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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은혜동산 JESUS - KOREA 원문보기 글쓴이: 영.분별자
문화예술비평/음악 2014/03/23 15:35 Posted by 김삼
사진출처: http://wcs4.blogspot.kr/2013_12_01_archive.html
비 온 뒤 햇빛처럼
김삼
원명: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 (The Peace that Jesus Gives)
원곡 참조 사이트: hymnary.org/hymn/GTS1921/page/149
영문 가사 scissurl.com/5/0i9
작가(작시/작곡): 핼더 릴레너스(Haldor Lillenas)
가사 (번역: 김삼)
비 온 뒤 햇빛처럼 고통 후 안식처럼
되찾은 희망처럼, 복된 예수의 평화
(후렴)
오 주 예수의 평화 항상 머물러 있네
하늘 음악 같으며 유리 바다 같아라
주님 주신 참 평화 주님 주신 참 평화
저 맑은 이슬 같이 밝아온 동녘 같이
정다운 우정 같이 참된 예수의 평화
깊푸른 강물 같이 끊임 없이 흐르네
한 줄기 노래 같네 크신 예수의 평화
이 작품은 장로교 합동/고려측이 만든 옛 새찬송가(1962)에 실렸던 곡(497장)이다. 인터넽에 떠 있는 반주 붙은 가락으로 되어 있는 데 비해, 한국 찬송가의 곡은 4부 합창으로 편곡돼 있다. 또 가락도 일부가 서로 다르다. 반주 가락이 원곡인지, 본디 합창 편곡이 있었던 것인지, 한국에서 편곡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솔직히 가사와의 조화는 합창 쪽이 훨씬 더 낫다는 느낌이다.
이 곡의 영문 가사는 >>에서도 볼 수 있다.
scisssurl.com/5/0i9
이 곡의 연주 사례로 찾은 것은 다음 (앨토 독창) 동영상 뿐인데, 배경이 좀 그렇다.
youtu.be/dG0fOJ1BMT8
흔히 한 두 개의 두드러진 독특한 화음의 바탕 위에 걸린 비화성음이 한 개의 악곡을 인상짓는 중요한 요소가 될 때가 있다.
이 곡이 수십 년 간 필자의 뇌리에서 오래도록 좀체 잊혀지지 않는 이유도 둘째 마디 첫 부분에 걸쳐진 (변화화음이자) 감7화음(F#dim7)과 그 위의 화음밖의 음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둘째 줄의 둘째 마디에서도 같은 음이 나타난다. 작곡자가 왜 초두부터 이런 화음을 쓰게 됐을까? 비와 햇빛이라는 상반된 요소의 대비를 염두에 두다보니 은연 중 감성적인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작시/작곡자가 동일인이어서 가사와 가락 중 어느 쪽이 먼저였는지, 아니면 흔한 경우처럼 가사/가락이 동시진행되어 나아갔는지는 모르지만, 가사를 가락으로 살리는 면에서는 부분적으로 좀 실패작(?)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전체는 매우 아름답지만.
왜 이런 말을 하냐면, 흔히 영어권 비평가들이 핸델의 '메시아'의 가사와 노래가 어떤 부분에서 영 어울리지 않는 점을 지적하면서 작곡가가 독일 출신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묘하게도 릴레나스 자신 바탕이 외국(노르웨이) 출신이다. 릴레나스의 스타일은 한 마디로 프롤리핔 즉 다작형이다. 그래선지 이 작품의 가사의 시운과 음의 높낮이의 조화 면에서 별로 탁월한 편은 아니다. 일부는 awkward하다. 종합적으로 본다면 이 찬송가는 대중화에 그다지 성공한 작품이 아니며 오래 남아 잘 불리는 편도 아니다. (그러나 성가대용 합창곡으로서는 적격이다.)
그런데도 바로 그런 면과 이 곡의 불규칙한 면에서 릴레나스 곡 중에서는 드물게 아름답고도 창의적이라고 감연히 단언한다.
그 요인 중 하나는 우선 주 예수님의 평화라는 주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그 토핔을 묘사하다보니 순차진행적이거나, 부드럽게 다독이듯 또는 달래는(soothing) 듯한 부분(첫줄 세,넷째 마디와 후렴 셋째 마디)들, 중간중간의 도약적인 부분들이 모두 매우 절묘하게 잘 조화되어 있다.
전반적인 6박자 음악 속에서 2분음과 4분음의 묶음이 흘러가듯 평화를 노래하고 있는 가운데 가사 때문에 둘째 줄 중간부터 돌출하는 2개의 4분음 묶음이 불규칙 마디 분위기를 형성하는 변화 때문이다. 이 불규칙적 변화는 회중에게는 하나의 부담스러운 건덕지이지만, 가사와 조화되는 음악의 미로서는 흠잡을 데가 없다.
번역과 음감
그 다음 논하고 싶은 것은 영시와 가락의 조화 자체가 불안하기 때문에 번역에 유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후렴 앞 부분 가사의 7.7.7.7.의 음절/가사 때문에 강박을 살리려면 으레 번역도 [4+3]의 흐름/리듬을 타면 되리라 생각하겠지만, 그렇게 할 경우 더더욱 awkward한 결과가 온다. 예컨대 옛 '새찬송가'의 오리지널 번역에서 '비온 후[에] 햇빛과'라고 토씨(조사) '-에'에 가장 높은 음의 강세가 왔기 때문이다. 주된 이유는 약박에 최고음이 왔기 때문이다.
물론 원시(링크 참조)의 'sunshine'에서 뒷 부분인 -shine이 마디의 끝음인 높은 음에 떨어졌으니 "영시 자체가 그렇지 않냐?"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대로, 이것은 햇빛이 빛나듯 고음에서 환해진 느낌은 들지만 그다지 좋은 테크는 아니다.
필자는 이것을 그래서 영어 음절 및 한글 번역을 4+3의 리듬이 아닌 '3+4'로 도치시켰다. 높은 음에 토씨가 아닌 어간인 '햇-'이 오게 하기 위해서다. 아마도 4+3의 (상투적인) 흐름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반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사와 음의 결합 면에서는 3+4의 음감이 훨씬 낫다!
다음 두 가지를 각각 가락과 비교해 보자.
비 온 후에 햇빛과
비 온 뒤 햇빛처럼
최고음은 각각 '-에'와 '햇-'에 떨어졌다. 한 번 불러 보라. 어느 쪽이 나은가? 듣는 청중의 느낌도 후자가 더 낫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필자는 가사 2, 3절도 모두 같은 방식으로 옮겨 처리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다. 4+3조 리듬을 3+4조로 바꿔 놓고 나니까 나머지 같은 가사(like ..)의 균형상 나머지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통 후에 안식과
다시 찾은 소망 (여기서도 최고음에 토씨 '은'이 떨어짐)
4.3조로 된 이 옛 번역가사를..
고통 후 안식처럼
되찾은 희망처럼(최고음에 어간 '희'가 떨어짐)
이렇게 3.4로 고쳤다. 이처럼 상투적인 가사의 조 흐름을 변화시키면 뜻밖에 좋은 번역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가락의 리듬보다 가사와의 조화를 더 중시하는 것은 하나의 창의적이고 narrative한 해석기법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어진다.
되찾은 희망처럼에 이어지는 가사와 호흡의 처리 문제이다. 원시는 보다시피 갑자기 둘째 마디 끝의 두 4분음이 (가사의) 그 다음 연의 시작으로 돼 있어 못갖춘마디처럼 되면서 이음표(페르마타)까지 길게, 한 프레이즈로 잇다 보면 뒤에서 숨이 차질 수 있다. 그럴 경우, 성악적으로 잘 훈련된 성가대/합창단이 아니면, 알아서 적당히 쉴 만한 데서 쉴 수 밖에 없다.
이를 의식해선지(?) 옛 '새찬송가'에서는 다른 마디에서처럼 둘째 줄 둘째 마디 끝에다 숨표를 붙여 놓았다. 하지만 되도록 원시의 가닥은 존중해 줘야 한다. 더욱이 후렴부터 본격적으로 나오는 못갖춘마디 형의 2개 4분음표 군은 바로 이 부분에서 '배태'되었기 때문에 필히 끊어야 전체적 균형상 올바르다. 그러다 보니 원시에는 없는 두 글자 형용사-참된/복된/크신 등을 넣어야 했다. 물론 큰 마이너스는 아니다.
여기서는 원곡 둘째 줄 끝의 이음표나 후렴 처음에 이어지는 이음표중 하나를 생략하는 것이 현대적으로 적합하다. 물론 음악적 효과를 위해 둘 다 끄는 것은 해석자의 자유이겠다. 후렴의 첫 이음표는 순전히 영문가사 'Oh'의 감탄효과를 위해서다. 끌지 않고 금방 나아가버리면 어색하고 효과가 적기 때문이다.
이 곡은 전반적으로 베이스 음군이 높아서(최저음: 낮은 Bb) "둥둥 뜬" 기분이다. 따라서 D조로 내리는 것이 안정감에 있어 더 낫다.
연주를 위한 귀띔
가사내용상 '대비'를 살리려면 밋밋하기보다 처음부터 극적인 효과를 노린다. 즉 '비 온 뒤 햇빛처럼'과 '되찾은 희망처럼'을 크레센도로 키워 '햇빛'과 '희망'이 작은 절정을 이루게 한다. 처음부터의 크레센도가 부담이 된다면, '비 온 뒤 햇빛처럼'은 약간 가볍게, '되찾은 희망처럼'은 더 강하게 처리한다.
아무튼 정말 비 온 뒤의 햇빛처럼, 되찾은 소망처럼 환하고 찬연한 느낌이 들 만 하게 강렬히 표현돼야 좋다. 그렇지 않고 밋밋하게 넘어간다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
'고통 후 안식처럼'은 조용히 처리하되 '안식'은 두 글자는 가볍고도 분명하게 앸센트를 준다. 후렴 전 '복된 예수의 평화'는 물론 고조된 채 좍~ 펼쳐 주는 듯 처리하면서, 속도를 충분히 늦춰 준다(요즘 많이 모자라는 여유이다).
후렴 첫 글자 '오'를 늘인다면, 그 다음은 금방 원속도(인 템포)로 하기보다 약간 여유 있게, 이내 속도를 키워 제 속도를 되찾는다.
후렴 첫줄은 큰 변화 없이 대강 넘어가되 가락 모습 그대로 찰랑거리듯, 다독거리듯 가볍게 하면 더 좋다고 본다. 이 부분에서 남성 파트는 크기보다 조용해야 좋다. 여성 가락이 낮은 편인 데 베이스의 가사와 진행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째 줄의 가락에서 작가 릴레너스는 다시 앞뒤의 극적인 대비효과를 노렸다. [ 음율을 맞추느라 다소 달리 옮겼지만, 원시는 "한 줄기 시편 가락처럼, 기쁘고 영원한 평온처럼"으로 되어 있다. ]
앞은 밝고 환하고 강하게(곡 전체에서 세 번째의 옥타브-음정 도약이다), 뒤는 약간 애조를 띠듯 깊고 그윽하게. 그러므로 전자는 고조시켜 강세를 이루고 후자는 음량을 줄이면서 생각하는 듯 처리한다.
마지막 줄은 다시 한 번 크레센도를 조용히 마무리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곡의 연주적 생명은 도약부분을 강하게 또는 짧은 크레센도로 처리하는 것이다.
부록
릴레너스의 생애
핼더 릴레너스(Haldor Lillenas 1885-1959)는 미국 현대 찬송가의 왕이라고 할 만큼 수많은 기독교 곡을 썼다. 작품 수가 약 4,000 곡이나 된다. 한국의 중노년 세대의 귀에 익은 것만 해도 퍽 많다. 그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곡이 후렴에서 남성 파트의 익사이팅한 "한량 없는 주의 크신 은혜 바다보다 넓고 깊도다"라는 멜로디가 나오는 웅장한 합창곡 "놀라운 주의 은혜"( http://scissurl.com/5/0mf )이다.
릴레너스는 특히 웨즐리/성결교 계열의 송라이터로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로 평가된다. 그는 나자렡(나사렛)성결교회 목사였고, 작가, 음악전도자, 시인, 음악출판업자, 찬송가 다작가로 명성을 떨쳤다. 또 1931년 나자렛 성결교 최초의 찬송가인 '영광스런 복음성가들'의 편집출판인이기도 했다. 1941년 그는 올리벳 나자렡 대학에서 명예음악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본래 1885년 노르웨이 베르겐 부근 스토르드 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넓은 땅을 팔아 그가 두 살이던 1886년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초기엔 사웉다코타 콜턴의 잔디풀짚으로 지은 집에 살다가 오리건주 애스토리아를 거쳐 미네소타 로즈빌에 거주하지만 릴레너스 자신은 공부를 위해 오리건에 돌아가 화학공장에 취업하기도 했다.
릴레너스의 신앙배경은 스칸디나비아 출신답게 루터교인이었으나, 어린 시절 동네(오리건 애스토리아)의 한 할머니에게 영어를 배우면서 예수님 이야기를 듣던 1906년 무렵 그 할머니가 활약하던 성결교 피니엘(브니엘)선교회 부흥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죽은 얼마 후 애스토리아로 돌아갔을 적 어느 날 저녁, 거리의 한 예배장소에서 들려오는 찬송가 가사 '나도 거기 있겠다고 어머니께 말해 주오'를 들은 것을 계기로, 계속 노래와 간증에 감동을 받고서 삶을 바쳐 기독교에 투신하기로 결단, "그 해에 구원을 받았고 그 3주 후 성결함을 받았다"고 한다. 스물 한 살 때였다.
1908년 그는 포틀랜드제일나자렛교회(A.O. 헨드릭스 목사) 정식 교인이 되었고 통신성경공부코스를 통해 사역자가 될 길을 닦는다. 또 구세군 보컬그룹 '전마차 군단'과 함께 활동하면서 부흥집회에서 노래하기도 했다.
그는 1909년 교회의 헨드릭스 담임목사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디츠퍼시픽성경대학에서 사역자 공부를 계속하다가 그 해 말 한 지역교회의 음악감독으로 들어가 송라이팅과 설교사역을 하기 시작하면서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리릭음악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했다.
그는 디츠퍼시픽 대학 재학 당시 목회자(훗날 지방회 감독)의 딸인 버트 메이 윌슨 양과 만나 함께 음악사역을 하다가 이듬해인 1910년 결혼을 했다. 그후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로 와서 피니얼 미션을 떠맡아 사역하다가 1년 후 릴레너스가 롬폭나자렡교회 목회자가 됐다. 1912년 부부는 나자렡 교회 장로로 안수를 받는다.
그즈음 릴레너스는 웨일즈 출신의 가수/작곡가였던 대니얼 프로티로와 아돌프 로젠케버에게서 3년간 작곡과 화성학을 배웠다. 그 후 릴레너스는 포모나 레드랜즈, 일리노이 오번, 텍서스 피니얼, 인디애나폴리스 등에서 계속 목회를 하다가 목회일선에서 물러나 음악출판에 투신했을 때도 아내 버타는 계속 목회 일을 했다.
그는 또 10년간 음악전도자로 아내와 함께 순회부흥음악집회 사역을 하면서 뉴저지 웨즐리언감리교회도 방문했는데 당시 그 교회 목사는 훗날 미국의 저명한 베이스바리톤이 되는 조지 베벌리 쉐이(참고 글: /// )의 아버지였다.
릴레너스 부부는 1938년 미주리 밀러 카운티의 2평방km의 광대한 시골 땅에 '멜로디 레인'이라는 저택을 짓고 살면서 동네 교회를 돕다가 1945년 아내의 암으로 사별한 뒤 롤라 델과 재혼을 하고 계속 살다가 1955년 패서디너로 옮겨와 살게 된다.
사족이겠으나, 릴레너스의 생애에 연루된 한 가지 기이한 사실이 있다.
1955년 그가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과거 미국 이민 초기 시절 만났던 팔레스타인의 그리스 정교도 '시르한'(영어 '설핸')의 가정을 돕기 시작했다. 시르한 가족은 릴레너스의 도움으로 1957년 1월 캘리포니아 패서디너에 와서 그의 집에 3개월 머무른 뒤 그가 마련해준 임차 주택에 살게 된다. 그러나 그 얼마 후 가장인 비샤라는 아내 메리와 두 아들을 버려두고 요르단으로 떠나버렸다. 그는 평소 두 아들을 구타로 체벌하는 엄한 사람이었다.
릴레너스가 당초 예루샬렘의 시르한 집을 방문할 당시, 2살 아기였던 시르한 비샤라 시르한(SBS)은 훗날 미국에서 크리스천으로 이 교단 저 교단을 전전했는데, 어쩐 일인지 (좐 F. 케네디 대통령의 아우인) 로버트 F. 케네디의 암살혐의자로 기소/선고 당하여, 현재까지 종신형을 살고 있다니, 기구한 일이다. [ 가장 최근의 변호사는 그가 모종의 음모로 "프로그램 화"되어 범행을 저질렀기에 범행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며 공모자가 있었다고 주장해왔다. 실제로 범행 당시 SBS는 오컬트 비밀집단인 '장미십자단' 단원이었고, 체포된 후 전문가에게 정신감정을 받은 결과 최면에 걸린 상태였다. ]
아무튼 릴레너스는 1959년 8월 18일 세상을 떠나 미주리 캔저스 시티의 포레스트힐 묘원에 묻혔다.
창작경력
릴레너스는 어릴 적부터 작곡을 시작했으나 19살 때 처음으로 작품 출판을 시도했다. 여러 번 출판사에 거절 당하면서 계속 시도 끝에 '주님 나를풀어 주셨네'(He Set Me Free)가 히트작이 되면서 로열티를 제대로 받기 시작했다. 21살 회심 후에는 자신의 신앙과 기쁨을 노래한 찬송가를 많이 쓰기 시작해 수많은 사역자들에게 공급했다. 또 부활절/성탄절 특별음악예배를 위한 칸타타 음악도 썼다.
릴레너스의 특징은 가명을 많이 썼다는 것인데, 여성의 이름인 '버지니어 로즈 골든'이나 '래번 그레이', '리처드 헤인즈웙', 'H. N. 라인즈 목사', '롸벑 휘트모어', '펀 윈터즈' 등이 그것이다. 위의 곡도 '리처드 헤인즈웙'라는 가명으로 발표했다.
그의 대표작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는 1917년 가난하던 시절에 쓰였다. 그와 아내가 일리노이주 올리벳에 작은 집을 지었지만 내부를 꾸밀 돈이 없었다. 피아노도 없어 악기가 절실히 필요했는데, 한 이웃집에서 작은 풍금을 발견해 '5 달러'에 구입했다. 이 악기로 여러 노래를 작곡했는데 그중 하나가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였고 1918년 판권등록을 했다가 1922년에야 비로소 '태버너클 합창성가집'에 수록돼 출판됐는데 그가 받은 금액이 바로 '5 달러'였다!
1924년 그가 인디애나폴리스제일나자렡교회를 목회할 당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붙인 음악출판사인 '릴레너스 퍼벌리슁 컴퍼니(LPC)'를 설립했다. 지분은 100달러 씩이었고, 사장은 E.W. 페티코트 씨였고 매니저는 릴레너스 자신이었다. 사업이 잘 진행되자 1926년 릴레너스는 목회를 접고 출판업에 투신하는 대신 아내가 목회를 계속했다. 4년 후인 1930년엔 출판사를 교단 발행매체인 나자렡퍼블리슁하우스(NPH)에 팔았는데, 조건은 릴레너스 자신이 10년간 (음악발행)매니저로 계속 일하고 재평가한다는 것이었다. 이때까지 총 약 70만권의 찬송가와 노래책을 만들어 팔았다. 당시 1,535개 작품의 저작권도 팔았다.
하지만 65세인 1950년 은퇴하기까지 계속 편집인으로, 은퇴 후에는 NPH의 음악자문위원으로 죽기까지 사역했다.
릴레너스는 시인이기도 했는데 '가난'(1928)이 대표작이다. 또 시집 '낙엽 긁어 모으기와 기타 시편'을 1929년에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