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론

삶 속에서 우리는 가끔씩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에 대해 시적인 표현을 해야 할 때가 있다. 활짝 핀 꽃을 보며 우리는 그저 단순히 꽃이 아름답게 피었다고만 표현해야 할까? 우리는 꽃을 바라보며 애인을 떠올릴 수도 있고, 꽃이 웃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시들어가는 꽃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삶의 추억들을 그 한송이의 꽃에 부여해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시적 감수성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다.
만일 산문으로만 느끼고 대화한다면 인간은 삶에서 곧 메마름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산문으로 표현할 수 없는 감수를 시를 통해 자연스럽고 간결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시적 감수성이 메마른 사람은 얼마나 따분하게 느껴질까...... 시를 떠나서 우리는 인생을 노래할 수가 없을 것이며, 시적 감수성을 잃어버린 인간의 정신은 메마르게 될 것이다.
첫째로, 한 편의 시에는 시인의 정신이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윤동주의 "서시"를 읽어 본다면 우리는 그가 살았던 암울한 시대에 대한 그의 가치관과 사상을 그의 시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즉 윤동주의 "서시"에는 윤동주의 정신이 사진 처럼 찍혀있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의 가치관과 정신 세계를 가장 빠르게 접할 수 있는 방법은 그의 가슴 속에서 나온 시를 통해서일 것이다.
둘째로, 한 편의 시에는 시인의 인생이 담겨 있다. 예를 들어 서정주의 "자화상"에는 그가 삶 속에서 가지게 되었던 인생의 경력들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생에 대한 경험은 시인의 정신 세계에서 시를 이끌어 내는 것이며, 삶 속에서 겪는 고난이 시인을 시인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한 편의 시를 접하게 될 때, 인생에 대한 우리의 경험이 그 시를 쓴 시인의 경험에 이르지 못 하게 되면 우리는 그 시에 대해 충분히 공감이 가지 않을 것이다.
셋째로, 나는 한편의 시가 한편의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아무리 짧은 시라고 해도 시인이 표현하려는 무궁무진한 표현은 그 시 한 편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읽게 되면 우리는 시인의 사랑과 연민이 담긴 한 편의 소설을 읽는 느낌이 들게 될 것이다.
누군가 "시는 언어의 파괴"라고 했듯이, 시는 언어의 한계에 매이지 않을 때가 있는 것 같다. 나는 시가 언어를 초월하는 그 무엇이라고 말하고 싶다. 시에는 언어의 비틀림이 있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고 있다. "어디서 흰 당나귀는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 응앙 울 것이다" 이것은 언어의 비틀림이며 언어의 변 태적 표현이다. 때로는 변 태적인 것이 아름다울 때가 있으며, 거기에 우리의 인생의 의미가 숨겨져 있을 수도 있다.
언어를 있는 그대로만 평범하게 표현한다면 우리는 이를 산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산문이라는 언어를 비틀어 줌으로 인해 인간의 속에 있는 시적 감수성에 호소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이 보고 있는 세상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세상이 아니다. 시인은 다른 사람과 다르게 세상을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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