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길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를 설명하기 위해 ‘신중하다’는 말보다 더 적절한 것은 없다. 심지어 권 후보의 단점을 꼽으라는 질문에 “지나치게 신중하다”고 답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권 후보의 삶을 되짚어보면, 지나칠 정도의 신중함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그런 신중함이 역설적이게도 그를 진보진영의 대통령 후보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정부기관지 출신의 언론운동가, 농민운동을 꿈꾸었던 노동운동가, 말많은 조직을 이끄는 말없는 지도자…. 일면 모순되는 두 가치들을 자신의 삶에서 융합시킨 힘도 거기에 있었다.
◇ 빨치산 아버지의 그늘=권 후보가 경남 산청 사람이라는 말은 절반은 맞지만 절반은 틀리다. 그는 1941년 11월 일본 도쿄의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권우현(작고·1915년생)은 결혼 직후인 1938년 일본에 밀항해 그 곳에서 권영길을 낳았다.
권우현은 1945년 광복과 함께 다시 안동 권씨의 집성촌인 경남 산청군 단성면으로 돌아와 구장 일을 맡았지만, 한국전쟁이 터지자 지리산에 들어갔다. 전쟁이 끝나고 대대적인 빨치산 소탕작전이 펼쳐지던 1954년 12월, 권우현은 허기를 채우기 위해 친척 집에 들렀다가 군경에 발각돼 총살당했다.
어머니 하영애(81)씨는 지금도 남편의 이야기를 극도로 꺼린다. 지리산 자락에서 황토밭을 일구며 숨죽여 1남2녀를 키운 기억은 맏아들 권영길의 가슴에도 그대로 전해졌다.
◇ 대학과 기자생활=경남고 재학시절 독서회 활동을 하며 넝마주이들을 모아 야학을 했던 그는 농민운동가가 되겠다며 1961년 서울대 농대 잠사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시절 그는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비밀서클을 조직하고 야학과 농촌 봉사 활동을 계속했지만, 학생운동은 그에게 큰 결실을 안겨주진 못했다.
결국 권 후보는 1971년 <서울신문>에서 기자의 길을 시작했다. 사주가 있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보다는 정부가 만드는 이 매체가 ‘공공성’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는 게 당시 그의 판단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부인 강지연(60)씨는 “남편이 밤늦게 만취해 들어와 엉엉 우는 일이 많았다”고 말한다. 유신정부의 나팔수 노릇을 하는 처지가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1979년 프랑스로 떠난 것은 그 일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노력이었다. 신문사를 그만두려 했지만 좌익전력의 아버지 때문에 출국이 어렵게 되자, 파리 통신원이라는 직함을 회사로부터 얻어내 유학을 떠났다. 그가 정식으로 파리 특파원이 된 것은 1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 지난 97년 가을 권영길 후보 부부가 함께 산책하는 모습. 부인 강지연씨는 삼성생명의 전신인 동방생명 창업주 강의수씨의 무남독녀였지만, 권 후보와 결혼하면서 ‘재벌가의 외동딸’에서 ‘박봉 기자의 아내’가 됐다.
◇ 노동운동가가 된 파리특파원=전세계를 뒤흔든 ‘68 혁명’의 진원지인 파리에서 그는 한 사회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을 보고 배웠다. 권 후보가 지향하는 대부분의 진보적 가치관도 이때 확립됐다.
특파원 생활을 마치고 1988년 1월 귀국할 때만 해도,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4·19혁명, 80년 광주항쟁, 87년 6월항쟁 등 현대사의 현장에서 권 후보는 언제나 비껴 서있었다. 그러나 마흔 일곱의 나이에 그는 언론인의 길을 접고 노동운동에 뛰어든다. 귀국한 지 석달만인 88년 4월, 권 후보는 서울신문사 노동조합 건설에 참가했다. 부위원장을 맡았던 그는 위원장의 사임으로 위원장 직무대행에 올랐고, 같은해 11월 역사적인 언론노련 창립대회에서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 진보진영의 구심으로=그가 언론개혁운동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애초 쉰을 바라보는 그의 나이에 대한 배려라는 측면이 강했다. 하지만 그는 속에 감춰두었던 뜻과 능력을 본격적으로 발휘하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은 권 후보를 “조직을 만드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고 평가한다. 그는 이합집산과 정파투쟁에 익숙한 ‘운동권’의 병폐를 극복하고, 진보진영의 역량을 하나로 통합하는 데 놀라운 수완을 보였다.
“모든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듣는 게 나의 일”이라고 말하는 권 후보의 평상시 모습은 역설적이게도 권 후보의 결단에 권위와 추진력을 심어줬다.
언론노련 초대~3대 위원장(88~94년), 전국노조대표자회의 초대 공동대표(93~95년),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95~97년), 국민승리21 대표(97~98년), 민주노동당 초대~2대 대표(2000년~현재) 등을 거치며 그가 한국 노동운동과 진보운동의 명실상부한 구심으로 서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97년 그는 민주노총 전국연합 등 재야단체의 연합체인 ‘국민승리 21’ 후보로 대선에 출마해 30만6026표(1.2%)를 얻었다. 2000년 4·13 총선에서는 경남 창원을 지역구에 출마했으나 원내 진출에 실패했다. 그러나 2000년 창당된 민주노동당은 각종 진보적 정책을 바탕으로 지지율을 끌어올려 지난 6·13 지방선거에서 정당지지율 8%로 자민련을 제치고 제3당의 반열에 뛰어올랐다.
“인격적 권력의 창출이 정치다. 상실된 인간성을 되찾는 것, 이것이 내가 정치를 하는 이유다”라고 그는 말한다. 너무도 신중해서 말수가 적은 노동운동가 권영길은 이제 진보정치의 새로운 실험을 향해 또한번 걸음을 내딛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