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에서
사람은 누구나 그의 생애에 이룬 업적으로서 평가를 받는다. 사람의 사후 평가에서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대체로 무시되 는 법이다. 전혜린(1934∼65)은 특이한 예외의 경우이다. 그녀가 생을 통해 이룬 것은 몇 권의 번역서,유고로 출간된 수필집,일기문 따위가 전부다. 그것은 「1세기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는 천재」라는 평가를 받았던 그녀의 업적으로서는 보잘 것 없는 것이다. 한 지인에게 『어느 조용한 황혼에 길가의 주막에 쓰러져 있는 집시가 있거든 나라고 알아줘!』라고 속삭였던 혜린,점성술과 운명을 믿고 가끔 점도 치던 혜린은 31세로 요절한다. 그녀는 특이하게도 자신의 생으로 이룬 「 업적」이 아니라 절대인식에의 끝없는 갈구와 열띤 방황이라는 삶의 「태도」만으로 사후 「전혜린 신화」를 창조해 냈다.
1965년 1월9일 토요일. 하늘의 푸르름은 마치 수정처럼 맑고 깊었지만 기온은 영하 10도 이하로 급강하한 몹시 추운 날이었다.
『세 시간이나 여기서 기다렸어!』
그날 약속없이 학림다방에 들렀던 서울대 법대 후배인 이덕희가 전혜린을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그들은 다방 한가운데 놓인 난로가로 자리를 옮겨 토요일 오후를 담소로 보냈다. 저물 무렵 그들은 학림다방을 빠져나와 명동에 있는 은성으로 갔다. 은성은 당시 문화예술 인들이 단골로 드나들던 유명한 대폿집이었다. 은성에는 연합신문 문화부장인 명동백작 이봉구가 앉아 있었다. 여러 사람이 합석해 두어시간 동안 떠들어댔던 그날의 술자리는 매우 유쾌했다. 혜린은 무척 고조되어 보였고,다른 날과 달리 더 자주 웃고 더 큰소리로 많은 말들을 했다. 곧 수필집을 낼 예정이고 책 제목도 정했다고 했다. 혜린은 이덕희에게 귓속말로 『제목은 나중에 너한테만 알려줄게』라고 속삭였다. 그녀는 국제 펜클럽대회에 참가할 예정이며,그 때문에 건강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글쎄 내 몸이 괴물처럼 건강한 거야』
짧은 겨울해가 지고, 바깥은 이미 어두워진 뒤 은성에서 나온 혜린과 이덕희,동행했던 후배 등은 한잔 더 하기 위해 신도호텔 살롱으로 자리를 옮겼다. 은성에서 신도호텔 살롱으로 가는 도중에 혜린은 『세코날 마흔알을 흰걸로 구했어 !』라고 속삭였다. 어딘가 모르게 몹시 달뜬 음성이었다. 신도호텔의 살롱에서 칵테일을 마시는 동안 혜린은 몇 차례나 일어나 카운터에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김승옥 이호철과 합세한 그들은 천장이 낮은 대폿집으로 자리를 다시 옮겼다. 소음과 담배연기가 자욱한 그곳에서 그들은 약 1시간 동안 술을 마셨다. 혜린은 술을 꽤나 마셨고,취한 눈치였지만 기분은 유달리 좋아 보였다.
그 다음날 전혜린은 죽었다. 당시의 신문은 1단짜리 여섯줄 기사에서 「희귀한 여류 법철학도요,독일문학가」인 그녀의 죽음을 「수면제 과용으로 인한 변사」라고 발표했다. 뮌 헨 유학시절 이미 한 번의 자살미수 경험이 있던 혜린의 죽음이 수면제 과용으로 인한 사고사였는지,과도의 저혈압으로 인한 자연사인지,자살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혜린의 사후 구구한 억측이 떠돌았지만 그녀의 죽음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전혜린은 평남 순천에서 1934년 1월 1일에 전봉덕의 8남매중 장녀로 태어났다. 어린 혜린에게 아버지는 신이었다. 훗날 혜린은 『내 한마디가 아버지에겐 지상명령이었고 나는 또 젊고 아름다웠던,남들이 천재라 불렀던 아버지를,나를 무제한으로 사랑하고 나의 모든 것을 무조건 다 옹호한 아버지를 신처럼 숭배했다』고 회고했다.
초등학교 1학년인 혜린은 총독부 고급관리인 아버지를 따라 서울을 떠나 이북 끝의 신흥도시인 신의주로 이주해서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1946년 다시 서울로 돌아와 경기여중에 입학하여 중 고교 시절을 보냈다. 혜린의 천재성은 부친의 영향과 천혜의 환경,그 리고 「절대로 평범해져서는 안된다」는 사춘기 시절부터의 정신속에서 키워졌다.
1952년 혜린은 피란지 부산에서 서울 법대에 들어간다. 서울 법대 진학은 부친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혜린의 서울법대 입학 당시 수학과목 성적은 0점이었다. 과락이 있을 경우 불합격 처리되는 것이 서울대의 관례였으나 다른 성적이 워낙 출중했던 혜린은 사정위원회를 거쳐 구제되었다. 수학과목의 0점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성적이 전체 2등이었다는 얘기는 이제 전설이 되었다. 대학교육에 관한 전시특별조치령에 의해 부산에 세워진 전시연합대학교 임시 가교사에서 수업을 받았다. 법학에 권태를 느낀 혜린은 여고시절의 단짝 주혜가 다니던 문리대에서 오든이나 엘리어트 같은 시인에 관한 강의를 도강했다. 법학과목의 강의 기피와 도강,그리고 온갖 종류에 대한 광적인 탐닉은 법학에 대한 혐오와 철학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침내 21세 되던 해인 1955년 혜린은 독일 유학을 떠났다. 그녀가 에어프랑스에서 내렸을 때 뮌헨의 하늘은 축축한 습기를 가득 머금은 회색빛이었다. 혜린 은 학교 근처에 방을 얻었다. 강렬한 인식욕과 날카로운 감수성을 지닌 혜린은 뮌헨대학에서 그토록 동경하던 문학과 철학의 세계로 깊이 빠져 든다.
뮌헨대학에는 독일학생들 뿐만 아니라 그리스 터키 이집트 터키 등지에서 온 유학생들도 많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검소했다. 남학생들은 거의 스웨터 바람이고 여학생들은 검은 스커트에 검은 양말,검은 머릿수건,길게 늘인 생머리가 제복이었다. 훗날 혜린의 저 유명한 검은 색의 옷과 검은색의 스카프는 그 시절 습관의 연장이었다.
혜린은 독일유학중 결혼을 하고 딸을 낳는다. 싸구려 번역일과 고국에서 보내주는 돈으로는 생활이 늘 빠듯했다. 한번은 생활비가 완전히 바닥이 나 그녀는 한 주일 동안 일생 처음으로 완전히 굶었다. 훗날 혜린은 「물을 마시니까 죽지는 않더라」고 했다. 그것은 그녀가 처음으로 체험한 굶주림이었다. 혜린은 1959년 독일 유학을 끝내고 귀국하여 서울대 이화여대 성균관대에서 강의를 맡는 한편 번역작업을 했다. 헤르만 헤세 ,하인리히 뷜,에리히 케스트너,루이제 린저 등의 독일 작품들이 혜린의 번역을 통해 국내에 소개됐다. 1964년 독일유학중 결혼한 남편과 합의이혼한 후 혜린은 자주 사랑에 빠졌다. 인습과 사회적 규범을 벗어 난 연하 제자와의 사랑도 있었다. 한 남학생은 그의 모친의 간곡한 만류를 받아들여 혜린과 결별을 선언했다. 그때 혜린은 시니컬한 미소를 얼굴에 담고 『네가 날아올 땐 난 네가 독수리인줄 알았는데,날아가는 모습을 보니 참새에 지나지 않았어!』라고 했다.
<장석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