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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고선
제17회 산행일지 : 강원도 태백산(가족과 함께한 눈꽃 축제)
일시 : 2004년 1월 16(금)-17(토)
날씨 : 눈, 흐림
새해 첫 등반인 제 17회 정기산행을 눈의 산 태백산으로 정한 건 지난 12월 6일 금산에서 돌아올 때였다. 새해로 접어들어 모처럼 이번 정기산행은 가족산행으로 하자는 의견을 내어 놓았더니 다들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그렇지 않아도 그간 여러 뒷바라지를 해온 집사람들에게 미안하던 차였고 아이들도 방학 중이고 게다가 태백산 눈꽃축제와도 날짜가 겹쳐서 눈이 흔치않은 동네에 사는 아이들에게도 좋은 추억거리가 될 것 같았다. 14일 금도현, 김생곤과 전화로 각자 일들을 나누고 청옥산 자연휴양림에 숙소를 예약하였다. 간식은 내가, 식사준비는 김생곤, 산행준비는 금도현이 맡았다. 듣자니 태백산 눈꽃축제가 시작된 것은 지난 10일인데도 아직 눈이 이렇다할 정도로 내리지 않아 눈 없는 눈꽃축제 중이라 한다. 다행히 주말에는 눈 소식이 예보되고 있었으나 이번엔 차량이 문제였다. 하여 금도현은 친분있는 어느 사장의 무쏘와 누나의 갤로퍼를 모두 4륜 구동차로 빌려서 약속시간보다 30분이나 이른 시간인 1시에 우리 집으로 와 있었다. 퇴근하는 나보다도 먼저 온 것이다. 김이돌은 13회 황장산에 처음 동행하였다가 14회는 쉬고 15회 백운산부터 금산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동안 나날이 그 열심이 더해가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김생곤은 점심도 옳게 먹지 못하고 고속도로에서 라면으로 떼우고 1시30분을 조금 넘어 도착했다. 우리 집이 왁짜하다. 차 한잔을 나누고 짐을 내리니 어른 7명에 아이들 5명을 합하여 도합 12명이다. 7인승 무쏘와 9인승 갤로퍼에 나누어 타고 무쏘는 금도현이, 그리고 갤로퍼는 김이돌이 운전대를 잡았다. 2시경 출발. 아이들은 9인승 뒷 칸에 몰아주었더니 신이난 모양이다. 주유소를 찾느라 칠곡 IC도 지나치고 결국 다부 IC에서 중앙고속도로를 만났다. 낙동 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가 영주 IC로 나와 시내를 지나 36번 국도를 타고 봉화, 노루재 터널을 지나 현동에 닿았다. 김생곤은 삼겹살 3근을 사서 돌아서다가 다시 4,000원어치를 더 사서 돌아왔다.
현동에서부터 강원도로 향하는 31번 국도를 접어들자 이젠 주위에 눈도 보이고 계곡도 점차 깊어진다. 겨울산의 모습이다. 900여 미터에 달하는 넛재를 넘어서자 눈이 조금씩 내린다. 우측으로 곧 청옥산 자연휴양림이다. 휴양림을 향하는 길은 온통 하얗다. 눈은 청소되어 있는 듯 하였으나 조심조심 내리막길의 입구를 들어서니 눈발이 굵어진다. 미리 예약해둔 금낭화, 초롱꽃 두 방값을 지불하니 열쇠와 함께 밥솥, 버너, 그릇 등을 소쿠리에 담아준다. 아이들은 벌써 뛰쳐나와 눈장난으로 요란하다. 눈 쌓인 청옥산 휴양림은 조용하고 포근한 깊은 산속에다 키 큰 소나무와 낙엽송들이 어울려 멋진 분위기를 자아애고 있다. 겨울이라 숲속의 집은 운영을 않고 산림문화휴양관만 손님을 맞고 있었으나 문을 들어서자 아무도 없다. 2층의 휴양관 전체가 우리 집인 듯 했다. 다소 추웠지만 조용하고 깨끗한 환경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짐을 올리고 저녁준비를 하는 동안도 아이들은 밖에서 들어올 줄을 모른다. 저녁이 준비되었다. 현동에서 산 삼겹살, 경주에서 가져온 과메기 등 저녁상은 아이들 어른 모두 만족할 만큼 맛도 차림도 풍성했다. 이층 다락방을 점유한 아이들의 뛰는 소리와 옥타브 높은 소리들이 이곳에서는 그리 성가시지만은 않다. 아이들 다섯은 숫제 저들만의 신나는 별천지를 만났음에 틀림없다. 부산에서 눈꽃축제를 향한다던 한 팀이 1층에 자리 잡았다. 바둑도 없는 추운 산속에서 술도 먹지 않는 이들이 긴 겨울밤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TV 시청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놀고, 어른들은 한방에 앉았다. 방에 온기가 별로 없다. 지금 시간이 10시가 가까워 오는데 “심야전기라서 10시가 넘어야만 보일러가 아직 가동된다”고 내가 큰소리 쳤는데 이부자리를 더 주려고 온 관리인이 9시부터 한 시간 보일러가 돌아가고 있는 중이라며 이제 곧 꺼지면 11시부터 다시 아침까지 가동된다고 한다. 아니 지금 보일러가 가동 중인데 그것도 한 시간이나 돌았는데 이리 춥다니 오늘 밤이 걱정스럽단다. 나라나 교회나 야당이 제대로 서야 된다는 김이돌 부인의 예기를 오늘의 결론으로 삼고 11시경 남녀로 나누어 잠자리에 들었다. 올림픽 대표팀의 축구경기를 졸면서 보고 있자니 평소 코를 다소 곤다는 김이돌은 처음에 조금 시작하더니 이내 잠잠해지고 김생곤의 코소리가 다소 들린다. 최태욱의 강력한 31미터 중거리 슛에 잠이 화들짝 깨었는데 좀 있으니 같이 축구를 보고 있던 금도현은 나를 깨워놓고는 자기는 잔댄다. TV를 끄고 누웠다. 아침, 김이돌은 간밤에 코를 골까 신경이 쓰여 제대로 잠을 못 이루었다고 고백한다.
눈은 조금씩 계속하여 간밤에 내렸나 보다. 아이들은 또다시 밖으로 나가고 집사람들은 아침준비를 빨리 끝마쳤다. 된장국으로 아침을 든든히 챙기고 커피까지 한 잔. 짐을 정리, 반환하고 아래쪽 우측으로 난 길로 휴양림을 나와 국도를 만났다. 이제 눈이 제법 내린다. 차창으로 펼쳐지는 눈 덮인 겨울산의 절경을 다들 넋 놓고 보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본전을 뽑았다고 한다. 느린 걸음으로 25km를 한 시간여 달려 태백산에 닿았다. 등산준비를 마치고 아이들과 헤어진다. 집사람 둘은 아이들 다섯을 데리고 눈썰매장과 축제장으로 그리고 김이돌 부부를 포함 등고선 회원들은 비료 푸대를 하나씩 배낭에 넣어 당골 입구로 들어선다. 10시 50분. 눈꽃축제 중이고 주말이어서 사람들이 다소 많다. 아이들 어른 할 것 없이 하산 길에는 비니루, 비료 푸대를 엉덩이에 깔고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다. 그래 태백산 겨울 등산의 필수 준비물은 바로 비료 푸대인 것이다. 1.7km를 약 40분 걸어 반재 밑 삼거리에 닿았다. 잠시 숨을 돌리고 우측의 망경사(2.2km), 천제단(2.7km) 방향으로 목교를 건너니 반재로 향하는 다소 경사가 있는 오르막을 만난다. 반재에 올라서니 커피향이 자욱이 번진다. 이동식 커피 판매대에는 다소 활기가 넘친다. 이제부터 주위는 더욱 환해지고 실로 눈의 나라에 접어든 느낌이 완연하다. 때로는 경사도 있지만 때로는 산책로처럼 포근한 눈길들이 무척 편안하다. 가득 핀 눈꽃도 예쁘고 콧등을 스치는 공기도 상큼하다. 망경사가 보인다. 색색의 등산복들이 흰 눈에 더욱 선명하게 온 산을 화려하게 수놓고 있다. 등고선 모든 회원의 입에서는 오로지 감탄사 뿐이다.
망경사는 하늘과 맞닿은 매우 높은 곳에 위치한 사찰이지만 불상과 석탑 등이 최근에 가져다 놓은 듯 길거리 석재상에도 볼 수 있는 그러한 것들이어서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구석구석에서 컵라면, 도시락 등 점심요기를 하고 있고 더러는 이곳에서도 미끄럼타기에 여념이 없다. 망경사를 지나 천제단을 향하여 오르막이 시작되는 좌측에는 단종비각이 있다. 삼촌에게 왕위를 빼앗긴 한 많은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었을 때 전 한성부윤 추익한이 태백산의 다래, 산과일로 모셨다는데 단종이 승하한 후 주민들이 그 영혼을 위로하고자 매년 9월3일에 제사를 모셨다고 한다. ‘조선국태백산단종대왕지비’라는 비문을 모시고 있는 이 전각은 1955년 지워진 것이며 전각의 현판과 비문의 글씨는 월정사 탄허스님의 것이라 알려지고 있다는 안내표가 붙어 있다. 이곳부터는 주목이 많다. 한참 자라고 있는 어린 나무에서부터 수백 년을 살아왔음직한 넉넉하고 풍채 좋은 주목도 이곳에서는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키 작은 나뭇가지마다에는 엄청난 크기의 눈꽃들을 빈틈없이 피워내고 있다. 갑작스레 앞길이 열리고 텅 빈 들판처럼 황량한 곳에서 태백산의 상징, 천제단 3기 중 가장 으뜸인 천황단이 둥그렇게 다가온다. 12시 30분. 이곳이 태백산의 정상으로 보이나(1,560.6m) 실제 높이로 정상은 유일사 방향으로 5분여 거리에 있는 장군봉(1,566.7m)이 정상이다. 사람이 많다. 마침 천황단 안에서는 모 통신회사에서 돼지머리와 음식들을 올려놓고 무사기원을 드리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처럼 기념사진을 찍지 않을 수가 없지. 천제단과 태백산 이름표를 배경으로 한 장. 여기서 유일사 매표소는 4.0km, 당골은 4.4km, 문수봉은 3.0km라는 이정표 옆에는 안축의 근제집 중에 있다는 ‘태백등산’이라는 제목의 7언절구 한시가 붙어 있다. 한자번역이 다소 마음에 안 들지만 적혀있는 대로 옮겨보면 그런대로 태백산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허공이 곧추올라 안개 속을 들어가니
비로소 더 오를 곳 없는 산마루임을 알겠네
동그란 해는 머리위에 나직하고
둘레의 뭇 산봉우리들이 눈 아래 내려 앉네
구름 따라 몸이 나르니 학의 등에 올라탄 듯
돌층계 허공에 길이 걸렸으니 하늘 오르는 사다리인가
비 그치자 골짜기마다 시냇물은 흘러 넘쳐
오십천 굽이굽이 맴돌아서 가이 없네
일반적인 태백산 등산은 유일사 방향에서 올라와 우리가 방금 올라온 당골 방향으로 하산하는 것이지만 차량과 가족 탓에 할 수 없이 하산 길은 유일사를 등지고 문수봉 쪽으로 길을 잡았다. 그래도 올라온 길로 하산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던 것은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니었으리라. 키 작은 관목들 사이로 조금을 하산하자 천제단 3기중 막내인 하단이 나타난다. 3기의 천제단 중 천황단은 방금 보았고 두 번째인 장군단은 북쪽, 즉 장군봉 쪽 300m 지점에 있으며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를 맞고 있는 것이 막내인 하단인데 정확한 이름을 알 수 없어 그저 하단이라 한단다. 하지만 난 이 하단이 우람한 천황단 보다는 소박하고 자연스러워 훨씬 정이 가는 듯 하다. 이 하단 옆에는 병조참판이라는 직함이 새겨진 비석을 가진 나지막한 묘 하나가 있다. 이리도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보고 태백산을 오르는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있으니 사후 팔자가 생전의 병조참판보다 더욱 좋은 것 아닌지... 사방이 눈이라서 오늘은 점심먹을 자리가 여의치 않다. 하여 하단 구석진 곳에 자릴 잡고 장비를 내어 준비한다. 하필이면 등산로를 두고도 우리가 있는 곳으로 여러 사람들이 돌아서 지나는 통에 다소 부끄러움이 더한다. 천제단 하단 위 제단에 있던 사과 한 알을 금도현은 깍아 나누어 먹고 물이 끓기를 기다렸다. 오늘따라 더디다. 주변엔 번호표를 붉은 가슴에 달고 흰 눈을 맘껏 뒤집어 쓴 채 꿋꿋한 주목들이 다붑다분 보인다. 재빨리 점심을 헤치우고 다시 쓰레기 봉지를 배낭에 메어 달고는 문수봉을 향하여 출발. 1시 30분.
문수봉을 향하는 길은 지나는 사람이 적어 조용하다. 길도 비교적 경사도 없이 편안하다. 간혹 만나는 천년을 살아온 듯한 아름드리 주목이 좋다. 금도현과 김생곤은 뒤쳐저 비료 푸대로 미끄럼을 열심히 타며 내려오나 보다. 물론 나도 간간이 엉덩이를 비료 푸대 위에 얹고 아찔한 미끄럼을 즐겼다. 정상에서 3km 거리인 문수봉을 400m 앞두고 당골로 향하는 좌측 길로 접어 들었다. 지나는 사람이 더욱 적어 눈이 꽤나 발을 붙든다. 좁은 길이어서 미끄럼은 여의치 않지만 조용하고 호젓하여 좋다. 다시 반재 밑 삼거리에 도착하니 오후 2시 30분. 이제부터는 거의 동성로에 해당할 정도로 사람이 많다. 하지만 틈만 나면 미끄럼 타기는 계속 되었다. 눈 줄기가 점점 굵어진다. 눈썰매를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 넘게까지 탔다는 아이들을 석탄박물관에서 만나 돌아서기 싫다는 것을 억지로 달래어 차에 올랐다. 폭설에 가까운 눈이 내리고 있고 어둡기 전에 되도록 멀리 가야겠기에 서둘러 출발. 3시 50분. 눈은 엄청 내리지만 다행히 길은 말끔히 정리가 되어 있어 안전하게 넛재를 넘을 수 있었다. 현동에 도착하기 전부터 아이들이 배가 고파 잠도 안온다며 난리를 쳐 지난 여름 내가 들른 적이 현동의 한 식당엘 들었다. 아저씨와 그 집 딸이 비교적 재빨리 식사를 내어 왔다. 제육볶음, 청국장, 동태찌게 등은 시골 나물들과 함께 맛이 그런대로 괜챦았고 아이들도 잘 먹었다. 커피까지 한잔 하고 다시 차에 올랐다. 이제는 그야말로 밤이다.
춘양을 지나 법전 기차 굴다리 앞에서 금도현이 운전하던-나도 이차에 탑승 중 이었다- 무쏘가 갑자기 쿵하며 접촉사고가 일어났다. 바로 주차하고 내리니 상대방 갤로퍼에서 내린 운전자는 술 냄새가 가득했다. 큰소리치는 가해자를 내버려 둔 채 금도현은 경찰에 신고를, 그리고 우리의 세 남자는 교통정리에 바빴다. 경찰이 도착할 시간이 되어가자 도망하려는 그 차로부터 키를 뽑아 제지하자 곧 경찰이 도착했다. 다시 파출소로 돌아왔더니 그는 이 동네 사람인 듯 서로 형님 하면서 많은 동네 사람이 몰려들었다. 심지어 파출소장까지도 가해자와 그 모인 형님들과 악수를 하고 한꺼번에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다. 한사코 봐달라는 주위의 부탁을 거절하고 몇 번씩 거부하던 음주측정을 하니 0.121의 혈중 농도가 기계에 찍혔다. 거의 1시간 30여분을 지체한 셈이었다. 다행히 운전에는 무리가 없을 정도여서 다시 대구를 향하였다. 10시가 다되어서야 출발지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록 접촉사고로 흠은 있었지만 이번 태백산 정기산행은 가족과 함께 한 것이어서도 그르려니와 눈 덮인 눈의 산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 회원 모두는 축복으로 여긴다.
登.苦.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