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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소식 스크랩 연기군 전동면.소정면의 역사와 유래
황순덕(20회) 추천 0 조회 30 10.12.12 05:0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전동면]

전동면은 전의의 동쪽에 있는 면이란 뜻이다. 과거 전동면은 전의지역이었으므로 원삼국시대에는 마한(馬韓)의 54개국 중 하나였고 백제시대에는 구지현(九知縣)에 속했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금지현(金池縣)이라 하여 대록군(大麓郡)의 영현이 되었다가 고려 때 전의현(全義縣)에 속하였다.

 

조선시대 1414년 연기현과 합하여 전기현(全岐縣)이 되었다가 1416년 다시 전의현이 되었으며 1895년 전의현이 전의군이 되었을 때 전의군 동쪽 지역에 속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전동면이 되었다. 1995년 3월 1일부로 동면의 갈산리를 청원군에 떼어주고 청원군의 심중리를 연기군 전동면에 편입하여 청원군과의 경계가 동림산 정상을 중심으로 그어졌다.


동림산은 동림산성(東林山城)과 송천사지(松泉寺址), 백자가마터 등 유적이 많은 곳이다. 전동면을 둘러싸고 있는 높은 산들은 이웃마을과 경계를 이루다 보니 그 산의 주인이 자신있게 ‘우리 땅이다’ 라고 주장하기가 곤란할 때가 있다. 운주산이 그 대표적인 예다. 지적 상 엄연히 산 정상의 2/3가 전동지역인데, 1/3을 차지하고 있는 전의면이 운주산과 관련된 모든 행사를 주관해 오고 있다. 그 예로 정초에 하는 해맞이 행사도 전의면 주관이다. 금이성이 있는 금이산(원이름 : 운주산) 또한 산정상을 기준으로 전의, 전동이 나누어져있고 남쪽에 있는 오봉산도 조치원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들 산에는 산성이 쌓여져 있어 고대삼국시대부터 중요한 전쟁터였음을 알 수 있다. 청원군에서는 병마산과 동림산에서 강감찬 장군이 군대를 훈련하였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동림산의 작은 암자에서는 강감찬 장군을 산신으로 모시고 있으니 우연이 아닌 듯 하다.

운주산 남쪽의 청송리에는 배일이란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안동권씨가 집성을 이루어 살던 곳으로 임진왜란 때 권주(權柱)가 의병 300명 군량 450석을 지원하려고 금산싸움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 후 안동권씨들은 일본을 배척한다는 뜻으로 배일(排日)이라 부르다 정조 때의 학자 권복(權復)은 자신의 호를 이원(李遠)이라 짓고 마을 입구에 이원동천(李遠洞天)이라 새겨 세웠는데 원 뜻은 ‘일본을 배척하는 마을이다’라는 뜻이 들어 있다고 한다. 이 비로 인하여 일제시대 일본인들과 마찰이 생기기도 하였다.

전동면에는 개미고개가 있다. 개미고개는 운주산의 남쪽 줄기로 전의에서 조치원으로 넘어가는 고개이고 그 아래에는 경부선 철로가 놓여져 있으며 고개 아래로는 터널이다. 6.25때 이곳에서 미군과 북괴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여 죽은 시체가 개미떼 같이 쌓여 있었다 한다. 1950년 7월 9일 벌어진 전투에서 당시 이곳을 지키던 사람은 미24사단 병력들이다. 이들은 길가에 호를 파고 개미처럼 밀려오는 북괴군과 전투를 하는데 처음에는 안개가 끼어 한치 앞을 바라볼 수 없는 상황에서 북괴군이 쏜 총에 대응하여 발포하였다가 위치가 탄로나 많은 피해를 보았고, 북괴군은 우회하여 앞뒤에서 공격하는가 하면 주무기가 소련제 탱크로 밀고 왔다.

 

미군의 주무기는 공중에서 공격하는 제트기였는데 짙은 안개로 인하여 아군을 공격하는 일까지 벌어져 결국 많은 사상자를 내고 조치원으로 후퇴해야만 했다. 몇 일 뒤 미군은 한강 다음으로 금강선을 제2 방어지역으로 설정하고 다리를 폭파한 후 방어를 하였으나 조명탄을 조정하는 병사가 실수하여 엉뚱한 방향으로 쏘자 이때를 놓칠세라 북괴군이 금강을 건너는 바람에 금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말았다.

 

전동면 각지명유래


조선말엽에는 전의군(全義郡) 동면(東面)의 지역(地域)인데, 이 곳에 예전부터 세 그루의 노송(老松)이 이곳 사람들의 신앙(信仰) 대상(對像)으로 모셨으므로 '청송(靑松)'이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청송리라 하고 연기군 전동면에 편입(編入)되었다


전동면과 서면(西面) 경계에 있는 산이다. 곧 까치성 위에 있는 산성인데 높이가 383m이며 돌로 쌓은 성(城)이 견고하여 철옹성과 같다 한다. 단단한 산성(山城)이라 하여 '쇠성'이라 부른다.


운주산 남쪽 아래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학자 권주(權柱)가 임진왜란 때 의병 300명, 군량(軍糧) 450입(?)으로 금산(錦山) 싸움에 이르렀다가 별세(別世)하였다.그래서 여기 사람들은 일본(日本)을 배척하는 의미(意味)에서 배일(排日)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지었다 한다.뒷산이 높고 골이 아늑하므로 '배일'을 '이곡(梨谷)'이라 하였는데 정조(正祖)때 학자 권복(權復)이 살면서 호(號)를 이일(梨逸)이라 고쳤다.'이곡(梨谷)'즉, 배나무가 많은 골이라 하여 그렇게 부른다.권복은 일본을 배이(梨)로 비유하여 일본을 멀리한다는 뜻으로 이일(梨逸)이라 하였다.


'아래배일' 입구에 있는 비(碑)를 이일동천비(梨逸洞天碑)라 부른다.정조(正祖)때 학자 권복(權復)의 호(號)를 이일(梨逸)이라 하고 마을 앞에 비(碑)를 세웠다.


'배일'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여기엔 소나무 정자가 세 그루 있다 해서 '삼송정(三松亭)'이라 부른다.


'삼송정' 남동쪽에 있는 큰 마을이다. 전의이씨(全義李氏)와 거창(居昌)신씨가 살면서 서로 의좋게 모이는 도회청을 두었으므로 도청(都廳)이라 하였는데 일제 때 쉬운 글자를 취하여 도청(都靑)으로 변했다.


조선말엽에는 전의군 남면(南面)의 지역이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동막리.상남포리.하남포리.청산리를 병합하여 '청산'과 '남포'의 이름을 따서 '청람리(靑藍里)'라 하여 연기군 전동면(全東面)에 편입(編入)되었다.


'증미'밑에 있는 마을이다. '증미'라 하던 것이 변하여 '청미'또는'청산(靑山)'이라고 부른다.


'시루봉'꼭대기에 있는 마을이다. 큰 바위가 봉우리를 이루었는데 그 모양이 시루와 같다 하여 '시루바위'라 부르며 '중암?'이라고도 부른다.


'버드나무말'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어려운 사람들이 처음 여기에 마을이 형성(形成)될 때 움막을 짓고 살던 것이 점점 큰 마을을 이루었다 하여 동막, 또는 동막골 이라고도 부른다.


'청산'에서 전의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개미기'고개라고 부른다. 고개가 잘룩하여 개미허리와 비슷하다 하여 '개미기'고개라 부른다 한다. '의현(蟻峴)'이라고도 부른다.


청람리 중 제일 윗동네로 이곳에 경주김씨가 동막을 짓고 오랫동안 살았던 마을이라 하여 동막골 이라 한다.


쪽개 라고도 불리우며 큰말, 도라말, 양지말, 버드나무말이 이에 속하며 이곳이 옛날에 뻘이었다 하여 남포라 한다.


연수봉 이라고도 불리 우는데 동막골 뒷산을 가리킨다. 이 산에는 큰 광산 1개와 작은 광산 1개가 있다.


조선말엽에는 전의군 동면(東面)의 지역으로서 조선 숙종(肅宗)때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선비 한 사람이 만년(晩年)에 그 선영(先塋)을 따라 이 곳에 은거하면서 솔밭부근(附近)에 정자(亭子)를 짓고 소요하였다 하여 송정(松亭)이라 불렀다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송동'과 '사정'그리고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송정리라 하고 연기군(燕岐郡) 전동면(全東面)에 편입(編入)되었다.


송정리에 있는 마을이다. 소나무가 있는 고개마을이라 해서 '솔재'라 부른다.


연수봉 남쪽에 있는 작은 마을을?안터?라고 부른다. 새터 안쪽에 위치하는데 내기(內基)라고도 부른다.


'구리골'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고려 때 사기점이 있었던 곳이다.'사장동(沙場洞)''사정리(沙亭里)'라고도 부른다. '사장골'안쪽에 있는 마을을 '안사장골'이라 부르고 바깥 편에 있는 마을을 또한 '바깥사장골'이라 부른다.


'송정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송곡리 '소골'위쪽에 있다.'상송동(上松洞)''상송곡(上松谷)'이라고도 부른다.


연수봉 아래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예전에 연수암(延壽岩)이라는 절이 있었다 하여 '절텃골'이라 부른다.


'상소골'앞 냇가에 있던 독송정의 터로, 지금은 예전의 독송정이 없어졌지만 숙종(肅宗)때 좌의정(左議政) 조사석(趙師錫)이 만년(晩年)에 그 선영(先塋)을 따라 이 곳에 은거하면서 정자를 짓고 소요하였다 하는데 그 정자(亭子)가 독송정(獨松亭)이라고 한다.


조선말엽에는 전의군(全義郡) 동면(東面)의 지역이었다.원래가 백제 때부터 솔이 울창했고 또한 백제 멸망 후 부흥운동이 활발했던 송성(松城)'금성(金城)'이 여기에 있어 여기를 '솔티'와 '성곡'의 이름을 따서 송성리(松城里)라 하여 이웃마을을 병합하고 연기군 전동면 송성리가 되었다.


예전에 이 마을에 한 가구가 살 때 어느 해에 산사태가 나서 집이 흔적도 없이 없어지자 그 곳에 요란스럽게 흐르는 물을 보고, 지나던 한 선비가 말하기를 요곡(물댈 요(堯), 골 곡(谷))이라 말한 것이 그렇게 전해 내려오다가 '요골'로 변하여 부르게 되었다.
지금은 예산이씨(李氏)들이 집을 짓고 많이 살고 있다.


예전 전의군(全義郡)당시 남면을 거쳐 서면으로 가는 길목에 마을이 있었는데 이 마을에 주막이 있어서 마을을 '주막거리'라 부르게 되었다.


잿말 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물이 흐르면 뱅글뱅글 돌아 때로는 강바닥까지 보였다 하여 '물도래''무도리'라 부르다가 '무드리'라 부르게 되었다.
물이 뱅글뱅글 돈다해서 수전(水田), 수전리(水田里), 수회(水回), 수회리(水回里)라고도 부른다.


'중말'남서쪽에 있는 고개를 '솔티'라 하고 그 아래 마을도 솔티고개 아래에 있다 해서 솔티라 부른다. 솔티고개는 고개가 길고 험하여서 도둑이 많기로 유명하였다.'솔티'마을은 조선시대 때 사기소가 있었으며 김해김씨(金海金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솔티동'이라고도 부른다.


조선말엽에는 전의군 동면(東面)의 지역으로서 '보평'안쪽 골짜기에 자리함으로 '속골'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소골'또는 '송곡(松谷)'이라 불렀다. 1914年 행정구역 개혁시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송곡리'라 하고, 연기군 전동면(全東面)에 편입(編入)되었다.


송곡리에 있는 마을로 꽃이 잘 어울려 피는 마을이라 해서 '꽃밭골'이라 불렀는데, 변하여 '꽃짝골'이라 부른다.


'보령'안쪽 골짜기에 있으므로 속골, 즉, 산 속에 있는 마을로 '속골'이라 불렀는데, 변하여 소골이라 부른다.
송곡(松谷)이라고도 한다.


'모시티'에서 조치원읍 둥이로 넘어가는 고개를 '모시티'라 부르고, 그 아래 마을을 '모시티'고개 아래에 있다 해서 역시 '모시티'라 부른다.


'하소골'동북쪽 송곡리 산26번지에 있는 낮은 토성(土城)이다. 토성이 아래 위 두 층으로 되어 있는데 삼한(三韓)때의 농성(農城)이다.


'모시티'동쪽에 '모시티'에서 300m거리에 '옥자리터'가 있다.예전 삼한시대에 농성(農城)인 토성(土城)을 쌓을 때 부역자를 다스리기 위해 만들어진 옥자리인데, 한 번은 애를 밴 여인을 가두어 두었더니 쌍둥이를 분만하여 그 때부터 옥자리를 옮겼다 한다.지금은 일명 쌍둥이 자리라 하여 집을 짓지 않고 전답(田畓)으로 사용한다.'쌍둥이 자리'라고도 부른다. 송곡리 38번지에 있다.


조선말엽에는 전의군 동면(東面)의 지역이었다.마을 앞에 '선돌'이 있으므로 '선돌배기''돌꽂이'로 불리우던 곳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혁시 '석곡리'라 하여 연기군 전동면(全東面)에 편입(編入)되었다.


선돌이 서 있었다 하여 '선돌배기''돌곶이''석곡(石谷)'이라 부른다. 예전에 한 장수가 한 길이 넘는 돌을 지팡이로 짚고 다니다가, 지금의 109번지에 꽂아 놓았는데 그 돌을 선돌이라 부른다. 선돌이 병오년(丙午年) 장마에 넘어져 지금은 그 자취가 없어졌는데 선돌이 있던 마을은 '선돌배기'의 '하석곡'이며, 이 선돌을 주축으로 웃말은'위선돌', 가운데는'중석곡'이라 부른다.'중석곡'은 '온고비골'이라고도 부른다.


'돌꽃이'남서쪽에 있는 산을 '국사봉(國士峰)'이라 부른다.높이가 267m되는 산인데, 산에 돌산과 청마가 있고 산제당(山祭堂)이 있다.고려 때부터 산봉(山峰)에서 국사에 큰 도움을 주었던 곳이며 봉화대(烽火臺)가 있었다. 또한 서민(庶民)들이 산신제(山神祭)를 지내는 제단(祭壇)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돌단과 철마가 있고, 산제당이 있다.


국사봉 동쪽에 있는 산이다.


안말 안쪽의 골짜기로 사기를 구웠던 곳이라 사기점골이 되었고 이곳에 사기 굽던 흔적이 남아 있다.


조선 태종(太宗)때에 전의현(全義縣)에 속했다가 다음에 전기현(全岐縣)에 속했으며 다시 전의현에 속했었다.이 지역에는 넓은 들과 큰 보(寶)가 있어서 농사가 잘 된다 하여 '보덕(寶德)'이라 부르는데, 1914年 행정구역 개혁때 보평(寶坪)의 '보(寶)'자와 덕소의 '덕(德)'자를 따서 보덕리라 하여 연기군 전동면(全東面)에 속하게 되었다.


보덕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붓들'이라고도 부르는데, 사실은'붓들'즉, 말해서 보(洑)가 있는 들이라는 뜻이 변해서 '붓들'이라 부른다.앞들이 넓고 보(洑)가 있어서 농사(農事)가 잘 되어 붙여진 명칭(名稱)인데, 그래서 보물 같은 들이라 하여 '보평(寶坪)'이라 부른다.


'지프네'위쪽에 있는 마을을 덕소(德沼)라 부른다. 예전에는 냇물이 흘러와서 고여 '덕소'라 부르고 선녀(仙女)들이 노는 신선지(神仙池)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모래가 쌓여서 소(沼)는 없어졌다. 깨끗한 물이 흐르고 고이는 소(沼)가 있다 해서 이 마을을 '덕소'라 부른다.


연수봉 남동쪽에 300m정도의 계곡(溪谷)이 있는데 이 계곡을 '절터골'이라 부른다.예전에 연수봉 기슭에 '연수사'란 절이 있었다.


'보평(寶坪)'북쪽 냇가 산기슭에 있는 바위를 '장군바위'라고 부른다.또한 '장군암''석정(石亭)'이라고도 부르는데 큰 바위가 넓은 바위 위에 얹혀 있고 그 밑에 큰 내가 흐르는데 명종 때 학자 박곤(朴坤)이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을 맞아 바위 위에서 이학(理學)을 담론하였던 바위라 한다.


'보평(寶坪)'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앞에 깊은 내가 있다 해서 '심천'이라 부른다. 또한 '지프내'라고도 부르는데, 처음은 '깊은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지프내'라 부르게 되었다.심천(深川) 마을 앞을 흐르는 강물은 조천(鳥川)으로서 소(沼)가 있었다 한다. 여기는 깨끗한 물이 고여서 선녀(仙女)들이 가끔 하늘에서 내려와 놀고 가는 곳이라 전해 내려왔는데, 지금은 소(沼)자리에 깊은 못은 없어졌으며 그냥 통칭 심천(深川)으로 부르고 있다.


원래 이 지역은 계곡(溪谷)에 풍류(風流)가 있어서 선비들이 즐겨 찾던 곳으로 '미곡(美谷)'이란 시조(時調)와 학이 있듯이 아름다운 계곡이 있는 곳으로 통칭(通稱)되어 왔으며 1914年 행정구역 개혁때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미곡리'라 하고 연기군 전동면(全東面)에 편입(編入)되었다.조선말엽에는 전의군(全義郡) 동면(東面)의 구역이었다.


전동면(全東面) 미곡리(美谷里)에 운주산정(雲住山頂)에 있는 산성을 운주산성 이라 부른다. 예전에 전성부사(全城府使)가 있을 때 목민(牧民)을 다스렸다.


'학당이'앞에 있는 비(碑)를 '안렴사유허비'라 부른다. 이 비(碑)는 안렴사(按廉使)였던 김휴의 사적을 기록한 유허비(遺墟碑)다.


'운주산'중턱에 있는 바위를 삼천암(三千岩)이라 부른다. 바위 밑에 크고 깊은 굴이 있어서 목천(木川) 수신(修身)으로 통하였다 하는데 임진왜란때 이 바위에 3,000명이 피난하였다가 왜적이 여기를 지날 때 바위에 숨어있던 3,000명 가운데 어린 아이가 우는 바람에 여기에 숨어있는 것이 발각되어 모두 피살되었다.


'미륵당이'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임진왜란때 이 곳에 피난하였던 수 백명이 왜적에게 피살되어 피가 내를 이루었으므로 피숫골 또는 피수동 이라 하였는데, 그 이름이 흉하여 '수구동(水口洞)'으로 고쳤다 한다.


'미륵당이'동북쪽 산 속에 있는 마을을 '학당리'라 부른다. 고려말엽 안렴사(按廉使) 김휴가 여기에 살면서 학당을 세우고 후진들을 양성한 마을이라 해서 학당리 또는 학당이 라 부른다.


미륵당이 모퉁이에 있는 미륵으로 남녀 두 형상으로 되어 있는데, 높이 3척(尺) 5촌, 넓이 1척(尺) 8촌이 된다.


조선말엽엔 전의군 동면(東面)의 지역이었다. 이 지역엔 갈대가 무성하여 '갈가리'라 불렀었고 임진왜란 때 학자 권주(權柱)가 이 곳에 살면서 갈대의 덕을 입어 무난히 그 왜란(倭亂)을 피한 후 마을을 그가 '노장(蘆長)'이라 하였다 한다.
1914年 행정구역 개혁때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노장리'라 하고 연기군 전동면(全東面)에 편입(編入)되었다.


'중로장(中蘆長)'양지쪽에 있는 마을이다. 양지바른 곳에 마을이 있다 하여 '양지말'이라 부른다. 양지촌(陽地村) 이라고도 한다.


'원지기'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배나무골'이라고도 부르는데 예전에 배나무가 많았다 하여 이목동(梨木洞)이라 부른다. 경주김씨(慶州金氏)가 많이 살고 있다


'원지기'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주겹니'라고도 부르는데, 대나무골 이라고 부른다. 예전에 대나무가 무성했던 마을로 여기에서 나오는 대나무는 나라에서 군기를 만드는 재료로도 사용하여 상당히 아꼈던 대나무밭 이라 한다.
'대나무밭'이 있다 해서 '죽엽리'라 부른다.


노장리(蘆長里)에 '하노장''중노장''상노장'의 세 마을이 있는데 모두가 갈대와 연유한 마을 명을 갖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학자인 권주(權柱)가 이 곳에 살면서 왜군(倭軍)이 쳐들어 왔을 때 갈대가 길게 늘어져 무사히 난(亂)을 피할 수 있었다 하여 갈대를 칭찬하기를 '노장(蘆長)'이라 하고 마을 이름도 '노장'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마을이 갈대숲 아래 위로 생기면서부터 위쪽은'상노장(上蘆長)'또는 '상로정(上蘆汀)', 아래는 '하노장(下蘆長)', 가운데는 '중노장(中蘆長)'또는'중로정(中蘆汀)'이라 부르게 되었다. '노장(蘆長)'을 '갈가리'라고도 부른다.


조선말엽에는 전의군(全義郡) 동면(東面)의 지역으로서 1914年 행정구역 개혁때 고소상리(古所峠里),서방동(西方洞),대동(垈洞)등을 병합하여 서봉과 만경대의 이름을 따서 봉대리(鳳臺里)라 하고 연기군 전동면에 편입(編入)되었다.


'고삿재'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사태말, 대동(垈洞) 이라고도 부르는데, 예전에는 사태가 많이 나온 마을이라 하여 '사태말'이라 불렀다.


'고삿재'서북쪽에 있는 마을을 서봉동(棲鳳洞)이라 부른다. 토형(土形)이 봉(鳳)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形局)이라 하는데, 예전에 봉(鳳)이 날아와서 집을 짓고 살았다 하여 서봉동(棲鳳洞)이라 부른다. 또한 '고삿재'서쪽에 마을이 자리하였다 하여 '서방(西方)골'이라고도 부른다.


봉대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전동면에서 천원군(天原郡) 수신면(修身面)으로 넘어가는 큰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를 '고삿재'라 부르며 이 재는 운주산과 망경대 중간 허리가 잘룩하게 되어 있는 고개다. 이 고개 아래에 마을이 있다 해서 '고삿재'라 부른다.'고소티(古所峙)''고소티리(古所峙里)'라고도 부른다.


서봉동(棲鳳洞) 북쪽 산기슭에 있는 터다. 산기슭에 약 3ha가량 되는 평지(平地)가 있는데 예전 조선중엽에 이 곳에서 목축(牧畜)을 많이 하였던 곳이라 하여 '목우장(木牛場)'으로 불리우고 있다.


심중리(深中里)는 본래 청주군 서강외 일하면 지역으로 강외면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은 공북리(拱北里), 서는 연기군 전동면 노장리와 접하고 있다.조선영조 후반 (1750-1776)에는 심천리(深川里)라 불렀으나, 정조13년(1785)경 한때 없어졌다가 헌종때(1895) 다시 부활되어 고종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1910년경 경술국치 직전 상심동(上深洞), 하심동(下深洞), 심남리(深南里), 심서리(深西里), 갈거리(葛巨里), 조광동(早光洞), 태고동(太古洞)으로 분리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상심동과 하심동의 각 일부를 상봉리(上鳳里)로 넘겨주고 미원동(彌院洞)의 일부를 병합하여 심중리라 하여 강외면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 3월 1일부로 연기군 전동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렀다.자연부락으로는 갈거리(葛巨里), 불근덕(丹悳), 덕룡굴(德龍堀), 민태절, 사기소(砂器所), 소죽골, 중지프내(中深里), 지프내(深川)로 나뉘어진다.


심중 2리 마을로 연기군 전동면과 청원군 동림리와의 경계지역이다.예전에는 청원군 강외면 심중 2리였던 것을 1995년 3월 1일 연기군 전동면으로 편입되었으며 민태산 이란 이름은 마을 뒷산 동림산 중턱에 절이 있었는데 이 절의 이름이 민태절 이라 부른데서 연유했고, 절이 폐사 되면서 절 이름이 마을 이름이 된 것 같다.민태절 절터는 크게 세 군데로 나누어져 있었다.돌축대를 쌓는 곳과 그곳에서 산 정상 쪽에 계단식 건물지가 보이고 동쪽으로 험준한 벽을 오르니 기와편이 무더기로 산재한 건물지가 있었다.


민태절에서 옥산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지칭한다. 이곳을 넘어가면 충청북도 옥산면 상동림 마을이 나온다.


마을 뒤 동림산 밑을 지칭한다. 그릇편이 많이 출토되어 예전에 이곳에서 도자기를 구웠던 자리라고 전해 온다.


동림산 정상에 동림산성이 있는데 남쪽 봉우리 가는 길에 커다란 바위가 있고 이를 농바위라 부른다.


절터 아래에 그릇을 구웠던 곳을 지칭한다.


민태절 아래에 있는 굿당이다.


민태절이 있던 곳을 지칭한다.


마을에서 서남쪽 높은 봉우리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범바위라 부른다.


범바위 아래에 있으며 바위에서 물이 나오는데 이 물을 마시면 모든 병을 다 고쳤다고 한다. 가뭄에도 물이 끊이지 않았는데 양쪽 옆에 묘를 쓰는 바람에 그때부터 물이 나오지 않았다.


붉은덕 위쪽 마을이다.


땅이 황토 흙이라 하여 붉은덕 이라고 한다.


깊은 냇가가 있어 깊은내 라고 한다. 냇가는 상심천, 하심천으로 부르며 깊은내가 상심천, 보덕리가 하심천이 된다.


깊은내에서 앞에 있는 산을 너덜봉 이라고 한다. 너덜봉 아래로 흐르는 내가 넓은 바다와 같은데 지관이 보기에는 이 봉이 넓은 바다 위에 떠있는 배의 형국이라 하여 너른 바다 가운데의 봉이라 하여 너덜봉 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너덜봉의 제일 꼭대기는 학봉 이라고 한다.


너덜봉 옆 우측으로 나 있는 골로, 이 골 밭 가운데에서 물이 나는데 이곳에 집을 짓고 살면 부자가 되는데 이곳에 도깨비가 많고 운이 맞지 않아 사람들이 살지 못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북절골에서 보면 너덜봉이 염해놓은 송장 같다 하여 기가 센 땅이라, 이곳에 절을 지어 나쁜 기운을 눌러야 하므로 북쪽의 절골이라 하여 북절골 이라 했다.


제일 위쪽의 마을로 동림산 밑에 있는 마을이다. 이곳에 고려시대에 미타사 라는 절이 있어서 미타절 이라 불렀다.


해가 제일먼저 뜨는 마을이라 하여 조광골 이라 한다.

[소정면]

소정면은 연기군에서 가장 작은 면이다. 원래는 전의면 지역이었으나 1995년도에 소정면을 신설하여 연기군이 1읍 7개면이 되었다.

소정면 하면 떠오르는 마을이 대곡리이다. 대곡리는 본래 천안지역이었다가 연기군으로 편입되었고 현재는 천안과 경계를 이루는 연기군의 북쪽 끝마을이다. 한절골, 대사동이라 불리는데, 이곳 마을에는 수백년간 마을을 지켜온 장승이 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밀양박씨로 연안 도호부사를 지낸 박승조(朴承祖)가 1618년 이곳에 어머니인 창원 황씨의 묘소를 조성하면서 식솔들을 데리고 와 터를 잡고 살았는데, 마을 서쪽이 훤하게 뚫려 있어 나쁜 기운이 들어오므로 이곳에 숲을 조성하고 입구에 장승을 깎아 세워 좋은 기운은 마을에서 취하고 나쁜 기운은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로부터 장승을 깎고 장승제를 지내 왔으니 이때가 지금으로부터 400여년 전이다. 현재 장승이 서있는 땅과 그 일대의 숲은 밀양박씨 문중에서 마을에 희사한 것이다.

대곡리 장승제는 매년 지내는 것이 아니라 윤년이 되는 해에 북쪽을 향한 조선 소나무(육송)을 잘라 윗부분은 地下大將軍-여장군)을 아래 굵은 부분은 天下大將軍-남장군)을 깎고 가지는 솟대 한 쌍을 깎아 마을 좌우에 세운다. 장승은 정성을 다하여 깎은 후 정월 대보름날 해가 넘어갈 무렵에 풍장패를 앞세우고 마을 입구에 장승을 세우고 장승제를 지낸다. 이때 제관은 마을의 평안과 태평을 비는 소지의식을 하는데 소지를 태우면서 마을 집집마다 소망을 이야기하여 그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간절히 바란다.

소정면에서 가장 높은 산이 고려산이다. 해발 305m의 산 정상에는 산성이 축조되어 있는데 이 산성을 고려산성(高麗山城)이라 부른다. 이산성에 대하여 『여지도서(與地圖書)』의 전의현 산천조에 「高麗山 雲住山 : ?自木川月照山來又自高麗山南落爲鐵城山 月照山卽 此三山祖宗」 이라는 기록이 있고, 또 『대동지지(大東地志)』전의 산수조에 「高麗山 : 西十里」라 하여 고려산이 전의현에서 서쪽으로 10리 지점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전의현읍지(全義縣邑誌)』 산수조에는 「古麗山 : 縣北十三里 上有祈雨祭壇」이라 하여 고려산이 전의현에서 북쪽 13리에 있으며 기우제를 지내던 제단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산을 고려산이라 부르는 것에 대하여 어느 학자는 고구려의 준말로 고구려가 남쪽까지 내려 왔을 때 이곳에까지 내려와 성을 쌓았으므로 ‘고구려 산성’이라 부르다가 줄여서 ‘고려산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 산성은 길이가 250m의 퇴뫼형 산성으로 성내에서는 삼국시대 토기편과 기와편이 출토되고 있다. 성 아래 마을을 아야목이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 산성에서 전투를 하던 병사들이 성안의 우물이 모두 말라 갈증으로 괴로워하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어 하늘에 기우제를 지냈다. 정성을 다하여 제를 지내자 하늘에서 비가 내려 모두들 춤을 추고 기뻐하면서 그 빗물을 받아 마셨는데, 갑자기 마신 물로 목구멍이 따가워서 “야야 목” “아야 목” 하고 외쳤다 하여 마을 이름을 아야목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소정면 각지명유래


백제때부터 큰 골짜기여서 북방을 막는 산성(山城)이 있었던 지역(地域)이다. 높고 곧은 큰 골짜기가 있는 산성아래 부락(部落)이 생기면서부터 '곧은골''고등(高登)이'라 부르게 되었다.
예전에는 한양(漢陽)과 통하는 삼남대로(三南大路)가 여기에 있어서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고장이기도 하다. 본래(本來) 전의군(全義郡) 북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에 전의면(全義面)에 편입(編入)되었다가, 1993년 소정면이 신설되어 소정면에 편입되었다.


'안골'북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앞에 동(東).서(西).북(北) 세 곳으로 가는 갈랫길이 있다 해서'세거리'라 부른다.
'시거리 ''삼기(三岐)'라고도 부른다.


예전부터 문인(文人) 명현(名賢)이 나올 곳이라 하여 산을 문필봉(文筆峰)이라 부른다.
'세거리'동쪽에 뾰족하게 솟아있는 산이다.


예전에는 삼남대로(三南大路)가 있어서 많은 행인(行人)이 넘어 다닌 고개다. 선비들이 흥얼거리는 시조가락에 들새가 잔잔하였다는 옛 시조의 일절에 등장할 만큼 유명한 고개다.
'고등이재''고등현(高登峴)'이라고도 부르며 고등리에서 대곡리로 넘어가는 고개다.


소정면(小井面) 고등리(高登里) 고려성(高麗城)에서 발원하여 '서정리'를 거쳐 전의(全義)읍내 앞에서 사기 소내와 합하여 '조천'이 되는 웃내를 '고등이내'라 한다.
고등리에서 발원한다 하여 '고등이내'라 한다.


소정면 고등리(高登里) 고려산(高麗山)위에 있는 산성을 고려산성(高麗山城)이라고 부른다. 고려 때 쌓은 산성으로서 옛날 백성들이 한번 난리를 만나고 이 산성에 피난하였으나, 식수가 적어서 갈증이 심하여 목이 아픔으로 성(城) 아래에 '아야목'이라는 부락(部落)이 있어서 이 부락에서 목을 축였다는 설(說)이 있는 산성이다.
성(城)안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던 제단(祭壇)이 있었으며 연기팔경(燕岐八景)의 하나이다.


세거리 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고려성 아래 마을이다. 고려 홍건적(洪巾賊)의 난리 때 고려성에서 피난하는데, 먹을 물이 떨어져 견딜 수가 없을 때 갑자기 비가 내려 급히 물을 먹자 아파서 “아야 목아”하고 울면서 산에 내려와 살았다고 하여 아야목이라 한다.


고려성 위쪽에 있는 산으로 전의읍의 주봉(主峯)이 된다.


마을회관 남쪽으로 마을과 사이가 떨어져 새로 생겼다하여 새뜸이라 한다.


들 이름으로 마을 북서쪽 강시골 옆을 야지팽이라고 한다


미륵이 있다하여 미륵땅이라고 한다.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이 보이는 지역이다. 이곳에서 신석기시대의 돌칼과 돌화살촉이 출토(出土)되었으며 산의 모양으로 보아 혈거부락(穴居部落)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한다.
조선시대 때는 역리(驛里)부락으로 김제역(金提驛)이었다. 본래는 전의군 북면(北面)의 지역이었다.
북면(北面)의 '대사동'과 '맹곡리'의 이름을 따서 대곡리(大谷里)라 하여 전의면(全義面)에 편입(編入)되었다가 소정면이 신설되면서 소정면에 편입되었다.


맹골 북쪽 큰 길가에 있는 마을을 역말 또는 역리(驛里),김제역말,진계역말 이라 부른다. 본래(本來) 천안군(天安郡) 소동면의 지역으로서 조선시대때 김제역(金提驛)이 있었던 마을이다. 또한 역말은 '학수동'이라고도 부르는데, 산 모양이 학 모양 같고 그 가운데 내가 흘러 '학수동'이라고도 부른다.


대곡리(大谷里)에서 제일 큰 마을이다. '고등이재'밑이 되는데, 예전에 큰 절이 있었다 하여'한적골'이라 부른다. 3층 석탑이 있으며 '대사동(大寺洞)'이라고도 부른다. 임진왜란 때는 중들의 피난처였다.


'한적골'북서쪽에 있는 마을 옛날에 맹씨(孟氏)가 살았다 하여 맹골, 맹곡(孟谷)이라 부른다. 이 곳엔 마을 위 논에 맹꽁이가 많이 울어서 맹곡, 즉 맹꽁이가 우는 골짜기 마을이란 이야기도 있다.


'역말'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앞들에 궁답(宮沓)이 많이 있었다 하여 궁말, 궁리(宮里)라 부른다.


옛날 관청이 있었던 터이다.


대곡 3리는 학이 날아가 앉는 형상이기에 학수동이라고도 한다.
옛날 이곳이 말을 갈아타는 곳이어서 역말 이라고도 한다. 처음에는 역말 주변으로 해서 마을이 조그맣게 있었는데 1979년에 자리가 좋지 않다고 현재의 위치인 학수동으로 옮겼다. 학수동은 천안과의 경계라 이곳에서 장도 열렸다.


2리와 연결된 길 있는 부근 안쪽 논밭이 있는 곳으로 이곳에다 집을 지으면 3년 동안은 잘되는데 3년 뒤에는 망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곳 지형 형세가 조랭이와(복조리) 비슷해 옛날 밥을 지을 때 쌀을 3번 정도 씻고 조랭이를 털었기 때문에 그렇다. 어떤 이유인지 남자들이 죽고 과부가 생기며 남편 없는 집은 금방 망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부터라고도 한다.


현재 마을입구에 장승이 있어 장승마을로 윤년이 드는 해에 장승을 세우며 장승제를 지낸다.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 우는데, 한절골은 골짜기가 많고 큰절이 있어서 그렇게 불린다. 또 한번 들어오면 막다른 곳이라 들어 왔던 길로 다시 나가야한다 해서 한절골이라고 한다. 1979년도에 민속보전마을로 지정되었다가 1982년쯤에 해제되었다.
한적골, 한절골 이라고도 하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옛날에 대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승려가 만여 명을 헤아렸으며 유적지와 초석이 완연히 남았었다고 한다.
거대한 석탑이 4층으로 되어 있고 그 크기가 추녀에 들어가 비를 피할 만 하였다고 한다.
또 천수가 용출하였는데 물이 맑고 동온하정하여 척서정이라 이름 하였다고 한다.
위의 탑은 매몰된 듯 자취를 찾을 길이 없고 현재 마을 입구(수살)에 장승이 있어 윤년이 드는 해에 목장승을 새로 깎아 세우고 장승제를 지내고 있다.


마을 동쪽에 있는 산으로 능성구씨네 산이며 조상이 조선시대때 병마절도사가 나와서 구병산 이란 말도 있으며 또 다른 이야기로는 고려 태조때 이곳이 격전지였기 때문에 이곳에서 작전계획을 세워 구병산이 되었다는 말도 있다.


한절골 좌측 안쪽의 남쪽방면으로 옛날에는 절과 승려들이 있었다고 해서 승절골이라 하며 몽고군이 쳐들어왔을 때 몽고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하여 승적골 이라고도 한다.


마을의 편안을 위해 자주 제사를 지내는 불당(佛堂)에서 제사를 지낼 때마다 구름이 산처럼
밀려오는 곳이라 하여 운당리(雲堂里)라 부르게 되었다.
본래는 충북 청주군 덕평면의 지역이었으나, 고종 32년에 전의군에 편입(編入)되고 서기 1914년 운강과 당리의 이름을 따서 운당리(雲堂里)라 하여 전의면(全義面)에 편입되었다가 소정면이 신설되면서 소정면에 편입되었다.


부락의 안위를 위하여 제사를 지내는 불당(佛堂)이 있다 하여 당말, 당리(堂里)라 부른다.
예전에 불당이 있었다. 불당은 당재에 있으나 그 아래 마을이므로 ?당말?이라 부른다.


운당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예전에 불당이 있었다.
불당골, 부곡리(富谷里)라고도 부른다.


마을 앞에 버드나무가 많았다 하여 양촌(楊村)이라 부르게 되었다. 불당골 북쪽에 있는 마을이며 양리(楊里)라고도 부른다.


구름이 항시 산처럼 하늘에 떠서 마을을 내려다본다 하여 '운강'이라 부른다. 이 마을에서 보는 구름은 운치가 있기로 유명하다.
불당골 위에 있는 마을이다.


원래는 전의군(全義郡) 북면(北面)의 지역이다. 천원군 풍세면(豊歲面) '소정(蘇井)'이라 부르기도 하였었다. '소정(小亭)'이란 잘못된 해석이다. 마을 앞에 소나무가 정자(亭子)처럼 서 있으므로 '송정(松亭)'이라 부르던 것이 '소정(蘇井)'이 되었고, 그 후 행정구역 개혁에 따라 이웃의 여러 마을을 통합하여 소정리(小井里)라 하고 전의면에 편입(編入)되었다가 소정면이 신설되어 소정면의 중심마을이다.


예전에는 '넉바위'라 불렀었다. 넓은 바위란 뜻에서 '넓바위'가 '넉바위'로 변해 부른다. 지름 5m가량 되는 바위가 있는 마을이라 해서 '넉바위'라 부르다가 '광암(廣岩)'이라고도 부른다. 전주이씨(全州李氏)가 많이 살고 있다.
'넉바위'에는 청룡과 백호(白虎)로 둘러져 있으며, 청룡 곁에 넓은 바위가 있어 대궐에서 여기를 지날 때 여기에서 쉬어갔다 한다.


'넉바위'남서쪽 오목한 곳에 있는 마을이다.'요곡(要谷)'이라고도 부른다.
고개를 넘어가는데 힘이 든다 해서 '요곡'이라 부른다. 해주오씨(海州吳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


마을북쪽 청룡산 끝 부분에 넓적한 바위가 있는데 넉바위라고 부른다.
지금은 철길을 놓느라 천안과 조치원 사이의 산을 끊어서 바위가 보이는데 예전에는 바위가 없었고, 이곳에만 있었다. 나무가 우거지기 전에는 바위들이 바로 보였는데 박정희 시대의 조림산업으로 지금은 숲이 우거져 바위가 잘 보이지 않는다.
좌청룡 우백호의 마을이라고도 한다.


마을 북쪽에 있는 산을 청룡산, 청룡황 이라고 부른다.
청룡황이 짧다고 해서 청룡을 길게 하려고 400여년 전부터 나무를 심어 인위적으로 숲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동네의 안녕을 빌고 북풍을 막아주므로 동네를 따뜻하게 해 주었다.
고목이 되어 나무가 죽으면 다시 심고 하여 전주이씨가 이 숲을 조상처럼 아꼈다고 전해진다. 박정희 재임시 새마을사업 때 청년들이 이것을 개간하여 논으로 만들자고 하였는데 이를 막기 위해 이승희(이승욱)씨가 이 숲을 정부 보호림으로 지정하게 했다.


마을 남쪽에 위치한 산으로 백호푸리라고도 한다.


마을 한가운데를 지나가는 골로, 길다하여 장골이라고 한다.


마을 남쪽에 위치하며, 산에 봉이 세 개가 있다 하여 산봉 이라고 한다.


청룡환 앞에 내가 흘렀었는데 바위나드리 쪽(바위나 들 밑)으로 내가 치고 들어가서 웅덩이가 있었다. 이상하게도 이 웅덩이는 소용돌이 쳤다. 이 속에 이무기가 산다고 생각했으며 소를 매 놓으면 사라졌다. (소를 매어놓으면 이무기가 채간다고 했다.) 이 웅덩이는 1930년대 자연적으로 메워졌다. (1930년대쯤에 토사축적과 하천의 직선화 공사로 메워졌다.)


아늑하다고 하여 안골이라 하고, 산이 삥 둘러 쌓여서 산 안에 있다하여 내동이라고도 한다.


안골 남쪽의 산으로 매가 날아가는 형국이라 하여 매봉재라 한다.


노장골 너머에 위치한다. (안골 남쪽을 조터골이라 한다.)


마을남쪽으로 노스님이 있었다 하여 노장골이라 한다.


장고개 뒤, 용당굴 앞의 산이 볼록 튀어나온 것이 용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용단골이라고 한다.


마을 서북간에 있으며, 투구처럼 생겼다하여 투구봉이라고 한다.


요골에서 안골로 넘어가는 고개로 말을 타고 지나간다 해서 그렇게 부른다

 

[연기군 지리적 위치]



또한 연기군의 주변도시와 생활권을 연결 지어보면 소정, 전의는 천안시와 생활권이 연결되어 천안의 시내버스가 전의 지역까지 운행이 되고 있으며 조치원, 동면은 청주와 생활권이 연결되어 역시 청주 시내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금남은 대전시와 남면, 서면은 공주시와 시내버스가 왕래하여 생활권을 연결하고 있으며 거리상으로 볼 때 대전은 45㎞ 공주가 25㎞ 청주가 20㎞ 정도이며 서울과는 114㎞ 이내이다.

연기군은 어느 지역보다 교통이 편리한 곳이다. 소위 국가에서 운영하는 교통망은 연기군을 관통하여 전국으로 연결되어 있다. 국도 1호선과 철도의 경부선이 지나고 충북선 철도의 시발점이며 경부·중부고속도로와 인접하고 고속철도가 연기군을 관통하여 소위 사통팔달을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 가장 복잡한 거리인 아홉거리('구거리'라고 하며 아홉갈래의 길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가 있는 곳이 연기군이다.

미호천과 금강이 흘러 용수가 풍부하고 산은 높지 않아 목야지, 과수원으로서 농산물의 재배에 적당하다. 온도는 연평균 12.4℃로 한서의 차이가 다른 지역에 비하여 극심한 편이 아니다.

 

[연기군 관계적 위치]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하였고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할 때 연기에는 연씨들 전의에는 전씨들이 활동했으며 연씨의 연신, 연돌은 백제의 병관좌평까지 오른 인물이다. 연기, 전의는 백제의 왕도 웅진과 가까이 있기에 이곳을 지키는 역할로 많은 성을 쌓았고 그러기에 연기의 산에는 당시 축조했던 성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660년 의자왕이 항복하고 31년 간 백제유민이 부흥운동을 전재 할 때 연기지역의 성들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결국 백제가 멸망하고 백제유민은 역대왕에 대한 추모제례를 전의 다방리에 절을 짓고 매년 4월15일 대제를 거행하였으니 그것이 오늘날 백제대제이다.

왕건이 고려 건국시 삼한 통일에 박차를 가할 때 금강을 건너 공주의 견훤과 싸움을 벌이기 위하여 금강에 도착하니 7월 장마로 물이 불어 건널 수 없게 되자 이치는 죽음을 무릅쓰고 왕건을 건너 준다. 이때의 공으로 이름을 하사 받아 이도(李棹)라 부르고 전의 이씨 시조가 되었으며 전의 남쪽성에 거주하였다하여 이곳을 이성(李城)이라 부른다. 고려시대에는 몽고의 침략이 이어져 나라가 위태로울 때 연기에서 몽고적을 물리치니 이것이 연기대첩이다. 조선시대 임진왜란시 연기, 전의 출신 인물들은 의병에 가담하여 왜군을 맞아 싸웠으며 근대에는 6?25전투가 전의 개미고개 금남의 금강방어 전투로 이어져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렇게 연기군은 고대 웅진을 지키기 위한 지리적 위치에서 한반도의 남쪽을 방어하기 위한 요충지 역할을 하여왔다.

연기군의 구성은 연기와 전의 그리고 금남으로 분류할 수 있다. 연기는 백제시대 두잉지현(豆仍只縣)이었고 통일신라시대 연산군에 속한 연기현(燕岐縣)이라 하였다. 전의는 백제때 구지현(仇知縣)이었고 통일신라시대에 금지(金池-金地) 하였으며 고려시대 전의현(全義縣)이라 하였다. 조선 태조 4년(1395년) 전의에 감무를 두었으며 태종 6년(1406년)에는 연기에도 따로 감무를 두었다. 태종14년(1414년)에는 연기와 전의를 합병하여 전기현(全岐縣)으로 하였다가 태종16년(1416)에 각각 환원하였다.

전의는 연산군때 환관 김처선에 의하여 (1505년)전의가 없어졌다가 중종반정때 (1506) 다시 복직되었으며 연기는 숙종 6년(1680년) 읍인 만설의 모역벌주(謀逆伐誅)로 인하여 문의에 속하였으나 1685년 복구하여 연기현이라 부르게 되었다.
고종32년(1895년) 전국 지방관제를 개정함에 따라 각각 군이라 칭하고 군수를 두게 되었으며 이때 연기군, 전의군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연기군과 전의 군을 합하고 금강건너 금남을 연기에 편입하였는데 이곳은 백제 때 웅진(熊津 : 熊川)에 속한 소비포현이었으며 고려 때는 공주에 속했다가 1914년 연기군에 편입되면서 금강의 남쪽에 있다하여 금남면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약간의 변화에 의하여 현재 연기군은 1읍 7개면으로 구성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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