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떠나면서
매년 떠나는 우리 가족의 답사이지만 지금 가고자 하는 곳은 최소 2박3일이 걸리는, 예전엔 영암군에 속해지만 지금은 완도군에 속한 보길도이다. 그래서 여름 휴가를 이용해 사랑하는 쌍둥이 두 딸과 그리고 아내와 함께 승용차를 이용해 가기로 했다. 너무도 잘 알려진 어부사시사가 탄생한 곳이지만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늦은 나이에 고전문학이 좋아 국문학을 공부하고 있는 학생의 입장에서 꼭 가고 싶은 곳, 무엇보다도 어부사시사의 모태가 되었던 그곳을 답사하고 싶었다. 어떤 곳이기에 그러한 어부사가 탄생했을까 하는 기대감속에서 인터넷과 책을 통해 일차적인 자료 준비를 하고 그곳에서 예전에 살았던 어떤 분을 알고 있어서 보길도에 대한 역사적 배경과 지리적 배경을 조금은 익히고 떠났다.
항상 답사를 떠나면서 느끼는 것은 문화유적을 찾아 답사를 할 때면 여러 경로를 통해 자료준비를 하고 특히 온라인 등의 발달로 인해 인터넷 등을 통한 정보를 갖고 떠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고장의 문화원에 직접 찾아가서 자료를 구한다거나 안내를 받고, 아니면 답사지의 현장 가까운 곳에서 대대로 살아온 토박이 어른들을 찾아가 물어보고 여쭤보는 것이 가장 유익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길이고 또한 역사 속에 감춰져 있거나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민초들에 대한 역사를 가장 잘 알 수가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많은 경험으로 얻어진 것이다. 물론 좀 더 전문적이고 체계적 식견을 가진 그 지방의 향토사학자를 만나서 사실적이고 현장성 있는 전문 지식을 습득할 수도 있지만 시간이나 여러 여건상 사실상 힘든 일이다.
이와 같은 이유들로 인해서 난 보길도를 향해 가던 중 우리 나라 육지의 최남단에 위치한 해남의 문화원을 아무런 연락도 없이 무작정 찾아갔다 물론 그 지방의 문화유적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이다. -해남은 보길도를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邑(읍)중의 하나이다-. 보길도가 속한 완도의 문화원을 찾아가는 것이 좋겠으나 해남의 땅끝 마을에서 배를 타야만 시간 절약이 되기 때문에 완도로 우회하지 않고 가는 도중에 그 곳을 들렀던 것이다.
난 그곳에서 의외의 성과를 거두었다. 우선 고산의 득관조가 살았던 연동이라는 마을이 있고 그 마을에는 고산과, 그의 증손자며 자화상으로 유명한 공재 윤두서의 유물전시관이 있었다. 또 산중신곡이나 오우가 등 수 없이 많은 시조들이 해남에 속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위와 같은 정보를 아주 친절하게 제공해준 여직원에게 고맙게 생각하며 그 여직원이 말해준 금쇄동과 수정동, 그리고 문소동 등은 주옥같은 시조를 잉태한 곳이기에 다음에 꼭 가보고 싶은 미완의 답사 처로 남겨 두었다
그리고 들뜬 마음으로 보길도를 향해 선착장이 있는 땅끝 마을로 향했다. 상당히 더운 날씨였지만 그곳의 작은 섬들이 펼쳐진 환상적인 퍼레이드를 보면서 땀을 식히고 마음의 휴식을 취해 보았다.
2. 어부사시사의 산실인 보길도
땅끝 선착장에서 보길도를 왕복하는 배는 1시간에 한번 있었다. 여객선은 상당히 커서 승용차를 수십 대를 실을 수 있었고, 마침 여름의 휴가철 이어서인지 피서객도 많았다. 주변의 크고 작은 많은 섬들 잔잔한 바다 위에 떠 있는 부표들 하얀 포말이 이는 배 뒤에서 저 멀리 사라져 가는 땅 끝 마을의 사자봉을 바라보았다. 한 시간쯤 뒤 드디어 보길도의 청별 선착장에 도착했다.
첫눈의 보길도는 바위도 많고 또한 산세도 좋아 보였다 예전에 이곳은 숲들이 밀림처럼 우거져있었고 식물 또한 분포도가 다양한 섬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섬에 고산은 은둔했다. 그래서 어부사시사를 세상에 내 놓았다.
윤선도는 서울에서 양반으로 태어나 이이첨 등을 탄핵하다 유배를 가고 별시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세자를 가르치는 사부가 되었다. 연이은 유배와 은둔 생활을 하는 중 향리인 해남으로 돌아가 유유히 책을 읽고 시를 짓는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생활을 시작한지 일년 정도 지난 1636년 12월 청군이 침입하여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청군의 황제에게 치욕적인 성하의 맹을 하고 말았다. 이때 고산은 향리의 노비와 젊은이들을 모아 강화로 가는 도중이었는데 이와 같은 비보를 접한 것이다. 그리고 울분을 참으며 향리인 해남으로 돌아가지 않고 제주도로 돌려 그곳에서 여생을 마치려고 작정했다 그러나 항해 도중에 마침 이곳 보길도에 들렀다가 이 섬의 아름다운 경치에 매혹되어 제주도 행을 취소하고 이 섬에 부용동을 짓고 낙서재라는 정자를 세워 여생을 마칠 계획을 세웠다.
이렇게 해서 고산은 보길도에 자리잡고 해남을 왕래하며 은둔의 생활을 하면서 우리말을 잘 부려서 작품을 빚었고 그리고 한문문학이 성행하던 그 때 우리의 문자인 훈민정음을 이용해서 최고 수준의 작품을 창작했다는 것은 커다란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Ⅱ. 園林문화의 극치인 세연정에서
1. 원림문화와 고산 문학
고산 윤선도는 흔히 국문학상 시조문학의 제 1인자이며, ,송강 정철, 노계 박인노와 함께 조선시대의 삼대 가인으로 꼽힌다. 고산은 우리 나라의 고유한 시조 시 형식인 시조작가로서 민간에서 흔히 사용되는 쉬운 언어를 아름답게 표현하여 국어 미의 극치를 보여준 분이. 그의 시조 75수가 모두 국어의 미를 발휘한 주옥같은 작품이고 이는 스스로 파고든 자연사랑에서 말미암은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러한 고산 문학의 주된 배경은 자연이다. 어촌의 자연을 배경으로 한 것이 '어부사시사'이고 산수를 배경으로 한 것이 '산중신곡', '오우가' 등이다. 때문에 고산 문학을 논하는데는 그가 좋아하던 자연을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고산문학을 얘기하는 데에 자연 그대로에 최소한의 인공을 가한 보길도의 부용동 원림, 해남의 금쇄동 원림과 수정동 원림 등을 들 수 있다.
고산은 18년의 유배생활과 20년의 은둔생활이라는 남다른 경험 때문에 정신적 위안을 주는 자연을 찾았을 것이고 어느 사가의 말처럼 검은 까마귀 속에 홀로 서있는 백로와 같다라고 했는데 이와 같은 그의 올곧은 기개 때문에 정치적으로 굴곡이 많은 생애의 연속이었다. 때문에 세속의 번뇌를 피해 자연 사랑을 키웠던 것이다. 중국의 주자가 무이산에 무이정사를 짓고 수양하면서 '무이도가'를 짓고 율곡 이이가 해주 석담에 은거하면서 주자를 흠모하여 '고산구곡가'를 창작했듯이 고산도 원림 문화를 경영하면서 송나라 주자의 대은병보다 작다고 해서 붙인 소은병이라 이름짓기도 했고 주자를 흠모하여 옛 도학자들이 추구하던 자연에서의 생활을 즐겼던 것으로도 보인다.
이렇게 볼 때 그의 문학작품에 흐르는 자연과의 친화는 인간세계를 떠나 자연 속에 동화되고자 하는 고산의 마음이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당시의 조선시대 문학이 대체로 자연을 소재로 하고 자연경관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자연을 통해 교훈적인 의미를 발견하는 등의 강호가도를 노래하는 것이 하나의 흐름이었기는 했다. 이와 같이 고산은 원림 문화를 경영하고 이것을 배경으로 우리 국문학사에 길이 빛나는 많은 작품들을 우리들에게 남겨 주었다.
이처럼 그가 원림 문화에 심취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선천적이며 남다른 자연사랑과 예술적인 심미감, 그리고 연속되는 은둔과 유배에서 오는 속세의 거부감으로 인해 자연과의 정을 더욱 깊게 하였을 것으로 본다.
상기와 같이 아름다운 섬 보길도 대한 외형적인 모습과, 눈앞에 펼쳐지는 바다, 그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와 함께 하는 어부들의 모습들을 보았다. 이러한 어부들의 사계절 모습들을 한 폭의 풍경화처럼 그려내고 있는 어부사시사의 40수를 상기하면서 국문학도로서 우리말을 아름답게 가꾸면서 꽃을 피워내었던 고산의 문학성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Ⅲ. 답사의 뒤안길에서
고산은 병자호란 이후 다시는 당시의 세상에 나아가 벼슬할 뜻이 없어서 소위 은둔자의 삶을 갈망하였기에 많은 원림 문화를 이룩하고 오우가와 같은 산수를 벗삼은 오우가와 독서, 시문을 창작하고 가야금을 타는 등 그야말로 풍류의 극치를 보여주는 생활을 하였다. 물론 풍요로운 집안의 물질적 도움과 권력이 밑바탕이 되었으리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조선사회는 임진왜란과 삼전도에서의 청태조에게 당한 치욕적인 인조의 임금의 불행 등 이처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엄청난 변화를 겪던 시기였는데 고산은 산세 좋은 곳에 정원을 만들고, 세연정 같은 데서는 배를 띄워놓고 가야금을 타면 그 가락에 맞추어 여인들은 연못 중앙의 바위 위에서 춤을 추었다 그는 효종의 사부였고 국란을 걱정했다던 고산으로서 이렇게 호화스럽고 여유 자적한 삶을 누린다는 것이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고 이러한 풍류생활은 어쩜 사대부의 도의와 책임 마저 도외시 해버린 그야말로 무책임한 생활이 아니었던가 하고 개인적으로 생각해본다.
또 보길도의 지근거리에 노화(蘆花)도라는 섬이 있는데 그곳 사람들은 오죽했으면 예전에 종노(奴)자를 써서 奴화도라고 했다한다. 이것은 당시 원림조경을 조성한다거나 보길도의 산 곳곳에 있는 정자를 세운다거나 하면서 섬 거주민들 노역의 고통이 어떠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고 인근의 섬 주민까지도 노역에 동원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고산의 문학이 빛나고 후대에도 가치 있는 평가를 받은 이면에는 이와 같이 재력과 권력으로부터 멀어져있는 민초들의 노고가 밑거름이 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었고, 답사의 뒤안길에서, 예나 지금이나 소외계층의 고달프고 비참한 역사를 상기해보는 의미 있는 답사의 여정이 되었다. 그리고 미완의 답사지로 남겨놓은 금쇄동과 수정동 그리고 문소동의 답사 때는 또 다른 시각에서 살펴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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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카페 회원 님들께서 윤고산의 발자취를 찾아 떠나 신다니
그쪽의 정보를 조금 아는 저로서 반가운 마음에 몇 자 올립니다.
상기의 글은 작년 국문과 2학년 교양과목인 '여가와 삶'의 과제물로 제출했던 것을
그대로 올려놓은 저의 拙稿이니 참고 하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계획된 일정으로 답사를 하시겠지만 혹시나 일정의 차질이 있으실 경우에 대비해서
몇 군데를 추천합니다.
보길도를 향하는 도중에 해남 읍에 도착하시면 읍내에서 10분 거리의 연동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그곳에 윤고산의 유물전시관이 있으니 들러서 윤두서의 자화상과 산중신곡집 어부사시사집 등 약 3천여점의 중요한 유물을 둘러보시고 바로 위에 있는 500년 수령의 은행나무와 '녹우당'이라고 쓰인 편액을 보시면서 동국진체를 이룩하신 당대 명필의 옥동 '이서'의 글씨(녹우당)를 감상하시고 가옥구조를 유심히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으실 겁니다.
또한 그 곳에서 약 15분 거리에 있는 대흥사(지금은 대둔사) 사찰을 둘러보시면 정조대왕이 금으로 쓴 친필과 천개의 불상이 있는 천불전 서산대산의 유품. 원표 이광사가 쓴 '대웅전'이라는 편액 그리고 산 중턱에 있는 그 유명한 일지암(동다송을 썼던 초의 선사가 이 암자에 계시면서 차의 문화를 꽃피웠던 곳) 우리 나라의 차문화의 발생지? 차를 좋아하신 분의 필수 답사 처--이곳은 시간상 조금 어려울 듯- 하지만 지금은 케이블카가 설치되었다고 함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곳 해남의 철새도래지 등등 .............
땅끝에서의 사자봉은 꼭 올라가셔서 다도해의 파노라마를 보시면 그야말로 fantastic!!!!!!!(방명록에 필히 흔적을 남기실 것)
그리고 보길도행(내용은 대충 과제물에 나온 데로) 그러나 동천석실이나 그 외 격자봉 이곳저곳에 많은 흔적이 있는데 시간상 생략하시고 .차라리 우암 송시열씨가 써놓은 글쓴 바위를 가보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이젠 서울로 향하시는 길에 다산초당은 필수코스 '다산동암'은 다산의 글자를 집자해 놓은 것이고 '寶丁山房'은 추사 김정희 중년의 글씨입니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강진의 구강포가 바라다 보이는 천일각(다산 유배시에는 없었음)이 있는데 다산은 자주 그 장소에서 함께 유배 도중 나주에서 갈라져 흑산도로 유배를 갔던 형 정약전(흑산도에서 '자산어보'를 집필함)을 그리워했습니다.
참고로 예향의 고향 해남은 혁명적 지사적 삶을 살다 간 김남주 시인, 오월 광주혁명의 시인 고정희 그리고 명기완, 시조시인 윤금초, 황지우, 이동주, 노형렬, 등등 시조시인의 대가 윤선도의 후예들입니다.
"해남은 발길 닿는데 곳마다
문인들이
배추밭에서, 깻잎 속에서
맨드라미 속에서
시가 되어 고개를 내미는 쉼터" 입니다
첫댓글 많은 참고가 될듯 하네여~~~
정말 가고싶은 곳이네요~ 맨날 마음뿐이랍니다. 언제 확 나서야 하는데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