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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교회 갱신과 선교
-목회자의 입장에서-
이 종 윤 교수
(겸임교수, 서울교회)
들어가는 말
1. 교회갱신이란 무엇인가?
ll. 갱신의 주되시는 그리스도
III. 교회갱신 운동의 방향
IV. 한국교회 무엇을 갱신할까?
맺는 말
교회가 부흥할 때 대개 몇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사람들이 복음에 대한 갈증을 갖고 열렬한 반응을 보인다. 거리와 상관없이 복음을 듣기 위해 모여오고 찬송을 열렬히 부르며 하나님의 말씀은 심령깊이 침투된다. 성경공부가 활발해지며 잃은 양을 찾으려는 전도열이 크게 고조된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영적갱신운동이 일어난다. 자기 갱신을 이룬 교회는 해외선교 또는 타종족에 대한 선교 운동이 활발해진다. 하나님께 감사와 깊은 헌신으로 봉사의 폭이 넓어지고 악령을 내쫓고 병자가 치유되며 도처에서 기적이 체험되고 다시 오실 주님을 대망한다. 주는 자의 생활 회생하는 삶이 구체화되고 금식기도 철야기도 산기도와 같은 뜨거운 기도운동이 일어나고 이름만 가졌던 신자들이 참신자가 되는 회심의 역사가 일어난다. 물론 부정적인 면도 있다. 직접 계시를 주장하는 신비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거짓 선지자들이 도처에서 나타남으로 교회가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성장 중에 생기는 아픔(growing pain)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지만 이것도 교회가 바르게 갱신되기 위한 촉매 역할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여기서 교회갱신이 무엇이며 그 갱신의 주체는 누구이며 그리고 갱신은 어떻게 무엇을 그리고 왜 해야 하는지를 찾아보도록 하자.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역사 하실 때 영적 각성, 갱신 또는 부흥을 일으키시나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가능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그 내용과 뜻이 다르나 교회는 이것을 종종 같은 의미로 사용해 왔다. 갱신이라는 말은 마치 사랑이라는 말처럼 정의를 내리기가 쉽지 않고 해석도 다양하다.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처음 신앙 체험과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에 다시 활기를 띄게 할 때 이 말을 사용하고 있다. 갱신은 정치적으로는 혁명이요 사회적으로는 혁신 또는 개혁이며 신앙적으로는 회개 또는 거듭남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영이 새롭게 역사할 때 개인 또는 교회는 오순절 사건 시 일어났던 내적 변화와 외적 변화 즉 예배나 교회구조, 전도와 삶의 양태가 새릅게 갱신의 열매로 나타난다. 이같은 갱신은 교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교회가 교회의 기본사명에 충실케 되고 결국 선교에 박차를 가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갱신은 어떤 상태라기 보다는 동력적 의미가 있다. 따라서 교회가 바로 갱신되면 성령의 충만(엡5:18)을 체험케 되고 하나님 나라 일을 수행할 수 있는 권능을 얻게되며 교회와 개인의 신앙은 성장케 된다.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새 것이라는 말은 ????와 ??????라는 두 개의 헬라어로 읽혀진다. 전자는 전에 없던 것 또는 방금 나타난 것(이재 막 일어난 것)을 말한다면, 후자는 다른 것과 비교하여 구별된 것, 새로운 것을 말한다. ????는 시간적으로 새로운 것을 가리킨다면 ??????는 옛 가치나 매력적이던 것 보다 더 우월하고 좋아진 즉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의미한다 신약에서 ??????는 주로 '아직 사용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마9:17, 막2:21, 눅5:36, 마27:60, 요19:41). 아주 특별하거나 흥미가 있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행17:21, 막1:27, 행17:19). 그러나 그 류(351)가 새로운 것(마13:52) 옛것을 대신 한 것(히8:13)이며, 시간적으로는 현재다(고후 5:17, 계21:1). 그러나 공관복음서에서는 ??????와 ????는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낡은 부대에 담긴 새 술의 비유와 낡은 옷에 새 천의 비유에서 새 술은 ????를, 그리고 기운 새것은 ??????를 각각 사용했다. (막2:21-22). 막1:27에서 예수의 말씀을 듣고 다 놀라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할 때는 ??????가 쓰였다. 이처럼 이 두 단어는 뚜렷한 의미상 구별이 있으면서도 서로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신학적으로 ??????는 구원의 때가 가져온 아주 다른 그리고 놀라운 것을 개략한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새 것이란 종말론적 약속의 최종 목적이기도 하다. 새 하늘과 새 땅(계21:1, 벧후 3:13, 사65:17), 새 예루살렘(계3:12, 21:2), 하나님 나라에서 새포도주(막14:25), 새 이름 (계2:17, 3:12, 사62:2, 65:15), 새 노래(계5:9, 14:3, 사42:10),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21:5, 사43:19). 이처럼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최종 목표를 새롭게 하시는 것에서 찾았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라고 사도는 외쳤다.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 그리고 새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되므로 새로운 피조물 즉 새 사랑이 되려면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 자신이 새 사람이다. 예수는 자신을 한 사람으로 말씀해 주셨다. 바울은 로마서5:12 이하에서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으나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한다. 예수는 새 사람의 표상이기도 하다. 이처럼 ??????는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 즉 구원받은 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새 사람이 된 것이다(엡2:15). 교회는 이 새 사람의 공동체다. 새 사람된 이들에겐 은사가 있듯이 책임도 있다(엡4:24). 하나님의 구원의지는 예레미야 31장 31절 이하에서 말씀하신 대로 새 언약을 통해 나타난다. 이 새 언약은 예수로 말미암아 세워겼다(고전11:25, 눅22:20, 히8:8이하). 새 언약은 옛 언약 또는 질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고(고후3:6) 더 좋은 것이며(히7:22) 무흠하며(히8:7) 영원한 효력이 있고(히13:20) 새 언약은 첫 것에 비해 완전하고 낡아지고 쇠하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히8:13, 7:18이하). 낡은 것과 혼합될 수 없다(막2:21이하). '새롭게'라는 말은 ??????라는 말에서 나온다. 히6:5에서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배교자는 두 번 회개를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배교자가 되지 말 것을 강조했다. 이 단어는 중생이나 세례와 연결하여 자주 사용되었다. ?????? 새롭게 하다, 갱신한다는 뜻이 있는 이 단어는 고후4:16에서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골3:10에서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라고 했다. 바울은 도덕적 진보나 변화를 말한 것이 아니고 외적 압력으로 달라진 것을 말한 깃도 아니다. 이같은 갱신은 하나님이 성령으로 주시는 것이다(고후5:5). 골로새서 3장10은 도덕적으로 생활 갱신도 말씀한다.
내적 갱신은 .개인의 삶도 새롭게 하고 그리스도인의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므로 (롬8:9-13, 고전12:13), '그의 긍흘 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도 저희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딛3:5이하)라고 했다. 즉 그리스도가 성령을 부어 주사 새롭게 하신다. 히브리서 10장 19절 이하에서는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회 육체니라'고 했다. 전에 없던 길을 만드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는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처음 여신 분이시며 우리를 새롭게 하길 분이시다.
우리는 여기서 신약에 나타난 ?????? 즉 예수의 구원 사역과 연결된 새언약, 새계명, 새로운 피조물, 새생명, 새사람, 새하늘과 새 땅, 새 이름, 새 예루살렘, 새노래 등을 연구해 보도록 하자.
1. 새언약( ??????????? ???????, 마26:28, 눅22:20, 고전11:25, 고후3:6,
히8:8,13, 9:15)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마지막 만찬 석상에서 예수는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다"(고전11:25, 눅22:20) 여기서 말씀한 예수의 죽으심과 피는 새언약의 기초가 된다. 새언약의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구속하려고 죽으셨고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셨다(히9:15). 히브리서 기자는 새언약의 주제를 더욱 발전시키면서 '저 첫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히8:7)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히8:13)고 하였다.
바울은 옛 언약을 율법조문으로, 그리고 새 언약은 영으로 한 것이라 하고 율법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 했다(고후3:6)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 할 지니라'(롬7:6)한다. 이와 같은 새 언약은 구약시대 예레미아 선지자에 의해 이미 선포되었다. 옛언약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이미 파기되었으며 새언약은 마음속에 세운다(렘31:31-33). 이 새 언약이 그리스도 예수로 세워진 것이다.
2. 새 계명 (?????? ?????? 요13:34, 1요2:7,8)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는 사랑의 새 계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하셨다. 구약에서 이미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신6:5)하셨다. 예수께서 사랑의 계명을 주신 것은 결코 새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는 새 계명이라 하셨다.
A. 영적인 계명이기 때문에
구약에서는 계명을 문자적 또는 형식적으로 받았다. 그러나 예수가 주신 계명은 마음에 새긴 영적 계명이다. 옛 계명은 마음이 없이 물질만 조금 내어주면 이웃을 사랑하는 구제를 한 것으로 간주했지만 새 계명은 비록 물질로 도와주지 못했어도 따뜻한 마음과 사랑을 주고 형제로 인격적 대우를 해주고 기도해줄 때 사랑의 계명은 지켜졌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형식이 아니고 문자적 종교도 아니다. 영적 종교로서 외형적인 것 보다 신령한 종교다
B. 새로운 동기를 가졌기 때문에
전에는 사랑을 하되 자기 중심적이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도 결국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인해 사랑도 봉사도 하는 것을 말한다.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에로 우리의 모든 삶의 동기가 바뀌어진 것을 의미한다.
C. 형제애의 강조를 말하기 때문에
예수는 '서로' 사랑하라 하셨다. 전에는 내가 사랑하면 되었고 상대가 나를 사랑하든 말든 상관이 없었다. 또한 내가 사랑만 받으면 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러나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 했다. 받으려고만 해서도 안되고 주려고만 해도 안 된다. 하나님 앞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놀랍고 새로운 계명이다.
D.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이기 때문에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새 계명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시고 주님을 영접한 사람만이 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수가 있다.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 안에 있을 때만 새 계명의 실행이 가능한 것이다 미움, 다툼, 시기가 옛것이라면 사랑, 용서, 자비는 새 것이다. 새사람이 새 계명을 지키게 된다
E. 새 대상이 생겼기 때문에
옛날에는 유대인들은 유대인만을 사랑하고 이방인은 개처럼 취급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인들은 죄인도 이방인도 사랑의 대상으로 삼게된다. 사랑의 대상이 차별 없이 된 것처럼 사랑의 방법 또한 새롭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고 즉 자신의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그 대상을 먼저 생각한다. 이것은 놀라운 새 계명이다
F. 새 능력 때문에
자신만을 사랑하던 사람이 다른 사람까지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은 성령이 임하시므로 주어진 능력 때문이다. 새 계명은 늘 새롭고 항상 새로운 계명이다. 오늘은 새것이고 내일은 밝아질 계명이 아니고 세월이 흘러도 항상 새롭다. 칼뱅은 새 계명은 사람을 갱신시킨다고 했다. 어거스틴은 새것이 사람을 새롭게 한다고 했다. 따라서 새계명은 사랑을 새롭게 만들고 새사람이 되게 한다.
G. 사랑의 표준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처음과 나중이 같은 일관성이 있다. 옛 계명이 말한 사랑의 표준은 자기 자신이었다.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즉 자신을 사랑한 만큼 남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새 계명의 표준은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이시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불교에서도 사랑(또는 자비)이라는 말을 쓰고 있으나 그것은 자기 완성에서 온다고 한다. 성불 즉 부처가 되어야 사랑이 나온다는 것이다. 반면 예수님 사랑은 자기 완성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버리는 것을 사랑이라 하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여기서 '같이'는 비교의 의미보다 오히려 '꼭 그대로'라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한 그 사랑으로 즉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아가페의 사랑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비교된 사랑이 아니라 꼭 그와 같은 사랑을 의미한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이다.
3. 새로운 피조물(????? ??????, 고후 5:17, 갈 6:15)로 살게하신 예수 그리스도
새 생명(????????? ????, 롬6:4), 새사람(?????? ????????, 엡2:15, 4:24, 골3:10), 거듭난 사람(골3:10, 요3:1-8),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다. 신생아가 세상에 태어나는 것도 신비롭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모습과는 비교가 안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이 천사들과 함께 기뻐하신다』고 했다(눅15).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살리시고(엡12:1),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를 긍흘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 (엡2:5-6). 이 같은 신생(新生)을 신학에서 중생(重生) 또는 거듭남이라 부른다. 중생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구원 전체라 할 수 없다.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은 영원한 구원 과정속에 있는 하나의 단계다. 중생은 했으나 성화 되지 못한 유아기적 신자로 머무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고 성인이 어린아이로 돌아가려 한다 해서 가능한 것일까? 자신에게는 불명예요 타인에겐 괴로운 일이지만 어린아이들처럼 행동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가 어린아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성인이 유아기적 태도를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아이가 될 수는 없다. 같은 이치로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전에 짓던 죄의 길로 돌아갈 수는 없다. 죄를 지을 수 있고 또 실제로 죄를 짓고 있으나 그것은 전의 것과는 다르다. 전과 같이 죄를 짓되 죄를 즐기지는 못할 것이다. 확신을 갖고 의도적인 죄를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3년이나 주님을 따르던 베드로가 주를 모른다고 했다 해도 사람들은 그를 향해 당신은 분명히 예수의 제자 중 하나라 하듯이 아직도 주님의 제자로 남아 있기 때문에 죄를 지으면서 기쁨은 없다
하나님은 당신을 죄짓는 것으로부터 중단시키시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죄 속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을 중지시키실 것이다 당신의 살을 비참하게 만드시어 죄에 빠진 것을 저주하거나 거기서 건짐 받기 위해 하나님께 간청케 하시거나 때로는 생명을 불러 가시는 경우도 있다. 고린도교회 성도 중 성찬을 범한 이들을 하나님이 불러 가셨다(고전 11:10). 만일 옛 사람에로 돌아가서 그 일을 계속할 수 있다면 그는 구원받은 자라 할 수 없다. 그런 이는 옛사람으로 돌아갈 뿐 아니라 일곱 마귀까지 끌고 들어와 전보다 더 악해질 것이다. 그리스도의 실체를 맛볼 수 있도록 충분히 가까이 있는 사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로 물러가면 그가 그리스도께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고로 뒤로 물러가지 말라. 다시 말하노니 뒤로 물러가지 말라. 그리스도로 구원받은 성도는 영원히 구원받은 자다.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새사람으로 새생명을 얻은 성도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의의 열매를 더 많이 맺어야 한다.
4. 새 하늘과 새 땅 (계21:1)과 새 예루살렘(계21:2, 3:12)을 받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
새 예루살렘은 천국에 있을 승리한 교회를 말한 것이다. 종말의 날에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신부처럼 하늘로부터 내려올 것이다. 영적 전쟁에서 이긴 자의 표시를 받은 모든 이들로 하여금 새 예루살렘을 받게 하신다(.계3:12), 이 아름다운 성은 (계21:2, 10 이하)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거기엔 성전이 없다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기 때문이다(계21:22). 그 도성엔 해와 달의 비춤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양이 그 등불이 되시기 때문이다(계21:23). 무엇이든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 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간다(계21:27). 새 하늘과 새 땅(벧후 3:13)은 옛 것과 질적으로 완전히 달라진 것으로 거기엔 죄가 전혀 없다. 이 같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자는 현세에서도 새 생활을 가진다. 주님의 재림시 흠 없는 신부처럼 주님의 영접을 받을 자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이 같은 천국은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주어진다.
5. 새 이름(계2:17, 3:12)의 비밀을 갖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
횐 돌에 쓴 새 이름은 받는 자의 이름 즉 영적 전쟁에서 이긴 자에게 주시는 영광과 지위를 표시한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 자신의 이름 즉 그리스도께서 이긴 자에게 전에 없던 긴밀한 교제를 시작해 주시는 특권을 의미하는 것인지 여러 해석이 있으나 그 이름의 내용은 받는 자밖에 알지 못한다(계2:17). 큰 핍박과 심한 유혹을 이긴 자들이 받을 하늘나라의 상급은 이처럼 아직도 신비에 싸여 있으나 그것을 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임은 확실하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갈6:15).
우리에게 새로운 존재, 새로운 현실, 새로운 상태를 가wu오시는 분은 그리스도 예수뿐이시다. 낡은 상태에 있던 우리가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 사도는 할례도 무할례도 아니고, 유대인이 되거나 이방인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가지 사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하는 것만이 새 사람이 되는 열쇠가 된다고 한다. 할례는 유대인들의 종교의식이고 회생은 이방인의 종교 습관이며 세례는 기독교인들의 신앙표현이다. 이런 의식과 규례로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현재 상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여러 모양의 할례와 무할례에 부딪치고 있다. 전자는 종교적이라면 후자는 반종교적 또는 세속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도는 그것이 종교적인 것이든 세속적인 것이든 문제가 아니고 거기에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고 새로운 존재가 나타났는가를 묻고 있다. 그 새로운 창조 한복판에는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이다. 새사람이란 단순히 옛 존재와 대치하는 그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부패하고 흠집이 나고 파괴되고 낡아버린 것을 좀 더 나은 것으로 재생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낡은 피조물을 새 피조물로 변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새것이란 영어의 접두어 Re-로 시작되는 세마디 말 즉 화해(Re-Conciliation) 재결합(Re-Union), 그리고 부활(Re-Surrection)을 통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화해란 하나님과의 하해를 말한다. 하나님 자신이 화해의 근원이시고 능력이신 데 누가 감히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킬 수 있단 말인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우리 모두가 의식과 성례, 기도와 예배 도덕적 행위와 자선사업으로서 하나님과 화해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우리 자신은 하나님을 절대로 만족시 켜드릴 수 없음을 스스로 알게 되고 우리는 하나님께 더 큰 적의를 품게 되었다. 하나님과 화해 못한 인간은 이웃과도 화해를 못하고 있다 자기비판을 거부하고 오히려 이웃에 대한 적의를 품는다. 그런고로 하나님과 화해 한 이가 이웃과 재결합도 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분열된 이웃을 다시 찾게 되고 연합하게 된다. 오늘의 기독교회가 인류역사 가운데서 재결합을 가져오지 못했다는 점에서 많은 비난을 받고 있는 이유가 바로 새사람이 가져야할 당위적 자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창조 또는 새사람의 또 하나의 표지는 부활이다. 죽은 자가 무덤을 열고 다시 사는 것이 부활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낚은 존재인 죽음에 새로운 생명이 나오는 젓을 의미한다. 부활은 먼 미래 주님 재림하시는 날 올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지금 여기서 내게 일어나야 한다. 시간의 모든 순간 순간이 영원으로 바뀌어지는 자기 변화를 의미한다. 소멸과 죽음에 처했던 내가 영생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과 화해, 이웃과 재결합, 그리고 자신이 새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을 새사람, 새로운 피조물이라 한다
갱신 운동이 일어날 때마다 제도적 교회와 마찰이 있었다. 종교개혁 당시 개혁자들과 로마교회와 독일의 국가 교회가 그러했고 19세기에 미국 감리교회 내에 일어났던 성결 운동도 교회 갱신 운동의 하나로 심한 마찰을 가져왔었다. 제도권의 교회와 갱신운동의 마찰은 항상 새로운 역동적 교회를 만들어 냈다. 교회갱신은 항상 교회 내에서 일어나야 한다. 교회 내의 작은 그룹이 동일한 문제의식을 갖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민저 성경에로 돌아가는 운동을 벌리는 것이다. 모든 발전은 앞으로 나가는 것이지만 교회갱신은 항상 (성경에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공부와 기도가 갱신운동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갱신운동은 소그룹 운동으로부터 출발하게 됨으로 운동원 상호간에 인격적 교제와 사랑 그리고 열심이 중요하다. 이들은 신앙적 공동 목표를 갖고 있기 때문에 무거운 짐을 서로 져야 하는 희생정신이 따라야 한다. 갱신운동은 새로워지기를 추구하기 때문에 분열할 수 있는 위험을 늘 안고 있다. 그러므로 제도적 교회는 갱신운동을 지원하고 격려해야 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프랜시스칸 운동과 제쉬잇운동을 인정하고 심지어 카리스마틱한 기도운동 또는 경건 운동 그룹들을 수용하므로 교회 분열을 막기도 하였다.
갱신운동의 구조는 선교적이어야 한다. 교회가 좀 더 효과적으로 세상에 증인의 사명을 하기 위하여 갱신되어야 한다는 목표의식이 분명해야 한다. 갱신운동에서 선교적 열심이 빠져서는 안될 뿐 아니라 선교하기 위한 갱신 운동이 되도륵 해야 한다. 작은 그룹일수록 도전과 기회 그리고 필요에 응할 수 있는 융통성이 더 많기 때문에 목표의식이 분명치 않을 때 갱신운동의 본분을 상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갱신운동을 하는 이들은 언약의 백성이라는 의식을 분명히 해야한다 제도적 교회가 상실한 선민의식을 다시 회복케 하여 교회에 부여된 사명을 다시 확인시키는 사역을 감당해야하기 때문이다. 갱신운동은 리더쉽 개발과 훈련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교회에 새로운 일꾼을 공급해 주고 받은 성령의 은사를 바르게 활용하므로 교회를 생동력 있게 만들어야 한다.
갱신운동은 말씀 권위와 영적 자유사이에 균형을 찾되 교회의 존재를 인식하면서 말씀과 성령 그리고 교회의 삼각관계를 건전하게 유지케 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성장이 점차 둔화되고 있다는 보고가 있다. 축복 받은 한국 교회에 지난 1994년부터 1996년까지 즉 3년 동안 1%이상 성장한 교단이 하나도 없었다. 무엇이 한국 교회를 이토록 어둡게 했는가? 성장하지 못한 것만 염려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성장을 둔화시킨 원인을 진단하고 겸손히 치료를 받아야 한다. 우리를 치료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이 새로워지기를 소원하기 때문에 이번 세미나도 열리게 된 것이다. 20세기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한 세기를 돌이켜 보면 '갱신 운동의 세기'라 할만큼 여러 영역에서 변혁을 시도하고 있었다.
우선 선교 운동의 변화가 있었다. 20세기 초 에딘버러에서 열린 World Missionary Conference를 시작으로 교회의 선교 운동은 새로운 방향을 찾기 시작했다. Donald McGavran에 의해 재창된 교회 성장 운동이나 Lausanne 세계 복음화 운동은 선교 운동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성경 신학에도 변혁의 바람은 불어왔다. 기독교 2천년 전통 신학에 도전하여 Karl Barth, Gerhard von Rad, Rudolf Bultmann과 같은 이들이 성경 해석에서 새로운 시도를 함으로 성경의 권위가 흔들리기도 했다. 따라서 잘못된 성경관을 바로잡으려는 새로운 복음주의 신학 운동이 일어났다. 1910년 에딘버러 대회를 통해 에큐메니칼 운동이 꽃을 피워 1948년에는 World Council of Churches를 구성케 되었고 교회 연합 운동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게 되면서 흩어졌던 개신교 교회들의 일치 문제가 다시 대두되었다.
신 오순절 운동(the Neo-Pentecostal or Charismatic Movement)은 오순절 사건의 계속성을 강조하면서 기성 교회에 성령의 권능과 은사 문제로 도전해 왔다. 복음주의 교회들의 사회적 무관심을 일깨워 준 자유 주의자들의 사회 정의 운동은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해 주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상실한 교회 모습을 회복하고 새롭게 하기 위해 개혁(reform) 이라는 말과 부흥(revival) 이라는 말이 교회 내에서 편만히 사용되었다. 전자는 하나님의 말씀 권위를 강조하였다면 후자는 성령의 역사를 강조했다. 말씀으로 개혁하고 성령으로 부흥케 하는 운동을 갱신이라는 말로 나타내기도 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도록 계속 갱신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하나님의 교회는 개혁된 교회(Reformed church, Ecclesia reformata)가 아니라 항상 개혁되는 교회(Reformed church, always reforming,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여야 한다. 자기 교회를 위해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가 요17장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에서 바라고 원하길 교회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교회의 본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갱신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바르게 갱신된 교회만이 성장할 것이다. 우리는 교회를 위한 주님의 기도 속에서 7가지 교회의 특성을 찾아 21세기를 향한 한국교회의 방향 설정에 도움을 얻고자 한다.
1. 한국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 : 기쁨(요17:13)
지상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가져야 할 중요한 특징이 있다면 무엇일까? 이 같은 질문이 저에게 몇 년 전에 주어졌다면 아마도 저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교리적 신실성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바른 교리를 알고 가르치는 것에 교회의 생명이 달려 있다는 데는 지금도 제 입장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요17장의 교회를 위한 예수님의 기도 속에서 기쁨을 교회 특징의 출발로 삼고 있음을 발견하면서 우리 교회를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들 대부분이 교회의 일차적 특징을 기쁨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그 같은 생각이 초대 교회 성도들의 정신으로부터 우리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초대 교회 성도들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주님과 더불어 함께 하면서 형제간에 기쁨을 나누는 것이었다. 신약 성경은 기쁨의 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말은 심오한 신학 문제를 논할 때만 사용되는 특수 용어가 아니다. 일반적인 인사말로 사용된 기쁨은 기독교인들만의 전용어는 아니지만 교회에서 자주 사용한 말이다. 예수 탄생시 천사가 목자에게 이르되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2:10)고 했다. 이 말은 분명히 보통 인사말로만 이해될 수 없다. 후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다. 그가 말씀하신 이것은 위대한 약속이었다. 사도 바울도 이 말을 여러 차례 사용하고 있다.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삐하라"(빌4:4)고 했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하여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고 했다. 여기에 나타난 모든 동사는 복수형이다. 개인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고 함께 모인 회중, 즉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말씀한 것이다. 주변 환경이 여의 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초청된 것을 기뻐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공 예배는 기쁨이 넘치는 축제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기뻐하고 있는가? 참으로 모일 때마다 기쁨이 차고 넘치는가? 우리가 종종 고백하고 마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우리의 현실 사이에는 차이가 있음을 시인하자. 우리 주님은 우리의 이 같은 형편을 아시고 교회가 기쁨을 회복하도록 기도하고 계신다.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 이다"(요17:13), 예수는 교회가 기쁨을 필요로 할 뿐 아니라 상실한 기쁨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씀한다.
교회가 주님의 기쁨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다.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 이다", 즉, 기쁨의 근저에는 건전한 교리가 있음을 가르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과 기쁨이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우리는 성경 연구를 통해 알 수 있다.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시19:8)한 다윗의 고백처럼 기쁨은 하나님의 성품과 계명들을 아는데서 얻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받는 하나님의 성품과 계명들에 대한 체험적 지식으로부터 오는 기쁨을 의미한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예수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1:27). 천지와 만물의 대 주제가 되시는 그리스도가 우리 중에 계신다면 그리고 매일 매 순간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보급하시고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교회는 초자연적 기쁨의 비밀을 갖게 될 것이다.
교회가 상실한 기쁨을 회복하려면 하나님과의 교제와 성도간의 교제가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이 두 가지 경우 우리의 모범이 되셨다. 예수는 슬픔의 사람이요 질고를 아는 분이시지만 주님은 '내 기쁨'(요17:I3)을 너희에게 준다고 하셨다. 주님의 기쁨이 무엇일까? 십자가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키는 일에 초점을 맞춘 미래 기쁨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씀한 기쁨은 그보다 훨씬 다른 차원에 있다. 오히려 아버지와 순간순간 만나고 교제하는 기쁨이다. 만일 우리가 그 교제의 실제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그 기쁨이 우리를 지탱해 줄 것이다.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줄기찬 교제를 통해서 기쁨을 얻었듯이 우리도 그 그리스도의 기쁨에 들어갈 수 있다. 더욱이 수평적 차원에서 인간 사이의 교제를 통해 그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여기서 교재( Koinonia )는 단순한 사귐( fellowship )이 아니고 참여(participation)를 말한다. 그리스도와 교제함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듯 이웃과 교제를 통해 형제의 삶에 참여하게 된다.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는 것과 서로 함께 성도간에 교제하는 것은 항상 함께 간다. "우리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우리가 이 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요일1:3,4). 그러므로 우리에게 기쁨이 없다면 하나님과도 이웃과도 교.제가 끊어졌다는 말이 된다. 다른 형제와 교제가 없으면 하나님과의 교제도 온전치 못한 것이다. 우리 교회가 기쁨을 회복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거룩한 삶이다.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육신적인 것에서 찾을 것이 아니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 얻어진 하나님의 평강이 있어야 참된 기쁨의 나라를 얻게 된다.
우리 교회는 죄로 인해 절망, 좌절, 공포와 죽음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기쁨, 하나님과 이웃과 교제하는 기쁨, 의로운 기쁨을 체현하고 감사하는 교회가 되어 민족에게 기쁨을 주고 희망이 되도록 하자.
2. 한국 교회가 지켜야 할 것: 거룩『요17:14-17)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의 거룩한 특성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다. 거룩함이 없이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할 것이다(히12:14). 하나님께서 교회를 악에 빠지지 않도록 보전시켜 달라고 주님은 기도하셨다(요17:15-16). 거룩한 사람이란 어떤 수준의 선에 도달한 사람이라기 보다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께로 따로 구별된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어떤 특별한 계층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다 쓰여지는 말이다.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이 성별 하신 성도들은 부르심을 받아 교회를 이룬다. (롬1:7, 고전1:2)
출애굽기 40장에서 모세는 장막 중 제단과 물두멍을 거룩하게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돌을 어떻게 거룩하게 할 수 있을까? 돌을 의로워지게 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을 하나님 위해 따로 구별하라는 말씀이다. 요한복음17:19에서 예수는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 이다"라고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이미 의로우신 분이시다. 그러나 자신을 거룩하게 하신다는 말씀은 특별한 사명 즉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구별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거룩한 자로 구별되었으나 세상 속에 있는 교회는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어느 시대나 어느 교단을 막론하고 교회의 옛 지혜는 성경의 지혜였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하나님 말씀 앞에 서 있고 영적으로 자기 무지를 고백했다.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심지어 성경의 지혜마저도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가져야 할 지혜의 영역에 세속주의가 침투해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의 지혜보다 인간의 지혜를 갖고 교회를 치리 하려는 이들이 있다. 정말 보잘 것 없는 또 다른 권위가 하나님 말씀 권위의 자리를 차지하려 하고 있다. 오늘날 교회간에 권위를 내세우는 근거는 대개 자기 교회 내에 속한 신자의 머리 숫자를 말하고 있다. 다수결 원칙을 주장하는 민주주의 가치관이 교회 내에서도 51%만 얻어내면 그것으로 권위를 삼으려 한다. 하나님의 지혜를 버린 교회는 이 세상에서도 그 영향력을 상실한다. 교회가 우리의 삶에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맛 잃은 소금이 아닌가?
우리가 세속 주의를 만나는 것은 세상 지혜의 영역에서 뿐 아니라 소위 신학의 영역에서도 접한다. 모든 종교는 공생하기 위해 서로 비방하거나 공격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신사도를 앞세워 종교 다원주의 심지어는 혼합주의까지 거침없이 외치는 신학 아닌 신학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믿는 이들은 편협하고 고루한 자로 밀어 불이고 '탈 기독교'를 외치는 급진주의자들이 기독교 지성인을 가장하고 나타났다. 기독교회가 전통적으로 사용해 오던 용어들이 다른 내용으로 이해되는 것도 또 다른 면의 세속화라 할 것이다. 가령 죄, 구원, 믿음, 선교의 .개념이 성경이 가르친 것과는 다르게 사용되고 있다. 그 결과 신학의 주 관심이 바뀌고 있다. 세상의 관심사인 굶주림, 인종차별, 저개발 국가들의 인권 문제, 생태학, 에너지 위기, 핵 문제, 노인 문제, 알코올 증독 등 오늘날 신문에서 읽을 수 있는 제 문제들이 교회의 일차적 관심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물론 이 같은 것들이 우리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같은 것들이 교회의 일차적 관심이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이런 문제를 최우선 순위로 삼을 경우 세상 사람들이 비웃음을 보낼 것이다. 교회가 특별한 능력도 없이 그 같은 문제에 참견(?)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정말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뒤로 미루게 될 것이 뻔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교회 내 급진주의자들이 시대 정신을 오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하는 모든 일은 기도와 복음의 능력으로 해야 한다. 말씀과 기도로 성령께서 우리를 치료하시고 악에서 벗어나게 하신다. 그러나 교회가 이 능력을 무시하거나 외면한다면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발에 밟히게 될 것이다. 그 비웃는 이들이 사용하는 방식은 정치와 돈이기 때문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교회의 거룩성은 하나님의 진리, 말씀 진리로만 지켜진다. 말씀이 희미해질 때 교회는 언제나 세속화된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교회가 바로 세속 교회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지혜와 성경 신학과 하나님 중심의 사상과 주님이 맡겨 주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한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뒤를 졸졸 따라 가고 있다. 교회가 세상을 이기기 보다 세상이 교회를 이끌어 가고 있다. 우리 사회에 만연되고 있는 물질주의가 세속적 가치관을 형성할 때 교회는 즉시 불필요한 경비들을 대폭 삭감하여야 한다. 교회가 땅에 보물을 쌓아는 것은 개인이 땅에 보물을 쌓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더욱 불행한 것은 예배 의식의 세속화다. 많은 교회가 예배의식을 보다 효과 있게 만들려고 실험을 하고 있다. 미국의 어느 교단 청년 모임에서 예배 인도자는 이렇게 말했다. "예배 의식이란 나를 내 이웃과 연결시키는 깃으로서 나로 하여금 좋은 느낌을 가지게 하고 동일성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라 했다. 재즈 음악을 하면서 예배드리는 뉴욕의 어느 교회는 TV 중계를 통해 "우리가 예배하는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느끼도록 도와주는데 있다"고 했다.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 어떠하든 간에 성경이 가르친 예배는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변덕스러운 세상을 따라 예배까지도 세속화시킨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오늘날 교회가 정작 관심을 가져야 할 것들을 잊고 있다. 타락한 자들의 상태에 무관심하고,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과 다른 성도들의 필요에 무관심했다. 교회 내에 지도력 결핍에도 무관심하다. 할 일은 많다. 그러나 목회자가 이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전념해야 할 목회자를 돕기 위해 교회에는 은사를 받은 이들이 각 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 성도들이 교회 일에 냉담하거나 훈련받은 일꾼이 부족한 교회는 계속 침체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교회가 거룩을 지킴으로 세속화되지 않도록 모든 성도는 먼저 자신을 성별 시키므로 참된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한다.
3. 한국 교회가 선포해야 할 것 : 진리(요17:17)
지금까지 우리가 지적한 교회의 특성인 기쁨이나 거룩은 모두가 하나님의 진리와 연관이 있다. 하나님의 딸씀 진리를 얼마나 알고 실천하느냐에 따라 기쁨도 거룩도 회복되고 지켜진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라고 주님은 기도하셨다. 진리가 무엇이냐고 예수 앞에서 묻던 빌라도의 질문은 오늘날까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질문이다. 진리는 거짓이 아닌 사실 또는 부족함이 없는 완전을 말한다고 하지만 실은 진리란 인격이다. 예수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이 진리의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없는 교회나 개인은 진리를 소유할 수 없다. 진리 되신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달라서 하나의 추상 명사가 아니라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인격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죽게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도 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게도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도 신비하게 역사 하신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길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 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17:11) 어떻게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이름에 무슨 힘이 있는 것인가?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에게 계시되었고, 아들은 사도들에게 아버지 하나님을 나타내었다(요17:6), 예수 그리스도는 지상 사역을 통해 이 계시를 이루셨다(12절). 그러나 지금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떠나시면서 아버지께 기도하시기를 그들에게 계시된 아버지의 이름에 충성할 수 있도록 그들을 지켜 달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하면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에 그들이 계속 충성할 수 있도록 하나 되게 해 달라는 것이다. '진리는 예수께서 자기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중 최대 관심사 였다. 예수는 계시를 말씀했고 자기 백성들이 이 나타난 계시에 충실해 줄 것을 원하셨다. 그 일을 위해 제자들의 연합도 강조하신다. 하나님은 자기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라 하셨으니(답전3:15) 진리 안에서 교회가 연합함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를 계속 선포해야 한다.
복음서에 나타난 진리 속에는 케리그마(Kerygma)와 디다케(Didache)가 있다 하나님의 진리는 선포될 뿐 아니라 교육을 통해 가르쳐져야 찬다.
교회 교육의 목표는 1) 거듭난 인간, 2) 성숙한 신자, 3)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천국 시민 양성에 있다. 교육 방법론이 아무리 훌륭하고 교육 자료가 최첨단 소재라 해도 바른 목표가 없고, 목표에 이르지 못하는 교육은 지양되어야 한다. 또한 피교육자에게만 목표 달성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교육자 자신이 먼저 교육 목표에 이른 사람이 되어야 진정한 교육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이 같은 고상한 교육 목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고 그가 주시는 능력 안에서만 가능하다. 성경을 영감된 하나님 말씀으로 믿고 그 말씀 진리를 생활과 신앙의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성경 권위가 여론 권위에 그 자리를 빼앗기고 있다. 성경이 가르쳤기 때문에 그러해야 한다기보다 사람들의 과반수가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행한다고 한다. 우리가 진리의 사람이 되려면 책(성경)으로부터 말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진리이시고 우리는 거짓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은 세상이 우선적으로 하는 것과는 달라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우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사회적인 것들에 무관심 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 말씀 진리가 요구하는 것들을 우선해야 한다.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까? 단순한 어떤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유의 사람을 먼저 만드는 것이다. 진리 되신 그리스도께 완전 헌신을 우선 할 수 있다면 교회의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강조할 것을 바로 강조해야 한다. 일시적인 것보다 영원한 진리를 강조해야 한다. 오늘날 스포츠나 TV가 종교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이와 같은 도전에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응전하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 사람들과 같이 유행 따라 흘러 떠내려가고 있는가? 주일 성수 문제는 오늘의 교회가 당면한 가장 심각한 과제가 되고 있다. 어린아이들은 주일에 교회보다는 학원으로 어른들은 예배보다는 오락을 찾고 있지 않은가. 비록 세상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다 해도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하는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이 요청된다. 우리가 갖고 있는 돈과 다른 자원을 주님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구별해야 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 교육을 통해 전달되고 시행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권위, 신학, 우선권, 삶의 스타일 등에 대해 말했다. 이런 것들이 세상적인 것과 구별되어야 한다. 하나님 위해 성별된 교회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다. 그러나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밖에 버려져 사람들 발에 밟힐 뿐이다. 성령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부르심을 받은 성도라면 우리는 진실로 그리스도의 사람답게 진리 안에서 살아야 한다. 빛은 어둠을 비춰야 한다. 진리의 빛을 밝게 비추는 우리 교회가 되도록 하자.
4. 한국 교회가 긴급히 해야 할 것 : 선교 (요17:18-19)
천국에 가면 눈물도 한숨도 근심도 질병도 죽음도 없는데 왜 속히 천국 가려 하지 않고 성도들은 이 세상에 머물기를 원하는 것일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기쁨을 얻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성화 되어 가고 성경을 상고하면서 진리를 발견하는 것으로 사명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바깥 세상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 즉 복음 전하는 사명도 감당해야 한다.
선교(Mission)라는 말은 라틴어 동사 Mitto, Mittere, Misi, Missum에서 왔는데 보낸다, 파송한다는 뜻이 있다. 예수께서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요17:18)라고 하셨다. 예수의 기도 속에 세상이라는 말이 15회나 나타난다. 성도와 세상의 관계 즉 불신자 또는 세속 사회와의 관계를 말해 준다. 세상 중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6절) 그러나 그들은 세상을 떠나간 자들이 아니요(15절) 아직도 세상에 사는 이들이다(11절). 하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으므로(14절) 세상은 그들을 미워했고(14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다(18절). 교회와 세상은 이처럼 특별한 관계를 갖고 있다. 그 속에 있으나 속하지는 않고, 세상의 미움을 받으나 그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다. 세상을 등지거나 타협하는 것은 교회가 할 태도는 아니다. 그렇게 될 경우 선교는 불가능해진다. 우리는 세상 안에 살고 있으나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존재다. 아버지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저들을 .거룩케 해 달라고 주님은 기도하셨다(요17:17). 여기서 거룩은 성화보다는 특별 사명을 위해 구별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께서 우리 위해 자신을 성별 하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신 것처럼 저들도 세상 선교를 위해 성별 함을 받게 해 달라고 하신 것이다. 세상을 섬기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구별시켜 달라는 것이다. 물론 예수가 보내심 받은 것과 우리가 보냄을 받는 것이 같을 수는 없다. 주님은 성육신을 통해 속죄 주로 오셨지만 우리는 육을 입고 오신 하나님도 아니고 죄인을 대신하여 죽는 메시아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처럼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것은, 선교를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선교는 우리가 자원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보냄을 받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서 선교는 수행된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중심에 계시므로 모든 특권, 안전, 영광을 포기하고 겸손히 그의 종으로서 세상이 미워해도 참고 그들과 복음을 나누고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다.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논하면서 우리는 간과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리스도의 유일성, 타종교와의 관계, 선교의 성경적 근거, 선교 전략, 교회 성장, 문화 문제, 상황 문제, 전도와 사회적 책임 문제, 교회 갱신 문제 등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중 그리스도가 선교의 자료요 방법이며 핵심이고 근본이며 목표가 되신다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 선교를 회복시키고 폭 넓은 비전을 위하여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선교의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찾자. 성육신 사건은 인류 역사 속에서 문화적 동일성의 가장 훌륭한 예가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 나라의 안전과 영화에 머물러 있지 않고 죄와 슬픔이 있는 인간 세상에 오신 것이다. 자기를 비우시고 섬기기 위한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복종하신 그리스도는 우리를 친구로 형제로 삼으시고 죄인 중 하나같이 되었다. 그는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이 되셨다. 우리의 선교는 수직 관계를 세워 놓고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에게, 지식인이 무식자에게 보태 주고 나눠주는 식민주의적 선교 자세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교의 대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불하자. 오늘날 교회가 고난의 값을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를 고난의 주로 보았고 예수님 자신도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한다고 하셨으며 사도 바울도 자기가 받는 환난이 도리어 너희에게 영광이라고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말씀했다(엡3:13). 고난과 죽음은 선교 열매를 위한 필수 조건이다. 누가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십자가 고난의 대가를 지불할 수 있을까? 거짓된 번영의 신학으로 한국 교회는 고난의 진가를 상실한지 오래 되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어리석은 도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우리는 복음을 위한 고난과 희생의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자. 선교 명령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찾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리스도의 선교 대명령 이전에 있었다는 것은 중요하다. 부활하신 주님이 모든 권세를 잡으시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주의 주가 되셨다.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살리심으로 그리스도가 모든 것의 주가 되신 것이다. 부활은 다시 사는 것이다. 선교를 통해 생명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문화를 개량하고 삶의 질을 높여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부활의 첫 열매 되신 그리스도처럼 살리는 역사를 하나님이 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선교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승천에서 찾자. 그리스도가 승천하심으로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그리고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에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빌2:9-11). 결국 선교의 최종 목표는 그리스도를 높임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한다. 선교의 힘은 그리스도가 보내신 성령이시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1:8)하셨다. 성령의 권능은 복음 전도를 위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가장 위대한 전도자시다. 사랑과 거룩을 깨닫게 하시는 성령 없이는 전도는 불가능하다. 전도자를 세우시고 말씀을 주시고 들을 자를 준비시키고 죄를 고백케 하시고 감긴 눈을 뜨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믿음을 주사 그리스도의 몸 되신 교회의 회원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그리스도를 증거케 하시는 이가 성령이시다. 이 모든 것 중 성령의 주 사역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시고 증거 하시는 것이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 세상과 싸우는 영적 전쟁에서 이길 수도 없고 말씀과 기도와 같은 영적 무기도 사용할 수도 없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는 우리의 선교는 무익하다.
선교를 긴급하게 해야 함은 그리스도가 재림하시기 때문이다. 승천하길 예수는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다 예수의 재림 시기는 아버지 하나님만이 아시는 알려진 비밀로 남아 있다. 그 때와 시를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 구원하는 전도를 더욱 시급히 서둘러야 한다.
5. 한국 교회가 지향해야 할 것 : 연합(요17: 20-23)
예수는 자기를 육체대로 보지 못했지만 자기를 믿게 될 오는 세대들을 위해서도 기도했다(요17:20). 이것은 모든 세대, 모든 장소 심지어 우리를 포함시킨 기도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은 우리의 부모나 목사 또는 전도인, 교사나 친구의 전도로 된 것이지만 그들의 증거는 모두가 이차적인 rjtemfd;다. 본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목격한 이들은 사도들이었다. 사도 시데 이후 모든 성도는 사도들의 메시지를 통해 예수를 믿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원하신 것은 1)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21절), 2) 우리 안에 있게 하사(21절), 3)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23절). 주님은 자기 백성들이 사도와 함께 연합하기를 기도하셨다.(VV. 20-21) 그리고 자기 백성들이 아버지와 아들과 연합할 수 있기를 기도했다(V. 23).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인의 연합을 위해 하신 기도는 성도간의 언합이라기 보다는 사도와의 연합이요(공동 진리)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과의 연합(공동생활)이다. 가견적 교회 연합을 배제한 것이 아니지만 그같은 연합은 진리와 삶 속에서 이루어짐을 보이셨다. 교회 연합에서 사도적 신앙고백과 성령을 통한 거룩한 삶이 무엇보다도 전제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후 381년 콘스탄틴 회의 이후 교회는 니케야 신조와 칼세톤 신조 등에서 계속 강조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교회', '거룩한 교회', '사도적 교회', '공교회'를 믿는 것이었다.
교회 연합을 말할 때 우리는 종종 가견적 교회의 구조적 연합을 말하기도 하지만, 불가견적 교회의 영적 연합을 말하는 경우도 있다. 지역 교회로서의 연합이나 우주적 교회로서의 연합이나 교회가 제도적 연합만을 강조할 경우, 그리고 형제 됨만을 주장하므로 유기체로서의 연합만을 말할 때 그 위험성은 양쪽에 다 있음을 알아야 한다. 교회가 연합해야 한다는 것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나 그 강조 점에 따라 연합의 성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구조적 연합(Organizational Unity)을 말하면서 한국 교회가 하나로 연합하여 힘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정치, 경El-,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힘을 갖기 위해 연합해야 된다면 그것은 아주 잘못된 발상이다. 중세기의 로마 카톨릭 교회가 힘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교만해져서 사회를 암흑으로 끌 간 역사를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힘을 가진 교회는 타락한다는 역사의 교훈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가 구조적 연합을 이루어 바벨탑을 쌓겠다면 차라리 그런 연합은 없느니만 못할 것이다. 따라서 교권 주의를 위한 구조적 연합은 위험하다. 한국 교회가 중세기 로마 교황청과 같이 하나의 세력으로 나타난다면 이는 개혁주의 정신에도 위배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친 것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바라는 연합은 힘을 쓰기 위한 구조적 연합이 아니다. 자기들과 비슷한 모양이나 틀을 가진 사람끼리 연합하려는 것을 닮은꼴 연합(Conformity Unity)이라 말한다. 자기와 꼭 닮지 아니하면 연합할 수도, 연합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믿는 대상이 같은 것처럼 그를 섬기는 방법도 같아야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들만이 구원의 자녀요 하나님을 가장 잘 이해하고 예배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각각 다른 문화와 역사적 배경, 그리고 성품을 주셨다.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아야만 한다는 주장은 잘못된 요구요 죄를 범하는 것이다.
구조적 연합을 강조하는 이들은 주로 진보적 성향의 교회들이고 자기와 닮은 이들만 연합하겠다는 이들은 보수 성향이 짙은 교회들이 많다. 주님은 이 같은 교회 연합을 원하신 것이 아니다. 참으로 수수께끼 같은 일이다. 그토록 사랑과 하나 되기를 외치는 이들이 날이 갈수록 더 나뉘어지고 그렇게도 하나 되기를 기도하고 관용하기를 힘쓴다는 이들이 뭉치기가 쉬운 것 같은데 일단 나누이면 합치기가 어렵고 보수 성향이 짙을수록 분열은 연쇄반응처럼 일어나고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물론 보수교회는 순수 논쟁을 하기 때문에 조금만 티가 보여도 갈라설 수밖에 없는 숙명을 안고 있지만 그렇다고 순수 논쟁을 하는 교회는 모두 분열만 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주님이 원하시는 참된 연합은 영적 연합(Spiritual Unity)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적으로 하나가 되면 외형적 연합도 가능해 질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교회 연합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문제를 풀어야 할 것이다. 1)교리적 견해 혹은 입장의 차이, 2) 교회 체제 및 치리에 대한 차이, 3) 무분별한 선교사들의 세력 확장, 4)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인식의 차이, 5) 지도자들의 지도력 문제 등 많은 원인들이 있을 것이다. 사실 이 같은 것들은 진리를 단편적으로 왜곡하는 인간의 무지로 빚어질 수도 있고 자기 안일주의, 교권 주의, 자파 확장주의, 이권주의와 같은 것들에 의해 눈이 가리워져 스스로 주님의 몸을 찢는 죄를 짓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 교회가 하나 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초기 선교사들과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놀라운 착상과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장로 교회가 하나가 되지 못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1) 일제의 탄압, 2) 해방 후 '신사 참배'에 대한 신앙적 이견, 3) 자유주의 신학의 물결, 4) 연합 운동에 대한 견해의 차이, 5) 사회 참여 즉 당면 문제에 대한 의견 차이, 6) 지방색 문제 등이 그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어떻게 할까?
우선 하나님의 교회, 즉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된 새로운 피조물임을 기억해야 한다 형제끼리 다투는 것을 좋아하는 부모는 아무도 없다. 마귀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 되는 것이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귀 좋아할 다툼을 계속해야 하나? 우리는 또한 지체가 됨으로 서로 나누고, 섬기고, 참여하는 교제의 삶을 이루어야 한다. 지체는 기능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상호 의존적이며, 종속적이다. 예수님을 머리로 삼은 몸된 교회는 서로 지체로서 성기는 일을 하므로 하나의 몸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같은 연합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가능하다.
한국 교회 연합과 일치를 위해 어디서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야 할지 막막하기만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실제적 제안을 해 본다
1) 교단간 강단의 교류 시행,
2) 인정된 신학교간에 교수 및 학생 교류,
3) 학점 인정을 하고 15학점(또는 20학점) 이상 이수한 학생에게는 자파 교단 목사 고시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 부여,
4) 신학 대학교(Theological University)를 창설하여 같은 캠퍼스 내에 각기 다른 건물을 가지되 연합 도서관 및 연합 채플 등을 시도,
5) 같은 지역에 있는 교회 또는 교인간에 연합 사업 추진 (특히 성찬 예식을 통한 한 몸됨을 확인),
6) 총회 시 상호 우정의 사절단을 파송하여 인사를 하되 중요 안건 설명,
7) 한국 교회 일치를 방해하고 있는 국제 기구와의 연대 활동을 잠정적으로 보류를 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
8) 신학적 입장 차이를 사실대로 인정하고 공통분모를 찾아 상대방의 신학과 신앙 자세에 부정적인 태도를 지양하고, 상호 신뢰와 보충을 해주는 자세로 임할 것,
9) 목회자 재교육을 연합적으로 시도,
10) 선교사들 파송 시 함께 협력(Partnership),
11) 국내 전도 전략의 공동 수립(개척 교회 난립 지양),
12) 대 정부 및 사회 문제에 공동 대체해야 한다.
이같은 실제적 연합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 연합을 먼저 이룰 때 가능하다. 한국 교회의 연합을 위한 바른 제시를 우리 교단이 할 수 있도록 기도하자.
6. 한국 교회가 보여 줘야 할 것 : 사랑(요17:23)
"아버지께서‥‥‥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분량이나 방식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사랑하신 것과 같다는 뜻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정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시듯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있는가? 그것은 어떤 추상적 증거가 아니라 갈보리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를 통해 역사적으로 그 사랑을 확증해 주셨다(요3:16).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우리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롬5:8). 이 확실한 사랑은 우리가 매달릴 수 있는 못과 같다. 실로 우리는 실존적으로 정서적으로 그 사랑에 매달릴 수가 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흔들린다 해도 그 사랑은 결코 빠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시듯 우리를 사랑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편벽 되지 않게 사랑하라는 말씀도 된다. 우리는 편견과 어떤 자기 시각을 갖고 사랑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무한한 존재가 아니므로 끝없는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우리는 완전하지도 못하므로 완전하게 사랑할 수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면 사랑하지 못할 만한 사람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랑한다는 의미에서 편벽 되지 않게 사랑할 수가 있다.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종 또는 섬기는 자(diakonoi)로 표현했다. 하나님을 섬기고(고후6:4) 그리스도를 섬기고(요12:26), 다른 형제를 섬기는 자(막10:43)로 설명한다. 특히 멍에를 함께 한 자들에게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다. 종교 개혁자들은 믿음이 없으면 구원이 없다고 가르쳤지만 성경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진실로 사랑하라,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가르 친다(요1서4:7). 예수는 자기 백성에게 섬기는 도리를 모범으로 가르치셨다. 예수께서 종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의 봉사는 가능하고 또한 마땅히 해야 한다. 이 같은 봉사는 선택 과목이 아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로 가능케 했다. 사랑과 섬김의 십자가는 새 삶의 특성이 되었다. 사도는 딤전3:8-12에서 섬기는 자(집사)의 자격을 높은 도덕성을 갖고 설명한다. 특히 사도행전 6장에서 구제하는 일과 손님 대접하는 일이 그들에게 중요한 사명으로 주어졌다. 집사를 세운 후에도 물론 사도들은 가난한 자,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일에 힘을 썼다(행11:30).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구제하고 봉사하는 일에 대한 책임이 있다. 이와 같은 자비 봉사는 교회적으로 해야 할 중요한 사명이다. "누가 강도 만난 이의 이웃인가?" 라는 질문에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했다. 예수께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다(눅10:37). 사마리아인처럼 버림받은 예수가 우리의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되시듯 주님의 교회는 다른 형제의 친구가 되고 이웃이 되어야 한다
한국 교회가 사는 길은 교회 전체 예산의 60% 이상을 형제와 이웃을 위해 밖으로 보내는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가 될 때 하나님의 축복이 더 크게 임할 줄 믿는다. 아직 미치지 못한 교회는 매년 점진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국경, 종족, 사회 계급, 이데올로기, 지방색 등 모든 인위적 장벽과 편견을 뛰어넘어 그리스도의 사랑과 섬기는 모범을 우리가 실천할 때 우리 교회가 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다시 부흥의 불길이 일어날 것이다. 교회마다 섬김위원회를 전보다 더 활성화하도록 해야 한다.
교회에서 사랑이 빠진다면 무엇이 남을 것인가? 앞에서 우리는 교회의 특성을 다섯 가지로 설명했지만 그것들에서 사랑이 빠진다면 무엇이 되겠는가?
기쁨에서 사랑이 빠진다면 거기에 남는 것은 가식과 위선이다. 사랑이 없는 기쁨은 기껏해야 의무의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기쁨에는 반드시 사랑이 전제되어야 참된 기쁨이 된다.
거룩에서 사랑이 빠지면 자기 의만 남는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 가장 거룩하다고 생각한 바리새인들은 남을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입장과 기준을 세운 채 저주와 정죄를 일삼고 마침내는 메시아까지 죽였다.
진리에서 사랑이 빠지면 죽은 정통만 남는다. 교리에는 고혈압증 환자가 되고 생활에는 빈혈증 환자가 된 이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가? 아무리 진리를 외쳐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도 감동하지 않는다.
선교에서 사랑이 빠지면 그 선교는 제국주의적 침략 행위로 전락한다. 자기 문화를 심거나 자파 확장이나 하는 식민주의 정책의 일환은 될지 모르나 참된 선교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연합에서 사랑이 빠지면 군림하고 교권을 남용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사랑 없는 일치는 연합하여 독점이나 하려는 잔인한 결과를 가져오게 하고 교회를 혼란에 빠지게 한다. 모든 사랑의 근원은 하나님 아버지시다. 이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된 것이다. 이 계시된 사랑을 성령으로 깨닫고 실천케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풍성한 교회로 우리 교회가 이 사랑을 보여줄 수 있도록 기도하자.
7. 한국 교회가 강조해야 할 것 : 지도자(요17:24)
훌륭한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결국 주님이 우리에게 최종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주님을 닮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꾼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요17:24). 한국 교회의 미래는 안디옥교회처렁 훌륭한 일꾼을 얼마나 많이 가질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귀하고 능력 있는 일꾼을 찾기 전에 현재 주님의 교회를 위해 앞장서서 일하고 있는 일꾼들을 아끼고 밀어 주어야 한다. 또한 주님이 크게 쓰실 유능한 일꾼을 발굴하고 그를 육성하고 보호하며 협력하고 기도해 줌으로 하나님의 일을 더욱 크게 이루도록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부터 하나님 교회를 위하여 주님 쓰시기에 합당한 일꾼이 되어야 한다.
초대 교회 지도자들을 우리의 모델로 삼도록 하자.
1) 그들은 신실하고 헌신적이며 책임감이 투철한 인물들이다.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다와 사마리아 땅으로 흩어지니라"(행8:1).
2) 그들은 무사기한 희생정신을 가진 이들이다(행15). 베드로의 리더 쉽은 야고보에게 넘겨졌고, 안디옥 교회에 바울을 소개한 바나바는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바울로 하여금 리더쉽을 가지게 하였다.
3) 그들은 자신을 교회와 일치시켰다. 순교자 스데반은 자기는 죽지만 끝까지 교회가 해야 할 용서와 사랑을 보여 주었다. 예수께서도 자신과 교회를 일치시켰다(행9).
4) 그들은 대 웅변가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웅변은 그리스도를 경험한 데서 생긴 것으로 언행이 일치된 웅변을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준 복음 내용을 전하는 고로 권위가 있었으며 능력이 있었다.
5) 그들은 연합 정신이 투철했다(행15). 그리고 도덕적으로 고상한 이들이다(행5:1-12, 11: 24). 성령 안에서 하나 되는 기쁨도 맛보았다. 동시에 위선자는 저주를 받았다(행5:1-11).
6) 그들은 복음에 대한 절대 신념을 갖고 있었다: 성경적 신앙 원리를 적용하여 복음 확장에 진력을 다했다.
7) 그들은 국제적인 협력자 정신을 가친 이들이다(행6:5). 예루살렐 교회 지도자중 적어도 1인은 외국인이었고 안디옥 교회 5명의 지도자중 2명은 흑인이었다.
8) 그들은 환상을 보고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로 하여금 그 비전을 따르게 하였다.
9)그들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칭찬 듣고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이다.
10) 분별력을 가진 자들이었다(Priority, 행3:1-10).
a) 재물보다 순종을, b) 양보다 질을, c) 구제보다 권능을, d) 임시적인 봉사보다 영원한 봉사를, e) 일을 시작하기 전 기도를, f) 이론적인 것보다 역사적 사실을 우선했다.
11) 그들은 타협하지 않고 핍박 중에도 자기 동일성(Identity)을 지킨다(행6:8-15).
12) 그들은 독선, 아집, 편견을 버리고 주님과 그의 말씀에만 순종(피조물의 모든 것은 철저히 상대화함)하므로 하나님이 뜻을 찾는 것에 최우선하고 사명감에 투철하다.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와 피나는 수련을 통해 만들어진 이상적 지도자로 믿음의 비젼을 가지고 사랑의 수고를 할 수 있는 그리고 소망의 인내와 섬기는 종으로서 사명에 찬 사람들이다. 그들의 행동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삶의 방법을 찾았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모든 것의 동기로 삼았다. 삼위 일체 하나님의 주되심과 그의 절대 주권을 믿으며 따라서 그의 소유권, 회수권, 감사권, 사용권을 인정하고 절대 권위이길 하나님과 그의 말씀(성경)에 절대 복종하며 그의 청지기로서 죽도록 충성하는 지도자들이었다. 한국 교회에 이 같은 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될 수 있도록 지도자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갖고 기도하고 양육하는 교회가 되자. 한국 교회는 책임 있는 교회로서 21세기를 목전에 두고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만일 교회의 참 모습을 상실한 것이 있다면 속히 회복해야 할 것이고 굽어진 부분은 곧게 하며 썩은 것은 도려내고 바른 것은 더 크고 확실하게 키워 나가야 한다.
교회역사상 최초의 부흥운동과 선교운동은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오순절 사건에서 출발한다. 복음이 확장되고 핍박 중에서도 교회가 부흥한 사도행전의 역사는 항상 말씀과 기도가 살아있을 때 일어났고 교회가 새로워짐으로 복음이 폭발적으로 퍼져나갔다. 이와 같은 사례들은 지난 2천년동안 교회역사 속에서 반복하여 일어났다. 이처럼 교회는 계속적으로 갱신되어야 생명력이 유지되고 동력 적이고 효과적인 선교를 할 수 있다. 우리는 세계선교의 대명을 이루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교회가 새로워져 내적으로 영성이 회복되고 그 열매로 복음을 확장시켜야 한다.
한국교회 갱신연구원에서는 교회가 지향해야할 갱신규범을 언약서로 제시하고 있다.
1. 우리는 교회갱신이 목회자 갱신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믿고 하나님 앞에서 철저한 회개를 통한 자기 갱신에 힘쓴다.
2. 우리는 교회갱신이 성경 말씀에로 돌아갈 때 이루어지는 것임을 믿고 신구약 성경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강해한다.
3. 우리는 교회갱신이 신행일치의 삶을 구체적으로 구현할 때, 확실해 짐을 믿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범적인 삶을 실천한다.
4. 우리는 교회 갱신이 복음화된 통일 조국 성취의 지름길임을 믿고 사도적 교회처럼 한국 교회 일치를 위한 화평을 도모한다.
5. 우리는 복음의 사도로서 땅에 묻힌 한 알의 밀알처럼 힘을 가진 교회가 아닌 섬기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새로운 가치 창조와 기독교 문화창달에 앞장선다.
6. 우리는 신·구약 성경이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성경에 배치되는 모든 사상과 신앙을 배격한다.
7. 우리는 결코 기도보다 앞서지 않고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목회를 한다.
이와 같은 언약서는 예언자 정신 사도정신 그리고 종교개혁 정신을 따라 한국교회갱신과 세계 복음화를 위한 시대적 사명감을 갖고 선언한다고 한다. 교회갱신은 곧 세계 복음화를 위한 첩경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