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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11강
不見(불견)가 黃蘗和尙(황벽화상)이 云(운)호대
<서장> 40쪽 셋째 줄, 不見(불견)가 黃蘗和尙(황벽화상)이 云(운)호대- 이 황벽화상은 제자를 잘 둬서 아주 자신의 이름을 천하에 떨치게 된 그런 분입니다. 황벽스님의 제자가 바로 임제스님이죠. 물론 황벽스님이 훌륭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임제 가풍이 워낙 세기 때문에 그 임제 가풍에 황벽스님이 가리기도 하지만 또 황벽스님이 빛나기도 하는 그런 관계가 임제스님과 황벽스님의 관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황벽스님이 말씀하시기를
我此禪宗(아차선종)은 從上相承以來(종상상승이래)로 不曾敎人(불승교인)으로 求知求解(구지구해)하고 只云學道(지운학도)라하나니
我此禪宗(아차선종)은- 우리들의 선종이라고 하는 것은 예부터 서로 이어 내려온 이래로 일찍이 사람으로 하여금 ‘知’와 ‘解’를 구하지 않게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지와 해를, 알음알이죠. 이 장의 이름을 ‘선문의 재변과 존심일처’ 이렇게 했는데 저 앞서의 ‘지해와 지혜’알음알이와 깨달음의 지혜의 관계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 알음알이를 구하지 않고 다만 말하기를 學道(학도), 도를 배운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거죠. 學道, 도 배우는 사람. 學道人! 참 좋은 표현이죠. 지식을 쌓는 것도 아니고 알음알이는 더욱더 아니고요, 도를 배우는 집안이다. 우리 선종이란 도를 배우는 집안이다. 이건 황벽스님의 말 뿐만 아니라 황벽스님의 말씀도 역시 옛날부터 내려오면서 우리는 學道한다고 하지, 알음알이하고는 거리가 멀다. 이렇게 학도라고 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정말 간단명료하게 더 이상 알음알이를 붙일 수 없는 이런 말을 썼지만 그렇지만 이 ‘학도’라고 하는 이 말도 사실은
早是接引之詞(조시접인지사)나 然(연)이나 道亦不可學(도역불가학)이라
接引之詞(접인지사)라- 사람을 접역하는 입장에서 어쩔 수 없어서 하는 말이지, 학도라고 하는 이 간단한 말에도 허물은 많다 하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 모순은 때고 있다.
그러나 道亦不可學(도역불가학)이라- 그러기 때문에 그래서 여기서 그러나 라고 했지만 그래서 도라고 하는 것은 또한 가히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학도라고 하지만 그러나. 뜻은 그렇게 연결되는 거죠. 도는 배우는 게 아니다. 배우는 건 가르쳐주고, 습득하고, 또 반복하고, 이런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지식의 축적을 우리는 배움이라 우리는 그런 말을 흔히 하는데, ‘도’라고 하는 것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도 또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참 불교가 좋기도 하면서도 또 어떤 의미에서 보면 상당히 접근하기가 어려운 그런 이야기입니다. 참 중요한 말을 한참 나열해 놓고 그것을 부정해 버리니까요. 부정해놓은 것 까지도 이해를 하겠는데 부정한 것 마저 또 부정하는 그런 경우를 많이 보지 않습니까? 그 깨달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어서 하는 일이지 뭐 우정 말장난하느라고 그런 것은 전혀 아닐 것입니다. 그렇게 수차에 부정을 하고서도 결국은 성에 차지 않을 거예요. 당연히 성에 차지 않아야 옳습니다. 도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이론으로, 사량 분별로 될 일이 아니죠. 그래서 여기서도 어쨌든 알음알이를 붙이지 않는 상태에서 뭔가 좀 가까이 접근하게 하려는 그런 노력으로 봐야 하겠죠.
情存學道(정존학도)하면 却成迷道(각성미도)라 道無方所名大乘心(도무방소명대승심)이니
情存學道(정존학도)면- 우리 마음이 도를 배운다는 이 사실에 가있을 것 같으면
却成迷道(각성미도)라- 도리어 도를 미혹하게 한다. 도를 미혹하게 한다. 그러니까 도를 배운다 라고 하는 이 사실이 또한 하나의 알음알이가 되죠. 도를 배운다는 그 생각이 벌써 하나의 알음알이가 되기 때문에.
道無方所名大乘心(도무방소명대승심)이니- 도에는 방소가 없는 것. 뭐 이것이다 저것이다, 어디다,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어떤 한정된 시간, 한정된 장소, 한정된 어떤 의식 이런 걸 가지고는 표현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대승심이라고 한다. 이것 뭐 설명할 수가 없죠. 이쯤되면 대승심이라고 하는 것을 설명 붙여봐야 군더더기가 됩니다.
此心(차심)은 不在內外中間(부재내외중간)하야 實無方所(실무방소)니 第一(제일)에 不得作知解(부득작지해)어다
此心(차심)은 不在內外中間(부재내외중간)하야- 내외중간에 있지도 아니해서
實無方所(실무방소)니- 실로 방소가 없는 것이니, 대승심이라고 하는 이 대승심은 이건 뭐 ‘현전일념’이라고나 할까요? ‘현전일심’이라고 할까? 그야말로 한 생각도 붙을 수 없는 그런 절대 현재라고 할까?
第一(제일)에 不得作知解(부득작지해)어다- 그래서 도라고 하는 것은 방소가 없기 때문에 어떤 고정된 시간, 장소, 의식 이런 것이 붙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제일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이 알음알이를 짓지 않는 것이다. 첫째 유의해야 할 것! 불법에 있어서 진정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려고 하면 우리가 불교, 불교 하니까 불법이라고 하는 것하고 차원을 달리하고 또 도라고 하는 말하고 다른 차원으로 우리가 이해를 하는데 불교나, 불법이나, 도나, 불도나 똑같은 의미예요. 그런데 불교는 알음알이로 통하는 뜻으로 이해를 하고, 불법하면 거기서 조금 차원이 높은 것으로 그렇게 알고, 거기서 불도- ‘도’자가 붙으면 그야말로 더욱 더 혀도 못 댈 그런 우리의 사량 분별을 초월한 그런 경지인걸로 생각하지만 사실 그 말 세 가지가 똑같습니다.
불교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렇게 이해해야 되네. 第一(제일)에 不得作知解(부득작지해). 불교 제대로 이해하는데는 이런 알음알이로서는 도저히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제일 유의해야할 사항이 이 점이다 라고 그래서 第一(제일)에 不得作知解(부득작지해)라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알음알이가지고 살림살이를 삼고 있는 우리들의 입장이라고 하더라도 알고는 있어야 되죠. 알고는 있어야 돼. 그래서 나중에 실컷 이야기해놓고도 이건 어쩔 수 없어서 방편으로 또 편의상하는 표현일 뿐이지 이것이 사실은 온전한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 정도는 할 줄 알아야 그게 불교에서 양심을 가진 사람이다 할 수가 있습니다.
只是說汝而今情量盡處(지시설여이금정량진처)로 爲道(위도)니 情量(정량)이 若盡(약진)하면 心無方所(심무방소)니라
只是說汝而今情量盡處(지시설여이금정량진처)로- 다할‘진’자가 있어요. ‘-정량진’하는 그 자리에. 그래야 말이 됩니다. 그래서 爲道(위도)니, 情量盡處(정량진처)로 爲道(위도)니 若盡(약진)하면 약진의 ‘진’자가 정량진처로 도를 삼으니 ‘다할 진’자가 빠졌어요. 다만 그대들에게 말하나 요게
황벽스님이 이 법문을 하신 상황이 대개 대중을 위한 설법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겠어요. 너희들에게 그대들에게 이야기를 하긴 하지만 지금 정량이 다한 것으로서 도를 삼는다. 알음알이가 뚝 떨어진 그것으로서 도를 삼는다. 정량이 만약에 다한다고 할 것 같으면
心無方所(심무방소)니라- 마음이 방소였다. 툭 터인다 이거야. 우리가 정량이 있으니까 의식, 식정, 정식... 여기 죽 나열해서 쓴 적이 있죠? 지혜, 지식, 알음알이, 어떤 사변, 우리가 생각해낼 수 있는 어떤 사고, 상량 이런데 보면 우리가 거래할 때 돈 계산이라든지 이런 뜻으로 상량이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만 그런 등등으로서는 이 불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거지. 그게 다 해야 그게 뚝 끊어진 상태, 그야말로 한 생각 뚝 끊어진 상태 그래서 고도로 발달한 철학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량, 알음알이의 어떤 지극히 정리되고 논리화된 입장이라고 하고, 이 깨달음- 불교는 그와 다른 가장 간단한 법이 다른 것이 그런 알음알이를 초월한 그런 데서 나온 그야말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다가, 그야말로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과정을 거친 뒤에서 비로소 ‘산은 다만 산이고, 물은 다만 물이다’상식적으로 다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그런 입장. 그건 그야말로 알음알이가 끊어진 상태거든요. 일체 삼라만상과 자기 인생과 일체 모든 것이 부정된 그런 정신 상태, 논리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정신세계 속에서 완전히 부정되어진 그런 체험, 이것을 한 고비 넘기고 나서 비로소 열려 버린 상태, 그리되면 심무방소야. 우리의 마음과 깨달은 사람의 마음 차이가 바로 그 점입니다. 우리는 그야말로 한 고비 넘기 이전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만, 깨달은 사람은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경지를 넘어서서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온 절대 아주 대부정을 거친 뒤에사 비로소 다시 긍정으로 돌아온 그런 상태의 어떤 정신세계. 그러니까 그들의 마음은 어떤 방소가 없어. 고정된 어떤 사량 분별이 없고, 우리는 어떤 고정된 사량 분별이다 이거죠. 산을 봐도 우리 생각의 산과 깨달은 입장의 산이 다르다는 거죠. 우리는 산을 봐도 산이 산이요 이렇게 ‘見水視水(견수시수) 見山視山(견산시산)’그런데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과정을 거친 뒤에 간단하게 ‘다만 지’자가 있을 뿐이야. 그 원문을 아주 오래 대의 사람 이야기지만 ‘다만 지’자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그게 안된다는 거요. 중생들은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산을 보되 별별 산을 그대로 산으로 산이 되어서, 내가 山化되어서 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산을 객관으로 놔두고 내 나름대로 내 정보대로 내가 갖고 있는 정보대로 산을 보는 거지.
그런데 깨달은 사람들은 ‘見山只視山(견산지시산)’사 산을 보되 다만 산일 뿐이다. 이미 그 사람은 山化되었어. 그게 다른 점이죠. 그래서 심무방소라는 것은 정량이 약진해. 사량 분별이 다 끊어져버리면 결국은 마음의 방소가 없다 라고 하는 이것은 바로 우리가 가깝게 표현한다면 그야말로 산을 보되 다만 산일 뿐이다. 이미 보는 내가 산화 되었어요. 거기에 다른 사량 분별이 없어. 축적된 자기 정보를 가지고, 자기 경험을 가지고, 자기 감정을 가지고 산을 보는게 아니라구요. 그 점이 다른 거죠.
이 점을 참 제일 큰 문제인데 여기도 第一(제일)에 不得作知解(부득작지해)어다. 우리 불교를 불법을 배우는데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이 알음알이 가지고 대들려 하지 말라. 괜히 알음알이 가지고 불교 알려고 하지 말라. 이렇게 우리가 제일 주의해야 할 사항이 이 점이다 라고 했습니다. 참 이 점은 이론적으로라도 우리가 좀 많이 천착을 해서 또 개인적으로 명상을 통해서 이런 주제를 가지고 깊은 명상을 통해서 좀 이론적으로라도 정리를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일념이 되어서 그야말로 그런 경지를 넘어서 툭 터진 상태가 되어서 心無方所(심무방소)가 된 情量(정량)이 다 한 뒤에 심무방소가 되어서 이해해야 옳겠지만 그렇지 못한 우리들의 입장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이런 주제를 가지고 깊은 명상이라도 해야 한다. 그래서 좀 사량 분별로라도 정확하게 이해를 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사량 분별로 道를 아는 것이, 불법을 아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어서 하신 말씀이
此道(차도)는 天眞(천진)하야 本無名字(본무명자)어늘 只爲世人(지위세인)이 不識(불식)하야 迷在情中(미재정중)일새
此道(차도)는 天眞(천진)하야 本無名字(본무명자)어늘, 천진 그대로라. 천연 그대로야. 그래서 뭐 이름을 붙일게 없어. 산을 가지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정보를 가지고 사량 분별로 보는게 아니라 천진한 山化되어버린 그런 안목으로 산을 보는 ‘只示山’다만 산일 뿐인. 本無名字(본무명자)는 본래 명자가 없거늘
只爲世人(지위세인)이 不識(불식)하야-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해서
迷在情中(미재정중)일새- 미혹해서 자기 정, 자기 생각 속에다 갖다 놓는다 이거야. 道란 것이 이런 게 아닌가? 별의별 자기 궁리대로 자기가 자기 깜냥대로, 뭐 저 기독교인들에게 불교 물어 봐요. 모르는가? 자기 나름대로 다 안다고. 불교인에게 기독교 물어봐도 다 알아. 전부 자기 깜냥대로 아는 거지 정확하게 그 자체가 되어서 아는 것은 아니듯이 마찬 가지로 이 불교라고 하는 것, 이것도 그 情이 미혹해서 우리 생각 알음알이 속에 있어서, 알음알이라는게 뭐겠어요? 온갖 정보야. 잡다한 되도 않은 그런 정보. 그런 정보가 뚝 끊어진 다 쓸어 없어진 상태, 情量(정량) 若盡(약진)이죠. 정량이 다한 그 자리!
所以(소이)로 諸佛(제불)이 出來(출래)하야 說破此事(설파차사)하사대 恐爾不了(공이불료)하야 權立道名(권립도명)하시나 不可守名而生解也(불가수명이생해야)니라
所以(소이)로 諸佛(제불)이 出來(출래)하야 說破此事(설파차사)하사대- 설파라는 말 선가에서 참 많이 잘 쓰는 말인데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설파했다, 이야기해서 깨트렸다. 이야기하면 다 깨진 거여. 온전하지가 못하다구요. 이 일을 설파했다. 설파하면 다 온전하지 못한 거야. 이미 그 정말 만연된 천하의 보물을 깨버린거여. 깨버려가지고 어떻게 되겠어요? 파삭 깨져서, 우리 근사한 청자를 상상합시다. 파삭 깨져가지고 그것을 전문가가 조각조각 맞춰가지고 겨우겨우 엇비슷하게 맞춰가지고 이렇게 꾸어매 놨어요. 그러니깐 뭐 이게 천 조각 만 조각 난 청자를 겨우 얼기설기 금으로 붙여가면서 했다손 치더라도 그 모양이 오죽 하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불교란 그런거라구요. 그런 불교를. 그나마 형태가 제대로 된 것을 우리가 본다면 괜찮지만 너무 형편없는 그런 이야기들을 우리가 불교라고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너무 많죠.
說破此事(설파차사)하사- 이 이야기를 설파해서
恐爾不了(공이불료)하야- 그대들이 모를까 두려워 해서
權立道名(권립도명)이라- 설파했다 한 게 뭐야? 學道(학도)라구요. 道라고 말했을 뿐이야. 道라는 이름도 사실은 설파해서 그 천만 냥 가는 청자를 파삭 깨어서 아무짝에 쓸모없이 만들어버린 그런 이야기지만 그래도 할 수 없이 그렇게라도 보여줄 수밖에 없더라. 그래서 道가 있는 사람은 다 ‘목격이도전’이라, 말 한 마디도 하기 이전에 척 눈을 마주치는 그 자리에 道가 있더라 그런 말을 하죠. 권립 방편으로 道라는 이름을 내세웠다. 그러니
不可守名而生解也(불가수명이생해야)니라- 역시 참 대혜 스님의 견해, 뛰어난 지견이라는 것은 참 이런데서 우리가 탄복을 하는 거죠. 不可守名而生解也(불가수명이생해야)니라, 가히 이름을 지켜서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 學道(학도)라 하니까 道라 하니까 佛敎라는 말보다도, 佛法이라는 말보다도, 佛道라고, 道라고 하니까 훨씬 고급스럽고 거긴 뭐가 있으려니 이런 생각을 하는 거죠. 그 이름을 지켜가지고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 그 역시 병일 뿐이지. 뭐 불교는 쉬운 거고 아무나 이야기할 수 있는 거고, 불도는 언감생심 우리가 입 댈 수 없는 것이다 라고. 그 역시 사량 분별이야.
前來所說瞎眼漢(전래소설할안한)의 錯指示人(착지시인)은 皆是認魚目作明珠(개시인어목작명주)하야 守名而生解者(수명이생해자)니
前來所說瞎眼漢(전래소설할안한)의 錯指示人(착지시인)은 皆是認魚目作明珠(개시인어목작명주)하야 守名而生解者(수명이생해자)니- 앞에서 눈 먼 사람들, 눈 먼 선지식들이 사람들을 그릇 지시해서 그렇게 하는데 그것은 다 고기 눈을 생선 눈을 오인해서 밝은 구슬 아주 값진 구슬 인양으로 그렇게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이름을 지켜서 알음알이를 내는 것이다. 내가 아까 뭐 근사한 청자를 파삭 깨어서 그걸 진짜 청자냥 알고 있는 그런 정도는 청자 쪼가리라도 있지. 이건 고기 눈까리는 명주 근처도 가지 않는 거지. 어찌 고기 눈하고 다이아몬드하고 그게 비교가 되겠어요?
敎人管帶(교인관대)는 此是守目前鑑覺而生解者(차시수목전감각이생해자)요
敎人管帶(교인관대)는- 사람으로 하여금 관대하라, 관대는 관리해서 지니다. 우리 한마음을 잘 지켜 가라. 보존해 가라라고 하는 이런 식으로 묵조 사선이 간혹 그렇게 지시하는 스승들이 있는데
此是守目前鑑覺而生解者(차시수목전감각이생해자)요- 목전 감각을 눈 앞에서 보고 느끼고 하는 것을 지켜가지고 알음알이를 내는 자다. 나도 이건 죄송스럽게도 잘 활용하는 일인데, 지금 보고 듣고 이렇게 말하고 춥고 더위를 느끼는 바로 이 사람이다. 그걸 무위진인이 명문출입이라. 여등으로 출입한다. 무위진인이 그대들 얼굴을 통해서 들어가고 나가고 한다 라고 하는 이런데 연관시켜서 흔히 우리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야기해도 크게 잘못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근원을 우리가 늘 생각을 하고 하면 그런 말을 해도 허물이 적지만, 그렇지 않고 정말 사량 분별심 그것만 가지고 근원을 잊어 버린채 사량 분별심 그것만 가지고 이야기를 한다면 目前鑑覺(목전감각)이여. 목전감관을 지켜서 알음알이를 내는 사람. 그게 道다. 그게 그 사람이다. 그걸 또 논리적으로 끼워맞출 수는 있습니다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사량 분별이다 이거야. 그 다음에 사람으로 하여금 또 이런 방법도 있다 이거야. 이게 전부 선문의 제병이라고 그런 말을 했죠? 선문의 제병, 병을 여러 가지로 지적하는 거여.
敎人(교인)으로 硬休去歇去(경휴거헐거)는 此是守忘懷空寂而生解者(차시수망회공적이생해자)요
또 한 가지는 休去歇去(휴거헐거)죠. 경휴거헐거라. 아주 굳게 철저히 일어나는 망상을 쉬고 쉬어라. 라고 이렇게 가르치는 경우가 많은데
此是守忘懷空寂而生解者(차시수망회공적이생해자)요- 이것은 어떤 경우인가 하면 망회공적, 생각을 다 잊어버리고 그러니까 생각을 쉬라 쉬라. 그러니까 점 하나 찍어놓고 거기다 일어나는 생각을 자꾸 집어던지라 이거야. 그건 일종의 블랙홀 같은 관념을 가지고 눈 앞에다 점을 하나 찍어서 일어나는 생각을 자꾸 던지라는 거야. 그걸 내가 일주일 다녀온 사람에게 환하게 들어서, 가보지는 않아도 그렇게 지시하는 걸 들어서 자세히 알고 있는데 그거라. 자꾸 생각을 잊어버리는 거라. 망회, 그런 생각이 일어나지 아니한 상태, 공적 그걸 지켜서 알음알이를 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이 전통 선법이라고 하는 것은 한 생각 뚝 끊어진 최초의 일념마저 뚝 끊어진 그런 과정을 통과해서 비로소 얻어진 하나의 깨달음이기 때문에 그렇게 망상이 일어나서 그 망상을 던지고 던지고 해서 그걸 할 때는 좀 괜찮은 것 같다가 그 다음 며칠 지나니까 도루묵이 되어버리는 그런 식이 아니다 이거지. 그러니 망상이라고 하는 것은 내~ 그 상태 그 상태야. 안하면 그 뿐이고 할 때는 뭔가 조금 괜찮은 것 같고 그러니 일도양단이니, 일단에 일체단. 이 앞에 여기 <서장>에는 그런 말이 많이 있는데 실타래를 한 칼로 좍~ 자르면 그 얇게 수 백 개 실올이 다 끊어진다 이거야. 실올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이거든 망상이거든. 그렇게 되는 것이 우리 조사선 우리 조계종의 전통 참선 선법이다 이겁니다. 하나하나 제거했을 때 좀 가볍고 가만 있으니까 그 자리에 도로 다 차서 또 안했을 때와 똑 같은 이런 식은 아니죠. 그러니까 대개 요즘 선법이라는게 비파사나에서부터 거의 그런 식입니다. 유사 선이라는 것이 전부 거의 그런 식이예요. 생각을 가지고 어느 정도 비워 가다가 나중에 안하면 제 자리로 돌아오고 또 제자리로 또 돌아 와버려. 그러면 간화선이라는 것은 어떤 거냐? 여러 번 나오지만 그야말로 어렵긴 어려워요. 어렵긴 어렵지만 이 과정만 통과하면 끝이야. 그걸로.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올래야 돌아올 수가 없도록 되어있어. 道無方所(도무방소)라고 했잖아요? 情量(정량) 若盡(약진)하면 도무방소라. 툭 터져 버리는 거죠. 그걸 실타래를 한꺼번에 놔두고 탁 잘라버리면 다 잘려가지고 더 이상 망상의 실오라기가 일어날 수가 없다. 연결될 수가 없다는 그런 겁니다. 또 전통선의 뭐라 그럴까? 성과라고 할까 그걸 간단하게 소개하면 그런 뜻이 됩니다.
休去歇去(휴거헐거), 이거 참 편안하고 마음은 펀안하고 걱정 없고 좋긴 하지만 道를 완전히 터득한 것은 못된다.
歇到無覺無知(헐도무각무지)하면 如土木瓦石相似(여토목와석상사)하리니
歇到無覺無知(헐도무각무지)하면- 쉬고 쉬어서, 생각을 쉬고 쉬어서 아무 감각이 없는데 까지 이를 것 같으면
如土木瓦石相似(여토목와석상사)하리니- 토목와석이라, 나무나 기와 쪼가리, 돌덩이 같이 그렇게 될 것이다.
當恁麽時(당임마시)하면 不是冥然無知(불시명연무지)라함은 又是錯認方便解縛語而生解者(우시착인방편해박어이생해자)요
當恁麽時(당임마시)하면-이러한 때를 당할 것 같으면 그 사람들 하는 말이
不是冥然無知(불시명연무지)라- 명연해서 캄캄해서 무지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가르친다 이거여. 명연무지라. 그런데 이렇게 한 것은
又是錯認方便解縛語(우시착인방편해박어), 방편으로 속박을 풀어주는 그런 말을 착인해서 오해를 해서 알음알이를 내는 자다. 그런데 여기는 쉬어가라 하는데 있어서 말하자면 두 가지 병이 따르는 거예요. 이렇게 가르치는 것을 쉬라고 하는 것을 제일 많이 지시하니까. 묵조선에서.
敎人(교인)으로 隨緣照顧(수련조고)하고 莫敎惡覺現前(막교악각현전)이라하나니
사람으로 隨緣照顧(수련조고)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인연따라 비춰보고,
莫敎惡覺現前(막교악각현전)이라하나니- 악각으로 하여금 앞에 나타나지 않게 악각으로 하여금 현전하지 않게 하라. 라고 하나니
遮箇(자개)는 又是認着觸髏情識而生解者(우시인착촉루정식이생해자)요
遮箇(자개)는 又是認着觸髏情識(우시인착촉루정식)이- 촉루정식은 제 8식이예요. 촉루정식을 오인해서 오착, 인착해서
認着觸髏情識而生解者(인착촉루정식이생해자)라, 알음알이를 내는 거다. 상당히 깊이 들어간 거죠. 마음을 비춰 보는 건데 마음을 비춰보아서 어떤 큰 알음알이, 큰 망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 나쁜 짓이 惡覺(악각)이 아니라 큰 망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그런 입장, 그건 상당히 깊이 들어가는 건데 그 역시 생각이 밑에 침잠되어 있을 뿐이지 제 8식까지 침잠되어 있던지 7식까지 보통 무의식이다, 잠재의식까지 침잠이 되었던지 간에 그런 상태지 그건 뭐 완전히 망상이 끊어진 상태는 아니다 이거죠.
敎人(교인)으로 但放曠(단방광)하야 任其自在(임기자재)하고 莫管生心動念(막관생심동념)이니
자요 그 다음에 사람으로 하여금 敎人(교인)으로- 하는 이것은 전부 병통으로 하나하나 지적하는 그런 이야기죠. 사람으로 하여금 但放曠(단방광)하야- 그만 텅 비어 가지고
任其自在(임기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데 맡기고. 내 상좌 선방에 갔다 와서 “그래, 요즘 화두가 열심히 들리나?” 그랬더니 내가 옛날 생각 해서 화두가 열심히 들리냐? 했더니 “에이~ 요즘 스님, 화두 안들어요.요즘 수좌들 화두 그거 힘들어서 잘 안들어요. 잊어버려요”방광자재여. 방광자재. 난 그 사람 개인 이야기라고 생각을 해요. 철저히 그 사람 개인 이야기지 대다수 사람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개인 이야기일거예요. 이거는. 내가 참 기가 차서. “아~ 요즘 그 뭐 힘들게 누가 화두 들고 있나요?” 이래. 화두 드는 일이 참 힘들거든요 그거. 뭐 터럭 끝 만한 무게도 갖지 않았지만 그보다 그야말로 천 근 만 근 무게를 갖고 느끼기에 달려서 그렇게 하지 않아. 참 힘드는 일입니다. 힘들어서 들지 않는다는 거예요. 화두.
첫댓글 일체 삼라만상과 자기 인생과 일체 모든 것이 자기 정신세계 속에서 완전히 부정 되어진, 그런 체험을 한 고비 넘기고 나서 비로소 열려 버린 상태가 되면 道無方所야! ... 불퇴지님! 감사드립니다... _()()()_
見水視水(견수시수) 見山視山(견산시산) 그런데 산은 산이 아니고,물은 물이 아닌 과정을 거친 뒤에 간단하게 다만 지, 지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그게 안된다는 거요, 중생들은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산을 보되 별별 산을 그대로 산이 되어서, 산을객관으로 놔두고 내 나름대로 내 정보대로 내가 갖고 있는 정보대로 산을 보는 거지, 불테지님 ,,수고하셧습니다,,,_()()()_,,,
歇到無覺無知하면 如 土木瓦石相似하리니....생각을 쉬고 쉬어서, 아무 감각이 없는 데 까지 이를 것 같으면 나무나 기와 쪼가리, 돌덩이 같이 그렇게 될 것이다...불퇴지님 수고하셨습니다.._()()()_
주말에 백련암에서 3000배를 올렸습니다. 이번엔 15살짜리 딸과 함께 갔는데 딸이 마지막 한 배까지 흐트러짐없이 절 하는 모습을 보며 참으로 대견했답니다. 부처님의 진정한 품 안으로 이끌어 줄 수 있어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딸도 행복해 하는군요. 세상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_()_
녹취 불사의 공덕이 기도의 힘에서 나옵니다...장하십니다.. 따님도..불퇴지님^^*_()_
성불하십시오_()()()_
一斷에 一切斷 _()()()_
도라고 하는 것은 방소가 없기 때문에 어떤 고정된 시간, 장소, 의식 이런 것이 붙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제일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이 알음알이를 짓지 않는 것이다...불퇴지님! 고맙습니다. _()()()_
此心(차심)은 不在內外中間(부재내외중간)하야 實無方所(실무방소)니 第一(제일)에 不得作知解(부득작지해)어다. 도라고 하는 것은 어떤 고정된 시간, 장소, 의식 이런 것이 붙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제일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이 알음알이를 짓지 않는 것이다...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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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_()()()_
情存學道(정존학도)하면 却成迷道(각성미도)라 道無方所名大乘心(도무방소명대승심)이니라. 우리 마음이 도를 배운다는 이 사실에 가있을 것 같으면 도리어 도를 미혹하게 한다. 도에는 방소가 없는 것! 이것이다 저것이다 표현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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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_()()()_
삼배 올립니다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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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