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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공자 연구소(孔子硏究所) 원문보기 글쓴이: 孔 在 晩(76 世孫)
신마을탐방 [173] 이원면 평계리(2) 계촌-공촌, 꺼깟말 | ||||||||||||||||||||||||||||||||||||||||
독립투사 공재익의 명성 가득한 마을 | ||||||||||||||||||||||||||||||||||||||||
8월 15 일 광복절을 맞으면서 독립운동을 하신 공 재 익 씨에 대한 자료를 올려 드립니다 | ||||||||||||||||||||||||||||||||||||||||
겉으로 보기엔 평계리는 평촌이 전부인양 생각하기 쉽다. 평계리의 평촌은 마을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반면에 계촌은 오솔길로 조금 더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마을에 여간 흥미를 느끼지 않거나 고향이 아니고서야 그 골짜기까지 들어갈리 만무하다.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을 따라 올라가보면 계촌의 존재가 보인다. 아마 ‘시내 계’를 써서 계촌인가 싶다. 시냇가를 중심으로 길쭉하게 형성된 마을이 계촌이다. 계촌은 세닷말, 양지말, 꺼깟말, 살구정이, 공촌 등 5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세닷말과 양지말은 그 마을의 자취를 감췄다. 사람들이 모두 떠났기 때문이다. 집터는 대나무로 울창하게 뒤덮었고, 콩이나 깨 등 밭작물이 심어졌던 그 흔적만 대충 짐작할 뿐이다. 집이 철거되지 않고 남아있는 집조차도 식물들의 생명력에 배겨나지 못한다. 아무 말 없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대나무와 넝쿨식물들은 사람이 떠난 집을 삼켜버린다. 계촌의 남아있는 마을 중 공촌과 꺼깟말을 찾았다. 살구정이 마을은 멀리 떨어져 있는 반면 공촌과 꺼깟말은 지척의 거리를 두고 붙어 있다. 공촌은 그 이름에서 짐작했듯이 대부분 공씨들이 살고 있다. 곡부 공씨. 아시아의 성현이라 일컫는 공자의 자손들이다. 임진왜란 때 공자의 12대 자손인 공원구(당시 종2품 가선대부 벼슬) 조상이 평계리에 뿌리를 내린 후, 지금까지 이어내려 온 것이 공촌 마을의 유래이다. 지금 이장을 맡고 있는 공창식(51) 이장은 바로 공자의 79대손. 그는 2월, 8월에 옥천향교에서 열리는 석전대제에 공자님의 후손을 대표해 꼭 참석한다. 공촌 마을 사람들은 모두 공자님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 태생적 자부심과 함께 공촌 사람들이 자랑하는 역사는 또 하나 있다. 바로 이 마을 출신 독립투사인 공재익씨다. ◆공촌의 자랑, 독립투사 공재익 “독립운동을 했다고 시아버님이 3년간 옥살이를 하셨어요.” 시집오기 전에 이미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시아버님의 얘기는 남편에게서 들은 게 전부이다. “남편이 4년 남짓 시아버님의 독립운동 행적을 찾으려고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몰라요.” 그녀가 보물처럼 간직하는 꼬깃꼬깃한 종이뭉치를 꺼낸다. 바로 공재익 독립투사의 3.1운동에 관한 기록이다. 그렇게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흔적을 찾아 헤맨 배정술씨의 남편은 이미 16년 전에 저 세상으로 갔다. 공창식 이장은 공자의 후손인 곡부공씨 자손들이 공자의 뜻을 받들어 나라에 충의하는 것을 몸소 보여줬다고 자랑한다. ◆공촌, 꺼깟말 사람들 공촌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꺼깟말. 꺼깟말에는 공영태(50)씨와 천도성(49)씨가 살고 있다. 공문표씨의 경우, 부천에서 87년도까지 기계를 제작하는 직장생활을 하다가 일찌감치 고향에 내려왔다. 아버지의 병환으로 내려오긴 했지만, 그는 고향이 너무 좋아 눌러 앉은 경우다. 지금 공촌 마을에 29평짜리 새집을 한창 짓고 있는 공문표씨는 고향에서의 삶이 너무 행복하다. “도시 사는 것보다 훨씬 좋아요. 고향을 지키고 산다는 것에도 자부심을 느끼고요.” 일은 고되지만, 아내 손정애씨와 병석(이원중3)이와 정현(대성초6)이와 4식구 오손도손 사는 것이 너무 재미있나 보다. 이처럼 공촌마을은 다른 마을에 비하면 30대와 40대, 50대 등이 주축을 이루며 마을을 젊게 이끌고 있다. 여타 시골마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학생들도 중학생 3명, 초등학생 1명 정도로 많은 편이다. ◆공촌의 자랑, 두 개의 돌장승 옛날 공촌마을 진입로(지금은 평촌마을을 거쳐 가는 새로 포장된 길이 공촌마을 진입로)에 그 위용을 자랑하는 돌장승은 세월이 가는 것에 아랑곳 않고 마을을 수호하고 있었다. 그 돌장승은 바로 평계리 선돌. 20여m 거리를 두고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윗부분을 뾰족하게 다듬은 것이 1호 선돌인 숫선돌이며 윗부분이 타원형으로 손질한 것이 2호 선돌이자 암선돌이다. 이 부부선돌은 지금도 주민들로부터 숭배를 받고 있는데 예전에는 해마다 정월대보름을 전후한 깨끗한 날을 받아 제사를 지내곤 했다. 이 제사는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것으로 공촌마을 뒷산인 마니산에 옛부터 `산지당'을 설치해 지내 왔으나 현재는 마니산 중턱의 산제 소나무(山祭松)에 생기복덕(生氣福德)에 맞는 사람을 선정, 1주일 동안 정결케 한 후 제사를 지낸다. 새벽 1∼2시께 시작하는 이 제사는 산제를 마치고 4∼5시께 마을로 내려와 먼저 숫선돌 앞에 짚을 깔고 간단한 제물로 제를 지낸 다음 암선돌에도 지낸다. 제단까지 마련되어 있는 암선돌은 현재 바위옷이 자라 돌 전체를 감싸 안아 한층 더 멋들어진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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