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이 동학농민항쟁의 불씨에 기름을 부었다. 당대의 세도가문인 풍양 조씨의 일원이었던 그는 1892년 말 고부군수로 부임한 이래 온갖 방법으로 백성을 못살게 굴었다. 면세(免稅)를 약속했던 황무지 개간에 대해 세금을 징수하는가 하면 갖가지 명목으로 재물을 빼앗았다. 태인현감을 지낸 자기 아버지의 공덕비를 세운다고 돈을 거둬 원성을 사기도 했다.
특히 말썽이 된 것은 동진강에 축조된 만석보(萬石洑) 사용료의 강제 추가 징수였다. 무거운 수세(水稅)로 농민의 불만이 높던 차에 조병갑은 농민을 동원하여 멀쩡한 보(洑) 위에 새로운 보를 쌓고는 가혹한 수세를 거뒀던 것이다. 참을 수 없게 된 고부 농민들은 동학 접주(接主) 전봉준(全琫準)에게 하소연했다. 중농(中農)에 서당 훈장이었던 그는 1893년 11월 농민들과 함께 고부군아(郡衙)를 찾아가 진정했지만 쫓겨나고 말았다. 결국 전봉준은 동지들을 규합하여 ‘사발통문’을 만들고 봉기를 결의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