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금남 장편소설 : 불 속의 꽃으로 피다.〈8〉

[봉명암]

불 속의 꽃으로 피다〈8〉

1장 여울목

지욱이 바랑을 벗어 칼 보따리 옆에 놓았다.
“법명이 무엇인가?”
늙은 스님이 물었다.
“조가 이옵고 법명은 지욱입니다.”
“지혜로울 지, 빛날 욱?”
“예.”
“거 법명 한 번 기가 막히네. 역시 그 다와. 속가 이름은?”
지욱은 늙은 스님이 그 라고 지목한 사람이 춘성스님이라고 생각하며,
“조 팔이라고 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조팔?”
되뇌던 스님이 허허허 하고 웃었다.
“거 이름 한 번 멋지구료.”
“예?”
“조팔이?”
“성은 조가이옵고 이름은 팔입니다.”
“하하하 난 또…….”
그렇게 말하고 스님은 입가의 웃음기를 거두었다.
“어디 조 씨인가?”
스님이 물었다.
“함안 조 가입니다.”
“팔은?”
“여덟 팔 자입니다.”
“그럼 형제가 많았던가 보군?”
“아닙니다.”
스님이 지욱을 쳐다보았다. 지욱은 대답하기도 뭐하고 해서 머뭇거렸다. 어머니가 죽기 전에 해주던 말. 지욱을 낳던 날이었다고 했다. 노름과 주색에 미친 아버지는 그날도 들어오지 않았다. 지욱의 아버지는 노름판에서 팔땡을 잡았다. 돈을 잃어 기회를 노리고 있는데 어떻게 팔자 두 장이 손에 들어온 것이다. 손을 떨며 두 장의 화투장을 쪼아보니 팔땡이었다.
‘왔구나!’
돈이 엄청 실렸다.

화투를 까고 바닥의 돈을 끌어 모으는데 집주인 여자가 문을 열고는 댁의 아내가 아들을 낳았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돈을 싸들고 돌아온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을 팔이라 지었다. 팔땡을 가져다준 행운의 아이라는 뜻에서였다.
다 듣고 난 늙은 스님이, “그래서 팔이가 되었군! 으하하” 하고 웃었다.
생긴 모습으로 보아선 농담 짓거리나 할 것 같지 않은데 늙은 스님이 갑자기 그러자 정말 넉살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학교 다닐 때 애들에게 이름 때문에 놀림도 많이 당했다.
뒤늦게 주지 스님이 앉았다. 늙은 스님이 다시 한 번 지욱을 훑어보고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어쩔거나 여기는 근본을 팔 곳이 없는데.”
지욱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 중얼거리던 그가 못 들었느냐는 표정으로 지욱을 마주 쳐다보았다.

“그렇다고 부처님에게 근본을 팔수도 없고 말이여.”
어이가 없어 원주 스님을 흘끗 보았더니 원주 스님이 얼굴을 숙이며 풋 하고 웃는 것 같았다. 그 웃음을 보자 이상한 오기가 솟구쳤다. 갑자기 눈에 열기가 모이면서 무슨 말이든 내뱉어야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생각나는 대로 내뱉어 버렸다.
“그래도 한 번 팔아 볼랍니다.”

늙은 스님이 이번에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잠시 후에야 물었다.
“여기서?”
“네. 여기서요.”
그의 대답에 이번에는 늙은 스님이 풋 하고 웃었다. 그러다 그는 근근이 입가의 웃음기를 지우고 중얼거렸다.
“부처에게 근본을 팔겠다? 거 재밋네. 그대 근본을 살 부처가 있을란지 모르것지만 그럼 한 번 팔아보던지.”
그것으로 대화는 끝나는가 했는데 늙은 스님의 시선이 칼 보따리에 멎었다. 망월사에 갔을 때 춘성스님이 그게 뭐냐고 물을 때처럼 늙은 스님이 물었다.
“옷 보따리는 아닌 것 같고 작대기를 싸들고 다닐 리는 없고……. 뭔가 그게?”
“칼입니다.”
지욱이 대답했다.
“칼?”
늙은 스님의 그림자가 약간 흔들리는 것 같았다.

지욱은 춘성스님에게 대답하듯이 대답했다.
늙은 스님이 그때의 춘성스님처럼 한 번 보자고 했다. 지욱이 보따리를 풀어 보이자 춘성스님처럼 칼을 일별하고 난 늙은 스님이 가만히 눈을 감고 있다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지욱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이 칼과 글에 대해서 아는 게 있는가?”
늙은 스님의 물음에 지욱은 아는 대로 대답했다.
아버지에게 팔땡을 안겨주었던 아이는 어린나이에 노름과 주색에 미친 아버지의 매질에 견디지 못한 어머니를 잃었다. 그제야 알았다. 왜 아버지가 어머니를 그렇게 증오했는지. 어머니는 죽기 전 지금 지욱이 끼고 다니는 칼 보따리를 물러주면서 이런 말을 했다.
“그거이 잘 간직혀라. 너의 친할머니가 고이 간직하시던 것이다. 그러다 네 아버지에게 물려졌고 네 아버지가 내게 준 것이니라. 너의 친할머니 이름은 용애, 너의 친아비 이름은 범정이다. 너의 할미 본시 이름은 분이였는데 일제에 신음하는 민심을 살피려 임금님께서 나왔다가 머문 후로 총애를 입었다 하여 용애라고 불렀다는 말이 있다. 왜 용애라고 불리웠는지는 모르겠다. 무서운 사실은 너의 아비가 태어나던 해에 그 고을 아이들은 모두 죽었다는 것이다. 아직 그 누구도 모른다. 왜 그 해에 낳은 고을 아이들이 죽어갔는지. 다행히 네 아비는 살아 나를 만나 너를 낳았다만 네가 인연이 있어 의문을 풀 수 있으려는지 어쩌려는지…….”
“그럼 칼과 글에 그 답이 있다는 말인가요?”
지욱이 어린마음에도 이상하여 묻자 어머니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나도 모른다. 네 아비가 누군가의 모함으로 모습을 감추면서 급하게 내게 남긴 것이니까. 네가 태어나면 주라고 하더구나.”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정확이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할머니는 임금의 총애를 받았고 자신은 팔땡을 잡은 아버지의 자식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이미 그 전에 어머니는 다른 남정네를 알고 있었고 그 씨앗을 밴 채로 팔땡을 잡은 아버지에게 시집을 갔다는 말이었다. 그럼 친아버지는 누군가의 모함을 받고 어디로 모습을 감추었단 말인가.

결국 어머니는 그 대답을 하지 못하고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어머니가 죽고 난 뒤 칼 밑에 있던 종이를 펼쳐볼 때마다 지욱은 지독한 의혹에 사로잡혔다. 그가 한문 공부에 미친 것도 어쩌면 그래서였는지 몰랐다. 알 수 없는 글들. 휘갈긴 글씨체. 다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은 임금이 내린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이런 글귀가 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짐(朕)의 마음 전하길 없도다. 이 나라 주군(主君)으로서 검으로 맹세하노니 내 사랑하는 여인이여. <계속>

[환희]

장편소설을 짧게 읽을 수가 있어 참 좋네요. 계속해서 끝까지 올려주시길. 삽화도 훌륭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