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청소년을 걱정하는 문철
술맛은 물맛이라는데 옥천수(玉泉水)로 술을 빚는다면 최고의
명주가 될 법도 하다.
그러니까 이곳, 옥천땅은 술도가로는 그만인 곳이라 하겠다.
그런데 말 한마디 걸어보기는 커녕 기척 한 번 내보지도 못하고
머무적거리기만 하다가 그냥 길을 떠나고 말았다.
얼마쯤 걸은 후 포도밭 노상 판매대에서 잠시 쉬면서 주인에게
물었더니 시튼둥이다.
아뿔싸, 요즘 시골에서 막걸리 인기가 바닥인 걸 깜빡했다.
영춘리(永春)에서 영신리(永信)로 접어드는데 대형 건물의 벽에
붙은 대형 간판과 나부끼는 현수막들이 눈에 가득차 왔다.
<한 눈에 반한 쌀, 러브 인증서 획득, 5년 연속 한국소비자단체
최우수 쌀로 선정> 등등....
'해남'의 특산품으로 금방 떠오르는 것은 '황토고구마'다.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걷고 있는 동안 고구마밭에서 순을 따고
있는 이들을 자주 보았다.
그런데 쌀이?
한 눈에 반해버릴 만큼 최우수 쌀이라고?
자치시대에 자기 고장 농산품 알림의 일환으로 이해해도 될까.
그보다는 미구에 닥칠, 재앙에 비견될 격랑을 어떻게 이겨낼지.
옛길을 걸으면서 이런 상념에 잠기다니.
옛 분들이야 이같은 날이 올 것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마을 가운데 길을 따르다가 신13번 국도에 올라섰다.
새벽에 예상한 대로 불볕 더위가 아침부터 용맹스러운데 그늘막
없는 자투리 옛길보다는 주유소에서 잠시 쉴 요량으로.
새 길의 개통과 더불어 생긴 영신주유소.
광주 집을 두고 홀로 주유소를 운영한다는, 과묵한 인상에 비해
속정이 깊은 느낌의 주인 문철.
종업원 없이 혼자 하니까 겨우 유지될 정도라며 60나이에 들기
까지 경기가 이처럼 심각하게 느껴진 적이 없지만 자기에게는
이보다 더 큰 걱정이 있단다.
다음은 차가운 새 물병을 꺼내 권하며 내놓은 그의 탄식과 걱정.
방학기간에는 국토종주 청소년 단체들이 많이 지나간단다.
그런데 이들이 마치 점령군처럼 들이닥쳐 물을 마구 마시고 나간
뒤 널브러진 쓰레기를 보면서 탄식하고 걱정하게 된단다.
갈증을 견디지 못하는 젊은 이들을 이해는 하지만 엄연히 주인이
있고 물 한 병이라도 모두 유상 구입한 사업용인데 이래서야?
말 한 마디로 천냥 빚도 능히 갚는다는데 사전에 양해를 구하고
뒷 정리도 말끔히 하는 예의는 과연 난해한 학문인가?
극기훈련이란 무엇이며 누구를 위하고 무얼 위한 종주인가?
지도자는 왜 이 고생을 시키고 있는지?
사람의 기본 도리인 예의 범절을 도외시한 훈련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건지?
주인 문철의 탄식은 내가 백두대간과 9정맥에서 하던 장탄식과
맥을 같이 한다.
대간과 정맥에 널려있는 쓰레기는 모두 대간 정맥 종주꾼들이
버린 것들이다.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일반 산객들의 발길이 닿지 않으니까.
그들은 왜 대간을 걷고 있으며 정맥들을 찾아나선 것일까?
설마 쓰레기 버리기 위해서 가는 것이거나 그것들이 무겁거나
짐이 되어서 그러는 것은 아닐 터.
이것은 배우면 되는 지식이 아니다.
마음 가짐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사유와 지각을 통해서 터득하고 실천하는 이 몸가짐을
우리는 에티켓(etiquette) 혹은 매너(manner)라고 말한다.
짓궂은 이들
얼마 가지 않아서 다시 옛길로 내려섰다.
그리고 가게에서 맥주 1병을 마셨다.
갈증과 시장끼를 동시에 해결한 셈이다.
내참, 출출할 때에는 막걸리가 최고라던 백두대간 노파(고남산
자락 매요리휴게소)의 신신 당부를 또 까먹었네.
(볼 때마다 주름이 늘어갔는데 안녕하신지. 이 고마운 잔소리를
다시 들으려면 우선 노파도 나도 다 건강해야 하는데 글쎄....)
이 마을 이름이 '이일시'란다.
매우 희한하게 느껴지는 이름만큼이나 상식을 깨뜨리기도 한다.
5일에 한 번 장이 선다 하여 5일장이라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는 매 2일마다 장이 섰단다.
2일, 12일, 22일, 그러니까 10일장이었던 셈이다.
마을 이름은 그래서 이일시(二日市)가 됐다나.
야산으로 난 길을 넘어 도는데 중년 셋이 무얼 찾는 중이었을까.
길 건느기를 거듭하다가 내게 말을 걸어온 이가 한의사란다.
그는 내 팔을 당겨 맥을 짚어보는 등 의사처럼 행동했고 두명은
명의를 만났으니 행운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의사 왈 맥이 잡히지 않는다며 땡볕의 진행을 중지하란다.
가다가 큰 사고가 날 지도 모른다나.
맥을 짚을 줄 알기나 하나?
그들은 왜 그런 허튼 짓을 했을까.
하루 해를 가다보면 별별 일 다 겪게 된다지만 아무 상관 없는
늙은 이에게 의사행세를 하다니?
늙은 이가 심심파적 감이었을까.
아니, 진짜 의사일런지도 모른다.
지금 나는 한 번에 500m 걷기도 힘겨우니까.
(하지만 이런 상태에서도 숭례문 앞까지 왔으니 그들은 아마도
잠시 의사놀이를 해본 것일 게다)
그러나 무심코 던진 돌맹이에 개구리가 맞아죽는다는데 그들은
그냥 해본 말이겠지만 심약한 사람이 충격을 받으면 어쩌려고?
비를 몰고 다니는 늙은 이
계곡면(溪谷) 소재지 성진리(星津:別珍驛이었던 곳)에 도착하여
아침 겸 점심으로 백반을 시켰으나 실망스러웠다.
구멍가게를 겸한 식탁 두개의 초미니 식당이라거나 비싸거나 한
것 때문이 아니라 지나치게 짜고 시고....
옆 분이 삽시간에 뚝딱 먹어치우는 것을 보면 더위에 달아난 내
입맛 탓인데도 까탈을 부린 건 아닌지.
겨우 시장끼만 달래고 나섰는데 심상치 않은 날씨로 변해 갔다.
문득 새벽에 찜질방에서 어떤 일행이 나누던 말이 생각났다.
한 낮까지만이라도 맑아줘야.....라던.(야외행사가 있는 듯)
부지런히 옮긴 걸음이지만 법곡리(法谷) 국도 밑 터널에서 비를
피해 한 참을 기다렸다.
잦아드는 듯 해서 다시 걸음을 재촉하는데 이번에는 장대비다.
저 앞에 난 새 도로(신13번 국도)로 인해 문을 닫은 을씨년스런
주유소에서 비 그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첫 날부터 비맞은 늙은 장닭 꼴이 되기 싫은데 굵어졌다 가늘어
졌다만 반복할 뿐 멎으려는 기미가 전혀 없는 야속한 비.
산에서는 비를 몰고 다니는 사나이(백두대간 7번 글)로 공인된
늙은 이지만 설마 길에서 까지?
그게 아니라면 말짱하던 날들이었는데 내가 걷자마자 왜?
우중인데도 무에 그리 바쁜지 들낙거리던, 주인인 듯한 중년이
마을에서 준 것이라며 옥수수 두 개를 주고 들어갔다.
그의 눈에는 비를 응시하고 있는 늙은 이가 시름에 젖어 있다고
비취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옥수수로 달래라는 뜻이었을까.
그러나 이 옥수수는 엉뚱하게도 평창 동그라미황토집 소정네를
여기까지 불러들였다.
어찌하다 그리 가서 밭농사꾼된 그네가 땀흘려 재배한 옥수수를
해마다 택배로 보내온다.
우리는 거저 먹기만 하는 불한당인 것이 항상 맘에 걸려 있는데
이 해남땅 옥수수가 다시 그렇게 만드나 보다.
그뿐인가.
나는 너무 자주 소정 모자를 그들의 천주님 앞에 무픞꿇게 했다.
산을 타는 동안 툭 하면 사고내어 그렇게 하게 하더니 이번에는
아예 다우너가 되어 그들의 무릎을 아프게 했다.
그 아픈 무릎의 대가로 나는 이렇게나마 걷고 있는 것 아닐까.
무릎꿇지 않는 게 소원이라는 그 마음이 내 안 깊은 곳에 그대로
빚으로 자리하고 있다.
삼남대로 마치고 할 첫 나들이는 평창 소정네로 해야지.
웬만하면 강진 성전면 소재지까지만이라도 가려 했으나 무료히
보낸 2시간여가 보람 없이 비는 계속 내렸다.
결국 용호(龍湖)마을을 뒤로 하고 해남으로 철수했다.
몸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듯 하여 배낭 무게의 반은 택배로
올려보내고.
비록 토끼 한 마리 잡는데 그칠지라도 호랑이 잡을 준비를 하는,
산을 상대로 한 유비무환의 물목은 조정이 불기피했으니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