 적어볼 생각을 품게 만든다. 물론,
마침내 나는 싫증이 났다.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 쓴다는 행위는 실제로 어딘지 일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일이 인간을 착하고 정직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그러니, 기회가 있는 것이다. 적어도.
써볼 생각을 품은 바로 다음 순간 싫증을 낼 수도 있다. 인간은 심술궂고 변덕스러운 존재다. 그러니 계기 역시 변덕스럽게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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