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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자료실☆───▣ 스크랩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081005)
갈릴리호수 추천 0 조회 32 09.12.11 09:1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마태복음 6:9~13
  
(여는 말)
지난 주간 우리는 상큼하고 발랄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를 가진 한국의 유명한 여배우, 최진실 씨의 죽음으로 인하여 모두 나름대로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전세계의 메스컴이 그의 죽음을 보도할 정도로 그는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자살이 쉽게 믿어지지 않을만큼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한두 번 자살 충동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저의 경우를 생각해보아도 그런 적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때였습니다. 한창 쓸데없는 것을 고민하고 갈등하며 공연히 고독을 부득부득 씹던 때였습니다. 그 당시 실존주의 문학책들을 더러 읽었는데, 알베르 까뮈의 『시지프의 신화』,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 저에게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들 작품을 읽으면서 내가 도무지 살아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는 생각으로 자살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유서를 써놓고 막상 자살을 하려고 하니 두려웠습니다. 죽을 때의 고통이 얼마나 심할까? 어떻게 죽으면 고통이 없이 죽지? 죽은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용기가 없어 우물쭈물하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국민윤리 시간에 서양의 어느 철학자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쇼펜하우어. 염세주의 pessimism의 대표자였습니다. 그 사람이 한 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의 행복론입니다. 첫째, 사람은 나지 않음이 행복하다. 둘째, 태어났으면 일찍 죽는 것이 행복하다. 셋째, 일찍 죽지 않았으면 자살하라
이 말을 듣는 순간 저는 더 이상 우물쭈물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그 다음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이 쇼펜하우어는 1788년에 태어나서 1860년까지 오래 살았으며(72세) 절대 자살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1831년 그가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 콜레라를 피해 프랑크푸르트암마임으로 옮겨가서 살았습니다. 저의 국민윤리 선생님께서는 "너희들 나이에 자살 충동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자살은 살인이다. 상대가 남이 아니라 자기라는 것일 뿐 사람을 죽인다는 사실에서는 똑같다. 그런데 더 나쁜 것은 남을 죽였을 때는 후회할 기회라도 있지만 자살하면 후회할 기회조차 없다." 아마 저 외에도 자살하겠다고 생각하던 친구들이 있었나 봅니다.
그 말씀을 듣고 제가 결론을 내린 것은 "지금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살아야 할 그 이유를 발견할 때까지는 죽어서는 안되겠다." 생명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신 줄 모르는 세상 사람에게도 자살은 악(惡)입니다. 하물며 나의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우리에게서랴!
오늘은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 가운데 우리를 위한 기도 중 마지막 기도로서 '(우리를)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우리는 악에 빠져있다.
이 기도에서 '구하옵소서'라는 말은 헬라어로 '뤼오마이'라는 단어인데, '건져내다', '구출하다'는 뜻입니다. '건져내다'는 말은 어디에 빠져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곧 악에서 구해내고 건져내는 것은 악에 빠져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일입니다. 이 기도를 하는 우리는 우리가 악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먼저 필요합니다.
악이라는 것은 절대로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힘이고 능력입니다. 그 악이라는 것이 우리를 위험에 빠뜨려놓고 있습니다.

구약성경 창세기(Genesis)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의 근원(origin, gene)을 기록하고 있는 책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선(goodness, virtue)의 근본적인 개념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최초로 빛을 만드셨습니다.(3절) 그리고 4절에 "그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하는 구절이 따라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하는 구절이 매 창조의 순간마다 따라옵니다. 10절, 12절, 18절, 21절, 25절, 그리고 사람을 창조하신 후인 31절에서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God saw that it was good.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 그것이 goodness, 선(善)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도 대로 잘 창조된 것이 선(善)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다운' 것이 선입니다.
낮이 낮답게 밝은 것이 선이며, 밤이 밥답게 어두운 것이 선입니다. 여름은 여름답게 덥고, 겨울은 겨울답게 추우며, 봄은 봄답게 따뜻하고 가을은 가을답게 서늘한 것이 선입니다. 북극이나 남극은 극답게 춥고 낮이 6개월 밤이 6개월 되는 것이 선한 것이며, 적도지방은 적도지방답게 4계절 내내 더운 것이 선입니다. 사자는 사자답게 강하고 날쌘 것이 선이며, 호랑나비 애벌레는 그답게 꼬물꼬물하며 탱자나무 잎을 갉아먹는 것이 선입니다. 모든 것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대로 잘 살아가고 제대로 존재하는 것이 선입니다.
사람이 사람다운 것이 선이며 사람답지 못한 것이 악입니다.
어떤 것이 사람답습니까?
人人人人,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한문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다와야 사람이지." 그런데 사람다운 것은 어떤 것을 말합니까? 사람답다는 말은 다른 표현으로 보면 "인간적이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떤 사람을 인간적이라고 합니까?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릅니다. 도구와 언어를 사용합니다.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자기의 경험과 남의 경험을 축적하고 스스로 변해가는 형성적인formative 존재입니다. 인간은 노동을 하며, 사회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고, 관계를 맺으며 삽니다. 이런 특성을 가지면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러한 인간의 특성을 기본적으로 갖춘 것을 두고 '인간적'이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그 이상의 특성이 있습니다. 인간은 도덕적인 존재입니다. 악은 사람을 사람답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고 능력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악에게 사람다움을 빼앗길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짐승같은 사람', 또는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짐승같은 사람', '짐승만도 못한 사람'은 아닌데, 그냥 '멀쩡한 사람'이지만 그래도 오늘 하나님 앞에 선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셨던 그 사람,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가 아닙니다. 우리가 인간답다고 하는 모습조차도 사실은 본래의 사람다움, 인간다움을 상실한 상태입니다. 본래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존재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절대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갑자기 자기 자신이 벌거벗은 것을 깨닫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을 가리고 나무 사이에 숨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하시니, 아담이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악에 빠진 사람은 두려움은 느끼지만 자기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아담은 하나님과 더불어 깊은 교제를 이루며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채 하나님을 피하고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사람은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자신에게 실망합니다. 자존감이 없으며 자신이 당하고 있는 모든 현실을 힘들어하고 억울해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사람은 사방의 사람과의 관계도 끊어집니다. 서로 싸우고 다투고 시기하고 경쟁합니다. 만인의 만인을 향한 투쟁이 시작됩니다.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자신이 악에 빠져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처음 만드신 그 형상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합니다. 이미 인간다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신 사람다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스바냐 3:5입니다.
그 중에 거하신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간단없이 자기의 공의를 나타내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께서 아침마다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당신의 공의를 보여주시는데도 불의한 자, 악에 빠진 자는 수치를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선포되는 말씀을 들으면서 수치를 느낄 때가 있다면 우리의 양심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우리의 구미에 당기는 말씀만 귀에 들어오고 양심을 찌르는 말씀은 없어 수치를 느끼지도 못한다면 우리는 문제가 있습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하고 기도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말씀의 거울 앞에 비추어보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도우심 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
여름철에 Sumner나 New Brighton 바닷가에 가보면 안전지대 푯말을 세워놓고 그 푯말 있는 곳에서만 수영을 하게 허용합니다. 푯말 바깥쪽에서는 절대 수영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 푯말 안과 바깥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물의 깊이도 같고 파도의 세기도 같습니다. 단 하나의 차이가 있는데 그 푯말 안쪽에는 인명구조대원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은 스스로 살아나올 수 없습니다. 인명구조대가 건져주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신 이유가 또 하나 더 있습니다. 우리를 악에서 구하실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2:19입니다.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줄 알라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악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 하나님을 버리는 것 그 자체가 악이며, 그것이 바로 고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살 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악에서 건지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으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지난 화요일, 수요일 아동부 수련회가 교육관에서 있었습니다. 17명의 어린이가 참석했습니다. 세 분 선생님께서 수고해주셨고, 여러 어머니들이 식사와 간식, 기도로 도와주셨습니다. 저도 어린 영혼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화요일 저녁 새가족성경공부를 평소보다 조금 일찍 마치고 교육관에 왔습니다. 시간표로는 8시까지가 기도였으니까 아마 이 시간쯤이면 간식먹고 재미있게 율동 배우고 있겠구나 하고 교회에 왔더니 완전히 어른들 부흥회 광경이었어요. 어린 아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통성으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무슨 회개할 거리가 많다고 그렇게 울리느냐? 하는 생각을 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그것은 사람이 시켜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어린 영혼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자기의 크고 작은 죄들을 돌아보며 회개하고 기도하는데, 어린 아이들이 눈물 콧물 흘리며 몸부림 치며 땅바닥을 두드리며, 자기 가슴을 치며 울며 기도해요. 제가 당황할 정도였습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하기를 요청하십니다. 막연하게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통절하게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이 시대를 위해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어른들이 기도하는 모습이 부족하니까 어린 영혼들에게 기도를 시키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이 때는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입니다. 부르짖어 하나님을 찾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전심으로 당신을 찾는 자를 찾으십니다.

 

3. 송영
끝으로 주님의 기도의 마지막 단락은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 아멘"하는 송영입니다. 이 부분은 마태복음에서는 괄호로 묶여져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초기 사본에는 나타나지 않는 구절이란 의미입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교회에서 실제로 예배에 활용하면서 덧붙여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쨋든 이 마지막 송영은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는 이유를 다시 한번 되새기는 의미가 있습니다.
개역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우리가 통상 외우는 주기도문에는 "대개"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개라는 말원래 헬라어 원어로는 '호티'라는 단어를 썼는데, 그 뜻은 우리가 쉽게 이해하는 것처럼 '대략(almost)'라는 뜻이 아니라 '왜냐하면(because)'이라는 뜻입니다.
즉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아래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라는 뜻이 됩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다 아버지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이 하나님을 반역한 악의 수중에 잠시 갇혀 있고, 모든 권세가 공중권세 잡은 자들, 곧 사단에게 속하여 있는 것 같고, 세상의 영광은 하나님과 무관한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수중에 있습니다. 머지 않아 심판이 있고 현재와 같이 악에게 사로잡혀 있는 이 세상을 청산하실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그 사실을 믿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주님이 가르쳐주시는 대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맺는말)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기도문으로 기도할 때는 건성으로 중얼중얼 외우는 기도가 되어서는 절대 안됩니다. 진지한 마음으로 그 구절구절을 깊이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날 주기도문도 제 자리를 잃고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상황, 선(善)이 아닙니다. 건성으로 주기도문을 외는 우리의 자리는 악(惡)의 자리입니다. 이제 제자리로 되돌려야 합니다.
인터넷에서 주기도문에 대해 이렇게 경고하고 있는 글을 보았습니다.
‘하늘에 계신'이라고 하지 말라. 세상 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하지 말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라고 하지 말라. 아들 딸로서 살지 않으면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바으시오며’라고 하지 말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하지 말라. 물질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지 말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하지 말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 하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먼저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하지 말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우리를 유혹에 빠지게 하지 마시고’라고 하지 말라. 죄 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하지 말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 하지 말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주님의 기도는 우리 기도의 모범입니다. 기도하는 우리의 마음과 자세를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새롭게 가다듬어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의 신앙의 성숙을 위한 결단의 기도입니다. 나의 욕구를 아뢰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결단들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또한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의 표현입니다. 아버지이신 그분께서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들어주시고, 아버지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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