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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강 - 般若品- 3
善知識아 莫聞吾說空하고 便卽着空이니 第一莫着空하라 若空心靜坐인댄 卽着無記空하리라 善知識아 世界虛空이 能含萬物色像이라 日月星宿과 山河大地와 泉原溪澗과 惡人善人과 惡法善法과 天堂地獄과 一切大海와 須彌諸山이 總在空中하니 世人의 性空도 亦復如是하니라
善知識아 自性의 能含萬法이 是大라 萬法이 在諸人性中하니 若見一切人의 惡之與善하야도 盡皆不取不捨하고 亦不染着하야 心如虛空하면 名之爲大로 曰摩詞니라.
善知識아 迷人은 口說하고 智者는 心行이니라 又有迷人이 空心靜坐하야 百無所思하고 自稱爲大라하나니 此一輩人은 不可與語니 爲邪見故니라
善知識아 心量이 廣大하야 徧周法界하나니 用卽了了分明하야 應用에 便知一切라 一切卽一이며 一卽一切여서 去來自由하야 心體無滯일새 卽是般若니라 善知識아 一切般若智가 皆從 自性而生이요 不從外入이니 莫錯用意함이 名爲眞性自用이라 一眞에 一切眞이니라 心量은 大事라 不行小道니 口莫終日說空하라 心中不修此行하면 恰似凡人이 自稱國王이라도 從不可得이니 非吾弟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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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知識(선지식)아→ 여기 와서 “선지식 아” 라고 말 한마디 듣는 것만으로도 아주 복입니다. “선지식 아” 모든 사람을 향해서 육조스님은 “선지식 아”라고 불렀어요. 우리를 보고 부르는 소리예요. 이것 참 육조스님은, 입살이 복살 이라는 말이 있듯이, 가능하면 좋은 말을 써야 돼요. 농담이라도 좋은 말을 쓰는 것이 좋아요.
부정적인 말을 쓰면 끝내 부정적인 입장으로 끝나지, 결과가 좋아지지가 아니해요. 그런 입장에서 보면 참 육조스님이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선지식 아” 라고 이렇게 부르는 것은 정말 좋은 착상 같고 무게가 있고, 모든 인간을 이 이상 더 어떻게 존경하고 이 이상 더 어떻게 긍정적으로 볼 수가 있습니까?
모든 사람을 그냥 무턱대고 오늘 절에 들어온 사람이든지, 아니면 무슨 벼슬아치든지 거기 뭐 도둑놈이 되었든지, 별별 사람들 다 모였거든요 여기에...
그런데 모든 사람들 보고 “선지식 아” 라고 이렇게 불렀다고 하는 사실...
莫聞吾說空(막문오설공)하고 便卽着空(편즉착공)이니→ 내가 공에 대한, 自性眞空(자성진공)이라고 하는 공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는 것을 듣고, 공에 집착하지 말라.
곧 그 자리에서 ‘아 공이 좋은 것 같다’ 하고 공에 집착하지 말라.
불교에서 공 이야기를 할 때, 제일 첫 째 주의 할 것이 뭐라고요?
第一(제일)에 莫着空(막착공)하라→ 제일, 공에 집착하지 않아야 되는 것. 제일 주의해야 할 것이 공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제일 공에 집착하지 말라. 공 이야기하면 공에 집착하기가 좋아요. 아주 좋게 되어 있다고요. 왜냐? 신기하거든요.
왜냐? 세상은 전부 有(유)예요. 有(유)의 세계거든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 있고, 희로애락이 다 있고,
안이비설신의 가 다 있고 그런데 있는 어떤 그 상황 속에서 우리가 평생 살아오다가, 없다는 도리를 들어 보면, 귀가 솔깃하고 기가 막힌 세상이거든요.
無眼耳鼻舌身意(무안이비설신의) 無色聲香味觸法(무색성향미촉법) 無眼界(무안계) 乃至(내지) 無意識界(무의식계) 無無名(무무명) 부처도 없고, 조사도 없고, 나중에 가서는 전부 없다고 하는 것.
공하다고 하는 것. 거기에 그냥 덜컥 목이 걸린다고요. 그러니까 그 공에 집착하지 말라.
若空心靜坐(약공심정좌)인댄→ 만약에 마음을 비워가지고, 마음속에 아무것도 없는 그런 상태로서 마음 텅 비워가지고, 아무 생각도 없이 고요히 앉아 있다면, 그건 뭡니까?
卽着無記空(즉착무기공)이라→ 이 무기공 이라는 낱말 하나 알아놔요. 無記空.
無記空 이라고 하는 것은 글자대로는 기록 할 수 없는 공. 이 말입니다. 기록이 안 되는 공이라는 그런 말인데, 이것은 말하자면 진짜 頑空(완공).
마음속에서 선도 악도 아무것도 일어나지 아니하는 목석같이 되어버린 그런 정신 상태를 무기공 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하거나, 참선을 한다고 한참 매달려 있다 보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멍 하고 뭐 생각도 떠오르지도 않고 그러면서 또 편안하고, 그런 상태.
화두도 아니요 염불도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면서. 뭔가 텅 빈 듯한 그런 느낌.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더러 봤어요. 한참 있다 보니 내가 텅 비어 내가 완전히 없다고 하는 것을 느끼겠더라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이 텅 빈 공간하고 일체가 되더라는 겁니다. 내가 공간이 되버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공부하다가 많이 느끼지요. 그것이 바로 無記空입니다. 空心靜坐(공심정좌)할진댄 무기공에 집착하게 된다. 무기공에 집착하리라.
善知識(선지식)아 世界虛空(세계허공)이 能含萬物色像(능함만물색상)이라→ 이 세상에 있는 허공이, (이것은 하나의 예 이지요.) 능히 만물과 색상을 전부 포함하고 있다. 전부 포함하고 있지요.
이 허공 속에 산도 있고 강도 있고 바다도 있고, 자동차도 왔다 갔다 하고 그러지요.
日月星宿(일월성숙)→ 해나 달이나 온갖 별들. 그리고 山河大地(산하대지)→ 산도 강도 대지도.
泉原溪澗(천원계간)→ 계울 물. 넓은 물 강이나 이런 것 까지...
惡人善人(악인선인) 惡法善法(악법선법) 天堂地獄(천당지옥) 一切大海(일체대해)→ 일체 큰 바다. 저기 태평양바다.
須彌諸山(수미제산)→ 온갖 큰 산들. 저기 히말라야 산을 위시해서 온갖 산들. 이것이 뭐 예요?
總在空中(총재공중)라→ 이 공간 속에 있잖아요?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이 지구도 공간 속에 있고, 해와 달도 공간 속에 있고...
해 · 달 · 별 · 다 이야기했으니까 뭐 그 속에 다 포함 됐지요. 그것은 제일 큰 것에서부터 작은 것에 이르기 까지, 전부가 이 허공 속에 있다는 것은 비유이고, 세계 허공이 이렇게 하고 있듯이,
世人(세인)의 性空(성공)도→ 우리들. 우리들 마음자리가 공한 것. 우리들 성품 자리가 공한 그것도
亦復如是(역부여시)하니라→ 또한 다시 이와 같으니라. 우리 마음도 텅 비어서, 우리 마음속에 선악 뭐 좋고 나쁜 것. 시비선악. 온갖 것이 우리 마음속에서 왔다 갔다 하지요. 텅 빈 공간 속에서 해가 돌아가고, 달이 돌아가고, 금성 토성 목성이 돌아가고, 온갖 수많은 별들이 그 속에서 돌아가고 비행기도 날아가고, 총을 쏘면 총알도 날아가고, 공간속에서. 허공 속에서 그렇게 그런 것이 가능하거든요.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마음속에도 性空(성공). 이라는 것은 마음이 공 한자리. 그 겁니다.
성품이 공 한자리도 또한 다시 그와 같다.
우리 마음속에 온갖 것이 뭐 아침에 눈 뜨자마자 지금까지 우리들 마음속에 지나간 사실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보고 들은 것은 도대체 얼마나 많으며, 내 눈앞으로 내 귀로 지나간 소리와 사물들. 그리고 사람들. 그냥 눈 감고 있으면서 또 내 머리 속으로 지나간 사건들. 사물들. 이런 것들이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지만 우리가 마음이 텅 비어있고 공하기 때문에 그런 모든 금방 이 사람 지나가고, 금방 저 사람 지나가고, 좋은 것 지나가고 나쁜 것 지나가고, 기분 나쁜 것 지나가고 기분 좋은 것 지나가고, 뭐 배고팠던 것도 지나가고 배불렀던 것도 지나가고, 온갖 것이 다 지나가지만, 우리의 마음자리는 본래 텅 비어있기 때문에, 거기에 아무것도 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善知識(선지식)아 自性(자성)이 能含萬法(능함만법)이 是大(시대)라→ 우리들 자성. 제가 그랬지요?
자성과 法性(법성). 또는 佛性(불성). 그런 말을 했지요? “자성”이라고 하면 개개의 성품을 뜻하는 것이고, “법성”하면 전체를. 모든 것을 하나로 뭉뚱그려서 법성 이라고 그러고, 부처의 입장이라고 보면 “불성” 그렇게 보는 건데, 말은 달라도 궁극에 가서는 하나입니다.
자성이 만법을 포함하고 있는 이것이 큰 것이다. 그래서 摩詞般若波羅密(마하반야바라밀)할 때 마하라는 의미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萬法(만법)이 在諸人性中(재제인성중)하니→ 온갖 일들이. 온갖 사실들이. 만법이라고 하는 것. 온갖 사실들이 전부 우리 마음속에 다 있지요.
그러니까 한없이 지나가잖아요. 전부가 우리 마음속에... 좋은 것도 우리 마음속에 있고 나쁜 것도 마음속에 있고, 세상의 변천에 따라서 새로운 것이 생기면 새로운 사건이 생기고, 새로운 물질이 생기고, 거기에 어떤 새로운 현상이 생기고, 전부가 우리의 마음속에서 그렇게 지나가는 것이지요.
若見一切人(약견일체인)이 惡之與善(악지여선)하여도→ 若見. 만약에 모든 사람들이 악한 사람 선한 사람을 보더라도,
盡皆不取不捨(진개불취불사)하고→ 모두 다 취하지도 아니하고 버리지도 아니 해. 그냥 그렇게 지나갈 뿐 이예요. 그렇다고 버리는 것도 아니고요.
그렇다고 눈에 들어온다고 취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지요.
亦不染着(역불염착)하여→ 또 거기에 물드는 것도 아니 예요. 물드는 것도 아니라고요. 그렇게 빨리 물들기로 하며는, 아주 좋은 점도 많겠지요. 안 좋은 점도 많겠지만, 좋은 점도 많아요. 물이 그렇게 보는 족족 들기로 한다면, 경전 쭉~ 한번 보면 물이 다 들어 버리면 얼마나 좋겠어요? 난 그랬으면 제일 좋겠어요.
경전 한번 쫙 봐버리면 물 싹 들어 버리면, 그 다음 책 필요 없잖아요.
물. 그렇게 쉽게 드는 것이 아니라고요. 그리고 어쩌다가 자기하고 과거에 지은 인연이 있는 어떤 사실들에 대해서는, 그런 사람이나 그런 사실들이나 일이나, 이런데 대해서는 좀 남보다 빨리 물드는 경우가 있지요. 그것만 그렇지 다른 것은 그렇게 물이 안 들거든요.
그러니 우리가 불법을 그렇게. 그렇게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그렇게 많이 해도 물이 잘 안 들어 가지고, 크게 영험이 없는 모양입니다.
亦不染着(역불염착)하여→ 또한 염착하지 아니해서
心如虛空(심여허공)하면→ 마음이 허공과 같이 될 것 같으면,
名之爲大(명지위대)라→ 그것이 큰 것이다 이겁니다.
曰摩詞(왈마하)니라.→ 이걸 가로대 마하라고 한다.
불교에서 “크다.” “마하.”이러면 그냥 바로 다른 것 생각할 필요 없어요. “아, 내 마음자리” 내 마음자리 이것은 한계가 없어요.
그 전에는 그런 말이. ‘넓으면 뭐 같이 넓고, 좁을 때는 무슨 바늘 끝 하나 용납 못한다.’ 그런 표현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여기 육조스님께서 크다고 하는, 우리 마음의 큰 입장을 아주 확실하게 표현했습니다.
善知識(선지식)아 迷人(미인)은 口說(구설)하고→ 미혹한 사람. 뭘 모르는 사람은, 마음자리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입으로만 자꾸 말해, 그러나
智者(지자)는 心行(심행)이요→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이 그렇게 돼요. 심행. 행할 行자가 뭐 별것 아니에요. 마음이 그렇게 되는 거예요.
입으로 말하고, 그렇게 안 되면 소용이 없지요. 그래도 혹시나 마음이 그렇게 될까 싶어서 입으로 자꾸 말해 보는 것이지요.
又有迷人(우유미인)이 空心靜坐(공심정좌)하야→ 또 어떤 미혹한 사람. 마음이 캄캄한 사람. 불교에서 미인 이라하면 좋은 뜻이 아니에요. 아주 안 좋은 뜻이에요. 迷人(미인). 迷人이 목석처럼 텅 빈 마음으로 고요히 앉아 있어요. 목석처럼 그렇게 앉아있는 것이지요.
百無所思(백무소사)라→ 여기 백무라고 하는 것은 백 가지도 생각하는 바가 없다 이겁니다. 온갖 것 그 어떤 것도, 생각하는 바가 없고, 그러면서
自稱爲大(자칭위대)라하나니→ 자칭 “위대”라. “아 나는 크다.” 이 말입니다. “나는 위대하다.” “나는 훌륭하다.” 그러니까 마음이 목석처럼 돼가지고 “아무 망상이 없다.”
이것만 가지고는 제일 그냥 공부가 잘 된 사람으로 생각한다. 이겁니다. 自稱爲大라고하나니,
此一輩人(차일배인)은→ 이 한 무리의 사람들은
不可與語(불가여어)→ 가히 더불어서 말할 상대가 못돼요. 그 사람하고 상대 못돼요. 아 그걸 가지고 목석처럼 마음속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
차라리 망상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낫지. 망상이 왔다 갔다 하고, 번뇌가 왔다 갔다 하는 그것이 훨씬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낫지, 목석처럼 아무 생각이 없고 空心靜坐(공심정좌). 百無所思(백무소사). 아무것도 생각하는 바가 없으면 그거는 참 문제다 이겁니다.
떫은 감이 어떻지요? 달지요. 아주 달지요. 익기 전에 아주 떫은 감이 상당히 달다고요. 덜 익었을 때 떫지 아니한 것은 달지도 않아요. 별로 달지도 않아요.
덜 떫은 것은 덜 달아요. 처음부터 떫지도 않은 것은 달지도 않아요. 그것이 회향 이예요.
회향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고, 불교는 바로 그 점입니다.
우리가 번뇌를 싫어하면 못써요. 번뇌 그것이 그대로 깨달음이거든요. 그래서
“흙이 많으면 부처가 크다.”이래요.
“佛像(불상)이 크다.”
“흙이 많으면 불상이 크다.” 옛날에 흙으로 불상을 많이 만들었거든요. 그렇듯이 번뇌가 강하고 번뇌가 많은 사람. 그 번뇌가 막 부글부글 끓는 사람들이, 이 사람들이 한 생각 돌이키면 지혜도 출중하지요.
지혜가 출중하다고요. 그 번뇌. 그것이 지혜가 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에요.
떫은맛이 단 맛이 되는 것입니다. 떫은맛이 없으면 단 맛이 없어요. 처음부터 空心(공심).
텅 빈. 뭐 떫지도 않고 그러면 결국은 단맛도 없어요.
그 공심정좌해서 백무소사하면, 그것은 제일 문제다 이겁니다. 이런, 한 무리의 사람은 더불어 말할 것이 못돼요. 왜냐?
爲邪見故(위사견고)니라→ 위사. 삿된 소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니라.
불교는 목석처럼 가만히 있고 아무 생각 없고, 아무 욕심도 없고 조용하고, 또 그래서 소극적이고 뭐든지 그저 양보만 하고, 물러서기만 하는 그것이 불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善知識(선지식)아 心量(심량)이 廣大(광대)해서→ 사람의 마음이 넓고 커가지고서,
徧周法界(변주법계)하나니→ 변주법계. 법계에 두루 하다. 불교에서 제일 큰 것을 법계. 이래요. 세계라는 말보다도 훨씬 더 범위가 큽니다. 삼천대천세계. 그것을 크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삼천대천세계를 크다고 하는데,
이 法界라고 하는 표현은 삼천대천세계보다도 훨씬 더 커요. 삼천대천세계는 한계가 있어요.
한 태양계를, 한 일월을
1000개를 모았을 때→ 소천세계.
소천세계가 1000개가 됐을 때→ 중천세계.
중천세계가 1000개가 됐을 때→ 대천세계.
그 대천세계가 3000개가 됐을 때를 그것을→ 삼천대천세계 그런다고요. 이것은 뭐 요즘 계산기로서 계산하면 금방 나오지요. 태양이 몇 개인지...
불교에서는 그렇게 해가지고 대충 잡아서 “100억 태양계”그래요. “100억 일월”그래 버려요.
간단하게 그래버린다고요. 그것이 100억 개가 되는지는 모르겠어요. 그것은 뭐 계산하면 금방 나오겠지요. 100억까진 안 될 겁니다마는 어쨌든 비슷해요 숫자가... 태양계 100억개를 삼천대천세계. 그러면 대충 “100억 일월”이렇게 표현하는데, 이 세계라고 하는 말은 “삼천대천세계”라 하더라도 한계가 있는 것이고, 法界라고 하는 것은 한계가 없어요.
徧周法界(변주법계) 했는데 법계는 무한한. 부처님의 지혜로도 못 미칠 그 멀고먼, 드넓은 공간까지를 전부. 부처님이 아는 세계든, 부처님이 모르는 세계든, 천체 망원경의 안에 들어오는 세계든, 망원경밖에 있는 세계든, 예를 들어서 지름1Km짜리 망원경을 만들었다 합시다. 1Km짜리 망원경이면 길이는 얼마나 될까요?
망원경지름이 1Km면 길이는 대충 망원경 만들 때 비율을 따져보면 아마 나올 겁니다.
1Km면 한 100Km쯤 되겠지요? 10배는 보통 돼야 되니까요. 10배도 넘지요. 보통 망원경 생긴 모양가지고 보면... 그런 거대한 망원경을 가지고 이 천체를 바라봤을 때, 그 안에 잡히는 세계. 더 밖에 것 까지를 합해서 법계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 법계라고 하는 말 속에는 포함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이 법계라는 말은 제일 크게 범위를 잡았을 때 하는 말이지요.
그 마음의 량은 광대해서, 그 드넓은 법계라고 하는 공간까지 전부 다 펼쳐져 있다 이겁니다.
用卽了了分明(용즉요요분명)하야→ 얼마나 큽니까? 우리 마음이... 그런데 쓰기를 그저 좁쌀만치 쓰는 거예요. 그렇게 큰 것을 가지고 쓰기는 좁쌀만치 쓴다 이겁니다. 用卽了了分明 사용한 즉슨,
용즉요요분명이라. 了了라고 하는 말은 아주 꿰뚫어 알 때, 이 了자를 써요. 대충 아는 것은 그냥 알 知(지)자를 쓰지만...
그래서 불교에는 了知(요지). 이 了자하고 알 知자 써가지고 요지 라고도 하고...
요요분명 하면 아주 미세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아는 것. 了了分明 해서
應用(응용)에 便知一切(변지일체)라→ 그렇잖아요? 조금만 더워도 그냥 더운 줄. 0.1도 올라간 것 까지도 알아요 우리 마음은...
그 뭐 모르면 멍청한 거고요. 그거는...
참 정확하게 알아요. 이 감지력 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마음의 감지력 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어떤 센서도 그런 것은, 그런 정도의 센서는 만들어낼 수가 없어요.
사람이 만들 수가 없어요. 이 마음만한 감지능력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기 了了分明이라는 것이 우리 마음의 감지능력을 말하는 것이에요. 하나도 안 놓칩니다.
응용에 편지일체라. 그 마음이 한번 움직이면 모든 것을 다 알아요.
변지일체라. 일체 것을 곧 안다. 그 일체를 아는 것은 바로 하나를 알기 때문에 아는 것이지요.
一切卽一(일체즉일)이요→ 마음하나 그거 제대로 파악하고 있면 일체를 아는 것이고,
一卽一切→ 하나가 곧 일체다. 불교에는 이런 말 나오면 그냥, 그냥 시명 불처럼 그냥 계속 되지요. 일즉일체. 일체즉일.
一中一切多中一(일중일체다중일)
一卽一切多卽一(일즉일체다즉일)
一微塵中咸十方(일미진중함시방)
一切塵中亦如是(일체진중역여시).
부처님의 불교의 궁극의 가르침이 화엄경이고,
그 화엄경의 도리를 요약한 것이 법성게이고,
그 법성게는 우리 신라 때 의상스님이 지은 것인데, 천하의 아주 명작으로. 정말 글자 하나 까지도 아껴가면서, 아주 간략하게 글자 몇 자 안 되는 그 속에 온갖 우주와 인생의 이치가 그 속에 다 무르녹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글이 꼭 길다고 좋은 글은 아니지요.
그렇게 아주 차돌 알맹이 같은 그런 간략하면서도 의미심장한 글이라고, 아주 그 참 칭찬이 자자하지요.
그 당시는 놀랐답니다.
중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의상스님의 법성게를 보고는 흉내를 많이 냈지만, 근처에도 못 간다 그래요. 그럴 정도로 우리 법성게는 뛰어난 글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왔다가 마지막 이 세상을 하직할 때 불러주는 송별곡 이라고나 할까요? 그것이 법성게 아닙니까? 마지막으로 송별 하면서 보내는...
“네가 이 소리 듣고 인도환생 하라.” 이것입니다.
“이 소리 듣고 못 깨달으면 너는 뭐 말짱 헛거다.”이런 식으로 바로 그것을 몇 번 반복해서 도량을 돌면서 저기 燒臺(소대). 마지막 태우는 거기에 가서 마지막 전송 하거든요. 봉송진언. 보내는 진언이 나오는데, 그 봉송진언 나오기 전까지 그 도량을... 미련이 있으니까요.
이 생에 대한 미련이 있으니까 도량을 빙빙 몇 바퀴를 도는데, 그 도는 것도 법성도를 돌게 돼있어요 사실은...
의상스님이 그린 법성도를 돌고, 외우는 것은 법성게를 외우고... 얼마나 그 의식이 멋있게 되어있습니까?
마지막 들려주는 이별의 노래가 바로 법성게입니다.
거기에 이런 이야기지요. 一卽一切(일즉일체) 一切卽一(일체즉일) 법성게는 일곱 자 로 돼가지고 더 멋있지요.
일중일체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
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
생사열반상공화. 이 죽음과 열반이 바로 하나입니다. 한 덩어리입니다.
生死涅槃相共和(생사열반상공화). 그러면 다 이야기한 것이지요 뭐. 다 되었지요.
생사열반상공화. 죽음이 죽은 것이 아니요.
산 것이 또한 산 것이 아니요.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라 하나이니까요. 어떤 차원에서 보면 그것이 하나입니다.
거기서 눈을 확 뜨면 그 보다 더 좋은 효도가 없는 거예요. 망자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은혜가 바로 그겁니다.
평소에 좀 관심이 있어야지 무식한 귀신은 안 돼요. 평소에 이런 이야기 좀 듣고 마음자리에 대해서, 마음의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좀 가져 놓으면, 영혼만 남은 그 때는 생생 해가지고, 이 육신이 있을 때는 거치적거려 가지고 도대체가 귀에 잘 안 들어오다가, 육신을 벗어 버리면 아주 총명해 진답니다.
누구도. 아무리 미련하던 사람도 영혼만 남았을 때는 그렇게 총명해진답니다.
일곱 배가 총명 해진다던가 그렇다고 그래요.
그렇게 총명해지는 거예요. 그럼 어지간한 사람은 다 알아들어요. 어지간히 무식하지 않으면 다 알아들어요.
그래도 평소에 이런 마음의 문제. 인생의 문제.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그것이 가능하지 안 그러면 어려워요. 평소에 귀 동냥이라도 자꾸 해야 돼요.
그것이 정말 마음의 양식이 되고, 그것이 노자돈 을 주는 것이지, 무슨 불전 몇 푼 놓고 그 사람 이름으로 말이지 망자 이름으로 복 좀 짓고...
그것도 물론 보탬이 되지요. 보탬이 전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정말 가능하면 돌아가시기 전에 알아듣는 말로, 유식한 한문으로 하지 말고, 알아듣는 말로, 번역된 걸로 자꾸 깨우쳐 줘야 돼요. 이 生(생)과 死(사)의 문제에 대해서...
그래서 마지막 들려드리는 이별의 노래가 불교의 그 많고 많은 글들 중에서, 정말 희대의 아주 명작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 의상스님의 법성게를 들려준다고 하는 것. 의식이 참 잘 만들어 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법성게 속에 一卽一切(일즉일체) 一切卽一(일체즉일) 이런 말이 많이 나오지요. 일체가 곧 하나고, 하나가 곧 일체다. 내 한 사람이 모든 이 세상이고, 이 세상이 곧 내 한 사람이고...
마음자리에 들어가면 더욱 더 그렇지요.
去來自由(거래자유)하야→ 가고 오는데 자유로워서,
心體無滯(심체무체)라→ 마음의 본체가. 심체. “체” 하니까 무슨 물체처럼 덩어리가 있는 것 같지만 계속 空寂(공적)하다고 그랬지요?
마음은 自性眞空(자성진공)했듯이, 공한 것입니다.
“體” 하니까 뭐가 큰 덩어리가, 딴딴한 덩어리가 탁 연상이 되는데 절대 그런 것이 아니지요. 말이 “心體(심체)”이지, “心滯(심체)”가 아니지요.
無滯(무체)일새 어디에도 막힘이 없음일새. “滯 했다”그러지요? 어디에도 막힘이 없음일새.
卽是般若(즉시반야)라→ 이것이 그래야 般若지요. 어디에 막히면 반야가 아니지요. 지혜가 아니지요.
어디에 치우치면 그것은 막힌 것이고, 막히면 그것은 치우친 것이고, 그러면 그것은 지혜롭다고 할 수가 없지요. 어리석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상황에도 거기에 치우치거나 막히거나, 딱. 한정을 하거나 규정을 하거나, 선을 긋거나 틀을 딱 짜놓고 거기에 맞추려고 이렇게 하면, 그것은 지혜로운 자세가 못 되는 겁니다.
善知識(선지식)아 一切般若智(일체반야지)가→ 모든 반야의 지혜가
皆從自性而生(개종자성이생)이요.→ 모두가 그 뛰어난 반야의 지혜가 본래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생긴 것이지, 우리 마음 떠나서 무슨 하늘의 계시도 아니고, 무슨 학문의 축적도 아니에요.
유교는 무슨 학문의 축적에 의해서 공자같이 뛰어난 성자가 되었고, 또 다른 종교는 “하늘의 계시다.” 해가지고, 자기도 모르게 어느 한 순간 신비한 계시를 받게 되고, 소리를 듣게 되고요.
보통 일본에 신을 섬기는 사람들도 신의 계시를 많이 받아요. 계시 받는 그런 경우가...
아주 뛰어난 靈(영)들로부터 힘을 받는데, 불교는 그게 아니에요.
개종자성이생입니다. 너의 마음자리에서부터 모든 것이 생겼다이겁니다.
부처님은 자신의 마음을 깨달음으로부터, 거기서부터, 깨달음으로부터 출발 했어요. 이것을 어쨌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우리가 들어야 되고, 이것을 우리 마음속에서 확고하게 뿌리 내려놔야 되어요.
불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뭐냐?
특색이 뭐냐? 뭐가 위대하냐?
정말 무엇이 실재적인 것이냐?
불교는 깨달음으로부터, 그것도 다른 걸 깨달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 마음 깨닫는 것. 거기서부터 모든 것이 다 출발한다. 이겁니다.
皆從自性而生(개종자성이생)이라→ 자성으로부터 생긴 것이다.
不從外入(부종외입)이라했잖아요.→ 밖으로부터 들어온 것이 아니다. 신의 계시나 아니면 과거 요순이나. 문무 주공이 축적해 놓은 학문의 결과로서 된 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그것은 전부 밖으로부터 들어온 것이거든요.
불교는 자기 자신 속에서 나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의 어떤 그 무엇이 폭발한 것이지요.
莫錯用意(막착용의)함이→ 마음을 그르게 쓰지 않는 것이. 名爲眞性自用(명위진성자용)이다→ 마음을 잘못 쓰지 않는 것. 막착용의.
생각을 그르게 쓰지 않는 것. 이것의 이름이 진성자용이라. 참 성품이 스스로 작용 하는 것. 자기 자신의 참 성품이 스스로 작용 하는 것이에요. 스스로 작용 하는 것.
그거 뭐 누구의 힘도 아니고, 자신의 참 성품이 저절로... 자기 속에서 무엇을 작동해서도 아니고 저절로...
누가 충격을 주어서도 아니고 자신 속에서 저절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一眞(일진)에 一切眞(일체진)이다→ 한번 참다워지면 모든 것이 다 참다워 진다. 이것은 마음을 한번 깨달으면 전부 깨달음의 세계예요. 전부 깨달음의 세계라고요.
꿈을 한번 딱 꾸면요. 거기에는 다이아몬드도 꿈이지요. 꿈속에 것은... 어떤 것도 꿈이라고요.
거지가 되어도 꿈이고 총을 맞아도 꿈이고...
꿈속에서 총을 맞아보니 거참 웃기지도 않더만... 아 이거 정말 꿈이에요. 허망하기가 이를 데 없어요. 아, 내가 죽었다 싶은데 죽은 것이 아니더라고요.
꿈속에서는 그렇게 편리해요. 아주 좋더라고요.
그럴 때는 괜찮아요. 그렇듯이 한번 깨닫지 않습니까?
한번 깨닫는 것을, 우리는 깨달은 경험이 없으니까...
꿈 깼다고 생각하면 되요. 꿈을 한번 깨버리면 그때는 어떤 것도 진짜입니다. 전부가...
전부 사실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여기 일진이라고 하는 말은, 깨달은 사람의 정말 진실한 깨달음의 세계. 그것은 한번 깨닫고 나면 뭐 자기 마음만 진리의 세계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진리세계 속에 있어요.
그래 깨달은 사람이 보면 전부 진리예요. 전부 깨달음뿐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명나라 때 고봉스님은,
“내가 성불하니 산하대지와 일체삼라만상이 전부 성
불이더라” 그렇게 표현했어요.
“내가 성불하고 나니까 모든 산하대지와 삼라만상이
모두가 성불이더라” 그렇지요. 성불한 사람의 눈으로 보면 전부가 부처의 세계 속에 있는 것입니다.
산하대지와 온갖 것도. 뭐 공해까지도 깨달음 속에 있는 것이지요. 공해까지도 깨달음 속에...
깨달음의 한 부분이에요. 꿈속에서 금을 꿈꿔도 그건 꿈이에요. 왕이 되어도 꿈이고 거지가 되어도 꿈이고, 깨달음 속에. 우리가 깨었을 때는 전부가 진실이고, 그러면 “마음을 깨달았다.” “도를 깨달았다.” 하면 그 깨달은 사람의 세계 속에는 어떤 것도 전부 깨달음뿐이에요. 전부가... 혹 흙도 돌도 사람도 무엇도 전부 깨달음뿐입니다.
그래서 그걸 가지고, 금을 가지고서 비녀를 만들든지 반지를 만들든지 시계를 만들든지, 아니면 비린내 나는 생선을 만들어도 그것 역시 금이에요. 그것 역시 금이라고요. 그걸 또 전단향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요.
전단香 나무를 가지고 중생의 모습을 만들든지 부처의 모습을 만들든지 보살의 모습을 만들든지 어떤 모습을 만들어도 전부 전단향기가 나는 것이지요.
전단香 나무를 가지고 생선을 만들어놔도 전단향기가 나지 비린내가 안 나요. 부처를 만들어놔도 부처냄새가 나는 것이 아니고 전단향이 납니다.
그래서 一眞에 一切眞이예요. 한번 진리의 세계 속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진리 속에서 그대로 진리와 하나다 이겁니다.
心量(심량)은 大事(대사)라→ 마음의 량이라고하는 것은 큰일이다.
不行小道(부행소도)니→ 대사이기 때문에 작은 길로 행하지 않는다 이거예요.
口莫終日說空(구막종일설공)하라→ 입으로 함부로 공 이야기를 하지 말라. 종일동안 공을 설하지 말라.
心中不修此行(심중부수차행)하면→ 마음속에서 이러한 수행을 하지 않으면. 이러한 행을 닦지를 아니할 것 같으면,
恰似凡人(흡사범인)이 自稱國王(자칭국왕)이라→ 보통 사람들이 스스로 “국왕이다.” 이렇게 말한다하더라도, 그것이 국왕은 안 되지요.
從不可得(종불가득)이니→ 마침내 “안 된다.”이겁니다. 그러니
非吾弟子(비오제자)다→ 나의 제자가 아니다. 이것은 입으로 공만 말하고, 마음 가운데 이 공의 도리를 닦지 않는 것은 “내 제자가 아니다.”이겁니다.
“내 제자가 아니다.” 입으로 공만 말하고, 마음에 공의 도리를 닦지 않는 것은
“내 제자가 아니다.” 마치 보통 평민이
“나는 국왕이야.” “국왕이야.” 한다고 해서 국왕이 안 되는 것처럼...
“나는 부처님 제자야.” 공 도리가 어떻고, 반야심경이 어떻고, 금강경이 어떻고, 공이 어떻고 막 그냥 이야기해도, 정말 그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되지 아니하면,
心行(심행). 마음이 그렇게 되지 아니하면 그건
“내 제자가 아니다.” 이겁니다.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고, 육조스님의 제자가 아니
다.”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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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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