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평마을은 조선 중기에 명나라의 멸망을 한탄한 慶州 氷씨의 入鄕始祖가 마을을 개척한 이후 현재에 이르러 빙씨와 박씨․김씨․정씨 등의 대성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대성들은 위토를 상당히 소유하고 있고 제실 등을 갖추고 시제를 지내는데 규모나 격식을 상당히 따지며 문중이 마을 내 결합의 중요한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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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에 대한 농민들의 인식
―곡성의 두 마을 사례의 비교―
홍 성 흡(전남대)
1. 서론
UR협상의 타결과 WTO체제의 출범으로 농산물 시장의 전면 개방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소자본과 영세한 생산수단, 낙후된 기술과 정보화 수준이라는 조건 속에 놓여 있는 한국의 농민들은 1997년 말 소위 ‘IMF체제’가 출범하게 되는 사태를 맞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농민들은 나름의 세계관을 통해 자기 주변의 일을 해석하고 적절하게 대응하고자 한다. 농민들의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삶은 나름의 경험과 지식의 틀 속에서 거시적 변화를 해석하면서 이루어진다. 그 해석의 주된 내용은 농업의 대규모화와 조직화를 골자로 한 농업구조개선사업의 실패와 개선의 전망이 안 보이는 유통체계의 문제, 더욱더 늘어가기만 하는 농가부채의 문제, 정부정책의 비일관성 등은 우리 농업의 총체적 위기와 농민들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의 암담함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상황을 최대한 유리하게 해석하고 이용하면서 농민들은 삶을 지속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전통적인 농촌마을과 일제시대때에 형성된 농촌마을의 사례의 비교함으로써 농촌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농업이나 농촌의 현실에 대한 인식, 정부의 정책에 대한 태도, 미래에 대한 전망에 있어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시론적으로 살펴 보고자 한다.
2. 조사지 개관
본 논문의 대상마을은 곡성군의 大平마을과 松田마을이다. 대평마을에는 총 94가구, 303(남:녀=140:163)명이, 송전마을에는 총 72가구, 233(남:녀=134:99)명이 거주하고 있다. 가구주의 연령별 분포를 보면 대평마을은 40세 이하까지가 13.8%(13가구), 40세 이상 60세까지가 44.7%(42가구), 60세 이상이 41.5%(39가구)이다. 송전마을은 위의 순서대로 각각 27.8%(20가구), 36.1%(26가구), 36.1%(26가구)를 나타내고 있다. 60세 이하의 연령층을 활발한 경제활동인구라고 볼 때 두 마을의 경우 이 연령층이 각각 58.8%와 63.9%를 차지하고 있어 큰 차이를 보이지 않지만 40세 이하의 농업후계자층의 비율은 송전마을이 2배 이상 높게 나타내고 있다. 남녀간의 성비나 연령별 인구구성이 대조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두 마을의 차이를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특히 상대 마을에 대한 인식이나 마을의 정체성, 농업경영의 구체적 내용, 농업에 대한 미래의 전망 등에서 이러한 차이의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두 마을은 확연히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대평마을은 조선 중기에 명나라의 멸망을 한탄한 慶州 氷씨의 入鄕始祖가 마을을 개척한 이후 현재에 이르러 빙씨와 박씨․김씨․정씨 등의 대성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대성들은 위토를 상당히 소유하고 있고 제실 등을 갖추고 시제를 지내는데 규모나 격식을 상당히 따지며 문중이 마을 내 결합의 중요한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반면에 송전마을은 일제가 養蠶과 製絲를 강제적으로 이식하는 과정에서 1932년 무렵에 鐘淵紡績의 桑田마을로 조성되었다. 여러 지역에서 노동자로 入村한 사람들로 형성된 전형적인 각성받이 마을이다. 따라서 이렇다할 문중조직도 발견할 수 없고 위토가 없다.
이 글의 연구자료가 된 가구는 대평마을이 65가구, 송전마을이 51가구이다. 나머지 조사가 불가능했던 가구들은 만날 수 없었거나 인터뷰를 거부당한 경우, 혹은 공식 자료와 인터뷰자료의 차이가 너무 큰 경우 등이었다. 대평마을의 65가구 중 농가는 50가구, 비농가는 15가구이다. 송전마을의 51가구 중 농가는 36가구, 비농가는 15가구이다.
곡성군에서 가장 잘 사는 마을로 알려져 있는 대평마을은 비닐하우스가 많고 대부분의 농가가 논농사에 종사하면서 딸기․메론․화훼작물 등의 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본래 논농사에 적합한 토질인 이 곳은 섬진강물을 끌어들이면서 농사에 활기를 띠게 되었다. 원래는 논농사를 중심으로 露地의 밭에서 야채를 재배하여 소득을 올렸으나 1982년 주민 중 한 사람이 하우스에서 딸기농사를 시도한 이후 대부분의 농가가 논농사와 하우스농사를 병행하는 농업경영을 하고 있다. 현재는 조사대상 50농가 중 28가구가 하우스농사를 하고 있고 논이나 밭농사, 과수원 경영을 하는 농가가 22가구이다. 비농가 15가구 중 자영업자가 4가구, 공무원이 2가구, 회사원이 4가구, 임노동자가 2가구, 노동능력이 없는 노년가구가 2가구이다. 상설시장이 있는 읍내까지는 약 2㎞가량 떨어져 있고 3㎞정도의 거리에 5일장이 서기 때문에 시장조건도 좋은 편이다. 논은 하우스가 가능한 곳이 평당 5만원 이상으로 하우스가 불가능한 곳의 3만원에 비해 월등히 높고, 밭은 7~8만원에 거래되고 있다. 임대차는 하우스 논이 평당 1,200~1,300원이고 논농사는 200평 한 마지지당 쌀 80㎏ 4가마 정도의 소출의 1/4에 해당하는 1가마이다. 농기계도입이 보편화되면서 농기계의 소유정도가 마을내 권력관계의 구체적 양상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였다. 품앗이나 소규모 작업조를 통한 공동경작의 관행은 이미 사라졌고 사용료를 지불하고 기계를 이용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다.
송전마을은 해방 이전까지 10여 가구의 작은 마을이었으나 해방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인구가 증가하였다. 1967년에 마을 구획정리와 경지정리사업을 실시하여 바둑판모양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70년대의 새마을운동시기에는 정부로부터 모범마을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3,500평 단위로 대규모의 경지정리를 실시하였다. 이 마을의 토양은 각종 채소농사에 유리한 사질토로, 60년대까지는 복숭아․생강 등을, 70년대에는 생강과 각종 채소를, 80년대에는 하우스농사를 시작하여 당근․호박․상추 등을 재배했다. 현재는 하우스에서 화훼(카네이션)나 수박․토마토․딸기․메론․오이․당근․(느타리)버섯 등을 경작하고 있다. 이들 채소들은 계통출하를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광주의 재래시장에 직접 출하하고 있다. 조사대상 36농가 중 하우스경영을 하는 농가가 7가구, 낙농가가 8가구(개․토끼 3/양계 1/젖소 2/염소 1/한우 1), 과수원과 식당을 같이 하는 농가가 2가구, 논과 밭농사만을 하는 농가가 20가구이다. 비농가 15가구 중 자영업이 5가구, 회사원이 9가구, 목사 1가구 등이다. 회사원의 비율이 대평마을에 비해 월등히 높은 것은 1991년에 금호타이어 공장이, 1996년에는 대형 세탁공장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임대차는 논 200평당 쌀 1가마니이며 밭은 임대차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는 농업경영의 중심이 논농사로부터 밭작물의 재배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 금호타이어공장이나 세탁공장 등이 들어서면서 농업노동력이 감소하면서 대형농기계의 도입이 본격화되었고 품앗이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대평마을과 송전마을은 대략 논을 5,000평 이상 경작하는 농가가 드물고 기존의 논조차 밭으로 전환하여 하우스경영이나 낙농 등을 행하고 있다. 이는 농업의 중심이 환금작물 중심으로 변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논농사와 하우스농사를 결합하여 적극적으로 농업경영을 펼치는 농가들은 경운기․트랙터․이앙기․트랙터․콤바인․농작업용 트럭 등의 기본적인 농기계를 모두 소유하고 있는데 반해 2,000평 이하의 경작만을 하는 대부분의 농가들은 기본적인 농기계조차 소유하고 있지 못한 대조를 보여 주고 있다.
3. 두 마을의 경제적 변화과정과 적응양상
대평마을은 전통적인 농촌 마을인 반면 송전마을은 새롭게 마을이 만들어져 주민의 대다수가 외부에서 이주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대평마을에서는 외부인이 들어와서 생활하기가 상대적으로 어렵고 토박이 중심의 마을생활이 이루어지고 있다. 반면에 송전마을에는 외부인이 쉽게 들어와 자기 나름의 독자적인 방식으로 농사를 짓고 있다. 또한 새로운 작물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도 대평마을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다. 특용작물 재배의 보급으로 현재 50가구 정도가 하우스 농사를 짓고 있는데 대략 비슷한 耕種을 선택하는 경향이 강하게 보인다. 반면에 송전마을은 화훼농, 화분공장 경영자, 버섯재배농, 양계장 경영자, 낙농업자 등 다양한 작목을 경영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송전마을은 금호타이어공장이나 세탁공장, 쟁반공장 등의 농공지구가 형성되어 있다.
대평마을과 송전마을에서 환금작물 경영이 도입되는 과정을 살펴 보면 이상의 차이점이 매우 선명하게 드러난다. 대평마을에서 하우스경영이 시작되는데에는 새로운 혁신을 이루고자 하는 선구자(entrepreneur)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대평마을에 사는 권☆☆씨는 경영면적이 넓기는 하지만 앞으로 전업농으로서 생존하려면 쌀농사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인근 선진지역을 방문하여 기술을 배우거나 농촌지도소의 협조를 얻어 가장 적합한 작목이 ‘딸기’라고 생각하고 1982년부터 독자적으로 하우스경영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하우스경영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호응이 좋지 않았고, 따라서 작목반을 구성하는 것도 불가능하였다. 여러 여건이 좋지 않아 첫해에는 큰 손해를 보고 나서 이듬해부터 소득이 오르기 시작하자 마을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하우스경영에 참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인근 마을과 함께 15농가로 작목반을 구성하였다가 참여자가 더 늘어나자 대평마을만으로 작목반을 구성하여 현재에는 50가구가 하우스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따라서 대평마을은 어느 한 사람이 선구자가 되어 하우스 농사를 시작하였고 마을의 다른 주민들이 따라가는 식으로 하우스 농업이 발전하였다.
송전마을의 환금작물 도입과정은 대평마을과는 여러 면에서 차이가 난다. 송전마을은 마을의 성립 배경에서 알 수 있듯이 여러 지역의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었기 때문에 경제 변화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개방적이고 개별적이다. 이 점은 세탁공장이나 금호타이어․대형 양계장․쟁반공장․화분공장 등 다양한 취업기회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잘 나타난다. 대평마을의 사례는 새로운 농업경영의 도입여부가 혁신가의 성공 여부에 따라 마을 주민들이 눈치를 보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면, 송전마을은 마을 주민들이 ‘각개약진’의 형태로 새로운 농업경영전략을 개별적으로 시도하고 개척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 점은 20여년 전에 가장 먼저 도입된 환금작물경영인 화분공장이 현재 두 농가에서만 참여하고 있고 그 중 나중에 시작한 농가는 조만간 이를 정리하고자 한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대평마을과 송전마을의 농가들의 농업경영유형을 비교해 보면 <표-1>과 같이 확연한 차이를 알 수 있다.
우선 송전마을의 농업경영형태가 훨씬 다양하고 여러 경영부문을 결합한 복합영농이 진전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평마을은 과수원을 경영하는 한 가구의 사례를 제외하면 하우스경영이 환금작물경영의 유일한 대안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송전마을은 하우스경영 이외에도 낙농과 각종 가축의 사육, 과수원과 식당경영 등이 시도되고 있다. 특히 가축사육의 경우는 개 600마리, 젖소 300마리, 닭 3만수 등 대단위경영이 모색되고 있다.
이러한 환금작물 도입과정과 의존도의 차이는 농업소득에의 의존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대평마을이 기존의 토지이용형 경영부문에 소극적으로 환금경영부문을 결합시키는 집단적 선택과정이 있었다고 한다면 송전마을은 적극적이고 각자의 농가의 개별적 조건에 맞는 환금경영부문을 외연적 확대를 통해 결합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점은 두 마을의 농외노동시장의 접근성이나 규모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독특한 적응양상을 만들어 내고 있다. 대평마을의 주민들은 인근에 농외취업 기회가 많지 않아 임노동을 하려면 광주 등지로 나가 일을 찾는다. 하우스농사에 종사하지 않는 농민들은 대부분 고령농가이지만 일부의 농가는 생산자원이 부족한 경우이다. 이들은 농외취업을 통해 소득을 올리고자 하는 강한 욕구를 지니고 있지만 최근에는 경제위기로 인해 일감을 거의 찾지 못하고 있다. 이 마을에서 농사 품삯은 하루 3만원선인데 그것도 IMF 이후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 농업노동에 의존하는 농민들은 상당히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 따라서 대평마을에서는 농외노동시장이 협소하기 때문에 임금노동자로서 생활할 수 있는 여건이 전반적으로 열악하지만 경제위기의 진전에 따라 더욱 어려운 상황속에 놓이게 되었다고 하겠다. 농촌의 전반적인 경제사정이 열악하기는 하지만 그 속에서도 이들 일부의 농가는 더욱 열악한 위치로 전락하고 있다. 따라서 대평마을 전체로 볼 때 빈익빈현상이 이들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하겠다.
반면에 송전마을에서는 세탁공장․쟁반공장․대형 양계공장 등이 마을 안에 있고, 마을 인근에 금호타이어공장이 위치하고 있어서 임노동을 원하는 주민들이 도시나 주변 지역으로 나가지 않고서도 일을 구할 수 있다. 현재 세탁공장에 마을 주민 3명이 취직해 있고, 금호타이어에는 15명, 골프장에는 2~3명 정도가 취업하고 있다. 이들 사업장에 부정기적이고 일시적으로 고용되는 형태까지를 고려하면 대부분의 젊은 노동력이 농외노동시장에 취업하고 있다고 하겠다. 금호타이어공장에서의 여성의 월급은 월 60만원 수준이고, 남성은 60~80만원 수준이다. 이 정도의 농외수입은 고정급인데다 농촌에서는 상당히 높은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농한기에 일시적으로 인근이나 광주의 공장에 나가 수입을 올리는 등 농외취업의 기회는 상대적으로 많다고 하겠다. 세탁공장의 경우 초봉이 50만원 수준으로 그다지 많지 않지만 일감이 풍부하고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끼리 작업을 하기 때문에 선호되고 있다. 송전마을의 농외시장과의 관계는 대평마을과 비교할 때 농업부문에서의 다각적인 적응전략의 모색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양태를 띠고 있다고 하겠다.
4. 두 마을의 농민들의 경제적 위기에 대한 인식
대평마을과 송전마을의 주민들이 경제위기를 인식하는 틀은 대략 빈부격차의 심화, 정부의 미온적 정책에 대한 비판, 부채문제 등의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이밖에도 농약문제를 비롯한 각종 환경문제, 자녀교육문제, 농기계사용에 따른 안전문제 등을 이야기하지만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하거나 시급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지는 않다. 또한 최근의 경제위기 상황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지도 않는다.
우선 빈부격차의 문제는 환금작물경영에 참여할 수 없거나 임노동의 기회조차도 잘 얻을 수 없는 계층들을 중심으로 많이 제기된다. 일부의 상층농이 농기계를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다거나 정력적으로 농업경영에 종사하는 등 빈부의 격차를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농민들은 실제보다 빈부격차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생산자원의 소유정도나 경영규모와는 무관하게 장성한 자식들의 보조로 생활하는 등 여타의 수입원을 지닌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도시민들과 비교할 때 자신들 사이의 차이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빈부격차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농민들은 농업소득이 낮거나 임노동 이외의 소득창구를 지니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농외취업의 기회가 협소해지거나 마을인심이 사나워졌다는 식으로 불만을 표출한다. 때론 정부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이들은 자신들처럼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해보고 싶어도 농협에서 대출받는데 보증인이나 담보를 세우라고 해서 정부가 제공하는 정책적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특히 농협 대출이 IMF위기 이후에 더욱 음모적이고 상층농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분개한다. 그리고 마을 내에서도 경제위기가 닥치기 이전보다 이전 주민들이 토지를 빌려주려고 하지 않거나 일감을 주는데 인색하다는 것에 불만을 지니고 있다. ‘마을 인심이 예전만 못하다’는 이야기를 쉽게 들을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사실과 맥락이 닿아 있다. 이는 곧 경제위기의 피해가 하층농들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피해의식을 반영한다.
두 마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적인 현상은 가구주가 지체부자유자인 사례가 많이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도시에서 살기에는 적절한 경험이나 지식, 기술 등을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친족관계를 통해 대부분 IMF경제위기 이후에 조사마을로 들어온 사람들이다. 이들의 사례는 경제위기상황 속에서 ‘신체적 부적격자’의 저수지로서 농촌이 기능하게 되는 것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다음으로는 정부의 농업정책에 대한 불만을 들 수 있다. IMF사태 이전부터도 이러한 정부정책에 대한 불신은 매우 뿌리가 깊지만 일부의 비판은 최근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벼 수매가격에 대한 불만은 두 마을 모두 농업경영의 중심이 쌀농사에 있지 않다는 점에서 실질적인 의미보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더 큰 것으로 판단된다. 표준화된 경영이 가능한 쌀농사의 경우는 노동력이나 각종 자본재를 이용하여 충분히 경작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농민의 역할이나 기능,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이나 정체성 등을 확인하는데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듯하다. 실재적인 의미에서 두 마을 주민들이 공통적으로 제기하는 것은 농산물 유통의 문제이다.
쌀을 제외한 농작물의 경우 유통체계가 체계화되어 있지 못한 상황에서 정보나 자본력이 뒤떨어진 농민들은 유통의 각 단계에서 여러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 두 마을 농가의 대부분이 하우스나 露地에서 밭작물을 경작하고 있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중간 상인들이 너무 폭리를 취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들은 가락동시장이나 인근의 재래시장에 팔기도 하지만 많은 양을 중간상인을 통해 밭대기형태로 판다. 밭작물은 대개 일손을 많이 필요로 하고 대농들은 파나 양파․당근․무․배추 등의 농산물보다는 수익이 높은 과일이나 화훼에 경영의 중심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적은 돈을 받고 수확 전에 일괄적으로 외부 중간상에게 파는 경우가 많다. 중간 거래상들은 인부를 부려 수확한 후 시장에 내다 파는 형태를 취한다. 따라서 밭작물소득은 실질적으로 그다지 크지 않게 된다. 또한 화훼나 딸기․메론 등의 과일류는 시세에 민감하여 적절한 시기에 출하하는 것이 농가소득을 높이는데 결정적이지만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 없어 단골관계를 맺고 있는 중간 유통상들에게 헐값에 넘기는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 특히 IMF 이후에는 긴급한 가계자금이 필요한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에 유통상의 불이익을 알면서도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더욱 많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유통상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주체는 정부이지만 정부는 그에 걸맞는 역할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민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영농조합이나 수위탁전문회사의 육성, 유기농산물의 경작 등 주민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은 거의 보이지 않고 있다.
하우스를 경영하는 농민들은 IMF 이후 정부에서 실시하고 있는 공공근로사업이 하우스경영에 필요한 노동력을 부족하게 만들었다는 불만을 지니고 있다. 특히 잔손질이 많이 필요한 화훼농들은 공공근로사업이 노동량이 적고, 휴일에는 쉬면서 임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인력문제가 심각해졌다고 생각한다. 또한 IMF 이후 연료비가 상승하고 ‘가정의례에 관한 법률’ 중 화훼 규제 조항 등에 의해 꽃의 판매량이 줄어들면서 농가의 부담이 더욱 커졌다고 인식하고 있다.
경제위기상황에서 농민들이 지니는 상황변화의 극명한 표현은 농가부채문제에서 드러난다. 조사대상 두 마을의 부채 현황을 살펴 보면 다음 <표-2>와 같다.
<표-2> 대평마을과 송전마을의 부채 현황(농협 대출금만을 조사함)
대평마을
송전마을
용도
가구수
금액
가구수
금액
기계구입자금
11
1억 7832만원
9
6억 8000만원
시설설치자금
8
1억 6200만원
5
8000만원
영농자금
18
1억 7750만원
12
9350만원
주택자금
6
1억 350만원
5
1억 2700만원
기타(학자금, 생활비 보조금 등)
5
2920만원
11
1억 7000만원
계
48
6억 5052만원
42
11억 5050만원
위의 통계는 농협 대출금만을 계산한 것이기 때문에 농협 이외의 금융기관에 대한 부채액을 고려한다면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부채현황에 대한 통계는 농가에서 대부분 말하기를 꺼려하기 때문에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다. 송전마을이 대평마을보다 농가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부채액이 거의 두 배에 달하는 것은 대단위의 가축사육을 하는 농가들이 있기 때문이다. 대형 양계공장을 경영하는 농가는 농협이나 기타 금융기관을 통해 약 10억을, 축산업을 하는 농가들은 대략 1억원 안팎의 부채를 지고 있다. 그리고 부채를 지고 있는 농가들은 학자금 보조나 생활비 보조 명목의 부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상층농들에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상층농들은 여러 종류의 부채를 지고 있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조사지의 농민들은 매스컴 등에서 정부가 농업보조금으로 엄청난 액수의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혜택이 결국에는 빚으로 남는 것이고 대부분의 농가가 가계형편상 농업경영에만 투자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한다. 또한 대출조건이 까다롭기 때문에 일부의 농민들에게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비판한다.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서 특이했던 점은 농민들이 실제 부채액보다 부풀려서 말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숨기고자 하다가도 나중에는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면서 적극적으로 부채문제에 대해 언급한다. 농민들이 직면한 현실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은 부채문제이고 외부인을 통해 이런 현실이 알려지게 되면 농민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부채탕감’이나 ‘부채감면’이 가능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농업구조개선이나 새로운 경영방식의 모색 등을 통한 자발적인 해결책의 전망이 거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농민 자신의 농업경영상의 문제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 부채문제에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
이상의 빈부격차․정부정책․부채문제에 대한 두 마을의 공통된 인식에도 불구하고 개별 농민들은 구체적인 이상의 문제에 대한 심각성의 정도나 해결책에 대한 다른 해석들을 보여 준다. 빈부문제에 대해서 대평마을의 농민들은 자신들이 원래 잘 살았던 마을이고 지금도 평균 소득이 높은 마을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극히 일부의 농민들만이 언급하는 태도를 보인다. 반면에 송전마을의 농민들은 부농이라 할지라도 자신들의 처지가 매우 어렵고 정책적인 보조가 절실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들은 부채문제의 원천적인 해결은 정부가 나서서 탕감해 주는 것이 현재의 농업문제를 해결하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신들은 모래밭에 세워진 마을에 들어와서 고생한 사람들의 자손이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열심히 농사를 지어 살아 보고자 하지만 부채문제가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심지어 대경영을 하는 일부의 낙농가들은 부채가 많다는 것이 자신들이 농업경영을 지속할 수 있는 안전판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은연중에 암시하기도 한다. 대조적으로 대평마을의 농민들은 부채문제가 심각하다고는 이야기하지만 부채의 거치기간이나 상환기간을 현실성있게 재조정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견해가 주를 이루고 있다. 정부의 농정정책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도 대평마을의 농민들은 대략 비슷한 견해를 보이는데 반해 송전마을의 농민들은 각자의 현실에 따라 다양한 견해를 피력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하층농들의 태도에서는 대평마을의 경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정부의 선처를 바라는 태도가 강하게 나타나는데 반해 송전마을에서는 모든 문제가 정부로부터 시작된 듯이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5. 결론
조사대상 두 마을의 사례에서 환금경영부문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차이점과 농업 현실에 대한 인식과 태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차별성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이고 확실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마을형성과정에서의 차이라든가 마을 주민들의 구성상의 차이, 자본주의적 심성을 길들일 수 있는 기회의 정도에 있어서의 차이 등과 일정한 관련을 맺고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벼농사 중심의 농업경영을 해왔던 집단적 경험과 애초부터 蠶絲라는 환금경영부문에 종사했던 집단적 경험의 차이가 일정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는 현실적 이해관계가 유사한 사회집단과 각기 다른 사회집단의 차이가 현실을 해석하는 차이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혹은 혁신자의 성공 여부를 보고서 대부분의 농민들이 짧은 기간에 따라간 대평마을의 ‘보수적 눈치’의 문화와 애초부터 ‘각개약진’을 통해 현실을 개척하려는 송전마을의 ‘적극적 자발성’의 문화가 지니는 차이로부터 나타난 것이라고도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