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 여행)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레콜레타 묘지와 에비타
세계지구촌엔 많은 나라와 다른 인종에
거기에 걸 맞는 여러 가지 형태의 장묘문화가 있다.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도시 한복판에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정서와는 색 다른 화려한 레콜레타(Recoleta) 공동묘지가 있다.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가깝고도 먼 세계인데 예로부터
죽음에 대한 피안의 세계를 미화하고 막대한 비용을 드려 가꾸는 문화는
이집트나 진 시황 때나 지금까지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익히 들어서 어느 정도 알고는 왔지만
사람이 죽어 영원히 잠을 자는 데에도 최고급으로 장식되어
죽어서도 부귀영화를 누리는 고급호화 음택(陰宅) 도시가 여기에 있었다.
앞에는 널따란 공원이 잘 조성 되여 있어 푸른 잔디와 꽃들이 예쁘게 피어 있었고
주위엔 높은 빌딩과 큰나무가 더욱 눈길을 끌었다.


< 공동묘지앞 공원에 있는 큰 나무 >
---공원에는 옆으로 가지가 울창하게 뻗은 큰나무가 유독 눈길을 끌었는데
이 나무는 인도 산 고무나무 인 “꼬메라”라고 했다. ---
이곳은 부에노스 아이레스 지역 중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시내 제일 중심지라고 하며
그 주위로는 최고급 레스토랑 및. 유명한 쇼핑센터가 밀집해 있으며
고급 아파트와 각국 해외공관이 자리 잡고 있다고 했다.


< 공동묘지 앞공원에 있는 조각상 >
이 레콜레타 묘지는 1882년 카토릭 국가인 아르헨티나에서 교회 내에
무덤을 쓰는 것이 금지 되면서 당시 주지사이던 “베르나르디노 리바다비아”가
수도원의 과수원에 묘지를 설치하면서부터 유래 되였다고 한다.
현재와 같이 담이 쌓여진 것은 1881년이고 그 후부터 1930년 사이에
상류지배 계층의 호화장묘가 되어버리면서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수입한 최고급
대리석으로 전통적인 장식과 화려한 조각으로 건립된다고 한다.
레콜레타 묘지 값은 1m2 당 2.500만원 정도 한다고 하며
대부분의 무덤은 국가지정 역사기념물이라 하는데 아르헨티나의 역사를 증언할만한
독립영웅과 위대한 대통령들의 무덤이 많기 때문이란다.

< 레콜레타 공동묘지 정문 >
약 4헥타르 정도의 넓이로 이루어진 이 유서 깊은 묘지에는
총7.000기의 납골당이 조성 되여 있고 2.600만 명이 묻혀 있으며
70여기가 문화재로 등록 되여 있다고 한다.
노동자들의 어머니라고 추앙받고 있는 미모의 “에비타”가 이곳에 묻혀 있으며
역대 아르헨티나 대통령 중에서 13인이나 이곳에 안치 되여 있어
유명인사들의 최상의 유택이라고 한다.




< 반듯하게 구획정리가 잘된 묘지 >
나는 이곳을 들러보면서 외관상으로는 죽은 사람들의 묘지라고 하기보다는
구획정리가 아주 잘된 정돈된 주택단지와 같은 느낌을 받았으며.
문을 두드리면 금방 사람이 안에서 나올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양택(陽宅) 마을 같았다.
그러나 음산함과 적막함. 그리고 엄숙함이 정적 속에서 온몸을 휘감으면서
죽음에 대한 막연한 무서운 관렴과 공포의 두려움이 머리를 스치고
마음의 평정을 앗아감은 어쩔 수가 없었다.
섬뜩하게 마구 무리지어 돌아다니는 고양이 떼와 창살사이로 으스름히 드려다
보이는 납골당안의 모습은 지금까지 우리의 통념에서 으스스하고
오싹한 감을 주어 나도 모르게 움츠려짐을 걷어낼 수가 없었다.



< 성모상과 화려한 조각상도 있다 >
묘지는 각자 가문에 따라 어울리게 한 채의 집으로 건립 되여 있으며
대체로 동판으로 그 사람의 성함과 업적을 기리는 글이 부착 되여 있고
골목 마다 길 이름과 묘소의 번지수를 안내하여 관리가 철저하게 되여 있었다.
묘지에는 국민 대다수가 카토릭 신자이기 때문에 대부분 성모상을 주로 모셨고
간혹 유명한 성인들의 조각상도 꾸며 정성을 다하는 그들의 조상에 대한 추념이
동양인 못지않다는 것을 엿볼 수가 있었다.

< 에비타 묘를 알리는 동판들 >
묘안에는 응접세트와 꽃. 그림 액자 그리고 화려한 실내장식으로 고인을 기렸고
밤에 불을 밝히는 전등과 수도 시설까지 갖추어
그들의 조상의 묘를 꾸미는 정성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 했다.
이곳 사람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집보다도 훨씬 비싼 값에 묘지를
꾸미기도 하며 묘지를 어떻게 장식하느냐에 따라서
가문과 부를 상징하는 것으로 나타낸다고 한다.
주말이나 휴일에는 항시 이곳을 찾아와 참배와 묘소를 가꾸고 있으며
특히 “에비타”의 묘소에는 언제나 화려했던 지난날을 못 잊어
서민들의 참배와 관광객들이 줄을 잊는다고 한다.

< 관광객들이 내부를 들여다보고 있다 >
에비타의 묘소에는 다른 레콜레타의 귀족과 명망가들의 묘에 있는 근엄한
조각상이나 화려한 부조(浮彫) 같은 장식 없이 의외로 단출하고 검소했다.
그러나 다른 묘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꽃들이 죽은 지 50년이 지난 오늘에도
문에 수북이 꽃 혀 있었고. 참배객과 관광객들이 휩쓸려 그의 살아생전 업적과
저주의 양대 논란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국민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가면서 “영부인이나 정치가가 아닌 ‘가난한 에비타’ 로 아르헨티나 역사에
기록되는 것이 유일한 꿈이다”라고 했단다.
“극빈자들에게는 우상이요. 부자들에게는 창녀”라는 악평을 동시에 받는 그녀는
극한대립의 한계가 아직도 설왕설래 하면서 그녀의 모순 된 삶에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 파란만장한 삶을 살고간 에비타의 고은 모습 >
아르헨티나의 국모로 불렸던 “에바 페론“은
단지 아름다운 미모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많은 복지정책으로 아르헨티나의 국민들이 에비타에 대한 달콤한 환상이 아직도
사로잡은 것 같았고 그녀에 대한 사랑은 이방인의 시각만으로는 헤아리기 힘든
정서가 밑바닥에 깔려있는 것 같았다.
아름답고 총명한 그녀는 가난한 이들에게 우호적 이였으며
선심정책을 써 국민은 열광했고.
사로잡은 민심에 편승해 선진국보다 더 많은 휴가를 즐기고 일하지 않아도
수준 높은 연금과 교육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제도화 식혔던 것이다.

< 젊은 날의 아름다운 모습 >
에바 페론(Eva Peron)은
1919년 아르헨티나의 대초원(팜파스)의 시골 마을 로스 톨도스(Los Toldos)에서
농장 주인과 농장의 요리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농장주와의 사이에서 사생아 5명을 낳았는데 그 중 에바는 4번째였고.
출생부터 불우 했던 어린시절은 가난과 불행으로 얼룩져 있었다.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화려한 배우를 꿈꾸면서 에바는 1935년에 무작정
수도인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하여 하루 끼니를 해결하기 위하여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고향집보다 나을 것 없는 곤궁한 생활을 하였다.

< 많은 대중들 앞에서 연설하는 에비타의 모습 >
3류 배우와 아나운서. 모델 등을 거치면서 10여년을 비참한 생활을 했던 그녀는
자신의 미모가 가장 강한 무기임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마침내 1944년. 산 후안에서 발생한 지진피해를 돕는 자선 쇼에서
후안 도밍고 페론(juan Domingo Peron)이란 야심만만한 군인을 알게 되고
그녀는 삶이 극적으로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그 후 페론의 집권으로 가난한 농부의 사생아에서 단숨에 퍼스트레이디로 등극한
에비타는 가난이 한이 되어서일까?
빈민노동자천국을 만들겠다는 야심 찬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국가정책의 최우선순위를
빈민구제로 삼고 국가의 모든 재정을 노동자들을 위해 퍼붓게 된다.
에바는 “페론을 위하여”라는 명분을 내세워 기업가들이나 부유층의 재산을 강압적으로
탈취하여 빈민노동자들에게 무상분배 해 줌으로서 노동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면서
“성녀”라는 칭호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는 노동자 농민들의 천국을 만들겠다던 신념과는 달리 당시 전 세계
상류사회 여성들의 유행을 이끄는 호화스런 사치와 낭비로 아르헨티나 식자들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무작정 국가재정을 끌어다 무주택 빈민들에게 아파트를 지어주어
서민들을 감동시켰고 누구나 무료혜택을 받을 수 있는 종합병원 등을 각 지역마다
세워 초일류 복지국가건설을 꿈꾸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인생의 정점에서 1952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페론과 만난지
10년 만에 한 떨기의 꽃잎으로 스러져 버린다.
한편의 드라마와 같은 그녀의 삶이 꿈같다고나 할까?
에바의 죽음에 전 국민은 광적으로 애도했으며
한 달간의 장례식은 아르헨티나 역사상 가장 큰 국장으로 비탄어린 통곡 속에
장엄하게 꽃의 헌화로 거리를 뒤덮으면서 치러졌다.


< 전 국민의 애도 속에 치러진 에바의 장례식 장면 >
일명. 에비타라는 애칭으로 더 널리 알려진 퍼스트레이디 에바 페론은
“거룩한 악녀이자 천한 성녀”라고 표현들 한다.
그녀는 아르헨티나의 독재에 봉사 하였고 대중을 기만하고
대중적 인기를 정치적인 입지 확보에만 이용하여 대중이 좋아할만한 정책을
내세우어 정권을 유지하려 했다고 비난을 한다.
무지하고 오만하다는 이유로 식자층으로부터 멸시당하고 지나치게 사치와
인기영합으로 아르헨티나를 망친 포플리즘의 대명사라고 악평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는 아르헨티나의 뿌리 깊은 빈부격차를 해소하기위해 부의 재분배라는
명제를 자기 인생의 최고 목표로 삼고 노동자들의 진정한 벗이 되고자
그들의 고단한 삶 속으로 직접 뛰어 들어 갔다.
수없이 많은 일들을 초인적으로 처리하면서 많은 노동자 빈민 여성들을 만나
의견을 들어주었고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녀를 노동자 빈민계급을 마취시킨 악녀라고 비판세력들은 폄하하지만 실제로
그녀가 행한 수없이 많은 초인적인 봉사는 헌신적이었고 거짓은 아니었다.
실제 그녀는 가진 자에게는 더할 수 없이 표독했지만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는
언제나 자상하고 너그러운 어머니였다.
많은 학자들이 그녀의 이런 모순 된 삶을 출생과 살아온 경로가 순탄치 않아
가진 자들에 대한 분노와 절망으로 아로새겨진 탓이라고들 한다.

< 생존시 다정했던 부부의 모습 >
에비타의 포플리즘은 오래전부터 고착화된 소외계층의 근본모순을 방치한 채
임시방편의 사회복지정책으로 국내 경제상황은 적자일로에 다다라
파탄의 지경에 이르게 된다.
끊임없는 인플레이션과 실업. 노동자들의 동요로 결국 군부에 의해 페론정권은
물러나게 되고 에바는 그 중심에 서게 된다.
20세기 전반기 세계7위의 경제부국으로 도약했던 아르헨티나가 그 후 바닥없는
나락으로 추락하는 이유가 반드시 에비타 신화의 원인으로만 귀결시킬 수 있을까?
물론 그녀에게 많은 책임은 귀결되겠지만 무엇보다도 제일로 어렵게 만든 것은
과거 식민지 시절부터 뿌리 깊었던 지배계급의 유럽 문화 선호 경향과 함께
골수까지 배인 사치와 무책임한 정치인들의 무능과 부패에서 비롯된
국민적 의식 수준과 식민사관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느 누구도 국민과 함께 고통을 나누려 하지 않고 페론정권의 복지정책을
시혜적으로 받아드려 개혁적이어야 할 노동자들을 당장의 달콤한 사탕발림에
마비되도록 그들을 중독 시켰든 것이다.
에비타는 죽었으나 에비타의 신화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
그녀를 그리워하고 오늘도 추모의 행렬이 줄을 잇고 있음은 그녀의 환상에서
아직까지 깨어나지 못한 탓일까?
아르헨티나의 역사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에바페론의 사진은 인터넷에서 인용)
* * * * * * * *
# 페론대통령과 에비타의 사후세계인 묘지는 그럼 어떻게 되였을까?
1952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에비타가
세상을 떠나자 페론 전 대통령은 아내를 영원히 보존하기 위하여
미라로 만들어 전국 노동조합연맹 건물에 전시하며 사당에 안치하려 했었다.
그러나 1955년 구테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군부세력들은 페론주의자의 반발을 우려하여 1957년 비밀리에 에바의 시신을
이탈리아로 가짜의 이름을 붇혀 보낸다.
그 후 페론이 정권을 다시 잡은 후 에바의 미라는 17년 만에 본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고 이곳 화려한 친정가족 묘지인 레콜레타에 묻히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사후 외국으로 밀반출 되고 행방이 묘연하리 만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온갖 수난을 당하지만 에바의 미라는 여전히 생전모습과 가깝게
보전되여 있다는 것이다.
한편 1974년 74세로 사망한 페론 전 대통령의 시신도 1980년대에 도굴꾼에 의해
훼손과 수난을 당하면서 몇 번을 에바와의 합장을 시도했으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3번째 이장을 하여 지금은 “차카리타”에서 주말 휴양지였던 출생지인 “산빈센테”에
2006년10월 17일 소란 속에 묻혔다.
결국 페론 대통령은 “산빈센테”에 에바는 “레콜레타“ 묘지에 따로 묻혀 있다.
*** "한평생 호사스럽게 살아도 리콜레타에 묻히는 것보단 돈이 덜 든다" 는 말이 있을 만큼 유명하고 부유한 가문 출신만 이곳에 묻힌다.
셀수도 없이 많은 골목사이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들도 전해 온다.
한 무덤에는 서로 등을 지고 있는 남녀 두상이 세워져 있는데 이들은 생전에 부부였다고 한다.
사치를 일삼는 아내에게 남편이 돈을 주지 않자 아내가 "죽어서도 당신 얼굴을 보지 않겠다" 고 했기 때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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