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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놀이를 뺏는 학벌주의 교육 : 안재오 유튜브 강의 15
cafe.daum.net/edurepublic 기도하는 교육공화당
1. 지나친 학습 부담으로 인한 꿈의 상실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한국의 아이들은 대부분 꿈이 없습니다. 학생들은 거의 그렇습니다. 아이들에게 “네 꿈이 뭐냐?” 라고 물으면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 대부분 “모른다” 라고 대답합니다. 저도 전에는 이럴 수도 있겠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꼭 꿈이 있어야 사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나 요즘 다시 생각하니 이게 한국의 근본문제라는 것을 깨닫았습니다. 꿈이 없는 민족은 죽은 민족이고 그 꿈은 주로 아이들의 꿈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많은 학생들은 공무원이 되는 게 꿈이라는 말도 듣습니다. 이는 너무 소박한 꿈입니다. 이는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다시 한국 아이들의 꿈이 없음을 문제 삼게 된 것은 “어린 시절의 꿈 또는 기이한 생각과 기이한 행동 혹은 상상력 등이 성인의 창의력과 결부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은 겨우 16세 때 ”빛에 올라타면 어떤 일이 일어날 지를 상상해 보았다“ 고 합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결국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고등학생이 이런 질문을 했다면 모두 ” 야 임마 쓸데 없는 생각하지 말고 공부나 해“ 라고 핀잔 들을 확률 100%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볼 때는 쓸데없는 아인슈타인의 이 황당한 질문이 현대 물리학의 혁명을 가져온 바로 그 질문입니다.
우리는 여유없이 주입식으로 온갖 지식을 마치 엄마가 아기에게 이유식을 먹이듯이 학생들에게 퍼 먹이기 바쁩니다. 위대한 서양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가(leisure)가 학문 탐구의 객관적인 조건임을 밝혔습니다. 학문 탐구의 주관적인 조건은 호기심입니다.
한국에서는 학생들의 호기심을 무참히 짓밟습니다. 심지어는 수업 시간에 질문도 제대로 못합니다. 누가 모르는 것을 질문하면 다른 학생들은 “ 진도 나갑시다” 라고 하든지 “ 야, 그게 시험에 나와?”라고 하며 질문자에게 핀잔을 줍니다.
또한 학교 즉 영어로 school 이라는 말도 고대 그리스어의 한가함 즉 schole에서 온 말입니다.
여유를 가지고 배운 사항만이 살이되고 피가 됩니다.
그러나 고도의 성적 경쟁의 압박하에서 시간적인 여유도 없이 공부한 지식은 결코 머리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에 에디슨은 상상력이 매우 풍부하고 기발한 호기심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달걀을 품어 병아리를 만들려고 했다는 일화 이외에도 숱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번은 에디슨이 곡물 창고에 들어가 그 구조를 유심히 관찰하던 중에 스위치를 잘못 눌러 곡물에 깔려 죽을 뻔했다고 합니다. 에디슨이 사람이 하늘을 날 수 있도록 하는 알약을 만들어 친구에게 먹게 했으나 그 친구가 하늘을 날기는커녕 며칠 동안 배가 아파 고생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런 어린 시절의 상상력과 호기심 그리고 이상한 행동 등이 인류 문화를 발전시킨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에디슨 한 사람이 가져온 부와 복지의 위대함을 고려하면 한 사람의 상상력과 꿈이 얼마나 소중하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나라는 이런 것들을 공부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보고 무가치하게 치부합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공부 혹은 학벌주의적 의미의 공부란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모릅니다.
어린이, 학생들의 상상의 나래를 공부라는 폭군이 짓밟은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우리는 한시 바삐 아이들에게 “놀지말고 공부하라” 는 말하기를 중단해야 합니다. 제가 독일에서 경험한 것은 실컷 놀아라 라고 해도 공부할 아이는 한다는 것입니다.
경상도 말투로 “씰데없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라는 말이 있는데 어른들 눈에는 쓸데없이 보이는 아이들의 행위나 말이 실은 쓸데 없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정반대입니다.
물론 너무 지나친 장난이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언행 등은 바로 잡아야 하지만 아이들의 탐구열이나 호기심 혹은 상상력 등은 억압하면 안되고 이를 좋은 방향으로 지도해 주어야 합니다. 특히 친구들끼리 하는 놀이나 게임은 극히 장려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뒤에 나옵니다.
2. 폭력에 대해
저는 초등학교 시절 학교 창고에 보관된 좀 오래된 의자와 책상을 친구와 몰래 꺼내어 그것들을 던져서 부수다가 수위 아저씨에게 걸려 혼난 적이 있습니다. 그 외팔이 수위 아저씨가 한 말을 “이 파괴주의자들아!” 였습니다. 그때 의자를 부순 것은 분명 잘못이나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집수리 일을 하다가 나는 대형 거울을 깨트려야 하는 일을 했습니다. 여기서 파괴 역시 인간의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어릴 때 아이가 파괴를 할 때도 너무 혼내지만 말고 인간의 파괴의 충동을 활용할 방법을 찾는 게 좋습니다. 가령 장작을 파괴한다든지 아니면 대형 쓰레기를 파괴하는 등의 일에 아이들의 관심을 돌리면 좋습니다.
우리는 파괴 혹은 폭력이라고 하면 무조건 나쁜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은 현실에서 파괴와 폭력이 꼭 필요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가령 폐차를 부수거나 폐기물을 파괴하는 경우입니다. 파괴없이 건설이 없습니다.
몇 년전 우리 학원에서 어떤 애가 신문지에 불을 붙여 불장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어떤 아주머니가 보고 이를 말렸습니다.
큰일 날뻔 했습니다. 그 아이는 엄마가 없는 가정에서 아빠도 일용직으로 살아가는 집이었고 그런 과정에서 아이는 소위 “일진”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균아 너의 파괴적인 충동도 그게 제대로 사용만 되면 좋은 것인데 나쁘게 사용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그의 폭력적인 기질도 그것이 군대같은 곳에서 사용되면 용맹하고 잔인한 습성이나 호전적인 능력은 도리어 상받을 것입니다.
이처럼 아이들의 부정적인 행동도 알고보면 유용한 측면이 있습니다. 가령 주의력 산만 같은 것도 실은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보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한 가지만 보면 결코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 주변의 여러 가지 상황을 한꺼번에 볼 필요가 생기면 어린 시절 주의력 산만한 애들이 도리어 더 잘 합니다. 가령 전투중인 경우 병사는 주변의 모든 상황을 한꺼번에 인지해야 합니다.
학교폭력의 문제 역시 이런 방향으로 풀어가야 합니다. 인간의 폭력성 그것은 그 자체로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닙니다.
3. 체벌
교사들의 징계 수단으로서의 체벌이나 매(폭력) 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사의 폭력 혹은 매질 등이 무조건 나쁜 것으로 규정되는데 이 역시 잘못입니다. 징계는 필요하고 그 수단이 문제인데 정학이나 퇴학보다는 폭력이 낫습니다. 폭력은 무조건 나쁘다 라는 인본주의적인 교육관이 대세를 이루는데 여기에 좀 문제가 있습니다. 때리는 것도 규제만 잘 하면 아주 효과적인 훈육의 수단이 됩니다. 특히 똑똑한 애들은 신체의 고통을 아주 민감하게 기억하고 따라서 잘못이 여러번 반복할 때 때리는 것은 좋은 효과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채찍으로 애를 가르치라” 는 구절이 있습니다. 잠언은 체벌을 금하지 말라 라고 가르칩니다.
요즘 학교에서 문제인 주의력 결핍증(ADHD) 같은 것도 꼭 나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학습진도입니다. 다들 빨리 배우고 시험쳐야 하는 분위기 내에서는 한 학생의 주의력 결핍증은 그에게 큰 손실을 줍니다. 그러니 학습 지진아나 수업 부적응자가 나옵니다. 이런 것은 모두가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성적 경쟁에서 발생합니다. 그러나 이 성적 경쟁은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닙니다. 가령 핀란드 같은 나라에서는 무학년 제도를 실시하여 아무와도 경쟁할 필요가 없고 수우미양가 등으로 평가될 필요가 없는 시스템을 운영중입니다.
4. 장난과 놀이의 교육적 의미
조선시대 아니 고려시대부터 “공부”, “공부” 하다보니 한국의 학교나 가정은 애들이 공부하지 않고 노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먼 옛날부터 이 땅에는 “공부하지 않고 논다는 것은 잘못이다” 라는 사상이 퍼져 있었습니다. 부모와 자녀들의 가장 큰 갈등이 “자녀가 공부하지 않고 논다”는 것입니다” 그런 전통은 해방이후 더욱 공고하게 되어 애를 잡는 부모들까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부모의 성적 욕심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아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심지어는 공부 때문에 엄마를 죽이기도 합니다.
2년 전인가 이 곳 서울시 광진구에서는 어떤 고등학생이 그의 어머니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었습니다.
모친살해의 원인은 엄마의 너무 공부 압박이 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학생은 “성적이 왜 이리 나쁘냐? ”핸드폰 게임 좀 그만하고 공부해라“ 는 등의 잔소리를 듣기 싫어한 나머지 자기의 엄마를 살해한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저는 우연히 서울 동부 지방법원에서 그 학생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자녀에게 성적 이야기, 공부 이야기를 많이 했으면 어머니를 죽였겠습니까?
그러나 공부의 반대 개념 즉 논다 혹은 놀이 또는 장난 등의 중요성은 점점 크게 부각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논다” 는 것은 “공부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는 “좋지 않은 행동” 이지만 서양에서는 반대로 이 “논다” 혹은 “놀이” 개념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우리 민족도 원래는 잘 놀고 즐기는 민족성이 있었지만 고려 시대 과거 제도가 도입된 이후 부터는 특히 청소년들에게는 노는 것은 죄악으로 여겨지고 오직 글읽고 책 보는 것에만 가치를 두었습니다.
조선시대 글씨로 유명한 한석봉은 “시간이 없어 공부하지 않겠다는 자는 시간이 있어도 공부하지 않는다” 라고 했습니다.
영어 속담에 “일만하고 놀지 않는 것은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All work and no play makes Jack a dull boy. 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이의 일이니 여기서 일은 아마 공부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속담은 특히 한국적인 학습 상황에서 많은 것을 의미합니다. 공부만 많이 하고 놀줄 모르는 아이는 바보가 됩니다. 문자 그대로 그렇습니다. 어린 시절 학습 압박이 너무 큰 상태에서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사고력, 도덕성, 창의성이 모자란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또 이런 것이 일반화된 사회 곧 학벌사회는 지도자들이 반드시 부패하게 됩니다. 조선 시대의 탐관오리들도 모두 이런 학벌주의 교육을 받은 관리들이었습니다.
5. 놀이의 문화적 의미
그러면 논다 혹은 놀이(play, game) 등이 가지는 의미를 문화적 의미를 한번 보겠습니다.
놀이의 깊은 의미를 밝힌 사람은 호이징하 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20세기 네델란드의 역사학자, 철학자로서 호이징하 혹은 하위징아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Johan Huizinga]
이 호이징하는 인간의 본질을 놀이하는 인간으로 보았습니다. 이를 호모 루덴스 라고 합니다. 즉 놀이하는 인간입니다.
호이징하에 의하면 놀이가 문화의 기초라고 합니다.
실생활과 대조되는 개념으로서의 놀이는 인간의 문화를 이루는 기초라고 합니다.
놀이(play)는 문화보다 오래된 일이고 놀이에서 문화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문화를 이루는 것은 사회성인데 이 사회성이 놀이를 통해서 발전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놀이의 본질은 재미(fun)입니다.
그리고 호이징하가 보는 놀이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놀이는 자유롭다, 놀이는 사실 자유 그 자체이다.
2. 놀이는 일상적이거나 실제 생활이 아니다.
3. 놀이는 그 위치성과 지속성에 있어서 일상 생활과 구별된다.
4. 놀이는 규칙을 창조한다. 놀이는 규칙을 절대적으로, 최고로 친다.
5. 놀이는 물질적인 이익과 연결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놀이로부터 어떤 이윤이 생길수는 없다.
여기서 보면 놀이 혹은 게임 같은 행사의 중요한 특징이 1. 자유롭고 2. 규칙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의 입장에서는 이 두 가지가 중요한데 자유로운 규칙성은 바로 인간의 도덕성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도덕성은 자율 개념을 말합니다. 자율도 일종의 강제요 구속인데 스스로 하는 강제요 구속이라는 점에서 타율과는 다릅니다. 억지나 강압에 의한 구속이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하는 구속이요 속박이라는 점에서 자율적입니다.
이게 바로 도덕과 윤리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도덕성은 놀이와 게임에서 성장하게 됩니다.
필자는 호이징하의 놀이-문화 사상과 조금 달리 놀이-도덕 사상을 좀 전개했습니다.
놀이와 게임은 이처럼 인간의 도덕성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합니다.
그러니 어울려 놀지 못하게 하고 공부만 시키는 한국의 역사가 그렇게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조선 시대가 전반적으로 그렇게 타락한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조선 시대 말기에는 국왕마저도 매관 매직을 공공연히 자행했고 자기 배를 불리기 바빴습니다. 세종대왕은 휼륭한 왕으로 알고 있지만 그는 백성들을 노예로 만드는 법을 제정하여 (종모법) 많은 노비를 창조했습니다.
이게 바로 한국입니다.
그러니 이명박과 박근혜 등이 그렇게 국정 농단을 하고 나라를 팔아 자기 배를 채우기 바빳던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자유와 자율이 없고 도덕성이 땅에 떨어진 나라가 한국입니다. 최근 대한 항공 조현아 부사장의 갑질 논란을 보십시오.
그 밖의 재벌 3새들의 갑질들을 보십시오.
과거가 그렇고 현재가 그렇습니다.
한국의 전통 문화에 유교가 있는데 이 종교(혹은 학문)는 예절과 도리를 그렇게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 종교는 인간의 도덕성 향상에 기여를 못했습니다. 그렇게 된 큰 이유가 과거제도 덕분입니다.
도덕에 대해 많이 아는 것이 인간을 도덕적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공자. 맹자의 도덕론과 예절 등에 대해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도덕적이거나 예절 바른 사람이 되지는 않습니다. 한 마디로 이 양자는 별개의 것입니다.
인간의 도덕성 혹은 도덕적인 자율성은 아는 것을 넘어서서 실제로 행함으로서 이루어 집니다. 게임이나 놀이 등은 실제로 행함을 배우는 체험이 됩니다. 그러니 놀지도 못하게 하고 친구간의 유희도 못하게 막는 한국은 도덕성 향상이 힘듭니다.
Play is free, is in fact freedom.
Play is not "ordinary" or "real" life.
Play is distinct from "ordinary" life both as to locality and duration.
Play creates order, is order. Play demands order absolute and supreme.
Play is connected with no material interest, and no profit can be gained from it.
6. 유희와 즐거움을 찾는 인간의 본성이 산업 혁명을 일으킨 동기이다.
국민일보 기사 인용
스티븐 존슨(Steven Johnson)이란 저술가가 최근(2014) 쓴 ‘원더랜드“ 어떻게 놀이가 근대 세계를 만들었나” 란 책에서 그는 놀이와 재미가 인류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왔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유희 본능, 역사를 바꾸다 라는 해설도 있습니다. 이는 위의 호이징하와 비슷한 생각을 보입니다. 단 존슨은 좀 더 세부적인 예를 가지고 인간의 유희 본능이 문화와 산업을 유도하고 있는 것을 보여 줍니다.
저자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책에 담긴 단락을 그대로 인용해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디어나 제도를 과연 누가 탄생시켰는지 친자확인 유전자 검사를 해본다면? 거의 대부분, 여가와 유희가 그 잉태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국민일보)
그러니까, 시시콜콜한 놀이 문화와 유행을 좇고 즐거움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본능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꿨다는 게 이 책의 골격입니다. 여기에 보태지는 살점은 수많은 사례들. 놀이와 유행이 혁신을 이끌어 세상을 바꿔놓은 에피소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건 패션과 쇼핑이 가진 역사적 파워를 전하는 내용입니다. 저자는 산업혁명의 도화선을 17세기 후반 영국 런던에 등장한 상점들에서 찾습니다. 이들 상점의 정면은 큰 유리로 돼 있었습니다. 매장 안은 정교하게 장식된 거울과 조명 덕분에 ‘귀족 저택의 접견실’ 같았습니다.
이전까지 별다른 인테리어가 없던 상점들이 경이로운 세상, 즉 ‘원더랜드(Wonderland)’로 거듭난 것이다. 주인들은 상점 분위기에 걸맞은 면섬유 옥양목을 선보였고, 손님들은 옥양목의 매력에 빠져들었습니다. 가격이 비싸고 내구성이 약해 별다른 인기를 끌지 못한 면이 각광받기 시작했습니다.
면이 대대적인 인기를 끌자 발명가들은 면을 대량생산할 기계를 만드는 데 매진했습니다. 방직기가 만들어지고 이런 현상은 증기기관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요약컨대 즐거움을 좇는 인간 심리가 반영된 상점의 등장이 새로운 소비문화를 낳고 산업혁명까지 이끌어냈다는 내용입니다.
이런 얼개는 산업혁명의 통념을 뒤집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산업화가 새로운 소비문화를 낳았다는 게 아니라 소비문화가 산업의 발전을 유도했다는 의미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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