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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의견 : 본 자료는 초기 기독교의 가정 교회 연구를 집중적이고 매우 분석적으로 다룬 어떤 개신교분의 논문이다. 비록 여기 쓰인 성경은 킹제임스 성경이 아니지만 어떠한 면에서는 참고가 될 만한 글이라 연구 목적으로 게시해 본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이 점을 유의해서 읽으되 성경본문은 킹제임스 성경과 비교해 가면서 읽어도 좋겠다. 다만 아직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는 교회 진영에서 아직 초기 기독교의 가정 교회에 대한 인식이 다소 부족한 것처럼 교회관에 대한 성경적 연구가 더욱 활발했으면 좋겠다.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
An Analysis of Documents for the Early Family (House) Churches
by 조병수
1939년에 Filson이 초기 기독교 가정교회의 의미에 관하여 발표한 짧은 논문2)은 비록 당시에는 큰 반응을 얻지 못하였지만 이 주제에 관한 논의의 시발점을 놓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Filson이 가정교회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가정교회들의 공헌을 염두에 두지 않고는 사도 교회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가정교회에 관한 관심은 꾸준히 고조되면서 결국 1980년대를 전후로 하여 이 주제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Klauck은 이 시기에 가정교회의 주제가 갑자기 붐을 일으키게 된 이유를 위하여 여러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고 말하면서 특히 현실적인 문제들, 예를 들면 오늘날의 가정에 대한 염려라든가 새로운 생동력있는 교회형태에 대한 추구가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볼 때 신약학계에서 1980년대를 중심으로 초기 기독교에 대한 사회학이 활성화되면서 가정교회에 대한 관심이 더욱 촉진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이제는 가정교회에 관한 문헌이 엄청나게 되었다. 이 주제는 신약학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것이 되었다. 본고는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를 면밀히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이 글에서는 사도행전과 서신서들 그리고 속사도 문서에 나오는 가정교회에 관한 자료들을 수집하여 분석하고, 이후 다음 글에서는 자료분석에 근거하여 가정교회의 의미를 파악하며 문제점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이 논문의 유익은 두 가지이다. 첫째로 이 논문으로 말미암아 초기 기독교의 교회현실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둘째로 이 논문은 오늘날의 교회들이 지향해야 할 성경적인 교회관을 설정하는데 일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I. 자료분석
초기 기독교에서 가정교회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 살펴보기 전에 자료를 수집하여 분석하는 것이 우선적이다. 우리는 신약성경으로부터 능력에 따라 자신의 집을 전교회의 회집이나 개별 그룹모임을 위하여 제공할 수 있었던 그리고 제공할 준비가 되어있었던 남자와 여자들의 이름이 구별없이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을 사도행전, 바울서신, 기타서신, 속사도시대 문서의 순서대로 정리해보자.
1. 가정교회에 대한 사도행전의 증거
사도행전은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에 관한 역사적인 사실들을 상당수 제공하고 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초기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정 중심활동과의 연속성 속에서 예루살렘 교회에서부터 가정집회를 중시하였다. 사도행전은 처음에 다락에 관한 진술 (행 1:13)과 마지막에 셋집에 관한 진술 (행 28:30)로 괄호법을 이룸으로써 마치 가정 (집)이 없으면 기독교도 없다는 듯한 인상을 제공한다.
* 다락방(an upper room) : “그들이 들어가 자기들이 묵고 있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와 빌립과 도마와 바돌로매와 마태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 시몬과 야고보의 형제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형제들과 함께 한 마음이 되어 기도와 간구를 계속하더라. (함께한 사람들의 이름의 수가 약 백이십이더라.) “(행 1:13-15)
* 셋집(hired house) : “바울이 자기 셋집에서 만 이년을 거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매우 확신있게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들을 가르치되 아무도 그를 막지 못하더라.”(행 28:30-31)
1) 팔레스타인의 가정교회 (사도행전 1-12장)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초기 기독교의 모습을 진술하면서 가정을 기반으로 하는 교회의 상황을 여러 곳에서 언급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후에 제자들은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한 집의 일부인 “다락”에 올라갔다 (행 1:13). 그러나 머지않아 집회는 한 집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를 사용하는 규모로 발전하였다. 누가는 사도 베드로가 사도보충설교를 할 때 120명의 성도가 모인 것과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실 때 제자들이 모인 것을 가리켜 (행 1:15; 2:1)라고 한다. 문맥을 살펴볼 때 분명한 것은 누가는 이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의식적으로 기독교 공동체의 집회 (한 장소에 모인 그룹이건 전체 공동체이건)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 표현이 건물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성령강림의 현상이 “온 집에 가득하였다”는 것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처음에는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집회가 성전회집과는 상이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성전에서 행한 일과 가정에서 행한 일이 선명하게 구별되어 진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성전에서와 달리 가정에서는 주로 식사교제가 이루어졌던 것 같다. 이것은 행 2:46f.의 구조를 살펴보면 선명하게 드러난다.
“또 날마다 한 마음이 되어 성전에 거하고 집에서 집으로 돌아가며 빵을 나무면서 단일한 마음으로 즐겁게 자기들의 음식을 먹으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호감을 얻으니 주께서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을 날마다 교회에 더하시니라.”(행 2:46-47)
첫째로 두 개의 분사가 나오고 다음에 주동사가 따르고 결국에 두 개의 분사가 이어진다. 처음 두 개의 분사는 장소 (성전과 가정)를 지시하고, 나중 두 개의 분사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태도 (찬미와 칭송)를 묘사한다. 이것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성전에서 한 일과 가정에서 한 일이 달랐다는 것을 입증한다. 성전에서의 집회는 모든 신자의 공개적인 모임인 반면에 가정에서의 집회는 식사교제에 치중해있었다. 본 절의 주동사 에 의하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공동식사가 매우 중요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 공동식사는 주로 집에서 떡을 떼는 일로 시행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초기 기독교에서 가정집회의 성격은 상당히 변화 또는 발전한 것 같다. 가정에서도 교육이 이루어졌다. 이런 사실은 행 5:42에서 분명하게 엿보인다.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서와 모든 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선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행 5:42)
이 구절에서는 가정이 성전과 마찬가지로 교육과 전도가 시행된 장소로 소개된다. dida,skein과 euvaggeli,zein은 하나의 개념으로서 설교를 가리키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런 이중표현은 행 15:35에도 등장한다. 또는 euvaggeli,zein은 dida,skein을 내용적으로 자세히 규명하는 것일 수 있다. 이제 가정집회는 단순히 교제의 차원을 넘어서 교육의 차원으로 전진하였다. “바울과 바나바도 안디옥에 머물며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선포하니라.”(행 15:35)
누가는 스데반의 순교사화를 마무리하면서 회심 전의 사도 바울의 기독교 핍박사건을 압축적으로 묘사한다. 사도 바울은 회심 전에 “그는 교회를 크게 파괴하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와 여자를 끌어다가 감옥에 넘겨주는 자더라.”(행 8:3). 이 구절은 교차대조의 구조가운데 각각 하나의 분사를 지닌 두 개의 동사로 이루어져있다. 첫째로 “교회를 잔멸한 것”과 “각 집마다 다닌 것”이 연결되어 있으며, 둘째로 “남자들과 여자들을 끌어간 것” 과 “옥에 가둔 것”이 연결되어 있다. 후자의 경우에서 중요한 것은 남자들과 여자들이 교회의 구성원으로 나란히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잠시 멀리하고 먼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전자의 경우에 나타난 교회와 가정의 관계이다. 이것은 초기 기독교가 가정 복음화에 얼마나 주력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을 뿐 만 아니라, 초기 기독교의 교회가 가정을 근거로 하여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진술이다. 누가는 회심 전의 사도 바울이 교회를 파괴한 것과 성도의 각 집에 진입할 것을 동일한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 언급된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를 가리킨다(행 8:1). “사울이 그의 죽음에 동의하더라. 그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있어 사도들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지역으로 널리 흩어지니라.”(행 8:1)
예루살렘 교회는 성도의 가정들로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가정들은 일종의 가정교회였을 것이다. 이 구절에서 동사들을 제외한다면 가정교회를 나타내는 바울의 표현법과 거의 다를 바가 없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누가에 의하면 회심전의 사도 바울은 가정집회를 파괴하는 것이 예루살렘 교회를 파괴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가정교회와 관련하여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로마군대의 백부장 고넬료의 회심사건이다. 고넬료는 기독교의 진리에로 회심하기 전에도 “온 집이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던 사람이었다. 고넬료는 기독교의 진리를 듣기 위하여 사도 베드로를 자신의 집으로 (행 10:22,30; 11:12) 초대하였다. “그들이 이르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로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온 유대 백성 사이에서 좋은 평판을 얻었더니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거룩한 천사 편에 지시를 받아 당신을 자기 집으로 초청하여 말씀을 들으려 하나이다, 하매…고넬료가 이르되, 내가 나흘 전에 이 시간까지 금식하고 아홉시에 집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보라, 한 남자가 빛나는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성령께서 내개 명하사 아무것도 의심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라 하시기에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행 10:22,20, 11:12)
이때 고넬료는 자신의 집에 그의 “일가와 가까운 친척들” 을 모았다 (행 10:24). “그 다음 날 그들이 가이사랴에 들어가매 고넬료가 자기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함께 부르고 기다리더니”(행 10:24) 고넬료는 사도 베드로를 통하여 구원을 얻을 말씀을 들어야 할 대상이 자신 뿐 아니라 “온 집”(행 11:14)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것을 매우 폭넓은 범위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가 네게 말씀을 전하리니 그 말씀으로 너와 네 온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다, 하거늘”(행 11:14) 이것은 고넬료의 가정이 실제로 그의 집에서 살지 않았던 사람들까지 포함하는 확대가정이었던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사도 베드로의 구원설교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문하였다 (행 10:48). “그들에게 명령하여 주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게 하니라. 그 때에 그들이 베드로에게 여러 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행 10:48)
사도행전에서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진술된다. 그 집에서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가니 거기에는 많은 사람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행 12:12). 이 구절은 마리아의 집이 두 가지 목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선 마리아의 집은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집회소로 사용되었다. 여기에 집회를 위하여 사용된 동사는 누가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으로서 특별한 모임을 서술하고자 할 때 사용되는 것이다. 이 집에서 충분한 수의 사람들이 집회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집이 상당한 규모를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실제로 이 단락이 대문과 여종을 언급하는 것으로부터 이 사실은 분명하게 입증된다. 둘째로 마리아의 집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는 기도처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마리아의 집이 핍박의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은밀한 예배처소로 제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리아의 집은 예루살렘 교회에 속한 여러 가정교회들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헤롯은 예루살렘 교회(행 12:1)를 파괴시키기 위하여 야고보를 처형하고 (행 12:1), 베드로를 체포하였다 (행 12:4).
이때 예루살렘 교회는 체포당한 베드로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행 12:5). 예루살렘 교회의 기도는 여러 개의 가정교회에서 행해졌던 것이 틀림없다. 베드로가 천사의 도움으로 해방되어 찾아간 마리아의 집은 분명히 여러 개의 가정교회들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가 마리아의 집에 도착한 후에 자신의 해방에 관하여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전하라 하고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가니라.”(행 12:17)는 사실로부터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두 가지 점이 돋보인다. 첫째로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는 다른 가정교회들이 집회장소와 예배처소로 제공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로 베드로가 “다른 곳으로” 갔다는 것은 제3의 가정교회를 의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가는 (오순절 후에) 공동체 전체가 한 장소에 회집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기록이 정확하다고 할 때, 신자의 수는 오순절의 결과로 3000명에 달하였다 (행 2:41; 참조. 4:4; 5:14; 6:7). 이렇게 많은 숫자는 신자들이 한 집에 모이지 못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베드로 자신이 마리아의 집에 모인 그룹에게 자신이 해방되었다는 것을 아마도 다른 곳에서 모이고 있는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말하라고 지시한 것은 집회장소가 여러 곳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예루살렘의 초대교회 내에 (잠정적으로건 그밖에 무엇으로건) 분쟁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이것으로부터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신자 (심지어 다수를 이루고 있는)를 한 지붕 아래 모이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는 사실이다”.
“그 때에 그의 말을 기쁘게 받아들인 침례를 받으매 바로 그 날에 삼천 혼 가량이 그들에게 더해지니라.”(행 2:41)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들은 사람 가운데 믿는 이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쯤 되더라.”(행 4:4)
“믿는 사람들이 주께 더 많이 더해지니 남자와 여자의 큰 무리더라.”(행 5:14)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제사장들의 큰 무리도 이 믿음에 순종하니라.”(행 6:7)
2) 이방선교의 가정교회 (사도행전 13-28장)
누가는 이방선교에서 가정교회의 형성을 팔레스타인의 가정교회보다도 훨씬 더 분명하게 기록한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루디아의 경우이다. 빌립보에서 사도 바울의 말을 듣고 기독교 신앙에 들어오게 된 루디아는 집과 함께 다 침례를 받았다. “그녀와 그녀의 집안이 침례를 받고”(행 16:15) 여기에서 누가 “집” 의 구성원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루디아가 자신의 집과 함께 침례를 받았다는 것은 이 사건으로 이미 가정교회가 건설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루디아의 집은 사도들이 빌립보에서 활동하는 동안 거점이 되었고, 나아가서 빌립보 초대교회의 본부가 되었으며, 빌립보에서 선교교회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이러한 사실은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나온 후에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 형제들을 만나고 그들을 위로하고 떠나니라”(행 16:40)는 말에서 분명하게 입증된다.
사도 바울이 복음사역에서 가정을 매우 중요시하였다는 것은 빌립보 감옥의 간수장과의 대화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감옥의 간수장에게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행 16:31)고 말하면서 “그와 그의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행 16:32) 복음을 전하였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개인전도 만큼이나 가정전도에도 총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로 말미암아 빌립보 감옥 간수장은 “자기와 자기의 온 가족이 즉시 침례를 받은 뒤에”(행 16:33). 결국 간수장과 함께 그의 “온 집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행 16:34) 된 것이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감옥의 간수장을 대상으로 사역한 가정전도는 그의 온 집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놀라운 열매를 맺었다.
사도행전은 가족이 복음화되었다는 증거를 많이 제시한다. 사도 바울이 드로아에서 작별하기 전에 마지막 집회를 가졌을 때 “주의 첫날에 제자들이 빵을 나누려고 함께 나오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며 계속해서 한밤중까지 말을 하니라. 그들이 함께 모인 다락방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유두고라 하는 젋은이가 창문에 걸터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오랫동안 말씀을 선포하매 졸다가 삼층 다락방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더라. 이에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를 껴안고 이르되, 그의 생명이 그 속에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 하고 그러므로 다시 올라가 빵을 나누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리라. 사람들이 살아난 젊은이를 데리고 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행 20:7-12), 청년 (행 20:9)이자 아이 (행 20:12)인 유두고가 그 집회에 참석한 것은 가족이 함께 참석한 것임을 암시한다. 이런 의미에서 드로아 집회는 가족교회들의 연합집회였을 것이다. 사도 바울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기 위하여 두로를 통과하였을 때 (행 21:4-6), 두로의 제자들은 “다 아내들과 자녀들과 함께” (행 21:5) 사도 바울을 전송하였다. 이것은 두로의 신자들에게 가족이 복음화되어 있었던 것을 보여준다. 결국 가족의 복음화는 가족 교회 (Family church)를 형성하게 되었다. 가족교회는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조직이다.
누가는 사도 바울이 전체 집회만큼이나 가정집회를 중시했다는 것을 증거한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 대한 설교 (행 20:18-35)에서 자신의 사역을 요약하면서 자신의 목회는 전파와 교훈이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되었다고 말한다.
”너희에게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숨기지 아니하고 보여 주며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너희를 가르치며”(행 20:20) 사도 바울이 거리낌없이 전파하고 가르친 것은 “유익한 것” (행 20:20)이었다. 그런데 이 전파와 교훈은 “공중 앞에서나 집에서나” 행해졌다 (행 20:20). “공중 앞에서”는 아마도 전체집회를 의미하는 것이며, “집에서”는 가정집회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목회에서 전체집회뿐 아니라 가정집회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2. 가정교회에 대한 바울서신의 증거
사도행전 못지 않게 바울서신도 가정교회에 관하여 상당히 많은 자료를 제공한다. 이것을 성경의 순서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로마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6장에서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로마서 16장은 로마에 여러 개의 가정교회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증거한다.
(1) 발신자의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에 아마도 최소한 두 개의 지역교회와 관련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첫째로 겐그레아 교회이다. 이 교회는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 (집사)으로서 여러 사람과 사도 바울의 보호자가 되었던 뵈베의 집을 거점으로 형성되었을 것이다. ”내가 겐그레아에 있는 교회의 종 우리의 자매 뵈베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의 마땅한 도리로 그녀를 영접하고 무슨 일이든지 그녀가 너희를 필요로 하거든 도와 줄지니 이는 그녀가 여러 사람과 나의 후원자가 되었음이라.”(롬 16:1-2).
둘째로 고린도 교회이다. 이 교회는 가이오의 집에서 형성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나와 온 교회를 접대하는 가이오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도시의 재무관 에라스도와 또한 형제 구아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롬 16:23)
그래서 가이오는 “온 교회의 식주인” 이라고 불린다. 바울의 동역자 디모데를 빼더라도 바울의 친척 누기오, 야손, 소시바더를 비롯하여 (롬 16:21), 대서인 더디오 (롬 16:22), “이 도시의 재무관”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 (롬 16:23)이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 외에도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자신의 주위에 또 다른 교회들이 있다는 것을 명시한다.
“그들은 내 생명을 위하여 자기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의 모든 교회들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또한 그들의 집에 있는 교회에게도 인사하라.(롬 16:4-5);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한하느리라”(롬 16:16)
이것은 지금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쓰고 있는 지역의 가족교회들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 수신자의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이 단락에서 “문안하라”는 말을 16번 사용하고 있다 (롬 16:3, 5, 6, 7, 8, 9, 10a, 10b, 11a, 11b, 12a, 12b, 13, 14, 15, 16).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인사의 말을 가지고 때로는 한 개인에게45), 때로는 두 인물에게, 때로는 여러 사람에게 문안을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문안하라”는 말은 아마도 로마교회 안에 있던 여러 가족그룹들을 대상으로 삼고 있는 듯이 보인다는 것이다. 로마교회 안에는 여러 개의 작은 교회들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이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입증해주는 것은 다음과 같은 가정들이다.
첫째로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가정에 교회가 있었다.
“또한 그들의 집에 있는 교회에게도 인사하라.”(롬 16:5).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본래 본도에서 출생하여 로마에 거주하다가 클라우디우스 (Claudius) 황제의 추방령에 의해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체류한 후에 (행 18:2) 에베소로 이동하였고 (행 18:18f.) 결국은 다시 로마로 돌아간 것 같다. 고린도에서 사도 바울은 처음에 체류와 직업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사용했던 이 부부의 집에서 고린도의 도시선교를 전개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바울과 이 부부를 중심으로 하는 가정교회가 형성되었다. 사도 바울의 직업은 생계유지를 가능하게 했을 뿐 아니라 선교사업을 결실시키는 사회적인 접촉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 부부는 사도 바울과 함께 에베소로 건너가서 또 다시 가정교회를 설립하였는데 (고전 16:19), 여기에서 심지어 아볼로와 같은 인물을 깊은 신앙으로 양육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행 18:26). 어떤 이들은 브리스가와 아굴라에 대한 인사에 이어 언급된 에배네도 (롬 16:5)가 이 부부의 일군 또는 노예로서 복음을 받아들여 이 부부와 함께 가정교회의 일원이 되었다고 추정한다.
왜냐하면 이 구절에서 에배네도는 “그리스도를 위한 아시아의 첫 열매”로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능한 해석이다. 그렇다면 에배네도는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로마로 귀환할 때 동행하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에배네도는 이들과 함께 사도 바울의 로마교회 문안목록에 등장하는 것이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로마에 도착하여 새로운 가정교회를 설립하고 로마방문을 계획하고 있는 사도 바울을 영접할 준비를 했을 것이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이 가정교회를 근거로 하여 두 가지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로 그들은 사도 바울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이라도 내놓았고,
둘째로 이방인 교회들이 감사할 정도로 봉사를 하였다 (롬 16:4).
이렇게 볼 때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가정교회는 사도 바울의 선교본부로서 충실한 임무를 감당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놓여서 안될 사실은 사도 바울이 아내 브리스가를 남편 아굴라보다 먼저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더욱 뛰어난 활동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아리스토불로의 권속에게” (롬 16:10b) 문안한다. 아리스토불로가 헤롯 가문의 일원이라면, 그가 기독교인 노예들을 이끌고 유대로부터 로마에 옴으로써 기독교가 로마에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바로 이어서 언급되는 헤로디온은 유대인으로서 (바울의) 아리스토불로의 권속과 모종의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롬 16:11a).
셋째로 사도 바울은 “나깃수의 권속 중에 주안에 있는 자들” (롬 16:11b)에게 문안하고 있는데, 이것은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나깃수의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님 안에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 의 사람들” 이라는 표현은 가족 또는 가솔을 가리킨다.
넷째로 아순그리도, 블레곤, 허메, 바드로바, 허마에게는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 (롬 16:14)이 있었다. 이 이름들 가운데 몇은 신화적인 이름들이다 (허메와 허마). 이것은 이 사람들이 노예이거나 노예상태로부터 풀려난 사람들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가정교회는 부분적으로 이런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다섯째로 빌롤로고, 율리아, 네레오, 그의 자매, 올름바를 중심으로 하는 가정교회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들” (롬 16:15)이 있었기 때문이다57). 네레오와 그의 자매가 이 가정교회에 속했다는 사실로부터 이 가정교회가 부분적으로 가족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은 만일에 빌롤로고와 율리아가 부부라면 더욱 확실한 일이다58).
이로부터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끄집어 낼 수 있다.
무엇보다도 로마에는 전면에 드러난 가정교회 지도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로 이러한 가정교회 지도자들은 로마의 여러 신앙지도자들은 먼저 자신들의 가족을 중심으로 최소단위의 교회를 이루고 있었다. 이것은 가족교회 (Family church)이다.
셋째로 이 가족교회에 방문자들과 손님들이 가담하여 가정교회 (House church)가 되었다. 특히 위의 마지막 두 경우를 살펴볼 때 가족교회가 가정교회로 확대되었다는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아순그리도, 블레곤, 허메, 바드로바, 허마에게는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 (롬 16:14)이 있었고, 빌롤로고, 율리아, 네레오, 그의 자매, 올름바는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들” (롬 16:15)이 있었다. 여기에 언급된 “형제들” (롬 16:14)과 “성도들” (롬 16:15)은 불특정인을 가리키는 표현처럼 보이지만 분명하게 이름을 제시하고 있는 사람들의 집에 예배하러 모여 두 개의 가정교회를 이룬 방문자들과 손님을 의미한다. 이 사람들과 함께 사도 바울이 중요하게 여기는 로마의 여러 신앙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집에 로마에 가정교회를 건설했던 것이다. 이것은 처음에 가족으로 시작된 교회가 가정교회로 발전하여 성장한 증거를 보여준다.
넷째로 로마에 있는 가족교회들 또는 가족교회들로부터 발전한 가정교회들은 연합하여 한 지역교회를 이루었다. 이것이 로마교회이다 (롬 1:7).
이렇게 로마 교회에는 여러 개의 작은 가족교회들 또는 가족교회들로부터 발전한 가정교회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2) 고린도전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의 도입부분에서 분쟁의 소식을 전달해준 “글로에의 사람들”에 관하여 언급한다 (고전 1:11). 글로에는 성별이 분명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이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따라서 글로에의 집이 가정교회로 사용되었는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또한 사도 바울은 그리스보와 가이오에게 침례를 주었다는 것을 명시한다 (고전 1:14).
사도행전에 의하면 그리스보는 회당장으로서 “그의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었다고 한다 (행 18:8). 이것은 그가 자신의 집을 가정교회로 제공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61). 가이오는 로마서에서 “온 교회의 식주인” (롬 16:23)으로 소개되었다. 이것은 가이오의 집이 가정교회로 사용되었지만 때때로 전체 교회의 회집장소로 제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에 이런 추측이 옳다면 고린도에는 하나의 지역교회와 여러 가정교회들이 병존했으며 다양한 회집형태가 있었다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63). 이것은 지역교회가 성장하게 되어 여러 가정에서 집회를 가지게 되었다는 의미보다는, 여러 가정교회들이 연합하여 지역교회를 이루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자면 가정교회가 지역교회보다 시간적으로 우선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가정교회들은 중요한 결정이나 성찬을 위하여 전체교회의 모임을 가졌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고전 14:23에서 잘 드러난다.
고린도전서에서 가정교회 개념은 스데바나와 관련하여 가장 분명하게 발견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스데바나의 가족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고전 1:16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침례를 주었고” 고전 16:15 “스데바나의 집”). 마찬가지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집도 가정교회로 사용되었다 (고전 16:19).
3) 갈라디아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게 자선을 강조하면서 특히 “믿음의 가정들에게” 착한 일을 하라고 권면하고 있는데 (갈 6:10), 이것은 가족교회들을 고려할 것을 말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4) 골로새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골로새와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것을 언급한다 (골 4:13,16).
특히 라오디게아에는 최소한 여러 개의 가정교회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눔바라는 여성의 집에 있는 교회가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녀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골 4:15). 라오디게아 교회는 눔바라는 여성의 가족교회가 확대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만일 이 구절을 사본읽기에 따라서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들의 집에 있는 교회”라고 읽는다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형제들의 집을 거점으로 삼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가정규칙을 제시한 것은 가정교회를 전제로 한 것일 수 있다 (엡 5:22-6:9; 골 3:18-4:1). 다시 말하자면 가정규칙은 가정교회들의 생활과 윤리를 위한 지침이다70). 특히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설명한 것은 가족교회의 정당성을 더욱 확실하게 해준다 (엡 5:22-33).
5) 빌레몬서
빌레몬서에서도 가정교회가 발견된다. 사도 바울이 문안하는 동역자 빌레몬과 자매 압비아와 군사된 아킵보가 한 가족이라고 생각할 때, 빌레몬의 집에 있는 교회 (몬 2, “네 집에 있는 교회”)는 일차적으로 가족교회를 가리킨다. 빌레몬의 가족교회는 “성도들” (몬 5,7)이 가세하여 가정교회가 되었다. 빌레몬서가 골로새서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골로새 교회는 빌레몬의 가족교회가 확대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72).
6) 데살로니가전서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를 마치면서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들리라” (살전 5:27)고 권면한 것은 전체집회를 염두에 두었다기보다는 각각의 가정교회에 있는 부분집회를 고려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73).
7) 목회서신
사도 바울이 디모데전서에서 직분자들을 세우는 일과 관련하여 집을 잘 다스리는 것을 조건으로 삼은 것은 가족교회의 지도를 말하는 것일 수 있다 (딤전 3:4,12). 이때 사도 바울이 감독의 직분을 위하여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서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 (딤전 3:5)라고 말한 것은 가족교회를 지도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집” 딤전 3:15)도 지도할 수 없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또한 사도 바울이 디모데후서에서 축복했던 오네시보로의 집도 가정교회의 경우에 속할 것이다 (딤후 1:16; 4:19). 특히 사도 바울이 거짓 교사들은 신자들의 집에 침투하여 (딤후 3:6) 전복시킨다 (딛 1:11)고 말한 것은 단순히 신자의 가정을 의미한다기보다는 가족교회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3. 히브리서
히브리서에서 가정교회에 관한 자료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은 열어두어야 한다.
4. 요한서신
만일에 요한이서의 수신자인 evklekta,를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실제인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면75) 자녀들과 함께 (요이 1,13) 이룬 가정교회를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삼서에는 발신자인 장로의 교회 (요삼 6) 외에 수신자가 속해있는 교회가 언급된다 (요삼 9)76). 그런데 후자의 교회는 최소한 두 개의 가정교회로 구성된 것처럼 보인다. 이 교회에는 장로를 지원하는 가이오 (요삼 1)와 장로를 반대하는 디오드레베 (요삼 9)가 중요한 역할을 점유하고 있었다. 가이오와 디오드레베는 각각 가정교회의 지도자로서 활약을 했던 것이다. 가이오의 가정교회에는 데메드리오를 비롯하여 “친구” (fi,loi)들이라고 불리는 신자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요삼 15), 디오드레베의 가정교회에는 “그들” (auvtw/n)이라는 총칭 하에 디오드레베의 추종자들이 있었다 (요삼 9). 그런데 이 두 가정교회는 장로의 선교정책에 대하여 서로 다른 입장을 취했다.
5. 속사도시대
가정교회 (또는 이보다 앞선 형태로서의 가족교회)는 신약성경 직후의 속사도 시대에도 계속되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디다케 (Didache)는 기독교의 교사들이 순회하는 중에 어느 가정에 숙박하게 되었을 때 세례와 성찬을 갖춘 예배를 인도했던 것으로 증거한다 (Did 11). 이것은 순회전도자들의 방문을 받는 가정들이 가족교회와 같은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가족교회 또는 가정교회의 모습이 이그나티우스의 서신들 (IgnSmyr 13:1-2; IgnPol 8:2), 헤르마스의 목자 (Sim 5,3,9), 빌립행전 (ActPhil 69)에서도 언뜻 발견된다. 저스틴의 순교사에 의하면 2세기 경 로마에 가정교회가 있었다. 저스틴은 모든 성도가 한 장소에 모일 수 없었다고 말하면서 “나는 Timiotinian 목욕소 근처에서 어떤 Martinus라는 사람의 윗층에 살고 있는데 그의 집 외에 다른 곳에도 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MartJustin 3,3)고 증언한다. 이 말은 로마에 여러 개의 가정교회가 있었다는 것을 설명한다. PsClemRecg 71,2는 안디옥의 Theolphilus에 관하여 말하면서 “아주 큰 열정을 가지고 자기 집의 큰 공간을 교회의 이름 하에 헌물했다”고 한다. 이 말로부터 예배를 드리도록 자신의 집을 내놓은 경우들을 발견하게 된다.
초기 기독교는 지역교회와 가정교회라는 이중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초기 기독교에서 지역교회와 가정교회는 서로 별다른 관계없이 존재하는 단순한 공존을 넘어서 때로는 단절을 보이고 때로는 연결을 보이는 복잡한 상생을 실현하였다. 지역교회는 가정교회들에 의하여 구성되면서 동시에 가정교회들은 지역교회에 의하여 보호되었다. 가정교회들이 상합하여 전체적인 지역교회로 발전하였고, 지역교회는 가정교회들에 개별적인 가치를 인정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중구조 속에서 가정교회는 보다 근본적인 형식으로부터 유래하였다. 그것은 가족교회이다. 가정교회의 근간에는 가족교회가 있었다. 가족교회는 초기 기독교에서 최소단위의 교회였다. 가족교회는 더 이상 분할될 수 없는 가장 작은 교회형식이었다. 초기 기독교에서 지역교회가 강력한 인상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배경에 가정교회가 있었기 때문이며, 가정교회가 강력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근간에 가족교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초기 기독교가 가정복음화에 힘을 기울인 이유이다. 신약성경 (그리고 속사도시대 문서)을 살펴보면 초기 기독교가 가정집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발견하게 된다. 가정에서 교회가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초기 기독교는 가정교회의 시기였던 것이다. 이제 이와 같은 자료분석에 이어 초기 기독교에서 가정교회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 포괄적으로 살펴보고 문제점을 생각해보면서 오늘날의 교회를 위하여 어떤 의미를 제공하는지 고찰해야 할 과제가 남아있다.
II. 의미분석
초기 기독교의 교회 형태를 재구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작업을 가능하게 하는 자료는 유일하게 신약성경이 제공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사도행전과 바울서신 그리고 신약성경의 후반부를 차지하고 있는 책들이 가장 생생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하지만 재구성 작업에 어려운 점은 이런 자료들조차도 특정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목적 그 자체가 일차적으로 초기형태의 교회 모습을 사료적 (史料的)으로 묘사하는데 있지 않다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의 교회 형태에 관한 대부분의 자료들은 어떤 주요목적 (예를 들면 교리와 선교 등등)에 종속하는 이차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이런 자료들에 들어있는 초기 기독교의 교회 형태에 관한 진술들이 기록자의 필요와 수신자의 상황에 따라 기록되었다는 것도 재구성에 난점이 된다. 다시 말하자면 이런 진술들은 대부분 조직적으로 어느 부분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마다 산발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초기 기독교의 교회 형태를 재구성하는 일을 힘겹게 만드는 것은 심지어 이런 진술들까지도 문맥에 필요한 것을 소개하고 있을 뿐이지 교회 형태에 관한 모든 것을 싣고 있지는 않다는 데 있다. 사실상 초기 기독교의 교회 형태에 관한 자료들은 대부분 부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점들에 불구하고 우리는 앞에서 초기 기독교의 교회 형태를 재구성해보는 일을 시도하였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사도행전과 바울서신 그리고 신약성경의 후반부에 속한 책들은 내용상 간접적으로라도 교회문제와 상당히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초기 기독교의 교회 형태를 재구성하는 일에 적지 않은 가능성을 제시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초기 기독교의 교회 모습을 설명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닌 까닭은 신약성경의 모든 진술의 배경에 교회론이 깔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진술들을 면밀히 조사한 후에 내리는 결론은 초기 기독교의 교회 형태는 가족교회로부터 출발하여 가정교회로 발전하고 결국은 지역교회로 확립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가정교회는 가족교회와 지역교회 (오늘날의 노회적 개념으로서)의 중간단계이다. 사도행전과 바울서신 그리고 신약성경의 후반부 책들이 제공하는 자료에 의하면 초기 기독교에 가족교회와 지역교회를 연결하는 가교로서의 가정교회가 존재했을 뿐 아니라 이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제 이 글에서는 가정교회가 초기 기독교를 위하여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 고찰해보고자 한다.
초기 기독교를 위한 가정교회의 의미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두 가지 사항에 주의하고자 한다. 첫째로 주의해야 할 것은 초기 기독교의 태동 당시에 가정이 어떤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둘째로 주의해야 할 것은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가 가지고 있던 구조는 무엇이었느냐 하는 것이다.
1. 가정교회의 배경
초기 기독교가 태동하던 시대에는 로마제국의 모든 사회가 가정 공동체 (household community, oikonomia)의 분위기가운데 존재하고 있었다. 실제로 가정은 그 자체로 정치적인 기본단위였다85).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 당시에 가정은 사회의 여러 부분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점유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신약성경이 구원의 진리를 나타내기 위하여 자주 가정의 표상을 사용한 것은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대단히 흥미로운 것은 당시의 가정이 혈연적인 성격을 넘어 종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의 가옥은 그리스인과 로마인에게 생활공간이었을 뿐 아니라 신들에게 헌정된 가정제단으로 기능을 하였다. 이런 까닭에 당시의 이교도들은 대단히 쉽게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를 종교적인 단체로 파악하였을 것이다. 여기에서 어느 정도 이교도의 가정제단과 기독교의 가정교회 사이에 순전히 어떤 외면적인 관계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결코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가 그리스와 로마의 이교적인 가정제단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91). 오히려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는 구약의 이스라엘 (신 6:4-9)과 중간기의 유대교 (눅 1:58)가 보여주는 가정신앙에 연속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초창기에 형성했던 가정회당 (Haussynagogen)과 연계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초기 기독교가 선교의 중심을 회당 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 두었다는 사실은 유대인 가정회당이 새롭게 형성되는 기독교 가정교회의 본래적인 모범이었다는 이론을 제시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뿐 아니라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초기 기독교에 가정교회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가정교회에 대한 신학적인 의의와 이상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학적인 의의와 이상이야말로 초기 기독교가 이방종교의 가정제단 뿐 아니라 유대교의 가정회당과도 질적으로 차이가 나는 가정교회를 형성시키고 견지시킨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가정교회의 구조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는 단순하면서도 단순하지 않은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를 나타내는 가장 적절한 표현은 “...의 집에 있는 교회”(롬 16:5; 고전 16:19; 골 4:15; 몬 2)이다.
이것은 어떤 지역에 있는 전체 그리스도인이 한 가정에서 집회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관련된 가족들이 한 가정에 모이는 것을 의미한다. 틀림없이 사도 바울은 가정에 기초한 개별적인 그룹들을 말함으로써, 경우에 따라 모이는 전체교회 (롬 16:23; 고전 14:23; 참조. 고전 11:18,20,33,34)와 차별을 두고 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더 큰 규모의 기독교 운동인 교회 (evkklhsi,a)와 구별하기 위하여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표현은 기독교 운동의 기본 세포 (basic cell)를 가리키는 것이며 그것의 핵은 실존하는 가족이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초기 기독교 당시에 가정에는 직계 가족에 더하여 노예, 자유인, 하인, 노동자, 동업자와 고용자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97), 가정교회가 다음과 같은 구성원으로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가장 좁은 의미에서 가정교회는 빌레몬의 경우에서처럼 직계가족으로 이루어졌다 (부모와 자녀, 몬 1-2). 추측컨대 그리스도인 이전의 바울이 초기 기독교를 핍박하면서 신자들을 체포하였을 때 “남자들과 여자들” (te. a;ndraj kai. gunai/kaj, 행 8:3)이 언급되는 것은 가정교회 구성의 핵심인 부부들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사도 바울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길에 두로의 신자들과 작별할 때 그들이 “그 처자와 함께” (행 21:5) 바울을 전송했다는 것은 직계가족이 가정교회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가정교회는 조금 확대되면 직계가족을 넘어 친척과 친구들이 참여하였다. 이 사실을 위하여 고넬료의 회심 사건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사실상 이 사건에서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 (행 10:24)은 고넬료의 회심 전에 모인 사람들을 가리키지만 이야기의 결말 (행 10:44-48)에 그들이 결국 기독교 신앙에 입문했다고 말하는 것은 가정교회의 확대구성을 의심할 바 없이 확신시킨다. 더 나아가서 확대된 가정교회에는 부하와 하인이 포함되기도 한다. 이것을 위하여 역시 고넬료의 회심 사건에 등장하는 고넬료의 하인 둘과 군졸 (행 10:7)과 예루살렘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모인 가정교회에서 활약한 마리아의 하녀 (행 12:13)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초기 기독교에서 가족교회와 가정교회는 어느 정도 구분되어 이해된 것으로 추측된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의 시작 부분에서 언급했던 스데바나의 집을 종결 부분에서 다시 한번 언급하는데 (고전 1:16; 고전 16:15), 해당단락 (고전 16:15-18)을 분해해보면 직계가족으로 이루어진 가족교회와 친구 (또는 하인)까지 포함하는 가정교회를 구분해서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도 바울은 우선 스데바나의 집이 아가야의 첫 열매로서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자신들을 드렸으므로 이런 자들에게 복종하라고 말하고 (고전 16:15-16), 또한 스데바나와 보드나도와 아가이고의 방문을 기뻐하면서 이들이 고린도 교회의 부족함을 보충하였기에 이런 자들을 알아주라고 말한다 (고전 16:17-18). 이렇게 볼 때 사도 바울은 전반에 나오는 사람들과 후반에 나오는 사람들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사도 바울이 스데바나와 관련된 사람들을 두 부류로 구분하는 것은 전자로는 직계가족으로 구성된 가족교회를 염두에 두고, 후자로는 친구/하인으로 확대된 가정교회를 생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보여주듯이 고린도에는 스데바나의 가정교회 외에도 여러 중요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하여 모이는 가정교회들이 있었다. 이렇게 가정에 기초한 개별적인 그룹들이 경우에 따라 지역교회로 모이고 (고전 11:18,20,33,34),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 (고전 11:22) 또는 “온 교회” (고전 14:23; 참조. 롬 16:23)라고 불리었다. 가족교회가 가정교회와 구분되는 것보다 가족/가정교회가 지역교회와 구분되는 것은 더욱 선명했던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정리해보면, 초기 기독교의 교회 형태는 구성원에 따라서 세분하여 설명될 수 있다. 직계가족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가족교회 (Family Church)라고 부를 수 있으며, 친척이나 친구가 동참하는 경우에는 가정교회 (House Church)라고 말할 수 있으며, 부하와 노예가 포함된 것은 가문교회 (Household Church)라고 말할 수 있다. 한 도시 안에는 여러 개의 가족교회, 가정교회, 그리고 가족교회가 존재할 수 있었다. 지역교회 (Local Church)는 위에 언급한 여러 형태의 가정교회들이 연합하여 이루어진 것으로서 오늘날의 노회와 유사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3. 가정교회의 의미
그러면 초기 기독교에서 가정교회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은 크게 보면 내적인 의미와 외적인 의미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더 세분하면 가정교회의 의미는 물질적인 측면에서, 타종교 또는 타사회와의 관계에서, 그리고 자체적인 성격에서 조명해 볼 수 있다.
1) 물질적인 측면
초기 기독교는 예루살렘에서 잠시동안 성전을 집회장소로 사용하였다. 이때 기독교에게는 성전을 대신할 건물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전을 집회장소로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사도행전). 그 이유는 신학적으로 볼 때는 건물로서의 성전이 기독교에 더 이상 신학적인 의미를 제공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실제적으로 볼 때는 기독교가 성전으로부터 추방을 당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초기 기독교는 자신이 성전으로부터 추방당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을 예상하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초기 기독교는 시작점부터 집회를 위하여 성전과 집을 동시적으로 겸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국 초기 기독교는 성전을 박탈당했을 때 가정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현상은 예루살렘 밖에서도 비슷하게 발생하였다. 예루살렘 밖에서는 아직 유대교와 기독교가 선명하게 구분되지 않는 상황에서 회당이 기독교인들의 집회장소로 사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기독교가 유대인들에게 그 정체를 노출하게 되었을 때 회당에서도 추방당하고 말았다. 결국 기독교인들은 회당을 사용하는 것을 거절당했을 때 가정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전과 회당으로부터의 거절은 가정교회의 부상을 위한 중대한 원인이 되었다.
초기 기독교는 특별히 종교적인 활동을 위하여 건축된 건물을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초기 기독교가 소수의 성도로 집회장소를 구매하거나 건축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초기 기독교는 집회를 위하여 사용 가능한 건물로 신자들의 집을 자연스럽게 활용하게 되었다. “집을 공동체의 목적으로 사용한 것은 ‘공개적인’ 집회건물을 사용하거나 구입하거나 건축하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 필연적인 일이었다”. 따로 공식적인 예배처소를 마련할 수 없었던 초기 기독교는 지체들이 자리를 얻을 수 있는 최소한의 사적인 공간이 존재하는 곳에는 어디에나 가정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2세기에 들어서도 집회를 위하여 예배당을 건축하기보다는 가정집을 개조해서 사용했던 것이다.
2) 타사회 또는 타종교와의 관계에서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는 타사회 또는 타종교와의 관계에서 조금 복잡한 의미를 보여준다.
첫째로 타사회와 타종교에 대한 가정교회의 관계는 특히 가정교회의 발생과 관련하여 생각할 때 소극적인 차원에서 이해가 된다. 초기 기독교는 유대인과 이교도들에게 핍박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초기 기독교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자신을 표현할 수 없었고 자연스럽게 안전한 은신처를 찾게 되었다. 초기 기독교에게 핍박을 피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은신처는 가정이었다. 가정은 유대 기독교와 이방 기독교가 핍박을 면할 수 있는 비밀장소였다. 대표적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마리아의 집이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행 12:1-17, 특히 12!). 회심 이전의 바울이 기독교인의 집을 수색한 이유도 이런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행 8:1-3, 특히 3!). 이것은 무엇보다도 가정교회의 발생의 소극적인 의미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런 가정교회 발생의 소극적인 의미에도 중요한 교훈이 들어있다. 그것은 초기 기독교가 심각한 핍박 가운데서도 쓰러지지 않았던 근본적인 이유 중에 하나는 그 근간이 가정교회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인의 모든 가정이 무너지지 않는 한, 가정교회는 무너질 수 없었다. 그리고 모든 가정교회가 무너지지 않는 한, 가정교회로 구성된 기독교는 무너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성장과정에서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는 타사회와 타종교에서 어느 정도 안정된 자리를 확보하게 되었을 때 상당히 긍정적인 성격을 보여주게 되었다. 그것은 가정교회가 이웃에 대하여 자신을 적극적으로 개방하고, 이웃은 가정교회에 호의적으로 접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는 자연스럽게 이교적인 이웃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고린도전서에서 분명하게 입증된다 (아래 성구의 밑줄에 주의하라).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고전 14:23-25).
이렇게 하여 초기 기독교는 가정교회를 통하여 이웃사회에 자신을 공개하고 복음을 전달하는 활동적인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가정교회는 이웃사회라는 덩어리에 대하여 긍정적인 의미의 누룩이 되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사실은 초기 기독교가 가정교회로 출발함으로써 타사회 또는 타종교와 질 다른 체계를 보여주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가정교회의 시작은 핍박의 상황에서 비롯되었을지라도, 가정교회는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사회에 대하여 가지는 특별한 사항이 되었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유대인에게는 가정회당이 있었고 이방인에게는 가정제단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이나 이방인은 결국 특정한 신전을 중심으로 존재하였다. 신전은 그들에게 모든 존재의 중심점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건물에서 자유로웠다. 이것은 유대교와 이방종교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차별화를 여실히 보여준다.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는 유대인 성전이나 이방인 신전에 대한 차별화 현상이었다. 더 나아가서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는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공간의 자유를 보여준다. 가정교회는 기독교의 자유정신을 가장 선명하게 표현하는 방식가운데 하나였다. 이렇게 가정교회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단순한 설교를 넘어서 교제와 자유를 가진 생활공간을 제공함으로써 선교적인 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뿐 아니라 초기 기독교는 가정교회의 방식으로 물질과 공간에서 자유를 얻음으로써 비가시적 공동체의 이상을 실현하였던 것이다.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의 실현은 가시적인 것에 구속받지 않는 새로운 종교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이다 (참조. 고후 4:16-5:7).
3) 자체적인 의미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는 그 자체로도 다양한 측면에서 대단히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1) 결속성
무엇보다도 초기 기독교는 가정교회의 형식을 가짐으로써 핍박과 이단이라는 두 가지 불안한 상황을 극복하는 길을 마련하였다. 본래 가정은 어떤 개인감과 상당한 친밀감과 공간의 안정감을 제공하는 것이다. 가정의 친밀성은 대규모적인 정치와 사회의 구조들이 제공하지 못하는 안정감과 소속감을 제공하였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아주 이질적인 초기의 교회들이 자체적으로 통합되는 것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신약시대에는 가정이 정치적인 기본단위로 여겨졌는데, 가정의 이익을 위한 가족의 충성은 국가에 대한 충성과 경쟁을 할 정도로 강한 것이었다. 따라서 초기 기독교의 집회가 가정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은 가정교회가 그 자체로서 긴밀한 구조를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기 기독교가 핍박과 이단으로 말미암은 불안한 상황을 무난히 헤쳐나가면서 안정되고 견고한 자리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가정교회 형식으로 내부적인 긴밀한 결속구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가정교회의 내부적인 결속을 위하여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가장이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볼 때 한 가정의 가장이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하는 경우에 그 가정의 종교적인 통일성이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한 가정의 가족들이 가장과 함께 집단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로부터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고넬료 행 10:48; 루디아 행 16:15; 빌립보 간수장 행 16:33; 스데바나 고전 1:16 etc.). 이렇게 가정은 공통된 종교를 가짐으로써 가족들의 결속을 표현하였다. 가정 공동체의 이러한 종교적 성격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그룹들의 행동과 관련하여 많은 것을 설명해준다. 물론 이런 일반적인 현상에도 불구하고 가장의 종교와 가솔의 종교가 항상 일치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가장이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가솔이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었다. 먼저 주종관계와 관련하여 이것은 사례적으로 빌레몬과 오네시모 사이에서 쉽게 발견된다. 이 경우에 모든 노예가 한결같이 주인의 신앙에 동의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로 드러난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 중에 한 토막은 심지어 부부관계에서도 이런 현상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라” (고전 7:12; 참조. 고전 7:14). 이와 비슷한 경우는 베드로전서에서도 나타난다: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벧전 3:1-2).
(2) 개방성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가 가지는 또 다른 특징은 개방성이다. 비록 가정교회의 사회적 구성은 대단히 상이하였지만 가정교회는 남녀를 불문할 뿐 아니라 모든 신분과 교육수준과 출신의 기독교인들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가정교회는 “고대에 특히 중압감을 주었던 유대인과 이방인, 자유인과 노예, 남자와 여자, 높은 자와 낮은 자, 학식자와 무학자 사이의 사회적, 민족적, 종교적 장벽들이 깨어지고 모든 기독교인이 주님이신 그리스도께 새롭게 결속된 것을 바탕으로 하여 평등하게 되는 곳”이었다. 사실상 가정교회의 이와 같은 개방성과 평등성의 실현은 당시의 가부장적이며 계급주의적인 사회에 대항하는 중대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3) 선교성
이렇게 결속성과 개방성을 지닌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는 전도와 선교에 상당한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가정교회는 초기 기독교에서 전도와 선교를 위한 근거지로서 절대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가정교회가 선교거점으로 사용된 사실에 관한 대표적인 예는 루디아의 집이다. 사도 바울도 가정들을 사용하여 다음 활동을 위한 근거지로 삼았다. 앞에서도 말했거니와 가정교회가 선교활동에서 중요한 까닭은 단순히 언어의 설교를 넘어서 각 계층 사람들에게 교제와 자유가운데 생활공간을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선교하는 기독교는 수많은 종교단체들과 대중적 철학강의들과 회당의 유인력에 대하여 종교적인 연합운동으로서 경쟁할 수가 있었다.
(4) 중개성
이와 더불어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는 두 가지 방면에서 중개적인 역할을 하였다. 첫째로 가정교회의 중개적인 역할은 가정교회들 사이의 연합적 성격에서 증명된다. 초기 기독교에서 가정교회들은 서로 간에 정보들을 교환하는 체계 (network)를 어느 정도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비록 상호간에 갈등과 마찰을 빚고 있는 가정교회들이라도 성찬을 위한 집회의 정보를 나눔으로써 지역교회의 성찬예식 수행에 무리가 없게 하였다 (고전 11:17이하). 또한 가정교회들이 사도 바울과 같은 신앙지도자의 지역교회 방문에 관하여 서로 간에 정보를 교환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것이다 (고전 16:1이하). 특히 가정교회들의 상호중개성은 사도들의 편지를 회람했다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다 (골 4:15-16). 아마도 예루살렘의 사도회의 (행 15장)는 안디옥 교회와 같은 지역교회의 참여를 중요시하면서도 예루살렘에 여러 가정교회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할 때 가정교회들의 참여를 배제하지 않는다. 이것은 예루살렘 사도회의가 가정교회의 중개적인 연합집회였다고 추측하게 만든다.
둘째로 가정교회의 중개적인 성격은 상부적인 관계에서도 엿보인다.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는 사도들의 그룹과 같은 상부조직에 협조하는 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이것은 다음과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우선 상부적인 관계에서 가정교회는 상부조직에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을 보고하였다. 때때로 이런 보고방식은 가정교회와 지역교회에 근접하여 사역하는 순회전도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가정교회로부터 직접 시행되기도 하였다 (스데바나, 고전 16:15-18139)). 또한 가정교회의 상부적인 관계는 접대방식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가정교회는 사도들 뿐 만 아니라 (롬 15:23; 고전 16:6; 몬 22), 사도들이 파송한 순회전도자들을 접대하였다 (딛 3:13; 요삼 6141)). 이런 순회전도자들은 상부구조에 가정교회의 형편을 보고할 뿐 아니라 가정교회들에 관한 정보를 소통시킴으로써 일종의 네트웍을 형성하고 가정교회들의 연합에 크게 기여하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5) 계승성
마지막으로 성경적인 근거가 희박하긴 하지만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는 사도들의 활동이 끝난 후에 교회의 지도자를 배출하는 산실이 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가정교회는 ‘사도적’ 지도가 상실된 후에 교회를 세워야 할 기독교 지도자들을 위한 양성 근거지였다”. 자신의 집을 가정교회로 제공한 부유한 집주인들은 초기 기독교에서 자연스럽게 지도자의 역할을 맡게 되었을 것이다. 결국 이 사람들은 사도들을 이어서 초기 기독교를 이끄는 지도자들이 되었다.
4. 남은 문제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를 연구하면서 남는 문제는 일반적으로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가정교회들 사이에 발생했을 갈등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한 지역에 병존하는 다양하고 상이한 가정교회들이 아무런 긴장 없이 지속될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이다. 가정교회를 연구하는 일에 시발점을 놓았던 Filson은 한 도시에 여러 가정교회가 존재했다는 것은 사도 시대의 분쟁에 대한 경향을 설명해준다고 말했다. 한 도시에 존재하는 다양한 가정교회는 분파를 등장시킬 잠재성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가정교회 간의 마찰에 대한 증거로는 거의 언제나 고린도전서의 분쟁이 제시된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의 분쟁이 과연 가정교회들 사이에 일어난 것인지는 앞으로 더 자세히 따져봐야 할 문제이며, 만일에 고린도 교회의 분쟁이 가정교회들 간의 분쟁이었다면 그것은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지도 더 폭넓게 고찰해야 할 문제이다.
결론
가정교회는 신약성경이 여러 곳에서 풍성한 자료를 제공하고 다양한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1세기동안 그리고 심지어 그 이후 세대에서도 교회 발전에 있어서 중대한 요소였다는 것이 분명하다.
초기 기독교에서 가정교회가 태동하는 데는 당시의 상황이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가정교회는 가정이 사회의 모든 영역을 기초하는 기본단위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정교회는 상황적인 이유에서 뿐 아니라 신학적인 의미에서도 초기 기독교를 위하여 필연적인 것이었다. 앞에서 논증한 바와 같이 초기 기독교는 처음부터 가정교회를 위한 신학적인 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에 가정교회가 단지 당시의 현실 때문에 형성된 것이라면 지금 전혀 다른 상황에 처해 있는 우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의 형성원인이 역사적 상황에 머물지 않고 계시적 신학에 기초하고 있다면 초기 기독교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엄청난 격차를 가지고 있는 현대 기독교에도 가정교회의 신학과 이상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원시 또는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는 기독교의 태동시기에서 선교와 신학과 조직에 중요한 요소를 보여준다.
그래서 현대의 교회는 선교에서 그리고 생활 가운데 종종 대단히 빈약하게 된 선포에서 저의 형태와 영향을 기억해야 한다”. 신약성경으로부터 가정교회에 대한 자료를 분석하고 의미를 발견한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는 오늘날 과연 어떻게 가정교회의 이상을 회복할 것이며, 과연 어떻게 가정교회의 모습을 재현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목회자들이 풀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대체적으로 목회자들은 대형목회를 하려는 꿈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가정교회는 소형목회이므로 가정교회의 이상을 실현하려면 목회자가 대형목회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목회자 뿐 아니라 성도들도 가정교회를 실현하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성도들이 헌신과 희생을 멀리하는 안일한 신앙생활을 정리해야 한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보여주듯이 철저한 헌신이 없이는 가정교회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가정교회를 회복하려면 분명한 신학의 확증이 필요하기 때문에 신학교는 이것을 마련하기 위하여 철저한 신학작업을 해야 한다. 만일에 신학교가 신약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형태를 복원하는 일을 무시하거나 외면한다면 부지중에라도 교회의 세속화를 찬성하고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여러 가지 방향의 노력과 함께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에 관한 신약성경의 제시를 바탕으로 하면서 문화와 사회가 고도로 발달한 우리의 현실을 고려하여 가정교회의 이상을 현실화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기초로 삼아 가정교회와 지역교회의 관계를 비롯하여 가정교회와 지역교회가 전기독교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를 가장 타당하게 방법론적으로 설정하기 위하여 지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신약교회의 회복이 현대교회의 살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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