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각과 정자를 찾아서"의 뒷부분입니다.
* 전라도의 모정(茅亭)
“우리 나라는 70% 이상이 산이다.” 나는 이 말을 중학생 시절에도 믿지 못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사방이 논뿐이고 산은 멀리 있는 노령산맥의 줄기가 산수화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해질 무렵 지평선을 향해서 달려가면 태양은 더 멀어졌고 달리다 지쳐 씩씩거리는 것은 나였는데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오히려 태양이었다. 지평선에 걸린 태양이 대머리 같은 꼭지를 마저 숨겨버리면 땅거미 지는 길을 되돌아 마을의 모정(茅亭)으로 달려갔다. 그 곳에는 같은 또래와 선후배 아이들이 모여 있었고 어른들이 한담(閑談)을 나누기도 했다. 가끔씩 징소리가 동네 한 바퀴를 돌고 나면 집집마다 어른이 나와 함께 마을의 공동일을 논의하기도 하고 더운 여름날이면 김매기에 지친 농부들이 한숨을 쉬고 가기도 했다. 어쩌면 일종의 회의장과 사교장 역할을 한 다목적 공간이었기 때문에 모정은 어른이나 아이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공간이었다. 내 어린 시절의 정자문화는 그렇게 모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평야지대라서 바람이 잘 드는 마을의 높은 곳에 지어 놓은 이 모정을 정자나 누각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같은 평야라 해도 충청도나 경기도 경상도 등 다른 지방에서는 찾을 수 없는 전라도만의 독특한 문화 공간이다. 그래도 누마루가 있고 마루 밑으로 아이들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공간이 있으니 누각의 구조와 비슷하다. 그래서 누정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누각과 정자의 범주에 포함시켜 이해를 돕고자 전라도의 모정 문화를 살펴보았다. 부연하자면 전라도 아낙네의 음식 솜씨는 바로 모정 문화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한 여름에 각 가정에서 준비한 음식을 모정으로 가지고 나와 마을 사람들이 같이 나눠 먹는 잔치를 벌이는데 이 곳에 가져오는 음식은 그 집안의 자랑이자 칭찬의 대상이었다. 그 자랑과 칭찬을 위한 아낙네의 노력이 바로 전라도의 음식 솜씨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짐작을 해본다.
이제 모정은 그 생명을 다했다. 일손이 모자라 묵정밭이 늘어나는 만큼 모정의 마루도 부풀어 올라 허연 먼지만 날리고 있다. 이 곳에서 허리 펼 어른도 없고 숨바꼭질할 아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그 용어까지도 변질되었다. 초가를 뜻하는 볏집이나 띠풀의 모(茅)자가 각(角)을 뜻하는 모로 바뀌어 육모정(육각정)이나 팔각정(팔모정)이라는 말로 바뀌어버렸다. 다행히 도심의 정원이나 여유 있는 사람들의 별장에 변질된 모습으로나마 서있는 모정이 운치 있는 기능의 명맥을 이어주고 있기에 아쉬운 대로 옛 정취를 느끼곤 한다.
* 누각과 정자
경 회 루 누각과 정자는 사람이 자연을 만나는 공간이다. 자연 속으로 들어가 자연을 볼 수 있는 공간, 그래서 자연과 하나될 수 있는 곳이 누각과 정자다. 흔히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하나로 묶어 누정이라 하지만 그러나 누각과 정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우선 누각은 개인이 설치하는 정자에 비해 국가나 정부 기관에서 설치하는 데서부터 정자와 다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누각을 공적인 일로 사용하고 정자는 사적인 일로 사용했다. 누각에서는 정치를 논하고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하고 외국 손님을 위해 잔치를 베풀기도 했으며 국가의 크고 작은 행사를 치르기도 했다. 지방에서도 누각은 지방의 수령이 조영(造營)하기 때문에 일반인은 범접할 수 없는 공적인 공간이었다. 더구나 관망대처럼 우뚝 솟아서 감시하듯 서 있기 때문에 이 건축물은 일반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자는 권력이나 재력이 있는 사람이 설치하여 그들의 사교장으로 사용하였다. 당쟁에 밀려 고향을 찾은 사람이 향리(鄕里)에서 위의(威儀)를 갖추기 위해서는 정자를 지어 사람을 불러 모으는 것이 제일 용이했다. 그 정자에 모이는 사람은 바로 자기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방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자의 소박한 출발은 뜻이 있는 사람이 후학을 가르치는 교육의 장으로 사용하거나 조상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 또는 자연 속에서 경관을 즐기기 위해서 조영(造營)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던 것이 점차 그들의 학맥과 인맥을 기르는 장소로 사용하기도 하고 유한자(有閑者)들이 모여 음풍농월(吟風弄月)하며 시류(時流)를 한하기도 하여 일반 백성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결국 모정이 서민들만의 휴식처였다면 정자는 권문세족들의 사교장이었고 누각은 국가의 정책을 펴기 위한 공공 장소였다. 향 원 정 건물의 사용주체와 이용 방법이 그렇게 확연히 다른 만큼 건축의 방법과 건물의 구조에도 큰 차이가 있다. 정자는 건물이 대부분이 1층이거나 마루가 지면에 가까운 저상식(低床式)인 반면 누각은 2층 건물이다. (그래서 누각을 다락이라고도 했음) 마루 밑은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만큼 공간을 두고 그 위에 마루를 깔았기 때문에 고상식(高床式) 구조의 건물이다. 크기도 누각은 주로 정면 5칸 이상의 큰 규모인데 비해 정자는 보통 2칸이나 3칸으로 작고 누각은 사방이 확 트인 마루를 그대로 두지만 정자는 작은 방 한 칸을 내어 온돌까지 마련해 두어 때로는 잠을 잘 수도 있게 한 곳이 많다. 물론 정자도 누각처럼 2층 구조를 보이는 것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누각과 정자의 그런 차이를 보인다. 동 십 자 각 여기서 특히 주목해 볼 것은 누각은 앞뒤가 확 트인 개활지에 설치하기 때문에 조망이 탁월하고, 정자는 산 깊고 물 맑은 곳에 설치하기 때문에 전망보다는 경관에 치중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누각에는 경치 좋은 곳을 일컫는 팔경이 없지만 정자에는 어김없이 팔경을 지정하여 시인묵객들의 시정을 자극했다. 그래서 학문과 권력이 출중한 인물이 조영(造營)한 정자에는 한 시대를 풍미한 정치가나 시인 묵객들의 글이 당시 건물주의 위상을 말해주듯 현판으로 걸려 있는 것이다.
누각과 정자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궁궐을 찾아가보기를 권한다. 궁궐(宮闕)은 궁(宮)과 궐(闕)이 합성어다. 궁은 임금이나 왕족이 거처하는 곳으로 궁가(宮家), 궁실(宮室)을 뜻한다. 대원군이 살던 집에 궁(宮)을 붙여 운현궁이라 하는 것도 그 이유에서다. 그러나 궐(闕)은 문의 좌우에 높게 세운 망루와 같은 시설물이다. 백성에게 알릴 일이 있을 때 여기에 방을 붙이기도 하고, 궁 내외를 살피는 역할도 했다.예전에는 동십자각도 경복궁 담장에 연결되어 있어 궁 내외를 살피는 망루 구실을 하였는데 일제가 삼청동 길을 내면서 독립된 건물처럼 따로 떼어 놓았다. 지금은 서쪽에 있던 서십자각은 없어지고 동쪽의 동십자각만 남아 궐(闕)의 용도와 역할을 살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다. 아울러 경복궁 내에 있는 경회루와 향원정은 지방이나 일반인이 사용하는 누정문화와 또 다른 일면을 볼 수 있어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좋은 구경거리를 제공한다.
역사와 문학이 있는 누정을 찾아 나서기 전에 우선 그에 대한 기본 상식을 알아보았다. 다음 호부터는 직접 각 지방에 있는 누정을 순방하며 우리 조상들의 여유 있는 삶과 역사를 살펴 볼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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