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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스크랩 단편 - 모스끄바에는 아무도 없다 (하) - 공지영 |
아데라 추천 0 조회 93 06.06.29 15:0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모스끄바에는 아무도 없다 (하)
 
 
 공지영 
 
 
나는 아까 그 여배우처럼 먼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자작나무숲은 끝이 없었다.
  대평원이었다. 이 나라가 사실은 아주 큰 대륙의 일부라는 사실이 갑자기 실감났다.
  나는 주머니에서 천천히 담배를 꺼내 물었다. 김포 면세점에서 산 디스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 온 이래 나는 줄창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이곳에 도착한 후 삼일 동안 거리에서고 촬영장에서고간에 내 손에는 담배가 들려 있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삼일 만에 담배 한 보루를 없앨 리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한국 담배 하나 피워볼 수 있을까요?
  누군가가 내 곁으로 다가섰다. 우리의 통역을 맡아주고 있는 안이었다. 이곳에서 러시아문학 박사과정을 이수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는 여기 도착한 이래 나의 소설에 관심을 많이 보이고 있었다. 소설을 쓰고 싶다고 수줍은 얼굴로 내게 고백한 그에게 몇 개비 남지 않은 담배 가운데 하나를 내밀었다. 검은 뿔테 안경을 버릇처럼 한 번 올리고 나서 그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흰 연기가 그와 내 입에서 동시에 뿜어져 나왔다. 우리는 말없이 서서 출렁거리는 모스끄바의 흰 자작나무 숲, 바다 같은 숲을 바라보았다.
  C의 전화는 이른 아침에 걸려왔다. 어젯밤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저녁도 거른 빈 속에 보드까를 마셔댄 탓인지 나는 밤새 토했고 아침에는 거의 탈진상태로 누워 있어야 했다.
  여기까지 우겨서 쫓아오더니 참 꼴 좋군.
  남편이 아침식사를 하지 않겠다는 나를 깨우다 말고 티셔츠를 갈아입으며 말했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지 말아줄 수 없어?
  나는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청색 티셔츠에 팔을 끼우다 말고 남편이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다 보았다. 그의 얼굴이 너무나 놀란 빛이었기 때문에, 갑자기 나도 어색해져버렸다. 나는 침대 시트를 벌컥 들쳐버리고 일어나 앉았다. 굳어진 그의 얼굴 때문에 갑자기 아니야, 소리를 버럭 지른 건 전혀 내 의도가 아니었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친구들을 만나든지, 빅또르 박한테 부탁해서 따로 관광이나 쇼핑을 하든지 그도 아니면 촬영장에 따라가자.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 나서 남편은 천천히 말했다. 나는 뭐라고 더 말할 수가 없었다. 요즘 와서 이상하게 나는 아주 빠른 속도로 말을 하거나 화를 벌컥 내거나 그도 아니면 가끔 말을 더듬었다.
  촬영장에 따라가겠어. 모스끄바에 와서 영어 할 줄 아는 사람도 없는 호텔에만 있다가 갈 수는 없잖아?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이곳에 있다 해도 사실 내가 얼마나 영어로 말을 잘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언젠가는 한 여자 스텝이 복도에서 지나가는 나를 붙들고 자기 방 화장대 위에 놓아둔 루불이 없어졌는데 그걸 어디 가서 알아보면 좋겠는지 청소부 여자에게 물어봐 달라고 말한 일이 있었다. 이 여자의 방 화장대 위에 놓아둔 루불화가 없어졌는데 그걸 어디 가서 알아보면 되느냐는 말을 영어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실 한마디도 떠오르지 않았다. 여자 청소부 앞에서 입술만 달싹이고 있는데, 여자 스텝의 얼굴이 실망으로 일그러졌다.
  영문과 나오셨잖아요?
  그녀가 물었다.
  영문과 나왔죠. 영문도 모르고
  여자 스텝은 내 말이 재미있다는 듯이 깔깔 웃다가 대답했다.
  하기는 영문과 나온 사람도 모르는 영어를 이 여잔들 알겠어요? 제 실수죠 뭐.
그런데 인터걸들 영어 잘해요. 어젯밤에 내가 남자 스텝 방에 놀러갔을 때 전화가 걸려왔는데 영어를 그렇게 잘하더래요. 섹스 앤드 마사지 베리 웰 오케이? 아이 엠 베리 프리티 걸
  영어를 못하는 우리는 인터걸의 기발한 영어를 들으며 바보처럼 웃었다. 그런데 나는 마치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나타나기만 하면 얼마든지 재미있을 수 있는 것처럼 남편 앞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전화벨이 울린 건 그때였다. 대번에 나는 그것이 C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C니?
  이상한 일이었다. 목소리는 나이를 먹지 않는 것일까.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조금씩 나이에 침식당해 있었다. 여자들은 눈가를 남자들은 머리와 배를 하지만 그게 누구든 전화를 걸어오는 목소리는 그대로였다.
  너 꽤 섭섭했었나 보더라. 우리 마누라가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데 니가 울까 봐 겁이 났다고 하더라.
  그랬다. 예전의 C였다. 우스갯소리를 잘하고 큰소리도 잘 치고 때로는 악의 없는 거짓말로 우리를 골탕먹이던 그. 나는 스물 몇 살의 명랑한 처녀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의 죽을 언제나 맞추어준 것은 나였으니까. 우리는 말하자면 손발이 잘 맞는 부질없는 말장난 콤비였다.
  그래 하루종일 네 전화 기다리느라고 호텔에서 통곡했어. 모스끄바가 눈물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알지만
  예전처럼 그가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이 먹지 않은 예전의 그 웃음소리였다.
  저녁에 술 한잔 해야지 내 말 잘 들어봐. 우선 누구한테 부탁해서 차를 잡아달라고 해. 거 기 현지 스텝 있지?
  응.
  화이떼베찌바 호텔로 가자면 모르는 운전사가 없을 거야. 거기 커피숍에서 일곱 시에 보자.
  어서 타세요. 다음 장소로 이동입니다.
  담배를 피우고 있는 우리의 뒤쪽에서 스텝 하나가 말했다. 우리는 담배를 입에 문 채 대절해 놓은 벤츠버스를 향해 걸었다. 버스는 이미 만원이었다. 남편은 촬영감독과 나란히 앉아서 콘티를 펴놓고 이야기를 하다가 나를 보자 다른 자리에 앉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안과 나는 운전석 뒷자리에 앉았다. 러시아 운전사가 틀어 놓은 알 수 없는 러시아 노래가 차 안에서 나직이 퍼지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머뭇머뭇 안이 무슨 말인가 꺼내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나는 창 밖으로만 던지고 있던 시선을 거두고 안을 바라보았다. 그가 나를 바라보더니 겸연쩍게 씨익 웃었다.
  나는 사실 안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대략 알고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였든가 우리 스텝들 중의 하나가 들려준 이야기였다. 그는 러시아에 유학온 지 5년, 아이가 하나 있는 연상의 러시아 여자를 알게 되고 지금은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살고 있다고 했다. 아들의 유학생활을 살펴보러 한국에서 날아온 부모는 아들의 이상한 동거를 알게 된다. 짐을 풀지도 못하고 넋이 나간 채로 앉은 부모에게 안은 아무 이야기도 하지 못했으리라. 아마도 그는 다만 정직하게, 언어 없이 이 모든 상황을 대면하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순수한 백러시아 혈통을 가진 9살 난 제 딸을 데려와 인사시키는 금발의 이혼녀 앞에서 부모는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고 했다.
  캔 유 스피크 잉글리쉬? 캔, 유 스피크, 잉글리쉬?
  삼십 분간의 침묵이 계속되고 나서 그들의 부모는 모든 관광일정을 취소하고 서울로 돌아갔다고 했다. 캔 유 스피크 잉글리쉬? 이것이 그의 부모가 러시아에 와서 며느리와 한 대화의 전부였다.
  저 저기요
  안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방금 촬영을 끝낸 곳의 지명이 뭔지 알아요?
  예상과는 달리 뜻밖의 질문이었다.
  글쎄요.
  아르한겔스끄예요. 천사의 땅이라는 뜻이죠 참 어울리는 이름이지요?  내 눈앞으로 아까 테라스에서 바라본 자작나무의 흰 숲이 스쳐지나갔다. 흰 자작나무숲과 천사의 날개
  그런데 이 천사의 땅엔 새가 없네요.
  그는 입에 가득 물었던 담배의 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맞아요, 새가 없어요. 그걸 발견하셨군요. 처음에 이곳에 와서 모스끄바 숲을 바라보면서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그거였어요.
  너무 추워서 그런가요?
  글쎄요, 그거야 새들한테 물어봐야죠. 그런데 왜 이즈음엔 소설 안 쓰세요?  두번째 촬영지인 모스끄바 대학 앞에서 촬영이 준비될 즈음 시간은 여섯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여배우는 이제 6 년의 시간을 뛰어넘는다. 한국에 돌아간 후 남편이 죽고 그녀는 남편과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이곳에 오는 것이다. 분장팀들은 해사한 그녀의 눈가에 진한 갈색 아이섀도를 칠하고 분홍빛 입술을 칙칙한 자줏빛으로 누르고 있었다. 저렇게 시간을 뛰어넘을 수 있다면, 마치 영화를 찍듯이 스무 살도 되었다가 서른 살로 되었다가 할 수 있다면 나는 어떤 나이로 가고 싶을까 분장팀의 붓이 움직일 때마다 시간을 뛰어 넘어가고 있는 배우를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어디로 나는 가고 싶을까? 나는 내 마음 속에 있는 사진첩들을 열심히 펼쳐보았다. 유년 시절, 얇은 스타킹 때문에 늘 발이 시려웠던 여학생시절 그리고 대학 결혼과 출산들 대답은 없다, 였다. 내 살아온 서른세 해 동안 돌아가고 싶은 그런 시절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렸던 사람에게 어떤 나쁜 기억의 섬광이 잠깐 비췄던 것처럼 나는 순간적으로 아찔해졌다.
  나, 가봐야겠어.
  가긴 어딜?
  콘티를 들여다보고 있던 남편이 촬영장에서 예의 그랬듯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 전화하는 거 들었잖아, 일곱 시에 화이떼베찌바 호텔로 간다구?  화이 뭐?
  아이 왜 그래? C를 만나기로 했다구. 아침에 전화하고 약속하는 거 당신도 들어 놓고선.
  남편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발치에 버리고 화가 난 것처럼 미간을 찡그렸다.
  택시가 없잖아.
  그는 그것이 짜증이 나는 이유의 전부라는 듯 잘라 말했다.
  아침에 내가 소리를 버럭 질렀을 때 그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 나서 천천히 말했다.
  지금은 안이 차를 잡아줄 거구, 그 다음엔 C가 차를 잡아줄 거라구.
  마피아가 데리구 가면 어떻게 하려구 그래. 여긴 전화도 없구 촬영하는데 여기까지 쫓아와서 계속 날 신경쓰게 만들어야 되겠어?  남편이 큰 소리로 말했다. 주위에서 촬영을 준비하던 스텝들이 쭈르르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간다는 거야. 당신 신경 안 쓰이게 나는 실밥 같은 기분이었단 말이야, 알아?
  남편이 무슨 소리냐는 듯이 나를 바라다 보았다.
  아무튼 나는 갈 거야. 예쁜 러시아 여자들 두고 나 같은 아줌마 데려다 양파 까게 할, 눈 나쁜 마피아가 어딨어?
  나는 백을 고쳐 메고 의기양양하게 걸었다. 감독과 나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안이 천천히 나를 따라왔다.
  미안해요.
  일행과 멀어지고 난 후, 내가 잠시 멈추어 선 자세로 안에게 말했다.
  뭐가요?
  안은 순하게 웃으면서 발끝을 보도블록에 톡톡 두드렸다.
  부부싸움 어느 나라 말로 해요?
  내가 묻자 안은 웃는 얼굴로 천천히 거두었다.
  부부싸움 안 해봤어요. 우리 집사람 가여워서 싸움 못해요. 내가 방에서 큰소리로 혼자 한국 노래 부르고 있으면 우리 집사람 내가 화난 줄 알죠  나는 갑자기, 안이 가여워하는 그의 아내처럼 안이 가여워졌다. 화가 났는데, 캔 유 스피크 잉글리쉬도 알아듣지 못하는 아내가 가여워서, 화가 났는데도 한국 노래를 부르고 있는 그의 모습 문밖에서 이해할 수 없는 남편의 나라 노래를 들으며 가스레인지에 러시아식 스튜를 데우는 그의 아내  지난 봄, 존경하는 노작가의 집으로 찾아갔던 생각이 났다. 하루종일 이야기를 나누고 어둑어둑한 그의 현관을 나섰을 때, 그녀가 밥을 주어 먹인다는 들고양이들이 마악 산에서 내려오고 있던 참이었다. 낯선 방문객을 발견한 고양이들은 등을 곧추세우고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이쁜아 이쁜아 이리 오렴! 노작가는 고양이들에게 소리쳤지만 고양이들은 더 다가오지 않았다. 얼핏 멀리서 내 눈이 그 중의 한 고양이 눈과 마주쳤다. 나는 너희들에게 아무 적의가 없단다, 이리 와서 선생님이 주시는 저녁을 먹으렴, 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 없었다. 내게는 그들을 부를 이름이 없었다. 내가 설사, 이쁜아, 이리 오렴, 하고 부른다 해도 그것은 노작가가 부르는 그 이름과는 다른 것일 테니까.
  신호등이 바뀌고 차들이 우리 쪽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안이 손을 들었고 낡은 일제 토요따 차가 우리 앞에 멈추어 섰다. 안이 흥정을 했고 내가 알록달록한 러시아 루블을 지불했다.
  하지만, 나는 그날 저녁에도 결국 C를 만나지 못했다. 운전자는 안의 말을 잘못 알아들었고 화이떼베찌바 호텔이 아닌 곳에서 밤늦도록 C를 기다리고 말았던 것이다.
  모스끄바에는 산이 없다 하지만 하나의 언덕이 있다.
  싸움은 결국 엉뚱한 곳에서 터지고 말았다.
  오늘 촬영할 콘티를 챙기면서 남편은 어제 한국식당에서 회식을 마치고 밤늦게 돌아왔을 때 내가 울고 있더라고 말했다. 서울로 가겠다고 했다고, 우리말로 이야기할 거라고 했다고, 남편은 웃으면서, 그러나 조심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않으면서 천천히 말을 꺼냈다. 화장대 앞에 앉아서 부석한 얼굴을 바라다보며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거짓말처럼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당신 요즘 조금 이상해진 거 알지?
  남편은 트렁크에서 양말을 꺼내 신으며 아침 먹었어, 하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투로 말했다. 나는 대답 없이 머리만 빗었다. 가느다란 머리칼들이 크림색 티셔츠 위로 우수수 떨어져내렸다.
  신경질적이고 갈팡질팡이고 당신 글 쓰고 있을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잖아.
  지금은 어떤 정도인데?
  그렇지 않으려고 했지만 내가 듣기에도 내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갑자기 가슴 속으로 뜨거운 어떤 것들이 치받쳐올랐다. 이건 좋지 않은 징조였다. 하지만 아니야, 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언덕 꼭대기에서 저 아래로,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전거처럼 내달리고 있었다.
  운명처럼 다가오는 한 남자, 같은 이야기나 쓸까? 그 남편이 죽어서 다시 모스끄바 대학에 찾아온 여자의 사랑이 어쩌구 하는 거 쓸까? 웃기지 말라구, 그건 정말 웃기지 말라구야.
  남편의 입술이 굳어지고 있었다. 그건 그가 아주 화가 났을 때의 버릇이었다. 내 영화에 대해 니가 그 따위로 말하는 것은 용서 못해, 하는 표정이었을 것이다.
  속이지 마, 사람들을 속여먹지 말라구. 안 그래도 속고 속는 사람들이야. 불쌍한 사람들한테 또 거짓 꿈 같은 건 주지 말라구! 노력하고 노력하면 행복을 찾을 수 있고 어느덧 행복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듯한 거짓말을 그만 해! 사랑? 이젠 역겨워 구역질이 나!
  나는 정말 방금 호텔의 일층 레스또랑에서 먹은 그 맛없고 시큼한 검은 빵과 들큰했던 러시아 스프를 다 토해낼 것처럼 말했다.
  가자. 버스를 타야 해,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
  남편은 화를 참기가 몹시 어렵다는 듯이 천천히 말했다.
  난 안 가.
  나는 아주 큰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갑자기 모스끄바에는 택시가 없다는 생각이 났다. 길거리에 나가서 손을 들고 아무 자가용이라고 불러세운 다음 통하지도 않는 러시아 말로 목적지를 말하고 값을 흥정까지 한 후 어디인가로 가야 했다. 그러면 택시는 어제처럼 나를 엉뚱한 곳에 내려놓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삶일까?  가고 싶지 않다면 네 마음대로 해.
  남편은 콘티가 복사된 종이를 손에 돌돌 말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문가로 나가기 전 나를 돌아보고 말했다.
  그래서, 사람들을 속이지도 않고 그렇게 현실적인 소설을 왜 못 쓰는 거니?  잠시 후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자리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넌 나쁜 놈이야. 넌 아주 질 나쁜 개자식이라구. 남편이 없는 호텔 방에서 내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자신없고 공허했다. 나는 신고 있던 샌들을 벗어던졌다.
  젠장할 무슨 호텔에 슬리퍼도 없는 거야!
  전화벨이 울릴 때까지 나는 침대머리에 벗어 놓은 속옷처럼 엎어져 있었다. 전화를 건 것은 C였다.
  기가 막히는구나. 그놈의 운전사가 그런데에 너를 내려놓다니 너도 그렇지, 호텔 간판을 봤으면
  난 러시아 글씨를 몰라
  그도 그렇구나, C가 한숨 쉬듯이 대답했다. 잠시의 침묵이 나를 다시 추스리게 만들었다.
  언제 떠나니?
  내일
  난 오늘은 중요한 세미나가 있어 밤늦게 끝날 거야. 그때라도 볼까?  아니.
  C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전화를 끊고 찬물에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우선 어디론가 가자,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인지 내가 그 이름을 모르면 어떤가, 어디든, 택시가 나를 내려놓는 곳에서 천천히 모스끄바를 구경하자. 나는 작은 배낭을 챙겨 들고 방을 나섰다. 복도에 앉은 여자는 여전히 하품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번에는 굿모닝 하고 말했다. 그녀는 내가 안녕하세요, 하고 말했을 때처럼 웃었다.
  나는 미네랄 워터와 지갑과 여권이 든 작은 배낭을 지고 토산품가게를 기웃거렸다.
배가 볼록볼록한 오뚜기 같은 러시아의 민속인형과 발라라이까와 호박 보석을 만져보았다. 값을 물어보고 다른 것을 보여달라고 말하면서 나는 사실은 내가 저 문밖으로 나가는 것을 몹시 두려워하는 것을 깨달았다. 어젯밤 화이떼베찌바 호텔이 아닌 화이떼베찌바 호텔에서 이리로 돌아올 때의 막막함이 생각났다. 나는 과장되게 손을 흔들어서 아무 차나 불러세우고 코스모스 호텔 코스모스 호텔, 하고 소리친 후, 주머니에 있던 러시아 루블을 주머니에서 닥치는 대로 꺼내 밀었다. 차를 모는 점잖은 중년 남자는 4만 루블을 제외한 나머지 돈을 내게 다시 돌려주었다. 아마 그는 생각했을지 모른다. 저 동양인 여자에게 무언가 굉장히 큰일이 일어난 모양이구나
  나는 로비에서 현관으로 통하는 유리창을 두고 망설였다. 그때 먼 시야에 누군가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뜻밖에도 안과 김이었다. 내가 그들의 이름을 큰소리로 불렀다.
그들이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촬영장에 안 갔어요?
  수완이 좋은 김이 취재를 하기 위해 안을 데리고 다닌 모양이었다. 커피 한잔씩을 하고 안이 촬영장으로 먼저 떠났다.
  저어, 우리 박물관에 가보지 않을래요? 여기까지 왔는데  목이 말라서 콜라를 한잔씩 더 마시다가 김이 말을 꺼냈다.
  그런데 택시가
  그게 무슨 문제예요. 다 사람이 사는 덴데요 뭐. 갑시다.
  나는 러시아어를 나처럼 한마디로 못하는 김의 뒤를 따라 나섰다. 호텔 앞에서 손을 들고 선 우리 앞에 밴이 한 대 와서 멎었다.
  뿌쉬낀 뮤지엄, 뿌쉬낀 뮤지엄.
  뿌쉬낀은 알아듣고 뮤지엄은 알아듣지 못하는 운전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김은 나에게 우선 뒷좌석에 타라는 눈짓을 하더니 운전사 옆에 앉아 수첩을 꺼내들었다.
힐끗 살펴보니 그 수첩에 그림도 그리고 미라도 그리고 하고 있었다.
  오오, 오케이.
  거짓말처럼 운전사는 우리를 뿌쉬낀 미술박물관 앞에 내려놓았다. 제정 러시아시절 귀족의 집이었다는 곳, 귀족들이 취미로 사 모은 예술품들이 이제 이곳에 모여 박물관이 되었다. 입구에서 영어로 된 도록을 사서 읽으며 우리는 넓은 미술관을 오르내렸다. 그리스와 이태리의 조각들, 이집트의 미라, 렘브란트의 그림을 지나간 나는 고흐의 그림 앞에 섰다. 내가 사랑하는 고흐는 어느 나라 말을 썼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델란드에서 온 이방인 고흐는 빠리도 아닌 시골 아를르에서 어떤 나라의 말로 이야기했을까? 각기 다른 사람이 쓴 고흐의 전기를 두 권이나 읽었지만 고흐는 어느 나라 말로 이야기했다는 구절은 없었다.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아서 괴로웠다는 구절도 없었다. 고흐는 다만 괴로워했다고, 이해받을 수가 없었던 그 자신의 생각을 이해받을 수 있도록 잘 표현할 수가 없어서, 마을 사람들도 몰라주고, 화랑도 몰라주고, 끝내 동료인 고갱도 모르는 어떤 공동체에 대한 생각이 좌절감으로써 괴로워했다고.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일까, 회색빛에 가까운 카키색의 죄수복을 입은 사람들이 둥글게 원을 지어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감옥"이라는 그림이었다. 화면 앞으로 다가온 그들 중의 몇이 그림을 그리는 고흐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옆에 걸린 "비가 개인 후의 오베르의 풍경"이라든가 "아를르의 붉은 포도밭" 같은 곳에 있는 프랑스 농부들은 그림을 그리는 고흐를 바라보지 않는다. 다만 묶인 죄수 몇몇, 그리고 "감옥"이라는 그림 옆에 걸린 "자화상" 속의 고흐 자신만이 물끄러미 고흐를 바라보고 있다.
  그 동사변화가 어려운 프랑스어를 고흐는 잘 할 수 있었을까. 나는 푸른색을 주조로 한 마띠쓰의 그림 쪽으로 다가가며 생각했다. 어학원에 다니지도 않았고, 개인 레슨을 받지도 않았을 가난한 화가 더구나 아를르는 남프랑스의 시골이고 사투리가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고흐는 그래서 그토록 동생 테오에게 열심히 편지를 쓴 것은 아닐까. 푸르스름하다거나 어둑어둑하다거나 얼핏, 문득, 새록새록 이런 네델란드 말이 하고 싶어서 빵을 사러 가거나 물감을 사러가는 거 하고 그런 생각을 표현하는 거 하고는 다른 일일 테니까. 고흐가 만일 프랑스 말을 유창하게 했다면 그는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 이 들었다. 타인에게 다가갈 수 없는 언어가 사람을 죽게까지 할 수도 있을까 생각하니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휘익 등줄기를 스치고 지나갔다.
  우리는 박물관을 나서 아르바뜨 거리로 갔다. 여섯 시밖에 되지 않은 하늘이 어둑어둑해진다 싶더니 금세 빗방울이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박물관에서 산 도록을 머리에 이고 비를 피하며 일본식당으로 들어가서 우동을 먹었다. 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창 밖에서 비를 맞으며 집시 옷을 입은 젊은이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식당에서 나온 우리는 빗속에서 춤을 추는 그들을 구경했다. 비닐우산이라도 구해보려고 가게를 기웃거리는 김에게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러시아 여자가 말을 거는 것이 보였다. 어떤 외국인 관광객에게 다가가 구걸을 하는 소녀를 수제품 레이스를 팔던 할머니가 고래고래 소리치며 쫓아내고 있었고 인터걸처럼 보이는 여자들이 성급히 뛰어 환전소로 향하고 있었다.
  없어요. 비닐우산 같은 건 없대. 하기는 물건을 사도 비닐봉지가 없으니  헛탕을 치고 돌아온 김과 나는 그대로 비를 맞으며 아르바뜨 거리를 걸었다. 비 탓인지 토요일 저녁이었지만 인적이 드물었다. 우리는 스파게티를 파는 이태리 식당에 들어가 감자 튀김을 시켜놓고 맥주를 마셨다. 비 때문이었을까 조금 일찍 취기가 오른 나를 바라보다가 김이 말했다.
  어제는 취재를 나가다가 레닌 언덕에 올랐지. 산이 없는 모스끄바의 유일한 언덕 러시아놈들 말이야 그 하나밖에 없는 귀한 언덕에다 딱 두 가지를 세워 놓았더군. 모스끄바 대학과 모스필름이라고 불리는 영화사야, 멋있지? 그 귀한 장소에 대학과 영화사를 세우다니 그런데 내가 정말 화가 나는 것 그토록 교육과 예술을 사랑하는 나라가 왜 이 모양 이 꼴일까 하는 거야. 곳곳에 시인들의 동상이 서 있는데 왜 이들은 패배하고 말았을까. 택시도 없고, 비닐 우산도 없고, 전화 걸기도 힘들고 그래서 문득 생각했어. 모스끄바의 명당이 그 레닌 언덕에 사관학교하고 정보부를 세워 놓았으면 어땠을까 하고 말이야. 서울이 한복판의 남산에다가 안기부와 텔레비 탑을 세워 놓았듯이 그랬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말이야
  김하고 단 둘이 남으면 우리는 왜 자꾸 이런 무거운 이야기들을 하게 되는 것인지 빗방울들이 돌돌돌돌, 모스끄바에 있는 이태리 레스또랑의 커다란 유리창으로 흘러내렸다. 사방은 어두웠고 마주보이는 보석상의 불빛이 노랗게 거리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모든 것이 수족관 속의 풍경처럼 고즈넉해 보였다. 갑자기 모든 소리가 멈추는 듯했고 내게는 이 모든 것이 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 정말 총각이야.
  나의 침묵을 의식했을까, 감자 튀김을 우적우적 씹던 김이 불쑥 말했다.
  서른네 살이나 먹었으면서?
  그래
  그는 작은 병에 담긴 러시아 맥주를 병째 마시며 입을 쓰윽 닦았다.
  옛날엔 사랑도 하고 그랬지. 자신도 있었고 정말 열심히 살았었어 그런데 이젠 잘 안 돼 가끔 예전에 그 여자아이들에게 전화가 오지 나 이혼하려고 하는데 만나줄 수 있겠니? 하고, 그러면 내가 다답해 이혼을 하는데 왜 내가 너를 만나야지? 너무나 많은 것이 변했어. 이 모스끄바 한복판에서 그쪽과 내가 둘이 앉아 있다니
  김은 풀풀 웃다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그쪽을 대학 때부터 알고 있었던 거 알어?
  대학 때부터?
  나랑 친한 놈 중에 H라고 1 학년 땐가 미팅했었다며?  H, H,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미팅에 나간 적이 있던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으니 그랬다.
  그놈이 니네 학교 신문에 네 시가 실리면 가져와서 우리한테 보여주고 그랬어.
그러다가 술만 먹으면 그쪽을 욕했지. 전형적인 부르조아 여대생이라고 그런 너와 내가 이렇게 모스끄바에 말이야, 다른 곳도 아닌 모스끄바에서 이렇게 데이트를 하리라고는 그놈이나 나나 혹은 그쪽이나 상상이나 했을까.
  그러니까 조심해. 우린 어쩜 이 다음에 남극에서 만나게 될지도 몰라.
  내가 빈 맥주병을 치우고 새 맥주병을 따며 말했다.
  남극?
  그래, 지난 10 년같이 이렇게 세상이 휙휙 변한다면 우리는 아마 10 년 후쯤에는 남극의 빙하를 타고 표류하다가 마주치게 될지도 모른다구  김과 나는 러시아의 작은 맥주병을 잡고 낄낄 웃었다.
  술집을 나섰을 때는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러시아에 도착해서 처음 보는 이른 시각의 어둠이었다. 비는 이제 그쳐 있었지만 아르바뜨 거리엔 군데군데 물웅덩이가 괴어 있었고 러시아의 젊은이들이 비에 젖은 금발을 쓰윽 매만지며 물웅덩이 위를 첨벙첨벙 걸어가고 있었다. 바람이 휘익 하고 불었다. 살갗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나는 반팔 아래로 드러난 팔을 쓰윽쓰윽 문질렀다.
  내가 그쪽 소설 싫어하는 거 알어?
  택시를 타기 위해 큰길 쪽으로 걸으며 김이 다시 말했다.
  우리들을 말야 우리들을 그렇게 힘없이 회상해서는 안돼. 우리들은 영원히 외로운 세대야 왜 그랬는지, 그땐 왜 그러다가 지금 요렇게 되었는지 영원히 이해받지 못할 거라구. 그러니까 그렇게 맥없이 항복하고 들어가는 건 싫었어 그래도 그쪽이랑 내가 보자마자 금방 친해진 것은 남들에게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걸, 우리들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랬던 거야 사실은, 그래서 우리 학번들 만나기도 싫어. 그쪽도 내가 이런 이야기 꺼내는 거 싫어하잖아  내가?
  우린 그런 것까지 닮아버린 거야 아닌가?
  그는 취한 듯했다. 아닌가? 하고 물었던 입을 천천히 다물고 그는 턱을 약간 들어 먼 곳을 보고 있었다. 빙하를 타고 있는 것처럼 그의 얼굴은 외로워 보였다. 나는 그처럼 턱을 약간 들어 먼 곳을 바라보았다. 빙하를 타고 있는 것처럼 내 얼굴도 어쩔 수 없이 굳어지고 있었다. 우리들의 시선 끝에 멀리, 맥도날드의 M자가 노란 빛으로 크고 선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김과 내가 복도에서 헤어지고 난 지 한 시간이나 두 시간 후쯤, 김과 나는 다시 복도에서 마주쳤다. 그의 곁에는 밤색 머리칼을 가진 러시아 여자가 서 있었다. 여자는 관리인 여인에게 다가가 돈을 내밀었고, 나는 내 손에 들린 미네랄 워터만 바라보고 있었다. 러시아 여자가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김이 몇 발자국 먼저, 내가 몇 발자국 뒤에서 복도를 걸어갔다. 우리들의 발소리가 긴 복도를 사각사각 울렸던가 아니던가
  다음날 빅또르 박이 아침에 우리들을 인솔해, 붉은광장으로 데리고 갔다. 성 바실리 성당과 끄레믈린 궁을 돌아보고 나서 빅또르 박은 이제 우리가 레닌의 묘를 볼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우리들은 마치 저승으로 통하는 것처럼 깊고 어두운 침묵이 깔린 계단으로 두 사람씩 줄을 서서 내려갔다. 어두운 지하세계로 내려가자 핀 조명이 밝혀진 곳에 밀랍인형 같은 병정이 서 있었다. 검지손가락을 들어 입술 위에다 세로로 대고 우리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는 정말 인형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발밑을 분간하기 힘든 계단을 몇 바퀴 돌아 우리는 레닌 묘에 다다랐다. 어렸을 때 우리집 서랍장 위에 놓여 있던 한복을 입고 장구를 치는 예쁜이 인형처럼, 레닌은 유리 상자 속에 누워 있었다. 그는 참 작았다. 키가 158cm의 단구라고 했던가 지하의 무덤 속에서 긴 침묵이 흘렀다. 얼핏 김과 나의 눈이 레닌의 유리관을 사이에 두고 마주쳤다. 모스끄바에는 새가 없대, 모스끄바에는 산도 없고, 모스끄바에는 아파트뿐, 개인집이 단 한 채도 없지 택시도 없었구, 영어를 알아듣는 종업원들도 없는 호텔, 창녀는 없지만 인터걸은 있고 산은 없지만 언덕이 하나 있고, 이제 여기 레닌이 있다 나는 김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떨구었다.
  빅또르 박이 천천히 대열의 앞을 인솔하고 있었다. 살아 있는 우리들은 죽은 레닌을 거기 남겨둔 채 지하의 어두운 묘지를 빠져나왔다.
  공항면세점에서 나는 마지막 남은 러시아의 동전을 바꿔 공중전화 코인을 샀다.
C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서였다. 디리릭, 디리릭 여러 번 신호가 갔지만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C도 없고 C의 무인도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공중전화를 걸 수 있는 러시아 코인 하나를 기념으로 지갑 속에 넣고 국제전화카드를 스텝에게서 빌려 서울로 전화를 넣었다. 모스끄바에 도착한 이래 처음이었다.
  전화를 받은 것은 시어머니였다. 간단한 안부를 묻고 시어머니는 언제나 그런 것처럼 전화를 아이에게 바꾸어주었다.
  아가야 엄마야, 엄마 해봐.
  내가 말했다.
  엄마, 그래봐, 엄마 빨리 오세요, 그래봐.
  아이의 목소리 대신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야, 엄마 해봐.
  내가 다시 말했다.
  아, 아,  아이가 말했다.
  엄마가 금방 데리러 갈게, 할머니 말씀 잘 듣고 있어.
  아.
  이제 막 돌이 지난 아이가 대답했다.
  전화를 다시 받은 시어머니와 몇 마디 나누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이제 막 말을 배우는 나의 아이의 얼굴이 못 견디게 보고 싶었다. 멈추어 선 채로 나는 핸드백 속에 늘 가지고 다니던 아이의 사진을 꺼내들었다. 그 사진은 아이가 6개월 무렵이 되었을 때 찍은 것이었다. 지금 아이는 많이 변했으리라. 서울을 떠날 때 본 아이의 마지막 모습도 이것과는 달랐으니까. 하지만 기억은 사진 속에서만 선명할 뿐, 모스끄바로 오기 며칠 전 시댁에서 바이바이를 하고 온 아이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C의 얼굴도 B의 얼굴도 함께 떠났던 마지막 여행에서 우리는 사진을 찍지 않았었다. 그때 우리는 무슨 말을 했던가 우리는 이제 인도로 간다, 라고 막막한 바다를 향해 말했던 것이 정말 C였던가 그 말을 한 것은 혹시 내가 아니었을까 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던 C의 모습이 지워지고 그 곁에서 언제나 음울한 표정으로 서 있던 B의 모습도 지워지고 이윽고 내 모습도 지워지고 막막한 바다만 남았다 그 말을 했던 건 그러면 바다였던가 바다 같지 않은 바다.
  섬으로 막막히 막혀버린 바다. 바람이 직선으로 불어오지 못하는 바다. 하지만 파도가 이는 푸른 색깔의 그러므로 바다
  아마도 서울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아이를 보러 가게 되리라. 아이에게 엄마라는 말을 가르치기 위해 하루종일 씨름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엄마라는 말과 아빠라는 말, 맘마라는 말과 산이라는 말 그리고 별과 새와 나무와 강, 자동차와 우산이라는 말 아이가 좀 더 크면 푸르스름하다거나 어둑어둑하다거나 얼핏, 문득, 새록새록하다는 말을 가르치게 되리라. 그러면 나는 집 베란다에 작은 의자를 내다놓고 디스 담배를 피우게 되겠지. 택시를 타면 모국어로 말하게 되리라. 버스를 타면 늘 지겹게 켜 있던, 남자 코미디언과 여자 코미디언이 수다를 떠는 방송을 듣게 되리라. 수다스럽다고 진저리를 치면서도, 가끔은 운전사의 뒷자리에 앉아서 나는 그들의 우스개를 이해하고 어쩌면 웃음을 터뜨릴지도 모른다.
  나는 천천히 면세구역을 향해 걸었고 이어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에 자리를 잡았다.
  비행기가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승객 237 명을 태운 보잉기는 안간힘을 쓰며 바람을 가르고 있다. 안전 벨트를 맨 사람들은 움직임이 없고 복도에는 스튜어디스도 없다. 비행기는 온몸을 다해 달려가다가 마침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 우주를 지배하는 중력과의 싸움이었다. 새도 아니면서 날아오르려고 하는 쇳덩어리의 몸부림. 귀와 목구멍과 가슴과 배에 이상한 통증이 느껴진다고 생각하는 순간 비행기는 하늘을 향해 비상을 시작했다. 창가로 내다보이는 모스끄바가 기우뚱하며 멀어져가기 시작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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