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2월 초 연구실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뜻 밖에 교육과 J 교수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윤 교수님 ! 대전 성모여고 문학동인지 냇글에 윤 선생님 이야기가 실려 있어요. 읽어 보셨어요."
나는 전화 수화기를 놓은 후 27년 전 무학여고 제자였던 대전 성모여고 이애령 교장이 보내온 "냇글"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잊을 수 없는 만남"이란 제목의 다음과 같은 이 교장의 글이 실려 있었다.
"1997년 여름, 나는 새로 나온 어느 공통과학 교과서를 들여다보다가 저자 윤길수의 이름을 발견했다. 얼마나 귀에 익은 이름인가? 까마득한 옛날 내가 무학여고 3학년이었을 때 나의 담임선생님이셨던 그 분이 아니신가? 그 책의 저자 윤길수는 공주교육대학교 교수로 소개되어 있었다.
내가 윤 선생님을 만난 것은 1970년 무학여고 3학년 때였으니 벌써 27년 전의 일이다. 나는 고3 때 담임 선생님의 고마움을 항상 느끼면서도 한 번도 찾아뵙지 못했었다. 나는 윤길수 교수님이 나의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일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 동명이인(同名異人)은 아닌가하여 윤길수 교수님께 편지를 올렸다. 윤 교수님은 편지를 읽은 즉시 전화를 해주셨다. 그 분이 바로 나의 은사님이셨던 것이다.
지금은 교수님이시지만 나는 그 분을 늘 선생님으로 불렀으므로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나에게는 편안하다. 윤길수 선생님의 목소리를 전화선을 통해서 듣는 순간 나의 머리 속에는 27년 전의 일들이 영화 속의 장면들처럼 펼쳐젔다
나는 고등학교 때 집안 형편이 어려워 대학 진학을 거의 포기하고 졸업 후에는 취직을 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수업료도 제 때에 못 내서 교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거리를 배회하던 경험이 있으니 대학 진학은 나에게는 꿈같은 일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입학할 때에 교복을 맞출 돈이 없어서 우리 어머니는 동대문 시장에 가서 헌 교복을 사오셨다. 지금의 학생들은 헌 교복을 판다는 일을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나는 헌옷을 고쳐서 교복으로 입고 다닐 정도였으니 어떻게 대학진학을 꿈이나 꿀 수 있었겠는가?
그나마 교육대학이나 국립대학에 입학하면 가능성이 있겠는데, 나는 그 때에는 교육대학에 가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서울지역의 유일한 국립대학인 서울대학교에는 내 실력으로는 들어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학에 가고 싶다는 소망은 늘 품고 있었고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공부를 했다. 학원이나 과외 같은 것은 물론 상상할 수도 수 없었다.
3학년이 되어 나는 윤길수 선생님을 담임선생님으로 만났다. 화학을 담당하셨던 선생님은 아주 지성적이면서도 자상 하신 분이셨고 그 분의 수업시간은 시간가는 줄 모르는 그런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당시 내가 다닌 무학(舞鶴)여고에서는 3학년 때 가정 방문이 이루어졌다. 그 때 나는 비닐하우스에서 살고 있었다. 친구들이 우리 집에 오는 것이 부끄러워 나는 절친한 서너 명의 친구 외에는 어느 누구도 그 비닐하우스로 데려오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담임선생님이 오신다는 데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마도 선생님께서 학생들의 가정형편과는 상관없이 모든 학생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담임 선생님을 만난 우리 어머니는 나를 대학교에 보낼 형편이 못된다는 것, 빨리 졸업하여 취직을 해서 집안을 도우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윤 선생님께서는 아주 차분하게 대학교를 졸업한 후에 취업을 하면 훨씬 더 가정에 보탬이 된다는 것, 그리고 교육대학이나 국립대학교에 진학하면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감당할 수 있다는 것 등을 말씀하시며 대학에 보낼 것을 권유하셨다. 그 때부터 나는 서울교대에 들어가야겠다고 결심하고 공부에 더 열중할 수 있었다.
대학입학원서를 제출하는 시기에 나는 담임선생님과 상의를 하고 서울교대 원서를 사왔다. 그런데 응시요강을 보니 피아노 실기 시험이 있지 않은가? 나는 그 때까지 피아노는 보기만 했지 내 손으로 만져 본 일도 없었다.
서울교대에 응시조차 못한다면 나는 어느 대학엘 가야한단 말인가!
실망하고 있는 나를 부르신 윤 선생님께서는 서울대학교에 응시해보라고 권유하시며 많은 격려로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셨다. 이렇게 해서 나는 서울대학교 가정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내가 그 때 윤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으리라.
지금도 그렇지만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도 소위 일류대학에 합격하면 담임선생님께 고마움을 표시하곤 했다. 특별히 대학 진학에 관한 보살핌을 많이 받은 나는 남들이 다하는 인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국립대학이라 해도 우리 집 형편은 등록금을 마련하는 일조차 어려웠기 때문이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뇌졸증으로 쓰러지셔서 반신불수로 생활능력이 없었고 우리 어머니께서 꽃집을 운영하고 계셨지만 아주 영세상인이어서 끼니를 잇기조차 어려운 형편이었다.
어머니는 담임 선생님께 드리라며 작은 화분 하나를 주셨다. 나는 그 화분을 들고 교무실로 윤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만면에 웃음을 띄우며 너무나 기뻐하시면서 축하 말씀을 해주셨다.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지금도 그 날 방과후에 선생님께서 직접 그 화분을 들고 교문 앞에서 택시를 타시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이애령은 대학을 졸업하고 고교 교사를 하다가 독일로 유학하여 화학을 공부했고, 수녀가 되었다. 그래서 대전성모여고에서 화학교사를 했고, 화학 교과서에서 저자인 내 이름을 발견하고 연락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지금은 대전성모여고 교장이 된 것이다. 우리는 요즘 사제지간이 아닌 같은 교육 동지로써, 많은 교제를 나누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때로는 직접 만나서 교육에 대한 많은 대화를 나눈다.
이 교장은 2002년 2월 22일에 있은 나의 정년 퇴임식에서 축사를 해 주었었다.
첫댓글 윤길수 홈피에서 축하글월을 보낸 이애령이 바로 이 수녀님이로군 그래, 두 분 사이에 그렇게 아름다운 사연이 .... 그리고 길수는 화학교과서도 썼당 가 ?
평생을 교육계에 몸 담아온 완숙한 교육자의 열매를 보는것 같아 흐믓 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