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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정보
오지윤 국악 연구원
 
 
 
카페 게시글
자유 게시판 스크랩 비운의 예술인 안향연의 울지마라 가야금
가연 추천 0 조회 41 12.04.21 21:4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안향연 / 울지마라 가야금아!

 

[一]

울어 울어 우는구나 가야금 열두줄이~ 

한 줄을 퉁겨보니 님의 얼굴  떠오르고
두 줄을 퉁겨보니 님의 모습 그립구나 

울지마라~ 가야금아 너마저 날 울리면

애 끓는 이 내 간장 구비구비 눈물진다

 

((간주))

 

[二]

님아 님아 우리님아  야속히 떠난 님아~

한줄을 퉁겨보니 님의 품속 새로웁고
열두줄 퉁겨 보니 설움만이 복바치네

울지마라~ 가야금아 너마저 날 울리면

설마 설마 기다리는 내 청춘이 서글프다

 

 

 

 

 
전남 무안 안향련의 묘

내 정은 청산이요 님의 정은 녹수로다
녹수야 흐르건만 청산이야 변할소냐
아마도 녹수가 청산을 못 잊어 빙빙 감돌아가~~

꿈아 꿈아 무정한 꿈아 오시는 님을 보내는 꿈아
오시는 님은 보내지를 말고 잠든 나를 깨워나 주지
언제나 유정낭군 만나서 긴밤자로 께세~

안향련 명창 육자배기 중에서

 
글.사진 : 국악평론가 김형일교수의 '경천애인' 카페자료에서 펌
 

안향련 명창은 자살할만한 이유가 없다 그런데 왜 안명창은 죽음을 택했을까 ?

여기에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안명창이 세상을 뜨기 전 그녀의 주변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필자는 추적 끝에 생존해 있는 분들 주변 인물 그리고 그녀의 제자들 평소에 친하게 지냈던 지인들과 국악인들 증언을 토대로 당시 상황을 열거하고자 한다


안향련 명창은 1981년 10월 심청가 완창을 당시 한국일보 강당에서 3일간 녹음을 하였다

그간 방송 출연은 1971년 ~1981년 까지는 TV 라디오 방송은 그녀의 독무대였다

그러나 81년 군부독재 시절 언론 통폐합으로 국악인 입지도 좁아지고 국악 프로그램 역시 없어짐으로 출연횟수도 줄어들게 된다. 당시 그녀의 활동상은 한국관 밤무대 고정 출연 외에 방송 활동은 국악자체 프로가 없어 출연 섭외가 없었다. 그녀를 죽음으로 내몰게 했던 원인을 찾아보기로 했다


가장 큰 첫 번째 이유는 주변 여건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

사랑에 대한 배신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녀는 연인으로는 맺은 사람들에게서 사랑에 대한 배신과 약속을 저버린 무책임한 작자들이 많았다. 예술밖에 모르는 그녀는 사내놈들의 말을 믿었으나 늘상 속았던 것이다. 소리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집을 사준다는 작자의 말을 믿었다가 큰 낭패를 보았으며 어떤 작자는 큰 업소를 차려 같이  동업하자 해 놓고선 아무런 소식이 없는 등,  열거 하자면 수도 없이 많다 그중에 하나 어느 화백의 말을 믿고 실행하고자 했던 것이 결정적인 실수 였다고 볼 수 있다.  명성은 있으나 그녀는 늘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고 증언하는 이가 많다.


두 번째 요인은 국악에 대한 열등감과 모멸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부친 안기선에게 소리를 배워 가히 젊은 나이에 이 시대의 최고 성음과   연기력, 춤 , 기악연주 등 미모가 특출한 팔방미인 셨다. 그녀는 국악의 등용문인 대사습 대회에 모 명창과 장원이라는 자리를 놓고 결승에 올랐다 . 두 번의 걸쳐 동점 처리 되면서 연장자 우선으로 모씨가 장원이 되자 국악계에 염증을 느끼게 했다 그로 인해 한동안 소리를 하지 안했다 누가 보아도 당연히 안향련 명창이 장원이어야 맞는데 오랜 국악계의 계보와 파벌로 뒷거래가 있었든 것이다.

 

심기일전한 그녀는 남원대회에서 비로소 장원하여 대통령상을 받게 된다. 제자의 얘기를 빌자면 안 선생님이 한참 전성기인 1978년 창극 황진이, 숙영낭자전, 견우와 직녀전에  출연했는데 한주에 2시간이상 출연하고 방송국에서 받은 출연료는 한 달 치가 고작 10만원도 못되었다고 하였다. 수년간 갈고 닦은 소리가 그렇게 대접 받고 있었다. 당시 대중가수 조용필, 최현, 혜은이, 윤수일 그들의 출연료 십 분의 일 정도의 페이다.

 

그래서 그녀는 대중가수로 데뷔를 시도하였으나 이미 소리로 다진 목소리라 대중가요 가수로는 무리였다. 집념이 대단한 그녀는 민요풍의 가요 야월삼경이라는 음반을 출시했는데 빛을 보지 못했다 결국 당시 오정숙, 남해성, 명창과 남도창과 민요 앨범을 내었다. 당시 MBC TV에서 박상규 사회로 일요 청백전이라 프로에 출연하여 대중가수가 국악을 국악인이 대중가요로 부른 적이 있는데 안향련 명인이 대중가요를 판소리조로 불러 많은 이들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득음을 한 그녀 역시 자신의 소리에 만족하지 않고 끝없이 노력하였다 . 끝없는 소리의 길 득음의 경지에 섰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자신만의 길에 서있다고 생각 했을까 ?


늘 고독한 그녀였다 무대에서 많은 관객이 추임새도 하고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으나 무대에 내려와 집에 오면 늘 혼자였다. 무대에서 내려오면 고독하고 쓸쓸했다 술로 모든 것을 달래 보아도 만족하지 못했다

국악인들 중에는 그녀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이도 많았다고 한다 . 근거 없는 많은 루머에 시달려야 했고 각가지 있지도 않은 스캔들로 정신적인 고통이 심했다고 한다.


세 번째 요인은 그녀를 에워싸고 있는 인간 환경을 극복하지 못했다

1981년 4월 그녀의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안기선 명창 본 부인으로 남편이 죽자 그녀가 늘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피 붙이는 아들과 어머니가 전부였다  어쩌면 국악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가 늘 옆에 있었고 또한 아들을 어머니에게 맡기고 활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바람기로 늘 혼자 살아온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어머니에 대한 정과 그리움으로 눈물로 보내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그해 5월 자신을 명창의 반열에 올려놓은 스승인 장영찬 명창이 당뇨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녹번동으로 이사 한 후 3년간 같이 지내던 그녀의 여제자인 오 모 씨가 지방으로 그녀의 겉을 떠나게 된다.  당시 제자는 유미리, 오송춘(예명) 이었는데 오송춘이라는 제자가 한집에 거하면서 살았다 안선생은 그 제자를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하였다.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안 선생이 제자를 자랑삼아 대동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렇게 아끼던 제자도 형편상 스승을 떠나야 했다.

 

이 대목에서 제자는 이렇게 증언 한다 “저가 선생님을 떠나 고향에 온지 두 달 만에 돌아 가셨어요” 

“너무나 절통하고 아쉬워요”  “내가 선생님 겉에 있었더라면” “절대로 그렇게 생을 마감하지 않았을 것인데“ “그때를 생각하면 너무너무 가슴이 아파요” 그렇다면 그녀는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어머니와 스승이 하늘나라로 가고 사랑하는 제자도 그녀 겉을 떠났다 더구나 사랑하는 사람 모 화가도 그녀에게 돌아 올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정황들이 그녀는 38세 나이에 극복하기 힘들었던 것일까 ?


여기 까지가 그녀가 자살하게 된 사연이라면 사연이고 이유라면 이유라고 추측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열거한 이유로 자살로 이어졌다고 볼 수 없는 요소들이 있다

 

 

그녀는 스스로 생을 마감 했을까 ? 여기에 의문점 몇 가지가 있다

당시 일간 신문에는 그녀가 유서를 쓰고 자살 했다고 기사가 실어있는데 유족 임모씨는 유서는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녀가 평소 술을 마셨다하면 과음을 하는 편이였다 . 과음한 탓으로 위장병을 앓고 있어 늘 약을 복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제자들과 측근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아들에게 남다른 정성과 열의를 다해 아들에 관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들어주는 어머니로써 어느 누구보다도 모성애가 강했다고 한다. 아들을 보면서 늘 아버지가 겉에 없어 아버지 대신 엄격했으며 대학을 보내고 장가보낼 때 까지 아들 뒷바라지를 다해야겠다고 하였다고 한다. 안 명창이 힘들 때 마다 커가는 아들을 보면서 많은 위안을 얻었다고 한다.

 

평소에 그렇게 말한 어머니가 아들이 예비고사 시험을 본 후 대학 진학을 앞둔 시기에 자살 택했을까 ?

생활고라고 주장하는 부분에서 목포에 사는 아버지로부터 대학 학비와 모든 생활비를 책임지고 가르치겠다고 하여 그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당시 목포에 사시는 임모씨는 그만한 재력이 있는 분이고 아들의 학비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생활고라하면 설득력이 없다. 안선생은 일본에서 순회공연을 하고 돌아오면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한다. 여기서 생활고란 상대적인 빈곤을 뜻하며 필자가 보기엔 자살할만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

 

자살하기 이틀 전 그러니까 그해 12월16일  한국관에 출연하는 안향련 선생을  만난 어느 교수는 아들이 어느 대학에 진학하였으면 좋겠냐고 물으면서 아들이 대학 졸업할 때 까지만 업소에 출연하겠다고 말하면서 지방대학보다는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가기를 원했다고 하였으며 당시 분위기로는 자식에 대한 어머니로써 안향련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녀가 이틀 후 생을 마감한 것에 대한 강한 의문점을 제시 했다. 그녀가 술을 마시고 신경안정제를 먹은 후 잠든 시각이 9에서 10시경이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어느 정도 약을 먹어야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냐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 정도 차이는 있지만 신경안제는 한통 당시 캡슐로 60알 정도였다는 것이다 . 신경안정제 즉 수면제는 당시 의약 분업이 이루어지지 않은 때라서 약국에서 구입할 수 있었다 다만 한 곳에서 많은 량을 팔지 않는다  그래서 이곳저곳 여러 약국을 다니면서 많은 량을 사서 먹어야만 사망하게 된다는 것인데 유족의 말을 빌자면 많은 량은 아닌 것 같고 약통에는 30~80알정도 들어가는 약통이었다고 하였다

그 약을 다 먹었다고 하드라도 100알 인데 절반 정도 먹었다면 50알 이상 먹었다고 단정할 수 있는데 과연 그 정도 복용으로 사망 하였는지 의심이 간다 .


당시 신문에는 친척인 김 모 씨가 발견하여 신고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분이 누구였을까 . 인기척이 없어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두 팔은 이불위로 올려져 있고 머리맡에 유서와 약병이 노여 있었다고 하면서 경찰에 신고 했다고 한다.  당시 연립에 살았는데 집 키를 같이 쓰고 있었다는 것으로 추측 된다. 그 사람은 친인척이 아닌 사람으로 밝혀졌다 . 이룰 수 없는 연인 사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녀의 죽음을 자살로 단정하였는데 당시 유족측에서 수사나  사인 원인을 신경안정제 과다 복용으로 판명 받고 장례을 치루었는지 여부이다. 당시 상황을 보면 약을 먹은 것은 확실하다.  왜 ? 자살로 생을 마감했어야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항간에 떠도는 소문간은 달리 뚜렷한 근거나 증거가 될만한 것을 찾기 힘들다 . 안향련 명창 그녀는 평소 낙천적이고 긍정적이며 마음씨가 유순하고 인정이 넘친 분으로 널리 알려진 분이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자살 했다고 할 수 있을까 ?  아니면 누군가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기 위한 뜻이었는데 과다 복용했다는 것일까 ?

 

사랑을 찾아 고통이 없고 이별이 없는 저 세상으로 자신이 택한 길일까? 아니면 저 세상 유토피아를 찾아서 그곳으로 갔을까 ?

 

누구의 마음을 돌이켜보려고 한 것이 그만 운명의 갈림길이 되었었을까 ?

 

1    당시 신문을 보니 애인 김씨(동양화가)가 발견 신고한것으로 되어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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