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된 신앙의 신비”
(마르 10:46-52)
복대동교회 관할사제 / 전해주(노아) 신부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리고에 들렀다가 한 소경의 눈을 뜨게 해줍니다. 이 짧은 단문을 묵상하며 우리는 신앙의 신비함과 구체성이라는 다소 상반된 개념이 어떻게 조화되는 가를 생각해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물론이오,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그 종교가 가진 신비함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그 강조만큼이나 중요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라고 해서 꼭 그 핵심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그 신비함이 물론 중요하지만, 그 신비 자체가 신앙이 추구하는 궁극적 진리는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소경은 예수님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여러 사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두 번씩이나 소리 질러 간청합니다. 아마 그 소경은 예수님이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었고,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오천 명을 먹이셨다는 소문을 익히 들었을 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그 신비한 능력이 자신의 눈뜸으로 다시 한 번 발휘되는 자비가 베풀어지기를 기대하며 더듬더듬 찾아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의 이런 간절함이 예수님과의 대면으로 드디어 이루어집니다.
신의 자비가 드러나는 신비함은 이렇듯 신을 대면하는 데까지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것, 바로 신비함 그 자체이지요. 얼마나 가슴 떨리는 일입니까. 하느님을 만나는 일은 오금이 저려 두렵기까지 하다고 성서 여기저기서 말할 정도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느님을 대면하는 이 신비함이 우리 신앙의 최종 목표일까요? 타종교에서처럼 그토록 신의 현존이 내게 임하도록 용맹정진하여 대오각성을 하든, 하느님의 은총으로 오매불망 그리던 신의 현존을 만나든, 그 순간만큼은 구름 위를 걷는 듯 황홀하고, 흩어진 구슬이 꿰어지듯 모든 우주의 이치가 내 머릿속에서 질서정연해짐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 좋아 그 순간을 지속시키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는 것이 참 신앙생활일까요? 거기서 나의 신앙이 머문다면 무언가 부족함을 느끼고, 내가 발을 담그고 있는 내 삶의 변화는 진정 이루지 못하며, 그럴수록 더욱 그 황홀함에만 빠져들 우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칼 마르크스는 종교를 아편이라 했던 모양입니다.
바로 이것을 경계하는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소경에게 그래서 묻습니다.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이때 소경은 예수님을 만난 신비함에서 한 발 나아가 제 눈을 뜨게 해달라는 아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자신의 문제를 내놓습니다. 소경이 많이 못 배운 사람이라 무지의 소치를 드러내 염치없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니 영생이니 하는 종교적 언어나 또는 새 생명이니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이니 하는 강한 은유로 말함으로 제도종교가 만들어 놓은 믿음의 정도를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 좀 보게 해 달라.’는 구체적인 자신의 문제를 예수님께 꺼내놓습니다. 곧 내 삶을 예수님께 맡깁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나는 너희에게 나를 만나는 신앙의 신비함을 주었으니, 너희는 나에게 그 신앙의 구체성을 보여라.’ 바로 이것입니다.
예리고의 소경이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듯, 하느님을 만나는 그 신비함에서 한 발 나아가 하느님의 가없는 선하신 의지와 나와 내 이웃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문제 해결이 조화를 이룰 때 우리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신비함은 비로소 완성됩니다. 그 완성된 신비함이 나의 삶을 주님이 주시는 평안함과 자유로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 또 그러기 위해 기도하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