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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징면 고왕리에서 윤석태 증언(證言)과
이동훈 이야기
2014. 10. 31.(금) 강남터미널 다방에서 尹錫台 록취록
1942년 왕징초등학교1학년에 함께 입학한 60여명 중
현재 살아있는 세 사람, 윤석태, 이동훈, 이용규.
왕징면 高旺里의 상황,
윤상설씨는 몰수당하고 윤상설씨 집 행랑채를 일정 때 헐어다가 왕징면사무소 기와를 얹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큰 부자였던 윤상설씨는 몰수를 당해 일찍 월남했고, 그의 집은 민주선전실로, 그의 건너 방은 고왕리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사용하였고, 당시 리 서기는 그의 일가인 윤익중(尹益重)이였는데 윤익중씨도 1.4후퇴 시에 남쪽으로 피난 왔다고 한다.
고왕리(高旺리)의 부자는 윤상설(尹相卨), 윤갑중(尹甲重), 이종성(李種成)씨 였는데, 윤상설씨와 윤갑중씨는 광복 후 일지기 몰수를 당해 서울로 떠났고, 이종성씨는 그 이전에 먼저 월남(越南)했다,
이종성씨는 아들 삼형제를 두었는데, 둘째 아들(이명렬)은 원래 서울에 살고 있었고, 셋째 아들(이호렬)은 해방 후 월남했는데 이종성씨의 큰 아들 이기열씨는 북한에서 열열한 공산주의자로 왕징면 민청위원장을 하다가 왕징인민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고왕리는 고왕산을 뒤로한 남향 동네로 필자(筆者)가 어렸을 때 고왕리 앞을 지나다 본 기억에도 살기 좋은 부자 동네로 기억이 된다. 고왕리에는 연희전문학교 출신이 두 명이 있었는데 한명은 이기열씨이고 또 한명은 김재설(金載卨) 선생이었다.
김재설 선생은 해방 후 왕징학교 선생으로 부임하여 우인기, 윤국중, 정기호, 정가복 등 5학년 단임을 하였는데 김재설 선생의 부친은 원래 汶山분 이었는데, 8.15 광복 전에 소개령으로 고왕리로 와서 살았던 산판 전문가였다고 한다.
김재설선생은 학생들 에계 대단히 존경을 받던 선생님 이셨는데. 1946년 일찍이 고향인 문산으로 월남하여 문산농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는데 인공치하 3개월간은 잘 피했으나 9.28 수복될 때 태극기를 그렸다가 발각되어 빨치산에게 학살당했다고 하며, 그 부인의 친정이 군남면 인데 9.28 수복 후 친정엘 들르는 길에 고왕리도 들른 적이 있다고 한다,
한편 이기열씨의 부친인 이종성씨는 일정 때 왕징면장을 역임하셨던 분으로 역시 왕징면장을 하셨던 윤우병씨와 함께 왕징면 내에서 가장 尊敬받는 분이셨다. 그렇게 존경받는 이종성 씨의 큰 아들인 이기열씨가 해방 후 열렬한공산주의자가 됐다는 것은 당시 왕징면민 모두가 이해가 안 되었다.(앞에서 언급했기 때문에 이하생략)
- 윤석태가 몸담았던 조국보위(祖國保衛) 이야기
북한은 1949년 7월 15일 조국보위후원회(祖國保衛後援會)를 결성 하라는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1949년 8월 말 각 도·시·군·면에 총 269만 명으로 조직된 조국보위를 조직하였다.
북한은 군대 확장에 따른 총동원계획으로,
1) 1949년 이후 고급 중학교에 배속장교 배치하여 군사훈련 강화,
2) 신검대상 전 인민을 1949년 여름까지 병력동원에 준비를 완료.
3) 전시 총동원령이 선포(1950년 7월 1일)로 징집 제외자까 징집,
4) 17~30세까지는 군대 입대, 30~50세까지는 노무자로 총동원. 되었다.
김일성은 1949년 9월 9일 북한정부 창립1주년을 맞이하여, “남조선에서 소위 국방군을 강화하여 동족상쟁의 내란을 야기 시킬 준비를 진행하고 있다”라고 전쟁분위기를 강조하면서 인민군에 입대하지 않은 장정들에게 군 입대를 유도하였다.
당시 북한에서 인민군에 대한 우대조치로 병사들의 식사를 일반 직장의 간부급 식사보다 훨씬 좋았고, 인민군 소좌의 봉급을 정부의 국장이나 도 인민위원회 위원장과 동등한 대우를 했다. 이는 전쟁을 1년 앞둔 군 확장과 사기를 위한 북한당국의 계획된 선전적 조치였다.
속아서 조국보위에 지원한 윤석태
윤석태는 1949년 6.25 전에 왕징면 인민위원회에 다녀오는 길에서 큰댁 아저씨 윤건중(尹建重)을 만났다. 윤건중은 1949년 7월 조국보위 왕징면 요원으로 차출되어 함경도 문천(文川)에서 6개 월 간 훈련받고 와서 1949년 6.25 전에 왕징면 대대장이 된 사람이다(북한은 조국보위조직으로 면은 대대,리는 중대로 조직했다) 인데 1950년 10월 국군이 북진했을 때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도망 간 사람이다.
6.25가 일어나기 전 해인 1949년 어느 날 왕징면 인민위원회에서 윤건중은 윤석태와 함께 고왕리까지 걸어오면서 석태에게 말했다. 통천(通川)에 가서 조국보위 교육을 받고 오면 인민군대도 면제되는 특혜가 있으니 오늘 밤 회의에서 선착순이니 먼저 손을 들어 지원하라고 했다,
순진한 석태는 큰집 아져씨의 권고임으로 믿고 회의에서 지원한다고 손을 들었더니 다른 사람은 아무도 손드는 사람이 없었다, 주위의 눈치들이 석태는 지원 할 사람이 나닌데? 하고 의아해 했다. 사실을 알고 보니 큰집 아저씨 윤건중에게 속아서 15살 석태는 끌려가게 되었다.
1949년 겨울 조국보위 훈련을 받으러 가려고 윤석태는 왕징면 인민위원회엘 가보니. 각 리에서 1명씩 뽑혀온 사람들이 모여 함께 연천군 군사동원부로 갔다. 그곳에서 기곡리 하상렬의 형 하홍렬을 만났다. 내일 북으로 갈 판인데 금강여관에서 자고나니 눈이 많이 왔다.
이 때 기억나는 사람은 고잔하리의 이태수와 동중리와 작동리에서 온 사람인데, 함께 열차편으로 철원을 거쳐 안변(安邊)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통천(通川) 자동역에서 내려 5리 쭘 가니까 백사장이 있는데, 이 백사장에서 군복으로 갈아입고 추운 겨울에 40일 간의 고된 훈련을 받았다
그런데 40일간 훈련 중 사복을 입은 이태수를 만났는데 어떻게 왜? 사복으로 갈아입었는지가 의문이었다, 그리고 그 때 큰집 윤건중의 감언이설에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000여 명이 훈련을 받던 중 하도 힘이 들어 도망치는 자가 발생하였는데, 잡혀 와서 인민재판을 받는 것을 목격했다.
무사히 훈련을 마치고 집에 왔는데 다음해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1950년 7월경 두 번 호출을 바고 연천군 인민위원회에 갔더니 나이가 어려서였는지(15살) 알 수 없으나 집에 가서 기다리라는 지시를 받고 집에 와서 숨어 지냈다.
내친구 이창열(윤석태의 이야기)
일정 때부터 나와함께 초등학교 때 같은 반에서 공부하였던 한동네 친구 이창열(李昌烈) 가족은 월래 인천에 살다가 8.15 해방 전에 소개령에 의해 고왕리로 온 사람이다.
이창렬의 부친 이종룡(李種龍)은 북한에서 왕징면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철저한 공산주의자였다, 1950년 9.28 수복 때 10월 어느 날인가? 38선을 넘어 장단 쪽에서 국군이 진격해 들어오자 국군에게 누군가가 당시 왕징면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인 이종룡을 고발해서 국군이 길에서 사살했는데, 이종룡은 아들 5형제를 두었다, 장남 이수열과 차남 이강열은 인민군이었고, 3남 이창열, 4남 경렬, 5남 호열 등 이었다.
그리고 왕징면이 수복된 이후(1950년 10월)
윤석태 부친(윤철중)은 왕징면이 수복된 1950년 10월 대한청년단 고왕리 단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그해 12월 국군이 후퇴하고 중공군이 밀려 내려오자 윤철중은 한청단장을 한 죄로 고왕리에서 몸을 피했다.
공산당이 다시 왕징면에 돌아온 후 윤석태는 아버지가 미산면 돌대미(석장리)에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더니 아버지는 없었다, 그런데 3일 후 아버지가 집으로 오셨다.
그 때 석태 아버지에게 웃물 댁 아저씨가 집으로 오지 말고 피하라고 했는데 동네 할아버지 벌 되는(빨갱이 이름?)자가 오라고 해서 갔더니 그 빨갱이 할아버지 벌되는 자가 자수하라고 권하여 자수했더니, 1951년 2월 24일 석태부친 윤철중을 비롯하여 부단장 안한순은 인민재판을 받고 구타를 당하여 끌려갔으며, 고종현(인민군갔다가 도망친사람)도 같은 날 어디론가 끌려가 행방불명이 됐다.
풍문에 들려오는 소문은 강내리 사는 한청단원과 함께 원산까지 끌려갔다가. 강내리 사람은 물 떠오라는 심부름 가는 기회를 이용하여 도망쳐 왔다는 사람을 천호동 피난민 수용에서 석태 일가분인 윤헌병씨가 만났다고 한다. 그런데 그 때 끌려 간 사람들은 순천으로 갔다고 하는데 그 후 무소식이다. 그러나 이 같은 소문은 모두 뜬소문으로 윤석태 아버지는 어디서, 언제, 어떻게, 처형(處刑) 되셨는지 알 길이 없다.
15살 윤석태는 졸지에 아버지를 잃고 증조모님을 위시하여 조부모님과 어머니 그리고 어린동생들, 많은 식구들을 모시는 가장(家長)이 되어, 1950년 12월 1.4후퇴 때 이 대가족을 이끌고 미산면 석장리 돌대미로 피난 갔다가 더 갈 수가 없어서 고왕리로 다시 돌아가 숨어 있었다,
3일 지나자 누가 와서 대문을 두드리기에 나가보니 중공군(中共軍)이 왔다. 중공군은 식구들을 모두 건너 방으로 나가라고 하고 안방을 차지하고, 외양간의 소도 끌어내고 군용 말(馬) 3필을 들여 매고, 스이라고 하여 알아듣지 못하다가 물을 떠서 마시라고 하여 물을 마시니까 그 물로 식량을 끓여먹기에 스이가 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멍석과 대문짝을 갔다가 방공호를 만들고, 3일 후 이들 중공군부대는 떠나자 다른 중공군 후속부대가 또 왔다.
1950년 12월 국군이 후퇴하고 북으로 도망갔던 공산당이 중공군과 함께 북에서 다시 내려와 세상이 바뀌자 북으로 갔던 이창렬이 다시 왔는데 창렬에게는 피살자 가족이라고 총울 지급하여 총을 소지하고 다녔다,
이와 같이 다시 세상이 바뀌어 다시 북한정권 세상이 된 이후 왕징면 인민위원회에서 윤석태를 호출하였다. 인민위원회에 가보니 윤석태에게 학습회 강사(宣傳隊)를 하라고 강권하였다. 각 부락을 순회하며 학습강사를 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학습강사를 추천한 사람은 이창렬 이었다.
그러나 창렬이가 한동네에서 함께 학교 다니던 친구였지만 인민위원회에서 시킨 학습강사를 거부하면 자아비판(自我批判)을 해야 할 지경이었기 때문에 생각지도 않던 시국선전대 강사 노롯을 하게 되었다.
다시 돌아온 이창열 자신은 민청(民靑) 조직담당을 하고, 사람이 없어서 그랬는지(모두 남으로피난갔음) 아니면 우정(友情)? 에서였는지? 성분이 다른 나(석태)를 학습강사로 추천하였던 것이다. 그 때 민청 책임자는 동중리 장재수와 한동네 살던 000(성명미상)가 국군이 북진 했을 당시 북으로 도망갔다가 다시 와서 민청책임자로 활동하였다.
그런데 나는 1주일에 1회 인민위원회에서 교재와 강습을 받고 그 내용을 인민위원회에서 지시하는 각 부락을 순회하며 학습을 하였는데, 각 부락에 학습하러 가 보면 부락민들은 12월 말에 국군 후퇴 시에 거의 남으로 피난 갔고, 각 부락에는 빈집이 수두룩하였으며, 그중 피난 가지 못한 젊은 사람들은 모두 잠적하고 피했기 때문에 모이는 사람은 대개 부녀자와 노인들인데 그 조차 모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학습강사(선전대) 상황
학습 강사로 차출되어 강서리 모 여성(성명미상)과 동행하면서 활동 중 강내리에 갔더니 민청위원장 집에 모인사람이 없었다(1.4후퇴 때 모두 남으로 피난갔음). 그러나 활동보고를 하려고 면인민위원회로 왔는데, 강서리에서 차출되었던 그 여자 조부가 와서 야단법석이 났다.
다음날 작동리 쪽으로 가라고 해서 가 보았더니 가마골에 여인들만 3-4명이 모여 있기는 했으나 연설을 들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교재내용을 읽으면서 대충 이야기 하고 돌아오는 중에 앞산에 포진하고 있던 중공군에게 잡혔다.
조사받는 중 집주소를 대라고 해서 집주소를 대고 아버지 소속을 묻기에 민주당원임을 밝히고(북조선에서는 노동당원 아니면 민주당원이었다) 중공군으로부터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인민위원회에서는 고잔상리 환들로 가라고 해서 가다가 또 중공군에게 길 안내자로 잡혔는데, 전투 중에 부상자를 장단군 강상면으로 이송하는 도중인데 귀찬으니까 중상자(重傷者)를 길섶에 던저 버리고 가는 중공군의 무자비 한 상황을 목격했다.
그 이후 1951년 봄에 국군이 다시 북진하여 고왕리에 들어오자 이창열은 주위의 피살자가족(1950년 9.28 수복 후 처형된 자)을 데리고 북으로 다시 도망갔다. 그런데 그 때 함께 간사람 중에는 고왕리 한동네 살던 윤씨네 종의 딸인 김옥녀 편에 창렬이가 나는 북으로 간다는 쪽지를 나에게 전해왔다. 그런데 왜 쪽지를 보내왔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그 이후 윤석태는 1951년 5월 29일 가족과 함께 미군 트럭에 실려 남으로 넘어왔다. 그 지긋지긋하던 북한정권 영역을 벗어나게 된 것이다. 고왕리에서 3가구만 남고 우리들은 모두 미군 트럭에 실려 군남면 옥계리로 나왔는데 이 때 기픈골, 산디, 만석골 살던 사람들도 함께 모두 나왔다.
미군과 한국군의 심사를 받고-동두천을 거쳐-천호동 피난민수용소에 수용되었다.(수용소장 송순무) 이 때 함께 실려나 온 왕징면민 중에는 동창인 허곡, 홍사덕, 동중리의 정모(이름 기억 안남) 노동리와 북삼리사는 000 등등 많은 사람들이 함께 나왔다.
천호동 피난민 수용소에는 연천사람을 비롯하여 장단, 철원사람들 등 많은 사람들이 수용되어 있었는데, 철원사람들은 천호동에 도착하자마자 물건을 어디선가 사다가 피난민을 상대로 장사를 시작하더라.....이때 한편에서는 미군들이 와서 노무자로 젊은 남자들을 잡아갔다,
송파중학교에 수용되어있던 수용소에는 전염병(傳染病)이 창궐했다. 일부는 집이 없어서 움막을 파고 살았다. 배급으로 나오는 밀가루 배급으로 연명하였으나 때로는 간간히 배급이 끊어져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럴 때는 들에 나가 물쑥, 엉겅퀴를 뜯어다가 연명을 했다.
이 같은 고난을 격은 윤석태는 아들을 잘 두어 현재는 아들이 건설회사 설비현장소장으로 현재는 잠실 아파트에서 여생을 여유롭게 잘 보내고 있다. 가끔 왕징초등학교 동창인 윤석태 이동훈 그리고 필자와 옛 이야를 하며 지낸다.
왕징면의 지도급인사 이종성 윤우병 이화영 선생
이동훈(李東勳) 가족은 왕징면에서 1946년도에 서울로 일찍이 월남하였다.
이동훈의 부친이신 이화영(李華榮)선생은 연천군 왕징면의 지도급어른이셨는데,
일정시대에 연천군 서남면 면장을 역임하셨으며,
형 이종훈(李種勳)씨는 광복 후 왕징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월남 후 산업은행에 다녔다.
1950년 6.25가 발발하고 6월 28일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하자
피신 중에 7월 말인가 북한군에게 의용군으로 강제 동원되어 잡혀갔다,
이동훈은 어렵게 학교를 마치고 이병철씨 장조카인 이동희박사가
묵정동에 세운 유명한 제일병원 창립일원으로 참여하여 일생을 제일병원에 복무하고
만년에는 연안이씨 월사(月沙)공 종중의 책임을 맡아 문중의 족보와
월사공 이후의 많은 선현들의 문집 발간 등 종사에 헌신하였다.
그런데 1950년 의용군으로 강제로 끌려간 이종훈 형님께서
평소 에도 병약하여 생존 해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못하였으나,
혹시 전젱 중에서 살아서 북에 계실지 모른다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서
이산가족 상봉신청을 해보았더니 2018년도에 북한에서 77세까지 생존했다는 소식이 왔다.
참으로 기쁘고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살아계셨다면 그 후손인 조카들이라도 만나보도록 신청을 했을 걸....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 하나의 임진강 부근 사람들의 애환으로 남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