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의 소망 부흥은 늘 우리의 마음을 흥분케 하는 주제이다. 유다 요시야 왕의 부흥운동을 예루살렘 왕궁에서 12세까지 경험했던 다니엘은 바벨론 포로 70년 후, 이스라엘 민족의 ‘Back to Jerusalem’을 성취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예루살렘 오순절 성령 강림의 부흥은 예수의 증인들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달려 나가는 담대한 용사들이 되게 하였다. 안디옥교회의 부흥은 사도 바울의 팀으로 열방 선교의 기치를 들고 힘 있게 아시아와 유럽을 향하여 전진하게 하였다.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 안에는 영원한 부흥의 소망이 있다. 부흥이 오면 교회의 영광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회복될 것이다. 모든 성도들은 기대감과 즐거움이 가득할 것이고, 말씀을 전하는 자들은 열정의 복음을 전파하는 감동이 가득할 것이다. 하나님 임재의 기도, 지혜와 계시의 영의 말씀 그리고 기쁨의 새 찬양이 예배를 아름답게 할 것이다. 부흥이 임하면 하나님을 향한 예배만큼 즐겁고 기쁜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천국의 영광이 예배 안에 가득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아름답고 감미로운지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은 듣기 싫은 소음과 지겨움이 된다. 진실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진하고 영원한지, 세상의 말하는 사랑은 유치하고 멸시 받을 만한 천한 것이 된다. 부흥의 천국이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다.
부흥은 사모하는 자가 가장 낮아질 때 열리는 계시이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 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셨다(마3:16). 예수님께서 가장 높은 곳에서 자신을 비워 가장 낮은 곳에 거하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셨다. 수면은 지구에서 가장 낮은 곳이다. 요단강 수면 아래로 자신을 낮추시고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시는 겸비하신 순간에 하늘이 열렸다. 에스겔 선지자에게도 바벨론 그발강 가에서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이 보였다(겔1:1). 이방의 바벨론 땅에 포로로 잡혀와 무너진 마음으로 강가에 머물러 있던 에스겔에게 하늘이 열린 것이다. 사도 요한도 밧모섬에 유배되었을 때 ‘하늘의 열린 문’을 통하여 보좌의 영광을 보게 되었다(계4:1). 함께 했던 모든 사도들은 이미 순교함으로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갔고, 이 땅에는 12사도 중 유일하게 요한만이 남아 있었다. 로마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핍박으로 인하여 밧모섬에 유배된 노 사도는 가장 낮은 마음으로 그가 가야 할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상한 심령 위에 하늘이 열린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은 겸손하시고 부드러운 분임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사람이 가장 겸손하고 상한 심령으로 부드러워졌을 때 자연스럽게 임하시기 때문이다. 40년 미디안 광야의 목동 생활로 지친 모세, 선지자 사무엘이 왔음에도 광야에 양을 지켜야 하는 말째 다윗, 다메섹에서 예수의 빛을 보고 눈이 멀어 망연자실에 빠진 사울.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은 하나 같이 상하고 낮아진 마음에 처할 때, 하나님의 성령을 만나고 부흥의 회복을 경험하였다.
부흥은 지금 한국 교회의 너무나 절실한 소망이다.
1907년 평양부흥은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빼앗기기 직전에 있었던 한국 교회의 부흥이었다. 소망이 보이지 않고, 암울하던 한국 민족의 장래를 교회가 회개하며 헤쳐 나갔던 역사라 할 수 있다. 지금의 한국 사회도 그 때만큼이나 어둡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낙태율, 이혼율이 매우 높은 것으로 통계가 나오고 있고, 한국인 가정의 평균 출산율은 1.13명이다. 이것이 풍요로운 한국의 현실이다. 교회가 이렇게 많은데, 한국사회는 이렇게 어둡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이스라엘도 그랬다. 전문 종교인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들이 많았고, 모든 사람들은 회당에서 주 하나님을 말하고 믿는다고 하였는데, 온 이스라엘 사람들 안에는 불의와 질병과 귀신 들린 자, 그리고 가난과 절망이 가득하였다. 백성이 입으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나 그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났다.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함을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기에 그랬다(사29:10-13).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부으셔서 선지자의 눈이 감기고, 선견자의 머리가 덮였다.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사람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지, 선지자, 선견자를 통하여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도와 선지자, 전도자, 목사와 교사의 직임자를 세우신 목적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엡4:11,12). 민족이 병들고 외롭고 고통 중에 있다면, 부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이 온전하게 섬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반도 북쪽은 온 백성이 굶어 죽고 있는데 핵 폭탄으로 도박하고 있고, 한반도 남쪽은 전직 대통령이 억울하고 부끄러워 자살을 했던 2009년이었다. 모든 사회에 육체의 쾌락과 음란한 도덕적 붕괴, 돈을 사랑함과 거짓이 만연되어 있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부흥이 필요한 때이다.
부흥은 하나님의 교회 안에 십자가의 회복을 가져온다.
하나님은 큰 위기의 때에 역사하신다. 모든 문이 닫히고 희망이 사라졌을 때 하나님은 민족의 길이 되어 주신다. 하나님께서 부흥의 사람을 택하시면 그에게 초자연적인 믿음을 부어주신다. 온 세상에 어두움의 위압감과 위기감이 가득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담대한 믿음과 결단으로 생명의 역사를 충만하게 불어넣는다. 부흥의 역사는 예수와 십자가로 충분하다. 그리고 예수와 십자가로만 해야 한다.
십자가는 인류 구원의 역사인 동시에 삼위일체의 원리이며 천국 질서의 중심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뿐 아니라 원래 천국에서도 스스로 하지 않으셨던 분이다. 영원 전부터 그리고 영원까지 항상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신다. 전능하신 예수님께서 전능하신 아버지와 하나되는 방법은 십자가이다. 자기 부인의 십자가는 구원의 중심인 동시에 천국 삼위일체의 중심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든 것은 천국 하늘의 계시이다. 하나님이신 삼위가 하나로 존재하려면 십자가 밖에 없다. 십자가의 완전 부인이 없다면 전지, 전능, 영원하신 삼위는 일체로 존재하실 수 없다.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뜻대로만 하셨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성자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의 주관자가 아닌 보혜사 곧 ‘돕는 자’로 오셨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성자 하나님에게 주셨고 그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을 통일시키려 하신다. 그 삼위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함께 하나로 거하시는 장래의 천국도 또한 말도 못할 십자가이다. 하나님이 턱없이 부족한 인간들과 함께 영원토록 거처를 함께 하시는 것은 영원한 십자가이다(엡2:22).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천국의 기초이다. 삼위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십자가의 완전 부인의 사랑을 부어 주시고, 백성들은 삼위 하나님께 십자가의 완전 순종의 사랑을 드리는 곳이 천국이다. 그래서 모든 자가 십자가로 하나가 된다. 진실한 부흥이 임하면 모든 천박한 명예욕과 권력욕은 사라진다. 지금은 그런 것들이 영광을 받고 있다. 부흥이 오면 예수님 말씀처럼 모든 자의 섬기는 자가 으뜸임을 누구든지 알게 된다. 한국 교회 안에 십자가가 우뚝 서게 되면 모든 높아진 욕심은 무너지고 섬김의 왕국이 될 것이다.
부흥은 한국 사회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꿀 것이다.
천국 공동체의 질서는 현대 자본주의와 판이하게 다르다. 자본주의가 인류 공동체의 다른 체제보다 더욱 낫고 효율적이기는 하지만, 자본주의의 경쟁 체제에 하나님의 법은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성경 말씀을 적용하고 이해하기에 성경과 우리의 삶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동떨어져 있다. 바벨론의 바알 신전 곧 풍요와 음란의 제국의 신 앞에서 하나님의 신앙을 지켜야 하는 다니엘처럼 막강한 세상 신의 도전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엄청난 통치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사랑해야 하고, 머리가 되어야 하고, 일용할 양식을 공급’ 받아야 한다. 적용되는 모든 성경 말씀이 너무나 단편적이라 마치 사회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인 것처럼 느껴진다. 현실에서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시며, 성경 말씀은 좋은 교훈이 있는 역사 책 정도로 느껴진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무력하신 것이 아니라, 충분히 역사하실 수 없는 총체적 불순종의 구조인데도 그런 사실을 그리스도인들은 명확하게 들어본 적이 별로 없다. 자본주의 체제가 하나님의 법대로 움직이지 않는 근본적인 부패의 구조요, 성경 말씀에 구조적으로 순종하지 않고 있는 부패된 사회라는 것을 외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문제는 부패된 개인의 죄악보다 사회 총체적, 구조적 반역의 죄악이고, 이것이 너무 심각하여 결국 이 하늘과 땅은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제시한 사회 공동체는 레위기, 신명기에 잘 나와 있다. 칠 일마다 안식을 해야 하는데, 종이나 소, 나귀 모든 육축과 손님이라도 칠 일째는 안식하도록 해야 한다. 거룩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인, 간음, 도적질하면 안되고 이웃의 아내나 소유를 탐내면 안 된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며, 나그네를 사랑하고 대접해야 한다. 십일조와 모든 헌물로 레위인(전임 사역자)과 성 중에 거하는 모든 자녀와 노비들과 함께 나누어 즐거워해야 한다. 예를 들면 화목제로 소, 양을 잡는 경우는 그 날에 다 먹어야 한다. 이튿날 아침까지 남기면 화목제는 취소된다. 방법은 모든 고기를 속히 먹기 위하여 다 나누어 먹는 것이다. 따라서 제사가 많이 드려지는 절기 때는 노비와 객, 고아와 과부를 포함한 모든 백성이 기뻐하며 나누어 먹는 잔치의 제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삼 년 끝에 드리는 십일조는 기업이 없는 레위인, 객, 고아와 과부들로 배부르게 먹게 해야 한다.
제 칠 년은 안식년으로 모든 자가 1년 휴가를 갖게 된다. 모든 자가 제 칠 년에 파종하지 않고도 다음 추수까지 먹고 누릴 풍년이 6년째에 부어진다. 안식년에 땅도 쉬고, 자녀와 종들과 품꾼들도 다 쉬고, 땅에 스스로 난 것은 들짐승들이 먹고 누린다. 가난한 자가 꾸어 달라 하면 반드시 꾸어 주되 넉넉히 꾸어 주어야 한다. 꾸어줄 때는 이자를 취하지 않는다. 그리고 제 칠 년 면제 년에는 모든 빚을 탕감해 주어야 한다. 빚을 못 받는 것에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유는 가난한 자를 돌아 본 것에 넘치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신다.
포도원이나 곡식 밭에 들어가서 가난한 자들이 배불리 먹고 손으로 이삭을 따는 것이 허락된다. 다만 낫을 대거나 그릇에 담아오는 것은 안 된다. 담보를 가난한 자에게 취할 때는, 꾸는 가난한 자가 주는 것을 담보로 가지고 가되, 해가 지기 전에 다시 돌려주어야 한다.
제 50년 희년이 되면 모든 땅을 원래 주인에게 다시 돌려 주어 기업을 회복시켜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 법의 민족 공동체이다. 이 법대로 살면 천국이 따로 없고, 가난한 자도 너무 부요한 자도 없는 행복한 세상이 된다. 순종하면 복에 복을 받는 것이고 불순종하면 저주에 저주를 받는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는 하나님의 공동체가 아니다. 그래서 말씀의 온전한 적용이 될 수 없는 세상 신의 체제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다니엘, 요셉처럼 제국 세상의 신 앞에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 결단을 의미한다.
성령강림 부흥이 있었던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는 레위기, 신명기 말씀의 공동체를 회복시켰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는 공동체였다. 그래서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들은 칭송하는 공동체였다(행2:43-47;5:13).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 교인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핍박을 감수해야 하고, 전적 헌신 곧 재산을 팔아 소유를 나누고 날마다 모여 떡을 떼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니 백성들이 그들의 삶을 보고 칭송하지만 상종하기에는 두려운 공동체가 예루살렘 부흥 공동체였다. 더군다나 거짓으로 소유를 바치면 죽임을 당하기도 했으니 더욱 두렵고 거룩한 공동체였음이 분명하다. 이런 온전한 공동체의 기록은 큰 부흥을 보았던 이방인 교회 즉 안디옥, 에베소 교회에서는 볼 수 없다. 이것은 레위기, 신명기를 2천 년 동안 알고 체험했던 유대인들과 생소한 이방인의 차이라 볼 수 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뜨거운 열정의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오랜 기독교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유럽, 미국 그리스도인의 삶의 신앙을 따라갈 수 없는 것과 동일한 이유이다. 가정과 삶 속에서의 깊은 실천 신앙은 오랜 세월의 헌신과 삶의 연습이 불가피하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부드럽지만 가정과 삶 속의 깊은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들이 태어난다는 것이다.
부흥은 마지막 재앙의 시대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교회의 지혜이다.
요셉의 지혜는 학교에서 배운 것이 아니다. 다니엘의 지혜도 바벨론 제국의 탁월한 교육에서 얻은 것이 아니다. 애굽, 바벨론 제국의 가장 탁월한 박사들보다 요셉과 다니엘이 10배나 나았다. 베들레헴의 목동, 그리고 광야의 도망자 다윗도 왕궁의 탁월한 교육과는 상관이 없었으나 이스라엘 최고의 위대한 왕이 되었다. 목수로 태어나신 갈릴리의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도 유대교의 심오한 철학과 신학을 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었다. 도대체 그들은 어디에서 그런 지혜와 능력을 배웠을까? 하나님의 법이 움직이는 가정 혹은 공동체,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성령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한 부흥 공동체를 통하여 신령한 지혜와 능력을 얻은 것이다. 요셉, 다니엘, 다윗, 예수, 사도들과 바울은 다 십자가를 체험하고 성령 하나님의 통치에 완전 순종한 자들이었다.
마지막 시대의 재앙은 전 지구적이고 우주적이다. 세계의 재난과 예측 불허의 재앙들은 더욱 자주 있을 것이고, 더욱 심해질 것이고 더욱 급박하게 될 것이다. 이런 어마어마한 재앙과 불확실에는 하버드, 옥스퍼드 대학의 지혜로는 감당할 수 없다. 예측하고 준비해도 미래의 25%를 대처할 수 있으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런데 75%의 재앙으로 세상은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될 것이다. 누가 그 심판의 재앙에서 승리의 천국으로 인류를 인도할 수 있겠는가? 요셉 같은 자들이다. 7년 풍년처럼 지금은 풍요가 넘치는 시대이다. 이후에 이 풍년을 삼켜 버릴 7년의 흉년, 곧 7년 대 환란이 온다. 이 7년 대 환란으로 온 세상은 망한다.
그런데 요셉은 7년의 망하는 재앙을 승리의 왕국으로 바꾸어 버린 자이다. 7년 흉년 뒤에 망해야 할 바로 왕을 승리의 왕으로 만들고 온 백성을 살게 한 자가 요셉이었다. 7년 대 환란으로 망하는 세상 중에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왕의 왕으로 세워 드리며, 왕국의 백성들로 승리의 생명을 얻게 할 수 있느냐가 마지막 시대의 싸움이다. 요셉은 7년의 엄청난 재난을 어마 어마한 영광으로 바꾸어 버렸다. 7년 흉년 뒤의 결과는 애굽과 가나안 땅의 모든 돈과 모든 육축, 모든 땅, 심지어 모든 백성들이 바로의 소유, 노예가 되어 버렸다(창47:14-19). 이 요셉의 영광이 350년 동안 애굽의 바로 왕들 안에 진동하였다. 천국의 교회, 천국의 성도들이 우주의 재앙을 승리의 영광으로 바꾸는 날,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영광을 받을 것이며 온 백성은 그의 소유됨의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부흥은 한국 교회로 하여금 모든 족속을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준비케 한다.
요셉처럼 세움 받을 자들은 세상의 체제 안에 안주하는 자들이 아니다. 땅의 것으로 탁월한 교육 받은 자들은 우주적인 심판의 시대를 이길 지혜가 없다. 반드시 십자가의 죽음을 뚫고 나온 자들만이 하늘의 지혜를 받을 수 있다. 핍박과 고난을 모르는 성공의 ‘리더십’들은 시대를 바꿀 수 있는 지혜자가 아니다. 바리새인, 서기관처럼 종교의 직위와 지식으로 서 있는 자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가장 그리스도 예수를 핍박할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의 구원 앞에 차별이 없다고 하여 사도 바울은 엄청난 핍박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모든 믿는 자에게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차별이 없다는 것은 유대 사회를 뒤흔든 선포였다. 이것을 선포한다면 당연히 유대인의 엄청난 핍박과 저항을 받는다. 사도 바울은 핍박을 선택했고, 그의 선포한 복음은 모든 족속을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준비케 하고 있다. 그의 외침은 하늘에 속한 자들은 땅의 것으로 차별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민족을 택하시고, 후에 그 민족의 각 개인을 찾아 오셔서 구원하시고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민족 공동체 안에 성령을 부으시고, 그 민족 공동체 안의 다수의 개인들을 힘있게 세워 가신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첫 번째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시고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다. 열방을 향하신 구원의 계획을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 시작하신 것이다. 아버지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아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시고, 자신의 모든 것을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 시작하셨다. 예수님의 이름 “예슈아”는 이스라엘 이름이고, 예수님은 영원한 이스라엘 사람이시다. 예수님이 함께 하셨던 열 두 제자와 위대한 바울 사도도 다 이스라엘 사람들이고, 신약의 성경 말씀을 기록한 사람들도 누가를 제외하면 다 이스라엘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처럼 열방을 향한 구원을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 시작하신 것이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진실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순종하셨다. 그래서 하늘 아버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나 사랑하시고 기뻐하셨다. 자신의 소명을 완성하신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 삼을 것을 명령하셨다. 예수님의 사역도 단위가 민족이다. 다만 이제는 모든 족속, 곧 전 민족적인 사역으로 확장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선교를 위하여 한국 민족을 택하셨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절대 은혜로 세계 13대 빈국, 불교 유교의 우상 숭배로 찌들었던 이 민족을 열방 선교를 위하여 택하신 것이다. 택함 받은 것은 너무나 감사한데 자랑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택함 받은 것이 그저 감사하기에 더욱 충성하고 생명을 다하도록 헌신해야 한다. 그것이 은혜 받은 자의 보답이다. 은혜 받고 갚지 못하는 자는 배은망덕한 자이다. 죽을 자를 살려 주었더니 주인 행세한다면 그것은 실로 버릇없는 망할 자이다. 아시아의 마지막 미전도 종족을 선교하기 위하여 한국 민족을 택하셨으니 생명을 다하도록 감사하고 섬겨야 한다.
주님을 닮은 큰 사람
예수 그리스도는 최고의 선교사, 최고의 목사, 최고의 성도 그리고 최고의 생도이시다. 우리 모두의 최고의 모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 누구든지 절망에서 일어날 수 있으며, 누구든지 교만함을 회개하게 된다. 부흥은 한국 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케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교회 부흥을 설명하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 작은 땅 베들레헴에서, 갈릴리 나사렛에 사는 다윗의 후손 중 가난한 잊혀진 사람들의 아들로 태어나셨다. 혼합 인종과 혼합 문화로 더럽혀졌다고 멸시 받는 이방의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시다. 예수님은 전문 종교인이 아닌 목수이셨고, 예수님의 주변에 있던 자들도 평범한 직업 혹은 그 이하의 죄인들이었다. 예수님의 출신과 배경은 하찮은 것이었지만, 예수님 자신은 진실로 큰 사람, 큰 주님이셨다. 예수님의 마음은 세상의 명문 가문과 많은 재물, 종교적 권세와 영광된 학위로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땅의 모든 것보다 너무나 크신 분이셨기에 그렇다.
예수님 같은 부흥의 큰 사람들이 한국 교회 안에 많았으면 좋겠다. 없는데 당당하고, 부족한데 권위가 있으며, 무시 당하는데 항상 기뻐하는 품위의 그리스도인들이 가득하다면 이미 부흥은 우리 한국 교회 안에 부어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