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이 떠도는 탁구인을 위한 제안
탁구는 언제 어떤 대상과 즐탁을 하였느냐? 에 따라 즐탁을 한 후의느낌과 감상이 사뭇 다릅니다. 여기서 '언제'라는 건 내가 처한 상황과 맞물리는 감성적 혼돈이 가미된 이성이라 하여야 겠습니다. 혼돈은 과거의 나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지만 올챙잇적 기억을 잊는 경우가 대다수 입니다. 상대가 오픈 서비스를 안든, 비신사적이든, 말 많고 탈 많은 탁구인 이든, 규제 이외외의 러버를 사용하든, 이것들은 생활탁구 활성화를 저해하는 아무런 빌미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간혹 승패에 너무 집착 하다 보면 아마도 이런 외면적인 형상들은 빌미를 제공하게 되기도 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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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탁구인 들과 접하여 대화를 하다 보면, '나이가 많아서' '늦게 탁구에 입문해서' '운동신경이 둔해서', 등등의 이유로 탁구 기술의 정진이 미미함을 핑계하는 경우를 접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생활 탁구인들 보다 훨씬 열악한 신체적인 조건에서 이를 극복하고 오히려 장애를 승화시켜 인간승리를 한, 수많은 장애우들을 볼 수 있습니다. 휴먼영화로 수많은 관객을 감동케 하였던 '말아톤'의 주인공 배 형진, 수영선수 김진호 등 우리 주변엔 참으로 위대한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소싯적 학문을 통해서 알게 된 청각 장애를 극복하고 운명과 싸워 이긴 베에토벤, 소아마비를 딛고 미국의 대통령이 된 루즈벨트 , 청각, 시각장애를 극복한 헬렌켈러, 근육 무력증을 극복하고 위대한 과학자가 된 스티븐 호킹 박사 등등 사회 각계각층에서 수많은 장애우들은 우리에게 선한 도전을 주며 감동과 시련을 극복할 힘이 되고 있습니다.
몇 날 전 생활체육 탁구 인들에게 비교적 많이 알려진 주인백 님, 그리고 장애인들에게 특별한 애착을 갖고 계시는 용품사를 경영하시는 문의배 사장님을 만나고 내려오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스스로가 장애를 갖고 있으면서 장애인들에 대한 깍듯한 사랑과 배려는 나로 하여금 그들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했습니다. 월례행사로 교회에서 장애우 목욕시켜 드리는 일이 전부였던 내게, 나를 돌아보면서, 위선적 탈을 벗어 던지도록 마음을 충동케 했습니다.
20년 전쯤 일이라 생각 됩니다. 286AT로 천리안을 통해 채팅을 하면서 알게 된 'AR영' 이란 친구가 있습니다. 저와 채팅을 하기 위하여 입에 볼펜을 물고 그 볼펜으로 열심히 타이핑을 하는 친구 입니다. 50줄이 넘어서도록 오라버니는 동생 뒷바라지 하려고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 동생을 업고 다닙니다. 사지가 없기에 걸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스스로 먹을 수도 없는 여동생을 사랑하기 위한 위대한 희생입니다.
청주로 돌아오는 길에 눈물 나도록 친구, 자네가 너무도 보고 싶은 거야. 자네가 사는 인천과 지척인 부천까지 갔으면서 보지 못하고 돌아서 왔음이 왜 이리도 나의 가슴을 짓누르는지 모르겠군, 지난 무지개 동호회 첫 만남의 태동이 있던 날, 광명까지 나를 만나기 위하여 오라버니 등에 업혀 왔던 기억이 왜 이리도 오늘 나를 아프게 하는지 모르겠네, 노래방에 놓고 온 내 것, 그리고 자네의 우산이 마음의 장애를 갖고 있는 누군가가 비를 피하게 하는 우산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은 자네도 기쁨으로 동의 할줄 이네.
청아한 자네의 음성처럼, 외적인 비 장애를 갖은 나이지만 , 내적으로는 수많은 장애를 안고 오늘도 삶을 부치도록 살아가고 있다네, 지난 부산, 그리고 서울 공연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케 했던 타이리화, 자네와 함께 감동 깊게 보았던 그 공연을 오늘 회고 하면서 마음으로 부족했던 나를 되새겨 보려 한다네, 내가 가진것이라곤 이렇게 타이핑 할 줄 아는것 밖에 더있는가? 자네는 나와 몇분의 채팅을 한후 서너끼는 음식을 씹지도 못할 만큼 고통을 겸허히 감내하던 모습을 내 상상으로 그려 보면서 생각 하려 하네
장애를 딛고 선 타이리화를 우리 탁구와 접목하면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무엇이며 배울 바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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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리화(邰丽华).
1976년에 태어난 그녀는 2살때 심한 고열을 앓은 후 부터 청각을 잃었다.
그녀의 오늘이 있게 한것은 농아학교를 다닐 무렵 아버지가 사온 무용 신발(舞蹈鞋) 한켤레로 그의 인생을 바꾼 최초의 계기였다.
두번째 오늘의 무용수로 태어나게 된동기는 농아학교 율동수업(律动课) 시간에 선생님이 나무를 두드리는데 그 울림이 교실 마루바닥을 타고 자신의 몸으로 울려 퍼지는 것을 느끼면서 새로운 감각의 세계로 들어서는 순간이었으며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몸의 리듬을 통한 감동(激动)스럽고 흥분(兴奋)의 시작의 발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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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무용이라는 세계에 발을 딛은 그는 무용을 통해서 중국인민들에게 희망과 소망을 주게 되면서 어려웠던 순간들을 이렇게 회고 한다. " 세상에는 이보다 더 험난하고 거친 파도(惊涛骇浪)가 너무도 많을 것이다."
13억 중국인들에게 감동을 준 대륙이 반한 청각장애인의 춤사위로 타이리화 그는 중국 국가 장애인 종합예술단 중심배우 로 이렇게 말한다. '춤은 세상과 교감하는 언어' 라고 말하는 그는 중국 장애인 특수예술협회 부주석으로 국보급 대우를 받는다.
생활 탁구에 입문하여 이제 중위 부수에 올라오게 되면 조금씩 현재의 생활체육에 대해 겪는 숱한 고민들, 그리고 툴툴대며 불만을 쏟아내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이 나의 모습과 겹친다. 네 모습이고, 내 모습이며, 내 친구들의 모습이자, 우리 동호회의 모습이고, 우리들의 모습이다. 1부 탁성, 그들은 결코 특별한 인물이 아니다. 그들은 열심으로 땀을 흘렸으며 시간을 매우 솔직하고 정직하게 보냈을 뿐이다. 내 스스로의 탁구에 대하여 솔직하지 못한 채 자신을 숨기며 살아가는 위선적인 이들보다 더 정상적이다.
탁구에 대한 툴툴 거림은 어린 아이가 방과 후 엄마에게 털어놓는 불평불만이고, 우리가 친구를 만나 못마땅한 친구를 흉보는 불평불만이다. 그와 나, 즉 우리는 전혀 다를 바가 없다.
타이리화, 그는 이런저런 고민으로 방황하고 있는 모든 탁구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장애는 할 수 없다.' '나는 안 된다.' 라는 스스로의 심리적 장애 때문이라고...... 내 안에 혼돈을 지우기 위해 더 많은 즐탁을 함이 어떠할까? 춤이 세상과 교감을 갖는 언어라면 우리 탁구인은 탁구가 그러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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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고민하지 말고 괴로워하지 말고 탁구와 대화를 하자. 자꾸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거나 숨지 말고 탁구와 대화하자. 그리고 현실적 분만들은 훌훌 털어버리자.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실망할 필요 없다. 나의 꿈을 펼칠 수 없다고 미리부터 좌절하고 괴로워할 필요 없다.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여기 있다. 나의 꿈을 펼칠 수 있는 방법이 여기에 있다. 먼저 진정한 탁구인을 만나보자. 그리고 다시 생각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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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리화 래한 공연 인터뷰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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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리화(邰麗華·30·여). 무용수에겐 치명적인 청각 장애인이면서도 전통춤 하나로 중국 대륙을 반하게 만든 최고 인기 연예인 중 한 사람으로 부와, 명예와 인기를 한몸에 쥐게된 그는 ,오늘도 겸손하게 무용에 대한 사랑으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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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렇게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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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 춤은 제 인생, 그 자체 입니다." " 무대에 설 때마다 살아있는 생생한 느낌을 만끽하게 됩니다." "남들은 음악을 귀로 듣고 춤을 추지만 전 마룻바닥에 전해져 오는 울림으로, 옆에서 박자를 맞춰주는 보조 선생님의 손짓으로 느낀다는 게 다를 뿐입니다."
결국 춤은 제가 다른 사람들과 교감하는 하나의 언어가 됐습니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관객들이 저희 장애인예술단을 불쌍하다는 눈빛으로는 보지 않았으면 합니다. 저흰 특수예술을 하는 특수한 예술인일 뿐 관객 분들과 다를 게 없는 사람들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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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구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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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의 영웅, 그리고 우리곁에 감동으로 남아 있는 장애우
소아마비를 극복한 레이어리 |
1952년 헬싱키 올림픽, 레슬링 그레코 로망형 웰터급에서 우승한 헝가리의 미크로스 질바시도,그는 1946년 경찰관으로 근무할 때 동료의 오발로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다. 결과는 다리 마비, 레슬링 선수에게는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걷지도 못했고 혼자 힘으로 설 수도 없었다. 그러나 거기서 주저 앉지 않았다. 매일 다리에 커다란 돌을 매달고 근력과 각력 회복을 위한 훈련을 했다. 차츰 마비 중세가 없어졌고 다리에 힘이 붙어 갔다. 상체의 능력이 더욱 커졌다. 그렇게 2년이 지나던 48년 런던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차지했다. 그리고 52년, 마침내 금메달을 손에 쥐게 되었다.
사고로 인한 장애(팔)를 극복한 카로리 타카스 |
1948년 올림픽 사격 속사 권총에서 연속 금메달을 딴 그는 원래 오른 손의 명 사수였다. 1929 년부터 38년까지 헝가리 사격 국가 대표로 각종 대회에 출전했다. 그런 그는 군 복무 중 수류탄 폭발 사고로 오른 손을 잃고 말았다. 너무나 큰 충격에 어찌 할 줄 몰랐던 그는 냉정했고 이성적이었다. 아직 왼 손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고 다시 권총을 잡았다. 오른 손이 했는데 왼 순이 못할 이유가 없다고, 의지와 의욕의 문제라고 자신을 채찍질하였다. 수많은 시련을 이기며 훈련에 열중 한 그는 익숙하지 않은 왼 손으로 한 팔이 없어 몸의 균형 잡기도 만만치가 않은 자세였지만 오른 손만큼 자유롭게 왼 손을 놀리게 되기 까지 l년밖에 걸리지 않으며 1939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것이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요, 인간의 능력이 무한함을 증명한 것이기도 했다. 타카스는 그러나 만족하지 않았다. 목표를 올림픽에 두고 훈련을 계속했다. 10년의 세월이 그렇게 지났다. 그리고 맞은 1948년 런던 올림픽, 타카스는 헝가리 대표로 속사 권총에 외팔로 참가했다. 그 동안 쌓은 실력이 헛되지 않아 금메달이었다. 52년 헬싱키 올림픽, 타카스의 나이 42살, 그는 또 속사 권총에서 우승했다. 타카스는 좌절하지 않고 왼 손으로 세계를 제패한 것이다. 오늘날 까지 헝가리의 영웅으로 남아 있는 그는 진정 불굴의 투지를 보여준 스포츠인의 귀감이다.
미숙아로 태어난 목발 장애인 |
1960년 로마 올림픽 100, 00m와 400m계주에서 우승, 올림픽 여자 최초로 3관 왕이 된 미국의 윌마 루돌프는 11 살 때까지 목발을 짚고 다닌 장애자였다. 1940년 6월 23 일, 미국 테네시주 클락스빌에서 태어난 윌마는 체중이 겨우 2kg의 허약한 아이였다. 4살 때 성홍열과 소어마비에 폐렴까지 앓았다. 흑인 가정의 22명 자녀 중 20번째인 윌마는 변변히 치료도 받지 못했다. 운 좋게도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그 후유증으로 6살에 왼쪽 다리를 쓸 수 없게 되었다. 11 살 때 마침내 목발 없이도 설 수 있게 되었고 중학교에 들어가서 농구부에 입단했다.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윌마는 배 이상의 연습을 했고 곧 우수한 농구 선수가 되었다. 윌마의 특출한 운동 소질을 인정한 학교에서는 그를 위해 육상부를 창단했다. 정상인을 능가하는 선수를 목표로 윌마는 달리기에 전념했다. 그의 집념은 끈질겼다. 각종 육상 단거리 부문을 석권하게 되었다. 그리고 16살 때인 56년 미국 육상 대표로 멜보른 올림픽에 출전, 400 m 계주에서 동메달을 땄다. 올림픽에서 돌아 온 윌마는 특기생으로 테네시 주립 대학에 입학, 집안 최초의 대학생이 되었다. 계속 달리기에 집중한 그는 60년 로마 올림픽, 여자 100m에서 종전 기록보다 0.3초나 빠른 1l 초,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했다. 바람 탓에 공인 받지 못했으나 놀라운 기록이었다. 200m에서도 22.9 초로 이미 세계 기록을 작성한 그는 또 금메달을 차지했다. 400m계주 마지막 주자로 뛴 윌마는 뒤늦게 바톤을 넘겨 받았으나 발군의 스피드로 선두를 제치고 1 위로 골인, 금메달을 추가했다. 44.4초,그 또한 세계 신기록이었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 남자 높이 뛰기에서 2.04m,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한 미국의 월터 데이비스,그도 8살 때 소아마비로 5년간이나 휠체어 신세를 진 장애자로 농구에서 육상으로 전향해 성공한 선수였다. 60년 로마 올림픽 10종 경기의 우승 미국의 레이퍼 존슨은 미국 텍사스주 힐스보로에서 태어났는데 어렸을 때 콘베어 벨트에 다리가 말려 절단 수술을 받아야 할만큼 심한 부상을 입었다. 겨우 절단은 모면했지만 23바늘이나 꿰매는 대 수술 끝에 목발을 짚고 설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로마 올림픽, 다리가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10종 경기에 출전해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했다. 그는 은퇴 후 배우, TV 스포츠 캐스터로 활약했고 정치에도 관심을 가졌다.
역시 로마 올림픽 500m 에서 금메달을 딴 뉴질랜드의 머레이 할버그도 장애자였다.17세 때 럭비를 하다가 왼 쪽 어깨를 크게 다쳤고 응혈 합병증으로 생명이 위독했다. 가까스로 위기는 넘겼으나 평생 반신불수로 지내야 한다는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할버그는 1년 후, 왼쪽 어깨와 팔을 흔들며 달리기 연습을 했다. 6년간의 피나는 노력이 헛되지 않아 1958년 그는 영연방 대회 3마일 경주에서 우승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60년 로마 올림픽에 출전, 500m에서 끝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렇듯 올림픽 대회에는 특히 육상 경기에 소아마비 등으로 불구자가 된 사람들이 불굴의 의지로 세계 정상에 우뚝 서 우리를 감동시킨 경우가 종종 있다
연습중 사고로 부상을 입고 출장한 선수 |
경기 도중 머리를 크게 다치고도 분전,금메달을 차지한 미국의 다이빙 천재 그레그 루가니스는 88서울 올림픽에서 가장 영웅적인 선수로 꼽혔다.1982년부터 87년까지 국제 대회에서 19연승을 기록했고 84년 LA 대회에서 이미 스프링 보드,프랫트폼 다이빙 두 종목을 석권한바 있는 그는 서울 올림픽에서도 당연히 우승 후보 1순위였다. 그런데 그는 스프링보드 다이빙 예선전에서 도약대에 머리를 부딛쳐 8바늘이나 꿰매는 부상을 입었다. 웬만한 선수라면 경기를 포기 했을 것인데 루가니스는 머리에 붕대를 감고 계속 출전,결국 금메달을 따냈다. 그는 이어 프랫트폼 다이빙에서도 정상에 올라 올림픽 사상 최초의 다이빙 두 종목 2회 연속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영웅적인 투혼이요,정신력의 승리였다.개인 혼영 400m 세계 기록 보유자로 64년 도꾜 올림픽에서도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미국의 리차드 로스는 경기 이틀 전 심한 복통으로 급히 병원으로 후송되었다.맹장염으로 당장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일본 의사는 진단했지만 캘리포니아 출신의 17살의 로스는 "나는 금메달을 따기 위해 이곳에 온 곳이지 수술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다"라며 진통제마저 거부, 얼음 찜질로 통증을 달래며 기어코 경기에 참가했다.그렇게 로스는 예선을 거쳐 결승에 진출,종전의 자기가 세운 기록을 무려 3초나 단축한 4분45.4초,신기록으로 우승했다. 금메달을 목에 건 후에야 맹장 수술을 받은 로스였다 36년 베르린 올림픽 권투 라이트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헝가리의 임레 하란기 선수도 부상을 무릅쓰고 링에 오른 고집 불통의 사나이였다. 올림픽이 있기 몇 달전에 열린 국내 대회에서 하란기는 코를 심하게 다쳤다.의사는 당장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지만 그는 올림픽 이후로 미루었다. 그리고는 맹 훈련 끝에 마침내 올림픽 시상대 맨 윗자리에 서게 되었다. 그런 후에야 코 수술을 받은 하란기였다. 금메달이 값진 것이기는 해도 건강만큼이야 하랴만 선수들에게 그런 의지,의욕,투지,정신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1908년 런던 올리픽 수영 남자 800m 계영 결승 경기였다.마지막 선수가 뛰어들 때 선두 헝가리는 2위 영국보다 상당히 앞서 있었다. 결승점을 얼마 남겨 놓지 않고 그런데 헝가리의 졸탄 할메이가 갑자기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이었다.1906년 아테네에서 열렸던 올림픽 10주년 기념 대회에서 역시 최종 영자로 금메달을 따 낸 바 있는 할메이였지만 다리에 쥐가 나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몸은 말을 듣지 않고 의식은 가물거리고, 그래도 초인적인 의지로 제 코스를 찾아 버둥대는 할메이였다. 그러나 근육 경련은 좀처럼 풀리지가 않았다.그렇게 세 번씩이나 물속에서 텀벙거리면서도 기권하지 않고 사력을 다 한 할메이는 2위로 골인했다. 그리고는 그는 완전히 정신을 잃고 말았다. 급히 임원들이 끌어 올려 응급 처치를 했지만 몇 시간이 지나서야 그는 겨우 눈을 떴다.이 또한 투지로 따낸 은메달이었다 1896년 1회 올림픽 사이클,아테네와 마라톤간의 왕복 87km 도로 경기에서 그리스의 콘스탄틴 티니디스가 천신만고 끝에 우승했다.이것 역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쾌거였다. 마라톤 까지 선두로 달린 콘스탄틴은 돌아 오는 길에 다른 선수와 충돌해 나 딩굴었다. 자전거는 망가졌고 부상도 입었다.응급 치료를 받고 다시 일어난 그는 보조원의 자전거를 빌어 타고 달렸다.아테네에 다 들어 와서 그는 길 가의 사람을 피하려다 또 벽을 받았다. 자전거는 못쓰게 되었고 상처도 컸다.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대충 치료를 받고 이번에는 관중의 자전거를 얻어 탔다. 그렇게 콘스탄틴은 1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그의 몸은 땀과 먼지로 얼룩져 있었고 그의 표정에는 수 많은 고난을 겪은 흔적이 역력했다."고 당시의 기록은 적고 있다. |
스포츠 맨 쉽의 귀감
오른팔이 펴지지 않는 선천성 장애도, 그의 야구 열정을 막지 못했다. 16회 대륙간컵 야구대회에 출전하고 있는 투수 김준(21·고려대). 야구는 물론 운동선수로서는 치명적인 장애였다. 하지만 그토록 좋아하는 야구를 포기할 순 없었다. 야구선수 출신인 아버지가 있었기에 이런 모든 게 가능했다. 바로 김인식 전 엘지 2군 감독이다. 프로야구 초창기 MBC 청룡의 그 유명한 2루수였다. 그의 강속구는 시속 145㎞를 찍었다. 좌완 강속구 투수로 빛을 보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결국 고려대 진학도 가능하게 됐고, 올해 3학년이 돼서는 봄철연맹전 우승 주역으로 활약해 국가대표까지 뽑히게 됐다. “갈수록 야구 실력이 늘어나는 것을 보고 아버지가 가장 기뻐하세요. 내년엔 아버지가 몸담았던 엘지 트윈스에 지명되는 게 꿈입니다.” 장애를 딛고 국가대표팀의 투수로 성장한 김준의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스타크래프트 게임왕 |
1.짐 에봇
장애를 가진 채로 메이저리그로 활약한 선수를 말하라면,단연 Jim Abbott (투수)가 유명합니다. 그는, 태어날때 부터 오른 손이 없었습니다. 1993년에 Cleveland 전에서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는 등, 메이저의 기록에 남는 것과 동시에, 팬들의 기억에 남는 선수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이렇게 월등한 스포츠의 기록을 남기게 된것은 그의 부모님들은 그가 하려고만 한다면 무었이든 할 수 있다. 라고 뒤에서 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100%의 희망이 없어 질 때까지 결코 불가능한 일이란 없다고 생각한다. 장애는 우리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넘어야 할 하나의 단순한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2.피트 그레이
1942년 캐나다, 아메리카 야구 리그에서 피트 그레이 선수는 42경기에서 3할 8푼의 을 기록하였으며 44년 마이너 리그 멤피스 팀의 선수소 활약 할때는 홈런 5개 도루 68개를 성공 시킴으로 마이너 리그 최우수 선수에선발 되엇다 그 결과 그레이 선수는 다음해인 45년에 세이트루이스 브라운즈의 선수로 뛸 수 있는 기회를 잡앗다. 양키스와의 더블해서에서 피터는 4안타 2득점을 하고 수비헤서도 9번의 플아이를 했다, 어린 시절 오른 팔을 교통사고로 잃고 왼판로 전향하여 연습을 하였으며 명 외야수로 명성을 날렸다. 오른 팔이 없던 피트 그레이는 1945년 한시즌 동안 세인트 루이스 브라운스 유니폼을 입고 77경기에서 2할 1푼 8리로 외야수로 활약 했다 먼저 가장 위대한 핸디캡 메이저리거로는, 피트 그레이를 꼽을수 있다. 그레이는 오릍팔이 없는 가운데 외야수로 활약한 선수다. 멀쩡한 사람도 올라서기 힘들다는 메이저리그 무대에서, 1945년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에서 활약하면서 타율 .218, 13타점과 도루5개를 기록했다.
그레이는 1915년 3월6일 펜실베니아주 낸티코크에서 태어났다. 그레이가 오른팔을 잃은 것은 여섯 살 때였다. 채소배달을 돕던 그레이는 채소트럭에서 내리다. 바퀴에 오릍팔이 잘리는 사고를 당한 것이다.
원래는 오른손잡이었던 그레이는, 왼손으로 모든 것을 해야하는 불편함속에서도, 완벽한 왼손잡이로 성공했다. 그레이는 야구를 어떻게 했을까? 물론 왼손으로만 했다. 방망이를 휘두를 때는 왼손으로 모든 균형을 잡았고, 볼을 받고 던질 때에는, 왼손에 낀 글러브를 재빨리 오른쪽 어깨사이로 비스듬히 낀뒤 오른손으로 잡아 던져야 했다. 그레이는 이런 각고의 노력끝에 지역야구단에서 뛰다, 아메리칸리그 소속의 스리리버스팀에서 타율 .381라는 놀라운성적을 낸다.
그는 우여곡절끝에, 마침내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에 입단한다. 1945년 4월18일 늘 꿈꿔온 메이저리거가 된다. 물론 그레이가 순탄하게 메이저리거로 올라선 것은 아니다. 1944년 고향과 같은주에 속한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에 입단하고 싶었지만, 코니맥 감독이 그레이의 입단을 거부해 좌절한경험이 있다.
그레이는 1년간의 메이저리그 생활에서 삼진11개(234타수)를 기록했다. 한팔로 이정도라면 꽤 정교한 타격이었다. 특히 빠른볼에는 강했고 속도를 줄인 체인지업에는 약했다고 한다. 한팔이다 보니 배트를 잠시 멈출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 그래서 상대투수는 그레이에게 스피드를 줄인볼을 많이 던졌다고 한다.
비록 1년이라는 짧은 메이저리그 생활이었지만, 그레이가 당시 메이저리그에 끼친 영향은 상당히 컸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으로 침체되었던 야구열기가 그레이의 활약으로 상승세로 돌아섰고, 전쟁으로 불구가 된 군인들이 그의 모습을 보고 용기를 갖게 되었다. 현재 그레이가 쓰던 글러브는 명예의 전당에 전시되어 있다 어릴 적 사고로 오른쪽 팔을 잃고도 미국 메이저리그의 야구선수로 활약했던 피트 그레이가 지난달 31일 사망했다. 향년 87. 1915년 펜실베이니아주 낸티코크에서 난 그는 야구에 입문하면서 이름을 피트 와이쉬너에서 피트 그레이로 바꿨다. 2차대전과 더불어 선수들이 대거 입대하면서 장애인인 그에게도 구장에 설 기회가 주어졌다. 고향의 지역팀을 거쳐 남부연합의 멤피스팀으로 옮겨 센터필더로 활약하며 44년에는 타율 3할3푼3리, 홈런 5, 도루 68로 ‘올해의 선수’에 올랐다. 이때 메이저리그의 눈에 띄어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팀에 스카우트됐다. 그는 1945년 브라운스팀의 외야수로 한 시즌 77게임에 출장해 2할1푼8리의 타율을 올렸다. 그뒤 입대했던 선수들이 복귀하면서 메이저리그를 떠나 50년대까지 마이너리그에서 활동했다. 그는 달리는 트럭의 적재함에 타려다 떨어지면서 팔이 바퀴에 끼어 오른쪽 팔을 잃기까지 오른손잡이였다. 그가 왼손으로 공 던지는 것을 익힌 뒤, 신기료장수가 맞춤글러브를 만들어줬다. 뻥을 대부분 빼서 한쪽손의 손가락끝만으로 쉽게 낄 수 있도록 한 것. 이로 인해 땅볼이나 뜬볼을 잡기 위해 글러브를 재빨리 빼거나 낄 수 있었다. 그의 글러브는 뉴욕주 쿠퍼스타운에 있는 야구 명예의 전당에 보존돼 있다.
3.휴 데일리
한팔 다리 만으로도 메이저 리그에서 정상이노가 똑같이 그라운드를 누비며 감동적인 인간승리’의 드라마를 일궈냈던 선수는 약 10여명 가량 있다.
첫 장애인 선수는 1882년부터 87년 까지 클리블랜드 등에서 뒤었던 휴 데일리이다. 왼팔이 없던 데일리는 1883년 9월 14일 필라델피아전에서 노히트 노런(1:0)의 대기록을 작성한 데이어 84년에는 483개의 탈 삼진 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했다 그해 28승을 거둬 다승 2위에 오르기도 했으며 통산 성적은 73승 87패, 방어율 2.92로 외팔로 타석에 들어서 통산 88안타도 기록 했다 한쪽 다리가 없는 선수로는 좌완 버트 세파드가 유명하다. 2차 세게대전에 참전 왼쪽 다리를 잃은 그는 45년 워싱턴에 입단 하여 활약했으며 청각 장애인 야구 선수인 커티스 프라이드는 1993년 몬트리올 엑스포스를 통해 빅리거의 꿈을 이루었으며 오늘도마이너 리그에서 활약 한다.
4. 짐 아이젠라익 1998년 플로리다에서 게리 셰필드 등과 함께, LA다저스로 온 짐 아이젠라익은 한때 신경이상증세로 근육경련을 겪었던 선수. 신인때인 1982년 미네소타에서 첫 26경기동안 3할이상의 타율을 보이며 승승장구 했으나, 4월30일 증세가 악화되면서 출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아이젠라익은 1982년 34경기, 84,84년을 합쳐서 14경기만 출장해, 거의 야구를 포기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아이젠라익은 1986년까지 약물치료등으로 건강되찾기에 주력했다. 그러던중 아이젠라익은 오히려 운동이 치료에 도움에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재활훈련에 힘쓴결과, 1987년 캔사스 시티에서 제2의 야구인생을 시작했다. 98시즌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메이저리그 최고의 대타요원으로 활약했다.
5. '스리 핑거 ' 모디카이 브라운
`세손가락' 브라운은 애보트보다도 더욱 뛰어난 활약을 펼친 장애인 투수. 1876년 인디애나주의 조그마한 농장에서 태어난 브라운이 `세손가락'이라는 별명을 갖게된 것은 어릴 때의 사고 때문이다.
브라운은 7살때 옥수수절단기에 오른손을 집어넣어, 집게손가락이 잘리는 중상을 입었다. 만약 브라운이 조신하게 몸조리만 잘했다면 그의 별명은 `세손가락'이 아닌 `네손가락'이 됐을 것이다.
브라운이 처음 야구를 시작한 것은 24세때인 1900년이다. 10대에 벌써 프로에 뛰어든 다른 선수들과 달리 브라운은, 뒤늦게 야구에 발을 들여놨다. 농장을 떠난 브라운은 수년간 광산에서 광부로 일을했고, 우연한 기회에 동네 야구팀에서 투수를 맡게 된다. 그날 브라운을 상대한 타자들은, 생전 처음보는 공에 연신 헛방망이질을 해댈 뿐이었다.
브라운이 던지는 커브가 기묘한 손의 모양때문에, 공이 테이블에 굴러가다가 모서리에서 떨어지는 것과 같은 `마구' 효과를 냈기 때문이다. 직구의 스피드도 상당했고 컨트롤도 좋았던 브라운은, 마구와도 같은 커브를 결정구로 삼아 당시 메이저리그의 최고의 투수였던 크리스티 매튜슨(슈트의 창시자)과 자웅을 겨루게 된다.
야구를 시작한지 3년만인 1903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처음으로 빅리그 무대를 밟은 브라운은, 데뷔 첫해 9승13패로 가능성을 인정받은 뒤 시카고 컵스로 트레이드된다.
이때부터 브라운의 시대가 시작됐다. 1905년 18승을 거둔 브라운은 1906년에는 20세기 메이저리그에서 두번째로 낮은 방어율인 1.04를 기록하며, 26승6패라는 놀라운 성적을 남겼다.
1907년에도 역시 20승고지를 넘어섰고, 월드시리즈에서는 완봉승으로 컵스의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브라운은 1911년까지 6년연속 20승고지를 밟았다. 브라운이 은퇴를 선언한 것은 마흔살때인 1916년이다.
브라운은 빅리그 14년동안(1903~1916), 통산 239승130패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뒀고(승률이 65%에 육박한다!), 그의 통산 방어율 2.06은 역대 3위에 랭크되는 성적이다. 만약 브라운이 월터 존슨처럼 10대에 야구를 시작했다면, 아마 300승 고지를 넘었을 것이다.
브라운은 1948년 사망했고 다음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이밖에 마이너리그에서는 사냥도중 총기사고로 한쪽 다리를 절단해야 했던 몬티 스트래턴은, 인공수족을 달고 볼을 던졌고, 양다리가 없이 태어난 데이브 스티븐스는, 의족없이 2루수로 출전하는 불굴의 의지로 관중들의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장애를 `던지고 때리면서'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준, 의지의 프로야구선수들, 그들에게 시련은 있었지만 좌절은 없었다...
6. 2게임 연속 노히트노런 쟈니 밴터미야
한 쪽 팔이 없는 장애인이 메이저리거가 됐다면 대단한 ‘인간승리’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외팔투수가 메이저리그에서 2경기 연속 노히트 노런 대기록을 세웠다면 어떤 찬사를 덧붙여야 할까.
1930년대 신시내티 레즈서 활약했던 신인투수 자니 밴터미야는 외팔이였다. 자니는 1938년 6월15일 믿을 수 없는 대기록을 수립했다.
브루클린 다저스와의 경기서 선발등판한 자니는 8회까지 볼넷 4개만 허용한 채 단 한 개의 안타도 내주지 않았다. 자니는 이미 나흘 전 경기서 노히트 노런을 수립한 바 있어 2경기 연속 대기록의 금자탑을 눈앞에 두게 됐다.
운명의 9회 마지막 수비. 첫 타자를 땅볼로 처리한 자니는 대기록 수립이 눈앞에 어른거려 흥분한 탓인지 1사 후 연거푸 3타자에게 볼넷을 허용, 위기에 몰렸다. 스코어는 6-0으로 크게 앞서 있어 문제가 없었으나….
1사 만루에서 맞이한 상대 타자는 3루 땅볼. 3루수는 병살처리할 수 있었으나 신중하게 3루주자만 협격 아웃시켰다. 계속된 2사만루에서 등장한 타자는 초구를 우익선상 파울 타구를 때려낸 후 2구째에 방망이를 휘둘러 중견수 뜬공으로 물러났다.
외팔투수가 극적인 2경기 연속 노히트 노런의 대기록을 수립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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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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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맨쉽의 귀감1936년 LA 올림픽 육상 5000m 결승 경기, 핀란드의 라우리 라티넨과 미국의 랄프 힐이 접전을 벌였습니다. 결승선을 얼마 남겨놓지 않고 라티넨이 한 발 앞서 달렸고 그 뒤를 힐이 바짝 추격했습니다. 힐이 사력을 다 해 라티넨을 앞서려고 바깥 쪽으로 빠져 나오려는 순간에 라티넨이 힐의 앞을 가로 막게 되었습니다. 멈칫하던 힐은 다시 방향을 고쳐 안 쪽으로 추월하려 했으나 라티넨이 또 그 쪽으로 몸을 틀며 진로를 방해 했습니다. 주춤할 수 밖에 없는 힐과 진로 방해 하던 라티넨은 거의 동시에 골인했습니다. 사진 판독 결과 라티넨의 우승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관중석에서 야유의 함성이 일어 났습니다. 달리기 경주에서 앞지르려는 선수의 길을 막으면 실격으로 처리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관중들이 라티넨의 우승을 비난하며 야유를 보냈습니다. 사력을 다해 달리는데 힘을 다 쏟다 보니 라티넨은 비틀거리며 달렸는데 관중들이 왜 소란을 피우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진 판독을 통해서 당시의 상황을 알게 된 라티넨은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분명한 진로 방해였슴을 알게된 라티넨은 그 즉시 힐에게 달려가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했습니다. 그러나 힐은 오히려 민망해 하며 라티넨의 우승을 축하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시상대에 올랐을 때 라티넨은 힐을 한사코 맨 윗자리로 미는 것이었습니다. 우승자는 자기가 아니라 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힐은 사양하였습니다.
아름다운 실랑이를 지켜 보던 관중들은 아름다운 스포츠 정신에 관중들이 모두 기립하여 두 선수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는 것이었다. 라티넨과 힐, 그들은 아름다운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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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로이드 존즈>, 그처럼 삶을 영위하길 바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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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에 만들어진 이장호 감독의 영화 `공포의 외인구단'은 이현세의 동명의 인기만화를 각색한 것이다. 당시 갓 출범한 프로야구의 인기에 힘입어 83년에 나온 만화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자 이장호 감독은 86년에 이 만화를 영화로 만들어 역시 홈런을 쳤다. 이 영화는 야구계에서 버림받거나 부상이나 장애를 가진 자들이 주멤버가 된 팀이 역경을 딛고 인간승리를 이루는 내용을 혜성과 엄지의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담고 있다.
픽션에서뿐만 아니라 실제로 외팔이의 장애를 딛고 스포츠 선수로 명성을 날린 선수들은 위에서 열거 분들 보다 훨씬 모래알처럼 많은 분들이 우리 곁에서 훈훈한 삶의 감동을 선사한다.
88서울 올림픽에서 미국야구의 자존심을 살리며 금메달을 선사한 ‘짐에봇’은 우리의 눈에 너무도 익숙해진 선수이다. "100%의 희망이 없어 질 때까지 결코 불가능한 일이란 없다고 생각한다." 라는 말로 우리에게 희망적인 메시지를 선사했으면 " 장애는 우리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넘어야 할 하나의 단순한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담금질했던 그에게 수많은 도전을 받게 한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듯이 우리의 탁구를 하기 위한 신체적 조건은 무엇일까? 가장 기본적인 신체조건은 라켓을 휘두르는 두 팔, 그리고 풋웍을 할 수 있는 다리다. 만약 이런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면 경기를 하는데, 상당한 불편을 느낄 것이며 ,심한 경우는 엄두도 못 낸다.
하지만 이들은 이 모두를 이겨내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체적인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정신력이다. 정신력은 신체적인 핸디캡을 극복해, 스포츠활동을 가능케 하는 요소다. 신체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데, 정신력만으로 핸디캡을 극복한 예가 참으로 많은 것을 이번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다.
휴 데일리는 '내 장애는 나를 집중하도록 만든다, 내가 포기 하지 않도록 , 동정을 받지 않도록 ,남과 다른 대우를 받지 않도록 나를 가르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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