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난 곳은 비학산 언저리 중농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 졸업후 면소재지에 하나밖에 없는 중학교에 시험을 쳐서 합격하여 초등학교 두반에 10명밖에 못가는 중학교에 맞춤교복을 입고 주위에 선망의 눈초리를 받으면서 학교에 다녔지만 초등학교 3학학년때 돌아가신 아버님 대신에 한분밖에 안계신 형님 마져 군에 가버리고 농사 지을 사람이 없어 머슴을 데리고 농사 짓는 어엿한 가장 노릇을 하는 중학생이였다 .
중학교 졸업후 공부하기 싫어 가라는 고등학교도 안가고 무서운 형님이 제대하고 오신 바람에 어머님 한테 돈 2000원 얻어 가지고 부산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흥아 타이어 공장에 취직하려 시험을 쳤지만 나이도 어리고 키도 작아서 떨어지고 합판공장에 다니다가 의식주를 해결 할길이 없어 중국집 배달부로 취직을 했다.
새벽에 일어나 짜장면 빼는 연습하느라 주 방장 한테 많이 맞아가면서 3개월 만에 내손으로 짜장면을 뽑을수 있어 주위에 내또래들이 고등학교에 다니는 걸 보고 야간 고등학교라도 다닐려고 하다보니 바쁜 중국집에선 시간을 낼수가 없어 친척이 경영하는 철공소에 취직을 했다.
한달봉급이 하숙비 절반도 되지않아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장에 경비를 하면서 외항선 선박수리를 전문으로 하는 일이라 내또래는 해양고 출신으로 외국으로 갔다오는 모습이 부러워 배를 타고싶어 해군에 지원입대하여 해상특공대에서 근무하다가 가장 힘든 U D T 지원하여 지옥주라는 훈련을 받으면서 인간이 무엇이던 할수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육체가따라주지 않은 특수훈련도 3개월만에 도중 하차하고 한국함대 기함을 탈수 있는 기회를 가질수 있었다 일년동안 900해리 바다를 누비면서 바다와 파도만보는 해상생활이 지겨워 마도로스의 꿈을 포기했다.
제대후 인천제철 공채출신으로 입사를 하여 이틀만에 주경 야독하는 산업체 특별학급에에 입학할수 있는 행운을 잡아 열심히 공부하여 2학년 때는 1등을 할수 있어 80년 대학에 가기 위해 회사도 그만 두었지만 대학시험에는 떨어지고 말았다. 자격증을 취득하고 보니 2개월밖에 남지 않은 공부로 기초가 돠어 있지않고 중학교 졸업후 10년의 공백을 메꾸기엔 너무나 무리한 도전이었지만 그러나 예비고사에서 102점의 카트라인에 3만명이 떨어졌지만 145점을 맞았다는 것은 2개월 간의 공부로 나에게는 경이적인 점수 일지 모르지만 대학을 간다는 것은 너무 무리한 도전 이였다.
회사를 그만두어 다시 부산 대한 조선공사에 좋은 조건으로 입사를 하였지만 동일계 폐지로 대학을 갈수가 없어 예비군 훈련받느라 고향으로 오니 마침 포항제철에서모집을 하기에 공채출신으로 합격하여 일하면서 공부하고저 다시방통통신대학 경제 학과에 다녀지만 전공도 틀리고 책을 제대로 구할수도 없고 신혼이라경제적 여우가 없어 중도에 포기를 하고 전공인 기계계통을 틈 틈히 공부하였다.
더디어 기회가 왔다 직업 전문학교 야간 향상 과정 모집 광고를 보고 84년 포항시청 지원(100만원)한 폴리텍대학(포항직업전문학교) 공업배관공과 야간 향상과정 입학을 하여 7년코스인(공업배관,용접기사(필기38명 실기 경남북4명합격)용접기능사1 급(꿈에도 그리던 자격증 포스코에서 일본 철강단기대학입학조건)을 9개월만에 취득하기위해 코피를 흘리면서 연습하여 얻어진 결과였다.
용접기사는 84년 신설된 자격이고 용접기능사 1급 세계기능올림픽 금메달 자격증을 소지 하고 실기만 면제 해주고 국내최초로 동시에 합격하여 그순간 만큼 내가 꿈에도 잊지 못하는 자격증 이였다. 일본 철강대학에 갈수 있는 길을 뒤로하고 학원(박태준 회장이 전 사원 용접교육을 하라는 지시를 보고)을 하기 위해 정든 직장을 퇴직했다.
퇴직후 이틀만 쓰고 준다고 빌려준 포스코 퇴직금도 받지못하고 학원 인가도 내지 못하고 전세준 집값도 용접기 사느라 모두 사용하고 보니 30만원 짜리 삭월세방 살이로 전락 했다. 학원허가도 나지 않았지만 포항에서 국내최초로 특수용접(84년 자격신설) 과정 및 용접기사자격(84년 자격신설) 증 수강료를 받지않고 결석없는 수강생 전원을 합격시켰다. 옆지기는(여자로써 최초) 시험 문제를 출제 하다 보니 특수용접 필기 시험에 합격하여 더큰 보람을 얻을수 있었다. 청와대 민원실에 올린결과 6개월후 학원인가 났지만 나의 수중에는 한푼도 없어 동업을 하게 되었지만 학원 경영(동업)이 여의치 않아 건설일용공으로 근무하다가 89년 다시 금속 회사에 취직을하였다.
보험회사 다니던 옆지기도 그만 두게하고 창설회사라 8개월 만에 진급도 하고 미국연수도 갔다 왔다. 기계정비를 담당하면서 수천건의 설비를 개선하고 생산주임으로 보직 이전하여 생산성을 두배로 하여 5천만불 수출탑을 받는데 기여 하기도 하였으며 80억 적자에서 흑자나는 시점에 대학을 또다시 도전하고 싶어서 93년 인천기능대학 기능장 과정에 입학하여그해 바로 기능장 1차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3개월만에 도중에 그만두어 기능대학 경력이 모자라 2차시험을 칠수가 없었다. 소련이 망하니까? 니켈 크롬값이 떨어져서 회사는 많이 어려워졌지만 조금씩 나아져서 기능대학에서 갔다가 복직 하니 자리가 없어지고 자회사(부도일보직전)로 인사발령이 나 있기에 일년간 버티다가 교대근무하기가 싫어서 또 회사를 자의반 타의반 그만두게 되었다.
95년 9월 내가 그토록 다니고 싶어하던 대한민국 최고의 주택지역에 근무하게 되면서 설계 ,감독, 감리 정산업무를 하면서 또다른 기회를 가지면서 5년여년만에 각고끝에 98년 꿈에 그리던 기능장(74년시험을 친후 가장 보람이 있었슴))을 첫 시험응시후 24년만에 취득하였다.(그해 년말 노동부 장관 직인 찍힌 기능장 합격증을 받음)
포항공대 철강 대학원을 갈려고 하다가 지원 자격이 되지 않아 2000년 한동대 국제대학원 최고경영자 과정에 입학하여 수료후 배운 것을 실천하고자 2001년 국가기술 자격증 취득을 위한 사이버교육기관인 시선기술교육원을 포항대학 창업보육 센타 에서설립하였지만 교육에는 관심이 없고 어떻게 하면 융자를 내어서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은 사람들을 제대로 보지 못한 내탓으로 30년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이제 학교에서내가 모르면 더배우고 아는 것을 조금더 가르치기 위해 2002년 국내 최초 위덕대학야간과정으로 철강분야(용접. 배관.기계정비,기계가공,압연 제강,제선등)16직종기능장 과정을 개설 하여 강의를 시작 하여 2001년에는 30명 정도 응시 하더니 2002년에는 500명 가까운 응시인원이 늘었다.
포항지역 최종합격자도 33회 17명 34회는 1차 시험 합격자가 169명이나 되었다 (기능대학 기능장 과정 합격율 30%) 난 30시간 강의로 기적에 가까운 일을 50년만에 그중에 내가 가르 친 수강생을 합격(50%)시키면서 위덕대학 총장 명의로 표창장을 수여하기도 하였다.
2005년 한국기술교육대학교에 훈련교사 자격을 취득하기 주말과정에 입학하여 서울로 23주동안 교육을 받아 면허를 취득하고 회사에서는 건물관리회사에서 최초로 노사문화 우수기업에 선정되어 중국 불수강 공장에 다녀온뒤 또다른 느낌을 받을수 있었다. 건물관리회사로 동남아시아 3개국 건물괸리 벤치마킹 하면서 말레지아 삼성에서 지은 88층 건물을 보고 부터는 우리의 기술 발전은 세계로 뻗어 나갈수 있다는 생각하면서 일본은 앞서나가고 중국은 따라오고 이제 철강분야는 양적인 면에서 중국의 4억톤의 철강생산국에서 5천만톤의 우리나라와 비교했을때 세계최고의 기능우수국이지만 중국에 경쟁에서 이길려 면 새로운 기술과 기능을 익히는데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것이다.
2006년부터 해양과학교와 폴리텍 대학 야간에 강의하면서 2008년에는 또다시 도전을 하기위해 포항대학 평생교육원에 학사과정을 신청하여 교육을 받던 중 양산대학에서 감리사 교육을 받고 폴리텍대학 기능장 시험감독을 병행하고
기능장 과정인 상일기술교육원을 설립하여 모르면 배우고 알면 가르치고 하루 24시간 중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인생을 결정된다고 생각되기에 우리자신속에 들어있는 무한한 에너지를 할용하여 좀더 나은 미래를 개척 해 나가야 할것이다.
2008년 12월
첫댓글 대단히 감사합니다. 정말 그렇게 노력하시는데 분명 성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구미 기능대 학장님이 한나라 공천으로 국회출마로 한 동안 대행체제였지 싶은 데 신문에 보니 얼마전 새로 취임하신 구미 기능대 학장님도 금속재료 기능장 출신일 것입니다.
금속분야의 책을 한권 만들어 는데 선생님의 자료가 많이 도움이 되어으며 산업기사 시험에는 용접야금에 대한 기초가 없으면 안되어 부족하지만 많은 도움 바랍니다.
한편의 드라마 같네요.
생각만 많이 하고 이루어 놓은 것은 가족들 고생만 시켜지요
감동입니다.
그렇게 보아 주시니 감사 합니다
대단 하십니다.. 제 은사님은 인천 기능대학 기능장 과정을 1994년에 받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직장문제로 몇년전에 도전을 포기 했었든데... 2009년은 울산에서 새롭게 시작 할려고 합니다... 열심히 생활 하겠습니다..
늦다고 생각할때가 제일 빠른 것 같아요 전 93학번 인데 3개월 만에 도중 하차 하였지요.
님의 열정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감사합니다. 같이 노력하면 좋은 결과가 있겠지요
고생도 많았지만 고생한것 만큼 보람도 찾아셨네요, 고생많았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