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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최저(最低)의 등장인물 소설 <예덕선생전>
‘엄 행수가 똥을 쳐서 밥을 먹으니 그의 발은 더럽다지만 입은 깨끗하다’
한국인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단어는 무엇일까?
『한국어 형태소 및 어휘 사용 빈도분석』1에 의하면 일반명사의 경우는 ‘사람’이고, 고유명사는 ‘한국’, 동사는 ‘하다’, 형용사는 ‘없다’요, 접속사는 ‘그러나’이다. 그런데 곰곰 살펴보면 저 앞의 ‘사람’과 맨 뒤의 저 ‘그러나’가 예사롭지 않다. 사실 우리의 고소설을 보면 영웅, 재주있는 남자와 그에 버금가는 여인이 등장하면 어김없이 그보다 못한 ‘사람’은 ‘인간대접’을 못 받는 게 다반사다. 어느 자리에선가 이 말을 하였더니, 한 분이 ‘그건 그렇지요, 그러나…’하면서 말을 이었다. 물론 ‘그러나’는 역접사답게 앞말을 뒤집는 게 제 전공영역이다. 들으나 마나 그 분의 말씀은 우리 고소설의 장점 한 부분을 들고 나올 것이 빤하다.
저 물 건너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Diogenēs) 선생 말씀으로 <예덕선생전>을 시작해보자.
디오게네스 선생이 환한 대낮에 불을 켜들고는 두리번두리번 다니더란다. 그래 사람들이 “거 왜 그러시오.”하고 물었겠다.
디오게네스 선생 가로되,
“어디 사람다운 사람이 있어야지. 그래 이렇게 사람다운 참사람을 찾고 있다네.”
<예덕선생전>은 ‘사람’이 보이는 소설이다. <예덕선생전>은 연암 박지원이 ‘그러나’를 안 썼기에 지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다. 대개 저 시절을 살았던 이들은 “조선왕조가 잘못되었지. 아, 궁중에선 남인이니, 서인이니 파당을 나누고, …그러나 저 이도 그러니, 나도 어쩔 수 없잖나. 저 이가 바뀌지 않으니 저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그래, 할 수 없이 과거를 본거지. 난들 하고 싶어 했겠나.”라고 했다. 지금도 똑 같다.
연암은 이 ‘그러나’를 안 썼다.
잘못되었기에 과거를 안 보았고, 저 시절이 잘못되었기에 이러한 소설을 지었다. <예덕선생전>에는 그래 저 ‘사람’은 있으되, ‘그러나’는 없다.
화설,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은 연암 박지원이 지은 한문단편소설이다. 단편 소설이니만큼 짧고도 등장인물도 적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단 3인. 나레이터인 나, 그리고 선귤자와 자목이다. 선귤자와 자목은 사제 간이기도 하다.
선귤자부터 보자.
이 이는 당대의 학자로 매일 똥을 푸는 직업의 엄 행수를 예덕선생이라고 부르고 오늘날에도 찾고 싶은 참스승상이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제자 자목에게 참다운 교류를 가르쳐 주려하나 실패한다.
선귤자로부터 선생이라 불린 예덕선생이다. 예덕선생은 똥을 져 나르는 역부의 우두머리이나 예의를 아는 사람이기에 선귤자가 예덕선생이란 칭호를 준다. 그의 정직하고 순후한 삶에서 관습적으로 천히 여기는 노동이 더 없이 정갈해 보인다. 그는 잃어버린 예의 은유이다.
다음에 자목이란 녀석이다. 선귤자의 제자로 스승이 엄생수와 같은 역부를 사귀는 게 부끄럽다며 스승에게 대들 정도로 뱀뱀이 영 형편없다. 당시의 전형적인 양반 사대부를 대표하는 인물로 제 똥 구린 줄 모르는 불인한 위인이다. 이런 녀석을 가리키자니 ‘선생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속담이 나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배경은 서울 종본탑이다.
이 소설은 연암별집 「방경각외전」에 실려 있으며 작자 20세 무렵의 작품으로 시종 선귤자와 자목 사제師弟간의 겨끔내기로 진행된다.
‘예(穢, 더럽다. 똥)’란 경멸스런 것에 ‘덕德’을 짝해 놓고 여기에 더하여 학예學藝가 뛰어난 사람을 높여 이르는 ‘선생先生’이란 칭호까지 부여하여 제목으로 버젓이 내놓은 소설이다. 선귤자에게 예덕선생이라는 벗이 있었는데 그는 종본탑 동편에 살면서 분뇨를 져 나르는 역부들의 우두머리인 엄 행수였다. 선귤자의 제자 자목은 스승이 사대부와 교우하지 않고 비천한 엄 행수를 벗하는데 대하여 노골적으로 불만의 뜻을 표시한다. 안타깝게도 어린 나이의 자목은 이미 진부하여 시속에 통하지 않는 동홍선생(冬烘先生)이 되어 있었다.
선귤자는 이러한 제자를 달랜다.
벗을 사귐에는 이해로 사귀는 시교(市交)와 아첨으로 사귀는 면교(面交)가 있는데 나중 것은 오래 갈 수 없는 것이므로 마음으로 사귀고 덕을 벗하는 도의의 사귐이어야 함을 자상히 일러준다. 비록 엄 행수의 사는 꼴이 어리석은 듯해 보이고 하는 일은 비천한 것이지만 남이 알아주기를 구함이 없고 남에게 욕먹는 일이 없으며 볼 만한 글이 있어도 보지 않고 좋은 음악에도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라고도 한다.
선귤자의 이야기를 통해 엄 행수는 아무런 요량 없이, 타고난 분수를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사람 사는 예를 지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속절없는 삶에 대한 무기력함에서 나온 행동도, 조선후기라는 질곡의 시대를 살아가는 삶에 대한 환멸도 아니다. 오히려 세상을 담담하게 인정하는 의연한 모습이다. 엄 행수는 비록 분뇨를 져 나르는 천민으로 지문 없는 사람들 중 하나지만 결코 ‘가년스럽다’할 수 없다. ‘가년스럽다’는 보기에 가난하고 어려운 데가 있다는 뜻이다. 인생의 8할을 아예 양반에게 주어버린 이에게 찾아낸 희망을 연암은 이렇게 그려내고 있다.
그러니 엄 행수야 말로 더러움 속에서 덕행을 파묻고 세상 속에 숨은 사람이다. 엄 행수의 하는 일이 비록 불결하다지만 그의 삶은 지극히 향기로우며 그가 처한 곳은 더러우나 의를 지킴은 꿋꿋하다고 말하는 선귤자 또한 진정한 선생이다.
이제 선귤자가 구체적으로 예덕선생의 어떠한 점에 매료된 것인지 짚어보자. 언급한 바, 예덕선생은 배운 것이 하나도 없는 그저 천인 역부에 지나지 않는 분뇨 수거인일 뿐이다. 예덕선생의 모습은 이렇게 적혀있다.
해마다 정월 초하룻날이면 아침에 비로소 벙거지를 쓰고 의복에 띠를 두르고 신발을 갖춘 뒤 두루 세배를 다닌다. 그 이웃마을을 돌고 와서는 전의 그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발채를 얹은 바지게를 짊어지고서는 마을로 들어갔다.
“근본 가지구는 사람을 말하지 못하네. 갖바치에서 생불이 나구 쇠백정에서 영웅이 나는 걸보게.”
홍명희의 『임꺽정』에 나오는 말이다.
비록 똥을 져 나르는 천한 역부의 우두머리지만 새해 아침 자기의 의복을 깨끗이 입고는 웃어른들에게 세배를 다닐 줄 안다는 예의도 그렇지만 그보다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자기 직분에 충실히 임한다는 점이다. 남의 떡이 커 보이는 게 인지상정이련만, 하물며 천인 역부로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그라고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예덕선생은 우직하니 제 갈 길을 간다.
선귤자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엄 행수는 똥을 져서 밥을 먹고 있으니 지극히 불결하다 하겠다. 그러나 그가 밥을 얻을 수 있는 까닭을 따지자면 지극히 향기롭다. 그의 몸가짐은 더럽기 짝이 없지만 그 옳음을 지키는 것은 지극히 높다. 그 뜻으로 미루어 보면 비록 만 섬에 해당하는 부역임을 알 수 있다. 이 점에서 보면 깨끗한 것에도 더러운 것이 있고 더러운 것에도 깨끗한 것이 있을 뿐이다.
넓은 도포 소맷자락 휘젓는 조선의 양반들은 아예 노동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경시하였다. 이 문맥 속에 저 앞문장을 담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여기서 다루는 ‘인분人糞’ 문제는 연암이 늘 생각하던 실학사상에 연유한 것이니 단지 소설을 쓰기 위해 임시로 차용한 소재가 아니란 점도 짚어야 한다. 그의 「일신수필(馹迅隨筆)」에서 “똥이란 지극히 더러운 것이지만 밭에 거름을 준다면 마치 금처럼 아까워한다. 길에 버린 재가 없고 말똥을 줍는 자는 삼태기를 메고서 말뒤를 따라 다닌다. 이러한 것을 네모나게 쌓거나 혹은 팔각으로 혹은 여섯 모로, 혹은 누대의 모형처럼 만든다. 똥거름을 보니 천하의 제도가 이곳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말한다. ‘기와조각과 똥거름 이것은 장관이다.’라고.”
연암은 ‘똥이란 지극히 더러운 것’이라 하면서도 가로되, ‘장관!壯觀’이라고 한다. 연암이 중국을 여행하면서 볼거리가 없어서 퇴비더미에 관심을 갖은 것이 아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20세기를 ‘밥의 시대’라고 한다면 21세기는 ‘똥의 시대’라고 하며 똥만이 인류를 구원할 있다고 똥 예찬론을 편다. 실상 서점가에 가면 여러 종류의 똥에 관한 서적이 보인다.
박제가의 북학의 「분오칙糞五則」의 글을 보면 “한양의 성중에는 매일 인분이 뜰이나 거리에 버려지고 …분뇨는 거두지 않고 재가 길가에 버려져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눈을 뜰 수 없고…都下 則日委之於庭宇街巷…糞旣不收 恢則專棄於道 風稍起 目不敢開…”고 하였으니 연암이 청나라에 들어가 저러한 것을 보고 장관이라고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이것은 그가 평생을 몸으로 실천한 실학사상實學思想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을 그대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연암이 분뇨수거인 엄 행수에게 ‘선생’이라는 칭호를 붙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더욱이 아랫사람으로서 웃어른에 대하여 논쟁을 금하는 ‘재하자(在下者) 유구무언(有口無言)’이라는 말의 위세가 여전할 때이다. 스승에게 대드는 녀석의 태도에서 영 뱀뱀이 떨어지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얄긋한 성격의 자목은 ‘귓구멍에 마늘 쪽 박았는지’ 통 알아듣지 못한다. ‘상놈’은 양반 앞에서만 상놈임을 저는 알지 못한다는 소리이니 저 백태 낀 눈으로야 엄 행수를 어디 한 사람의 ‘인간’으로조차 보았겠는가. 더욱이 자목은 불순함이라고는 없는 엄 행수에게 모진 욕까지 퍼붓는다. 자목이 하는 짓을 보면 늘품이라곤 조금도 없다. 연암 당대, 저러한 자목류의 모지락스런 생물들이 적잖았을 것이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요령껏 사는 것이 큰 재주인 듯 여기나 이 소설을 찬찬이 읽고는 빙충맞아 보이는 엄 행수라는 인물을 통해 부끄러움을 느꼈으면 한다. 그래 논어 ‘위령공衛靈公’편에서 공자는 “더불어 말할 만한데도 함께 말을 하지 않으면 아까운 사람을 잃어버리고 더불어 말할 만하지 못 한데도 함께 말을 하면 말을 잃는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람도 말도 잃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우리 주위를 찬찬히 살피면 보이지 않는 곳에 저런 이들이 꽤 많으니 찾아 사귀어 볼 일이다. 겉치레만 화려한 이들의 뒤꽁무니만 붙좇지 말아야한다.
짧지만 결코 짧지 않은 소설이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쓴 19세기 말 미국의 유명한 작가, 마크 투웨인(Mark Twain)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짧은 편지를 쓸 시간이 없어서 긴 편지를 썼다.”
짧은 소설이니 <예덕선생전> 전문을 보자.
<예덕선생전 穢德先生傳> 원문
배경, 서울 종본탑.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3인으로 선귤자와 자목은 사제 간이다.
선귤자, 퍽 점잖은 당대의 학자로 매일 똥을 푸는 직업의 엄 행수를 예덕선생이라 부른다. 오늘날에도 찾고 싶은 참스승상이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제자 자목에게 참다운 교류를 가르쳐 주려하나 실패한다.
예덕선생, 똥을 져 나르는 역부의 우두머리이나 예의를 아는 사람이기에 선귤자가 예덕선생이란 칭호를 준다. 그의 정직하고 순후한 삶에서 관습적으로 천히 여기는 노동이 더 없이 정갈해 보인다. 그는 잃어버린 예의 은유이다.
자목, 선귤자의 제자로 스승의 말에 코대답만 해대며 엄 행수와 같은 천한 역부를 사귀는 게 부끄럽다 한다. 분을 삭이지 못하여 스승에게 대들 정도로 뱀뱀이 영 형편없는 녀석이다. 당시의 전형적인 양반 사대부를 대표하는 인물로 제 똥 구린 줄 모르는 불인한 위인이다.
선귤자(蟬橘子)에게 '예덕선생(穢德先生, 풀이하자면 더러운 똥이지만 여기에 덕이 있다는 뜻에서 붙인 호칭)'이란 벗이 있었다.
그는 종본탑(宗本塔) 동쪽에 살면서 날마다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똥을 져 나르는 것으로 직업을 삼았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를 ‘엄 행수(嚴行首)'라고 불렀다. ‘행수’라는 것은 상일꾼들 중에서 늙은이를 말하는 것이고 엄은 그의 성이었다.
제자 자목(子牧)이 스승인 선귤자에게 물었다.
"예전에 제가 선생님께 듣기를 '벗이란 동거하지 않는 아내요, 한 핏줄이 아닌 아우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벗이란 이와 같이 중한 것입니다. 온 나라의 내로라하는 사대부(士大夫,독서를 하면 사士요, 벼슬을 하면 대부大夫)들이 선생님의 뒤를 따라 아랫바람에 놀기를 원하는 자가 많지마는, 선생님께서는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대체 저 '엄 행수'라는 자는 마을의 천한 상일꾼으로 하류 계층에 처해서는 치욕스러운 일을 합니다. 그런데도 선생님께서는 자꾸 그의 덕(德)을 너무나 칭찬하면서 '선생'으로 부르시고는 장차 교분을 맺으시고 벗으로 청하시려는 듯합니다. 제자는 너무나 부끄러워 이제 선생님 문하를 떠나려 합니다."
선귤자가 웃었다.
"게 앉거라.
내 너에게 벗을 사귀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겠다.
왜 항간에 떠도는 속된 말에도 있지 않느냐. '의원이 제 병 못 고치고, 무당도 제 굿은 못한다.'고. 사람들은 모두 저 혼자 잘한 일을 가지고서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안타깝게 여기다가는 이제는 자기의 잘못을 들으려 애쓴단 말이야.
이럴 때 부질없이 칭찬하기만 하면 아첨에 가까워 멋대가리가 없고, 오로지 단점만 지적한다면 마치 잘못된 점만 들추어내는 듯해서 인정머리가 없어 쌀쌀맞거든. 그래서 잘못된 점을 띄어놓고서는 어름어름 가장자리만 돌고 깊이 파고들진 않는 법이지. 그렇게 하면 비록 크게 책망하더라도 노여워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아직까지는 자기가 가장 꺼리는 곳을 꼬집어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그러다 우연히 저 혼자서 잘했다고 생각하는 일을 마치 여러 가지 사물을 견주다 알아나 맞히듯이 슬쩍 언급한단 말이야. 그러면 마음속으로 감격하는 것이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같이 생각한단 말씀이야.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데에도 방법이 있단다. 잔등을 어루만지되 겨드랑이 가까이는 가지 말고 가슴팍을 만지더라도 목덜미까지 건드리지는 말아야해. 그래서 잘못된 점을 띄어놓고서는 어름어름 가장자리만 돌던 말이 자기를 칭찬하는 말인 줄 알게 되면 뛸 듯이 기뻐하면서 '정녕 나를 알아주는군.'하고 말할 거야.
이렇게 하는 것이 벗을 사귀는 것이냐?"
이 말을 들은 자목이 귀를 막고 물러나 달아나면서 말하였다.
"이는 선생님이 저를 너무 업신여기시는 게 아니십니까? 제게 시정의 잡배나 하인놈들의 사람 사귀는 법으로써 가르치시는 것일 뿐입니다."
선귤자는 자목을 다시 불러 앉히고 말하였다.
"그러면 네가 수치로 여기는 것은 이곳에 있는 것이지 저 곳에 있는 게 아니로구나. 무릇 시교(市交,시정잡배의 사람 사귐)는 이해로 사귀는 것이고 면교(面交)는 아첨으로 사귀는 것이란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아주 가까운 사이라도 세 번 도움을 청하면 사이가 벌어지지 않을 수 없고, 또 묵은 원한이 있는 사이라도 세 번 도와주면 가까워지지 않을 수 없는 일 아니냐. 따라서 이해로 사귀면 계속 관계가 이어지기 어렵고 아첨으로 사귀면 오래갈 수가 없는 법이다. 무릇 큰 사귐은 얼굴로 사귀는 것이 아니며 좋은 벗은 지나치게 가깝지 않고 다만 마음으로 사귀는 것이고 덕으로 벗을 해야 하는 게야. 이것을 이른바 도의지교(道義之交)라 하지. 그러면 위로는 천 년 전의 사람을 벗하더라도 멀지 않을 것이며, 만 리 밖에 떨어져 있더라도 소외되지 않게 된단다.
그런데 저 엄행수라는 이는 일찍이 나에게 알고 지내기를 요구한 적이 없었지만, 나는 언제나 저이를 칭찬하려 하였지 싫어하지 않았단다. 저이가 밥을 먹을 때면 “꿀떡꿀떡”하고 걸음새는 “어청어청”하며, 잠을 잘 때는 “쿨쿨”하고 그 웃음소리는 “허허”대더구나. 평상시에는 바보 같지.
흙으로 벽을 쌓고 볏짚으로 지붕을 이어 구멍문을 내놓고는 새우등이 되어 들어가 개처럼 주둥이를 틀어박고 자다가는 아침 해가 뜨면 기쁜 듯이 일어나, 흙 삼태기를 메고 동네에 들어가 뒷간을 쳐 나른다. 9월이 들어서면 서리가 내리고, 10월에 살얼음이 얼어도 뒷간의 사람 똥과 마굿간의 말똥, 외양간의 쇠똥, 또는 횃대 아래에 떨어진 닭똥, 개똥, 거위똥 이나, 돼지똥, 비둘기똥, 또끼똥, 참새똥 따위를 마치 값지고 귀한 보물처럼 걸태질(마구 긁어모으는 짓)해가도 얌통머리 없는 짓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이득을 혼자서 차지해도 의리를 해친다하지 않고 아무리 탐내어도 양보할 줄 모른다고 말하지 않는단 말이지.
손바닥에 침을 “탁!” 뱉고는 가래를 쥐고 허리를 꾸부정하니 숙여 일하는 모습이 마치 날짐승이 무엇을 쪼는 모습이더군. 비록 볼만한 글이라도 보려하지 않고, 종과 북의 풍악소리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대체로 부귀란 것은 사람마다 모두 원하는 것이다만, 원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러워하지 않는 게지. 따라서 저이를 칭찬 하지만 더 영광스러울 것도 없고, 헐뜯는다고 해서 더 욕될 것도 없는 게야.
왕십리(枉十里,현재의 이태원 옛 이름)의 무, 살곶이다리(뚝섬 쪽으로 나 있던 다리로 현 한양대 부근)의 무, 석교(石郊,현재의 서대문 밖 일대)의 가지, 오이, 수박, 호박, 연희궁(衍喜宮,현재의 연희동과 신촌 일대)의 고추, 마늘, 부추, 파, 염교하며, 청파(靑坡,현재의 청파동 일대)의 물미나리, 이태인(利泰仁,현재의 이태원)의 토란 따위를 심는 밭들은 그 중 가장 좋은 상(上)의 상밭에만 골라 심는다 해도, 모두 엄씨의 똥거름을 써야지만 살지고 기름지게 잘 가꾸어져 해마다 6000냥이나 되는 돈은 그렇게 버는 게지.
그렇지만 엄 행수는 아침에 밥 한 사발만 먹으면 만족한 기분으로 다니다가, 저녁이 되면 또 한 그릇을 뿐이지. 남들이 고기를 먹으라고 권하면, '아, 목구멍에 내려가면 푸성귀나 고기나 배부르기는 마찬가진데, 왜 맛있는 것만 가리겠소?'하면서 사양하지. 또 남들이 옷을 입으라고 권하면, '넓은 소매 옷을 입으면 몸을 움직이기가 불편하고, 새 옷을 입으면 길가에 똥을 지고 다니지 못할 게 아니오?'하면서 사양하더구나.
해마다 정월 초하룻날이 되면 비로소 갓을 쓰고 허리띠를 두르고는, 옷에 신을 갖추어 신고는 이웃 동리에 두루 돌아다니며 세배를 올리지. 그리고 돌아와서는 곧 다시 전에 입던 옷을 찾아 입고는 흙 삼태기를 둘러메고는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 거야.
이러하니 엄 행수가 어찌 이른바 더러움 속에 자기의 덕행을 파묻고 이 세상에 숨은 참된 은사(隱士)가 아니겠느냐. 옛 전(傳:여기서는 중용)에 이르기를 '본래 부귀를 타고 난 사람은 부귀를 행하고, 빈천을 타고난 사람은 빈천을 행해야 한다(素富貴 行乎富貴 素貧賤 行乎貧賤).'고 하셨다.
이 말에서 '본래'란 하늘이 정해 준 분수를 뜻하는 거지. 또 시경에 이르기를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공무를 같이 보지만 저마다의 분복은 같지 않도다(夙夜在公 寔命不同)’라고 하셨다. 여기서 분복(命)이란 타고난 분수를 말하는 게지.
하늘이 만백성을 낳으실 때에 제각기 정해진 분수가 있으니, 분복은 본래 타고난 게야. 그러니 그 누구를 원망하겠어. 새우젓을 먹으며 달걀을 생각하고, 굵은 갈옷을 입으면 가는 모시를 부러워한단 말이지. 천하가 이래서 크게 어지러워지는 법이란다.
아! 농투성이 백성들도 땅을 버리고 들고 일어났으니 논밭이 묵어 자빠져 황폐해지게 마련 아니냐.
진승(陣勝)이니, 오광(吳廣), 항적(項籍:項羽)의 무리가 그래 그 뜻이 어찌 호미나 극쟁이 따위(농삿일을 말함)에 있겠느냐.
주역(周易)에 ‘짐을 지는 소인이 군자처럼 수레를 타니 도적이 닥치리라(負且乘,致寇至).’라고 한 말이 바로 이것을 두고 이름이란다. 그렇기 때문에 ‘만종지록(萬種之祿, 굉장한 벼슬자리)’은 더러울 뿐인 게다. 제 힘을 다하지 않고서 얻은 재산은 비록 부유함이 소봉(素封,녹봉, 작위 등이 없으나 제후만 못지않은 큰 부자)과 어깨를 겨룬다 해도 그의 이름을 더럽게 여기는 게지. 그래 사람이 죽으면 반함(飯含,사람이 죽으면 저승 노자로 입안에 구슬을 넣어 주는 것)을 하는 것은 깨끗함을 밝히려는 게야.
저 엄 행수가 똥을 지고 거름을 가져다가 그걸로 먹고 사는 게 아주 깨끗하다고는 못 하겠지만 저 사람이 밥벌이를 하는 것은 지극히 향기롭고, 몸가짐은 더럽기 짝이 없지만 의로움을 지키는 점은 지극히 높은 것 아니냐. 저이의 마음가짐으로 미루어 생각해보면 비록 굉장한 녹을 받는 벼슬자리라도 그를 움직이지는 못할 걸. 이로 본다면 깨끗한 가운데도 깨끗지 못한 것이 있고 더러운 가운데도 더럽지 않은 것이 있단 말 아니냐. 누구나 먹고 입는 데서 견디기 어려운 처지에 이르게 되면 아닌게아니라 나만도 못한 처지의 사람을 생각하게 되는데, 엄 행수를 생각한다면 견디지 못할 것이 없지. 짜장 도적질할 마음이 없기로 따지면 엄 행수 같은 사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걸. 이 마음을 크게 키운다면 성인(聖人)도 될 수 있을 게다.
그러니까 대체 선비가 좀 궁하다고 해서 얼굴에 나타내면 부끄러운 노릇이고 출세했다 하여 온 몸에 표를 내는 것도 수치스러운 노릇이지. 아마 저 엄 행수를 보고 부끄럽지 않을 사람이 거의 드물걸. 그래 나는 엄 행수에게 ‘선생(先生)’으로 모신다고 한 것이다. 어떻게 감히 벗이라 부르겠느냐? 이 때문에 나는 엄 행수에게 감히 그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예덕선생(穢德先生)’이라는 호를 지어 바친 거란다."
- 『연암집별집』·「방경각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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