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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화산(休火山)
박 화 성
모두들 나를 신자(神子)라고 부릅니다. 한자로 써놓으면 제법 그럴싸 하지요. 신의 아들이라니 얼핏 업수이 여길 수 없는 위엄마저 풍기거든요. 그렇지만 정직하게 풀이하여 귀신의 아들이라 그 말씀입니다. 귀신의 아들이라니 얼마나 섬뜩한 호칭입니까? 신재식이라는 아버지가 있었고 버젓하게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고정애라는 어머니가 계신데도 강보에서부터 나는 귀신의 아들로 죽 통해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출신이 귀신의 소생이었다는 것입니다. 가령 아버지가 끼쳐놓고 요사(妖死)를 했거나 횡사(橫死)를 했다고 합시다. 그런 불행한 씨라도 열 달 동안 어머니의 뱃속에서 조용히 자라나 뭇 사람의 주시와 동정을 받으면서 세상 밖에 나오면 이내 축복어 따르는 유복자가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를테면 아니 이를테면이 아니라 정작 나도 당당한 유복자이건만 아무도 나를 유복자라고 인정해주지 않고 도리어 귀신의 아들이라고 딱지 붙이듯 했단 말씀입니다.
게다가 내가 태어난 곳이 형무소의 감방이라는 데서 그 섬찍한 호칭이 더욱 튼튼한 밑받침을 달게 되었음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감옥소에서 출생한 귀신의 아들. 썩 어울리는 출신과 출신이라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나는 외가집 식구들에게서 따돌림과 멸시를 받았습니다. 자주 접촉한 일도 없지만 어쩌다가 한 번쯤 내가 심술이나 고집을 부리는 장면을 목도한 외할머니는 이내,
“앵이 감옥소 귀신이 씨운 새끼라 저리 못돼먹었어.”
하는 악담올 퍼부었어요. 귀신의 아들을 떼고, 감옥소 출생의 출신을 떼어버린 감옥소 귀신이라는 약어(略語)로 말씀입니다.
혼히들 친할머니보다도 외할머니가 더 만만하고 흉허물없이 정답다는데 내 경우만은 두 분의 사이에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친할머니는 무조건 어머니와 내 편이었고 맹목적으로 우리 모자를 사랑하셨지만 외할머니는 언제나 우리와 맞서서 원수처럼 대하셨고 따라서 외가집 언저리의 사람들마저 우리를 달갑게 여겨주지 않았습니다. 내가 강보의 유아로 있을 때부터 이십사 세가 된 지금까지 말씀입니다.
참 제 이름을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신현구라고 합니다. 감옥소 태생인 신자(神子)이니까 미천한 신분이라고 외가집 어른들은 깔보았지만 교육자 가문인 친가의 백부님들이 돌보시고 현숙하고도 씩씩한 어머니의 분투하신 덕분으로 만난을 돌파하고 현재 일류 대학교 정치과 삼학년 학생이 되기까지에 이른 것입니다. 물론 군복무도 재학 중에 깨끗이 치르었구요. 하필이면 요새 잘 괄리는 공과계통이 아니고 왜 말썽스러운 정치과를 택했느냐고 주위에서들 염려해주지만 아버지이셨다는 신재식 씨가 정치과 이학년에서 아깝게도 요절했기 때문에 어머니의 은근한 배려가 나를 정치과로 보낸 것 같습니다.
대학의 최고 학년생인 이십사 세나 되는 현대의 청년이 이제 새삼스럽게 귀신의 아들 어쩌구 한다면 누구나가 다 망발이라고 웃어넘기겠지만 내가 여지껏 살아온 사실이 엄연히 그러하였을 뿐 아니라 맘속 깊이에 풀지 못할 수수께끼가 있는 까닭에 이렇게 나를 노출시킴으로 귀신의 아들이라는 딱지를 떼어버리고 사람의 아들이라는 당당한 명칭을 가지려는 데에 고백의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인자(人子)로 태어났어도 결국 하나님의 아들 즉 신자(神의子)로 후세에 이름을 남겼지만 나는 귀신의 아들이라는 신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후세가 아닌 현세에서 인간의 아들로 참다운 인생을 살고자 이렇게 인자(人子) 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내가 그런 섬뜩한 호칭을 갖게 되었는지 다음에 나타나는 장면에서 짐작하시리라 생각됩니다.
1948년 4월 24일 밤 여덟 시 제주 성내리에서도 가장 끝동네 귀퉁이에 처연하게 서 있는 신재식의 집에는 고요하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말없이 움직이는 여인들의 치맛자락만이 가끔씩 무겁게 펄ㄹㄱ이었다. 자정(子正)에 있을 혼례식에 소용되는 약간의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혼례식이라면 그래도 경사(慶事)일 테고 경사일진대 웃음도 있을 법 하건만 그들의 입은 굳게 닫겨져 손과 몸만이 기계처럼 놀려지고 웃음은 커녕 어쩌다가 동작에 필요한 문답도 소리없는 극히 짧은 대화로 끝나곤 했다.
다만 삼월 보름 달빛이 넘칠 듯 가득히 찰랑대는 좁지 않은 뜰과 새하얀 꽃이 만개하여 환한 달빛에 더욱 화사하게 보이는 두 구루의 배나무가 귀기(鬼氣) 마저 도는 듯한 이 집의 분위기를 겨우 낭만적 정경으로 끌어올리듯 했다.
건넌방 문이 열리고 재식의 누이 재희가 침묵을 깨며 마루로 나왔다.
“큰아버지랑 오빠가 왜 입 때 안 오실 까?”
아무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니까 재희는 아랫방 툇마루에 걸터앉아 달을 쳐다보고 있는 어머니에게로 가서 그 곁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엄마. 언니는 또 웬일일까? 낮에 올 줄 알았는데.”
“이 난리통에 어찌 시간을 대 오겠니? 늦게라도 와만 주면 좋겠지만, 한림 같이 아직도 안 터지진 않았을 텐데.”
속삭이돗 탄식하듯 가만가만 말하는데도 여인들 틈에서 역시 소곤대는 듯한 대답이 들려왔다.
“한림 길이사 버얼써 터졌지요. 어제도 우리 집에 한림 사람이 왔다갔는데.”
“거봐요 엄마. 안 오실지도 모르지 않우?”
“아니다. 큰아버지 꼭 오신다.”
어머니의 신념을 증명하듯 일각때문이 삐걱 열리고 큰아버지의 부자(父子)가 들어섰다. 오십 고개를 넘을까 말까 한 풍채 좋은 신사와 이십여 세쯤 되어보이는 청년이다.
모녀는 퉁기듯 일어나 그들의 앞으로 갔다. 손님들의 손에는 손가방이 들어 있어서 재회는 가방 두 개를 양손에 받아들고 안방으로 앞서 들어갔다.
“오시며 고생은 안 하셨는가요?”
어머니가 시아주버님인 영진 씨에게 은근히 물었다. 그는 걸으며 대답했다. 달빚을 등진 그의 그림자가 마루 위로 쑥 올라갈 만큼 큰 키였다.
“왜요? 좀 말썽은 부리지만 그런 대로 버티고 왔습니다.”
“아무튼 잘 오셨어요. 어서 들어가셔요. 윤식아, 안방에 모시고 들어가라. 어서 저녁 드셔야지.”
“저녁은 먹구왔습니다.”
윤식의 대답이다. 굵직하고 무게가 있는 음성에 어머니는 문득 재식의 것인 듯 착각하고 사촌끼리 너무나도 흡사하다는 한탄을 하였다.
“이 소란통에 어디서?”
“다 통하는 재주가 있으니까요.”
“그럼 감주들이나 좀 드시지.”
어머니는 부엌에 지시를 하고 재희에게 가까이 오라 하여 귓속말로 물었다.
“언니는 뮐하고 있니?”
“뭔가 쓰고 있더군요.”
역시 재희의 귓속 대답이다. 어머니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쓰라린 듯한 긴 숨을 내쉬며 달을 쳐다보았다.
일각 대문짝이 부서질 듯이 쫙 열리고 보통이를 머리에 인 재순이 허둥대며 들어오는 것을 보고 여인들 중에서 한 사람이 우르르 마주 나가 보퉁이를 안아 내렸다.
“인제야 오는군. 우린 못 오는 줄 알았지.”
여인들은 웅성대며 반가워했다. 안방에서 영진 씨 부자가 내다보다가 윤식은 마루에서 내려갔다.
“누님 요옹케 빠져오셨소그려.”
“누가 아니래? 보퉁일 가져다가 저희네 신주 삼으려는지 그것만 달라지 않아?”
“거기 뭐가 들었기에요?”
“뭐는 뭐야? 괜시리 트집 잡느라고 그러지. 잡동사니 가져다가 잡화점 낼 테냐고 마구 악지를 쓰며 대들었지. 어떻게 해? 와야는 해야겠고 시간은 자꾸만 가고. 아이 땀이 다 흥건하게 났네그랴. 못된 새끼들 같으니라구. 인제 그만저만 날뛰 쟎고…….”
재순은 푸더분하게 지껄이면서도 실심하고 서 있는 어머니의 표정을 훔쳐보기에 신경을 썼다.
“그럼 저녁도 못 먹었겠구나?”
“엄마두 참. 그것들하고 쌈할려기에 저녁 먹을 틈이 어디 있어요?”
“언니 일루와. 내 밥 차려줄게. 언니 줄 거 따로 아껴두었거든.”
“아이그 그저 내 동생이 제일이지. 얘 재희야, 걘 어디 있니 지금.”
재순은 수선스럽게 말하면서 눈을 꺼벅 댔다. 재희는 말없이 건넌방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재순은 이내 심각한 표정이 되어 물끄러미 건넌방을 바라보다가 재희를 따라 부엌방으로 들어갔다.
영진 씨 부자는 대청에 초례청을 꾸몄다. 병풍을 치고 탁자를 놓고 화병에는 뜰에서 꺾 어온 배꽃을 꽂아 테이블 위에 놓았다.
“제 소원이 그렇다니 그대로 하긴 그대로 합니다마는 아무래도 썩 내키지는 않는군요.”
“끝끝내 제 소원을 고집하니 별수 있어요? 제 집에서는 완전히 떨어져 나온걸요. 부모 형제 다버리고…….”
“애기가 나온 게 아니라 그 집에서 걔를 쫓아낸 셈이지요. 자기네 자식 아니니 너 갈 데로 가라 했다며요?”
“글쎄 그렇긴 했다지만…….”
어머니는 말끝을 맺지 못하고 또 울먹였다. 영진 씨는 입을 다물고 윤식은 대문께를 바라보며 초조해하였다.
“열한시가 넘었는데 이 사람들이 왜 아니 올까? 또 무슨 일이 생겼나?”
“세상이 하두 소란하니 안심할 수가 있어? 와야 오나 부다 하지.”
재순이 향로를 가져다가 화병 반대쪽에 놓으며 말하는데 대문이 조용히 열리고 두 사람이 들어섰다. 검은 양복의 청년과 흰 두루마기에 큰 액자 같은 것을 옆구리에 낀 청년이었다.
윤식과 재순, 재회는 마당까지 달려내려가 그들을 붙잡고 반가워 어쩔 줄 몰라하고 그들을 마루 끝에서 기다리던 어머니는 두 청년을 한아름에 얼싸안으며 비로소 울음을 터뜨렸다.
“너희들은 살았는데…… 아이 구우 너희들은 살아왔는데에…….”
참고 있던 울음이 분출구를 얻은 듯 아픈 넋두리를 섞어가며 몸부림쳤다.
“제수님! 고정하십시오. 지금 이러시면 어떻게 합니까? 어서 진정하시고 일올 치르셔야지. 참 자네들도 어서 저쪽에 가서 잠깐 쉬도록 하게.”
영진 씨는 우는 사람을 달래고 손님들에게 앉을 자리를 분별해주었다. 재순은 그들에게 감주로 목을 축이도록 권하면서 쉬지 않고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열심히 묻고 있었다.
“재희야! 건넌방의 준비는 다 되었더냐?”
영진 씨가 물었다: 향을 갉아내고 있는 재희 대신 재순이 건넌방으로 들어가더니 이윽해서야 도로 나왔다.
“큰아버님, 시작하시면 어떨까요?”
“오냐 알았다. 마당에 계신 분들도 다 올라와서 참례하시게 해라.”
마침 괘종이 열두 번을 뎅뎅 울렸다. 영진 씨의 지시로 사람들은 각각 제자리를 찾고 영진 씨가 주례석에 섰다. 검은 양복의 청년이 사회역을 맡았다.
“지금 신랑 신재석 군과 신부 고정애 양의 결혼식을 올리겠습니다.”
나지막하고 폭넓은 음성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숙연하기만 하던 좌석이 더욱 고요해졌다.
“신랑 입장!”
흰 두루마기의 청년이 액자를 안고 천천히 걸어와 미리 시설해놓은 자리에 기대어놓았다. 신재식의 사진이었다. 갸름한 윤곽에 곱슬머리칼이 매력 있고 크지 않은 눈은 날카로웠다.
“신부 입장!”
흰 두루마기가 나타지자 사회가 더 낮은 목소리로 신부의 입장을, 알렸다. 배꽃같이 새하얀 치마저고리를 입은 신부 고정애가 흰꽃을 안고 고요히 걸어와 주례의 왼편, 사진의 우측으로 신랑과 나란히 섰다. 배꽃처림 하얀 면사포 아래 신부의 얼굴도 배꽃같이 청순하다.
누구에게선가 가느다란 오열이 새어나왔으나 이내 조용해지고 향로에서는 실오라기 같은 향연이 피어올라 은은하게 번져든다.
“이제 신랑 신부가 상견례를 하겠습니다.”
주례가 자기를 향해 있던 사진을 신부에게로 돌리고 신부 고정애는 신랑 신재식에게 신부로서의 첫 번째의 절을 올렸다.
“지금은 신랑 신부의 예물 교환이 있겠습니다.”
주례인 영진 씨가 재순이 드리는 반지갑을 받아 그 속에서 둥근 백금반지를 집어내고 조용히 신부에게로 다가와서 그의 왼편 무명지에 신랑의 선물인 결혼반지를 끼워주었다.
신부인 고정애는 품에 안았던 흰 꽃묶음 속에서 끝에 별이 달린 백금목걸이를 내어 신랑의 사진에 걸어주었다. 오열 대신으로 이쪽저쪽에서 콧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주례 선생님의 주례사가 있겠습니 .”
주례인 신영진 씨는 잠깐 목도에 잠긴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고 이어 입을 열었다.
“이제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있을 성싶지 않은 혼령과의 결혼식은 끝났습니다. 이로써 신재식은 고정애의 영원한 남편이요, 고정애는 신재식의 영원한 아내임을 여러분에게 선포합니다.”
주례의 침통한 선언에 사회까지도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는 넋을 잃은 사람처럼 멀거니 신부만을 주시하고 앉았는데, 그러한 숙모를 윤식이 제 팔로 받쳐주고 있었다.
“재식 군은 여러분이 알쿠 계시다시피 정치학을 전문하는 유망한 학도로서 뭇 사람의 촉망과 기대를 한몸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제 결혼식인 오늘 이 자리에 있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만 것입니다.”
목이 메는 듯 영진 씨는 말을 끊고 밭은 기침을 두어 번 하여 목을 트인 후에 다시 계속했다.
“재식 군의 육신은 비록 이곳에 없을지라도 그의 혼령은 엄연히 이 자리에 참석하여 그의 아내가 되기를 갈망하는 신부 고정애와의 결혼식을 이룬 것입니다. 신부 고정애는 남편인 재식 군의 보호로써 많은 세월에서 신재식의 홀륭한 아내로 두 사람의 인생을 빛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사람의 결합을 충심으로 축복하며 오늘밤 이 결혼식에서 뜻깊은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도 음으로 양으로 두 사람의 앞길을 열어주시고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간곡하고 호소하는 듯한 주례사가 끝난 후에 사회가 다시 알렸다.
“지금은 신랑 신부가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주례가 신랑의 사진을 신부에게 들려서 돌아서게 하고 신랑의 사진을 안은 신부가 허리를 깊숙이 굽혀 공손한 절을 올리자 숙연한 분위기와는 대조적인 박수 소리가 우레처럼 터졌다.
그렇게 하여서 혼령의 아내가 된 고정애 신부는 그날부터 눌러 할머니의 새며느리가 되었고, 따님이 혼백 결혼을 했다는 소문에 외가댁에서는 외할머니가 기절까지 하는 소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원래 서울 유학생이던 신재식 씨와 목포 유학생이던 고정애 씨는 본도에서도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사이지만 제주까지 왕복하는 여로(旅路)에서 더욱 절친하게 되었고 그러는 동안 의지가 통하는 청춘 남녀는 물불이라도 가리지 못할 만큼 열렬한 사랑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목포의 일녀(日女)들 학교에서 배우고 있던 고씨는 해방이 되던 다음 다음해(1947년)에 여중을 졸업하였으나 완고한 부모의 반대로 상급학교에 취학하지 못하고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고, 신씨는 세칭(世稱) 일류대학에 입학하여 사람들의 선망을 받았으나 고씨외 가문에서는 외면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유야 뻔하지요. 대대로 부(富)를 이어오는 고씨 집안의 남자들은 관계(官界)와 군문(軍門)에서 국록(國祿)을 타먹으며 떵떵거리고 살고 있는 반면에 육지에석 떠돌이 교사로 들어와 뿌리를 박고 겨우 연명이나 하고 살아가는 신씨네인 까닭에 도시가 자기들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네의 귀한 고명딸이 하찮은 신재식과 죽을 둥 살 둥 모르게 어울려 있는 것을 누차에 걸쳐 강경하게 타일렀건만 결국은 결혼까지 하겠다고 맹럴하게 주장하곤 나서는 딸에게 차차 중오와 환멸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1948년 4월 3일에 폭동 사건이 일어나 고씨 가문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다소 괴로움을 당하였고 그때는 구월이 신학년이어서 학기시험을 끝내고 봄방학에 고향에 돌아와 있던 신재식 씨는 행방불명이 되었다가 결국 죽음이 확인되었던 것입니다.
내용이야 어찌 되었건 일방적으로 신씨를 원수로 치부하고 있던 고씨 집안에서 딸이 기어코 신씨의 집으로만 들어가 살겠다고 버티는 까닭에 그들은 별수없이 고정 애를 포기하였고, 딸은 좋아라고 집을 뛰쳐나와 애인끼리가 언약하여 정해놓은 4월 24일에 기어코 혼백 결혼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그래도 한가닥의 정은 남아 있었던지 고정애 씨는 어머니가 기색하였다가 오랜만에 소생하여 겨우 의식을 회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어느 날 밤에 조용히 친가를 찾아왔었답니다. 들어서자 올케들의 눈초리가 싸늘하게 모가 서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어머니야 설마 어쩌랴 하고 딸은 어머니의 발치에 내려 앉아 어머니를 조용히 불러 병세가 어떠시냐고 물었더니 딸을 본 어머니는 다 죽어가는 시늉은 간데없이 어디에서 그런 힘이 솟구쳤는지 자리를 차고 벌떡 일어나 앉으며,
“이 귀신의 기집년이 어디라고 감히 내 집에 발을 댔느냐? 썩 나가지 못 할까?”
하는 고함을 치고 눈을 부릅뜨며 이를 드득 갈아붙이더랍니다. 졸지에 그 꼴을 본 딸은 어안이 벙벙해 멀거니 앉아 있었더니 두 번째의 욕설이 떨어졌습니다.
“귀신의 기집이 됐으니 너도 인젠 귀신이다. 이년! 이 더러운 귀신년 같으니라고. 얘들아! 이 귀신 쫓아내라! 어서 썩 쫓아내라!”
게거품올 물고 발악하던 병자는 자기의 독을 못 이겨 다시 쓰러지고 아니나다를까 을케 두 사람이 들어오더니,
“빨리 나가요! 어머니가 겨우 진정 되셨는데 왜 와서 더쳐투려요?”
하고 시누이의 팔올 잡아 일으키더래요.
굼벵이도 밟으면 꿈를한다는데 벌레가 아닌 고정애 씨의 감정인들 그런 모욕올 당하고 폭발하지 않올 수 있겠어요? 아무리 모녀간이지만 말씀입니다. 더구나 올케들의 그 말본새라니 자기네가 언제적 효부이었다고. 블효막심한 며느리들인 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시누이에게다가…….
“손 놔요! 귀신의 손 잡았다가 모진 귀신 붙으면 재미있는 세상들도 못 살 텐데 썩 놓지 못해요?”
혼령과의 결혼을 고집하여 성공한 만큼 고정애 씨의 성격이 어떻다는 것쯤은 누구나가 다 짐작할 만하지 않습니까? 그 수려한 눈을 모질게 훔쳐뜨고 날카롭고 쟁하게 울리는 음성으로 올케들에게 대들었습니다. 위엄이 서릿발처럼 돋아난 얼굴을 내려다보던 올케들은 부지중에 손을 떼고 머쓱해 서 있는데, 이번엔 어머니를 향하여,
“갑니다 가요. 귀신 물러가니 사람들끼리 행복스럽게 잘들 살아보세요.”
던지듯 뱉듯 무겁게 쏘아붙인 딸은 엄연하게 일어서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마침 집으로 돌아오던 대령의 계급장이 달린 군복 차림의 둘째 오빠와 대문간에 서 맞닥뜨렸습니다.
그는 상큼하게 얼어붙은 누이의 표정에 우선은 멈칫했으나 그 역시 속속들이 쟁여진 울화가 터지는 듯 발을 탁 구르며 군대식 호령을 터뜨렸습니다.
“야! 짜식 너 여기 왜 왔어?”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던 고정애 씨는,
“못 올 텔 왔기에 그냥 가는 거예요.”
하는 대답을 휙 던지고 대문 밖으로 유유히 걸어나왔더랍니다.
그 후로 외가댁과의 인연은 완전히 끊어지고 고정애 씨는 자애로운 시어머님과 상냥스럽고 영민한 시뉘와의 평화스러운 나날을 보내면서 손 위 시뉘인 재순 씨의 세심한 배려와 한림 중학교의 교장이신 백부님의 지독한 사랑을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한림 중학교의 말이 났으니 잠깐 그 이력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원래 그 학교는 백부님인 영진 씨와 내게로는 조부님이 되시는 즉 재식 씨의 아버님이시고 영진 씨의 친아우가 되시는 영태 씨가 설립한 학원이었는데 해방이 되자 중학교로서의 자격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일제 치하에서는 좀처럼 학교의 허가를 내주지 않고 학원으로서만 묶어두었기 때문에 학원을 그만큼 키워오기에 두 분의 고충은 여간 크고 심각하지 않았다 합니다.
그러나 영태 씨는 학교의 인가를 받은 그 기쁨도 미처 사라지지 않은 1946년 1월에 별세하셔서 영진 씨가 초대 교장이 되셨고, 그의 둘째 아드님인 윤석 씨가 교무주임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소란스럽던 제주도의 치안도 평정이 되고 파란만장한 초여름과 영주 선경의 극치를 나타내는 녹음과 단풍의 계절이 뒷걸음침에 따라 고정애 씨에게는 점차로 이상(異常)이 생겨났습니다.
고씨 자신이야 자기 몸에 일어나는 자초지종의 증세를 잘 알고 있겠지만 오직 자기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할 뿐이었겠지요. 그러나 밖으로 나타나는 이상이야 어찌 남의 눈을 가릴 수 있겠습니까?
11월이 되자 고씨의 배는 완연하게 둥실 두드러졌습니다. 초산이어서 그때까지는 몸매의 이변(異變)이 없었으나 날로 커가는 태아(胎兒)의 성장을 막을 길이 없으니 임신이라는 것을 숨길 도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주위의 쑥덕임이 여러 가지로 변질도 되고 진화(進化)도 되었숩니다.
“분명 혼백 결혼이 아니었소?”
“누가 아니래요? 우리도 가서 도와주며 참례하지 않았나베요.”
“거 참 이상하지? 혹시 죽기 전에 만들어놓은 것이나 아닐까?”
“그럴 수도 있지만…… 이봐요. 혹시 살아 있는 거나 아닐까?”
“에끼 죽은 건 확실하지 않아?”
“누가 시체릍 확인했어? 재식이가 죽어 넘어졌는데 어떤 작자가 끌고 가는 것을 목도하고 도망쳐온 방앗간 아들의 말을 그대로 믿은 거래요.”
“그러니 틀림 없이 죽은 거 아니요? 예수라고 다시 살아나겠소?”
“그렇다면 그 애는 뉘 애란 말요? 설마 혼령이 씌어서 아이가 된 건 아니겠지. 혼령이 어떻게 애를 만들어?”
“아유 머릿살 아파. 어미 자신이야 알고 있겠지. 우린 그만두자구. 결말도 없는 말 밤낮 해 뭘 하오?”
그런 대화는 그 사실을 아는 집집마다에서 계속되어 나중에는 재식이가 꼭 살아 있을 것이라느니, 정애에게 딴 애인이 있어 임신이 되었다느니, 두 가지의 결말로 일대 도약(一大跣曜)을 했었더랍니다.
고정애 씨는 가끔 수사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결혼 직후에도 몇 번인가 불려가서 신재식 씨의 행방불명이 된 그 현장과 성격에 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었었으나 아무런 혐의가 없으므로 늘 무사하였고, 생활비도 한림 백부님에게서 영태 씨의 은급이랄까 영구 봉급이랄까의 명목으로 보내오기 때문에 군색하지 않은 살림 을 해왔던 터이었지요.
그러나 임신이라는 새로운 사실에서 문제는 좀 달라졌습니다. 파다하게 소문이 돌아 있는 재식 생존설과 딴 애인이 있다는 풍설이 도화선이 되어 고정애 씨는 수없이 수난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으니까 말씀입니다. 애인이 있다는 말은 당초에 무근한 낭설이니까 곧 바로잡아졌지만 생존설까지 부인하는 데 대해서는 모두가 잘 납득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재식 씨가 생존해 있을 때에 임신된 것이라면 흰눈이 펄펄 날리는 십이 월쯤에 반드시 아이가 출생되어야 할 게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십이 월 중순이 지나 하순에 접어들었건만 출산 소식은 감감하고 오히려 엉뚱한 큰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1949년 1월 17일 여수 형무소의 여자 감방에는 만삭의 고정애가 새우잠이나마 이루지 못하고 전전반측하였다. 이쪽저쪽으로 바꾸어 누워보아도 태아의 압박과 동요에 잠시도 편한 위치가 되지 않는 까닭만이 아니다.
오늘은 음력 섣달 보름날. 시어머니의 생신이다. 시집 와서 처음 맞이하는 어머니의 생일을 외며느리로서 한 번 푸짐하게 잘 차려드리려고 몇 달 전부터 은근히 별러왔었는데 생일차림은커녕 이런 돌발 사고로 어머님은 얼마나 애통하고 계실까. 더구나 만삭의 임신부를 감옥에 보내놓고…….
고정애는 무거운 몸을 겨우 뒤채며 피가 맺히는 한숨을 내뿜었다. 곁자리에 끼여 있던 여인도 덩달아 긴 숨을 내쉬었다. 달빛은 짧고 좁은 창문에라도 새어들어 여인의 어깨 언저리에 창살 그림자를 길쭉하게 폈다. 고정애는 또 한 번 피가 듣는 듯한 한숨을 불어냈다.
고정애가 이곳으로 끌려온 것은 크리스마스의 열기가 돌기 시작하는 12월 22일, 이 해 들어 제일 혹한이던 동지날이었다. 동지팥죽을 한솥 가득히 쒀놓고 붙들려온 것이다.
여수 순천 사건이 발생된 본거지인데다가 그로부터 두 달밖에 경과되지 않은 시가의 분위기는 역시 제주 사건 이후의 제주성내의 그것과 흡사하였다. 다만 경찰보다도 군인들의 활약이 주도적인 것 같은 것만이 달라 보였다.
고정애가 연행된 곳도 군의 기관이었다. 그들은 대뜸 신재식이 어디에 숨어 있느냐고 물었고, 고정애 네가 이 반란사건에 관련된 어떤 군인을 하룻밤 재워준 일이 있지 않느냐는 허무맹랑한 심문을 했다.
영리한 고정애는 이런 허무맹랑한 신문을 받게 된 그 이면에 반드시 음험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음을 직감하고 곧 그런 헛소문올 발설한 장본인을 대달라고 맹렬히 추궁하였더니 며칠 후에야 관련자를 재웠다는 혐의는 풀렸으나 신재식을 왜 죽은 사람으로 가장하여 결혼식까지 올렸느나는 꽤 구체적인 질문만은 좀처럼 늦추지 않았다.
그들이 내세우는 이유는 고정애의 임신한 사실이었다. 혼령이 아이를 만들 수는 절대로 없는데 너의 엄연한 현실은 남편이라는 신재식의 생존을 훌륭하게 중명하고 있다는 결론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차일피일 미뤄온 것이 새해를 훨씬 넘어 반달이나 지난 이날까지 이르른 것이다. 그 동안 재순과 재희가 함께 다녀가고 백부님 부자는 번갈아와서 차입과 면회를 해주었다. 그럴 때마다 백부님은 곧 나오게 될 테니 안심하라고 위로를 하셨으나 재순 자매는 올케의 덩실한 배와 기미투성이가 되어 있는 수척한 얼굴을 바라보며 울기만 하다가 돌아간 것이다.
‘아이 가엾으신 어머님!’
정애는 집에 혼자 남아 있을 어머니를 생각하면 언제나 구곡간장이 녹아나는 아픔을 느낀다. 딸의 임신 소식을 듣고는 더더구나 만장같이 펄펄 뛰며 갖은 악담을 퍼부었다는 친어머니는 꿈에 보인대도 섬뜩할 것 같다. 더욱이 어떻 게든지 자기를 궁지로만 몰아넣으려고 하는 친가 오빠들과 그 언저리에 생각이 미칠 때는 소름마저 으스스 돋아나는 것이다.
아득히 닭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곁에 낀 여인이 그 통에서도 잠꼬대를 하느라고 배퉁이를 어깨로 치며 중얼대어서 정애는 깜짝 놀라 두 손바닥으로 배를 감쌌다. 문득 그제 심문관에게 항변하던 말이 되살아났다.
“당신네는 눈에 보이는 내 배만을 문제삼는 겁니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임신이란 아니 출산이란 지정일보다 훨씬 빨라질 수도 있어요. 팔 개월이나 구 개월 만에 출산할 수 있는 반면에 훨씬 늦어질 수도 있단 말입니다. 만 십 개월을 잡을 만큼요. 그런데도 자꾸만 없는 사람의 종적을 추궁하면 난들 어떻게 할 도리가 없지 않아요? 당신들이 말하는 대로 그이가 살아 있기만 하다면 난 그 이가 어떤 중대한 죄인이어서 함께 갈산 지옥엘 가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놓치지 않을 겁니다. 정말입니다.”
그들은 눈을 반짝대면서 들을 만하고. 었었으나 아무런 결말도 없이 또 이대로 방치해두는 것이다.
다음날은 아침부터 고정애에게 진통 비슷한 아픔이 와서 종일 고통을 겪다가 다음날 아침에야 곁에 있는 여인의 보고로 정애는 병감에 불려가 의사의 진단을 받았다. 오일 이내에 해산하리라는 것이다. 정애는 미리 해산에 필요한 것들을 나이 지긋하고 비교적 친절한 여간수에게 부탁하여 약간 준비한 것이 있었지만 종시 이십이 세의 어린 산모에다가 아무런 경험이 없는 초산에 장소마저 지극히 자유롭지 못한 감방이고 보니 불안과 공포가 겹쳐 날마다가 두렵고 괴롭고 지루하기만 하였다.
드디어 닷새 후인 1월 24일 오전 열시에 고정애는 병감 한구석에서 남아를 분만하였고 산모와 출생아가 함께 건강하다는 것에 겨우 맘을 놓았던 것이다.
나 신현구는 음산한 감방 한구석에서 그렇게 인생으로의 첫 순간을 맞이한 것입니다. 여러 갈래의 의문점을 안고 말씀이지요. 아버지가 죽었다 살았다, 있다 없다, 혼령이다 아니다, 잡다한 소음도 소음이려니와 하필이면 감옥 출생이라니 참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비상(非常)한 존재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러니 누가 이 신현구를 결혼의 대상은커녕 애인으로라도 택할 용기를 내리겠습니까? 재수없다는 타박 맞기 안성맞춤이지요.
그건 그렇고. 어쨌든 나의 젊은 어머니는 생후 일주일밖에 되지 않은 강보 영아를 안고 일월 삼십일 이른 아침 여덟시에 형무소의 문을 나왔습니다. 겨울의 여덟시면 바람도 맵고 한기도 제일 날카로울 시각인데 이 가련한 모자를 마중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더구나 제대로 조리도 섭양도 못 해본 산모는 일주일에도 몸을 잘 가누지 못할 만큼 쇠약해 있었는데 말씀입니다. 애기의 출생과 출옥 날짜는 전보로 본가에 알렸지만 풍랑이 심하여서 배가 결항하였는지 옥문 밖에는 낯익은 얼굴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잠깐 두리번거리눋데 저쪽에서 신사 내외분이 달려와서 우리를 얼싸안았습니다. 목포 사범학교의 교유로 계시는 백부님의 큰아드님 즉 윤식 씨의 형님 형식 씨 내외분이 무전으로 연락한 아버님의 통고를 받고 밤차로 달려오신 것입니다. 진실로 절처봉생이란 이런 경우에 꼭 적용되는 말이었습니다.
두 분은 추위와 주림과 희열로 발발 떨고 있는 어린 산모를 가까운 주막에라도 들어가 어한을 시켜야 한다면서 제일 가까운 음석점으로 들어갔습니다.
다행히도 뜨뜻한 방을 안주인이 선뜻 내주어서 모자를 눕히고 부인이 분주하게 드나들며 우리를 먹이고 재우고 하는 시중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분들의 주장은 우선 목포로 내려가 자기의 집에서 3·7일 즉 이십 일간의 산모 후산을 깨끗이 치르어 본가로 보내겠다면서 오후의 급행으로 떠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외가댁과 어머니와의 관계를 정확히 모르고 있는 형식 씨의 내외분은 자기와의 중학고 동창인 고광석 대령 즉 어머니의 둘째 오빠인 그분이 바로 여수역 앞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여수의 치안 확보를 위하여 수완과 능력이 비상한 고 대령이 임시로 출장하였다는 자랑 비슷한 말까지 덧붙였습니다.
굳이 반박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어머니는 잠자코 있을 따름이었는데 이분들은 여수역에 이르는 도중에서 기어코 그 고씨의 집에 들르고 말았습니다.
“광석이! 광석이 있나?”
퍽 소탈한 성격인 듯 형식 씨는 문간에서 거침없이 옛친구를 부르고 이 시간에 어떻게 마침 집에 나와 있었던지 광석 씨는 어김없이 현관에 나왔습니다. 역시 늠름한 군복 차림이지요.
“고 대령 무고하신가?”
“어 형식이. 자네 웬일인가?”
외가댁에서는 신씨 가문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는데도 이 두 분의 우정만은 그런 사이가 아닌 듯 퍽 정다웠습니다.
“어서 올라오게. 나 마침 또 나가려던 참이었네마는. 웬일인가? 자네.”
반갑게 악수를 교환한 후에 고 대령이 형식 씨에 그렇게 말했습니다.
“응, 나 우리 질부 마중왔네.”
“질부라니?”
“아 정애 말여. 일주일 전에 아들 낳아서 오늘 출감했지 않나? 지금 저기 있네. 얘 아가!”
형식 씨가 아기를 안은 자기의 아내 곁에 다소곳이 서 있는 어머니를 가리키며 의기양양하게 불렀습니다. 어머니에게 힐끗 눈길을 보내던 고 대령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그 눈살에 독기를 잔뜩 올렸습니다.
그러는데 이들의 대화를 들은 듯 안에서 올케의 모습이 나타나 문 밖의 광경을 일별하고는 이내 남편의 팔을 이끌고 안으로 가더니 고 대령이 다시 나와서 격한 음성으로,
“자네만은 반갑네마는 저 귀신의 기집이나 귀신의 자식만은 집에 들일 수 없네. 다음에 자네나 만나세.”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내가 생후 맨 처음으로 귀신의 자식이라는 호칭을 얻은 것이 바로 이때였습니다. 이번에는 형식 씨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습니 다.’
“뭐라구? 귀신의 기집? 귀신의 자식? 누가 귀신이란 말어냐? 웅.”
형식 씨는 대뜸 고 대령의 멱살을 잡으려다가 군복임을 깨닫고 손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입으로는 총알처럼 퍼부었습니다.
“네 눈엔 아무도 안 보이냐? 다 귀신으로 보인단 말이지? 누가 진짜 귀신 인지 두고보자!”
형식 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와서 벌써 얼마큼이나 앞서가는 우리를 따라오셨습니다.
나중에 들은 말이지만 고 대령의 아내는 불길한 사람들 즉 감옥소에서 낳은 귀신의 자식과 그 어미가 다녀갔다 하여서 귀신을 쫓는 무당의 푸닥거리까지 하였다는 것입니다.
세월은 흐르는 물같이 빠르다고들 하지만 우리 모자에게는 가시밭을 걷는 듯한 괴로운 나날이 더디게 지나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도 내가 중학생이 되던 첫날 중학교의 교복을 입히시면서 기뻐하는 듯 슬퍼하는 듯 복잡한 표정을 하시던 어머니와 두말 없이 나를 붙들고 좍좍 울어대는 할머니 두 분의 영 상은 늘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1961년에 우리는 한림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내 중학 진학 때문에 전 해에 이사온 거지요. 6·25동란에는 다행히 제주도가 피난처로 되어 있어서 별다른 고생은 없었지만 내 출신이 언제나 말썽을 빚어서 할머니와 어머니의 심정을 괴롭게 하였던 것입니다.
나는 잊혀지지 않습니다. 국민하교 사학년 때에 외가댁의 아이들과 동급이어서 자주 싸웠는데 한 번은 그 집에까지 붙들려가서 외숙모란 여인에게 따귀를 맞으며 주문처럼 뇌까리던 귀신의 자식이란 언어하며, 외할머니란 노인의 감옥소 귀신이 씌어서 못돼먹었다는 저주의 욕설하며를 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에는 절대로 절대로 잊어먹지 않을 것이니까요.
한림으로 이사오면서 제일 시원한 것이 외가댁 아이들과 헤어지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일 자랑스러운 것은 우리 할아버님들이 세우신 학교에서 당당한 중학생이 되어 있는 일이구요.
나는 일학년 일학기에서도 우리 반에서 최고점을 땄습니다. 좀 쑥스러운 자랑 같지만 국민학교에서도 줄곧 최우등의 자리를 빼앗긴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외가집 아이들이 제 집의 어른들이 지껄이는 말을 들은 대로,
“귀신의 아들이라 귀신같이 공부를 잘하는 거지? 그렇지 넌?”
어쩌구 하다가 내게서 대판 얻어터지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여름방학에는 애월(涯月)에서 큰 상점을 하고 있는 재순 고모댁에 가서 거기의 사촌 형제들과 얼마나 재미나게 잘 놀고 왔는지요. 할머니와 어머니께 드릴 선물을 잔뜩 가지고 온 것은 물론, 학과의 숙제도 빠짐없이 완벽하게 해왔기 때문에 가을 학기를 신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더니 우리에게도 슬픈 날이 닥쳐왔습니다. 큰할아버지께서 교장의 직을 그만두게 되신 것입니다. 육십일 세 이상의 노인들은 모두 현역에서 물러나라는 문교부의 새 학령에 따라 작년에 회갑을 지내신 조부님이 현직에서 떠나게 되셨는데, 아직도 학교에 대한 기획과 포부가 많은 터에 갑자기 그 모든 애착을 버리고 돌아서시기란 너무나 한스러우신 듯 무한히 슬퍼하시고 애달파하셔서 주위의 우리들 역시 서운한 심정을 달래기 어려웠습니다.
“아직도 십 년은 끄덕없겠는데, 어허 인제 나도 퇴물이 되었단 말인가?”
조부님의 탄식 소리를 들으면서 어머니도 퍽 서글퍼하셨습니다.
구월말에 교감이던 분이 교장이되고 조부님이 이사장이 되셨으나 웬 일인지 옛날에 그 벌벌 타오르는 듯하던 정열적인 활동적인 패기는 보이지 않고 풀기가 없이 축 늘어진 듯한 인상을 풍기시어 우리를 슬프게 하였습니다마는 윤식 백부님이 교감이 되셔서 불행 중 다행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대로 나는 할머님과 어머니와 고모들, 참 재희 고모도 이제는 어엿한 사모님이 되었어요. 우리 학교 교무주임 선생의 부인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백부님들의 보호와 사랑을 맘껏 받으면서 중학의 과정을 최우등생으로 마쳤습니다.
가시발길을 걷는 듯이 더디게만 느껴지던 세월이었는데 돌아보니 어느덧 십여 년이 살같이 달아나고 만 듯한 놀라움도 곁들여 한편 흐뭇한 맘도 들었습니다. 더구나 내가 변성이 된 음성으로 소년답지 않게 엉뚱한 말을 지껄일 때에 대견해하시는 할머니와 어머니를 보면서는 누구의 자식이 되었든 감방이 아닌 마굿간에서 태어났더라도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만을 다행하게 생각하였습니다.
다만 할머니의 머리에 백발이 늘어나고 그 고운 어머니의 눈가에도 실주름이 잡혀지는 것을 볼 때에는 가끔씩 너무나도 기구했던 모자의 운명을 되새기곤 했습니다.
1967년 사월에 나는 당당히 S대학의 정문을 드나들었습니다. 정치과 일학년생으로 말씀입니다. 사실 내 진학에 대해서 할아버님과 백부님들과 어머니와의 논란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할아버님은 사랑스러운 손자, 더구나 창립 이래 언제나 최고점만을 유지하고 있는 나를 끝내 자기네 학교에 두고 싶으셨지만 어머니가 타교에 진학을 극히 주장하고 백부님들이 여기 동조하셔서 서울에서도 일류라는 K고교에도 시험을 치른 결과 수석은 못 되었어도 다섯째 안에 드는 좋은 성적으로 K고교의 학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내 학비의 조달을 위하여 학교에 가까운 동네에 구멍가게를 내고 밤낮으로 노동을 하셨습니다. 전날의 수입은 할머님의 생활비로 충당해드리고 두 목숨과 자식의 학비를 이어가느라고 하루 종일 허리를 펴고 앉아볼 사이가 없었습니다.
조석밥을 지으실라, 매상고는 적으면서도 허다한 종류의 물품을 하나 둘씩 사러오는 많은 손님들에게 물건을 팔으실라, 새로운 물자를 구입하실라, 빨래하실라, 머리엔 언제나 먼지가 끼고 손은 엉망으로 거칠어져서 옛날의 모습은 언뜻 찾을 수 없이 되어갔습니다. 밤이면 그것도 장사라고 주판을 들고 계산을 하시는데, 내 공부방만은 밝고넓은 데다 정해주시고 자기는 점방에 달린 쬐그만 방에서 행여나 내 공부에 방해나 되지 않을까 신경을 쓰면서 가만가만히 주판알을 굴리시는 것에 밤마다 내 가슴은 미어지는 듯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사흘에 한 번씩 불효막심한 자기를 용서해주시라는 상서를 할머님께 올리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머니의 노력과 정성이 헛될 이치가 있겠습니까? 고된 나날이면서도 크나큰 보람으로 잔잔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충격이 있었더랬습니다. 물론 외가댁과의 충돌이지요. 우리가 살아오는 동안에 그 댁에는 수차에 걸쳐 경사가 많았습니다. 즉 외삼촌들이 관계에서나 군문에서 빛나는 승진을 거듭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하필이면 대학의 합격자 발표라는 자리에서 만날 게 뭐겠습니까? 가끔씩 우리에게 꾸준한 욕설을 계속한다는 소문만 듣고 대면한 일은 도무지 없었는데 말씀입니다.
그 자리에는 수많은 학부형 모자매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는데 그 복판에 우리 모자와 윤식 백부님도 섞여 있었어요. 관중의 가슴을 지지리도 태우던 방이 나붙자 여기저기서 환성과 비명이 교차로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내 수험 번호가 먹물로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장하다! 우리 현구!”
윤식 씨는 내 팔을 번쩍 들어올리시며 큰소리로 외치시고 어머니는 한 팔로 내 등을 감싸며 감격적인 흐느낌을 하셨습니다. 바로 이때입니다.
“흥 장하면 뭘해? 귀신의 자식이…….”
하는 비웃음이 등 뒤에서 나지막하나 날카롭게 들려오지 않겠습니까? 우리 셋은 똑같이 휙 머리를 돌렸습니다. 광현 씨의 둘째 아들, 나하고 국민학교 때 늘 싸움하던 그 애는 죽을상이 되어 머리칼만 쥐어뜯고 있는데 그의 어머니란 여인이 독살스러운 눈초리로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그 말 지금 누가 했소?”
윤식 씨가 여인의 앞으로 바싹 대들며 따졌습니다. 여인은 태연했솝니다.
“내가 했소.”
“그 말 다시 한 번 해봐요! 냉큼 다시 한 번 해봐요!”
“당신 무슨 자유가 있어서 내게 호령하는 거요?”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얼마나 반석같이 단단하게 믿는 구석이 있고 얼마나 호화로운 배경이 있으면 인간이 저렇게 당돌하게 되는 것일까요?
“자유?”
“그래요. 무슨 권력이 있어서 덤비느냔 말요.”
“권력?”
이 때에 어머니가 나섰습니다.
“너무 그렇게 잘난 체하지 말아요. 아무리 귀신의 자식이라도 당신네의 그 자유 권력 조금도 부럽지 않으니 그 자유 그 권력 그늘에서 당신네나 영원히 잘 살아요, 가세요. 아주버님! 상대가 돼야 말하지요. 가자 현구야! 어서 가서 수속이나 해야지.”
우리는 서로 손을 잡고 새파랗게 질려서 저게 저게 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 여인을 무시하고 군중의 틈으로 섞여들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어머니의 얼굴에는 가다가 혹 침울해하는 빛이 어리곤 했습니다마는 내가 육군의 졸병으로 입대하게 될 때까지의 생활에서는 그 나름대로의 행복감을 느끼시는 듯하였습니다.
드디어 1973년 오월입니다. 할머님과 어머니를 여러 번 울려드리던 군복무도 완전히 끝나고 다시 배움의 보금자리로 되돌아온 것입니다. 군 복무기간 중에서도 모범 군인으로 웃어른들과 동료들의 사랑을 많이 받아 비교적 맘 편한 날마다를 보낸 셈입니다마는 함께 군에 입대하여 복무과정에서 간간이 맞닥뜨리게 되는 외가댁의 아이들 때문에 늘 울화가 터졌더랬습니다.
이를테면 외사촌 형제끼리가 아닙니까마는 미천한 출신이요 출생이라고 마구 터놓고 내 주위의 동료들에게 상세한 내용까지를 퍼뜨려 나를 괴롭히는 것을 낙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는 중에 차차로 내 가슴에는 어떤 결심이 굳어가고 있었습니다.
돌아와보니 어머니는 구멍가게를 청산하고 서울에 집을 사서 하숙을 경영하며 아직도 정정하신 할머님을 모시고 계셨는데, 나의 통학을 배려하여서 집도 도보로 삼분쯤 걸리는 D동에 마련하셨더군요.
그런데 가장 슬픈 일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겁니다. 교장직을 물러나 이사장직에 계시면서부터는 스스로 노쇠하다는 것에 신경을 쓰셔서 기운을 저상하셨는데, 그 증상이 그대로 계속되어 패기를 잃으시고 따라서 건강마저 후퇴하였던 것입니다. 후에 다시 육십사 세까지의 연한의 되어 복직하시기를 주위에서는 권하셨지만 한 번 물러선 자리라고 굳이 사퇴하시고 학교행정의 뒷받침에 꾸준히 전력하셨으나 끝내 별세하셔서 목포 사범대학에 계시던 형식 백부님이 할아버님의 유지를 받들어 삼대 교장이 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깝게도 형식 백부님마저 육십오 세의 정년으로 금년에 은퇴하시게 되어 윤식 씨가 사대 교장이 되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 한창 정열적으로 일하시다가 중등을 잘려 봇물이 막히듯 갑자기 쇠퇴해지신 전례로, 형식 백부님 역시 대단히 서글퍼하는 모양이시라 그분도 스스로 의기를 상실하셔서 상서롭지 못한 결과가 될까 우리 후손들은 퍽이나 심각한 염려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이에 구애하지 말고 그들의 인격이나 실력에 맡겨 언제까지나 자유로 활동하시게 하는 제도가 다시 나타났으면 하고 은근히 바라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신록이 아름다워 우리 집에서 내려다보이는 학교의 정원이 연연한 연두빛 장막을 두른 듯 싱싱한 단 공기를 발산하는 듯 상쾌하게 개인 어느 일요일에 하숙생들이 다 외출하기를 기다려서 나는 어머니께 여쭐 말씀이 있다고 나와 마주 앉으시도록 하였습니다.
“어머니 전 이민 가기로 작정했습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나의 결심을 토로했습니다.
돌연한, 그리고 총알처럼 무게가 있는 내 발언에 어머니는 아연히 나를 바라보다가,
“그게 무슨 말이지?”
하며 애써 침착하려고 하셨습니다.
“전 이민을 가기로…….”
미처 끝나기도 전에 어머니가 내 말을 끊으셨습니다.
“뭐라구? 누구와 의논한 거냐?”
“저 혼자의 결심입니다. 제가 아무리 여기서 버티어보았대야 귀신의 자식이라는 명칭이 끝내 따라다닐 테니까요. 차라리 깨끗하게 여기를 떠나서 자유롭고 활발하게 살고 싶어요.”
“어미와 나라를 버리고 너 혼자의 생존을 위하여 이민 가겠단 말이지?”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언제 어머니께서 아버지에 대한 무슨 말씀을 내게 들려주셨단 말입니까? 돌아가셨는지 아닌지 항간의 소문만으로 결정지을 수도 없지 않아요? 어머니께서 나를 어떻게 낳으셨는지 즉 몇 달만에 낳게 되셨는지 상상으로도 주위의 알림만으로도 극히 모호하고 석연찮기만 하거든요. 그런데도 귀신의 아들이라는 딱지는 끝내 떨어지지 않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말썽 많은 이 자식만 훌쩍 떠나버리면 영구한 망각이 있을 뿐 아니겠습니까?”
어머니는 흥분을 이기시려는 듯이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가 이윽하여 다시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습니다.
“인간이 생존하는 가치도 조국이 있으므로이요. 외국에서나 국내에서 열심히 배워 학위를 따고 성공하려는 것도 나라에 봉사함으로써 보람과 영광이 있는 것이지 외국에 이민으로 나가서 제 일신의 호구에만 일생을 바친다면 그건 국민으로서의 긍지를 잃는 것이 아니냐? 난 차라리 내 나라에서 거지가 될지언정 딴 나라에 가서 부자 되기를 원치 않는 주의다. 어미의 뜻이 이런데 자식 인 네가 어떻게?…….”
“그럼 나는 어쩌란 말입니까?”
이번에는 내가 어머니께 아프게 반문했습니다.
“귀신의 자식으로 살아가란 말인가요?”
“네가 왜 귀신의 자식이란 말이냐? 엄연히 훌륭한 아버지가 계신데…….”
“어머니! 툭 털어놓고 말씀해주십시오. 내가 알고 싶어하는 모든 사실을요. 네? 어머니!”
“그래.”
어머니는 한마디를 침통하게 토하셨습니다. 정말 토하시는 듯한 어조였습니다.
“인제야 내가 말해줄 시기가 닥쳐온 것 같다.”
“어머니! 오늘에야말로 모든 것을 말씀해주십시오. 어머니의 말씀에 따라 제 인생의 행로를 결정하겠습니다.”
중요한 대화를 앞에 둔 이 집의 뜰에는 오월의 미풍이 한가롭게 넘나들고 있었습니다.
(1973년)
2016년 12월 15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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