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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6월 4일 광주시 31사단
초소에서 근무를 서던 경비병은 아침을 먹다 말고 백기가 걸린 지프가 달려오자 반합을 내던졌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지만 지프는 31사단 정문에 이르자 속도를 줄이기 시작하였다. 경비병은 무전기를 돌려 사단본부를 연결하였다.
“비상이다 비상!”
경비병은 탁자에 놓인 M16 소총과 탄창을 집어 들고는 어깨에 메고서 초소 밖으로 나갔다. 지프는 점점 가까이 왔다. M16 소총에 탄창을 집어넣고는 사격 준비 자세를 취하였다. 지프 쪽에서 누군가가 일어선 채 백기를 흔들었다. 경비병이 사격 준비 자세를 취한걸 눈치 챈 것 같았다. 경비병은 M16 소총을 든 채 지프가 오는걸 바라보았다.
“말년에 뭔 일이람... 내일 모레 제댄데... 젠장.”
지프가 정문 앞에 멈추는 동시에 국방색들이 정문 밖으로 몰려나왔다. 백기를 흔들었던 사내는 국방색들을 보자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뭐야? 향토사단이라매!”
“...”
사내는 31사단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국방색들 중 중령 계급장을 단 장교가 앞으로 걸어나왔다.
“향토사단 맞소. 사태가 심각해서 사단 전 병력이 완전 무장을 했을 뿐이오. 그런데 이곳에는 무슨 일이오? 시위대 같은데... 아, 나는 31사단 1대대 대대장 중령 정병우요.”
“...”
누군가가 능숙하게 지프 뒷좌석에서 내려서는 정병우 중령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정병우 중령에게 열차포의 화염을 토해내듯 소리쳤다.
“야이 개새꺄! 사태? 니가 뭔데 사태라고 지랄 하는거얏! 시민들이 대갈이 씹새끼 졸개들에게 뒈지고 있는 판인데 사태라니! 이 개새꺄, 니 전대병원이나 기독병원에 가보기나 했냐? 사방이 송장으로 뒤덮여 있단말야! 그리고 시위대 같다고? 총들고 있음 빨갱이들 사주 받은 폭도겠다 이 개새꺄!”
50대 초반은 되어 보이는 사내의 고함에 정병우 중령은 순간 움츠러들었다. 아저씨뻘 되는 사내는 군인들을 보고도 기죽기는커녕 오히려 잘 만났다는 듯이 기고만장 하였다. 해병대나 특전사에서 군복무하고 왔는지 사내는 다른 50대들과 확연히 달라보였다. 당장 멱살을 잡고 패버릴 기세였다.
“니, 어디 출신이냐?”
“네...?”
“당장 대답 햇!”
사내의 고함이 다시 작렬하였다. 사내의 질문을 회피하려던 정병우 중령은 다시 움츠러들고는 부동자세를 취하였다.
“저... 전라도... 해남... 출신입니다... 근데... 왜...”
“그래? 해남출신? 근데 왜 사태라고 지랄하냐? 니하고 같은 전라도 사람들이 떼로 뒈지고 있는데 왜 사태라고 지랄하냔 말이야! 뭐, 사태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광주 사람들이 공산당의 사주를 받고 폭동을 일으켰다는 대갈이의 발표를 믿고 있는거냐?”
“...”
정병우 중령은 할 말을 잃었다. 경직된 표정의 사내는 이내 얼굴을 풀고는 정병우 중령의 손을 잡았다.
“미안하외다. 순간 흥분했소. 아, 나는 광주시민군 채경식이라고 하오. 이쪽은 차솔찬이고.”
사내들은 정병우 중령에게 간단한 목례를 하였다. 정병우 중령은 땀을 흘리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겨우 안정을 되찾고는 채경식이라는 이름의 나이 많은 사내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백기를 흔들면서 오는걸 보면 상당히 중요한 일인 듯 싶은데...”
“이 사단의 사단장을 만나고 싶어서 왔소. 사단장과 단독 면담을 해야겠소.”
“네?”
사단장과의 단독면담이라는 말에 정병우 중령은 당황하였다. 지금 같은 상황에 아무나 사단장과 만나게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사내들은 손에 카빈, M16 같은 화기들을 들고 있었다. 적의 같은 건 없어 보이지만 만약 사단장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면 큰일이었다.
“꼭 만나야 합니까?”
“그렇소. 아주 중요한 일이오.”
“...”
정병우 중령은 고민하였다.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는 몰라도 사단장이 시민군들의 요구를 쉽게 들어줄지 의문이었다. 그렇지만 사단장은 저번 달에 있었던 공수부대의 만행과 전투교육사령부의 행동에 분개했던 사람이었다.
“그럼 잠시 기다려 주십쇼.”
정병우 중령은 소령 계급의 장교와 몇 마디 나누고는 국방색들 사이로 사라졌다. 나이 많은 사내는 정병우 중령의 뒷모습을 보고는 젊은 사내에게 귓속말을 하였다.
“차하사. 긴장 해. 이제부터 진짜 중요한 일이야.”
“알겠습니다. 상사님.”
1980년 6월 4일 광주시 전남도청
김정수 중령은 도청 앞 광장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광주시민의 피가 스며든 그곳. 크리스마스 때 분수대에 설치된 대형 트리를 보며 좌절하고 괴로워했던 그곳. 방황을 했을 때가 생각났다. 치열하고 처참했던 고등학교 시절. 지금쯤 채경식 상사와 차솔찬 하사는 31사단에 도착해 정 웅 소장을 만나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광주시내가 계엄군에게 완전히 포위된 상황에서 김정수 중령은 31사단과의 접촉을 명령하였다. 그 이유는 광주시민들에게 그나마 나은 이미지를 가진 향토사단 31사단을 통해 부족해지는 식량과 생필품을 공급받고, 전투교육사령부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부산지역에서 시위가 있다고 하지만 시위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포위상황이 길어질수록 불리한 쪽은 광주시민군과 해병대였다.
“참 심심하군 박중사.”
김정수 중령은 뒤돌아 총기를 관리하는 박경아 중사를 바라보았다. 하얀 피부에 참해 보이는 몸매와 얼굴. 소대장 시절 해병대 하사였던 박경아 중사를 처음 봤을 때 그녀를 보고 연모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누님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박경아 중사를 연모한다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때 박경아 중사는 김정수 중령을 남자가 아닌 상관으로 생각 했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대대장님. 저는 지금 바쁩니다.”
“...”
“근데 김혜선이라는 여자와 만난다는거 사실입니까?”
“?”
박경아 중사의 질문에 김정수 중령은 당황하였다. 김혜선이라는 여자와 만난다니? 김혜선이라면 김정수 자신의 여자친구였다. 근데 김혜선을 박경아 중사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이수영 소위님께 다 들었습니다. 대대장님이 김혜선이라는 연상의 여자를 만나고 다닌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며칠 전에 광주천에서 대대장님이 그 여자분을 만난 걸 이수영 소위님이 보셨다고 합니다. 대대 내 장교 분들과 부사관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보급담당 이하나 대위님도 말입니다.”
“뭐...?”
(이하나 대위라고 해서) 이 사람 아니다(...)
김정수 중령은 헛기침을 하였다. 여군 장교들과 부사관들은 다 알고 있다니? 광주천에서 이수영 소위가 김혜선과 김정수 자신이 만난걸 봤었다고? 그리고 자신이 대한민국 해병대 최강미녀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이하나 대위까지 알고 있다니? 며칠 전 일이 떠올랐다. 광주천에서 김혜선과 데이트 할 때 강우혁 병장과 말싸움 하던 이수영 소위를 말렸던 일이.
“어떻게 알았나? 박중사.”
“이수영 소위님께 다 들었습니다.”
“...”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아무래도 단단히 말을 잘못 꺼낸 것 같았다. 김정수 중령은 헛기침을 하고는 창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김정수 빠가데쓰네... 씨발.”
1980년 6월 4일 광주시 31사단
문이 열리고, 자신들을 광주시민군이라고 밝힌 해병대 채경식 상사와 차솔찬 하사는 무장을 해제당한 채 정병우 중령의 안내를 받아 복도를 걸었다. 31사단 내로 들어가기 전. 정병우 중령은 사단장과의 면담이 성사되었다면서 사단장의 안전을 위해 무장해제를 명령하였다. 그 명령에 채경식 상사와 차솔찬 하사는 처음에 불쾌해 하였지만 일단 사단장을 만나는 게 중요한지라 무장해제 명령을 순순히 따랐다.
복도를 한동안 걷다가 문이 나타났다. 문 양 옆에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헌병들이 서 있고, 문에는 선명하게 [사단장실]이라는 글자가 씌어져 있었다. 헌병은 정병우 중령을 보자 거수경례를 하고는 문을 열었다. 채경식 상사와 차솔찬 하사, 정병우 중령은 숨을 죽인 채 사단장실로 발걸음을 움직였다.
“반갑소!”
책상에 앉아있던 국방색 군복 차림의 남자가 벌떡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시청 고위직 공무원 같은 인상을 풍기는 남자는 책상 밖으로 나와 오랜 친구를 만난 사람처럼 채경식 상사의 손을 붙잡았다. 채경식 상사는 남자가 입은 군복 명찰에 씌어진 이름 두 글자를 보고는 동공이 확대되었다.
“이야기 들었소. 광주 시민군이라고 했소? 하긴. 공수부대의 진압이 얼마나 악랄했으면... 공무원 시절에 이 고장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많이 유감이오. 아, 본관은 육군 제 31사단 사단장인 육군 소장 정 웅이오.”
“!”
채경식 상사는 31사단 사단장의 이름을 듣자 뭔가 강렬한 것을 느꼈다. 31사단 사단장 정 웅 소장. 채경식 상사가 알기로 그는 항쟁 당시 무혈진압을 통해 시민들에 대한 최소화 하고, 항쟁 후 신군부에 대한 소극적인 협조로 강제전역 당한 후에는 국회의원으로 활동해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리려 했던 자였다.
말년의 정 웅 소장
정 웅 소장은 채경식 상사를 보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정병우 중령에게 밖으로 나가라고 하고는 채경식 상사와 차솔찬 하사를 자리로 안내하였다.
“나를 만나 면담을 한다고 했는데, 정확히 무슨 일 때문이오?”
“광주시내에 대한 식량공급과 시민군에 대한 협조를 요구하기 위해 장군님을 뵈러 오게 되었습니다.”
“그렇소?”
채경식 상사가 초반부터 요구사항을 말하자 정 웅 소장은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식량공급과 시민군에 대한 협조.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정 웅 소장은 계속 말 하라고 손짓을 보냈다.
“장군님께서 대충 알고 계시겠지만, 지금 광주 시내의 식량상황은 악화 일로를 걷고 있습니다. 시장과 도지사가 식량문제를 해결한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지만 계엄군의 외곽봉쇄로 식량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고, 광주 시내로 들어와야 할 트럭들이 시내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장마다 채소 값이 폭발적으로 치솟아 원성이 큽니다.”
“계속 말 하시오.”
“이건 정치적인 이야기지만, 광주 시민군은 군사독재정권을 몰아내고 지난날 시위에서 보여준 공수부대의 만향에 대해 사과를 받기 위해 언제 죽을지 모름에도 불구하고 하루라도 긴장을 풀지 않고 시 외곽에서 공수부대와 총격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시민군이 계엄군의 공격에 맞서 총격전을 벌이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광주 시민군은 하루 빨리 포위가 풀리길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광주시민군의 힘만으론 포위를 풀기란 어렵습니다. 31사단 사단장이신 장군님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
말이 끝나자 정 웅 소장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라도 순천에서 태어나 순천에서 잠시 공무원 생활을 하고, 군인이 되어 현재 전라도 지역을 담당하는 육군 제 31보병사단 사단장이 된 전라도 출신으로서 현재 광주시민들이 겪는 어려움을 모르는건 아니었다. 하지만 계엄사령부에 유혈진압을 거부한다고 선언한 이후 정 웅 소장은 아무도 모르게 보안사령부의 감시를 받는 요주의 인물이 되어 있었다.
광주시민들이 고통 받는걸 생각하면 당장 계엄사령부에 맞서 광주시민들을 지켜주고 싶었다. 하지만 보안사의 감시를 받는 상황에서 병력을 멋대로 움직이는건 엄청난 도박이고, 지금 사단에 있는 실 병력은 겨우 한 개 대대 정도였다. 헬기와 소수의 장갑차가 있다고 하지만 병력과 장비가 작전에 나가기엔 무리한 전력이었다. 원래 31사단의 관할에 있었어야 할 3공수, 7공수, 11공수는 5월 18일 이후부터 쭉 31사단의 지휘를 받긴 커녕 소준열 중장의 전투교육사령부와 특전사령부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흐음... 이런 말을 하긴 곤란하지만, 우리 31사단은 시민군에 협조하기가 대단히 어렵소. 지금 있는 병력이 겨우 사단 내 병영을 경계하고 있는 판에 시민군을 돕는다는걸 그들이 알면 본관과 본관과 31사단은 모두 끝장이오.”
“...”
“전라도에서 태어난 사람으로서 광주시민들의 고통을 모르는 바는 아니오. 광주시민들의 고통을 감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소. 하지만 이 상황에서 시민군에게 협조할 수 없소.”
정 웅 소장은 말을 딱 잘라버리고는 입을 닫았다.
“장군님!”
“장군님!”
채경식 상사와 차솔찬 하사는 벌떡 일어났다. 힘들게 31사단에 왔는데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못한 채 도청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그럼 광주시민들은 다 뒈지라는 겁니까? 요구사항을 들어줄 수 없으니 뒈지라는 겁니까? 장군님! 광주시민들의 고통을 알고 계신다면서요! 근데 그걸 피해가겠다는 겁니까? 에라 씨발.”
문이 열리고 정병우 중령과 헌병들이 사단장실로 쳐들어왔다. 채경식 상사가 분노한 모습에 정병우 중령은 놀란 눈빛을 보였다.
“아무 일도 아니오. 앞에 사람들이 화가 났을 뿐이오. 헌병들과 두 분은 잠시 나가주시오. 그리고 정중령은 여기 앉으시오. 그 두 분!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
“...”
채경식 상사는 분노한 눈빛으로 고개를 떨군채 사단장실을 나섰다. 헌병들과 채경식 상사, 차솔찬 하사가 사라지자 정병우 중령은 자리에 앉았다.
“정중령. 잘 들으시오.”
“...”
“아까 시민군들이 우리에게 협조를 부탁하였소. 하나는 식량공급에 관한 것이고, 하나는 우리 사단의 협조를 요청한 것이오.”
“그렇습니까?”
정 웅 소장의 말에 정병우 중령은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일단 협조를 못한다고 했지만 한편으로는 많이 불편하오, 광주 시민들의 고통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소.”
“...”
“마음 같아선 협조를 하고 싶지만 서울의 군부세력이 문제오. 자기들이 일을 저질러 놓고는 본관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 하니... 쯧쯧...”
공수부대가 ‘광주시민을 닥치는 대로 패대는 사태’ 내내 정병우 중령은 정 웅 소장의 심리적인 고통을 곁에서 지켜봤었다. 사태와 관련해 사단장이 지휘관들을 모아 지휘관 회의를 열 때 지휘관들의 유혈진압을 조장하는 지휘행태를 질타했지만 질타 당하는 지휘관들은 반성을 하기는커녕 지휘관들을 질타하는 사단장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하였다.
그럴 만 했다. 제아무리 사단장이 지휘관들에게 유혈진압을 하지 말라고 명령해도 유혈진압을 하는 쪽은 31사단 각 연대장들, 대대장들이 아닌 세 개 공수여단 지휘관들이었다. 세 개 공수여단이 31사단의 지휘계통을 따르지 않는 상황이었다.
“정중령의 생각은 어떻소?”
“...”
정 웅 소장의 물음에 정병우 중령은 대답을 망설였다. 시민군에 협조하자고 하면 광주시민들을 구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서울의 신군부가 사단장을 가만 놔둘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민군의 협조요청을 거절하면 더 많은 시민들이 공수부대의 총칼에 죽을지 몰랐다. 어쩌면 광주 시내에 사는 가족들 중에 누군가가 공수부대에게...
“일단...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제한적으로 협조요청을 받아 놓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단장님을 감시하는 사단 내부의 첩자를 비밀리에 제거 하는게 좋겠습니다.”
“흐음... 제한적으로 요청을 받아 들인다라...”
정 웅 소장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중령. 그럼 나가보게. 그리고 그 시민군들 다시 들여보내고.”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정병우 중령은 절도 있게 거수경례를 하고는 사단장실을 나섰다. 이내 풀이 죽은 채경식 상사와 차솔찬 하사가 들어왔다. 정 웅 소장은 둘을 보자 환하게 웃으며 채경식 상사의 손을 잡았다.
“마음 고생이 참 심했을 것 같소. 하지만 걱정 마시오. 협조 요청을 받아들이겠소!”
“?”
아까 고함을 지르며 사단장실을 나섰던 채경식 상사와 차솔찬 하사는 정 웅 소장의 말에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 사실입니까?”
“그렇소! 하지만 본관이 지금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어 제한적으로나마 협조를 할까 하오.”
협조요청 허락! 제한적이라는 단서가 붙어있지만 둘은 협조요청을 받았다는 사실에 환호하였다. 채경식 상사와 차솔찬 하사는 부동자세로 정 웅 소장에게 거수경례를 하였다.
1980년 6월 4일 광주시 전남도청
31사단 사단장의 협조요청을 받았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해병대 지휘관들과 항쟁위원회 위원, 시민군 상황실장이 한 자리에 모였다. 김정수 중령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며칠은 걸릴 줄 알았던 협조요청이 겨우 몇 시간 만에 성사되었습니다. 제한적이라는 단서가 붙어있긴 하지만 광주시내의 부족한 식량상황이 해결될 것입니다.”
31사단과의 접촉. 처음에 대대 장교들이 회의를 할 때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채택되지 않았던 의견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쉽게 호천되지 않고, 시위가 빨리 확산되지 못한다는 비관적인 전망 때문에 어느 보병중대 중대장이 냈던 의견이 이 상황을 타개할 의견으로 채택되었다. 이 의견이 채택될 때 많은 비난에 부딪혔었다. 후방사단으로 공수부대에 맞서서 뭘 하겠느냐, 전두환을 자극할 일 있냐.
하지만 의견을 제시했던 보병중대장은 31사단과의 접촉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점들을 이유를 대며 설명하였다. 지휘계통에서 31사단이 빠져있고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극히 적어 신군부의 관심에서 그나마 떨어져 있을 것이고, 31사단이 병력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31사단을 이용해 계엄군에 대한 정보를 빼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의견에 김정수 중령은 중대장에게 공감을 표시하고, 31사단과의 접촉을 명령하였다. 이를 위해 채경식 상사와 차솔찬 하사가 31사단으로 가게 되었다.
“와따~ 그러믄 향토사단이 우리 편이 되는거요? 당장 시민들에게...”
“안됩니다!”
박남선은 들뜬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였다. 그러자 김정수 중령은 급히 박남선을 막았다.
“왜 안된다는거여? 시민들이 좋아할텐디...”
“시민들이 좋아하느냐 마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전두환 일당이 이 사실을 알아버리면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악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
김정수 중령은 몇 주 전에 벌어졌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가 아마 도청에서의 전투가 끝난 다음날인 것 같았다. 시민군과 계엄군과의 전투에서 계엄군을 무찔렀다는 기쁨에 박남선이 민주시민궐기대회에서 “해병대가 봉기했다!”고 발표한 것이었다. 그 이후 해병대는 자신들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전전긍긍 하였고, 해병대에 대한 정보를 캐내려 했던 보안사 요원을 생포하기도 하였다.
“상황실장님. 이 사실은 절대 밖으로 새나가선 안됩니다. 새나가기라도 하면 우리는 큰일입니다.”
“...”
박남선은 김정수 중령의 말에 “알겄소.”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기느냐 전두환 일당이 이기느냐! 이것은 우리 광주시민들과 민주시민들의 행동에 달려있습니다. 부산에서 시위가 계속 벌어지고 우리가 향토사단과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민주시민들은 이길 것입니다. 앞으로 나갑시다. 민주 대한민국 국군과 함께 앞으로 나아갑시다!”
“와아!”
해병대 장교들과 항쟁위원회 위원들은 항쟁위원장 김종배의 말에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1980년 6월 4일 경상남도 김해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는 김해김씨 집안의 시초인 김수로왕이 태어난 곳이자 김수로왕이 세운 철의나라 금관가야의 발상지인 김해로 난데없이 군가 ‘전우여 잘자라’가 울려퍼졌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잘 있거라 내 전우야 우리는 전진한다... 대형버스에 가득 탄 시위대는 버스가 달리는 내내 신명나게 군가를 불렀다.
6월 1일. 부산 시내에서 처음으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진 이후 부산 시민들과 대학생들은 작년 부마항쟁 때 같이 전 부산시민들이 일어나 유신잔당들을 몰아내자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공수부대가 초반에 강경한 시위진압을 하였지만 시위진압 과정에서 공수부대가 휘두른 대검에 수많은 시민들이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오면서 시위는 시간이 갈수록 확산되었다. 그리고 6월 3일에는 공수부대가 시위진압 도중 시위대에 수류탄을 투척, 시민 수십 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시위대는 분노해 이 사실을 밖으로 알려야 한다며 시 외곽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시위 기간동안 많은 차량들이 외곽으로 빠져나갔다. 개인 자가용 승용차부터 시작해서 포니 택시, 대형버스, 용달차, 트럭, 덤프트럭, 경찰에게서 빼앗은 페퍼포그, 트랙터, 군인들로부터 빼앗은 군용트럭, 경운기 등. 차량의 종류와 숫자는 다양하였다. 이와 함께 수천 명 단위의 시위대들도 외곽으로 빠져나갔다. 시위대들 중 일부는 마산으로 진출해 마산지역의 시민들을 상대로 시위를 선동하고 있었다.
이성관도 다른 시위대들과 같이 김해지역의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외곽으로 빠져나갔다. 공수부대가 시위대에게 수류탄을 투척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를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탄 것이었다. 이성관과 시위대를 태운 버스는 가는 마을마다 큰 환영을 받았다. 마을 주민들이 시위대에게 “유신 하는 그 문딩이 새끼들 죽여삐리라카이!” “하모하모. 열씸히 싸워야 하는기라!” 하며 격려하고, 어느 구멍가게 주인은 시위대에게 음식 먹고 싸우라며 한 상자 가득 과자와 음료수, 빵을 주기도 하였다. 돈 하나 받지 않고.
시위대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가는 곳마다 격려 받았겠다, 구멍가게 아주머니가 먹을거 줬겠다. 이제 공수부대의 만행을 경상남도 전 지역에 알리고 부산으로 되돌아가 잔인한 공수부대에 맞서 싸워야 했다.
“와아!”
버스가 마을에 들어서자 마을 입구의 주민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버스가 멈추고, 이성관과 시위대는 버스에서 내렸다.
“여러분! 우리는 공수부대의 만행에 맞서 싸우기 위해 이렇게 이 길을 왔습니다! 지금 사악한 공수부대는 가는 곳마다 무고한 부산시민들을 닥치는 대로 패고 있습니다! 주민여러분, 도와주십시오! 공수부대에 맞서 싸워 민주 부산시민들을 구해야 합니다! 도와주십시오 주민여러분!”
청년은 버스 지붕에서 분노에 젖은 고함을 내질렀다. 아까 전만 해도 환호하던 주민들은 청년의 고함에 숙연히 고개를 숙였다.
“지금 사람이 몇 명이나 죽었노?”
“공수부대가 시위대에게 수류탄 던진거 사실인기가?”
“사실입니다!”
마을 청년 몇이 버스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시위대는 환호성을 지르며 청년들을 안내하였다. 시위대는 군가를 불렀다. 싸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이형. 엄청나지 않습니까?”
시위기간 동안 이성관을 따라다니던 청년이 말했다. 철공소에서 일한다는 청년은 이성관이 이틀 전에 만났던 사람이었다. 활달한 성격에 잘생긴 얼굴의 청년은 이성관을 따르겠다며 이성관을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엄청납니다. 무엇에 끌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또 다른 청년이 버스에 올랐다. 시위대는 청년들이 버스에 탈 때마다 일일이 청년들의 손을 붙잡고 악수하였다.
“이형. 부산으로 돌아가면 뭐 하실 겁니까 저는 철공소에 가서 무기 될 만한거 가져와서 사람들한테 나눠줄건데.”
“저... 저도 돌아가면 한가지 해야죠.”
청년의 물음에 이성관은 멋쩍게 웃었다. 솔직히 이성관은 시위대가 수류탄을 맞고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두려웠었다. 그렇지만 그 소문을 생각하면 생각 할수록 이상하게 용기가 생겨났다. 공수부대를 보면 당장이라도 돌을 던질 것처럼.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마을 청년 수십 명이 버스에 오르고 있었다.
1980년 6월 4일 부산시 5X사단
사단장은 죽을 맛이었다. 공수부대의 유혈진압으로 시위가 일어나 미쳐버릴 판에 이제는 공수부대가 시위대에 수류탄을 투척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었다. 이 사태에 사단장은 공수여단에 무혈진압을 명령했지만 공수여단은 그 명령을 듣지 않고 막무가내로 행동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얏! 시내 중심부가 온통 시위대야 시위대! 공수여단보고 폭력진압 사죄하라고 시위하고 있단말야! 근데 공수여단은 내 말을 듣고 있는거야 마는거야! 그리고 부산시민들보고 폭도라니!”
부산 시내를 나타난 지도의 시내 중심부는 온통 시위대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공수여단 휘하 대대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반면 해병대가 배치된 지역은 이상하리만큼 평온하였다.
“진압봉, 대검사용 금지! 실탄과 수류탄 전량 회수! 아악! 내 명령을 듣거야 마는거야! 시위대 분산시키라고 하니까 오히려 시위대를 결집시키고 있어!”
분통을 터트렸다. 이대로 공수여단이 유혈진압을 하게 되면 시위대가 광주에서 같이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해 무장을 할 판이었다. 시위대가 무장을 하는 최악의 상황을 막을 필요가 있었다. 그것을 막지 못하기라도 하면 공수여단이 더 많은 시위대를 죽일지 몰랐다.
“참모장! 헬기 준비해!”
사단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철모와 지휘봉을 챙겨들었다. 그러자 지휘관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사단장을 붙잡았다.
“놔 새끼들아. 놔! 공수여단이 말을 안 들으면 내가 직접 가는 수밖에!”
지휘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단장은 사단 연병장으로 걸어갔다. 사단본부를 나서자 UH-1 수송헬기가 언제 알았는지 이륙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단장은 헬기에 오르고는 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 사단장의 탑승에 헬기 조종사는 당황하였다.
“사... 사단장님!”
“당장 입 닥치고 출발 햇! 목표는 부산시내! 그리고 엠 씩스틴 가져와! 실탄하고! 빨리!”
M16 소총을 든 사병이 헬기에 올랐다. 그리고 헬기는 천천히 연병장을 이륙해 부산시내 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헬기가 시내 중심가에 이르자 아래로 시위를 진압하는 얼룩무늬들과 이에 맞서는 거대한 무리가 보였다. 사단장은 조종사에게 헬기를 시위대 쪽으로 접근시키라고 하고는 사병이 든 M16 소총을 빼앗아 들었다.
“확성기!”
사단장은 확성기를 들고는 공수부대를 향해 악을 지르기 시작하였다.
“거기 공수여단! 나 5X사단 사단장이다! 이 개새끼들아! 당장 시위진압 중지 햇! 중지 안하면 너희들 다 쏴 죽여 버릴거야!”
시위를 하던 시위대와 시위를 진압하던 공수부대는 5X사단 헬기의 출현에 헬기를 향해 고개를 올렸다. 공수부대를 향해 기수가 돌려진 헬기. 모두 당황하였다.
“X공수여단! 당장 시내에서 꺼져!”
사단장은 M16 소총의 탄창을 확인하고는 개머리판을 몸에 고정시켜 공수부대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파파파팡! 아스팔트로 떨어지는 소총탄에 공수부대원들은 뒤로 주춤거렸다.
“나한테는 지금 엠 씩스틴이 있다! 시민에게 진압봉이나 대검을 휘두르는 새끼는 이 자리에서 즉결처분이닷!”
공수부대원 하나가 M16 소총을 집어 들고는 헬기를 향해 대공사격자세를 취하였다. 사단장은 그 공수부대원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엄청난 비명! 공수부대원은 고통스럽게 쓰러졌다.
첫댓글 슬슬 집결이 시작되는군요. 그러고보니, 부산에서의 이야기에 빠지다보니, 망상적 상상이 하나 떠오릅니다. 우리나라 제 3물결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안철수 의장-이사회에서 의장직을 맡고 있다고 하네요. 현재는 벤처기업을 도울 수 있는 이른바 벤처 코디네이터로의 활동을 위해 준비 중 이고요.-이 서울대에 들어가기 전이고, 그의 부친이 정형외과를 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미래 해병대가 첨단무기로의 지원을 위해 안철수나 미래에서 첨단기기로 유명세를 날릴 인물들을 끌어오는 것은 어떨까요?
쿨럭... 괜찮을 것 같긴 한데(...), 소재파악이 가능할런지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대체역사라고 해서 실제역사에서 뭐 했던 사람이 대체역사에서도 뭐 한다고 하기는 뭐하잖습니까... 예를 들어 원래역사에서 민족지도자로 나오는 김구선생이 동방대제국에서는 군인이자 독재자로 나오는 식으로;;;(...)
그것도 좀 그렇겠네요. 어쩌면 시민군에 참여 또는 부친을 돕다가 요절할 가능성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