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에 있어서 청대(淸代)는 중국의 오랜 봉건사회를 종식하고 반봉건식민지사회로 전환되는 과도기적인 특수한 시대이며, 중국 봉건사회의 마지막 시기이다. 청왕조는 1664년 순치(順治)황제가 중국 중원(中原)으로 입관(入關)하면서, 북경의 자금성을 함락한 후, 이내 곧 중국 천하를 통일하였다. 중원을 통일하고 강성하고도 번영된 제국을 건설했던 청왕조는 건륭황제 이후 그 국운이 점점 쇠락하고, 앞을 다퉈 밀려오는 서구 외국자본주의 열강들의 이따른 침략을 받으면서 급기야는 반봉건식민지사회로 전락(轉落)하고 마는 운명을 맞게 된다.
이러한 강성(强盛)과 번영(繁榮), 그리고 혼란과 격변의 중국 근대 흥망성쇠가 한꺼번에 잘 농축되어 전개되어 있는 곳이 바로 중국의 차관(茶館)이며, 그야말로 당시의 격변의 중국 사회상을 잘 엿볼 수 있는 중국 근대 사회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청대(淸代)의 차관(茶館)은 명대(明代) 차관(茶館)의 발전을 기초 토대로 삼아 더욱 심화 발전하게 되며, 중국 전역의 대도시는 물론 작은 성읍(城邑)에 이르기까지 널리 보급되게 된다.
청나라 팔기군(八旗軍)이 중원(中原)으로 입관한 이후, 팔기(八旗)의 자제(子弟)들은 자신들의 권세만 믿고, 일정한 직책이나 직업도 없이 종일 무위도식(無爲徒食)하며, 향락만을 일삼았다. 이렇게 일정하게 하는 일 없이 포식(飽食)하며, 놀거리만을 찾아 다니며 시간을 소일하는 그들에게 있어 차관(茶館)은 그야말로 종일 남아도는 시간을 소일하기에는 아주 적합한 곳이였다.
그들은 한 손에 조롱(鳥籠)을 들고 거들먹거리며 비단 창파오((長袍) 휘날리며 차관의 문턱을 수도 없이 넘나 들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한 번 들어 와 앉으면 일단 하루종일을 차관에서 시간을 소일하는 게 일쑤였다. 특히, 강희(康熙)·건륭(乾隆)의 태평성세(太平盛世)에 이르러서 그들 자제들은 아예 주루(酒樓)나 차사(茶肆)에 틀어 박혀 종일을 보내기가 일쑤였다. 따라서 차관업(茶館業)은 더욱 흥성할 수 밖에 없었다. 청대의 차사·차관들은 주로 대강남북(對江南北)·연해내지(沿海內地)에 편중되어 있었으며, 그 수도 아주 크게 증가함을 보였다.
그 증가의 실례로 제회향(諸晦香)의《명재소식(明齋小識)》의 기록을 보면 잘 알 수가 있다.
"차사(茶肆)는 놀이 건달배들이 모이는 곳이다. 내가 어렸을 때, 기읍(記邑)에 (차관이) 두 곳이 있었는데, 하나는 남문(南門) 밖의 모씨가(某氏家)이고, 또 하나는 성황당묘(城隍堂廟) 입구 동쪽 누각(樓閣)에 있었다. (차) 가격은 모두 일률적으로 2문(文)이었다. 지금은 20여 곳이 더 늘었으며, 차 한 사발에 부르는 값이 50여 문(文)이나 되니, 사치와 방탕한 풍속이 어디까지 갈지 모르겠구나? "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 기록을 통해, 차 한 사발의 값은 무려 15배나 올랐고, 차관의 수는 10배나 더 증가 했음을 볼 수가 있다. 당시의 도시의 발전속도와 물가, 그리고 세월의 변천을 감안하더라도, 어쨌튼, 찻값의 상승과 차관(茶館)의 수가는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청대(淸代)의 차관(茶館)은 그 숫자가 많을 뿐만 아니라, 차관(茶館)의 환경(環境)을 고려한 택지(宅地) 선정(選定)에 있어서도 매우 연구와 심혈을 기울였다.
청대 문인(文人) 이두(李斗)는 건륭(乾隆) 60년(1795년)에 《양주화방록(揚州畵舫錄)》을 저술하였는데, 여기에 고성(古城) 양주(揚州)의 누대(樓臺) 정사(亭 :정자)와 당시 민속 풍정(風情) 등이 상세히 기록 되어 있다. 그 중에서 양주(揚州) 북문교(北門橋) 차사(茶肆)에 대해 묘술해 놓은 기록이 한 단락이 보인다.
"쌍홍루(雙虹樓)는 북문교(北門橋)에 있는 차사(茶肆)이다.누각에는 다섯 기둥(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일반적으로 대문 앞에 두 개의 기둥 만을 세움)이 있고, 동쪽 벽의 창을 열면 강물을 접하고 있고, 멀리 조망(眺望)할 수가 있다. 내 고향의 차사(茶肆)는 천하에 으뜸이다. 이 것을 주업(主業)으로 삼는 자들이 많이 있다. 돈을 투자하여 화원(花園)을 건조(建造)하기도 하고, 혹은 고가(古家)의 대저택의 버려진 정원을 사들여 차관(茶館)의 정원으로 꾸미기도 한다. 누대(樓臺)의 정사(亭舍)에는 차목죽석(茶木竹石)·찻잔·다반 등, 어느 것 하나 정미(精美)하지 않은 것이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상의 기록에서 보듯, 그들은 차관(茶館)의 부지 선택에 있어서도 환경적(環境的)·심미적(審美的) 측면에서 대단히 신경을 쓰고 있음을 엿볼 수가 있다.
청대 차관(茶館)의 경영방식은 그 방법적인 측면에서 각양각색으로 나타나지만, 대체로 다음의 몇 종류의 차관(茶館)으로 크게 분류해 볼 수가 있다.
첫째 부류는 "청차관(淸茶館)"이라고 한다. 이 곳에서는 차엽 판매만을 위주로 하고 있다. 청차관(淸茶館)들은 일반적으로 대청(大廳)과 우아한 찻자리(雅座)로 분리하고, 갖가지의 중국전통양식의 가구와 장식 및 화분, 꽃꽂기 그리고 명인(名人)들의 그림이나 서묵(書墨)의 대련(對鍊) 등으로 꾸미어 놓고 손님이 편안히 품차를 즐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차관의 실내 장식과 배치가 우아하고 집기들이 청결하여 청차관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문인(文人)·아사(雅士)임을 자처하는 이들이 주로 많다.
둘째 부류는 "서차관(書茶館)"이다. 이런 부류의 차관은 차를 판매하는 것 이외, 설평서(說評書)를 동반하는데, 북방과 남방에 모두 이런 부류의 차관(茶館)이 있다. 이런 곳에 와서 차를 마시며 설평서를 듣는 이들은 대부분 황족이나 권세있는 귀족들이 그 주류를 이루지만, 간혹 평민백성들도 섞여 있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부류의 차관들은 좌석배치에 있어 당연히 신분고하(身分高下)의 구분이 엄격하였으며, 공연을 하는 설서인(說書人)들 또한 명배우와 일반배우의 차별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셋째 부류는 "야차관(野茶館)"이다. 이런 식의 명칭은 옛날 북경에서 비교적 성행했던 방법이다. 이런 부류의 차관들은 대부분 대로(大路) 변이나 성문 밖 혹은 황폐한 교외(郊外)나 야외 등에 임시 가판대를 설치해 놓고 지나 다니는 행인들에게 차(찻물)를 팔았다. 이런 차관들은 대부분 시설이 남루하고 음용으로 파는 차엽들은 대부분 거친 조차(粗茶)들이었으며, 다기들 또한 세련되거나 고급품이 아닌 거칠고 투박했다. 그러므로 이 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당시 사회 하층부의 수공예인이거나, 채소를 농사하는 농사꾼이 대부분이고, 또는 갈증(渴症)을 해소하기 위해 찾아 드는 행상(行商) 및 행인(行人)들이 대부분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야차관(野茶館)은 비록 그 시설이 남루하고, 파는 찻물이 저급품(低級品)이긴 하지만, 주위 환경이 그윽하고 운치가 있어서, 간혹 문인(文人) 묵객(墨客)들에게도 꽤 인기가 있었다. 따뜻한 봄에는 자연을 만끽하기 위해 봄나들이 오는 적지 않은 행락객을 즐겨 찾아 들었고, 그 중에는 자연의 운치를 만끽하려는 적지않은 문인, 묵객들의 발걸음이 일부러 이곳을 찾기도 했다.
넷째 부류는 "이훈포(二 鋪)"라 부른다. 이런 차관은 과거 북경성(北京城) 안에서 매우 성행하였다. 이 곳은 차객(茶客)들에게 각종의 차품(茶品)을 제공하는 것 이외에도, 다양한 요리와 주류(酒類)·간식거리·식사류를 판매 제공하였다. 사실, 이런 부류의 차와 술을 겸해서 운영하는 차관은 현재 중국 각지 어딜 가든 쉽게 볼 수가 있다.
이외에도 중국차관의 부류는 각 지역과 계급 등에 따라 더욱 더 많은 종류로 분류할 수가 있으나, 중국의 차관의 일반적 유형들은 대체적으로 이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가 않는다.
드넓은 중국 전역에 이렇게 널리 퍼져있는 중국차관들은 장구한 중국역사의 흐름 속에 태평성대와 시대의 격변기를 동시에 살아가던 근대 수많은 중국인들에게 어떠한 공능(功能)과 역할을 제공하였는지, 또 그들은 왜 이곳을 끊임없이 찾아들어야만 했는지,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만청시기(晩淸時期)는 청왕조가 쇠락(衰落)과 서방 열강들이 앞을 다퉈 중국 대륙을 침략함에 따라, 정국(政局)은 동탕(動蕩)하고, 국가는 쇠퇴하고, 백성은 곤궁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當時)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지위고하와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마치 차관(茶館)을 자신들의 집인 냥, 하는 일도 없이 온 종일을 차관에서 빈둥거리며 보내는 일이 허다(許多)하였다.
반면, 개중에는 간혹 국가의 장래나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사회 각 방면의 소식이나 정보를 알고 싶어 하였다. 차관(茶館)은 바로 이런 인사들의 정보교환이나 사교(社交)에 있어서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사교장(社交場)으로써의 역할과 장소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청나라 말기(末期)과 중화민국(中華民國) 초기의 대혼란기에 중국의 차관(茶館)은 오히려 태평성대 때보다 더욱 흥성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를 대표할 만한 중국차관이 흥성했던 도시로는 주로 북경(北京)·남경(南京)·상해(上海)·광주(廣州)·항주(杭州)·성도(成都) 등을 손꼽을 수가 있다.
이상의 도시들은 아직도 중국의 대표적 차관들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여전히 번창하고 있어 중국을 찾는 많은 외국 관광들에게 신비스러움을 더해 주고 있음은 물론 매우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의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다.
현재는 중국차관의 사회적 공능도 다양화되어 그 기능을 세분화하여 살펴 볼 가치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지면상의 제한으로 그 역할과 공능을 살피는 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고, 중국인들이 자부하고 있는 차관의 대략적인 공능은 크게 대략 일곱가지로 분류해 볼 수가 있다. ①교제(交際)의 공능 ②정보(情報)의 공능 ③심미(審美)의 공능 ④전시(展示)의 공능 ⑤교화(敎化)의 공능 ⑥휴식(休息)의 공능 ⑦찬음(餐飮)의 공능 등이 있다.
일천 여 년을 넘게 전승되어 내려오는 동안, 중국의 차관은 어느덧 문화지식 전승의 체제를 갖춤은 물론 중국인들의 심신 휴식의 공간으로 형성되게 되었다. 아울러 대중정보의 전파(傳播) 및 매개체(媒介體)적인 통로이며, 각종 민간활동의 교류(交流) 장소로 자리 매김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 생산력의 발전과 생활 수준이 향상될수록, 차관(茶館)의 사회적 공능(功能)은 필연적으로 더욱 완선(完善)과 강화를 더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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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졸고는 2003년 <<다담>> 봄호에 발표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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