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말씀: 출애굽기 16:4~5, 사도행전 2:43~47
참 조: 고린도전서 11:20~22
일 시: 2001년 12월 15일 대강절 특별새벽기도
장 소: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신성교회
찬 송: 447장
이제 하늘을 향하던 우리의 기도는 본격적으로 땅을 향합니다. 하늘의 뜻과 땅의 뜻이 아름답게 연결되는 것을 본 우리들의 간구는 이제 땅의 삶을 위한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땅의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우리를 놀랍게 만듭니다. 우리의 상상을 뒤엎고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신실하고도 경건한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는 말입니다. 오늘 경건하다고 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이 땅위에서 가장 중요하게 그리고 시급하게 할 일은 선교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땅 끝까지 이르러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 교회가 없는 곳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 지상최대의 명령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 땅위에서의 일을 언급할 때 무엇보다도 선교에 대한 간구를 드려야 하는 것이 정당한 순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는 그러한 내용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제켜 놓고 지금 당장 교회 없는 곳을 찾아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은 놀랍게도 ‘밥 먹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의 위장을 채우는 일에 대한 것입니다. 아마 서구철학에서 보면 놀랄 것입니다. 기독교 믿음이 형이상학적인 수준 높은 것인 줄 알았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래 인간을 위한 기도를 하면서 처음부터 ‘밥 먹는 일’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니 이렇게 형이하적 일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놀랍게도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은 땅의 일을 언급하면서 ‘밥 먹는 일’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주님에게도 ‘밥 먹는 일’이 제일 중요하고 절실한 문제가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그렇다. 주님도 당장 내일 먹을 양식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늘 사시곤 하였다. Dominic Crossan에 의하면 예수님은 지중해 연안의 한 작은 나라, 로마의 속국인 유대의 시골 청년이었고 직업이 변변치 않는 가난한 사람이었다. 역사적 예수에 관한 혁명적인 내용은 Dominic Crossan의 The Historical Jesus: The Life of a Mediterrian Jewish Peasant, The Essential Jesus(1998), Jesus:A Revolutionary Biography(1994) 등을 읽어보라. 그 외 Crossan의 저서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 생활에 대하여 깊은 연구결과를 소개하고 있다.)
저는 오늘의 강해를 밥에 대한 몇 가지 한국 현대시들을 여러분에게 소개하면서 시작하려고 합니다.
제일 먼저 소개할 내용은 비록 시는 아니지만 김지하 시인의 ‘밥’이라는 마당극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김지하 시인은 1984년 ‘밥이 하늘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는 이 마당극을 통하여 밥을 하늘처럼 섬기고 살아가는 한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밥이 왜 하늘일까. 밥을 하늘로 보면서 살아가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가. 밥을 하늘처럼 생각하는 것과 오늘 주님의 기도와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밥을 하늘처럼 생각하는 것은 오늘의 기도를 드리는 삶의 태도로 적합한 것일까?
밥이 무섭다
김용택
밥이 무섭다
식전 논에 가 논두렁을 걸으며
논을 둘러보면 무섭다
머리가 띵하게 코를 찌르는 농약 냄새
메뚜기 한 마리 없는 논두렁
방동사니 개 밥풀 하나 없는
깨끗한 논바닥
올챙이 한 마리 없이 말짱한 논물을 보면
어지럽고 무섭다
논두렁을 걸으며
들을 둘러보면
바작 받쳐놓고 소죽감 베는 사람 하나 없는
적막한 들판을 보면 무섭다
거미줄 한 가닥 걸리지 않은 논을 둘러보고 돌아와
배고픈 밥상 앞에 앉으면
밥이,
밥이 겁나고 무섭다
밥 보다 더 큰 슬픔은 없다
이수익
크낙하게 슬픈 일을 당하고서도
굶지 못하고 때가 되면 밥을 먹어야 하는 일이,
슬픔일랑 잠시 밀쳐두고 밥을 삼켜야 하는 일이,
그래도 살아야겠다고 밥을 씹어야 하는
저 생의 본능이,
상주에게도, 중환자에게도, 또는 그 가족에게도
밥덩이보다 더 큰 슬픔이 우리에게 어디 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들로 다가오고 있는 밥에 관한 것을 주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리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 자체가 가난한 사람으로서 살아오셨고 가난한 사람들이 당시 유대민중들의 90%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을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Dominic Crossan 이라고 하는 학자에 의하면 예수님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최하위층에 속해 있었고 심지어는 예수님RP서 공식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아 문맹자였을 가능성이 많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John Dominic Crossan, Jeus A Revolutionary Biography(1994), 37~52 쪽) 그만큼 예수님에게서 있어서 밥 먹는 일은 절박한 일이었습니다.
어제 아르헨티나 통계청에서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국내 실업율이 무려 18, 3%에 달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절대수치로 환산하면 노동 가능 인구 중 약 25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실업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일주일에 36 시간미만을 노동하는 임시직 혹은 part time(sub-employed)의 비율은 16, 3%로서 약 230만 명에 달하고 있습니다. 전 노동 가능 인구의 34,6%가 고용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결론입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밥 먹는 일’은 가장 중요한 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주님께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밥 먹는 일에 대하여 주님께 기도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당연히 드려야 할 기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밥 먹는 일을 위해 기도드리면서 분명히 해야 할 내용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오늘을 위한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σημερον(세메론) 이라고 하는데 24시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일용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επιουσιον(에피우시온)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필요한’ 혹은 ‘존재에 필수적인’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오늘의 기도를 직역해 보면 다음과 같을 수 있습니다. “주님, 24시간동안 내가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먹을 것을 주십시오, 그리고 매일매일 24시간을 유지할 수 있는 먹을 것이 끊어지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아르헨티나의 또 다른 통계를 살펴봅니다. 현재 아르헨티나에서 최저생계비 이하에서 생활하고 있는 국민이 전 인구의 40%에 달하고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현재 아르헨티나의 GNP는 일인당 8300 달러에 달하고 있습니다. 적지 않는 수치입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에서 한 사람이 잘 사는 것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최저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연간 2640달러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일인당 국민소득이 연 8300 달러 최저생계비가 연 2640 달러인 나라에서 국민의 40%가 최저생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분배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24시간 먹을 것이 아니라 소수의 사람들이 평생 아니 자자손손이 먹을 것을 쌓아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1980년대 이후부터 전 세계를 휩쓸기 시작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20여 년 동안 세계경제가 눈부시게 발전하도록 했습니다. 20 년 전과 비교해 볼 때 세계경제규모는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성장했습니다. 따라서 세계의 경제 생산량은 20 년 전보다 훨씬 높아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의 수는 더 늘어났습니다. 잘 살게 되었는데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아지게 된 이런 모순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 나오는 것처럼 하루 24시간 동안 필요한 양식이라는 개념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그 많은 재물들이 오히려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어렵게 만들고 있고 이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쌓아두는 음식, 하루 24시간이라는 음식의 수명의 한계를 망각한 사회는 결국 썩어져 가는 사회가 되고 말 것입니다. 성서에서는 이러한 하루 일용할 양식의 개념을 분명히 하고 있고 또 하루가 지나면 그 양식들의 썩음으로 인하여 그 사회가 혼란을 겪게 될 것이라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의 본문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만나를 이틀 분을 쌓아두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만나는 썩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약한 냄새를 풍겨내고 말았습니다. 오늘 세계의 경제계가 그렇습니다. 소수의 큰 손들이 재물의 한계, 하루라고 하는 한계를 망각한 채 부를 쌓아두고 있기 때문에 한없는 축적의 욕망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의 삶이 썩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루의 개념을 망각한 재물쌓기는 결국 인간의 한없는 욕망에서 비롯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발생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성서는 가르쳐 줍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은 재물의 수명인 하루를 망각하는데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하루가 먹을 양식을 위해서 기도드리면서 우리 마음속에 있는 욕망의 극복을 위해서 기도드립니다. 세계 경제계를 뒤흔들고 있는 큰 손들의 그 욕망이 녹아져 나가기를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입니다.
위에서 ‘일용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επιουσιον(에피우시온)이라는 것과 이 말은 ‘필요한’ 혹은 ‘존재에 필수적인’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도드리는 것은 평생을 먹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위한 것입니다. 필요에 의한 재물 사용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두 가지 요인에 의해서 살아갑니다. 첫째는 필요성입니다. 둘째는 욕망입니다. 그런데 욕망과 필요성의 차이를 구분 짓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봅니다. 25 만 불짜리 집에 거주하고 해변에 10 만 불짜리 별장을 가지고 있으며 8 만 불짜리 수입차를 타면서 50 만 불에 해당하는 금융투자를 하고 있는 사람은 필요이상 혹은 필요이하로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은 어떤 기준을 사용하느냐에 달렸습니다. 만약 필요의 기준으로 보면 그 사람은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가졌으므로 나누어줄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백 만 불짜리 집에서 거주하고 40 만 불짜리 수입 차와 개인제트기를 소유하고자하는 그의 욕구를 실현 시키기 위해서는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성정모, 욕구와 시장, 그리고 신학, 홍인식 역 일월서각, 2000, 81쪽)
성정모 교수는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무한한 욕구의 개념으로부터 출발하면 한계는 사라지고 무한정적으로 그 어떤 것들을 원한다. 그리고 끝없이 원할 때는 나누어 주기 위한 것은 절대로 남아돌지 않으며 항상 무엇인가가 모자란다. 그래서 그들은 소득과 부의 재분배에 대한 대화를 용납할 수 없다.”(같은 책, 81 쪽)
오늘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드리면서 이러한 욕구에 의한 삶이 아니라 필요에 의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우리들이 되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구입할 때도 욕구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 구입해야 합니다. 집을 살 때도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주님, 이 집이 나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것입니까? 아니면 진정 내가 필요해서 사는 것입니까?” 이런 기도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그대로 적용하는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어떤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일까요? 과연 나는 필요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의 삶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욕망이 아닙니까? 오늘 이 아침에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드리면서 다시 한번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간구합니다. 최용건, 조금은 가난해도 좋다면, 푸른 숲, 2001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첫 공동체를 이루었던 사람들은 “모두 함께 지내면서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마다 빵을 떼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습니다. 주께서는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습니다.”(행 2:44~47) 그 뿐만 아닙니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행 4:34) (필요에 의한 경제생활에 대하여서는 아지뜨 다스굽따 지음 장종원 옮김의 무소유의 경제학, 솔 출판사, 2000을 참조하라.)
오늘 드리는 이 기도는 욕망으로 가득 찬 우리의 삶을 회개하고 진정 오늘과 같은 밥 먹기가 어려운 세상에서 믿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를 성찰하게 해 주는 기도입니다.
‘밥 세 끼 먹고도’라는 제목의 이성선 씨의 시를 하나 소개 합니다.
밥 세 끼 먹고도
우리는 왜 이리 할 일이 많은가
산에 사는 것들은
제 나무 열매 멀리 던지고
겨울에는 옷을 벗어
뿌리를 덮고
새들은 찬 바람
허공의 하늘에다
마른 죽지를 묻어
붉은 노을을 이불로 덮어 쓴다
저녁 어스름의
수묵 빛 꿈을 꾼다
셋째는 이 기도는 우리 모두의 양식을 위한 기도입니다.
밥은 밥상 위에 놓여 있을 때 가장 빛을 발합니다. 그리고 그 밥상은 여러 사람이 들러 앉아 있을 때가 가장 빛을 발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외로운 사람이 같이 먹는 입들, 食口들이 없는 사람입니다. 밥은 식구들이 모여 앉아 먹을 때가 가장 즐겁습니다. 혼자서 먹는 밥만큼 쓸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경험을 일상생활에서 가끔씩 경험합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진리를 놓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 배만 부르면 만사가 다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성서는(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등)십일조와 안식년 그리고 희년제도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제도는 궁극적으로 이스라엘 민족들 사이에 가난한 사람이 없도록 하는 사회보장제도의 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제도를 통하여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양식이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보장하고 있습니다. 결국 성서는 같은 민족 가운데 먹을 것이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전 이스라엘 민족의 배고픔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성서의 가르침은 이처럼 먹는 것을 개인적인 차원이 아닌 전 민족적 차원으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일용할 양식(인간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 모두는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아르헨티나의 인구의 40%가 최저 생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것은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드리는 것은 나만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나에게 일용할 양식이 있다고 감사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이 기도는 우리 모두의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리고 이 땅위에서 배고픈 사람, 일용할 양식이 없는 사람이 없어지는 그 날까지 쉬지 않고 드려야 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의 군중이 굶주리고 있을 때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오늘도 주님은 이 기도를 드리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오늘 우리는 주의 기도를 드리면서 이렇게 간구합니다.
“주님,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도록 양식을 주옵소서. 더 이상 지나치지 않게 하시고 욕망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살아가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나로 하여금 없는 자들에게 그들의 일용할 양식을 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언젠가 주님 앞에 설 때 서로 부끄러움 없이 한 밥상에서 먹게 해 주십시오. 나에게 진정한 생명의 양식을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