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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훈장로교회 새벽의 만나 큰 평강, 큰 사랑 시편 119편 161절 “고관들이 거짓으로 나를 핍박하오나 나의 마음은 ‘주의 말씀만 “경외”하나이다” - 고관들의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만을 두려워한다고 선언한다. 고관들은 권세와 지위와 돈이 있어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말씀대로 살면 핍박이 오지만 고관들이 거짓으로 나를 핍박해도 나의 마음은 주의 말씀만 경외합니다. 자기 맘대로 살면서 말씀대로 산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핍박을 당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네 종륲의 마음 밭 중 돌밭의 경지를 넘어선 옥토의 사람이다.
마태복음 13장 5절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절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20절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절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고관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 권세 지위 돈 때문에 분명히 그들을 거슬려 말씀대로 살면 환난이나 박해를 당할 수 밖에 없고, 핍박 아니면 유혹인데 핍박과 유혹은 본래 동일한 것으로 결국 말씀을 대적하게 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는 것이 목적지이다.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돌밭의 경지를 넘어서 옥토로 되어간다는 것이다
시편 119편 162절 “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처럼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 찬양으로 전쟁을 이긴 사람은 여호사밧이고, 기도로 전쟁을 이긴 사람은 히스기야다. 칼보다 군대보다 강국의 왕보다 무서운 것이 찬양이고 기도다.
-“탈취물” 열왕기하 6장 25절 “아람 사람이 사마리아를 에워싸므로 성 중이 크게 주려서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요, 비둘기 똥 사분의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 하니 29절 우리가 드디어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그 여인에게 이르되 네 아들을 내놓아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그가 그의 아들을 숨겼나이다 하는지라 9절 나병환자들이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되겠도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알리자 하고 15절 그들이 그들의 뒤를 따라 요단에 이른즉 아람 사람이 급히 도망하느라고 버린 의복과 병기가 길에 가득하였더라 사자가 돌아와서 왕에게 알리니 16절 백성들이 나가서 아람 사람의 진영을 노략한지라 이에 고운 밀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이 되고 보리 두 스아가 한 세겔이 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사 아람 군대를 몰아냈고, 나병환자 네 명을 통해서 풍성한 양식의 복음이 전하여진다. 그렇지만 그 많은 탈취물 보다 주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 주님의 말씀으로 얻는 기쁨이 더 큽니다. - 이런 고백이다.
시편 119편 163절 나는 거짓을 미워하며 싫어하고 주의 율법을 “사랑”하나이다 164절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 시인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가 어떠한가? 경외(161절) + 즐거움(162절) + 사랑(163잘). 하나님의 말씀 이것이 노래의 제목이고 주제이고 노래말이다. - “이것을 하루에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합니다.” 찬양의 내용은 주님의 의로운 규례들이다. 주님의 의로우신 말씀을 하루에 ‘일곱 번’ 찬양한다는 것은 온전히 찬양한다. 찬양으로 하루 를 채운다. 하나님을 향한 노래의 주제가 의이다. 일반적으로 축복의 말씀은 좋아해도 의의 말씀은 싫어한다. 의의 노래로 찬양하려면 내가 회개해야 찬양할 수 있고, 내가 의를 사랑해야 찬양할 수 있고, 의의 길을 가야 찬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가 길가밭이 아니다. 듣고 깨닫지 못하면 말씀에 대한 태도가 길가 밭이다. 설교가 이해가 안된다. 성경이 이해가 안 된다 그러면 내 마음의 영적인 상태가 지적 수준 감정적 이해, 이성적인 판단이 사람들이 다녀서 굳어버린 길가(밭)이구나 생각하면 맞다. 우리 마음을 곡갱이 쟁기로 내 마음을 밭갈아야 한다.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콘크리트를 걷어내고 굳은 마음을 걷어내야한다. 그 후에야,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싹이 나고 열매를 맺는 것이다. 내 마음이 길가밭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성경이 어렵다고 말하지 않는가! 어찌하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한다. 주님에 대한 태도가 경외로 시작해서 기쁨이요 사랑으로 찬양으로 나아가야 한다.
시편 119편 165절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 큰! 평안이 있다. 하나님이 주신 이런 평강(평안)이 진짜 평강이다. 하나님이 주신 큰 평안은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것이다. 율법을 주시고, 복음을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우리의 태도- 감정과 이성과 의지적 태도가 어떠냐에 따라 평안이 좌우된다. 길가밭에는 평안이 없고, 돌밭에도 평안이 없고, 우리의 마음이 옥토라야 평안이 있다. 내안에 평안이 없다면, 곡갱이 들고 쟁기 들고 갈아엎고, 낫으로 엉겅퀴를 잘라내고, 쟁기로 밭을 갈아서 가시와 엉겅퀴의 쓴 뿌리를 다 파내 잘라내어야 한다. 고 쓴 뿌리를 다 캐내고 돌을 골라내야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고 이해가 된다. - 선지자 예레미야의 입에 할례를 주려고하지 말고, 자기 귀에 할례를 해야 한다. 선지자 입에 할례를 행해서 - 입막으려고, 감옥에 가두어서 전하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이 아닌가!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남유다의 마지막 왕인데 모세, 다윗, 솔로몬, 40년 통치하듯이 예레미야가 사역 4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으나,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듯 그는 듣지 않았다. 물론 들어 지적 이해는 했으나, 그러나 순종하는 의지적 결단이 없었다. 생각이 안바뀌고, 감정이 안 바뀌고, 의지가 안 바뀌면 삶이 안 바뀐다. - 주님의 제자들은 말씀을 들으면 꼭 순종한다. 우리의 삶의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한다 “내 말이 너희 속에 거할 곳이 없도다” 예수님 자신이 태어날 곳이 없듯이, 오늘날 예수님 말씀이 거할 우리 마음이 없다. 탐심으로, 교만함으로, 오해로, 선입견으로, 편견으로, 쓴 뿌리가 깊이 자리잡고 있어서, 말씀으로 마음에 상처 났다는 소리는 많이 하는데 말씀에 순종할 결단은 안한다. 에베소서 6장 10절 :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절 :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 이 말씀으로 상처의 쓴 뿌리를 거두어 내고 승리해야 할 것이다
시편 119편 166절 :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바라며 주의 계명들을 행하였나이다. 167절 : 내 영혼이 주의 증거들을 지켰사오며 내가 이를 지극히 사랑하나이다. 168절 내가 주의 법도들과 증거들을 지켰사오니 나의 모든 행위가 주 앞에 있음이니이다. 169절 여호와여 나의 부르짖음이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 주의 말씀을 가르쳐주세요. 깨닫게 해주세요. 구원해주세요. 이런 기도는 자기 자신의 영적 무지를 알고 있는 자만 할 수 있는 말이다. 내가 안다는 말씀도 성령님의 빛으로 조명을 받아 깨닫고, 영안이 열려 보고, 의지적 결단을 하여 순종한다는 말이다. 말씀을 가르쳐달라는 것은 지적 이해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감정의 변화와 의지적 결단이 포함된다. 그렇지 않는 배움은 참 배움이 아니다. 야고보서를 통하여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2: 19) - 하나님 사랑하고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되 어느 정도까지 아느냐? 말씀이 육신이 될 때까지, 말씀이 삶이 될 정도까지 알아야 한다. - 베드로가 설교하면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잘 들으려하지 않았다. 그래봐야 어부인데? 예레미야가 말할 때도 안들었다. 그런데 앗수르 왕이 말하면 듣는다, 애굽의 왕이 말하면 듣는다. 권력 앞에는 순종하고 하나님 말씀 앞에는 순종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시작해서 진정한 지혜와 지식을 얻고, 진정한 앎에 이르게 되고, 결국에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말씀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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