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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합동대 베이스캠프였던 군용텐트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권경업.김문식.강창호.배종순.이종양, 이정희씨.(왼쪽부터)
[권경업씨 제공]
[설악에 살다] (16) '권경업과 배종순'
그는 오랫동안 말도 안되는 짓을 일삼고 다녔는데, 알고보니 그의 사형(師兄) 배종순씨가 그런 행동의 원조였다.
대구 팔공산악회의 오상균씨가 언젠가 '별 해괴한 친구'를 산에서 만났다며 혀를 껄껄 찬 적이 있다.
"부산 산악인들과 대구 팔공산에서 합동산행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가 겨울이었는데 부산에서 온 어떤 산꾼이
모닥불 곁에서 반바지에 반팔 옷차림으로 밤늦도록 앉아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정말 추위에 강한 체질인가보다 하고
얼굴이나 한번 보려고 가까이 가봤어요. 그러나 웬걸. 얼굴이 청동빛으로 얼어 붙은 데다 가느다란 팔다리를
사시나무 떨 듯 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물어봤죠. 안 춥냐고요. 그랬더니 이 양반 대답이 걸작이더라고요."
"보면 모르냐. 이렇게 떨고 있는 걸."
"그럼 옷이 없는 모양이군요. 빌려줄까요."
"옷은 나도 많구마."
"그런데 왜 이런 겨울산에서 반바지만 입고 떨고 있나요."
"귀찮게시리 자꾸 물어보네. 이건 어떤 산선배의 가르침을 따르는 거구마. 그 선배 말이 토왕폭을 오르거나
알프스의 아이거북벽을 등반할라카마 이 정도 추위는 알몸으로 견뎌내야 한다고 했구마는.
지금 나는 토왕폭과 아이거북벽 등반 훈련 중인기라."
그 다음날 오상균씨는 부산에서 온 이 괴짜와 함께 팔공산 병풍암을 등반했다. 꽤 까다로운 코스를 오르는데,
그 괴짜는 여전히 반바지 차림으로 손에는 속칭 고구마장갑이라는 면장갑을 두 개씩이나
끼고 있어 바위틈 사이를 제대로 잡지 못해 쩔쩔 맸다.
전날 밤처럼 너무도 안타까운 나머지 오씨는 "장갑을 벗고 오르면 되지 않느냐"고 물어보았다.
"아참, 또 귀찮게 하는구마. 내가 지금 팔공산 병풍암을 오르고 있는 줄 아능교. 천만에! 나는 지금 아이거북벽에
붙어있는기라. 그런 곳에서 맨손으로 등반하다가는 손가락 모두 동상 걸려 잘려버릴 꺼구마는.
이런 지혜 모두들 그 위대한 산선배한테서 배웠구마는."
오씨가 팔공산에서 만났다는 그 부산 괴짜가 권경업씨였으며, 그에게 그런 산행법을 가르쳐준 이가 바로 권씨의
토왕폭 자일 파트너였던 배종순씨였다. 토왕폭 제2등에 성공한 부산 엑셀시오산악회의 배종순씨가 1986년
어느 봄날 서울로 나를 찾아온 적이 있다.
배씨는 토왕폭 등반 때의 또 다른 자일 파트너였던 김원겸씨와 아이거북벽 겨울 원정에 나설 꿈을 키우고 있었는데,
82년과 83년 이태에 걸쳐 두 번의 알프스 등반 경험이 있는 내게 알프스 현지 사정에 대해 자문하고 싶었던 것이다.
광화문의 어느 술집에서 우리는 알프스는 건성으로 건너 뛰어넘고 토왕폭 얘기를 안주삼아 강소주를 마구 들이켰다.
배종순씨는 77년 1월 토왕폭을 두 번째로 오를 때 소토왕골에서 훈련 산행을 가진 뒤 비룡폭포 위에 설치한 베이스 캠프로
돌아오다가 토왕폭 쪽에서 들려왔다는 어떤 비명 소리에 대한 궁금증을 털어놨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부산합동대원들이 짐을 나르던 중 토왕폭 초입에서
잠시 쉬고 있다. [권경업씨 제공]
[설악에 살다] (17) 배종순의 하얀산
"정말 이상한 소리였어요. 우리 부산합동대는 당시 초등에 성공한 크로니팀의 박영배씨와 송병민씨가 서로 고립되는
위기 상황이 벌어진 줄 몰랐거든요. 때문에 그 소리의 주인공이 박씨나 송씨일 거라고는 전혀 짐작조차 못했어요.
오히려 토왕폭이 크로니의 산꾼들에게 처녀를 내주던 광경을 지켜보다 말고 돌아선
에코팀의 투박한 총각들이 내지른 고함인가 했지요."
배종순씨는 토왕골 들목에 있는 비룡폭포 위쪽 베이스캠프에서 하산하는 유기수씨의 에코팀을 만났었다.
"그때 기수형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는데 아무 대꾸도 없더군요. 어디 그 말이 제대로 들리기나 했겠어요.
하지만 다른 후배들은 몹시 흥분해 있더라고요. 그들 가운데 누가 홧김에 지른 고함이 아니었을까요?"
하긴 서로 연결한 자일을 놓쳐버린 박영배씨와 송병민씨가 젖 먹던 힘까지 짜내 고함을 내질렀겠지만,
그 소리가 멀리 떨어진 비룡폭포까지는 전해지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배종순씨가 추측하는 그 '에코설'도 곧이 들리지는 않았다.
유기수씨는 바위에서 떨어질 때 '앙카'소리조차 지르지 않고 자신의 추락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무섭도록 냉정한 사람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몸이 깨져도 소리치지 않는 바위 같은 유기수씨는 속으로만 노래하는 '침묵의 산꾼'을 대표했다.
"아니! 그럼 누가 그런 소리를 질러댔단 말이오?"
유기수씨의 에코팀에서 낸 소리가 아닐 거라는 내 주장에 배종순씨는 짜증스레 반응했다.
내가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것처럼 들린 모양이었다. 그래서 내친 김에 더 짓궂게 내질렀다.
"그럼, 정말 그런 소리를 듣긴 들은 거요?"
"거참! 박형도 답답하네. 우리가 왜 없는 얘기를 꾸며내겠소.
나뿐만 아니라 그때 비룡폭포 위에 있던 부산합동대의 대원들이 다 들었다니까."
그제야 나도 고백했다.
"사실 권경업씨에게서도 그런 얘길 들은 적이 있어요."
"그렇다니까. 그럼 그게 사람 목소리가 아니라 혹시 토왕폭이 낸, 토왕의 소리가 아닐까요?
왜 얼음이 얼거나 깨질 때 비명소리를 지르잖아요. 아무튼 그 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해요.
아무래도 다시 들어보러 토왕폭으로 가봐야겠어요."
그렇게 그 소리의 정체를 궁금해하던 그 토왕폭의 사나이는 그해 겨울 아이거 북벽으로 떠났는데
다시는 토왕골을 찾아갈 수 없었다. 그는 토왕폭에서 줄을 함께 묶었던 자일 파트너 김원겸씨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죽음의 빙벽'으로 불리는 아이거 북벽을 겨울에 완등했으나, 하산길에 악천후를 만나
두 사람 모두 정상 부근 설원에서 탈진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
부산합동대의 토왕폭 제2등의 하객인지 그들이 등반을 마친 1977년 1월 25일, 두 명의 산꾼이 토왕골로 찾아 들었다.
그들은 토왕폭을 뚜렷이 볼 수 있는 폭포 맞은편 능선으로 올라가 3백m 길이로 드리워진 얼음기둥을
서너 시간 동안 말없이 바라보고 내려갔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부산합동대원들이 짐을 나르던 중 토왕폭 초입에서
잠시 쉬고 있다. [권경업씨 제공]
[설악에 살다] (18) 마운틴빌라의 도전
하산하는 그들을 바라보며 권경업씨는 그런 상념에 잠겼었다.
권씨의 상념은 그때로부터 정확히 1년 앞을 내다본 통찰이었다.
장경덕 대장이 이끄는 서울고 산악부 OB회인 마운틴빌라의 토왕폭 등반대 9명은 크로니팀이 토왕폭을 초등한 지
꼭 1년 만인 1978년 1월 11일 토왕골로 들어갔다. 한 해 전 권경업씨가 만난 두 산사나이들은
마운틴빌라팀의 정찰대원이었던 것이다.
12일 토왕폭 하단 아래쪽에 베이스를 치고 장경덕.최영규 대원이 오후 4시쯤 등반을 시작해 동대 테라스까지
진출한 후 자일을 고정시켜 놓고 캠프로 돌아왔다. 그 이튿날 오전 9시30분 등반을
재개한 두 대원은 오후 4시쯤 하단 등반을 끝냈다. 놀라운 속도였다.
1월 15일, 전날 상단 80m까지 설치해둔 자일을 타고 최영규.김기환 대원은 오전 8시30분쯤 상단 등반에 들어갔다.
그들은 재빨리 움직여 오후 4시쯤 1백10m 지점에 세번째 테라스를 깎았다. 이제 위쪽으로 남은 토왕빙벽의 길이는 20여m에 불과했다.
뒤쪽을 맡은 김기환 대원을 제3 테라스로 올려놓고서 최영규 대원은 어둠 속의 토왕폭을 줄기차게 올랐다.
오후 11시30분까지 확보를 보고 있던 김대원의 손에서 자일은 계속 위쪽으로 빠져나갔다. 그 자일 끝을 맨 최대원의
위쪽으로 토왕은 정수리 부분 7m 정도를 남겨 두고 있었다.
토왕폭 완등의 고빗사위를 완전히 넘어선 것이다. 그 고빗사위가 끝나는 지점에 뿌리를 내린 나무 한 그루가 앞선
최대원의 눈에 들어 왔다. 최대원은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듯한 그 나무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그 나무를 잡고 밑둥의 굵은 우듬지에 확보줄만 걸면 초등과 2등 때 12일씩이나 걸린 등반시간을 나흘로 줄이는 기록을
세우며 토왕폭 3등의 영광을 손에 쥐게 될 터였다. 하지만 그 순간 '아악!'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밑에서 확보를 보고 있던
김대원의 손에 잡힌 자일이 어둠 속으로 마구 빠져나갔다. 나무를 향해 나아가던 최대원의 해머가 완전히 박히지 않은
눈더미에서 빠져나오는 바람에 최대원이 그대로 떨어진 것이었다.
30여m 밑으로 떨어지던 최대원은 김대원의 필사적인 확보로 제3 테라스 아래쪽 5~6m 지점에서 멈춰
외줄에 매달리게 됐지만 추락 도중 양쪽 발목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김대원은 안간힘을
다해 부상한 최대원을 테라스로 끌어올렸다.
테라스의 두 대원은 하강하기로 했다. 김대원이 먼저 제2 테라스로 내려섰다. 하지만 뒤이어 내려온 최대원은
부러진 발목 때문에 제대로 하강하지 못해 자일을 엉키게 만들었다. 그 바람에 두번째 테라스로 내려서지 못하고
빙벽에 꼼짝없이 매달리게 됐다. 그것으로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끝났다.
토왕폭으로 골짜기의 물을 몰고 가는 함지덕 위로 찬 조각달이 걸리고, 사위는 조용해졌다.
다만 초조한 시간만 흘렀다. 날이 밝으려면 다섯시간 정도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섭씨 영하 16도로
곤두박질친 설악의 날씨는 구조대에게 해 뜨기를 기다릴 만한 짬을 주지 않았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토왕폭 빙벽 하단부 동대 테라스를 향해 오르고 있는
권경업씨의 뒤에서 김원겸씨가 밧줄을 잡아주고 있다.
[설악에 살다] (19) 최영규 대원 구출기
머뭇거릴 여유가 없다고 판단한 장경덕 대장은 때마침 토왕폭 하단을 등반하고 야영 중이던 서울 봔트클럽의 최영국 대원과
마운틴빌라의 이건성.이만영 대원을 데리고 오른쪽 능선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층 가까워진 왼쪽 빙벽에서 새어나오는 김대원의 신음이 구조대원들의 가슴을 갈가리 찢었다.
"경덕이형! 손이 썩어들어가요. 빨리 구해줘요."
다른 대원들은 중단에 파놓은 설동(雪洞) 위쪽까지 나아가 조난당해 토왕의 빙벽에 매달린 김기환.최영규 대원에게 소리쳤다.
"기환이형, 영규형! 나 의근이야. 자지마. 자면 안돼. 손발을 계속 움직여!"
최대원은 혼수상태에 빠져 반응이 없었고, 김대원은 침착하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설명한 다음 요구사항을 말했다.
오전 4시30분쯤 장대장은 조난 대원들의 졸음을 쫓아 주려고 서울고 교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낮고 조용한 음률의 목소리가 토왕골로 퍼져 나갔다.
"인왕의 억센 바위…."
아래쪽 설동에서도, 빙벽의 최대원도 따라 불렀다. 어둠 속 토왕폭은 그들의 노래 소리로 가득 찼다.
장대장의 눈에서는 별빛을 받은 눈물이 쉼 없이 흘러내렸다. 그 별빛으로 반짝이는 눈물을 보는 순간
불가사의한 힘에 휩싸인 장대장은 허리까지 빠지는 눈더미를 헤치며 정신없이 정상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전 7시쯤 정상에 닿은 장대장은 40m짜리 자일 4동을 연결해 먼저 김기환 대원을 끌어올렸다.
4시간 30분 동안의 격렬한 몸놀림 끝에 네 명의 구조대원은 김대원의 얼굴이 토왕폭 상단 설사면 위로 떠오르는
볼 수 있었다. 생명의 불꽂이 사그라져가던 그 얼굴을 얼싸안은 토왕폭 사나이들의 눈은 격정으로 이글거렸다.
점심 때쯤 최영규 대원도 구조돼 정상으로 옮겨졌다. 최대원의 왼손은 심한 동상에 걸려 있었고,
양쪽 발목은 부러져 40도 정도 안쪽으로 꺾여 있었다. 그곳에서는 신발을 벗겨 볼 수도 없었다.
오후의 햇살이 걷히자 기온은 더욱 떨어졌고, 잠잠하던 토왕골은 다시 거센 바람에 휩싸였다.
그날 저녁무렵에야 최대원이 중단 설동까지 무사히 옮겨진 것을 확인한 장대장은 김대원을 부축해 골짜기로 들어섰다.
토왕은 이미 비정한 산으로 변했고, 바람결은 냉혹했다. 하지만 그 바람과 추위도 토왕폭 사나이들을 얼릴 수는 없었다.
오후 10시30분쯤 중단 설동에서 김대원은 먼저 내려온 최대원과 재회했다.
이튿날 에코클럽의 박일환씨, 광주서 올라온 바자울산악회의 토왕폭 정찰대, 동굴사진가 석동일씨 등의 도움으로
하단 아래로 옮겨진 최대원은 곧장 서울 백병원으로 후송됐다. 마운틴빌라 회원인 권철수 정형외과장의 집도로
최대원은 동상 걸린 오른쪽 발가락 모두와 왼손 약지 한 마디를 잘라냈다. 마운틴빌라팀의
속도 등반은 그렇게 미완성으로 끝났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윤대표씨가 1999년 여름 북한산 선인봉 하늘길을 오르고 있다.
[사진작가 손재식씨 제공]
[설악에 살다] (20) 돈키호테 손칠규
손칠규씨는 피아노를 팔아 등산장비를 샀다. 이는 등산장비를 팔아 피아노를 샀다는 것보다도 상식 밖의 일이다.
손씨의 행위는 가계 형편상 피아노를 팔아 등산장비를 살 여유도 없는 사람이나 등산장비를 팔아 피아노를 구입하는 사람,
양쪽 모두를 약오르게 만든다. 그래서 일까. 이웃에 살던 미국인 선교사가 남기고 간 외제 피아노였기에 그걸 팔아
이탈리아제 돌로미테 이중 등산화와 프랑스제 샤를레 모제 피켈.아이젠 등의 빙벽 등반장비 일체를 세상에서
가장 좋다는 외제로만 사서 산으로 간 날 그는 선배들로부터 흠씬 두들겨 맞았다.
그가 외제 빙벽 등반장비로 중무장하고 찾아간 곳은 대구 팔공산이었는데, 선배들은 도대체 얼음도 없는 팔공산에서
그런 장비들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손칠규씨를 마구 나무랐던 것이다.
손씨는 선배들로부터 맞아 생긴 몸의 상처보다 마음 속에 키우고 있던 토왕폭 등반에 대한 열정이 상처를 입었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아주 서러웠다. 대구 왕골산악회의 회원으로 발군의 클라이밍 실력을 가졌던 그는 당시 쟁쟁한 산꾼들의 꿈인
토왕폭 초등을 이루겠다는 야심을 키우고 있었다. 피아노와 바꿔치기한 외제 빙벽 등반장비들이 팔공산과는 궁합이
제대로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안 손씨는 남들이 들으면 농담이라며 웃고 말 기발한 생각을 하게 됐다.
당시 그의 집에는 커다란 과일 저장창고가 있었다. 손씨는 그 창고의 벽을 얼리고,
또 얼음을 쌓아 다양한 형태를 갖춘 빙벽 훈련장을 만들었다.
토왕폭 초등자를 꿈꾸며 그는 매일 창고 속에서 피켈을 휘두르며 얼음을 깨뜨려 놓았다.
그러나 겨울산간학교(한국등산학교의 전신)에서 배운 '피올레 캉'이니 '피올레 라마세'니 하는 프랑스식
오리걸음을 연습하기에 빙벽이 너무 가팔랐다. 그래서 이 엉뚱한 사나이는 더욱 황당한 생각을 하게 됐다.
아이젠을 신고 집 마루에서 프랑스식 오리걸음을 흉내냈다. 그 바람에 마룻바닥이 온통 울퉁불퉁해졌다.
마루에 엎어져 피켈을 휘두르며 프런트 포인팅까지 연습한 탓에 마루는 곧 부서졌지만,
그의 마음 속에서는 토왕폭이 곧은 소리를 내며 곧게 일어서고 있었다.
그의 이는 모두 의치(義齒)다. 오토바이 타기와 암벽 등반, 그리고 스킨 스쿠버 다이빙 등 이가 부러질 짓만 골라서
좋아했기 때문이다. 고교 때부터 즐긴 오토바이 질주로 이가 모두 부서졌는데, 그 뒤 다이빙을 하다가
물 속 바위에 얼굴을 들이받는 바람에 새로 끼운 앞니가 다시 몽땅 내려앉고 말았다.
손씨의 취미에서 사진을 빼놓을 수 없다. 남들은 가질 엄두조차 못
냈던 핫셀 블라드를 '소품으로 쓴다'고 큰 소리쳐 다른 사진쟁이들의 간을 뜨끔하게 만들기도 했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토왕폭 등반을 마친 손칠규씨(左)와 윤대표씨가 기념촬영을 했다.[허욱씨 제공]
[설악에 살다] (21) 손칠규의 열정
손칠규씨는 제대한 뒤 대학시절 전공(작곡)을 살려 포항에서 음악교사를 한 적이 있다. 그땐 사진 찍는 재미로 지낼 만했다고 한다.
시험 시간에 커닝하는 아이들의 표정, 매질하는 어느 여선생의 모습. 봄날 교무실에서 입 벌리고 침 흘리며 잠든 노처녀
수학선생의 표정 등을 카메라에 몰래 잡아 대문짝 만하게 인화해 음악실에 걸어 뒀었다.
그러다가 토요일만 되면 요란한 파열음을 내는 오토바이를 몰고 대구 근교의 산으로 사라져버리는
이 괴짜 음악선생은 침 흘리며 잠든 여선생의 사진이 화근이 돼 인연없는 교육계를 떠났다.
그리고는 자신의 작은 토왕폭이 된, 얼음 창고와 마루에서 토왕폭을 오르기 위한 등반훈련을 거듭했다.
손씨는 1977년 12월 말 설악의 토왕폭으로 정찰등반을 떠났다. 같은 해 1월에 크로니산악회와 부산합동대에
초등과 제2등의 영예를 잇따라 내준 토왕폭이었지만. 손씨는 7년 가까이 키워온 토왕폭 등정의 꿈을 접을 수 없었다.
토왕골에 들어가 토왕폭을 요모조모 뜯어보던 중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하산하게 됐다.
대구의 집으로 가보니 어이없게도 자신의 혼수함이 알지도 못하는 어느 처녀의 집에 가 있었다.
그는 설악에서 바로 내려온 산행 차림으로 배낭을 진 채 그 처녀의 집으로 가서 신랑으로서 인사를 올릴 수 밖에 없었다.
손씨의 부모는 종손인 그를 대학 재학 시절부터 결혼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아들이 산으로 도망가버리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이번에는 아들이 설악의 토왕골에 들어가 있는 틈을 노려 두 집안의 어른들끼리 기습적으로 합의,
이 문제아의 결혼을 성사시킨 것이었다.
그는 숙제하는 기분으로 결혼식을 치렀다. 신혼여행은 한라산으로 갔다. 한라산에서 며칠을 함께 보낸 뒤 신부를
대구 근교의 처가에 맡겨두고 78년 1월 말 곧장 설악으로 달려가야만 했다. 토왕골에는
토왕폭을 함께 오르기로 약속한 악우회의 윤대표씨 일행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손씨는 집안뿐 아니라 대구 산악계에서도 단단히 찍힌 문제아이자 이단자였다. 짐 잘 지고 밥 많이 먹고 술 또한
잘 마시면 선배들에게서 좋은 후배 나타났다고 귀염받는 분위기 속에서 손씨는 술을
입에 대지도 않는 데다 남들은 걷기 산행에 열을 올릴 때도 바윗길만 고집했다.
또 그는 이중섭이 그린 바닷게 등짝처럼 생긴 키슬링이라는 대형
배낭 대신 날렵한 외제 배낭을 메고서 외제 신발을 신고 바위만을
쳐다보고 다녔으니 산선배들의 눈 밖에 나는 건 당연했다. 특히
오토바이를 타고 팔공산 바윗골까지 달려가 암벽 등반을 하는
바람에 산선배들에게서 미움을 톡톡히 샀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이진우(左).신성삼씨가 캠프에서 토왕성 빙폭을 등반하고 있는
윤대표.손칠규씨를 지켜보고 있다. [백승기씨 제공]
[설악에 살다] (22) '대표 산쟁이' 윤대표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설악의 토왕골로 달려간 손칠규씨는
1978년 2월 2일 악우회의 토왕폭 등반대와 합류했다.
신성삼.임근성.백승기.이진섭.이진우 대원의 지원을 받은 악우회의 윤대표 대장은 대구 왕골산악회의
손칠규 대원과 자일을 함께 묶고 다음날 오전 11시30분 토왕폭 하단에 붙었다.
하단의 동굴을 거치지 않는 왼쪽 루트를 통해 먼저 오르기 시작한 윤대장은 오후 1시 무렵 동대테라스에 올라섰다.
그는 77년 2월 악우회 후배인 유한규 대원과 토왕폭에 도전했을 때 동대테라스에서 심한 낙수(落水)를 만나 돌아서고 말았었다.
그때 유대원은 발톱을 여섯개나 뽑아야 하는 심한 동상에 걸렸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물줄기가 동대테라스의 오른쪽으로
트여 다행히 등반루트에는 낙수가 심하지 않았다.
뒤따라 오르던 손대원은 오후 4시쯤 하단에 완전히 올라섰다.
4시간 30분 만에 하단 등반을 끝냈다.
2월 4일 오전 11시40분. 윤대표 대장과 손칠규 대원은 상단 등반에 들어갔다.
토왕폭 상단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물이 흥건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윤대표씨라면 대표라는 이름 그대로 국가 대표급 산악인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어쩌자고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이라도 따게 되면 낳고 이름 지어준 부모님을 호강시켜드릴 수 있는
인기 스포츠 종목의 '대표'가 아니라, 도대체 밥이 나오길하나 돈이 되길하나 부른 배마저 쉽게 꺼져버리고
마는 그놈의 산에 미쳐버린 '등산대표'가 되고 말았을까.
아버지의 이 같은 탄식은 아들의 이름을 '대표'로 지은 자업자득인지도 모른다.
윤대표의 아버지 윤선씨는 윤대표라는 이름을 오래 전부터 기억하고 있었다.
윤선씨가 알고 있는 윤대표라는 이름은 자랑스러운 대표적인 대장부였다. 아버지는 그런 대표적인 장부가
되라는 마음에서 아들의 이름을 대표라고 지었다. 아버지가 바랐던 '장부대표'와 지금의 산대표가 된 윤대표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윤대표는 체격은 작은 편이나 '겁없는 산사나이'라는 이미지에 어울리는 외모를 지녔다.
한눈에 야무진 외골수임을 느끼게 한다. 검고 반듯한 얼굴을 가로지르는 짙은 눈썹은 당겨진 활시위에 놓인 화살 같은 긴장감을 준다.
윤대표는 산 외에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만큼 결벽증을 가진 '윤대표의 산'이다.
그에게는 오직 산만 산이다. 삶의 다른 국면을 산으로 대체하는 산쟁이들이 있지만 윤대표는 그마저 거부한다.
술도 담배도 모른다. 그에게 술과 담배는 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수도 적다. 말도 그에게는 산이 아니다. 입으로 산을 오르는 사람을 보면 그렇게 얄미울 수 없단다.
파트너란 어떤 벽을 겨누고 뜻을 같이 했을 때 함께 오르는 동료에 지나지 않는다.
친구도 산이 아닌 것이다. 그런 친구를 따라 가는 곳은 강남일 뿐, 산이 아니다. 때문에 전혀 모르는 사람과도 자일을
함께 묶을 수 있고, 그만한 파트너가 없을 때는 혼자 오른다.
그런 윤대표씨를 산에 입문시킨 사람은 친형인 윤인표씨다.
대학에서 산악부원으로 활동하던 형은 70년 고교를 막 졸업한
동생을 데리고 서울 도봉산 선인봉의 남쪽 코스를 올랐다.
'형제 산행'은 그후 3년간 계속됐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아이거 베이스캠프에서 베타호른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한
허욱.조윤희.윤대표씨(왼쪽부터). [허욱씨 제공]
[설악에 살다] (23) '시리우스' 윤대표
형과 자일을 묶고 지냈던 1973년 무렵 윤대표씨는 신문에 실린 회원모집 광고를 보고 엠포르산악회에 가입했다.
엠포르산악회에서 최고의 공격수로 떠오른 그는 어느 날 서울 합정동 로터리를 지나다 그토록 갖고 싶었던
스위스제 헹케 비브람(겨울용 중등산화)을 신고 있는 사람과 우연히 마주쳤다.
윤씨는 용기를 내어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 비브람의 주인이 악우회 회원 백승기씨였다.
그 인연으로 윤씨는 1976년 10월 악우회에 몸담게 됐다.
악우회 회원들과 77년 도봉산 선인봉의 모든 코스를 연결해 오르는 연장등반에 성공했고, 이듬해에는 설악산 선녀봉을 초등했다.
그리고 그해 겨울 손칠규씨와 자일을 함께 묶고 토왕폭 제3등에 도전한 것이다.
무예의 고수처럼 세 자루의 아이스 해머를 적절히 휘두른 윤씨는 78년 2월 4일 오후 4시쯤 토왕폭
상단 3분의 2 지점에 자리잡은 테라스에 올라섰다. 뒤이어 손칠규씨는 5시15분쯤 테라스에 닿았다.
그 테라스 위쪽의 이른바 '얼음 골짜기'에서 윤씨는 토왕폭 등반의 최대 고비를 맞았다. 얼음 골짜기는 암벽 위를
살얼음으로 살짝 도배해 놓은 듯했다. 그 얼음층이 너무 얇아 아이젠과 아이스 해머의 이빨을 제대로 물어주지 못했다.
그 골짜기에서 진퇴양난에 빠진 윤씨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피로와 허기로 지쳐가는 몸으로 사지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 치는 토왕폭의 사나이를 두고 해는
함지덕 머리 위로 훌쩍 넘어가 버렸다. 동시에 기온이 뚝 떨어졌다.
두 손의 감각과 의식을 잃어가던 윤씨는 푸석푸석한 얼음에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순간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위기 상황임을 몸에 일깨워주려고 윤대장은 자신의 손가락을 마구 깨물었다.
자꾸만 허물어져 내리는 도배 빙벽이어서 아이젠의 앞이빨을 박는 프런트 포인팅 기술이 통하지 않았다.
때문에 윤씨는 킥 스텝으로 억지 발디딤을 만들거나 양 무릎을 얼음벽에 바싹 붙이며 어둠 속의
얼음 골짜기를 조금씩 조금씩 올라가야 했다.
오후 7시40분, 그렇게 사투를 벌여 얼음 골짜기를 무사히 빠져나온 윤씨는 뒤따라 올라온 손씨를 정상에서 뜨겁게 껴안았다.
1박2일에 걸쳐 12시간30분 만에 이룬 토왕폭 빙벽 제3등이었다.
이 등반에서 토왕폭 빙벽 3백m 구간을 앞장서 오른 윤씨는 1년 뒤인 79년과 80년 두차례에 걸쳐 당시 한국산악계
최대 과제였던 알프스 3대 북벽(아이거 북벽.마터호른 북벽.그랑드 조라스 북벽)을 한국
산악인으로는 처음으로 등정하는 개가를 올렸다.
그 위업의 자일 파트너였던 허욱씨와 연계시켜 윤씨가 산악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나는 겨울 하늘에서 찬란히 빛나는 시리우스라는
별에 비유한 적이 있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보우회 회원들이 1971년 여름 울산암 중앙벽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했다. 오른쪽 앉아 있는 사람부터 시계방향으로
홍석하.김진교.정종욱.최효중.이강오씨. [홍석하씨 제공]
[설악에 살다] (24) 70~80년대 두 별
큰개자리의 으뜸 별인 시리우스는 고대 이집트에서 태양력을 탄생시킨 기준 항성이었다.
또한 그리스에서는 아킬레스같이 넓은 가슴을 지닌 청년들을 징집할 때 그들의 시력을 측정하는 별로 유명해졌다.
윤대표씨와 허욱씨는 19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한국 산쟁이를 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별로 떠오르게 했다는
점에서 찬란한 시리우스다.
그리고 세계적 클라이머의 모암(母巖)인 알프스 3대 북벽을 함께 오름으로써 한국 산꾼의 클라이밍 기량을 클라이머
수준을 평가하는 국제적인 잣대로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그들은 분명 태양력의 기준이 된 시리우스다.
밝은 눈의 그리스 청년은 시리우스가 두 개의 별임을 볼 수 있었다. 시리우스가 연성(連星)인 까닭이다.
시리우스는 하나의 별에 또 다른 별이 끼고 돌아 더욱 빛나는 두 개의 별이다.
윤대표라는 별을 허욱이라는 별이, 또 허욱이라는 별의 둘레를 윤대표라는 별이 알피니즘을 축(軸)으로 삼아
설악과 알프스에서 미친 듯 돌아갈 때, 두 별은 시리우스처럼 하나의 별로 한국 산악계에 찬연히 빛났다.
두 별 사이에 구심력과 그 반대 방향의 원심력이 팽팽히 맞설 때만 연성 현상이 나타난다.
그 당기는 힘과 미는 힘만큼이나 윤씨와 허씨의 개성은 판이했지만 서로의 힘이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연성으로 공전하면서 공존할 수 있었다.
도시락 싸들고 학교를 다녔던 사람들 모두에게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반찬이 여러 가지 있을 때 어떤 것부터 먹느냐?"
순서없이 젓가락 놀리는 사람도 있지만 고집있는 친구는 도시락 비우는데도 나름대로 순서를 갖고 있다.
"그야 맛있는 것부터 먹지요."
허욱씨가 선뜻 답했다.
"…맛없는 것부터…."
윤대표씨의 조심스러운 대답이었다.
'까오기'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허씨는 여러 면에서 파트너 윤씨와 대조적이다.
윤씨 앞에서는 괜히 주눅들던 산악인들도 허씨를 만나면 봄바람에 녹는 눈처럼 부드러워진다.
허씨는 덩치가 큰 편인 데다 '완력등반의 1인자'라는 소문에 어울리는 체력을 가졌지만 얼굴 생김새는 그렇지 않다.
순한 느낌을 주는 이목구비가 검고 굵은 안경테 위로 부드럽게 그려지는 게 허씨의 초상이다.
윤씨가 고주파의 강렬한 성격을 지닌 데 비해 익살스러운 떠버리 허씨는 큰 진폭의 인간성을 지녔다.
설악을 좋아하기는 윤씨 못지않아, 설악의 여러 암릉과 암벽에는 초등자로서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허씨는 대학 입학 후 보우회(보성고 산악부 OB회)의 홍석하(현 월간 '사람과 산' 발행인).최효중.이강오 선배들과 함께
설악의 여러 암벽을 누비며 보우회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72년에는 설악의 곰길을 초등했고 73년에는
설악의 공룡능선을 암릉릿지로 개척 등반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설악의 울산암에 여러 개의 등산로를 열기도 했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윤대표씨와 허욱씨는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알프스의 아이거
정상을 밟았다. 사진은 아이거 정상의 허씨 모습.
[설악에 살다] (25) 아이거 북벽 등반
허욱씨는 결코 계산하지 않는다.
먹을 게 있으면 맛있는 것부터 먹고, 술이 있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마신다.
히말라야의 8천m급 거봉인 마칼루 원정 땐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워 말썽을 일으킨 적도 있다.
바둑이나 음악감상 등 조용한 취미를 가진 윤대표씨에 비해 그는 스쿠버다이빙이나 윈드서핑 같은 모험 레포츠를 즐긴다.
1979년 아이거 북벽 등반 때 다른 대원들은 가부좌를 한 선승같은 자세로 좋은 날씨를 기다리고 있는 중에도 그
린델발트로 내려가 동네 술꾼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놀았다.
허씨는 큰 등반을 끝내고 돌아오면 석달간은 술을 퍼마시는 기간으로 정해놓았다.
다리 부러진 강아지처럼 고래고래 고함지르며 석달 정도 매일 술을 마셔대야 고산증세로 이상해졌던 몸이
정상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언제나 산만 생각하며 훈련하는 친구들과 술 마신 몸으로 등반해도 그들에게 뒤지지 않는 것이 신기해
가끔 누군가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싶어지기도 한단다.
그는 위축감을 주는 산은 가능하면 생각하지 않는다. 떠올리면 괜히 불편해지기 때문에 떠나기 얼마 전쯤,
어쩔 수 없을 때에야 가야 할 산을 떠올린다. 등반할 산의 사진들을 방에 붙여 놓고
루트의 구석구석까지 머리에 입력시켜두는 윤씨와는 이토록 다르다.
허씨는 실제로 벽에 붙을 때까지는 산을 잊으려고 애쓴다.
걱정한다고 구름이 벗겨지거나 오던 비가 멈출 리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벽에서는 되도록 즐거운 일만 생각한다. 전쟁터에서도 그렇다는데,
그럴 때는 역시 여자를 생각하는 게 가장 즐겁단다.
윤씨와 '오월동주'식으로 함께 오른 아이거 북벽에서의 일이다.
오나라의 맹장 허욱이 월나라의 용장 윤대표에게 물었다.
'죽음의 벽'이라는 아이거 북벽의 제2 설전에서다.
"애인 있어?"
전쟁터 같이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북벽의 사지에서, 더욱이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 '애인'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오나라 장수가 사뭇 인간적인 목소리로 분위기를 풀려고 했던 것이다.
먼 곳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월나라 장수도 인간인 이상, 이런 상황에서는 애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만약 애인이 없더라도 애인 비슷한 울림을 주는 인간적인 말로 응수해 올 것이라고 오나라 장수는 기대하고 있었다.
"없어!"
월나라 대표장수의 대답은 뜻밖에 너무도 간단했다. 그 짧은 답에 흠칫 놀란 나머지 오나라의 허장수는
적의 기습으로부터 공주를 보호하려는 호위대장처럼 인간적으로 풀어놓았던 분위기를 곧바로 수습하고 말았다.
그 후부터는 서로 아무런 대화가 없었다. 그저 자벌레의 머리와 꼬리처럼 헤어졌다 만날 때마다 대화를 하는 대신,
거둬들인 카라비너와 하켄 등을 전해주었을 뿐이다.
그렇게 이뤄진 허씨와 윤씨의 아이거 북벽 등반이었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 1970년대엔 겨울 빙벽등반 장비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사진은 부산합동대의 권경업(左).이정호씨가 스케이트날을 갈 듯
휴대용 브라인더로 아이젠을 갈고 있는 모습.
[설악에 살다] (26) 돌아온 사나이들
서울고 산악부 OB회인 마운틴빌라의 장경덕 대장과 악우회의 윤대표 대장은 돌아온 토왕폭 사나이들이다.
1978년 토왕폭을 며칠 앞뒤로 등반했던 두 리더는 79년 2월 각자 등반대를 이끌고 다시 토왕골로 들어갔다.
공교롭게도 1년 전처럼 등반시기가 겹쳤다.
마운틴빌라는 78년 1월 토왕폭 도전 때 최영규.김기환 대원을 죽음의 문턱까지 내몰았던 토왕폭 빙벽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이번에는 우측 벽을 노리고 다시 토왕골로 들어온 것이다.
당시 최.김 대원은 토왕폭 상단의 정상을 불과 7m 가량 남겨두고 후퇴했었다.
장경덕 대장은 79년 2월 3일 김상택.김상규.이지원.송원기.이해관.신용민.김명선 대원과 함께 서울 동마장터미널에서
속초행 버스에 올랐다. 10년 만의 폭설로 설악동에는 어른 키가 잠길 정도의 눈이 쌓여 있었다.
주민들은 1백80cm는 쌓였을 것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토왕골로 들어서니 그들이 오르려는 토왕폭 우측 벽에는 뜻밖에
개미처럼 보이는 산꾼들이 붙어 있었다. 악우회의 윤대표 대장이
백승기.유한규 대원과 함께 78년에 이어 다시 빌라팀의 목표인
토왕폭 우측 벽을 등반하고 있었던 것이다.
악우회의 세 명장은 우측 벽 하단의 정상을 40여m 앞두고 맹렬한
기세로 오르고 있었다. 장대장이 보기에 악우회팀은 4~5일 전에
등반을 시작한 것 같았다.
토왕폭의 빙벽과는 달리 암벽인 우측 벽은 팀 간에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한다면 여러 팀이 동시에 붙을 수도 있다. 이에 따라 장대장은
앞에서 오르고 있는 악우회팀에 개의치 않고 등반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장대장이 택한 루트는 토왕성 빙벽과 악우회팀이 등반하고 있는
코스 사이의 중간 위치에서 하늘을 향해 곧장 뻗어 있었다. 마침
토왕폭에는 서울의 서강대 산악부팀도 등반 중이었다.
그래서 세팀의 토왕폭 사나이들은 자신들이 오르고 있는 얼음과
눈과 바위만으로 이뤄진 수직세계를 알프스의 북벽이라고 생각하며 그 속으로 빠져들었다.
빌라팀은 2월 5일부터 본 등반에 들어갔다. 빌라팀이 자랑하는
톱장이 김성택 대원이 송원기 대원을 데리고 이날 50여m까지
올랐다. 그날 두 대원은 70여m 아래쪽에 설치된 베이스캠프로 내려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비박(야외에서 텐트 없이 잠자는 것)했다.
이들이 밤을 보내기로 한 곳은 엉덩이도 편안하게 붙일 바위턱
하나 튀어나와 있지 않은 바위 절벽의 한 가운데였다. 30분 정도만
내려가면 따뜻한 텐트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아이거 북벽과 같은 해외 거벽 원정을 위한 훈련으로 비박을 택했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낭만을 선택한 것이다.
선배인 김대원은 대학병원에서 레지던트로 근무하는 25세의
예비의사이고, 송대원은 22세의 대학 3년생이었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비룡폭포 위에 설치한 베이스캠프를 배경으로
토왕폭 등반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배종순.김원겸.한성진.이정희.권경업씨(왼쪽부터)
[설악에 살다] (27) 김성택과 송원기
김성택.송원기 대원은 '싱글 앵커 해먹'(양쪽으로 매다는 일반 해먹과 달리 바위 절벽이나 빙벽에서 비박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해먹)에서 잤다. 이 해먹 속에 들어가면 땅꾼 자루 속에 든 뱀처럼 몸이 도르르 말린다. 아무리 새우잠이라지만 이 때 만큼 등을 구부려야하는 새우잠은 없을 것이다.
하켄 하나만 치면 아무 절벽에서나 매달려 잘 수 있게 해주는 신장비임에는 틀림없으나 누구라도 그 해먹 안에서는 새우가 되지 않고서는 제대로 잘 수가 없다. 토왕성 우측 벽에 매단 해먹 속에 들어간 김.송대원은 밤새 새우가 돼버렸다.
아래쪽에 있던 지원조가 올려준 떡국과 차를 마시며 두 새우는 "바로 이맛이지" 하면서 멀리 동쪽을 바라보았다.
고래 싸움에 왜 새우등만 터지겠는가. 그런 싸움이 벌어진다면 등이 터지고야 말 온갖 물고기들의 고향인 동해가 새우들의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고향은 지금 먹물을 풀어놓은 듯 검었다.
동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얼굴에 닿자 고향의 거친 파도가 아가미 껍질을 스치는 것만 같았다. 바다에서보다 토왕의 벽에서 바라보는 속초의 빛이 더 찬란했다. 다음날 하늘은 여전히 맑았지만 베이스캠프는 영하 12도까지 떨어져 몹시 추웠다.
오전 5시부터 등반을 재개한 공격조는 톱(선등자)을 김성택 대원에서 송원기 대원으로 바꿨다.
그러나 첫 지점에서부터 연거푸 추락하는 바람에 송대원은 톱자리를 마운틴빌라의 '톱쟁이' 김대원에게 되돌려 주고 말았다.
역시 김대원은 '톱쟁이'답게 속도를 보였다.
점심 후, 장경덕 대장과 선용민 대원은 중단 설사면으로 설동(눈굴)을 파러 올라갔다. 서강대 등반대는 토왕폭 상단의 빙폭에
붙어 있었고, 마운틴빌라팀보다 더 오른쪽에 붙은 악우회팀은 우측 벽 상단을 40m 가량 올라가 있었다.
장대장이 설동을 타고 중단에서 내려다보니 김성택 대원이 하단 벽을 마무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김상규.이해관 대원은 설동에
머물며 저녁에 올라 올 두 공격대원을 맞이하기로 하고, 장대장은 나머지 대원들을 데리고 하단 밑둥에 친 베이스캠프로 내려갔다.
등반 세쨋날 새벽녘부터 베이스캠프의 설동에서 김명선 대원은 버너를 켜고 눈을 녹여 떡국을 끓이기 시작했다. 버너에 녹은 설동의 안벽은 무수한 물방울이 맺혀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반짝거렸다. 장대장은 떡국을 먹는 둥 마는 둥 한 뒤 바깥으로 나가 기온을 쟀다.
영하 11도였다. 아직 별빛이 초롱초롱했지만 맑았다 흐려졌다 하는 날씨가 될 것 같았다.
오전 9시쯤, 한창 상단 벽을 오르며 땀을 흘리고 있어야 할 송원기
대원이 베이스캠프로 내려왔다. 매우 풀 죽은 모습이었다.
"별일은 아니고요. 몸이 좋지 않아서…. 성택이 형이 내려가서 장대장님과 교대해 달라고 하라더군요."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1976년 1월 장군봉을 등반한 윤형규.장경덕.김성택씨(왼쪽부터)
가 비선대 이글루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윤형규씨 제공]
[설악에 살다] (28) 장경덕의 악몽
송원기 대원의 기죽은 얘기를 들은 장경덕 대장은 곧 등반 채비를 갖춰 토왕폭 중단으로 올라갔다.
빙폭을 보니 서강대팀의 톱은 이미 상단을 70여m나 올라 있었다.
탄탄한 기량의 클라이머였다. '그 정도면 별 어려움 없이 토왕폭을 완등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측 벽 상단 20m 지점의 테라스에서 김성택 대원이 장대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다음 테라스까지는 눈과 얼음이 뒤덮인 골짜기 형태의 직벽이어서 빙벽 등반 장비가 필요했다.
김대원은 비브람에 아이젠을 달고 아이스해머와 피켈을 휘두르며 오른쪽 바깥으로 울퉁불퉁 튀어나온 암벽으로 침착하게 나아갔다.
아이젠의 두 앞이빨만으로 몸의 균형을 잡으며 수직으로 일어선 빙벽을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올라간다는 것은 곡예에 가까웠다.
김대원과 장대장은 세시간의 곡예 등반 끝에 다음 테라스에 도착, 담배를 피우며 휴식을 취했다.
오른쪽 2시 방향 50여m 위쪽에 악우회의 윤대표 대장과 유한규 대원이 등반하고 있었다.
악우회의 두 정예 클라이머의 동작이 믿음직하게 보였지만, 그들이 나아가는 속도는 굼벵이 같았다.
'좌서강, 우악우'의 한가운데로 오르고 있는 마운틴빌라의 장대장은 좌청룡과 우백호를 거느리고 등반하는 것 같은 희열에 빠졌다.
테라스 위로는 아주 작은 바위틈도 찾아볼 수 없는 7~8m 길이의 직벽이 가로 막았다.
어쩔 수 없이 바위에 구멍을 뚫고 박아 넣어야 하는 볼트라켄을 사용해야 했다.
볼트는 시간 잡아먹는 귀신인가. 네 개의 볼트를 치고서야 그 짧은 직벽을 겨우 넘어섰는데 해가 함지덕 너머로 기울고 있었다.
진퇴를 결정해야 할 순간이었다.
좌청룡의 서강대팀이 먼저 하산키로 결정했다. 순탄하게 오르던 톱과 달리 뒤따라 등반하던 라스트가 거듭 추락하는 탓에 등반
흐름이 끊겼기 때문이었다. 톱을 섰던 뛰어난 청룡은 퇴각하라는 대장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하강하고 있었다.
토왕폭 빙벽 상단의 정상을 불과 40여m 남겨놓고 뒤돌아선 청룡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장대장은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좌청룡과 우백호, 그리고 그 사이로 오르던 곰은 토왕성의 벽에서 약속했다.
이 땅에서 가장 높고 가장 험한 곳에서 한 약속이지만 그 내용은 너무나 소박했다.
무사히 서울로 돌아가 청진동이나 무교동 낙지집에서 소주 한 잔 나누자는 것이었다.
"형, 이상한 상실감에 가슴이 저려요. 저들이 내려가는 걸 보니 내 속의 뭔가가 따라 내려가는 것만 같아요.
형, 그게 뭘까요?" 김대원이 장대장에게 물었다. 그러나 김대원은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담뱃불을 끈 다음 곧바로 출발했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1975년 9월 설악산 울산암 릿지 등반 중인 윤형규.이상경.김성택.
김대근씨(왼쪽부터)가 울산암 정상에서 포즈를 취했다.
[설악에 살다] (29) 야성의 토왕골
가끔 아래쪽 토왕골의 검은 골짜기로 떨어지는 큰 돌덩이와 얼음조각도 생명력을 가진 것처럼 그 순간에 "나 죽는다"는
단발마의 비명을 내지르는 듯했다. 그 무시무시한 소리에는 외과의사로서 배짱이 두둑한 편인 장경덕 대장도 간담이
서늘해져 몸서리를 칠 정도였다.
야릇한 두려움에 젖은 두 공격조는 그곳에서 10여m를 더 오른 뒤 오후 5시쯤 고정로프를 이용해 중단의 설동으로 내려갔다.
등반 7일째인 2월 8일 오전 1시쯤 악몽에 시달리던 장대장이 벌떡 일어났다. 그 기척에 잠이 깬 김성택 대원도 악몽을 꿨다고 하소연했다.
장대장과 김대원이 서로 꿈 얘기를 털어놓자 곁에 누웠던 김상규 대원이 '곰들의 개꿈'이라고 놀려댔다.
연유를 끓여 마시고 토왕폭의 사나이들은 다시 잠을 청했지만 누구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폭설이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 탓이었을까. 장대장은 날씨 걱정으로 뒤척이며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장대장은 김대원과 함께 오전 9시쯤 전날 고정시켜둔 자일을 타고 테라스로 올라갔다.
그들이 설동을 나서기 한 시간 전쯤에 악우회의 윤대표 대장과 유한규 대원은 우측 벽 가장자리에 붙었다.
우백호들도 이날 안에 우측 벽을 넘고야 말겠다고 결심했으리라.
테라스에서 김대원이 또 앞장섰다.
믿음직한 김대원의 등반 모습에 장대장은 늦어도 내일까지는 정상에 설 수 있겠다고 말했다.
만약 일기예보대로 폭설이 내리더라도 벽에 매달린 새우처럼 비박을 한 뒤 다음날 정상에 서리라는 결의를 다졌다.
겨울만 아니라면 가볍게 오를 수 있는 80도 경사의 절벽이 이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한겨울이다. 업보처럼 무거워진 피켈을
휘두르며 바위에 얼어붙은 얼음을 조금씩 조금씩 까내야 했다. 이끼.흙.눈더미가 뒤엉킨 바위 틈새로 긴 앵글하켄을 막무가내로
박아넣는 폭력도 휘둘러야했다. 그러면서 김대원은 쉼없이 올라갔다.
낮 12시 무렵 장대장은 컨디션을 회복한 송대원과 교대했다. 송대원에게 김대원을 지원토록 하고 장대장은 일단 중단으로 내려갔다가
우측 능선으로 우회해 먼저 토왕폭의 정상에 올라가 나중에 올라올 공격조를 지원하기로 했다.
설동으로 내려선 장대장이 식량과 장비를 우측 능선으로 옮기고 있던 중에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막탄이 터진 것 같은 짙은 산안개(산꾼들은 이런 안개를 '개스'라고 부른다)가 몰려왔다.
개스는 시야를 완전히 가리는가 하면 어느 순간 불어온 바람에 무대 장막 걷히 듯 날아가 버렸다.
그러다가 도둑고양이처럼 불쑥 나타나 다시 시야를 가리곤 해 장대장은 가슴을 졸였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1976년 1월 설악산 산행을 마친 윤형규(左).김성택씨가
설악산 입구에서 포즈를 취했다. [윤형규씨 제공]
[설악에 살다] (30) 환상의 토왕골
개스(산안개)와 바람은 그렇게 엎치락뒤치락 씨름판을 벌이며 아가씨 마음 같다는 산 날씨의 변덕을 과시했다.
"어쩔 것인가? 후퇴냐 전진이냐?"
고심 끝에 장경덕 대장은 벽에 붙은 김성택 대원과 상의했다.
김대원은 "지금 올라가나 어두울 때 내려가나 위험한 건 마찬가지죠"라며 계속 등반하겠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장대장은 장비와 식량을 빨리 정상으로 날라야만 했다.
주위는 이미 어둑어둑했다. 해가 함지덕 머리 위로 넘어간 데다 개스가 잔뜩 몰려왔기 때문이다.
그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찰그랑찰그랑하는 소리가 났다. 끝까지 등반하겠다던 악우회의 윤대표 대장과 유한규 대원이
베이스캠프로 돌아가기 위해 내려가고 있었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몸에 달고 있는 온갖 쇠붙이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논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황소의 목에 달린 요령소리처럼 울렸던 것이다.
얼마 후 장대장을 그토록 애태우던 개스가 완전히 걷혔다.
시야가 탁 트였을 때 장대장은 전날 벽에서 김대원에게 젖어들었던 상실감의 정체를 알게 됐다.
그것은 지금 토왕골을 환하게 비추고 있는 보름달이었다.
그랬다. 달빛 받은 토왕골에는 김대원의 해머질 소리와 그가 내뿜는 거친 숨소리가 하나의 음악이 돼 울려퍼졌다.
그밖의 모든 소리들-토왕폭에 매달린 고드름질 얼음이나 그 위를 흐르는 실뱀같은 물줄기나 바람이나
별빛 등-은 그 음악을 제대로 듣기 위해 숨을 죽였다. 그 순간 장대장은 달빛에 빛나는 소리의 선율을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토왕폭에서라면 수십리 밖에서 가늘게 떨리는 땅의 숨결을 들을 수 있는 하등동물처럼 사람도 시공을 뛰어넘어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돼 노래하는 그 순수음악을 듣고 볼 수 있게 된다.
지금 토왕폭의 사나이들은 원초적 감성의 시간대에 놓여 있다.
지원품이 든 배낭을 지고 장대장은 달빛을 받으며 우측 능선을 올랐다.
이해관 대원과 그는 오후 8시쯤 토왕폭 우측 벽 상단에 이르렀다.
김대원과 송원기 대원의 이마에 단 랜턴에서 흘러나온 불빛이 장대장의 왼쪽 편에서 깜빡거리고 있었다.
김대원도 장대장의 이마등에서 비치는 노란 불빛을 보고 "경덕이형, 우리가 먼저 올라갈거요. 천천히 와요"라고 소리치며 올라왔다.
장대장은 더욱 서둘렀다. 공격조의 김대원과 송대원보다 먼저 토왕폭 정상에 올라가 그들의 언 몸을 녹여줄 따듯한
차를 끓여 놓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앞길이 순탄치 않았다.
정상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설사면이 눈사태에 휩쓸리면서 드러난 바위면이 몹시 미끄러웠다.
그 사이사이에 뿌리가 드러난 나무에만 의지한 채 오르느라 장대장과 이대원은 고초를 겪었다.
숨을 헐떡이며 그들은 오후 9시30분쯤 토왕폭 상단 정수리에 올라섰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김성택씨가 1975년 가을 설악산 울산암을 등반하고 있다.
오른쪽 봉우리는 집선봉이다.
[설악에 살다] (31) 사라진 산사나이들
하지만 그곳에는 김성택.송원기 대원이 없었다.
장대장은 '내가 먼저 왔구나. 차 끓일 시간이 있겠는걸'하고 생각하며 안도했다.
소나무에 고정시킨 자일을 타고 장대장은 공격조가 올라올 토왕폭 우측 벽의 최상단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는 63빌딩 스카이라운지에서 내려다보이는 한강처럼 설동을 팠던 중단의 설원과 눈 덮인 토왕굴이 달빛에 훤히 드러났다.
다만 김.송대원이 등반을 마무리하느라 애쓰고 있을 우측 벽 상단만 먹물 먹은 듯한 어둠에 잠겨 의뭉스레 숨어 있었다.
그 신비스러운 벽 쪽에서는 어쩐 일인지 김대원의 해머질 소리도 들려오지 않고, 송대원의 이마에서 반짝이던 랜턴 불빛도 비치지 않았다. 어둠 속을 뚫어지게 쏘아보던 장대장의 머릿속에 돌연 불안한 예감이 스쳤다.
잃어버렸던 보름달을 다시 찾은 후배들이 벽에 없었기 때문이다.
장대장은 호흡을 가다듬고 후배들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성택아. 원기야 어딨냐! 하이 빌라! 대답 좀 해봐! 안 들려! 하이 빌라! 성택아, 원기야 대답 좀 해!"
목까지 피가 올라오도록 불러봤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렇게 고함치던 장대장은 멀리 떨어진 베이스캠프 주변에
불빛이 어른거리는 것을 봤다. '공격조원들인가'하고 생각한 장대장은 다시 힘껏 고함을 질렀다.
그 절규가 하늘을 움직였는지, 3백50여m 아래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불빛의 주인공들은 김.송대원이 아니라 베이스 캠프를 지키던 김상규.이지원 대원이었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벽 쪽에서 헤드랜턴 불빛이 비췄는데 어느새 그 불빛이 내려간 것 같다"는 베이스 캠프에 있는
대원들의 고함을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김.송대원이 완등을 포기하고 지금쯤 중단 설동으로 내려가 대피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장대장은 그 가능성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기로 했다. 모든 사실은 날이 새야만 밝혀질 것이었다.
그때까지 기다리는 것밖에는 어쩔 방법이 없었다.
사실 장대장과 이대원도 뜬눈으로 다음날 아침해를 맞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위기에 놓여 있었다.
해가 떨어지면서 기온이 영하 18도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온몸에 스며든 동상 기운을 참고 있던 이대원은 0시
무렵 도끼날 맞은 장작처럼 나뒹굴었다. 외과의사인 장대장은 이대원부터 살려야 했다.
구두를 벗기고 언 발을 우모복으로 감싸 온기를 돌게 한 다음 허리까지 빠지는 눈을 헤집으며 모닥불이라도
지필 나뭇조각을 주워 모았다. 이대원을 껴안은 장대장은 스물아홉해의 삶에서 가장 길고 혹독한 밤을
토왕성의 꼭대기에서 보내야만 했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1978년 여름 설악산 백운동계곡을 오른 김성택(左).윤태규씨.
[설악에 살다] (32) 날개 꺾인 사나이들
토왕폭 우측 벽을 오르던 송원기 대원에게 위기가 닥쳤다. 발디딜 곳도 없어 보이는 깎아지른 절벽이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송대원의 눈에 소나무 한 그루가 들어왔다. 소나무는 송대원이 있는 곳에서 2시 방향으로 13m 가량 떨어져 있었다.
그 소나무는 '구원의 나무'처럼 보였다. 그 소나무에 확보점을 마련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나무 뒤쪽의 벽은 경사가 완만한 데다 토왕폭 상단 정상까지는 20여m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 소나무까지만 나아간다면 등반은 사실상 끝나는 셈이었다.
어느 순간 벽이 환해졌다. 산안개가 완전히 걷히며 토왕골 위로 보름달이 두둥실 떠올랐다.
달빛을 받은 토왕골은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웠다. 밑에 있던 김성택 대원이 연발하는 감탄사가 송대원에게까지 들려왔다.
토왕골이 보여주는 절대적인 아름다움 속에서 송대원은 바위 틈에 엉성하나마 두 개의 하켄을 박아두고
구원의 소나무까지 힘껏 건너뛰었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보니 소나무는 작고 볼품이 없었다. 밑에서 본 소나무가 아니라 다른 소나무가 아닌가 여겨질 정도였다.
자신과 김대원의 목숨을 걸기에 반 뼘쯤 되는 소나무의 밑둥이 너무 약해 보였다.
그러나 소나무 밑둥에 자일을 건 송대원은 토왕폭 우측 벽 완등이라는 대과제를 자기 손으로 마무리한다는 흥분에 사로잡혔다.
송대원은 밑의 김대원에게 올라와도 좋다는 뜻의 신호인 '하이 빌라'를 외쳤다.
고정자일에 유마르를 걸고 김대원이 올라오는 사이에 손이 빈 송대원은 볼트 설치에 들어갔다.
아무리 뜯어봐도 소나무가 너무 가는 데다 바위 틈에 엉성하게 박힌 두 개의 하켄이 불안했기 때문이다.
볼트 구멍을 거의 다 팠을 때 7m쯤 밑에서 김대원의 해드랜턴 불빛이 흔들거리며 번쩍였다.
'아! 성택형은 역시 빠르구나' 라고 생각하며 볼트를 구멍에 끼우려는 순간, 벨트를 맨 허리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다.
동시에 자신의 몸과 소나무가 벽에서 송두리째 뽑혀나가는 걸 보았다.
송대원과 김대원은 그렇게 검은 토왕의 벽에서 하얀 달빛 속으로 날았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고? 그게 뭔 헛소리인가?
토왕폭에서 추락하고 있는 김대원과 송대원에게 무슨 날개가 있다는 말인가.
그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떨어져서는 안될 높이가 있을 뿐이었다.
추락하는 모든 것은 높이가 있다.
토왕폭에서 추락하는 것은 토왕폭만한 높이를 가지고 있었다.
토왕폭을 오르겠다는 열망과 의지가 쌓아올린 높이만 품고서 김대원과 송대원은 그렇게 높은 곳에서-1973년 1월의
송준호가 그랬듯이-토왕성 폭포 위를 가르는 하나의 물줄기로 떨어져 내렸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북한산 인수봉을 찾은 김성택(右)씨가 김종현(中)씨
등과 함께 바위에 걸터앉아 잠시 쉬고 있다.
[설악에 살다] (33) 생사 갈림길
토왕폭 정상에서 이해관 대원과 길고 긴 밤을 하얗게 지샌 장경덕 대장은 속초 시내의 불빛이 흐릿해질 무렵 전날 밤
후배들의 이름을 목놓아 불렀던 토왕의 정수리께로 다시 갔다.
여전히 후배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중단 설사면을 내려다보니 몇 사람이 움직이고 있었다.
온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더니 그들의 응답이 들려왔다.
"경덕이형, 나 백승기요. 후배들이 추락했어요. 추락."
악우회의 백승기 대원은 이어 "한 대원은 중단 위쪽에, 다른 한 대원은 중단 아래쪽에 떨어졌다"고 알려줬다.
동료들이 추락했다는 말을 듣고 다시 주저앉은 이해관 대원을 부축해 장대장은 급히 우측 능선을 타고 백대원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악우회의 윤대표 대장과 백대원이 침통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장대장은 중단 설사면 위쪽에 떨어진 대원에게로 달려갔다.
그는 김성택 대원이었다. 김대원의 눈자위는 피로 물들어 있었고 헬멧은 반쯤 벗겨진 채 깨져 있었다.
이미 숨이 끊긴 상태였다. 장대장은 김대원의 눈을 감겨준 뒤 김대원보다 더 아래쪽으로 떨어졌다는 송원기 대원을 찾았다.
그러나 송대원은 그곳에 없었다. 후배의 주검을 찾는 그에게 백대원이 소리쳤다.
"경덕이형, 나도 정신이 나가 깜빡했네. 원기는 살았어요. 다치지도 않았어요. 형 팀의 후배들이 조금 전 베이스캠프로 옮겼어요."
베이스캠프로 급히 내려가 송대원과 눈물로 재회한 장대장은 의사로서 송대원을 진찰해봤지만 50층 건물 높이인 1백50여m 위에서
추락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전혀 다친 데가 없었다.
"볼트를 치려는 순간 몸이 붕 떠면서 곧바로 의식을 잃었는데 깨어나 보니 중단 설사면이지 뭐예요."
김성택 대원의 추락에 따른 충격으로 확보줄을 건 소나무와 두 개의 하켄이 모두 부러지고 빠져나가면서 송대원도
뒤따라 떨어진 것이다. 김대원이 그렇게 낚아채듯 끌어당긴 게 결과적으로는 송대원의 목숨을 구한 것이었다.
수직으로 떨어진 김대원은 절벽 곳곳에 튀어나와 있는 바위에 잇따라 부딪친 데다 가속도가 붙은 상태에서
경사가 완만한 바위벽에 추락한 것이 치명적이었다.
그러나 송대원은 김대원의 추락으로 인한 충격이 원심력으로 작용해 둥근 원주를 그리며 떨어졌다.
때문에 송대원은 추락 중에 바위와 전혀 부딪치지 않은 데다 바위벽이 아닌 가파른 설사면으로 내려앉듯 떨어져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 천만다행으로 목숨을 건진 것이었다.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권금산장의 유창서씨, 거리회의 장봉완씨, 요델클럽의 백인상씨, 악우회의 윤대장과 유한규.
백승기 대원의 도움을 받아 장대장은 김대원의 유해를 설악동으로 옮겼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한 시즌에 토왕폭 좌.우 암벽과 빙벽을 동시에 등정한
부산 청봉산악회원들.
[설악에 살다] (34) 청봉과 어센트
1980년 겨울 토왕폭은 어느 해보다 꽁꽁 얼었다. 79년 겨울에 어느 팀도 완등하지 못하자 외로움을 느낀 토왕폭이
'토왕폭의 사나이들'을 부른 것일까. 81년 1월 두 팀이 며칠 사이로 토왕폭 정상에 올라 제4등과 제5등을 이뤄냈다.
제4등은 부산 청봉산악회가, 제5등은 서울 어센트산악회가 각각 81년 1월 6일과 9일에 달성했다.
77년 1월 토왕폭 제2등을 기록한 부산합동대의 핵심 맴버들과 토왕폭 좌측 암벽 초등자 등 쟁쟁한 산쟁이들로 짜여진
청봉산악회는 80년 겨울에 토왕성 좌.우측 암벽과 토왕성 빙벽을 모두 등반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설악산으로 들어왔다.
김흥수 대장이 이끄는 청봉의 등반대는 정태희.홍복광.이정호.이재섭.권찬근.양진현 대원으로 구성됐다.
80년 12월 27일부터 등반에 들어간 그들은 먼저 3백m 높이의 좌벽 공략에 나서 정태희.홍복광 대원을 정상에 세웠다.
부산의 산사나이들은 81년 새해 첫날부터 토왕폭 빙벽 하단에 불었다.
등반조는 이정호.홍복광 대원이었다. 동굴을 거쳐 동대테라스까지 나아간 그들은 갑자기 쏟아진 폭설로 일단 후퇴했다.
하지만 정태희.이정호 대원이 다음날 아침 일찍 등반을 시작해 4시간 만에 하단 정상에 올랐다.
1월 5일 중단 캠프를 떠난 두 공격대원은 다음날 오후 6시10분 토왕성 빙벽 상단의 정상에 섰다.
토왕성 빙벽 제4등을 깨끗이 마무리한 청봉은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상당수의 대원이 부상으로 고생하고 있었지만 모든 대원이 1월 8일 높이 4백여m의 우측 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
들은 등반 닷새째인 12일 우측 벽의 정상에 섰다. 마침내 청봉은 '토왕폭 좌우 암벽 및 빙벽 한 시즌 등반'이라는 과제를 풀었다.
어센트산악회는 토왕폭의 빙벽과 그 좌.우벽을 일직선 상에 놓고 연장등반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81년 1월 2일 토왕골로 들어갔다.
그들의 목표는 청봉산악회의 경우처럼 단지 빙벽과 두 암벽을 잇따라 등반하는 게 아니었다.
세 개의 벽을 하나의 벽으로 생각하고 등반하려는 것이었다.
때문에 공격조의 식량과 장비 등을 나르는 지원조는 등반이 쉬운 우측 능선으로 돌아 올라가거나 지원물품을
미리 부려 놓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오로지 공격조가 뚫은 루트만을 따라 올라갔다가 내려온다는 원칙을 세웠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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